미완성의 영역
* if. 아케미 생존
헤어진 연인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나라별, 문화적인 차이가 있을까? 성별은? 이 복잡하고 심오한 주제에 대해 정확한 통계를 낼 수 있을 리 없지만, 조디는 훌륭한 표본이 될 수 있었다.
옛 남자 친구의 결혼식은 애석하게도 날이 맑았다. 하늘은 더없이 높고 한없이 푸르른 색이었다. 평소라면 빼곡한 글씨와 어지러운 모니터만 보다 하늘을 바라보면 마음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을 텐데. 세상이 지독하리만큼 맑다고 생각한 조디는 자신이 오늘 비가 오길 바랐던가, 잠시 고민했다. 비가 내리고 천둥이 쳐도, 어딘가 투덜거림은 있을지 언정 사람들은 기념적인 날을 변함없이 축하할 것이고, 부부가 되는 이들도 기쁘게 받아들일 터였다. 그렇다고 이 순간, 세상 누구보다 행복할 신랑과 신부에게 악감정을 품고 있지 않다. 진심으로 악천후를 바라지 않았기에 옛 남자 친구의 결혼식에서 감정이 북받쳐 눈물을 흘리거나 자리를 박차고 나가 주변이에게 신랑과 관계를 암시할 계획도 없었다.
아름다운 첼로 선율을 시작으로 웅성거림이 서서히 잦아든다. 선곡이 바뀌자 사회자가 마이크를 들었다. 곧 예식을 시작하겠습니다. 하객 여러분은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잔잔한 음악이 축복으로 바뀐다. 사회자가 들뜬 음성으로 주인공을 호명했다. 조디는 사람들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수갈채 사이 멀리 장신의 남자가 보였다. 그림자처럼 사는 남자는 검은 가죽자켓 대신 하얀 예복을 입고 등장했다. 모자를 벗은 머리카락은 단정하게 손질했고 부드럽고 하얀 천은 어색함 없이 그를 한 몸처럼 감쌌다. 아카이 슈이치가 하얀 옷을 입는 날이 오다니. 조디는 낯섦을 느꼈다. 손뼉에 아무런 감각이 없다.
식장 입구부터 단상까지 생화로 가득 찬 예식장은 거대한 봄이었다. 세상이 그의 결혼식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행진을 시작하자 버진로드를 따라 세워진 장치에서 꽃잎을 쉼 없이 토해냈다. 꽃잎은 힘차게 하늘로 솟아 정점을 찍고 하늘하늘 떨어졌다. 조디는 고개를 위로 향했다. 아, 예쁘네. 유독 하얗게 빛나는 잎이 그녀의 시선을 빼앗았다. 그 꽃잎은 유독 천천히 내렸다. 그리고 그녀의 앞머리에 앉아 그을림처럼 시야를 방해했다. 떨쳐내기 위해 박수를 멈추고 손을 들었지만, 모처럼만에 만진 헤어가 망가질 것 같아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느린 속도로 바닥에 가라앉는 잎을 바라봤다. 환호성은 더욱 커졌다.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아주 낯선 복장을 한 그가 모르는 사람처럼 자신을 지나고 있었다.
이어 신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면사포 사이로 아카이와 꼭 닮은 검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트레이드 마크처럼 찰랑거리는 긴 머리를 한데 모아 유연한 목라인을 부각했다. 드레스는 몸매를 크게 부각하거나 화려하지 않지만, 어깨를 시원하게 드러내서 조디는 아케미 성격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시선이 집중되자 아케미는 부끄러운 듯, 곁에 있는 미야노 시호에게 몸을 기울여 무어라 말을 했지만 조디에게 들릴 리 없었다. 다만 동생이 여전히 탐탁지 않은 얼굴에 조디는 조금 웃었다.
아케미가 찬란하게 움직인다. 수줍어하던 얼굴이 이내 미래로 향했다. 한 발짝, 조심스레 내딛는다. 시호는 언니를 따라가지 않았다. 웃을 줄 모르는 얼굴을 보고 조디는 피로연에 독한 술이라도 한 잔 갖다 줄 생각을 했다. 한 쌍을 위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은 하객으로 가득찬 결혼식은 환희로 충만했다. 낯선 사람 사이로 멀리 앳된 티를 벗은 꼬마탐정과 옛 제자들, 동료들을 숨은 그림 찾기처럼 하나둘 찾았다. 꽃잎 사이로 말간 눈망울이 스쳤다. 곧고 흔들림 없는 시선을 따라가자 아케미만 기다리는 한 사람이 보였다. 아카이 슈이치가 긴장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혹시 긴장한 티를 낸다면 조디는 한 번 놀려줄 요량이었다.
슈가 저렇게 웃었나?
타인을 보고 형용할 수 없이 따스하고 사랑을 담은 눈빛이, 정신없이 떨어지는 꽃잎 사이로 보였다. 태양을 오래 바라본 것처럼 시야가 아찔했다. 조디는 눈을 잠시 감았다. 이윽고 서로의 손을 잡은 한 쌍이 더없이 환하게 웃었다. 환희가 더욱 커진다. 필사적으로 박수를 쳤더니 손끝이 저리도록 따끔했다. 감각은 피로연까지 이어졌다. 정신을 차리니 조디는 덩그러니 놓여 자신의 손바닥을 보고 있었다.
“속 쓰려요?”
술 마시면 안 될 것 같은데요. 그러면서 시호는 와인잔을 내밀었다. 조디는 위염기가 좀 있었는데 괜찮아, 하고 장난스럽게 윙크했다. 오늘은 좋은 날이니까 마셔도 문제없어, 어른스럽지 못한 대답을 덧붙였다.
“식장에 상비약 있으니까 말씀하세요.”
“걱정해 줘서 고마워.”
“걱정은 무슨. 저도 속 쓰리거든요.”
“하하. 넌 아직도 슈가, 음, 슈이치가 마음에 안 드는 거니?”
“아카이 슈이치는 좋아지려야 좋아질 수 없는 남자잖아요.”
조디는 시호가 모르는 아카이의 좋은 면을 얘기하려다 이내 불필요한 일임을 깨닫는다. 그렇지,하고 조금 동의했다. 아케미의 어깨를 감싸고 속삭이는 남자의 미소는 너무나 행복해 보여 조디는 자신이 옛 여자친구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시호라면 자신을 위로는커녕 아카이를 더 꼴사납게 볼 것 같아 그만뒀다. 조디는 어떤 일이 있어도 과거를 밝히지 않을 걸 안다. 아카이 슈이치가 이별을 고한 지 십 년이다. 이제 옛 여자친구라는 이름이 민망할 정도로 너무 낡은 기억이기에. 아카이 슈이치는 스물셋의 조디 스털링을 사랑하며 웃었던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억한다 해도 시간과 감정이 뒤엉켜 비쩍 마른 꽃잎처럼 바스러져 있을 테니.
“넌 잘 지내지?”
“보다시피요.”
대답이 긍정인지 부정인지 어려웠지만, 조디는 그럭저럭 지내고 있다고 받아들이기로 하고 씁쓸하고 달콤한 액체로 위를 마비시켰다. 잔을 내려놓자 밖으로 나오지 못한 한 방울이 미련처럼 고였다. 액체에 스며드는 찰나 시호가 조디를 깨웠다. 더 마실 거죠? 하고 조디의 해묵은 감정은 상관없다는 듯 물었다. 제임스가 적당히 마시라고 했는데. 조디는 슬쩍 주변을 살폈다. 제임스는 누군가와 대화 중이었다. 그 여자가 어딘가 아카이를 닮았다 생각하며 조디는 부탁할게, 하고 부드럽게 웃었다. 제임스는 조디를 종종 그 시절 어린아이처럼 여겼다. 자신의 범위 안에서 낯선 이가 조디에게 가벼이 호감을 표시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시호랑 함께라면 자신도, 제임스도 괜찮을 거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그렇게 조디가 완벽하게 정신을 차린 것은 한참 뒤로 호텔 화장실이었다.
한참 변기를 잡고 있던 조디는 말간 액체를 확인하고 물을 내렸다. 고여있던 물이 시원하게 회오리치다 사라졌다. 아이고 머리야. 손바닥으로 머리통을 거칠게 쳤다. 피가 얼굴로 쏠리며 두통이 심하게 일어났다. 한참을 게워냈더니 턱과 위가 얼얼했다.
“그러니까 적당히 마셨어야지.”
스스로를 질책하며 엉망인 몸을 씻기로 한다. 아직 어지러워 몇 번이나 미끄러질 뻔했지만, 생각에 잠식되지 않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차라리 머리라도 부딪히고 기절했으면 좋았으련만. 그러면서 의식을 잃지 않게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는 것을 포기했다. 체온보다 낮은 온도로 지난 하루를 씻어냈다. 정신이 심연만큼 차가워지고 심박수가 낮아졌을 때, 조디는 겨우 숨을 뱉었다. 물기가 목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남은 기운을 짜내 샤워를 마쳤더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힘없이 침대에 걸터앉자 기능을 상실한 콘돔이 쓰레기통에 걸쳐있는 것을 발견했다. 슬리퍼 끝으로 툭 건드려 지난밤의 흔적을 치웠지만, 발치에 드레스와 속옷이 널브러져 있었다. 다른 옷가지가 보이지 않는 걸로 홀로 낯선 곳에 남겨진 것을 실감했다.
멍하니 시간을 감내하던 그녀가 최선을 다해 손을 뻗었다. 옷가지 대신 핸드폰을 집었다. 기억이 끊겨 있는 동안 남은 흔적을 하나씩 확인한다. 제임스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 조디가 돌아오지 않자 걱정했을 텐데. 너도 성인이고 앞가림을 잘하니 걱정은 하지 않는다만…. 그러며 제임스는 조디에 대한 걱정을 완벽하게 감추지 않았다. 피로연에서 만난 남자 따라왔는데,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어요. 살아있는 걸 보니 살인마는 아닌가 봐요. 조식 전에는 갈게요. 걱정하는 사람에게 그런 무책임하고 사춘기적인 말을 할 수 없었다. 답장을 고민하다 침대에 몸을 맡겼다. 이 시간이면 제임스도 잠들었을 테니, 그런 변명을 하며. 엉망인 침구가 물기로 젖어간다. 천장은 체크인했던 호텔과 다른 무늬였다. 조디는 제임스의 옆방에 묵고 있어야 했지만, 지금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어쩌면 더 멀지도 모르고. 알코올 사이로 드문드문 웃음소리와 살결을 만지는 체온만 희미하게 떠올랐다. 이름이 뭐였더라… 눈가에 통증이 찌르르 울렸다. 남자가 먼저 말을 걸었는지, 검은 고수머리를 보고 조디가 말을 걸었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키스를 하며 버릇처럼 목덜미부터 손으로 훑었다. 이내 손가락 사이에 들어찬 머리카락은 보기보다 더 가늘고 곱슬거렸다. 체온도, 말투도, 생김새도 어느 하나 조디가 찾는 이와 닮지 않았다.
조디는 어제와 다른 날짜를 마주했다. 위는 다시 쓰려오고 밤은 지독하게 길었다. 아주 긴 날이었다. 영영 끝나질 않을 것 같이. 조디의 시간은 남들보다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아케미와 결혼해. 아카이는 여전히 건조한 말투로 다시 이별을 고했다. 청첩장을 받았을 때, 현실을 마주한 조디는 어떤 표정을 지을지 난감했다. 그래서 그녀는 청첩장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슈, 그때 내가 축하한다고 말했어?
질문은 영영 아카이에게 닿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직 아카이를 사랑하고 있는 건가. 십여 년간, 스스로에게 수없이 질문했다. 조디는 언제나 남겨진 이였다. 선택하지 못한 이별은 버거웠고 상실을 메꾸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은 제자리 맴돌았다. 해결하지 못한 의문이 조디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몸에서 꽃향기가 지독하게 났다. 마치 꽃집을 한가득 끌어안은 기분에 질식한다. 그럴 때마다 화려한 꽃잎 사이에 걸린 남자의 미소가 명치에서 내려가지 않았다. 목구멍까지 토기가 차올랐다. 조디는 온몸을 이끌어 황급히 화장실로 달려갔다. 고개를 처박으며 변기를 붙잡았다. 그 손은 조디에 짓눌려 터질 듯 했다.
토하고 싶지 않아.
목울대를 올라오는 토기를 억눌렀다. 입술을 깨물어 차오른 맺힘을 삼키며 손에서 힘을 뺐다. 그대로 주저앉았다. 바닥은 얼얼하도록 차가웠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무력하게 숨을 뱉었다. 식도가 따끔거렸다. 목구멍으로 채 뱉지 못한 이별은 조디의 내장을 베베 꼬아놨다. 속에 뒤엉켜 영영 배출하지 않을 것처럼. 조디가 벗어나지 못한 기억은 심장을 쥐어짜며 펌프질을 방해했다. 조디는 오래도록 아팠음에도 끝까지 박수를 치며 사람 좋은 얼굴로 웃어 보이며 고통을 감내했다. 떨림이 멎을 무렵, 고개를 들었다. 활짝 열린 문 너머로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세상을 아스라이 물들이고 있다.
당신은 사랑하는 이를 보며 눈감고, 나는 사랑에 허덕이며 아침을 맞이한다. 애초에 우리는 다른 엔딩을 갖고 있었다.
조디는 오래도록 여명을 바라보며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을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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