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조디

payback

if. 조디 기억상실

그 남자다.

조디는 남자를 볼 때면 마음이 울렁였다. 이마에 흐트러진 새까만 머리카락, 살짝 벌린 입에서 흐르는 담배 연기, 굵은 뼈마디 사이로 아슬하게 잡혀있는 담배. 처음 남자를 본 순간, 당연한 일처럼 시선이 갔다. 시선을 달리해도 초점은 남자에게 맞춰졌다. 아는 사람인 것 같은 기시감이 들었지만, 정체는 물론 뚜렷한 알파벳 하나 떠오르지 않았다. 기이한 감각이다.

카페에서 남자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며칠에 한 번 꼴로 오는 남자는 항상 테라스, 비슷한 자리를 고집했다. 그가 앉는 자리는 시선이 가는 길목이나 중앙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늘진 자리도 아니었다. 신경쓰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는 자리. 사람을 피하려 안쪽에 앉으면 오히려 시선을 받기 마련이다. 남자는 사람들 속에서 몸을 숨기는데 능해보였다.

오늘도 검은 모자, 검정 자켓을 입은 남자는 유난히 짙은 머리카락을 한데 모아 목덜미를 드러내고 있었다. 남자는 머리카락이 자라는 동안 자신이 몇 달 째 지켜보고 있는 사실을 알까? 그녀는 사각지대에 서둘러 눈도장을 찍고 카페로 들어갔다.

꿈에서 남자와 몸을 섞었다. 처음엔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하지 못했다. 몽롱한 기운이 구석구석을 지배했다. 손 끝 하나 움직일 수 없는 탈력을 단순 월요병이라고 치부했다. 조디는 이불을 뒤집어 쓰며 저번달부터 마음먹은 운동 알람을 껐다. 이제 30분 더 자도 괜찮아. 마음과 다르게 온 몸에 감각이 하나, 둘, 살아 돌아왔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잠투정을 해보았지만, 결국 다리를 베베 꼬고 싶을만큼 묵직한 요의가 밀려왔다. 결국 침대에서 일어난 그녀는 이내 나이를 되짚을만큼 당혹을 감추지 못했다. 팬티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애도 아니고. 

아침에 뱉었던 한숨이 다시 나왔다. 

조디는 남자에게 이유 모를 호감을 갖고 있다. 쿨하게 인정하기로 한다. 그리고 꿈 속에서 남자에게 욕정을 품을 만큼의 감정인지 재어본다. 그러고보니 섹스를 마지막으로 한 게 언제 였더라? 상대가 누군지 까마득했다. 그녀는 얄팍한 기억을 되짚어 봤다. 지난 3년을 합친 것보다 꿈 속에서 한 섹스가 가장 몸이 달아올랐다. 조디, 조디. 목소리도 들어본 적 없는 남자는 자신의 귓볼을 깨물고 이름을 애타게 불렀다. 허벅지를 더듬고 안으로 들어오는 손은 크고 거칠었다. 단단한 굳은 살이 살갗을 스치면 그녀의 입에선 신음이 터졌다. 아쉬울정도로 하나하나 기억나진 않았지만, 당분간 남자 얼굴을 떠오르기만 해도 발가락을 꼼지락 거릴 수 있을만큼의 흥분이 남아있었다. 굵은 성기가 들어와 치댈때면 머리까지 퍼지는 쾌락이 아직 정수리에 달라붙은 기분이었다.

욕구불만인가?

조디가 상담사 번호를 지웠는지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을 때 "스털링 씨!"하고 신경질적인 소리가 매장을 울렸다. 조디는 당황하며 서둘러 픽업대로 갔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네 번이나 불렀다고요. 카페 사장은 표정이 다양한 편이 아니었다. 늘 한결같은 얼굴로 커피를 내렸다. 잘 웃지 않고 퉁명스러운 말투 탓에 인터넷 평점에서 종종 불친절하단 얘기를 들었다. 

"미안해요. 잠이 덜 깨서요."

눈썹을 찡그리고 미안한 내색을 드러냈다. 뚱한 얼굴에 대고 차마 밖에 있는 남자랑 섹스했던 꿈 생각이요, 라고 말할 수 없어 속으로 선의의 거짓말이었다고 변명했다.

"또 밤새 게임했어요?"

"으응, 아니. 월요일이라 그런가봐요."

증명하듯 조디는 목을 가볍게 주무르며 어색하게 웃었다. 

"뭐, 거지같은 월요일이지."

사장은 카운터에 진열한 쿠키 하나를 집어 조디에게 건네고 커피머신으로 돌아갔다. 조디는 마카다미아와 화이트 초코가 촘촘히 박힌 쿠키를 보고 목소리를 높여 감사인사를 전했다. 단골의 기분을 챙기는 그의 마음 씀씀이가 가슴을 쿡 찔렀지만, 속으로 믿지 않는 신을 찾으며 '솔직하게 말하면 하느님도 이상하게 볼거잖아요.' 고해성사를 했다.

평소보다 남자를 의식해서인지 걸음에 속도를 냈다. 카페를 나와 몇 블록을 지날때까지 고개를 들지 못하고 휴대폰만 바라봤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남자는 조디 인생에 한 번도 개입한 적 없는 것처럼 시선조차 주지 않을 걸, 조디는 알고 있었다.

조디가 인생을 통채로 잃은지 3년이었다. 말하자면 총에 맞아 그대로 차에 치였다. 너덜한 뱃가죽과 수술자국을 볼 때면 살아남는게 기적이었다. 사고후유증은 신체적인 면보다 정신적인 면이 컸다. 사경을 헤매고 일어났더니 기억상실이라는 흔한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그녀는(실제로 자신이 FBI임을 알았을 때, '제가 FBI라고요? 영화나 드라마 보면 헬기에서 줄타고 내려와서 남의 집 문을 박살내고 총 들이밀면서 어쩌고 하는 그런거?'하고 되물었지만 사격 훈련장에서 과녁 중앙에 맞춘걸 보고 스스로 납득했다. 적어도 이름이 수상한 조직에 몸 담고 있거나 범죄자가 아니라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좀처럼 삶에 정착하지 못했다. 자신이 살았다던 집은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적막감만이 감돌았고 직장에서는 '부상' 명목으로 임무에서 제외됐다. 생활을 하는데 지장은 없었지만, 삶을 겉도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서 제임스가 휴직을 할 것인지, 복귀할 것인지 인내를 갖고 기다려주는 동안 조디는 먼 곳에 정착할 계획을 세웠다. 

훌쩍 사라진 기억만큼 미련없이 사직서를 냈다.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그녀에게 '동료'들은 조디가 FBI가 되기 위해 노력한 시간과 FBI가 되고 쌓은 공로를 안타까운 목소리로 읊고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조디 스털링은 무슨 문제가 있었을까?

뇌는 세상 무엇보다 복잡한 매체였다. 언어, 생활, 역사, 지식은 늦어도 몇 초 안에 대답이 나왔다. 조디 안에 사실은 존재하지만 추억은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왜 알고 있는지, 왜 일을 하고 있는지. 무엇 하나 스스로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하루를 의무적으로 끝내면 기계가 된 이질감이 들었다. 그래서 나이만큼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끌어안고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했다. 새 직업을 얻고, 삶에 안정감을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런 삶은 되려 조디를 흥분시켰다. 그녀는 끊임없이 비어있는 기억을 채우기 보다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로 했다. 머리를 쥐어뜯고 싶지도 않았고 기구한 운명을 불쌍하다 여기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기억은 텅 비었어도 두 눈으로 보는 세상은 그리 절망적이지 않았다. 
그런 조디 앞에 남자가 나타났다. 제 기억처럼 짙은 머리색을 갖고 있는 사람은 처음으로 과거를 되짚게 했다. 몽롱한 과거를 마주야하는 불안감은 나이트메어 같았지만, 몇 번 마주한 남자는 날카로운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눈이 예쁜 사실을 알게 됐다. 전신을 어두운 색으로 무장하고 있으니 보일리가 있나. 

알고보면 같은 건물에 사는 사람일 수도 있고, 배우일지도 몰랐다. 조디는 감정을 건드리는 미디어보다 사실을 전하는 뉴스를 주로 시청했는데, 거기에 출연하는 리포터 일 수도 있었다. 뭐, 리포터 하기엔 너무 수상하게 생겼지만.

남자는 한동안 보이지 않았다. 조디가 남자를 상대로 이상한 꿈을 꾼 후라, 들킨게 아닐까 찔렸다. 그럴리가 없는데도. 노골적으로 남자를 봐서 스토커처럼 보였을지, 남자를 음흉하게 바라보고 있었는지, 유리창에 반사된 얼굴을 좌우로 꼼꼼히 살폈지만 알길이 없었다. 인사라도 건네볼걸 약간의 후회가 들었을 때, 남자는 깊어진 가을과 함께 돌아왔다. 수분기 없는 낙엽이 바싹 말라 바닥 곳곳에 쌓여있었다. 

평소처럼 태블릿을 보거나 책을 읽고 있지 않았다. 다만, 조금 신경질적인 얼굴로 통화를 하고 있었다. 인상은 더욱 험해졌지만, 쉽게 언성을 높이는 편이 아닌지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찡그린 미간과 머리를 거칠게 넘기는 손길은 조디가 꿈 속에서 본 그대로였다. 조디. 자신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던 허스키한 음성이 머리속에서 재생됐다. 그 목소리가 귓가에 녹아들어 괜히 귓볼을 만지작 거리는데, 막 담배에 불을 붙이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처음이었다. 표정에 변화가 있던건 아니지만, 그는 당황한 것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조디는 태연하게 시선을 돌리며 벌써 가을이네, 중얼거리며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펌킨라떼 할건데, 마실래요?"

"어? 네."

사장은 느리게 걷지만, 커피 기계만큼은 정확하고 빠른 손놀림을 보였다. 사무실이 밀접한 동네에 주문이 한번에 들어와도 주문에 막힘이 없었다. <커피 맛과 별개로 불친절.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음.> 리뷰와 다르게 20년 넘게 장사하고 있는 이유였다. 그가 규칙적으로 만들어내는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편해졌지만, 제 앞에 라떼가 놓일때까지 조디는 진정하지 못하고 귓볼을 만졌다.

"가봐요. 한달동안 뭐하고 지냈는지. 아까 주문하면서 어디 갔다 왔냐고 물봤는데 '아, 뭐.' 이 말만 하고 쳐다도 안 보더라고." 

"뭐, 뭘요?"

<얼굴에 심술이 덕지덕지 붙어있음> 리뷰에 걸맞는 사장이 처음으로 웃었다. 비웃음인지, 응원인지 알 수 없었지만, 퉁퉁한 손으로 밖을 가리켰다. 

"스털링 씨, 카페 오면 저 남자만 보잖아요."

"티 났어요?"

"여기서 스털링 씨 사무실에서 20분 거리잖아요. 아침, 저녁으로 꼬박 들리던 이유가 내 커피 맛이 아니라 저 뺀질이처럼 생긴 놈 때문인걸 모르는게 이상하지."

"잠깐, 정정할게요. 첫째, 여기 커피가 맛있어서 오는게 맞고 둘째, 저 남자보다 내가 먼저 여길 알았어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내가 하나 알려줄까요? 저 남자, 이 동네 사람도 아니고 근처 회사에 다니지 않아요. 처음엔 수상쩍게 오는 손님들 얼굴을 하나하나 살피더라고. 눈치챈 사람이 없는지 클레임이 걸린 적은 없어 내버려 뒀지만. 짐작하건데, 저 사람. 잠복하는 경찰 아니면 그보다 수상한 인물이거나 혹은."

사장은 멈출줄 모르고 추리를 줄줄 뱉었다. 그와 긴 대화를 해본 적이 없었기에 조디는 신기하게 사장을 바라보고, 이내 얘기에 빠져들었다. 창 밖을 보던 사장이 갑자기 입을 다물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넓은 카운터가 둘을 방해했지만, 조디는 홀린듯이 카운터에 바짝 다가갔다.

"수상하게 생긴 평범한 사람이거나. 하하하."

사장은 김샌 얼굴을 마주하고 시원하게 웃었다. 그가 건넨 컵에서 뜨거운 열기가 아른거렸다.

"그런데 이 근처 사람이 아닌건 어떻게 알았어요?"

"뭐... 홈즈팬이라면 이정도 관찰력과 추리는 기본이지."

대수롭게 어깨를 으쓱이자 조디는 수사에 몇 가지 헛점을 있다고 말하는 대신, 좋은 추리였어요. 잘 마실게요, 하고 웃었다. 문 밖에 쓸쓸한 바람이 입꼬리에 남은 웃음기를 거두어갔다. 바람이 지나가고 눈을 슬며시 뜬 시야에 남자가 걸렸다. 남자는 그 사이 통화를 끝내고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 증거로 두터운 손 안에 어떤 물체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남자는 손끝으로 무언가를 세웠다, 눕히고, 다시 세우기를 반복했는데 아주 느리지 느린 동작이었다. 샅샅이 보이는 움직임 덕분에 하얀 상자는 담뱃갑임을 알아챘다. 손끝은 가벼이 보였지만, 그러나 무의식적으로 조절하는 힘에 상자는 쓰러지지 않고 의도대로 움직였다. 남자의 시선이 처음으로 책이나 신문이 아닌 존재하지 않는 곳을 향해 있는 것을 깨닫자,

"안녕하세요."

조디는 자신이 낼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상품 권유도 아니고,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인상을 남기고 싶었다. 누가봐도 당신에게 호감을 갖고 있어요, 를 무럭무럭 뽐내고 싶었지만 날카로운 눈매는 조디의 꿈까지 파악하고 있을 것 같았다.

"펌킨라떼죠? 여기 펌킨 라떼 맛있거든요. 잘 모르시겠지만, 저도 여기 단골이에요. 그쪽 종종 봤는데. 여기 커피도 괜찮지 않아요? 잠깐 앉아도 될까요?"

충동적이라기엔 계획을 세운 대화였다. 그녀는 발걸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메트로놈을 흔들고 있었다. 느린 템포에 맞춰 차분하게, 거절 당해도 의자를 던질 것 같은 미친 여자처럼 보이지 않게. 왜인지 이제 시작인데, 남자는 곧장 장난을 멈췄다. 꿈에서 본듯한 손끝은 시선과 같이 여전히 상자 모서리에 닿아 있었다. 그러자 조디는 실연을 당해본 사람처럼 상처받을까봐 울고 싶었다. 오늘은 아껴둔 와인을 까서 진탕 마시고 아이스크림을 퍼먹을 계획을 짰다. 긴장한 탓일까? 그녀는 다급하게 앞에 있는 의자를 힘껏 잡았다. 벗어나지 않을 요량으로. 빨리 대답을 해! 재촉을 하기엔 목구멍이 낙엽만큼 버석했다. 남자는 아주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닿자 심장부터 희열이 퍼졌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갑작스런 방문에 놀라 눈동자가 커진것 같았는데, 착각같이 느껴질만큼 이내 안정을 되찾았다. 바람이 메마르게 발목을 치고 굴러갔다. 그러나 그것도 느끼지 못할 만큼 조디의 가슴은 새까만 머리카락으로 엉망진창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남자는 입을 열고 무언가 말할 듯 움직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조디는 위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해 아랫입술을 꽉 깨물물며 의자를 천천히 뒤로 끌었다. 안심이 되서일까, 남자는 며칠이 걸리더라도 자신을 기다려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조디 스털링이에요."

"아카이 슈이치. 슈이치입니다."

빠르게 과거가 되감겼다. 꿈에서 들었던 느리고 허스키한 음성. 기억이 선명하게 붉게 피어났다.

그리고 확신이 들었다.  

나는 이 남자에게 반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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