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스타!

이십일그램의 우울

이십일그램의 우울

미도리×치아키

소설 / 190428 발행

모리사와 선배는 한참동안 내려오지 않았다. 오늘은 다른 활동이 없으니 우리 집에 들르겠다고 했었는데. 남아서 할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한창 하교할 시간도 지났다. 그냥 그와의 약속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모르는 척 돌아갈까 생각했다가도 결국은 그의 교실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시간이 많이 늦었다는 것이 핑계라면 핑계였다. 나는 벽에 걸린 시계를 흘끗 바라보았다. 그 사람의 일이니 곤란한 사건에 휘말렸을 수도 있다. 그러고보면 그 철저한 사람이 연락이 없는 것도 이상한 일이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다음에는 나에게도 희미한 불안감이 찾아왔다. 나는 평소라면 절대로 가지 않을 3학년 교실로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선배는 3학년 A반의 교실에 있었다. 있었지만, 무슨 일인지 멀쩡한 상태로는 보이지 않았다. 교탁 아래에 숨어있지만 뻔히 보이는 등이 완연히 움츠려있다. 무언가로부터 숨어있는 것이 분명한 모습에 나는 짓궂은 생각이 들어 짐짓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다가갔다. 선배의 어깨가 약하게 떨리고 있다. 그 어깨를 붙잡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 긴장감은 어떻게 봐도 공포로부터 오는 것이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공포를 장난으로 건드릴 생각을 할 만큼 못된 성정은 또 아니었기에 나는 생각을 고치고 목소리를 내었다.

“뭘 하고 있어요?”

“우, 우오오옷!”

내 배려가 무색하게도 선배는 아주 성대하게 놀랐다. 그의 몸은 더욱 움츠러든다. 그의 시선은 땅바닥에 고정되어있을 뿐, 내게 보이는 흐트러진 뒷머리에는 돌아볼 생각조차 없어보인다. 나는 선배를 다시 한 번 불렀다.

“모리사와 선배?”

그 순간 선배의 떨림이 멎었다. 커다래진 눈으로 내 얼굴을 확인한 모리사와 선배가 어리둥절하게 목소리를 내었다.

“어, 어라? 타카미네……? 타카미네인가?”

모리사와 선배의 얼굴에 스치는 것은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탓으로 보이는 의문과 이유조차 알 수 없는 묘한 안도감이다. 나를 확인하는 목소리에 어째 위화감이 들어 되물었다.

“뭐예요?”

“아, 아니, 그게…….”

선배는 머뭇거리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 망설임 끝에 이어지는 건, 머뭇거리는 게 당연한 말이었다.

“유령이라고 생각했다…….”

“……진심이에요?”

내가 인상을 쓰며 되물었다. 원체 유령을 무서워하는 사람이긴 했다. 나도 공포영화에는 약하고, 유령의 존재를 믿지는 않지만 그래도 무서운 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이유가 없다. 할로윈도 아니고 유령 장식조차 없는 상황에서 이렇게 겁에 질린 것은 이상하다. 나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며 물었다.

“무서운 영화라도 본 거예요?”

“내가 영화따위에 굴복할 인간으로 보이는 거냐!”

“예…….”

“크으으~”

나의 즉답에 분한 듯이 신음한 모리사와 선배가 냅다 소리쳤다.

“나는 유령을 볼 수 있다!”

모리사와 선배는 그 말로 내가 모리사와 선배의 불안을 이해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저 멍하니 선배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앗, 죄송해요. 방금 그거 농담한거죠?”

“아니다! 믿어다오! 너희의 대장을……!”

모리사와 선배의 과장된 리액션에 맞춰 줄 기분은 들지 않아 나는 덤덤하게 쏘아붙였다.

“요즘 새로 나오는 특촬 설정이에여? 다음 히어로쇼 설정? 메소드 연기에 도전하고 있는 건가요?”

“그런, 그런 게 아니다!”

묘하게 안절부절 못하는 태도에 저도 모르게 마음이 눌렸다. 나는 그 이상 모리사와 선배를 몰아붙이지 않기로 했다. 한숨을 내쉰 나는 몸을 일으켰다. 모리사와 선배는 여전히 교탁 밑에 주저앉은 채로 나를 따라 고개를 들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전부 믿어줄 만큼 순진하지는 않다. 하지만 겁에 질려 굳었던 얼굴이 나를 마주하는 순간 풀어졌던 것만은 분명히 확인했다. 나는 몸을 돌렸다. 등 뒤로부터 어리둥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어라?”

 나는 그 목소리에 굳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교실 밖으로 느리게 걸음을 옮기며 퉁을 주었을 뿐이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적당히 놀려요.”

그러면 이내 분주한 소음이 따라붙었다. 모리사와 선배였다. 선배는 재빠르게 나를 앞서 가로막았다. 내가 조금만 서둘렀어도 부딪칠 만큼 가까운 거리에 선배가 있었다. 급하게 뛰어와 자세를 낮춘 탓에 나를 올려보는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약간의 위화감을 느꼈지만 이유는 좀처럼 알 수가 없다. 내가 멀뚱하니 선배를 내려다보면, 선배가 우렁차게 나를 불렀다.

“타카미네!”

“네?”

“그, 그게…….”

부르기까지는 큰 문제가 없었는데, 막상 말하려니 또 어려운 모양이다. 하지만 그 얼굴에는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선배는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그게 조금 의외였다. 항상 저의 공포를 감추고 모르는 체 하려던 사람이었다.

할로윈 행사를 준비하던 모리사와 치아키의 모습을 떠올린다. 제 불안을 감추기 위해 헛소리를 하며 얼버무리던 남자였다. 물론 전혀 의미없는 행동이기는 했지만. 어떤 일에 실패하거나 무언가를 무서워하는, 이른바 부끄러운 모습은 누구에게도 보여주려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다른 누군가, 그것도 제가 돌보고 있는 후배를 향해 이렇게 저의 불안을 드러내려 하다니.

방금 전에야 나를 유령으로 착각하는 바람에 기겁했다손 치더라도 지금에 와서는 그것도 아니다. 선배는 지금, 분명히 내게 기대려고 하고 있다. 이상하게도 그걸 기만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가만히 그의 얼굴을 탐색하며 이어질 선배의 말을 기다렸다. 흔들리던 눈동자가 물끄러미 나를 향했다.

“같이 있어주면 안 될까? 무서우니까…….”

입을 연 선배는 겨우 그렇게 속삭였다.

“웬일로 솔직하네여.”

나는 덤덤하게 말했지만 그건 대답이 되지 않았을 테다. 선배는 가만히 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물론, 나의 대답이야 정해져있다.

“하지만 같이 있다고 해서 내가 지켜줄 수 있는 건 아니구, 오히려 나도 무섭구…….”

“괜찮다! 지켜준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 말에 내가 즉답했다.

“갈게요.”

“타, 타카미네! 기다려라!”

모리사와 선배는 당황한 듯 소리쳤다. 내가 어쩔 수 없다는 양 고개를 돌리면 모리사와 선배는 제 뺨을 긁적이고 한숨을 내쉬었다. 늘어놓는 것은 결국 변명거리 뿐이다.

“그……. 조금 이해타산적인 일이라서 말이다. 늠름하고 믿음직스러운 선배답지 못하달까.”

“그냥 말해여.”

우물쭈물 이어지려는 변명의 꼬리를 자르자 모리사와 선배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음! 거두절미하고 말하자면, 타카미네가 있으면 다가오지 못하는 것 같아서 말이다. 타카미네의 기가 녀석들을 퇴치해버린 게 아닐까 싶다.”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데요.”

“진심으로 말하는 건가?”

선배가 멀뚱하게 반문했다. 모리사와 선배의 마음도 이해가 가지만, 그렇게 묻고 싶은 건 내 쪽이다. 선배야말로 진심인 걸까. 유령이 보인다느니 기로 퇴치했다느니 믿을 수 없는 말들 뿐이다. 이쯤 되면 모두 함께 작정하고 나를 놀리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다. 내가 대답하지 않고 인상을 찌푸린 채 앞서 걸음을 옮기자, 선배가 재빠르게 따라붙었다. 비슷한 속도로 함께 걸으며 선배가 말했다.

“하하, 타카미네와 있으니 평화롭구나.”

하지만 모리사와 선배는 나의 기분 따위와는 상관 없이 느긋하게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아까 전의 불안은 눈에 띄게 사그라들었다. 묘하게 들뜬 목소리에는 이상하게도 신뢰가 생겼다. 그의 말이 아주 농담인 것도 아닌 모양이라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원래도 그…… 보였어요?”

내 물음에, 모리사와 선배는 의외의 상황을 마주한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믿어주는 게 의외일 정도라면 털어놓지를 말든가. 나는 불퉁하게 시선을 피했다. 모리사와 선배는 희미하게 웃고 내 물음에 대답했다.

“어렸을 때는 곧잘 보였는데 중학교에 들어간 뒤로는 안 보이게 되었다.”

거기까지 말한 선배가 잠시 숨을 삼키고 덧붙였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야 그렇겠죠……. 지금은 다시 보인다는 거죠?”

“으음…….”

선배는 긍정하는 대신 짧게 신음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살피며 물었다.

“그, 나로 괜찮은 거예요?”

“괜찮다! 아니, 오히려 좋다!”

모리사와 선배는 익숙한 미소로 대답하며 양 팔을 벌렸다. 나는 그의 어이없는 제스처를 무시하고 연달아 물었다.

“헛소리 하지 말고요. 역시 절에 가본다든지……. 3학년 선배 중에도 있지 않나요?”

“하스미 말인가! 하스미는 확실히 성불시켜줄 것 같구나.”

확실히. 그 말에 되려 불확실함을 느낀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애매한 말을 하네요.”

“음, 절에서 하는 구마엔 돈이 드니 말이다.”

그건 생각 외의 대답이었지만 전혀 이상한 이야기는 또 아니었다. 아무리 아르바이트를 하고 아이돌 활동을 해도 절에서 본격적으로 하는 구마를 할 만큼의 여유는 없을 테다. 하지만. 문득 나에게 도움을 구하던 선배의 얼굴을 떠올린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일단 믿음직스러울 것도 없는 후배에게 매달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그 정도로 두렵고 끔찍한 일이라면, 조금 돈이 들더라도 부모에게 손을 벌려 해결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게 지극히 이기적인 생각을 했다.

하지만 역시 모르겠다. 선배는 나와는 다르니까. 의외로 똑똑하고 계산이 되는 사람이니까, 이 사람 나름대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가지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나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그런 문제인가여.”

“그런 문제라니! 아주 심각한 문제다……!”

“그건 그렇죠.”

현실적인 문제는 별 수 없다. 내가 순순히 인정하면 선배는 무얼 떠올린 사람처럼 턱을 문지르며 고개를 들었다.

“뭐, 없애기만 한다면 사쿠마 형제가 있는데.”

“그쪽은 의외네여.”

선배가 내게 동조하듯 미소지었다.

“사쿠마는 그렇군. 타카미네와 동류인데 조금 다르다. 타카미네에게서는 그들이 도망을 치는 정도지만 사쿠마의 경우에는, 사쿠마의 기가 그들을 집어 삼킨다고 할까…….”

애매한 비유를 한다. 내 얼굴에 자연스럽게 의문이 떠오른 모양이다. 모리사와 선배는 무얼 각오하듯 숨을 들이마시고 천천히 속삭였다.

“사쿠마의 영역에 드는 순간 그들은 먼지처럼 흩어져 버린다.”

그 말에 눈을 부릅뜨고 모리사와 선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예 없는 진지한 얼굴에 다시 한 번 실감했다. 농담이 아니다.

영혼마저 사라지게 만드는 존재란 대체 어떤 것일까. 모리사와 선배는 그걸 저의 눈으로 확인해버리고 만 걸까. 그런 게 영화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어째 등골이 오싹해져, 나는 무심코 숨을 삼켰다.

“그건…… 무서운데여…….”

“그렇지?”

모리사와 선배는 씩 웃으며 그렇게 되물었다. 그리고는 변명이라도 하듯 바로 덧붙이는 것이다.

“사쿠마는 나쁜 녀석이 아니지만…… 유령에게도 나름의 이유가 있어 남은 것일 테니 말이다.”

선배는 동의를 구하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 그렇게 무서워하는 주제에 그들이 존재하는 이유까지 신경 쓸 여력이 남아있다는 게 퍽 우습다. 사쿠마 선배의 힘을 빌려, 전부 없애버리면 선배는 쉬이 편해질 수 있는 것을.

그제야 모리사와 선배가 구마를 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손을 벌리지 않고 굳이 믿음직스럽지 못한 나에게 매달리는 건지 조금 납득이 갔다.

“그래서 나로 쫓겠다는 거예여?”

“음……. 그렇지.”

선배는 눈을 굴리며 대답했다. 모리사와 치아키는 그렇게 눈치가 없는 사람은 아니다. 이 상황과 그 말이 내게 실례가 될 수 있다는 걸 모르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거다. 이 사람에겐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내 침묵이 제 탓이라는 걸 알기는 아는 모양이지. 나는 살짝 울상이 된 선배를 흘겨보았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사람이네요.”

그 말을 허락 정도로 오해해버린 걸까. 선배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 얼굴을 향해 착각하지 말라고 칼 같이 잘라내는 것도 귀찮은 일이라, 나는 그가 저 좋을대로 착각하도록 내버려두기로 했다.

보폭이 크고 걸음의 박자가 빠른 선배는 쉬이 앞서 걷곤 했다. 감출 수도 없을 만큼 겁에 질린 주제에 저를 지켜주는 내 곁에서 이리도 쉽게 벗어난다. 지키는 것도 본의가 아니기는 하지만.

앞서나가는 선배를 붙잡으려다가, 이내는 어색하게 손을 물렸다. 대신 좀 더 걸음의 속도를 높여 그의 곁을 나란히 걸었다. 서로의 걸음이 맞아떨어진 순간, 모리사와 선배가 씩 웃으며 나를 바라보기에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부렸다.

“나를 신경써주는 건가?”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그런 소리를 한다. 그야, 평소라면 그가 앞서가면 앞서가는대로 내버려두기는 했다. 나는 변명하듯이 말했다.

“아직 남아있는 거 아니에요?”

상대가 정말로 유령이라면 목소리를 낮추는 정도로는 눈을 속일 수 없겠지만, 나는 무심코 낮춘 목소리로 물었다. 선배는 잠깐 주위를 살핀 뒤, 나와 마찬가지로 속삭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음, 그렇다. 타카미네에겐 안 보이겠지만 타카미네의 영역 밖에서 눈치를 보는 것 같은 녀석이 하나…….”

선배는 불안한 얼굴로 그렇게 속삭였다. 하지만 다음 말을 덧붙이는 순간에는 또 환하게 웃는 얼굴이 되어있었다.

“그래도 타카미네 덕분에 다가오지 못하는 모양이라 말이다!”

“하아.”

선배는 공포 끝에 나와 했던 약속을 잊어버린 것일까. 우리 집에 들를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것 뿐만이 아니다. 내가 상가로 들어가려 하면 선배는 나지막이 나를 불렀다.

“타카미네.”

그건 평소의 선배에게서는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였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였지만 오히려 그랬기에 그 목소리 아래의 불안을 눈치챌 수 있었다. 나는 그 위화감을 그가 필사적인 탓으로 막연하게 치부했다. 내가 몸을 돌려 선배를 바라보면 모리사와 선배는 잠시 다음을 망설이다, 이내 머뭇거리며 물었다.

“그, 갈 건가?”

“이 쪽이 저희 집인데여.”

“……그렇군.”

내 대답에 모리사와 선배답지 않은 낙담이 그의 얼굴에 드리운다. 저렇게 표정 관리가 안 되는 사람이었던가. 아니,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표정 관리조차 안 되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 어째 견딜 수가 없게 된다. 나는 허둥대며 말을 고쳤다.

“아, 알았어요. 좀 더 같이 있으면 되잖아요.”

내가 그렇게 말하면 선배의 얼굴이 바로 환해졌다. 데굴데굴 변하는 표정에 정신이 없다. 모리사와 선배는 제 가슴팍을 두드리며 외쳤다.

“좋다! 오늘은 우리 집으로 가자! 어머님께는 내가 연락드리지!”

“……당신 우리 엄마 번호는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결국 우리는 함께 모리사와 선배의 집으로 향했다. 그런 거면 우리 집으로 가도 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여과 없이 뱉으면 모리사와 선배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도와주는 상황인데 집에 폐까지 끼칠 수는 없단다. 그 말에는 어이가 없어 한숨이 나왔다. 지금 본인이 누구에게 폐를 끼치고 있는 상황인지 완전히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모리사와 선배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특촬의 DVD를 꺼내 플레이어에 집어넣었다. 마침 보여주고 싶은 게 있었단다. 방금 전까지 유령 운운하며 겁에 질려 있던 걸 떠올리고 조금 어이가 없어졌다. 하지만 달리 할 수 있는 게 따로 있는 것도 아니라서 얌전히 보기로 한다.

선배는 이야기가 진행되는 중간중간 몇 번이나 흥분하며 소리쳤고 나는 적당히 대꾸해주었다. 평소 같은 시간이 오히려 이상하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밖으로 꺼내지 않은 것은 모리사와 치아키의 평온한 시간을 망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게 모리사와 치아키에게 있어 찰나와 같은 시간임을 알고 있다. 나는 그의 곁에 계속 있을 수 없다. 내가 집으로 돌아가면, 선배는 이 좁은 방에서 저를 괴롭히는 유령을 견뎌야 할 테다. 내가 어떻게 그를 더 도와줄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이 미친 순간, 모리사와 선배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득 그를 돌아보면, 모리사와 선배는 온화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묘하게 애틋한 얼굴에 숨을 삼켰다.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어서, 나는 그가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타카미네가 계속 함께 있어준다면 좋겠는데.”

오히려 그의 평온한 시간을 깨뜨린 것은 모리사와 선배 자신이었다. 그 답지 않게 진지한 목소리에 나는 무심코 대답을 고민하고 말았다. 내가 대답을 망설이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일까. 모리사와 선배의 표정이 장난스럽게 바뀐다.

“부적처럼 말이다!”

나는 그 말에도 잠깐의 시간을 더해 대답을 고민하다, 고개를 돌려 화면을 바라보았다. 

“정말, 사람을 뭘로 생각하는 건지.”

그렇게 일갈한 뒤에도 나는 내내 모리사와 치아키가 한 말들을 떠올렸다. 내게 도움을 요청했다. 함께 있어달라고 했다. 무엇도 쉽게 떨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내색하고 싶지 않았던 것 뿐, 모리사와 선배가 내게 기대어주는 것은 오히려 기뻤다. 내내 괜찮은 척을 하던 사람이었다. 내가 아주 믿음직하지는 못하겠지만, 분명 그럴 테지만. 그런데도 그런 나를 믿어주고 의지하려 하는 것이 싫게 느껴질 리 없다. 나는 여전히 시선을 화면에 둔 채 말을 이었다.

“지금까진 그런 거 한 번도 이야기한 적 없었잖아여.”

“그야, 한동안은 안 보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너무 비현실적인 일이라 절대로 믿어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선배의 말에는 어폐가 있다. 절대로 믿어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어째서. 나는 선배를 물끄러미 돌아보았다.

“하지만 말했네요.”

“그…….”

희미하게 목을 울리고도 그의 말은 금세 이어지지는 않았다. 도망치듯 눈을 굴리던 모리사와 치아키는 겨우 짜내듯이 속삭였다.

“무서웠으니까…….”

기어들어가듯이 중얼거린 선배는 안고 있던 쿠션에 고개를 묻었다. 부끄러웠던 것일까. 그렇게나 좋아하는 특촬에서조차 시선을 돌리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정도로. 무언가를 무서워하는 것은 그리도 부끄러운 일인가. 나는 잘 모르겠다.

혼자 남을 모리사와 선배를 생각하다보면 아무래도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먼저 꺼낼 수가 없었다. 모리사와 선배는 분명 영리한 사람이니까, 내가 어쩔 줄 몰라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채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더욱 말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겨우 오늘의 일정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저녁식사 때였다. 그것도 저녁식사 메뉴를 묻기에 딱히 집에 간다는 이야기를 꺼내지는 못했다.

모리사와 치아키는 사람을 휘두르기는 해도 적당한 선은 지키는 사람이다. 그런 모리사와 선배가 하는 행동이다. 이 사람도 필사적인 마음이겠지. 그렇다면 하루 정도야 뭐. 그 정도로 생각하게 되었을 즈음이었다. 나는 제가 사겠다는 선배를 만류하며 말했다.

“저녁은 괜찮아요. 지금 적게 먹고 있는 중이라서.”

“아…….”

내가 그렇게 거절하면 선배는 그 이상 무어라고 하지 않았다. 평소라면 성장기 청소년이니 뭐니 하며 식사의 중요성을 역설했을까. 맥없는 반응이 돌아온 이유에 아주 생각이 미치지 않는 것도 아니었지만 나는 굳이 캐묻는 일 없이 고개를 돌려 화면을 바라보았다.

“선배, 부모님은요?”

짧은 침묵을 사이에 두고 입을 연 것은 내 쪽이었다. 선배에게 억지로 붙들려 함께 DVD를 보고 있을 때면 한두 번 이상 얼굴을 비추던 선배의 어머님을 떠올렸다. 아마도 자리를 비우신 것일 테다.

“오늘은 마침 자리를 비우셨다! 여행을 가셨지!”

내 예상은 맞았지만 어울리지 않는 말이 붙는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그거 마침인가요.”

거기서는 보통 마침이 아니라, 그렇게 덧붙이려다 마땅한 말이 달리 떠오르는 것도 아니어서 대충 넘겼다.

“으으음…….”

모리사와 선배가 말실수라도 한 양 난감한 얼굴로 신음했지만 나는 그에게 신경쓰는 대신 오늘의 일정에 대해 짧게 고민했다.

인생이란 원래 이런 법이다. 난처한 일이 생기면 그 이상의 일이 겹친다. 물론 부모님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일도 아니었으니 차라리 그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모리사와 선배가 입에 담은 마침이라는 말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입을 열었다.

“저기요, 선배.”

“그, 타카미네.”

그리고 선배도 동시에 목을 울렸다.

“먼저 말해라!”

모리사와 선배가 그런 말로 내게 발언권을 넘겨주었지만 나는 고개를 젓고 다시 모리사와 선배에게 돌려주었다. 내가 모리사와 선배의 말을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면 그는 제 뺨을 긁적이며 희미하게 속삭였다.

“그, 그게 말이다.”

머뭇거리는 눈동자가 물끄러미 나를 향한다. 그건 부끄러운 것도 같았고 조금 긴장한 것도 같았다. 이어지는 것은 그 목청 큰 남자의 것으로는 어울리지 않을, 간절하고 애틋한 부탁이다.

“……오늘 밤, 같이 있어주면 안 될까?”

모리사와 치아키라는 남자가 어떤 목적으로 그런 소리를 하는지 뻔히 알고 있는데도 그건 어째 근질근질하게까지 느껴지는 달콤한 말이었다.

모리사와 선배는 나를 위해 여분의 침구까지 준비했다. 분주한 모리사와 선배를 바라보며 나는 뭘 했냐면, 그 곁에서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손님이니 신경 쓰지 말고 가만히 기다리라는 선배의 지시였다. 신경을 안 쓸 수야 없기는 했지만 선배는 기어코 혼자서 준비를 마쳤다. 그야, 평소라면 잘 시간이긴 했다.

어째 잠이 오지 않았다. 내가 없었다면 선배는 이 밤을 혼자서 보내야 했을까. 인간의 관심을 끌고 싶어하는 유령의 필사에 가까울 행위들을, 그 겁많은 사람이 혼자서 버틸 수 있었을까. 수많은 생각들이 나를 잠식한다. 혼자였다면 결코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눈을 꾹 감았다, 다시 떴다. 아마 선배도 같은 생각을 했겠지.

“타카미네.”

모리사와 선배가 나지막이 나를 불렀다.

“잠이 안 오나?”

“그러네요.”

선배는 어떻냐고 되물으려다 말았다.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겠지 싶었다. 분명, 혼자였다면 버틸 수 없을 시간을 생각하고 있었겠지. 이 사람이 지금, 어떤 생각으로 나를 붙잡고 있는지 알고 있다. 모리사와 선배는 몸을 뒤척이며 나지막이 대답했다.

“그렇구나.”

생각 외의 짧은 대답과 함께 침묵이 찾아왔다. 그러면 모리사와 선배는 그 침묵을 견디지 못한 것처럼 몸을 벌떡 일으키며 나를 향해 외쳤다.

“그렇다면 올나잇 상영회는 어떤가!”

“지금 그럴 생각이 들어요?”

“으으음.”

모리사와 선배가 난감한 듯 신음했다. 하지만 변명은 하지 않는다. 뻔히 나를 신경 써주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이 거슬린다.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안다. 유령이니 뭐니 받아들이기 어려운 초현실적인 이야기다. 그렇지만 모리사와 치아키의 말이니 믿었다. 모리사와 치아키는 쉽게 남에게 말할 수 없을 일들을 겪고 있을 것이다. 겁에 질린 얼굴이 방금 보았던 마냥 떠오른다. 그렇게 불안한 주제에, 무서워하고 있는 주제에, 나를 먼저 신경 쓴다고.

이 사람이 단순히 유령을 쫓기 위해 나를 끌고 온 게 아니라는 것 또한 알고 있다. 내 일이니까 알고 있다. 몇 번이나 참고 물렀을 수많은 행위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건 이를테면 모리사와 치아키의 선의였다. 전부 나를 위한 거였단 말이다. 그런데. 그런데 내가 선배의 선의를 멋대로 내쳐도 괜찮은 걸까. 그건 모리사와 선배를 상처입히는 일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화가 났다. 모리사와 치아키가 좀 더 저의 상황을 걱정하길 바랐다. 아무리 내가.

“모리사와 선배.”

나는 그 즈음에서 무심코 목소리를 내었다. 아무래도 나는 무엇을 감추는 데에는 서툴었다.

“음?”

“선배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죠?”

“무얼 말이냐?”

모리사와 치아키는 어리둥절한 투로 되물었다. 그렇게 똑똑한 주제에, 이렇게 멍청해지는 순간이 있다. 아니, 어쩌면 오히려 그가 나를 멍청한 후배로 생각한 탓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유령이라는 거.”

나는 결국 그렇게 목을 울렸다. 하지만 그렇다. 아무리 내가 유령이 되어버렸다고 해도, 모리사와 치아키는 모리사와 치아키 자신의 일을 우선해야 했다. 모리사와 치아키는 멍하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감출 수 없는 당혹이 그 얼굴에 스민다. 모리사와 선배는 겨우 짜내듯 목소리를 내었다. 마른 호흡이 떨리고 있었다.

“그게 무슨.”

“설마 비밀로 할 셈이었어요?”

그 말에 선배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던 눈을 굴려 시선을 피했다. 선배는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하여튼 재미있는 사람이다. 남도 아니고 나 자신의 일이다. 내가 눈치 채지 못했을 리가 없는 것을. 나는 웃음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선배는 내가 눈치 채지 못하길 바랐던 거죠.”

“타카미네.”

모리사와 선배는 만류하듯 내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대신 뻔히 정답을 알고 있는 이야기를 했다.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않았던 건 선배를 괴롭히는 유령이 나였기 때문이야.”

“아니, 타카미네. 그게 아니다…….”

예상했던 부정에 나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모리사와 선배는 제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게 모리사와 치아키 나름의 각오라는 건 알았다. 모리사와 선배는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네가 유령이라는 걸 알았던 건, 네 사고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떠오르지 않는 과거를 선배의 말로 알았다. 사고를 당했구나. 내가. 내 죽음의 이유를 알게 된다는 것은 생각보다는 별 일이 못 되었다. 타인의 이야기를 건너듣듯이, 나는 덤덤하게 이어질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그 직후에 그 유령을 봤다.”

모리사와 선배는 그 순간을 떠올리듯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의 긴장이 그대로 목소리에 드러난다. 나는 모리사와 선배가 말을 잇기를 잠자코 기다렸다. 선배는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유령은 저를 볼 수 있는 인간에게 흥미를 갖지.”

나는 그 유령을 본 적이 없다. 그게 모리사와 선배가 거짓말을 하는 증거라고 생각하기보다는 막연히 유령끼리는 서로를 인식할 수 없는 모앙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모리사와 선배가 거짓말을 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지만, 한없이 0에 가까운 가능성이라고 생각한다. 애초에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고.

유령은 인간을 인식할 수 있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 일방향의 인식은 나를 외롭게 만든다. 아마 모리사와 선배가 아니었다면 나는 벌써 존재하지 않았을 테다. 모리사와 치아키는 누구도 나를 인식하지 못하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나를 봐주는 사람이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모리사와 치아키를 따라다니는 유령을 생각했다. 그건 인간에 대한 흥미 따위가 아니다. 생각하는 존재로 남기 위한 발버둥이다. 내가 유령이니까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그건 유령의 문제다. 인간은 관여할 필요도 없고 관여해서도 안 된다. 그런데도 이 남자는.

“너무 오랜만이라 대처할 수가 없었다.”

모리사와 치아키는 한심할 정도로 무르고 멍청할 정도로 다정한 사람이다. 저를 따라오는 유령을 둘이나 내버려두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내 마음은 그 순간과 다르지 않다. 나라면 분명 사쿠마 선배의 힘을 빌려서라도 편해지는 것을 고민했을 거다.

하지만 이 사람은 유령인 나를 먼저 생각했다. 만약 이 사람이 없었다면, 만약 내가 유령이라는 이유로 나를 피하기라도 했다면, 나는 여전히 학교를 헤매고 있어야만 했을 테지.

“하지만 타카미네가 온 뒤 그 녀석이 도망쳐서 말이다.”

모리사와 선배는 허탈하게 웃었다.

“하하. 타카미네가 내 곁에 있어주면 좋겠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아, 네에. 부적으로 말이죠.”

“그것도 부정은 못하겠다만.”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농담이었지만 나도 선배도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이 멎은 다음에는 피차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은 선배의 표정은 아마 나의 것과 같았을 테다. 선배는 어떤 감정을 애써 참고 있는 것이 뻔히 보였다. 모리사와 선배는,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북받쳐오르는 울음을 겨우 억누르는 것이 완연히 드러나는 목소리였다. 

“이런 체질따위 필요 없다고 사라져버리면 좋겠다고 몇 번이고, 정말 몇 번이고 생각했었지만.”

모리사와 선배는 드디어 내게 손을 뻗었다. 한 번도 손을 내밀지 않고 한 번도 끌어안지 않은 오늘 하루를 되돌아본다. 그가 나를 찾아오지 않는다면, 내게 손을 내밀지 않는다면. 그것조차 어렵다면 나를 끌어안지만 않는다면, 그렇게 나를 홀로 내버려둔다면. 분명 편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게 아니었다면 널 볼 수도 없었겠지.”

아니, 아니다. 전부 거짓말이다. 모조리 허세에 지나지 않는다. 편해질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다. 모리사와 선배가 나를 옭아맨 순간부터 겁을 냈다. 이 사람이 내게 실망하고 나를 놓아주고 홀로 내버려두게 될 다음을 걱정했다. 아주 편할 테다. 그리고 죽을 만큼 외로울 테다.

나의 뺨을 스치는 손의 감촉을 나는 모른다. 언제나 이런 외로움을 상상했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유령인 나를 지나쳐가는 친구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모리사와 선배를 떠올렸다. 모리사와 선배는 언제나 날 찾아주었으니까, 이번에도 나를 발견해주지 않을까 싶어 찾아갔다. 그리고.

“선배는 언제나 날 발견해주는군요.”

내가 맞았다. 모리사와 선배는 나를 봐줬다. 모리사와 선배만이 나를 봐줬다. 이 상황이 조금 우습게 느껴져서, 나는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이보다 조금 더 일찍, 제대로 몸을 가지고 있던 시절에 했어야 했던 이야기를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선배에게 발견될 수 있었어서 다행이에요.”

그 말에 모리사와 선배는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생각해도 놀란 얼굴이라, 내가 지금까지 그렇게 솔직한 적이 없었나 싶어졌고 실제로도 그게 맞았다. 모리사와 선배는 지금까지 내가 계속 품어왔고 품을 몸이 없어진 지금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마음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나도, 나도 처음으로 이 눈에게 감사할 수 있었다!”

모리사와 선배는 그렇게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

“타카미네를, 내 곁에 붙잡아둘 수 있게 해줬으니까!”

모리사와 치아키의 그 말이 모리사와 치아키와는 살갗을 맞댈 수조차 없는 내게 얼마나 따뜻했는지 아마 그는 몰랐을 거다. 모리사와 치아키는 너무나 따뜻한 사람이다. 태양 같은 사람이다. 살갗을 맞대는 것으로는 절대 얻을 수 없을 온기를, 나는 그 목소리에서 얻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닿을 리가 없는 입술을 그의 입술에 느리게 겹쳤다. 선배는 피하지 않았다. 피하는 의미도 없을 행위이기는 했다.

그래서 오히려 내게는 의미를 가졌다. 아무 의미도 없을 행위를 하나의 입맞춤으로 만든 것은 모리사와 선배의 손길이었다. 선배는 나의 뺨을 감싸쥐듯 손을 오므려 나를 향했다. 우리는 필사적으로 입맞춤을 흉내냈다.

여전히 온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온기는커녕, 선배에게 닿을 수도 없다. 그게 너무 분해서 눈물이 났다. 아니, 눈물조차 나지 않는다. 그제야 나는 내게 눈물을 흘릴 수 없는 기관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나의 기억 뿐이다. 지금의 나는 불투명한 기억만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나 대신 선배가 울었다. 주륵주륵 흘러내리는 눈물을 내 손으로 닦아주고 싶었지만 그것조차 할 수 없었기에 나는 도리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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