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스타!

토끼는 외로워도 죽지 않는다 下

토끼 카페가 여전히 한창인 교실을 나선 뒤에도 모리사와보다 반 걸음 정도 앞서 걷던 타카미네가 모리사와를 돌아보며 물었다.

“어디 안 갔어요?”

발이 좁은 타카미네도 모리사와나 다른 활달한 친구들에게 끌려다니며 1년을 보낸 뒤에는 별 수 없이 아는 사람이 늘었다. 그러니 어떤 반에서 무얼 한다더라 하는 정보는 대부분 알았고, 덕분에 손님보다는 관계자의 기분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오늘은 모리사와에게 맞춰 줄 셈이었다. 모리사와가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타카미네와 함께라면 어디든 좋다!”

“하아, 그런 소리를 잘도.”

한숨 섞인 퉁을 주기는 했지만 아주 불쾌한 이야기는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다. 타카미네는 웃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입꼬리를 끌어내려야 했다.

“아케호시 선배한테는 들렀어요?”

“아? 음.”

모리사와의 대답은 애매하다. 아케호시는 모리사와가 그렇게나 아끼던 후배다. 그러니 분명 격렬한 반응이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가 않다. 타카미네 미도리는 그렇게까지 둔하게 태어난 인간은 아니다. 오히려 남의 감정이나 태도에는 상당히 예민한 편이고. 타카미네는 눈치 채지 못한 양 그를 떠볼 요량으로 말했다.

“엄청난 걸 할 거라고 꼭 오라고 했었거든요.”

“그렇군!”

대화가 어째 맥이 없다. 모리사와 치아키 답지 않은 반응에 타카미네는 그의 얼굴을 살피다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타카미네 미도리는 그렇게까지 눈치가 없는 남자는 아니다. 타카미네는 같은 물음을 반복했다. 이번에는 꾹꾹 누르듯이 속삭였다. 처음부터 대답이 될 수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는 것을 그 순간 비로소 눈치 챘다.

“어디, 안 갔어요?”

“……우웃.”

그리고 모리사와 치아키는 거짓말이 능숙한 남자는 아니다. 모리사와는 푹 꺾듯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 반응에야 비로소 타카미네는 제가 멋대로 기대를 했다는 것을 알았다. 어이가 없는 것도 별 수 없다. 도대체 어떤 자신감으로.

어떤 자신감으로 타카미네 미도리는 모리사와 치아키가 저를 가장 먼저 찾아오리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타카미네 미도리는 그의 짐 밖에는 되지 못할 인물인데.

모리사와 치아키는 무얼 변명이라도 하듯 털어놓았다. 전부 다녀왔단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저를 보러 왔다는 말에 타카미네는 할 말을 잃었다.

모리사와가 잘못한 게 없다는 것은 타카미네도 알고 있다. 그러니까 죄라도 지은 듯한 모리사와의 태도는 더욱, 타카미네를 화나게 했다. 그건 타카미네 미도리를 의도적으로 피했다는 방증이었다.

두 사람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타카미네 미도리는 딱 반 걸음을 앞섰다. 이제는 타카미네가 더 잘 알고 있을 길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모리사와 치아키가 타카미네를 만나러 오는 동안 이미 지나온 길이기도 했다.

애초 타카미네 미도리는 모리사와가 ‘타카미네 미도리’에게 제일 먼저 올 거라는 생각을 한 적은 없다. 다만 타카미네는 항상 나구모의 곁에 있었다. 테토라 군은 유성대의 리더니까, 절차와 예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리사와 선배라면 결국 테토라 군에게 연락할 테니까. 단순한 후배에 불과한 내가 아니라. 타카미네는 그런 약삭빠른 기대로 나구모에게 기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것조차 아니다. 모리사와는 타카미네에게는 비밀로 나구모에게 연락을 했다. 거기까지는 타카미네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무리 서운하고 쓸쓸하더라도 납득할 수 있었단 말이다.

그런데 막상 도착해서는 타카미네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을 만났다. 유성대의 새로운 리더인 나구모마저 미뤄두고. 그 시점에서 모리사와의 의도는 분명해진다. 타카미네는 알고 있다. 아마 나구모 테토라가 타카미네 미도리에게 가장 가까운 존재였던 탓이겠지.

모리사와 치아키가 아직 학교에 남아있던 시절의 이야기다. 유닛도 부활동도 같았으니 함께 식사를 하는 날이 제법 있었다. 종종 좋아하지 않는 반찬이 함께 나왔고, 자연히 모리사와 치아키의 접시 한 편에 밀려났던 가지의 무덤을 기억한다. 그대로 접시 위의 음식물을 쓰레기통으로 밀어내었어도 되었을 것을, 모리사와 치아키는 끝내 제 입에 담았다.

타카미네는 이를테면 그런 존재인 거다. 눈을 감지 않고는 입에 담을 수 없고 넣은 다음에는 씹는 시간조차 견딜 수 없는, 그런 존재였던 거다. 모리사와 치아키는 사실 타카미네 미도리를 만나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 즈음에서 타카미네는 걸음을 멈추었다. 타카미네는 그 순간 깨닫고 만다. 저의 마음과 모리사와 선배의 마음은 결코 같지 않다. 얼마나 큰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타카미네는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저만 혼자서 모리사와 선배를 그리워했다고.

그때였다. 꼬리뼈 부근에 생기는 묘한 위화감에 타카미네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 타카미네의 눈치를 보며 꼬리에 손을 가져다 댄 모리사와와 눈이 마주친다. 그의 손 끝이, 토끼 꼬리의 하얗고 가느다란 털 언저리를 쓸어올리고 있었다. 그 순간 상황을 파악한 타카미네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뭐, 뭐머, 뭐예요! 그그거 서서서성희롱이라구여!”

“그, 그런가! 미안하다!”

타카미네의 꼬리에서 황급히 손을 떼어낸 모리사와는 잠시 고민하다 물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진짜 타카미네의 꼬리도 아니고, 문제 없는 것 아닌가?”

“생각이 불순하다구여!”

“내, 내가 무슨 생각을 했다는 거냐!”

대답은 그렇게 돌아왔지만 얼굴에서는 민망해하는 기색을 지우지 못한다. 타카미네의 입술을 비집고 희미하게 한숨이 나왔다. 질린 척을 했지만 실제 질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타카미네는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고 느꼈다.

혼자 하는 생각이란 으레 그렇게 된다. 혼자서는 남의 마음을 상상하고 멋대로 상처받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새 묵혀버린 마음을, 눈 앞의 모리사와만 모르게 상해버린 마음을, 그제야 옳지 않다고 여긴다. 그러면 타카미네의 흐렸던 기분도 무심하게 개는 것이다. 전부 모리사와 치아키 덕분이다. 하여튼 혼자서 침울해지도록 내버려두지를 않는다.

“하아, 바보 같아. 이럴거면 그냥 자리에 있을 걸 그랬네여.”

혼자 들떠버린 게 어째 멍청하게 느껴져 타카미네는 한숨섞인 목소리로 투덜대었다. 그러면 모리사와가 물끄러미 타카미네를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에 담겼을 감정에, 의도에,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조바심이 일었다. 모리사와는 금세 저 혼자 무얼 받아들인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물렀다.

“음, 그런가. 그렇군.”

뭐야, 그 반응은. 타카미네의 입이 멍청하게 벌어졌다. 동시에 모리사와 치아키는 평소와 같은 얼굴로 돌아간다. 타카미네는 밝게 미소짓는 모리사와의 얼굴을 마주한 채 멍하니 멈춰섰다.

“방해해서 미안하구나.”

밝은 얼굴과 담담한 목소리는 어째 어울리지 않아서, 무성 영화의 대사를 읊는 변사의 것처럼 애매한 위화감을 품는다.

“그럼 나는 가 볼 테니 너는 반으로 돌아가라!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쓰게 해버렸구나!”

쓸데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모리사와 치아키는 지금 어떤 의도로 저를 깎아내리려 하는 것일까. 타카미네 미도리가 모리사와 치아키를 위해 살라낸 시간은 결코 쓸데없지 않았다.

모리사와 치아키는, 타카미네 미도리에게 있어 고작 시간 조금 썼다고 그 시간을 아쉬워해도 괜찮은 인간이 아니란 말이다. 천천히 머리가 굳는다. 돌아서는 등이 슬로모션처럼 눈 앞에 펼쳐지는 순간, 타카미네는 어떤 결심을 해야만 했다.

타카미네는 그를 멈춰세울 셈이었다. 하지만 벌어진 입 밖으로는 어떤 말도 나오지 않는다. 이대로라면 타카미네는 모리사와를 불러 세울 수가 없다. 그래서 타카미네가 어떻게 했냐면.

손목을 붙잡았다. 타카미네는 아주 짧은 시간동안, 손아귀에 들어차는 마르고 단단한 뼈대가 움츠러들듯 긴장하는 것을 느꼈다. 그러면 바로 다음 순간 타카미네는 모리사와의 손목을 잡았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라 그의 손을 놓치고 만다. 모리사와는 몸을 돌려 타카미네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지만 타카미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런 순간에 할 수 있는 말을, 타카미네 미도리는 알지 못한다. 그저 숨이 부족한 붕어처럼 입만 벙긋대기나 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해? 아니, 그 전에 뭐야? 나랑 어떻게 하고 싶은 거야? 나 같은 거 만나기 싫었던 거 아녔어? 마지막의 마지막에, 먹기 싫은 반찬을 차마 남길 수 없어 젓가락을 향하듯이 겨우 나를 만나러 온 것 아니었냐고. 모리사와 치아키는 여전히 싫어하는 반찬을 남기지 못하는 남자일 테니까,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도 제 후배고 전 동료라는 멍청한 이유로 만나 줄 셈이었던 것 아니었냐고!

타카미네 미도리는 그런 것을 생각한다. 아마 아주 틀린 생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모리사와 치아키는 여전히 커피를 마시지 못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하지만. 타카미네는 멍하니 모리사와의 얼굴을 확인한다. 꾹 다문 입술과 웃지 않는 눈매가 어색하다. 타카미네 미도리는 그 순간 모리사와 치아키라는 사람을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이렇게, 투정에 가까운 심술을 부리던 사람이던가. 제가 상처 받았다는 것을 티내지 못해 안달하는 사람이던가. 좀 더 어른스러운, 그의 말을 빌리자면 늠름하고 믿음직스러운 선배가 아니었던가.

말하자면 전부 모리사와 치아키 답지 않은 모습이다. 그랬기에 타카미네 미도리의 심장은 별 수 없이 속도를 높인다. 혼란스러운 고양감이 타카미네를 엄습하고 나면 다음으로 할 말은 아직 정하지도 않았는데 입이 먼저 열렸다.

“안 가여…….”

그러니까, 김이 샐 만큼 멍청한 대답이 나온 건 별 수 없었다. 타카미네는 그런 대답을 부끄러워하듯 필사적으로 말을 이었다.

“아, 그, 알잖아여. 나 행사 같은 거 별로 좋아하지 않구, 이렇게 선배 탓으로 돌리면서 땡땡이 칠 수 있으면 오히려 좋구…….”

이어지는 것은 변명 뿐이다. 타카미네의 말에 모리사와는 입술을 우물거리다, 이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타카미네는 정말이지.”

모리사와는 그 즈음에서 말을 멈추고 한숨을 내쉬었다. 희미하게 미소지은 얼굴이 어째 허탈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모리사와는 되뇌듯 말했다.

“정말이지, 상냥하구나.”

타카미네는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평소라면 재빠르게 부정했을까. 그러기에는 오늘의 모리사와는 타카미네가 알고 있는 모리사와 치아키 같지가 않았다. 부정하는 순간 다시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서버릴 것만 같아서, 타카미네 미도리의 기다란 토끼 귀가 잘 보이도록 숨은 뒷모습을 모르는 척 놓아줘버릴 것만 같아서. 타카미네는 저의 반으로 돌아가는 대신 그대로 모리사와와 함께 천천히 교내를 돌았다.

어딜 가도 인파가 몰리고 떠들썩한 날이었다. 두 사람의 걸음은 자연스럽게 농구 코트를 향한다. 몇 번이고 함께 향했던 장소니 함께 걷는 걸음이 익숙한 것도 별 수 없었다. 코트는 두 사람이 예상했던 대로 비어있었다. 그야, 부활동을 할 학생들은 모두 축제에 몰두해있다. 사람이 찾아올 리 없는 공간이었다. 타카미네가 먼저 벤치에 앉았다. 토끼 귀가 가볍게 흔들렸다. 모리사와는 그의 곁에 앉는 대신 코트를 휘 둘러보았다.

“오오오, 정말 하나도 변하지 않았구나!”

그건 당연한 일이다. 그가 졸업한지 아직 1년도 채 되지 않았고. 모리사와는 호들갑을 떨며 보관함에서 농구공을 집어들었다.

“한 판 할까?”

“토끼는 농구 같은 거 안 해요.”

“하기야, 옷이 망가지기라도 하면 그건 큰일이겠구나.”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지만 모리사와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혼자 공을 튕겼다. 탄력있는 공이 바닥을 치는 경쾌한 소음이 일정한 템포로 코트에 울렸다. 타카미네는 희미하게 한숨을 내쉬며 벤치에 등을 기대었다. 몸을 풀 셈이었을까. 공을 튕기며 코트를 향하려는 모리사와를 향해 타카미네가 물었다.

“나랑 있는 거, 싫어요?”

답이 정해져있는 물음이었다. 하지만 모리사와도 심술을 부렸으니, 그 정도는 잘못도 아니라고 타카미네는 저를 정당화했다. 모리사와는 양손으로 공을 잡아 멈추고 타카미네를 돌아보았다.

“음…….”

타카미네가 말하는 데에 모리사와에게 짚이는 구석이 없을 리가 없다. 그러니까 어떤 변명도 하지 못한 채, 모리사와는 나지막한 신음만 흘렸다. 타카미네는 말을 고쳐 다시 물었다.

“내가 보고 싶지 않았나요?”

“……보고 싶었다.”

“그러면 어째서, 날 찾아오지 않았어요?”

타카미네의 말에 모리사와는 고개를 저었다. 담담한 부정에 이어지는 것은 침착한 목소리였다. 모리사와 치아키가 짤막하게 속삭였다.

“첫 번째였다.”

타카미네는 그 말을 바로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느리게 그의 얼굴을 살폈다. 제대로 이해했다면 아마 그렇게 바라보고 있지는 못했을 테다. 모리사와는 가만히 타카미네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다시 한 번 말했다.

“첫 번째로, 네게 갔다.”

그 말에야 타카미네는 시선을 떨어트렸다. 그러고도 분한 마음에 신음이 샐 것만 같아 입술을 깨물었다. 모리사와는 천천히 타카미네에게 다가섰다. 타카미네는 턱을 홱 치들었다, 곧은 시선과 마주한 동시에 다시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러면, 어째서…….”

모리사와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이렇게 잘하고 있는데 말도 없이 찾아온 내가 귀찮게 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타카미네는 그 단단한 시선이 여전히 저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타카미네는 최대한 불퉁한 체를 하며 대답했다.

“뭘 이제와서 내 기분을 신경쓰고 있어요? 학창시절 내내 그렇게 멋대로 굴어놓고.”

그런 건 원한 적도 없다. 타카미네 미도리는 작년의 기억을 떠올린다. 멋대로 굴며 저를 휘두르는 남자를 좋아했었다. 타카미네와는 정반대의 인종이었다. 얼마나 긍정적인 사내였던가. 타카미네의 행동을 멋대로 곡해하여, 결국엔 그런 행동으로 감춰두었던 타카미네 미도리의 마음을 꿰뚫어보았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타카미네는 기대했다. 모리사와라면 숨어버린 저를 찾아내줄 거라고. 분명 웃으며 손을 내밀어줄 거라고. 하지만 모리사와 치아키는 그러지 않았다.

타카미네는 모리사와가 심술을 부렸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약간 생각이 바뀐다. 그래서 타카미네는 어울리지 않는 말을 입 밖으로 내어본다.

“만약, 아주 만약…… 내가 당신을 보고 싶어했으면 어쩔 셈이었던 거야?”

“……보고 싶었나?”

모리사와는 반신반의하는 투로 되물으며 타카미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타카미네는 그의 커다란 눈동자에 비치는 묘한 기대를 눈치챘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 너무 당연한 말을 굳이 입 밖에 내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모리사와는 타카미네의 대답을 기다렸던 것 같다. 타카미네의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모리사와가 희미하게 웃음소리를 내었다. 

“아, 하하. 그럴 리가 없지.”

모리사와 치아키가 뺨을 긁적이며 한껏 낮춘 목소리로 말했다. 어울리지 않는 태도에 타카미네가 반문했다.

“……네?”

“타카미네는 나 없이도 잘할 수 있으니까.”

모리사와의 말에는 타카미네도 별 수 없이 얼이 빠졌다. 당연한 이야기를 굳이 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 침묵은, 결코 부정의 의미가 아니었다. 

“그, 러니까.”

목소리가 짧게 떨렸다. 모리사와 치아키는 목을 가다듬을 셈인 것처럼 숨을 삼키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담담한 목소리가 나왔다.

“네가 나를 보고 싶어했을 리가 없지.”

모리사와는 그걸, 부정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말한 모리사와는 타카미네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두 사람은 같은 코트를 앞에 두었다. 그게 타카미네와 시선을 맞추고 싶지 않기 때문이란 것은 타카미네도 금방 알았다. 그의 단정한 옆얼굴과 아무 것도 없는 코트를 바라보는 무정한 눈동자가 그걸 말해주고 있었다.

물론 타카미네는 그를 그러고 있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타카미네는 모리사와의 어깨를 붙잡아 저를 향하도록 몸을 돌렸다. 모리사와 치아키의 몸은 빳빳하게 굳어 저항이 있었지만, 이내는 타카미네를 향해 돌아섰다.

“선배.”

“……읏.”

오히려 그 부름에 모리사와는 타카미네의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숙였다. 농구공을 쥔 마른 손등이 단단한 뼈로 도드라진다. 억지를 써 저를 보게 할 만큼 강압적인 성격인 것도 아니어서, 타카미네는 그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혹시 선배, 서운했던 거예요? 내가 혼자서도 잘 하고 있어서.”

그 말에 모리사와가 바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모리사와가 소리쳤다.

“뭐, 뭣! 그럴 리가 없다! 서운하다니, 그런 게 아니라! 당연히 기뻤다! 분명 이렇게, 잘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역시나, 그런 대답이 돌아온다. 모리사와는 제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알면서 심술을 부린 게 아니다. 무척 혼란스럽겠지. 사랑스러운 후배가 이렇게 잘하고 있는데 어째서? 어째서 모리사와 치아키는 늠름하고 믿음직스러운 선배로 있지 못하는가. 타카미네 미도리는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럼 뭐예요?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그냥, 내가, 당연히 이렇게 잘하게 되었을 너를, 1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귀찮게 한 건 아닐까 싶어서…….”

그건 모리사와의 진심이었을 테다. 그래서 타카미네는 제대로 문장조차 이뤄내지 못하는 말들에 가만히 집중했다. 타카미네가 제 말에 가만히 집중하는 모습에 모리사와는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물론! 당연히 잘하게 될 거라는 건 처음부터 알았다!”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 모리사와에게는 미안하지만 제법 재미있다고 타카미네는 무례한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나는, 그래서 너를 영입했던 거고!”

하지만 이런 식으로 변명하는 데에는 역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타카미네는 참지 못하고 불쑥 말했다.

“저기, 지금 엄청 횡설수설 하고 있는 거 알아여?”

그러면 바로 즉답이 돌아온다.

“알고 있다!”

아, 알고는 있구나. 웃음이 나올 것 같아 타카미네는 무심코 손을 들어 입가를 붙들었다.

“하지만, 그건!”

모리사와 치아키가 순간 목소리를 높였다. 그건 모리사와 자신의 초조를 다잡기 위한 행위였다. 모리사와는 다시 침착하게 갈무리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의 욕심이었을 뿐이었던 거지. 타카미네와는 관계 없는.”

어떻게 관계가 없을 수 있을까. 지금의 타카미네 미도리를 만든 것은 모리사와의 욕심이었다. 모리사와 치아키 없이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타카미네 미도리를 앞에 두고 하는 말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말이 안 된다. 그 냉정한 말에 비로소 모리사와 치아키의 소극적인 행동과 심술을 닮은 말들이 하나의 퍼즐처럼 맞아떨어진다. 타카미네 미도리는 더 이상 웃음을 참지 않는다. 타카미네는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아, 어떡해……. 선배, 날 좋아하는 거죠.”

“어?”

본래의 모리사와 치아키라면,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웃음을 터트리며 그렇다고 대답했을까.

나는 타카미네를 사랑하고 있다!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묘한 흥분감으로 들뜬 목소리와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한 표정에 타카미네는 그만 그의 진심을 의심할 것이고 이내는 온전히 진심이기에 같은 마음이 아님을 확인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지금은 그런 익숙한 반응은 돌아오지 않는다.

“아, 으…….”

모리사와는 그저, 얼굴을 시뻘겋게 만들며 느리게 고개를 떨어트렸을 뿐이다. 타카미네는 웃음이 터질 것처럼 근질거리는 얼굴을 굳힐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기엔 이미 타카미네의 의혹이 확신으로 굳어버린 다음이었다.

“선배는 서운했던 거예요. 내가 선배가 없어도 잘하고 있어서. 내게 선배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 같아서.”

그럴 리가 없다. 모리사와가 없어도 아무렇지 않게 생활할 수는 없었다. 타카미네 미도리는 외로웠다. 죽을 만큼 외롭다고 생각했지만 사람이 그렇게 쉽게 죽는 건 아니었다. 이를테면 모리사와 치아키는 타카미네 미도리의 양철심장이었다. 양철심장이 없어도 죽지는 않는다. 그저 그를 도려낸 순간 딱 죽지 못할 정도로만 외로워졌다. 그건 차라리 죽고 싶을 만큼의 외로움이었다.

그런데도 타카미네 미도리는 살았다. 아이돌의 의상은 여전히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했지만 필사적으로 숨통을 열었다. 점점 자라는 키가 부끄러워 숨고 싶었지만 어떻게든 등허리를 폈다. 큰 키가 더욱 도드라질 것이 뻔한 토끼 귀를 다는 것도 창피했지만 결국은 달았다. 무엇이든 제게 닥친 일이라면 해내고 싶었다. 기왕 귀찮음과 창피함을 무릅쓰고 해야만 할 일이라면 잘하고 싶었다.

“나는, 정말 잘하고 싶었어요.“

그랬다. 타카미네 미도리는 잘하고 싶었다. 아니, 잘해야만 했다. 왜냐면 지금의 타카미네 미도리는 자신만의 힘으로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전부 선배가 도와줬으니까, 선배의 1년을 내게 줬으니까…….”

그래서, 타카미네 미도리는 외로워도 죽지 않는다.

아니. 죽을 수가 없는 것이다. 타카미네 미도리가 꺾이고 무너져내리는 순간, 제가 남김없이 가져가버린 모리사와 치아키의 1년은 전부 낭비가 되어버릴 테니까. 쓸모없는 시간이 되어버릴 테니까. 타카미네 미도리는 좋아하는 사람이 온전히 저를 위해 쓴 시간을 아까워하거나 그 시간의 의미를 의심하지 않길 바랐다.

“내게는 분명 그만한 값어치가 있었다고 당신이 맞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당신의 1년은 온전히 여기에 있다고. 그리고 언젠가 당신 곁에 다시 돌아갈 거라고. 타카미네 미도리는 희미하게 웃으며 장난을 섞어 속삭였다.

“앞으로도 계속 잘할 거지만 너무 서운해하지는 말아요. 지금의 타카미네 미도리는 모리사와 치아키 덕분에 있는 거니까.”

그건 진심이었다. 모리사와 치아키는 한 번도, 타카미네 미도리에게 있어 의미가 없었던 적이 없었다. 타카미네를 가만히 바라보던 모리사와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담담한 눈동자를 마주한 채, 타카미네는 모리사와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타카미네…….”

그 순간 어떤 것을 기대했을까.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기대하는 순간 실망해버릴 것을 알았다. 타카미네는 그래서 눈을 감지 않았다. 멍하니 모리사와의 손 끝만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뻗어오는 손은 이번에는 제대로 타카미네의 뺨에 닿는다. 

타카미네는 눈을 크게 떴다. 모리사와의 손 끝에 맺힌 더운 온기가 타카미네의 살갗으로 옮겨붙었다. 타카미네는 그의 손바닥에 천천히 제 얼굴을 기대었다. 그 어리광에 모리사와가 문득 손 끝을 움츠렸다. 하지만 손을 무르지는 않는다. 모리사와는 조금 망설인 끝에 말했다.

“……정말 멋지게 성장했구나! 토끼 귀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만큼!”

하지만 덧붙인 말에 타카미네는 제가 여전히 토끼 귀를 달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야, 마주 본 사람이면 몰라도 제 머리 위에서 흔들리고 있을 물건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타카미네가 잘하지도 못하는 말을 열심히 다듬어 주워섬기는 동안 모리사와는 그의 토끼 귀에 집중하고 있었다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 타카미네도 별 수 없이 죽고 싶어진다.

“제대로 토끼 귀 보고 있었잖아…….”

타카미네가 꾸며낸 울상을 하고 한숨이 섞인 목소리로 대답하면 모리사와가 만족한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면 타카미네도 픽 웃고 만다. 모리사와 치아키도, 분명 확실한 대답을 원했던 것이라고 타카미네는 생각한다. 이 안심한 얼굴은 사랑스럽고 동시에 미안하다.

타카미네는 좀 더 미리 말했어야 했다. 좀 더 확실하게 표현했어야 했다. 타카미네 미도리는 모리사와 치아키가 있어 외로워도 죽지 않는다고. 제가 연락하지 않는 순간 연결고리가 끊기고 제가 찾지 않는 한 먼저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후배가 그에게는 얼마나 야속하게 느껴졌을까.

“저기요, 선배.”

나지막한 부름에 모리사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타카미네를 살폈다. 타카미네는 제 뺨을 쥔 모리사와의 손을 제 손으로 조심스럽게 감싸쥐었다. 그리고. 모리사와의 무릎으로부터 공이 굴러떨어진다.

바닥을 울리는 소음이 몇 차례 더 이어진 다음에야 타카미네는 모리사와의 입술에 맞대었던 제 입술을 천천히 떨어내었다. 모리사와의 눈동자는 이제 온전히 타카미네 미도리를 담고 있다. 타카미네는 들뜬 목소리를 꾹꾹 눌러가며 발갛게 달아오른 귓가에 속삭였다.

“지금부터는 정말로, 토끼 귀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게 만들어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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