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저녁밥은 카레

ㆍ7 스포 주의

그래서, 아라카와 마사토는 말했다.

"질렸어"

청천벽력같은 그 말에, 식탁에 뜨거운 물을 부은 '지옥냄비맛! 파야소그パヤソグ'를 내려놓던 이치반이 돌아봤다.

"예?"

"질렸다, 몇 번을 말하게 하는 거야. 매일매일 삼시세끼 똑같은 편의점 식사잖아"

"똑같지는 않잖아요? 게다가 저는 요리를 못하고..."

"다 똑같은 편의점 음식이잖아! 말의 요지를 알아들으라고! 그리고 요즘은 파야소그, 파야소그 탄탄멘, 파야소그 핵불닭맛, 파야소그 지옥냄비... 죄다 파야소그잖아! 그것도 지독하게 매운 맛만 골라서! 죽일 셈이냐!? 날 위 천공으로 죽일 셈이냐!?"

"아니, 도련님이 요새 매운 맛 땡긴다고 하셨잖아요! 저는 임신하셨어요? 라고 했고"

"임산부는 신 맛이다, 이 바보이치! 매운 맛도 하루 이틀이어야지 매일 세 끼 파야소그만 먹어봐라! 죽는다! 미뢰가! 애초에 넌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똑같이 파야소그만 먹으면서!"

"매웠죠! 존나게 매웠죠! 그냥, 도련님 취향은 특이하구나... 이러면서 먹었죠!"

"미련한 놈! 곰이냐? 머리는 사... 민들레 홀씨같이 생겨먹은 주제에! 네놈은 옛날부터 그런 점이 마음에 안 들었어! 힘들어도 닥치고 참는 게..."

"아아, 잠깐 스탑. 진정합시다, 저희. 이러다가 진또배기 도메스틱 바이올런스로 번지게 생겼습니다"

마사토는 안경에 뿌옇게 김이 서릴 정도로 씩씩대고 있었다. 어깨가 눈에 보일 정도로 크게 들썩였다. 하지만 이치반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는, 한숨을 푹 쉬고 천을 꺼내 안경알을 닦았다.

"그래, 그... 과거 이야기를 꺼낸 건 미안했다"

"알아들으셨다니 다행입니다. 게다가 사과라니, 내일은 서쪽에서 해가 뜨는 게 아님까?"

"사람이 솔직하게 나와줬더니...!"

"아, 스탑스탑. 이번에는 제가 잘못했슴다. 죄송함다"

"진심으로 사과하는 거 맞아? 아니, 됐다. 이래서는 끝이 안 난다. 그런데 진또배기란 건 뭐냐"

"예? 도련님, 설마 모르시는 검까? 진짜라는 뜻인데"

"쓰지 마라, 그거. 아저씨 같으니까"

"아니, 아저씨 맞잖아요. 도련님도 아저씨면서..."

"뭐야, 해 보겠다는 거냐!?"

"아니, 이제 그만 두자매요!"

바보같군. 마사토는 목에 핏대를 세우는 걸 그만두고, 그냥 천장을 올려다보며 푹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 놈이랑 함께 있으면 정신 레벨도 똑같은 수준으로 떨어지는 느낌이야.

이치반은 파야소그의 뚜껑을 열며 퉁명스레 내뱉었다.

"아니 그럼, 뭐가 먹고 싶으신데요. 편의점이 아니면 뭐, 다이노소어 버거요?"

그리고 면발을 호로록 입에 머금었다. 불어 터지면 아까우니까. 그리고 시뻘건 얼굴로 눈물을 찔끔 흘렸다.

마사토는 미간을 찡그리고 계속 천장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집밥"

낼름 내민 혀에 손으로 부채질을 하던 이치반이,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집밥요? 저 요리 못하잖아요?"

"시끄러, 먹고 싶은 건 먹고 싶은 거야. 이대로 편의점 음식만 먹다가는 몸이 상할 것 같아. 아니, 상한다. 틀림없어"

"예에..."

뭐, 그 말은 맞다. 이치반은 수긍했다. 도련님에게 맞춰서 계속 편의점 밥을 먹고는 있었지만, 슬슬 하얀 쌀밥이 그리워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배달을 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고 말이지. 그러면서 흘끗 커튼을 쳐 둔 유리창을 봤다.

그렇다고는 해도, 카스가 이치반은 정말 요리를 못했다. 취업센터에서 수습 요리사 업무를 알선 받은 적은 있지만, 자격증도 없는데 주방에 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야 망상 속에서는 인간 채썰기, 인간 바베큐가 특기였다지만. 현실은 지금도 제일 잘 하는 요리가 계란부침이였다.

"뭐가 먹고 싶으신데요? 그래서. 말해두지만 저, 도련님이 매일 먹던 고급 레스토랑 같은 메뉴는 무리임다"

그러고 보니, 아라카와 마사토는 집밥이란 것을 먹어 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라는 사람은 분명 잘 챙겨주기는 했지만, 직접 요리를 만들어 주는 타입은 아니었다. 크고 나서도 언제나 식사는 식당에서, 혼자서 해결했다. 사람이 많아봤자 정신 사납기만 할 뿐이고, 좌석이나 시간 같은 자질구레한 일에 신경도 써야 하고.

그러니까, 둘 다 일반적인 가정식이란 것을 몰랐다. 먹어본 적도, 만들어 본 적도 없으니 알 리가 있나. 마사토는 이마를 짚었다. 집밥이라는 게 뭐지? 잘은 몰라도, 대략적인 이미지는 있지 않은가. 뭔가 서민적이고, 뭔가... 손맛이란 게 느껴지고. 뭔가... 뭔가가.

"카레?"

불쑥 튀어나온 단어 끝에는 의문부호가 꼬리처럼 달려있었다.

"카레요? 아~... 그거면 나도 만들 수 있으려나"

카레. 이치반은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어렸을 적에 카레를 먹어본 적이 없었다. 아니, 초등학교 급식 때 한 번 먹어봤던가? 뭐든 적당히 썰어서 카레 가루랑 넣고 끓이면 그만이지 않던가. 고기하고, 양파하고... 뭐더라? 아무튼 난이도는 그렇게 높지 않아 보였다. 만들기 쉽고, 먹기 쉽고. 뭣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혹시나 해서 묻는데, 이치. 너, 만드는 법은 알고 있겠지?

뜨끔. 도련님의 의심 가득한 말투에, 이치반은 저도 모르게 펄쩍 뛰어올랐다.

"그... 으럼요? 아마도?"

"아마도면 모른다는 이야기 아니야. 난 카레가 먹고 싶은 거야. 카레 비슷한 것 내지 망친 음식을 먹는 건 사양한다"

"뭡니까, 도련님. 요리 초짜한테 밥하란 소릴 하시면서 거참 깐깐하게 구시네요"

"시끄러. 기왕 이렇게 된 거 난 카레가 먹고 싶다. 편의점 카레나 어둠 전골 카레 같은 거 말고, 제대로 된 카레"

"방금 기왕이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대충대충 정하신 거 아니죠?"

"이치 주제에 군소리가 많다! 아무튼 카레 만드는 법 하고 재료를 가져와. 만드는 것 정도는 도와주지. 네녀석 친구 중에 요리 잘 하는 녀석 있다고 했지?"

"그야, 있긴 있는데요. 도련님, 너무 뻔뻔하신 거 아닙니까?"

"뭐라고?"

"아니, 그렇잖아요. 어차피 만드는 방법 알아 오는 건 저잖아요? 그럼 만드는 것도 거의 제가 하게 되겠죠? 재료도 제가 다 사야 하죠? 이거 순 도련님은 누워서 떡만 먹겠다는 소리 아닙니까? 양심적으로다가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그러면서 이치반은 마사토를 빤히 바라봤다. 별반 화를 내는 것도 아니고, 짜증을 내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마사토는 윽, 하고 외면해버리고 말았다. 내심 자각은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치반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이런 곳까지 따라와서, 헌신적으로 보살펴주고 있는 이치반에게. 하지만 뭔가를 시도하기에는 그의 안에 있는 알량한 자존심과 비뚤어진 죄책감이 너무 컸다.

"어쩌란 거야, 그럼. 나보고 밖으로 나가란 말이냐"

이치반은 다시 흘끗, 커튼을 쳐둔 창문을 봤다.

파파라치가 문제였다.

야쿠자와 유착하고 있던 전 도지사. 제목만으로도 돈 냄새가 풍기지 않는가. 죽여주는 기삿거리였다. 그러니 계속해서 따라붙을 수 밖에. 커튼을 쳐 두지 않으면 항상 창밖에 번쩍, 하고 빛나는 카메라 렌즈가 보였다. 빌라를 나서는 이치반에게 말을 거는 놈들도 있었다. 실례지만 전 도지사 아오키 료와 무슨 관계십니까?...

떠올리기만 해도 지긋지긋하다. 이치반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껏 생긴 외출 기회를 날려버리는 건 너무 아까웠다.

그럼 어떻게 할까. 일단 도련님의 측근은 도움이 안 될 것이 확실했다. 이치반은 저번에 있었던 사건을 떠올렸다. 고용했던 보디가드가 주간지에 도련님의 주소를 팔아먹은 사건. 그 이후로 도련님 앞에서는 되도록이면 힘 좀 빌려달라는 소리를 자제하고 있었다. 마사토가 못 미더워서가 아니었다. 떠올리고 스트레스를 받게 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뭐, 그럼 언제나처럼 그 방법을 써야지..."

"설마, 또냐? 같은 수법이 그렇게 자주 먹힐 것 같아?"

"안 그래도 슬슬 힘들 것 같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래도 한 번은 더 써먹을 수 있을걸요? 안 통하게 되면, 그건 그 때 가서 생각하면 되죠"

그리고 이치반은 스마트폰을 꺼내서, 태평하게 콧노래를 부르며 번호를 눌렀다.

아다치의 전화번호를.


"쫓아! 또 그 스포츠카다, 쫓아!"

"씨양, 저거 맞는거야? 저번에는 허탕이었잖아!"

"저기 타고 있으면 어쩔건데! 앗, 주간문추 녀석들이다! 선수 빼앗겼잖아, 어서 밟아!"

끼기기기기긱, 요란한 바퀴소리와 함께 여러 대의 승용차가, 화려한 스포츠카가 조용한 동네의 골목길을 달려나갔다.

"에~ 군고구마 사아려, 맥반서억~ 군고구마..."

털레털레 굴러가는 노상판매 트럭을 지나치며.

"달콤달코옴~ 맛조오~은..."

늙은 너구리 봉창 때리는 듯한 목소리가 멈췄다. 달칵. 마이크를 제자리에 돌려놓고, 머리에 배배 꼰 수건을 감은 아다치가 짐칸에 속삭였다.

"좋아, 다 갔다. 이제 나와도 돼"

붉은 비닐포대를 걷으며 이치반과, 선글라스에 마스크까지 착용한 마사토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야, 이게 통하네. 이거 어디서 났어요? 이번 직업?"

"취직 센터 갔더니, 한 달만 노점 대신 굴려줄 양반을 찾는다데. 완전 꿀 빠는 알바 아니냐? 술값도 벌 겸 바로 오케이 때렸지"

"진짜요? 와, 굉장하다! 그거 완전 로또 얻어걸린 거 아님까?"

싱글벙글 기분이 좋아보이는 이치반을 옆에 두고, 마사토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외출 한 번 하는데 매번 이 짓거리를 해야한다니..."

"원인을 따지자면 죄다 네 녀석 탓이잖아. 궁시렁대지만 말고 현실을 받아들이는 게 어떠냐!"

아다치는 슬슬 속도를 높여 고속도로를 탈 준비를 하면서 소리쳤다. 씨익 이를 드러내고 웃으면서. 이치반도 말리기는 커녕 맞장구를 쳤다.

"말이야 맞죠, 옳소! 잘 한다! 한 말씀 더!"

마사토는 잔뜩 분한 표정이었지만, 대꾸는 하지 못했다. 대신 이치반을 물고 늘어졌다.

"시끄러워, 바보이치. 이제 저 녀석들을 어떻게 따돌릴 셈이야? 이런 짓도 한두번이나 통하는 거야. 그리고 그 스포츠카 모는 녀석, 동료라면서 걱정되지도 않는 거냐?"

"아, 준기요? 그 녀석이라면 걱정 마세요. 오히려 얼굴 팔리면 동료들 더 찾아올 거라고 좋아하던데요"

"차에 기스라도 나면 선희가 펄펄 뛰겠지만, 뭐. 그 녀석 운전실력이면 문제 없겠지"

"네놈들은 태평한 건지 무심한 건지 알 수가 없군..."

"아니, 본인이 가기 전에 따봉 날리고 갔다니까요. 엄지 척"

"허허허, 아무래도 우리 도지사님은 동료를 믿는 마음이 부족한 것 같소이다"

"됐다. 물어본 내가 바보지. 그래서, 어디로 가는 거야? 이치, 너 길 정도는 제대로 알고 있겠지?"

"그야 뭐. 갈 곳이야 정해져 있죠. 이진쵸"

"경금반점!"

아다치가 수동변속기를 밀어젖히며 힘차게 외쳤다.


"진짜로 괜찮냐? 너희 일 마칠 때까지 기다려 준다니까?"

"됐어요. 알아서 돌아갈게요. 이 이상은 민폐기도 하고, 계속 같은 차 타고 다니면 들킬 것 같으니까"

"그러냐. 또 뭐 필요한 일 있으면 언제든지 불러! 차든 뭐든 몰고 후다닥 달려올테니"

"신세졌슴다, 아다치 씨"

헝빙류만 앞, 명화 극장. 군고구마 트럭에 탄 아다치와 거리에 내려선 이치반이 작별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마사토는 약간 떨어진 곳에, 휠체어를 타고 앉아있었다. 조금 불만인 듯한 표정을 하고서.

"기다리고 있으면 나올 거야. 그럼 카스가, 건강해라"

그런 도련님을 힐끔 보고서, 아다치는 이치반의 귀에 대고 속닥였다.

"저 녀석 버리고 싶어지면 바로 버려. 서바이버 2층 아직 비워놨다"

"그러니까 도... 아무튼, 안 버린다고요!"

먼 발치에서 곤란한 듯이 웃는 이치반을 보면서, 마사토는 작게 혀를 찼다. 다 들린다, 반백의 너구리 녀석.

"어어이, 아오키... 아니, 너! 안경!"

갑작스러운 부름에 고개를 들자, 아다치가 운전석에서 몸을 빼어 내밀고서 마사토에게 손인사를 하는 광경이 보였다.

"이 녀석 너무 괴롭히지 마라! 울리면 가만 안 둔다!"

"안 운다니까 그러네!?"

그 소리만 하고 껄껄 웃고는, 항의하는 이치반을 두고 차를 몰아 떠났다. 부르릉.

"누가 안경이야, 중늙은이가..."

마사토는 멀어지는 트럭을 째려보며 중얼거렸다. 같이 큰 소리로 쏘아붙여줄 기력은 없었다. 염치도, 없었다.

마사토에게 있어서 이치반의 '친구들'이란 서먹한, 마음에 들지 않는 존재들이었다. 자신이 모르는 이치반을 알고, 자신이 없는 사이에 이치반의 옆자리를 차지한 녀석들.

특히 저 아다치라는 남자는 상당히 마음에 안 들었다. 성격은 정반대지, 거기다 전직 경찰이라고 했다. 야쿠자의 아들인데다 예전의 연애 라이벌도 경찰이었던 마사토다. 좋아할래야 좋아할 수가 없었다.

"이야, 죄송합니다 도...아무튼. 아다치 씨가 쓸데없는 소리를 했죠"

"그냥 마사토라고 불러. 이진쵸다. 황색언론도 여기까지는 쫓아오지 못해"

"그래도 만약이라는 게 있잖아요"

"존댓말조차 버리지 못하는 녀석이 애써봤자, 언젠가 들통날 뿐이다. 편하게 불러, 그냥"

전직 도지사 아오키 료의 본명은 아라카와 마사토, 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자는 적은 편이기도 했다. 아오키, 아니 마사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범지역이기 때문인지, 지나가는 사람도 적었다.

일단은 안심해도 될 것 같았다. 마사토는 선글라스 뒤에 숨은 눈알을 불안하게 굴렸다. 하지만 언제 들켜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진쵸 일대를 밀어버리려고 했던 아오키 도지사. 야쿠자와의 유착에 살인 교사 혐의까지, 각종 범죄에 연루되었으면서 보석으로 풀려난 뻔뻔한 전과자. 알아보자마자 바로 멱살을 잡아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런 처지인데 도로변에서 사람을 기다리라니. 이전의 마사토였더라면 진작에 역정을 냈을 것이다.

'경금반점까지 가려면 휠체어로는 힘들어요. 쵸우한테 나와달라고 부탁해야죠'

하지만 이치반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게다가 원인을 따지자면 색다른 걸 먹고 싶다고 투정을 부린 자신이 문제였다. 무엇보다,

"옛날 생각 나지 않슴까, 도련님"

불쑥, 이치반이 입을 열었다.

"뭐가 말이야"

"학교 끝나고 나서요. 이렇게 서서 조의 차를 기다리곤 했잖슴까. 저랑, 도련님이랑"

"옛날 이야기는 꺼내지 마라. 별로 떠올리고 싶은 기분 아니니까"

"아, 옙. 죄송합니다. 그래도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까, 이런 생각도 들더라고요"

이치반은 크게 숨을 들이키고, 하늘을 올려다 봤다. 어수선한 이진쵸, 그것도 복잡하기로 소문난 헝빙류만의 노을진 하늘을 바라보며.

"도련님이 살아계셔서 다행이다, 라고"

이런 반병신으로 살아남았는데 말이냐, 라고. 마사토는 대꾸하지 않았다. 하반신 마비, 예후 불투명. 휠체어에서 벗어나려고 한 번 죽기까지 했는데, 결국 도로 돌아오게 되었다. 법원에서도 이 상태 때문에 도주 위험은 없다고 판단했을 정도다. 재산도, 지위도, 건강도 모두 잃고, 어쩌면 처음 스타트 라인보다 더 밑에서 시작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질 나쁜 농담보다 비참한 결말이었다.

하지만 도저히, 그런 식으로 말을 할 수는 없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이치의 표정을 보고는, 도저히.

"뭔가 바쁜가보네~ 나중에 다시 올까?"

이치반과 마사토는 류만의 안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쵸우가 느긋하게 걸어오며 손을 흔들었다.

"오우, 쵸우! 잘 지내고 있었어?"

"그건 이 쪽이 할 소리지. 그쪽의 역병신은 아직도 붙어있어? 한 번 액땜하러 가 보는 게 좋다고 생각해~ 신사든 절이든"

누가 역병신이냐. 마사토는 다시 대꾸하려던 걸 꾹 참았다.

"역병신 아니라니까! 그냥 요구사항이 많은 응석받이 도련님이라고"

"넌 도대체 누구 편이냐, 이치!"

역시 제일 만만한 건 이치반이었다. 입을 열기가 무섭게 날아오는 항의. 그렇다고 이치반도 옛날처럼 마냥 당하고 있지는 않았다. 입술을 쭉 내밀면서,

"예? 도련님 편인데요?"

받아쳤다. 초등학생 수준의 입씨름이었다.

"뭐, 농담은 이쯤 해 둘까"

쵸우는 두 사람을 쳐다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나도 남말할 처지는 아니니까"

마부치를 떠올리고 있었다. 누구나 꼬여버린, 마이너스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끊어버릴 수 없는 관계가 있게 마련이었다. 언젠가는 알아주겠지, 하고 완전히 포기할 수 없는 관계.

좋게 끝나지 않을 걸 알면서도, 놓지 못하는 관계.

"너는... 아니지"

이치반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마부치와 쵸우의 관계는 이미 끝났다. 마부치의 돌이킬 수 없는 행동으로 인해서, '라오마'와의 관계를 완전히 끝내버리기로 정했다.

결국 놓지 못한 자신과는 다르다고,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비슷하지. 카스가 군은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만 빼면 말이야"

결국 완전히 끊어내지는 못했다, 라는 게 쵸우의 생각이었다. 살아있으면 어딘가에서 다시 만날 수 있겠지. 막연한 희망을 보면서 마부치를 보내줬다. 그럴 일은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자신에게 있어서 카스가 이치반이라는 인간은 직시하기에는 조금 눈부신 존재였다. 하고 싶은 말은 망설임 없이 말하고, 그러면서도 상대방의 감정에는 세심하게 반응해 줄 수 있는 사람. 밑바닥에서도 항상 위를 쳐다보는 사람.

자신도 그렇게 행동했다면, 마부치와 결별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텐데. 가끔씩 그렇게 생각하곤 했다. 지나간 일은 어쩔 도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앉아있는 마사토를 보고, 쵸우는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잘 대해줘, 진심이야. 기껏 얻은 마지막 기회잖아. 소중하게 써야지"

한 마디 볼멘 소리나 쏘아붙여줄까, 하다가 그만 뒀다. 마사토 역시 생각하는 바는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대답은, 해 줬다. 퉁명스레 내뱉긴 했지만.

"알아"

"진짜로오?"

씨익 웃으면서, 쵸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시늉을 했다. 어떤 눈을 하고 있었는가, 선글라스 뒤에 숨겨놓고 보여주지는 않았다.

"뭐, 그건 됐고. 오늘은 무슨 일로 찾아온거더라?"

"부탁해! 내게 카레 만드는 법을 전수해줘!"

이치반이 기세 좋게 합장하며 고개를 숙였다. 쵸우는 곤란한 표정으로 빙긋 웃었다.

"그런 거,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금방이잖아. 천 개의 레시피라던가 말이지이"

"도련님이 제대로 된 카레를 먹고 싶다길래, 그렇다면 쵸우한테 물어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거든"

"역시나 또 도련님의 생떼에 휘말린 거였구나. 그건 그렇고 내 전문, 중화요리인데 말이지~ 카레 정도야 어렵진 않지만"

그렇게 말하며, 쵸우는 슬쩍 마사토가 있는 곳으로 눈을 돌렸다. 역시나 또는 뭐냐, 역시나 또는. 마사토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쵸우를 노려보다가, 화들짝 시선을 돌렸다. 

여전한 성미인 걸 확인하고는, 이번에는 이치반을 돌아봤다. 걱정스럽게 마사토를 바라보다가, 쵸우의 시선을 느끼고 돌아보며 말했다. "응? 뭔데?" 순한 강아지 같은 눈망울이었다.

아하. 쵸우는 왜 이치반이 도련님을 데리고서, 굳이 먼 이진쵸까지 온 건지 대강은 짐작할 수 있었다. 알면서 한 행동인가, 자기도 모르게 한 행동인가. 뭐, 어느 쪽이라도 상관은 없지만.

"그럼, 재료랑 만드는 법 알려줄게. 그리고 재료 살 곳도. 대출혈 서비스~"

"그런 것도 알려주겠다고? 역시 쵸우야! 무슨 비장의 식재료라던가, 암시장이라던가. 그런 걸 알려주게?"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구~"

그리고, 쵸우는 다시 마사토를 쳐다봤다. 잔뜩 의심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도련님을.

"그냥, 사소한 조미료랄까..."


"왜 굳이 이진쵸 끝까지 재료를 사러가지 않으면 안 되는 거냐. 그냥 동네 슈퍼면 될 것 아냐. 그 수상한 녀석..."

"쵸우가 한 말이니까 뭔가 있겠죠. 그 녀석, 요리에 진심이거든요"

"네 녀석은 사람을 너무 잘 믿어..."

탈탈탈. 가느다란 바퀴살들이 턱을 하나 넘을 때마다 경쾌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이치반은 에코백을 움켜쥔 마사토의 휠체어를 밀며, 요코하마 해안 공원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시간은 초저녁. 저 바다 건너편의 대관람차에 화려한 조명이 들어오고, 우아한 서양식 조형의 가로등에 따스한 불빛이 켜졌다. 아름답기로는 그럭저럭 인지도가 있는 요코하마 항만의 야경이었다. 반짝반짝 보석처럼 조명등을 매단 여객선 쪽에서, 뱃고동 소리가 아스라이 울려퍼졌다. 뚜우, 뚜우.

"바닷바람, 차진 않으세요? 도련님"

"이런 정도로 추워할 만큼 허약해지지는 않았어. 네 걱정이나 해라"

사실은 약간 추웠지만, 마사토는 객기를 부렸다. 반쯤 진심이긴 했다. 온 몸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던 옛날이라면 모를까, 하반신만 빼고 다 멀쩡한 지금은 나름대로 견딜만 했기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 이치 앞에서 약한 소리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 이런 분위기 속에서는 더욱.

길을 오가는 사람은 적었고, 사방에 설치된 스피커에서는 느긋한 클래식 음악이 재생되고 있었다. 탈탈탈.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를 지날 때마다 시야가 밝아졌다, 어두워졌다를 반복했다. 마사토는 천천히 지나가는 개화기풍의 건물을 감상하다, 가로등의 불빛 속에 비친 그림자를 봤다. 이치반의 길고 큰 그림자, 그리고 왜소하게 휠체어에 웅크리고 앉은 자신.

이런 시간까지 시중이나 들고. 문득 마사토는 울컥, 짜증이 치솟았다.

"너, 왜 아직까지 날 도련님이라고 부르는거냐"

"예? 뭡니까 갑자기. 약간 센티멘탈한 기분이라도 드셨슴까?"

"아버지도 죽었고... 아니지, 진짜 아버지는 구류돼 있지. 아무튼, 너도 이제는 일반인이다. 그럼 아무렇게나 불러도 되는 거 아니야. 왜 아직도 도련님이라고 부르면서 따라다니는 거냐"

탈탈탈. 굴러가던 바퀴소리가 돌연 멈췄다. 횡단보도였다. 신호등은 붉게 빛나고 있었다.

바닷바람 소리가 매서웠다.

"글쎄요"

이치반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돌아가신 어르신의 부탁도 있고, 코인 락커 앞에서 나눈 이야기도 있고. 그런 말까지 해서 도련님을 살게 만들었으니까. 그럼 책임을 지고 마지막까지 지켜봐 드려야 하지 않겠나, 하고"

책임. 마사토는 멀거니 신호등을 올려다봤다.

그게 다인가.

"그리고 말씀드렸잖아요. 도련님은 제 가족이나 다름없다고. 세상에 단 둘 남은 형제같은 거고"

대꾸하지는 않았다. 멍하니, 멈춰선 사람 모양의 픽토그램을 쳐다봤다.

"그리고, 도련님은 제,"

멍한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반짝, 신호가 푸른색으로 바뀌었다.

탈탈탈. 다시 휠체어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굴러서, 굴러서, 횡단보도를 건너갔다. 아무 일 없이, 평탄하게.

"제, 뭔데"

대답대신 이치반은 헤헤, 웃었다.

그런 소리로 웃지 마라. 마사토는 에코백을 그러쥐었다. 잘 알 수 없는 기분이 되니까.

"도련님은, 머리 좋으시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아시겠죠. 장난스럽게,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고 싶었지만, 더 이상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치반은 우는 건지, 웃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바다 쪽을 바라봤다. 적어도, 마주 걸어오는 행인에게 그 꼴을 보이고 싶지는 않아서.

"놀리는 거냐"

머리는 네가 훨씬 좋으면서. 마사토는 가까스로 입 밖까지 나오려던 말을 삼켰다.

모를 리가 없었다.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밑바닥에서 기어올라, 마치 부모라도 되는 양 설교까지 늘어놓고, 결국은 자신을 납득하게 만들었다.

어릴 적부터 그랬다. 언제나 바보같은 짓만 하는 주제에, 한 번 마음먹은 일이 있으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릴 줄 알았다. 그럴 때의 이치는 누구보다 똑똑했다. 그 시절에는 그저 요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알 수 있었다.

지혜라는 건 가방끈의 길이로 잴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 그리고 이 녀석은 자신에게 너무 과분한 선물이었다는 것을.

이치는 대단한 녀석이야.

몇 번이나 떠올렸는지 모른다. 그래도, 도저히 그런 말은 하기 싫었다. 그러면 자신이 너무 비참해지니까. 너무 한심하고, 모자라서, 이치의 곁에 있는 걸 견딜 수 없게 될 테니까.

이치가 없는 삶이란, 자신에게 무슨 가치가 있을까.

"놀린다뇨, 저는 그냥..."

"해 본 말이다, 바보이치. 동정심 때문에 붙어있는 거라면, 빨리 떠나버려. 내 태도는 변하지 않으니까"

정말 떠나버리는 게 무서운 주제에, 마사토는 그렇게 말했다. 잃는 게 두려워서 상처를 입히고, 그렇게 입힌 상처에 자신도 상처받고. 그만 둬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자신과 이치의 관계는 원래부터 그랬으니까. 이것 말고는 대화하는 방법을 모르니까.

탈탈탈.

다시, 휠체어가 멈췄다. 작은 식료품점 앞에서.

"이런 가게를 소개해 주다니 그 녀석, 믿을만한 게 맞는거냐?"

"글... 쎄요? 그런데 영화같은 거 보면, 이런 집이 맛집이잖아요"

확실히 파는 물건의 품질은 좋아보였다. "도련님은 특별히 드시고 싶은 게 있으세요?" "카레" "아니, 그거 말고" "카레" 소소한 만담이 오가며, 메모에 적힌 대로 재료를 고르기 시작했다. 고기, 버섯, 당근.

"전 안 버릴 겁니다"

갑자기 이치반이 말했다. 손에는 양파 한 알을 들고서.

"무슨 말씀하셔도 절대 안 버려요. 욕을 해도, 투정을 부려도. 약속했잖아요. 도련님이 밑바닥에서 일어날 때까지, 계속 지켜봐 드리기로"

그러면서 웃었다. 경멸도, 조롱도 섞이지 않은, 민들레처럼 눈부신 미소로.

왜 웃는거야.

이번만큼은 마사토도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어서,

"그러냐"

라고만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너무 많이 들어가잖아"

마사토가 양파를 토막내며, 눈물을 찔끔거렸다.

"이 집에 몇 명 산다고 생각하는 거냐? 두 명이다, 단 두 명. 도대체 냄비 한가득 끓여야 하는 이유가 뭐야!?"

"하지만 쵸우가 그랬는데요? 카레는 원래 이렇게 만드는 거라고"

이치반이 냄비에 카레 루를 텀벙텀벙 풀어넣으며 대꾸했다. 한 상자 더 넣어야 하나? 물의 상태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며. 카레란 건 좀 더 꾸덕한 이미지 아니던가.

"이치. 넌 내 부하냐, 아니면 그 녀석 부하냐?"

대답하기 전에, 이치반은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유 시민입니다만?"

"이치 주제에...!"

마사토는 이를 갈았다. 아까는 평생 따르겠다던 놈이.

"아, 양파 다 자르셨죠? 그럼 이리 주세요, 볶게. 다음은 이거 잘라주시구요"

그러거나 말거나. 이치반은 한참 전의 미소가 무색하게, 무심한 동작으로 당근이 든 접시를 턱 내려놓았다.

"내가 전자동 절단기인가 뭔가라도 되는 줄 알아? 이치 주제에 누굴 부려먹는거야!"

"무슨 말씀이세요 도련님. 이거 도련님 식사잖아요? 도련님 위에 있는 건 도련님밖에 없잖슴까? 그러니까 도련님의 식사를 만들 수 있는 건 도련님밖에 없다..."

"궤변 늘어놓지 마라, 바보이치! 어떻게 자르면 된다고?"

"깍둑썰기라고 적혀있슴다"

"좋아, 앞으로는 필요한 정보만 말해라, 쓸데없는 소리 말고"

통, 통, 통. 칼날이 도마를 두드리는 경쾌한 소리. 투덜거린 것 치고, 마사토는 꽤 정성을 들여 자르고 있었다. 그야 자신의 입에 들어갈 음식이라서이기도 하지만.

"카레란 거요, 꼭 저랑 제 친구들 같아요"

갑자기 양파를 볶던 이치가 입을 열었다. 후라이팬에서는 양파가 구워질 때 나는 특유의 단 냄새가 풍겨왔다. 치이이익.

"갑자기 무슨 소리야"

마사토는 돌아보지도 않고, 당근을 깍둑썰며 대꾸했다. 통, 통, 통.

"오만가지 재료가 다 들어가잖아요? 그런데 완성하면 하나의 요리가 된단 말이죠"

치이이익.

"그게 너희들과 무슨 상관인데"

통, 통, 통.

"그렇지 않아요? 여러가지 사연이 있는 녀석들이 모여서 다 친구가 됐잖아요. 카레처럼"

치이이익.

"식상한 비유군"

탁.

정확히, 일정한 크기로 당근을 다 썰어놓았다. 마사토는 산더미처럼 남은 자투리를 그대로 음식 쓰레기 봉투에 쑤셔넣으며, 이치반을 돌아봤다.

"나는?"

"도련님도 동료죠"

"꽤나 쉽게 말하는데, 이유가 뭐야"

"별 거 있나요? 같이 카레 만들고 있잖아요"

이치반답다면 이치반다운, 단순한 이유였다. 하지만 마사토는 그런 대답을 듣고싶은 게 아니었다.

너에게 있어 나는 그냥 동료인가?

스스로도, 염치가 없는 질문인 건 알았다. 그래서 가만히 이치를 쳐다보기만 했다. 혹시 다른 대답을 말할까 싶어서. 헛된 기대라는 걸 알면서도.

갈색으로 곱게 구워진 양파를 냄비에 넣으며, 이치반이 어색한 동작으로 돌아봤다.

눈이 맞았다.

그러기가 무섭게, 두 사람은 잽싸게 고개를 돌렸다. 이치반은 번개처럼 당근 접시를 집고, 마사토는 소리보다 빠르게 쓰레기 봉투를 꺼냈다.

"버리러 갔다온다"

"다녀옵셔"

그리고 마사토는 얼굴이 벌개진 이치반을 놔두고 신속하게, 도망갔다. 탈탈탈.


"하나만 묻자, 이치"

황금빛 카레. 놀라우리만치 이상적인 카레의 형태. 그것도 두 요리 초보자들의 손에서 만들어진.

마사토는 카레 접시를 앞에 두고 요모조모 뜯어보며 말했다.

"예, 말씀하십셔"

이치반은 한 팔을 턱에 괴고, 숟가락으로 카레를 쿡쿡 찌르면서 대답했다. 이건, 말하자면 아다치와 화과자에 대한 대화를 나눌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너무 완벽해서 손대기 망설여지는, 그런 느낌.

"네 동료들하고 카레 만들어 먹은 적 있어?"

이치반이 고개를 들고, 게슴츠레한 눈으로 마사토를 쳐다봤다.

"도련님"

"뭐"

"그건 너무 속이... 보이는 질문 아님까?"

마사토는 대답 대신 안경을 빼어 괜히 닦는 척을 했다. 그리고 목소리만은 당당하게 대꾸했다.

"그래서, 먹은 적 있어, 없어"

먹었는데요. 라고 대답하려다, 이치반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아무튼, 어떤 형태라도 독점욕을 보여준 것은 기뻤기 때문에. 그리고 응석도 가끔씩은 괜찮으니까.

사에코가 알면 신나게 쪼아대겠지. 이치반은 한숨을 푹 쉬고, 대답했다.

"없슴다"

"그러냐"

사실, 마사토는 어떤 대답이라도 좋았다. 아무튼 둘이서 카레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기 때문에. 뿌듯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실룩이는 도련님을 보며, 이치반은 픽 웃고 말했다.

"그럼, 먹을까요"

"그래, 이 완벽한 형태를 무너뜨리는 건 좀 아깝지만"

"아, 저도 그 생각 했는데"

"뭐야, 너도냐? 하여튼"

"잘 먹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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