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건 다니엘 카펠 평전
19세기를 앞둔 여름날이었다. 촘촘히 산재한 공장의 열기 때문인지 낮은 나날이 더워지기만 했다. 그리고 잉글랜드 사우스요크셔, 셰필드의 중심가로부터 2마일쯤 떨어진 곳, 더위가 사그라들기 시작하는 이른 밤을 틈탄 19시 14분, 린치 부부는 첫 번째 자식을 얻었다. 첫 아이에게 자신의 이름을 주겠다 호언장담했던 에이드리언 다니엘 린치는 그 약속대로 아이의 이름을 다니엘 린치라 지었다. 마지막으로 스칼렛 린치가 애정을 담아 테건이라 부르며 테건 다니엘 린치가 탄생했다.
린치 부부는 공동명의로 철강 사업을 운영했고, 이 시대에 철강이란 단 한 번도 정체기를 겪지 않았으며 오히려 날이 갈수록 호황을 거듭했다. 부부는 중요한 사안이라면 모두 직접 처리한다는 철칙이 있었으므로, 결국 둘 중 누구도 갓 태어난 어린아이에게 시간을 오래 쏟을 수 없었다. 테건이 기어 다니지도 못했을 때는 유모가, 갓 걸어 다닐 때부터 제법 뛰어다닐 수 있게 되었을 때까지는 메이드들이 가장 긴 시간을 함께했다. 그 사이에 태어난 테건의 남동생, 코너 스칼렛 린치 또한 테건과 똑같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3살 어린 코너가 타고난 행운이 있다면, 비슷하게 놀 수 있는 상대인 테건이 있었다는 점뿐이었다. 그나마도 테건이 9살이 됨과 동시에 린치 부부가 고용한 가정교사들에게 박탈되었고, 그 자신도 3년 후에 똑같은 과정을 밟았다. 집안에는 딱딱한 엄격함도, 한가득 품을 사랑도 없었으며 그저 삭막한 공기 틈에 작은 종이 부스러기가 떠다니기만 했다.
린치 부부가 두 자녀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들은 자녀가 낸 성과만을 가정교사의 보고를 통해 볼 수 있었음에도, 그 과정에서 힘을 잃고 쓰러지지 않도록 지지하는 의미에서 원하는 일은 전부 할 수 있도록 조용히 도왔다. 아이들이 모두 좋은 사람으로 자라길 바란 탓이었다. 그러나 이는 명백한 욕심이었고, 린치 부부는 그 사실을 몰랐다. 그저 둘 다 엇나감 없이 잘 지내는 데에 만족했으며 가끔 테건이나 코너가 먼저 요청하는 것이 있다면 기뻐했다. 한편 테건은 매번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개인 시간을 바랐다. 그 기류를 눈치채지도 못하고, 궁금해하지도 않은 일은 분명한 잘못이며 비극의 출발이었다.
겨우 열 살을 넘긴 시기의 테건은 예의 바르고 얌전하며 소위 쓸데없다고 여겨지는 것에 시간을 쏟지 않았다. 따라서 특별히 소개할만한 일화가 없다. 어떤 위인전을 펼치든 유년기에 대단한 통찰력을 발휘하거나 흔히 겪을 수 없는 난관을 헤쳐나온 일 하나쯤은 적혀 있지만, 테건의 사례는 이 시대 영국의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난 이라면 얼마든지 공감할 수 있을법한 일이었다. 이 무렵 테건이 친척과 부모님의 손님에게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어른스럽다’였다. 가정교사들에게는 속 썩이지 않는 학생이었으며, 집안의 사용인들도 테건이 부탁하는 일은 고용주인 린치 부부 몰래 들어주기도 했다. 그는 주변 모든 어른에게 신뢰받았다. 그러나 이런 결과를 위해 테건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지는 그중 단 한 사람도 알지 못했다. 몇 년이 지나도 마찬가지였다. 언질도 없이 자리를 비우더라도 서로 봤는지 물어보기만 할 뿐, 금방 돌아오리라 믿고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테건이 대학에 입학한 열아홉, 어떤 남학생의 턱을 주먹으로 시원하게 갈겼다는 소식을 누구도 믿지 않았다.
테건은 상대가 입학 초부터 자신을 끊임없이 모욕했으며, 자신은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직접 치러주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대학은 당연하게도 남학생의 손을 들어주며 테건에게는 징계 처분을 내렸다. 이 일로 린치 가족은 발칵 뒤집혔다. 그리고 에이드리언 린치는 부당함을 바로잡기로 했다. 총장에게 긴 서신을 보내고, 스칼렛 린치와 함께 법적으로 해결할 방법은 없을지 고민해보며 법률 변호사를 한 명 더 기용했다. 결국 대학은 법정 명령으로 징계 처분을 철회했다. 남학생은 도리어 정학당했다. 테건에게는 이 사건이 간단한 교훈으로 남았다. 누구나 우러러볼 만한 권위라면 해결 못 하고 쩔쩔맬 문제란 없겠구나. 지금껏 삶이 힘들었던 이유는 내게 어떠한 권위도 없었기 때문이구나. 떠밀려 입학한 대학에서의 공부에 처음으로 흥미가 생기는 순간이었다. 그 이래로 테건은 주변의 신뢰를 사기 위해 들인 것보다 수십 배는 큰 노력을 쏟아부어 권위를 얻으려 했다. 세상에서 받아들이는 권위의 종류는 다양했지만 가장 붙잡기 쉬운 것은 재력이었다. 테건의 부모님은 꽤 이름 있는 철강 사업의 소유주였고, 잘 배우기만 한다면 벼랑 끝에 몰려 무너질 일은 없어 보였다. 한편 린치 부부는 갑작스레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의지로 빛나는 테건의 눈이 마음에 들면서도 불안을 억누르지 못했다. 그러나 설명했듯이 그들은 자녀가 멈추게 하는 방법을 몰랐다. 오직 멈추지 않도록 주변을 조작해주기만 했지, 그 조작을 뒤바꾸어 멈추려는 시도는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이 상태를 멈추고 싶다는 소망이나, 그래야겠다는 걱정 또한 없었다. 대신 지금이야말로 그에게 가장 좋은 기회는 아닐지 끊임없이 고찰했다. 바로 앞에 버젓이 놓인 기회를 걷어찰 동작조차 취하지 않는 부모 덕분에, 테건은 끝없는 공급에 힘입어 자신을 정제해갔다. 무엇이 권위를 만드는지, 그리고 권위가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돋보이는지에 파고들었다. 그 과정에서 3년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뒤처지게 된 코너가 시기를 일삼았음에도 테건에게 그 훼방은 유성 옆을 스치는 작은 티끌에 불과한 수준이었다.
그래서인지 코너의 시기는 매해 여름의 더위처럼 나날이 정도가 더해지기만 했다. 부모의 추진을 감각 없이 얻을 만큼 신뢰받고, 그 추진을 단 한 치도 낭비하지 않고 이용할 만큼 유능한 자신의 손위 형제가 너무도 빛나보이고 부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음이 분명했다. 결국 코너는 테건에게 이런 마음을 털어놓았다. “그 잘난 능력이 어쩌다가 네게만 갔는지는 몰라도, 나는 절대 네 편에 서서 도움 따위를 건네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단절을 선언했다. 그러나 테건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기에, 코너는 자기 자신을 벼랑 끝에 몰아넣었으며, 그보다 겨우 한 발짝 안에 선 테건을 질투할 이유가 없었다. 기회는 공정하고 평등하게 주어졌고, 그걸 보지 못하는 사람은 코너뿐이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둔하다는 의미의 말만을 남기고 무시했다.
그 이후로 코너는 제대로 방해하지는 못해도, 테건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존재 정도는 되었다. 적어도 테건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는 그랬다. 졸업 직후 LS 철강에서 경영상 결정권을 일부 가지게 되면서 하루 중 많은 시간을 사무실에서 보내게 되자, 둘이 부딪히는 시간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리고 그래서도 안 됐다. 테건은 일을 하고 배우느라 아주 바빴고, 도움과 조언을 위해 스칼렛이 항상 곁에 있었기 때문에 간섭할 여지는 생길 수 없었다. 기대주인 테건의 가치는 코너를 포함한 누구보다도 높았고, 매일 끝을 모르는 듯 높아져만 갔다. 그를 방해했다가는 방해꾼이 누구이든지 소송이 걸릴지도 몰랐다. 결국 테건과 코너는 완전히 단절되었고, 감정이 풀릴 일은 요원해졌다. 테건은 스칼렛이 은퇴하려고 할 때쯤 촘촘히 짠 경영 계획서와 로드맵으로 금전적인 지원을 받아 호텔을 지었다. 그리고 코너에게 LS 철강에서 자기가 앉아 있던 자리를 넘길 준비를 했다. 둘 사이에는 여전히 업무 외의 대화가 없었고, 따라서 테건은 코너가 숙부인 데일 알더스 린치와 결탁했다는 사실은 눈치채지 못한 상태였다. 몇 년이 지나고 호텔이 완공되었을 때에서야 코너는 그동안 묻어왔던 계획을 이행했다. 그 낌새를 알아낸 에이드리언이 배달부에게 돈을 쥐여주고 중간에 가로챈 편지가 테건 앞으로 도착했다. 호텔 개업을 무산시키고, 실패한다면 영업을 적극적으로 방해하겠다는 내용이 적힌 편지는 테건이 처음으로 맞닥뜨린 유의미한 위기였다. 테건은 어느 파티에서 전략적으로 제레미 알렉산더 카펠을 만났고, 서로의 상황을 처음으로 확인한 척 연애 결혼을 약속했다. 테건의 목적은 상원의원직까지 달고 있는 세습 귀족을 등에 업어서 코너나 데일의 수작질을 예방하는 것, 단 하나였다. 그리고 제레미에게도 누군가의 끝없어 보이는 재력으로 정말 몰락할지도 모르는 자기 집안을 복구시킨다는 목적이 있었다. 연애와 약혼과 결혼은 둘의 이해관계가 정확히 맞물리면서 일어난 결과였다.
제레미는 세습 작위와 과거의 도박중독을 제외하면 특별한 것 없는 사람이었다. 테건을 만난 시점에서는 도박도 완전히 그만두었고, 이전의 잘못 때문인지 매사에 자신감이 떨어지고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점을 제외하면 성격 문제도 없었다. 다만 도박중독으로 인해 파혼당한 사실은 결혼을 계획하는 데에 문제가 되었다. 일부러 연애 기간을 가지는 것처럼 보인 이유이기도 했다. 이 기간에 사교계에는 관련한 소문이 몇 가지 돌았다. 다른 일에도 신경을 쓰느라 바쁠 양반들이 어째서 이 기묘한 두 인물의 사랑 이야기에 이렇게까지 관심을 기울였는지는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우선은 테건이 사교계에 발을 잘 들이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고, 다른 세습 귀족에 맞먹는 자산가 집안 출신이면서 흔하지 않은 모습을 하고 다닌 것이 컸다. 그는 당시에 남성적인, 또는 남성만의 전유물이라고 알려진 의복과 취미를 당당하게 내보였다. 처음부터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는 의미다.
그리고 두 번째로 그저 연애를 가장하는 것이 아닌 실제로 연애를 하는 것으로 보이는 장면이 몇 번 목격되었다. 대체 어떤 행각이 ‘그렇게 보이는’지는 사람마다 해석이 다르므로 굳이 서술하지 않겠다. 마지막으로 제레미가 일가친척들에게 정식으로 테건을 소개했다. 그 반응이 어땠는지 또한 소문의 탈을 쓴 비난으로 긴 수명을 이어나갔다. 제레미는 크게 불안해했고, 테건은 두 의붓자식과 시간을 보내며 카펠 일가에 좋은 이미지와 신뢰를 심으려 노력했다. 어려서부터 잘했던 일인 만큼 진행은 더디지 않았다. 가장된 연애를 시작한 지 1년이 막 지나갈 무렵부터 테건은 카펠 일가와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까지 발전했다. 말솜씨는 부드러웠고 서체는 찍어낸 듯 일정하면서 강단 있었다.
경영자로서의 경험을 쌓으면서 테건이 신뢰를 쌓는 방법은 물론,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방법까지 완벽하리만큼 터득한 덕분이었다. 결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꽤 길게 웅성거리던 소문은 약혼 소식과 함께 완전히 사라졌으며, 자질이나 계략에 대한 음해는 진정으로 가족을 생각하는 듯 보이는 모습으로 인해 물러났다. 푸른색 드레스를 입고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테건의 모습에서는 진정한 행복이 느껴졌다. 신문의 지방소식란으로 일련의 과정을 접한 몇몇 사람은 이 이야기에 매료되어 연애 결혼을 꿈꾸기도 했다. 그러나 테건이 배우자로서, 그리고 어머니로서는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점은 끝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테건은 자신이 가정에서 배웠던 대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다만 직접 겪었던 방침과는 다르게 각자가 원하는 만큼 쉴 수 있게 해주었다. 당장 하고 싶지 않다면 미루어도 됐다. 하기 싫다면 안 해도 상관없었다. 그는 누구에게든 계기가 필요하다고 굳게 믿었고, 제레미는 곁에서 테건의 의견에 동조했다. 그나마 제레미는 의회에 출석하고 남는 시간, 혹은 주말에 두 아이와 함께했다. 그러니까 아멜리아 카펠과 로버트 제레미 카펠은 엄격한 어머니, 가정적인 아버지 사이에서 성장했다. 둘의 유년기는 힘겹지도 않았고, 모든 요소가 각자의 속도에 맞추어져 있었다. 거기에 어머니의 직접적인 관심만 더해졌다면 의심할 여지 없는 행복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행복의 한 조각을 테건이 채워주지 못했다고 하여 비난할 이유가 없다. 그 환경을 조성한 장본인이 테건이었고, 두 자녀는 실제로 주어진 시간을 부담 없이 자유롭게 만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아이들은 서로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성장해갔다. 각자 원하는 것을 찾아내려 노력했고, 점차 안정되고 있는 테건의 호텔 수익과 LS 철강 임원에게 지급되는 월급은 아이들이 얼마나 오래, 그리고 얼마나 많이 방황하든 모두 포용할 수 있었다. 테건은 아이들에게 자유만큼은 확실하게 쥐여주었음을 기쁘게 생각했다. 한편 정서적인 면은 제레미가 신경 쓰고 있으니 깊게 관여하려 하지 않았다. 두 아이가 10대 중반이 되었을 때, “아멜리아는 다양한 분야를 조금씩 손대 보다가 테건이 하는 일에 흥미를 느꼈고, 로버트는 어떤 분야에 관심을 가진다기보다는 인생 자체를 즐기려는 듯 보였다”라고, 제레미가 알려 왔다.
평화는 아주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그 무렵 네펠리온 호텔은 코너와 데일의 마수에서 완전히 벗어났고, 코너는 테건을 끌어내리는 일을 완전히 포기하고 LS 철강을 어떻게든 더 크게 키우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로버트는 기숙학교에 들어갔다. 연령을 따지면 입학 시기가 좀 늦긴 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간혹 보내오는 편지로는 사고 없이 잘 지내는 것처럼 보였다. 한편 아멜리아는 테건 곁에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가정교사가 맡는 수업 시간을 제외하면 테건을 쫓아다니며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물었다. 어쩌면 아멜리아는 테건이 나타나기 전에 집안 사정이 어떠했는지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테건을 향한 첫인상이 어떠했든, 아멜리아의 흥미와 열정만큼은 진심이었다. 결국 테건은 아멜리아의 끈기를 당해내지 못하고 곁에서 사소한 문서 정리나 장부 읽는 법 정도는 배울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고 아멜리아는 과거에 테건이 그랬듯이 서서히 신뢰를 쌓았다. 비극적인 일이다. 피가 이어지지 않는데도 두 사람은 많이 닮아 있었다. 아멜리아는 개인적인 관심만 있다면 배우는 속도가 빨랐고, 이윽고 검토 정도는 도움 없이도 틀리는 부분 없이 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즈음에 에이드리언 린치가 세상을 떴다. 테건은 상실을 채 떨치기도 전인 장례식 당일부터 LS 철강에서 임시로 보내오는 서류들을 처리해야 했고, 이전보다 바빠지며 더는 아멜리아를 신경 써줄 수가 없었다. 아멜리아는 어른스럽게도 그를 이해했다. 그리고 다시 주목받기를 기다렸다.
어떤 면에서 아멜리아는 테건과 완전히 똑같은 길을 걸었다고 설명할 수 있겠다. 세대를 넘기는 일이 미숙한 것을 테건의 잘못이라고 말하지는 못하지만, 그 미숙함이 다시 전해지지 못하게 막지 않은 일은 잘못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종류의 방임이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님을 직접 겪었음에도 개선하려 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그래도 아멜리아는 언젠가 에이드리언 린치와 스칼렛 린치가 테건이나 코너에게 바랐던 것보다도 훨씬 좋은 사람으로 성장했다. 제레미로부터 사회의 많은 것들을 전해 듣고 배웠기 때문이었다. 반면 누구의 영향도 명확히 받지 못하고 상대적으로 열악한 환경에, 단지 시대상 보편적이라는 이유로 내던져진 로버트는 그러지 못했다.
로버트는 그 시대의 흔한 상류 계급 남학생처럼 지냈다. 라틴어를 배웠고, 지루한 얼굴로 시나 희곡을 읽었고, 종교가 반쯤 섞인 과학을 별생각 없이 받아들였다. 몰려다니는 무리에서는 의견을 이끌어나가면서도 흥미 없는 일에는 철저히 무관심했다. 취침 시각을 앞두고 룸메이트들이 길에서 본 아가씨 이야기를 하며 첫눈에 반했다느니, 사랑이라느니 떠들어댈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시선을 천장에 고정하고 손가락을 까닥이며 10개가 맞는지 개수나 세었다. 그리고 부모님 이야기가 나오면 적당히 끼어들고는 했다. 꼭 다른 사람들도 자기와 같은 일을 겪고 있는지 확인하려는 듯한 태도였다. 그렇게 로버트는 자기 같은 경우가 흔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학기가 끝날 때마다 집으로 돌아왔지만 그럴 때마다 테건은 물론이고 제레미와 시간을 보내는 일도 점점 줄어들었다. 그나마 아멜리아와는 가끔 장난을 쳤고, 제레미가 먼저 다가오면 받아주었기 때문에 가족과 완전히 단절되지는 않은 채였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테건이 날이 갈수록 바빠진 것은 아주 치명적이었다. 로버트는 경쟁적으로 테건의 관심을 갈구했다. 그리고 보답받지 못한 욕구는 언젠가 누구에게도 좋지 않은 결과를 낳을 터였다. 그 서장은 정말이지 눈에 띄지도 않는 사소한 사건 하나였다.
드물긴 하지만 테건이 호텔 업무로 며칠간 집을 비우는 시기가 있었다. 보통 일주일보다 짧았으나, 이때는 “호텔을 임시로 닫고 내부 인테리어 교체와 함께 직원 충원, 내부 감사까지 할 예정이라 평소보다 오래 런던에 있을 것”이라 명확한 언질을 주고 갈 정도였다. 문제는 테건이 잠시 떠나고 불과 이틀째 되는 날에 일어났다. 그 당일에도 카펠 저택은 평온을 누리고 있었다. 제레미는 의회 출석 후 돌아와 남들보다 늦은 점심 식사를 들었고, 아멜리아는 약혼자인 잉그리드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나가 다음날 돌아올 예정이었으며, 사용인들은 충실하게 일과 업무를 보았다. 각자 자기 할 일을 하느라 여념이 없는 모습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그중 단 두 명, 초조하게 시간을 셈하는 사람이 있었다. 특히 로버트는 일을 맡겼던 시종을 부르고 손톱 끝을 잘근잘근 씹으며 기다리다가 노크 소리가 나자 성급하게 일어서며 의자를 넘어뜨리기까지 했다. 고용된 지 얼마 안 된 젊은 시종은 우당탕하는 소리에 당황한 기색을 미처 숨기지 못한 채로 로버트의 지시대로 테건의 빈 집무실에 숨어 들어가 필사한 장부의 일부분을 건넸다. 종잇장들을 낚아채어 거칠게 넘긴 로버트는, 시종의 표정은 신경조차 쓰지 않고 매우 기뻐하며 금화를 몇 닢 쥐여주었다. 그리고 시종이 깊게 절하며 방을 나서고, 그 발걸음 소리가 멀어진 지도 한참이 지난 후에야 실성한 듯 웃고는 장부를 꼼꼼히 읽어내려갔다. 로버트는 바로 이런 순간을 위해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공부를 해왔다. 당장 결실이 드러나지는 않더라도 이 작고 비밀스러운 정보마저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큰 도움이 되리라 믿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이틀 후에도, 나흘 뒤에도, 로버트는 그 젊은 시종을 시켜 장부 필사본을 조금씩 가져오도록 했다. 방에는 정돈되지 않은 메모로 가득한 지저분한 표들이 간단한 제본 처리도 받지 못하고 쌓여갔다. 그러나 누구도 로버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랐고, 저택 안에 이 일을 아는 이 또한 심부름했던 시종을 제외하고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테건이 돌아와서도 눈치채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테건이 문학을 읽기 시작한 것은 문제가 일어나기 시작한 날과 비슷한 시기였다. 읽지 않는다고 해서 삶이 유의미하게 나빠질 일은 없었지만, 추천을 받았으니 그에 걸맞은 성의 정도는 보여주기 위한 독서였다. 그의 주변에는 부르주아이든 프롤레타리아이든 노동 계급이 많았고, 자연스레 독서 취향은 비판이나 풍자를 곁들인 사회참여소설로 굳어졌다. 표현을 보다 정확히 하자면 취향이랄 것도 없이 제목을 듣는 대로 다음 목록에 반영하는 쪽에 더욱 가까웠다. 그리고 빼곡한 줄글을 항상 무감각하게 읽어나갔기 때문에 일상에서의 변화라고는 일을 맹렬히 처리하고 독서 시간을 따로 빼내면서 생활 패턴이 약간 달라진 게 전부였다. 감수성이나 철학은 단 한 점도 바뀌지 않았다. 그러므로 테건은 남들 눈에 조금 더 바빠 보였을 뿐이었고, 그들은 실제적인 변화를 기대할 수 없었다. 가능했을 법한 변화라 하면 사회의 부조리함에 저항하거나, 정서적인 교감의 방법을 얻거나, 문학에서 관찰할 수 있는 사건을 현실에 투영하여 비아(非我)인 객체에 대한 이해 함양 정도가 있겠다. 하지만 이렇게나 다양한 가능성 중 단 하나도 현실이 되지 못했다. 한편 아멜리아는 테건이 여가를 위한 개인 시간을 어떻게든 내려고 노력 중이며, 그 여가가 독서라는 점까지 파악해냈다. 그리고 용감하게도 테건에게 “다시 이전처럼 시간을 함께 보내면 안 되겠는지” 물었다. 말을 들은 순간의 반응은 밝아 보였으나 결국 어렵겠다는 대답으로 돌아왔다. 조금 더 시간을 낼 수 있다면 가능하겠지만, 호텔이 아직 발전 단계에 있기에 누군가를 가르치면서 일까지 할 수는 없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그리고 테건과 놀라우리만큼 닮아버린 아멜리아는 그 말을 네가 부족한 것을 언제까지나 신경 써줄 수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말았다. 본래 비극의 씨앗이란 인간 주변 어디에나 심겨 있는 것이라서, 조금이라도 물을 주면 금방 싹을 틔우고 만다. 그 싹이 하늘을 모르고 자라난다면 이는 곧 비극 그 자체가 되겠으나 하루 이틀 만에 장성하지 않으므로 두고 볼 일이다. 그러나 발아는 이미 시작되었으니, 아멜리아 또한 테건에게 다가서기 위해 정도 이상으로 애쓰기 시작했다. 물론 그 결은 로버트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로버트가 테건이 구축한 환경을 움켜쥐고 품에 안고 싶어 한다면, 아멜리아는 테건의 옆에 서서 완전한 신뢰를 얻어 파트너이자 친밀한 가족으로 함께 걷기를 원했다. 그리고 한편, 제레미는 그 모습을 관조하다가 시간이 날 때마다 테건에게 조심스럽게 알렸다. 로버트의 일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아멜리아의 행동을 보고하는 것이 전부였으나, 제레미가 테건에게 제공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정보이기도 했다. 테건은 이미 로버트가 부리던 젊은 시종을 현장에서 적발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로버트는 이 사실을 몰랐다. 마치 로버트의 능력을 시험해보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테건은 가족들에게도 온갖 비밀을 감춰두었다. 비밀이란 단지 사업상 어떤 방식으로도 새어 나가서는 안 되는 기밀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속내나 앞으로의 계획까지를 일렀고, 심지어는 가계 장부도 특별한 일이 없으면 볼 일이 없도록 했다. 두 아이들에게 호텔을 굳이 견학시켜주지도 않아 아멜리아와 로버트는 런던에 들를 일이 생긴 20대 때가 되어서야 네펠리온 호텔을 처음으로 눈에 담을 수 있었다. 테건이 마침 함께한 것은 둘에게 행운이나 다름없었다. 아멜리아는 그토록 바라던 호텔 내부를 빠짐없이 둘러볼 수 있었고, 로버트는 직원들이 자리를 비운 시간대를 노려 사무공간에 비밀스럽게 발을 들여볼 수 있었다.
제레미를 포함한 네 가족이 네펠리온 호텔에 사흘간 머무르면서 일어난 일은 그리 어지럽지 않았다. 테건은 대부분의 시간을 업무에 할애했다. 밀도 높은 처리로 정해진 일과가 일찍 끝나고 나면, 그나마 가족들에게 업무와 관련된 간단한 의견을 구하거나 호텔 내부를 조용히 돌아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아침에는 식사를 함께했고, 오후에 함께 찻잔을 달각였으나 네 가족이 모두 모여 자유롭게 대화할 시간은 오직 그럴 때뿐이었다. 또한 호텔 내에서 호텔과 테건에게 누가 되지 않을만한 행동은 모두 허용되었기에 제레미와 아멜리아, 그리고 로버트는 예정된 일정 외의 모든 시간을 자유롭게 보냈다. 그 자유에는 경리 사무실에 몰래 들어갔다 나오는 일, 직원들에게 정중하게 시간을 요청하여 각자의 업무나 그 루틴에 대해 인터뷰를 하는 일, 늦은 밤까지 총지배인 근처에서 업무 환경을 구경하는 일, 파티시에에게 붙잡혀 다음 달에 나올 디저트를 한가득 시식해보는 일, 정원을 산책하면서 손님으로 온 이들과 친분을 쌓는 일, 잠시 자리를 비운 테건 대신 회계사들의 보고를 받는 일 외에도 정말 많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제레미는 일을 떠맡은 쪽에 가까웠으나 그럭저럭 만족했고, 아멜리아와 로버트 또한 각자의 목적을 달성하여 기뻐했다. 이렇게 나름대로 가족끼리의 시간을 보내는 사이에 있었던 일을 간략히 설명하자면, 아멜리아는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잉그리드 트렌치와의 약혼식을 치렀고, 카펠 가의 모두가 약혼식에 참석하여 성의와 맹세, 그리고 값어치만큼은 확실한 선물들을 트렌치 가와 주고받았다. 둘의 결혼 예정일은 1년 후였다. 이 말은 아멜리아에게 남은 시간이 1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호텔에서 무엇을 했는지 테건이 알게 되면서, 제레미를 통해 아멜리아가 결혼 이후에도 혼자 공부할 수 있도록 약속받았다. 잉그리드 트렌치가 적극적으로 찬성하며 나섰고, 그런 발언에 트렌치 가가 굳이 힘을 써서 가로막지 않은 덕이었다.
아멜리아와 잉그리드의 결혼식은 정말이지 화려함의 끝이나 다름없었다. 날씨 화창한 수요일, 하객은 지역 교회 본당을 가득히 채웠다. 본식은 종교적이고 검소했으나, 트렌치 가의 연회장은 초여름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피는 꽃을 모두 꺾고 따서 모아놓은 듯 활기 넘치는 장식으로 가득 찼다. 테건이 평소 잘 알던 요리사들을 고용하면서 축하연을 위한 음식 또한 호화스럽게 준비되었다. 트렌치 남작가의 초청으로 참석한 일부 젊은 하객들은 테건을 몰라보고 눈치를 주려는 듯 얼쩡거리다가도 제레미나 트렌치 남작, 트렌치 남작 부인이 나타나 테건을 소개하면 “몰라뵈어 죄송하다”라며 금방 위축되어 연회 속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간혹 부끄러움을 감추지 않고 자리에 남아 진정으로 사과하는 사람은 후로도 테건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 반수 이상이 네펠리온 호텔을 자주 이용하는 사람이긴 했으나, 사람을 사귀는 면에 있어서는 진심으로 보였기에, 또한 사귀어 둔다고 나쁠 것이 없었기에 테건은 사과를 받아들였다.
결혼식 자체는 군더더기 없이 진행되고 마무리되었다. 아멜리아는 특히 테건과 떨어지게 된다는 사실을 어렵게 받아들이면서도 잉그리드와 함께할 앞날을 향한 기대를 끌어안고 지극히 행복해했다. 잉그리드 트렌치는 남작가의 적자는 아니었으나 사람이 올곧았고 무엇보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배려가 몸에 밴 사람이었다. 이는 아멜리아의 높은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요소 중 하나였다. 잉그리드는 아멜리아가 확실한 기준과 명확한 신념으로 움직이는 데에 반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의 진술대로 아멜리아의 말은 단단하고 힘이 있었다. 이는 잉그리드가 항상 동경하고 원했으나 얻지 못한 것이었고, 아멜리아를 만나며 그것이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음을 절실히 깨달았다. 둘이 서로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이유는 이것이었다. 둘은 상호 보완적이었고, 상대가 가진 것을 질투하지 않았다. 서로를 인간으로 찬미하면서도 부정적인 의견 또한 내비치고 수용했다. 양가에 결혼 허락을 받으며 보인 모습이 꾸밈없이 그러했기에 둘 사이에서 걸리는 일은 없었다. 둘의 교제가 길었고, 따라서 약혼은 조만간 결혼할 예정임을 알리는 허례허식에 불과했다. 차라리 그 사실을 널리 알리려고 일부러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약혼식을 치른 것이었다. 둘은 넘치도록 행복했고, 앞으로는 그 이상의 행복을 쌓아나갈 예정이었다.
한편 로버트는 아멜리아가 없는 카펠 저택을 제 것처럼 누볐다. 아멜리아의 결혼 후 테건이 가계를 로버트에게 맡기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신이 난 상태였다. 집안에서 나름의 권력을 획득했으니 이전부터 물밑작업을 꾸준히 해 왔던 로버트에게는 이보다 더한 경사가 없었다. 그리고 쌓아두었던 계획을 단숨에 시행하기 위한 절차를 시작했다. 지금껏 카펠 가의 위세와 영지를 유지하는 데에 필요했던 비용은 어떻게든 줄이고, 저택에서 일하는 인원은 최대한 적게 고용하기 위해, 최소한의 집안 유지에 필요한 일과 고용인들이 맡는 업무들을 세세히 알아보았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겉에서 보기에 그저 로버트가 맡은 일에 충실한 정도로만 비추어졌다.
그렇게 3년여간, 집안은 테건이 굳이 손을 대지 않아도 꽤 잘 굴러가는 듯 보였다. 그리고 [ ]의 문학회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테건은 초청장을 받아든 직후부터 눈에 띄게 즐거워 보였다. [ ]은 테건이 최근 들어 즐겁게 읽은 작가 중 하나였고, 카펠 가의 모두가 그 작가를 알았다. 테건이 재미있다길래 함께 읽었다가 [ ]의 작품을 덩달아 좋아하게 된 제레미는 자기 이름이 적히지 않은 것을 내심 아쉬워했지만, 기쁜 마음으로 짐 목록을 대신 작성해두기까지 했다. 테건이 열흘 동안이나 자리를 비우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렇기에 테건은 새해 전까지 호텔의 일을 최대한 정리해두었다. 그리고 12월 31일, 한 해의 마지막을 기념하고 새로운 시작을 축하하는 가족 만찬을 즐긴 밤에 런던으로 향했다. 문학회는 마냥 즐겁지만은 못했다. 처음 며칠은 괜찮았다. 그러나 설명할수록 기괴한 일이 연달아 일어났다. 테건은 다른 이들에 비하면 훨씬 상태가 좋아 보였으나, 실제로는 일련의 사건을 견디지 못했다. 상식 밖의 일이란 그렇게 사람을 갉아먹고는 하는 것이었다. 테건은 자신과 자신의 미래를 걱정하며 끝내 유언을 작성했다. 그가 앞날에 대한 불안을 늘 안고 있음은 여태껏 드러난 적이 없었으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불안은 테건에게서 펜과 잉크를 통해 종이로 흘러들어갔다. 그리고 이 어둠은 누구에게도 공개되지 않았다. 테건은 이 문서가 빠져나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몇 번의 위기를 거쳐 일은 겨우 마무리되었다. 연옥 같던 일주일이 지나고 시간은 이상한 일이 시작되었던 문학회의 세 번째 저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테건은 아무도 모르게 쉬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일정을 마무리하지도 않고 조용히 문학회가 개최된 호텔을 빠져나와 안락한 자신의 네펠리온으로 향했다. 그리고 비밀리에 칩거를 시작했다. 일에 손대지 않고 오로지 정신적인 요양에만 신경 썼다. 한편 로버트는 집안을 장악하고 호텔의 인사에도 손을 대고 있었다. 그러나 두 손으로도 제대로 들지 못해 아슬아슬하게 떨어지지만 않은 상황이었다. 조금만 더 방치했다가는 정말로 무너질 수 있었다. 테건은 그 점을 바로 알아차렸으나 즉시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대신 경과를 지켜보며 오랜 친구이자 변호사인 에드워드 홉스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각자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 추론해낸 로버트의 계획은 분명히 테건을 향한 도전이었으며, 지금껏 남들에게 철저히 숨겼다 착각한 야욕을 드러내기 위한 과정이었다. 그 진행은 현재까지는 꽤 순조로운 듯 보였다. 물론 능력 밖의 일을 억지로 끌어가는 탓에, 어딘가에서 자꾸만 무너지는 소음이 났다. 테건은 에드워드에게 그 부분을 중심으로 사건 진행을 조사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는 한편 호텔 내의 일은 테건이 놓치지 않고 지켜보았다. 직원들이 하나둘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테건은 몇 번이고 도중에 등장하여 일을 망치고 싶다고 생각했다. 분노와 불안이 섞여 충동을 키웠다. 하지만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가장 효과적인 해결 방안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충동은 결코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호텔의 처음부터 지금까지 함께한 총지배인은 추천서도 없이 해고당하면서 몰래 메모를 남겼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괜찮으니 문제를 뿌리째로 뽑아 없애버려” 달라는 내용이었다. 곁에는 신임할 수 있는 사람이 많았고, 아직 에드워드 홉스가 발각되지 않은 채로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테건은 반드시 해내겠다고 조용히 약속했다. 로버트의 반인륜적인 계획을 하나하나 마주하면서 끔찍함을 삼키고 단 한 발의 탄환으로 응축하여 장전했다. 그리고 장례식이 다가왔다.
장례식은 지역 교회에서 치러질 예정이었다. 조문객으로 누가 참여할지 테건과 에드워드는 명확히 아는 바가 없었으나, 누가 오든 큰 상관은 없었다. 유일하게 오지 않았으면 하는 사람이 있다면 남동생인 코너뿐이었다. 유산분쟁이 마무리되어 가는 이 시점에서 거짓 부고가 알려지고 참석까지 한다면 테건은 판결에서 꽤 불리해질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이는 로버트를 한 치의 양보와 자비 없이 처벌해야 할 이유이기도 했다. 비밀스러운 부재가 초래하여 사회적 신뢰를 떨어뜨린 불쾌한 사건은 분별력과 책임감을 증명할 견고히 다질 기회로 뒤집힐 가능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내막을 알고 있는 사람은 테건, 에드워드, 로버트뿐인, 이상하리만큼 베일에 싸인 장례식 당일 아침이 밝았다. 시작은 오후 2시경으로 예정되어 있었으므로, 테건은 이른 아침부터 마차를 바꾸어가며 베이싱스토크로 향했다. 그리고 딱 적절한 시각에 도착하여,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조작된 묘 앞에서 침울한 듯 낭독 연설을 해대는 로버트를 발견했다. 그리고 천연덕스럽게 다가가 일갈했다. 로버트는 당황한 기색을 짙게 풍겼고, 근처에 있던 모든 사람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지금 당장 사정을 밝힐 필요는 없었으니 조문객을 모두 돌려보내고 아멜리아를 포함한 카펠 가족은 저택으로 돌아왔다. 저택의 관리 상태는 예상했던 대로 좋지 못했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테건이 매일 빼놓지 않고 드나들었던 집무실 또한 마찬가지였다. 서류가 이곳저곳으로 날렸고, 바인딩 되어 잘 꽂혀 있던 십여 년 전의 문서 낱장은 뜯어진 채로 서류들과 함께 나뒹굴었다. 테건은 그것들을 한 데 끌어모아 정리하면서 책임을 물었다. 그리고 로버트는 끝까지 반항하려 들었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대신 저지른 악행의 원인을 테건에게 떠넘겼다. 아멜리아가 곁에서 로버트를 비난했고, 제레미는 누구 편도 들지 못하고 불안해했다. 결국 로버트는 테건의 지시로 아멜리아가 데려온 사용인들 손에 끌려 나갔다. 테건은 어떠한 자비도 없을 것이라 선언했다.
취소된 장례식 당일 오후에는 에드워드 홉스가 방문했다. 늦게나마 제대로 소개하자면, 그는 테건이 호텔 영업을 준비하고, 아직 LS 철강의 임원일 때부터 함께한 사무변호사이다. 원래는 단순히 법률문제를 상담하는 정도였으나, 그 빈도가 잦아지면서 호텔 운영을 시작함과 동시에 종신을 기본으로 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이 시점에서는 테건이 무한히 신뢰하는 인물 중 하나이며 사건을 해결하는 데에 필요한 사람이 되었다. 에드워드는 도착하자마자 제레미에게 대략적인 상황을 설명하고 테건과 주고받은 편지를 보여주었다. 난잡하게 흘려져 있던 서류를 모두 정리한 모녀가 뒤늦게 도착하자 수집하여 서면으로 작성한 정보를 전달했다. 순식간에 자료를 검토한 테건은 에드워드에게 로버트의 협력자였을 경찰과 장의사, 그리고 협력자일 가능성이 있는 교회에 연락을 부탁했다. 해고당한 사용인과 호텔 직원들은 테건과 카펠 가족이 찾아보기로 결정되었다. 해고된 사람들이 빠짐없이 복직하는 한편, 계획에 가담했던 경찰과 의사, 스코틀랜드로 도주했던 변호사까지 모두 검거되었다. 그로부터 몇 개월 후의 재판에서는 에드워드 홉스와 친분이 있는 법정 변호사 커크 맥커니가 테건 측에 섰으며, 로버트가 재판 준비 과정 중에 죄를 인정했으므로 시간 낭비 없이 바로 형량이 내려졌다. 엄벌을 요구했고 사회 풍조를 거스르기에 형은 결코 가볍지 않았으나, 가혹하지도 않았다. 로버트는 그를 인정한 것인지, 아니면 포기한 것인지 순순히 수감되었다. 간혹 테건 앞으로 편지가 날아오는 것으로 문제없이 모범적인 생활을 한다고 대강 추측할 수 있었다. 비슷한 시점에 유산분쟁이 테건에게 유리한 쪽으로 마무리되면서, 테건은 편지에 답할 여력이 충분히 있었으나, 내용만 읽고 태워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온갖 상투적인 반성으로 매 페이지의 절반 이상이 차 있는 아주 성의 없는 편지였다. 오히려 로버트를 모른 척하는 것보다도, 제레미가 답장을 보내려는 걸 막는 일이 더 힘들었다. 한편 아멜리아는 긴 공백이 걱정되어 달려왔던 잉그리드와 함께 몇 개월 더 베이싱스토크에서 지내기로 했다. 재판 종료와 동시에 일상은 빠르게 안정되었다. 인원수에 변함이 없어서인지 마치 이전과 같은 환경인 듯이 평온했다. 그리고 아멜리아는 처음부터 아예 눌러앉을 심산이었는지, 머무는 기간을 조금씩 꾸준히 늘렸다. 잉그리드는 차남이었으니 굳이 돌아갈 필요도 없었고, 새 환경에 적응한 이래로 아내가 사랑하는 곳을 마찬가지로 사랑하고 있었다. 넷의 일상은 행복했다.
테건과 제레미는 전과 같이 지냈다. 정확히는 5년 전과 같이 지냈다. 테건이 비밀리에 신경 써야 할 문제가 더는 없었기에 돌아갈 수 있었다. 이는 5년간 쌓아둔 비밀을 없던 것처럼 취급하고 알리지 않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신혼 때와 다를 바 없이 친밀하고 애정이 넘치는 아멜리아와 잉그리드는 하루의 절반 정도는 함께 보내고, 나머지 절반 정도는 개인적인 일을 처리하면서 보냈다. 잉그리드는 간혹 테건과 함께 사냥을 즐기러 나갔고, 제레미는 테건이 없을 때 아멜리아의 일을 도왔다. 테건과 아멜리아가 같이 있을 때는 둘 다 일에 전념하며 두어 단어로만 대화하고는 했으며, 제레미와 잉그리드는 세간에 도는 이슈나 새 출간물, 또는 유행에 대해 가벼운 이야기를 즐겁게 나눴다.
그렇게 좋고 아름답던 어느 날, 창고에서 야생 햄스터가 발견되었다.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산 상태로, 그것도 식료품을 이것저것 갉아먹어 아주 통통한 모습으로 메이드들에게 발견되었다. 햄스터를 두고 쥐인지 아닌지, 식료품을 축냈으니 죽여야 하는지 웅성이며 고민하던 메이드들은 하우스키퍼에게 발견되어 각자의 업무 장소로 되돌아갔고, 하우스키퍼는 처분을 고민하기 위해 방으로 햄스터를 데리고 갔다. 그리고 마침 급하게 의논할 일이 생겨 하우스키퍼를 찾던 테건이 햄스터를 발견하고 이대로 데리고 사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결국 햄스터 관리는 테건 몫이 되었다.
테건은 이름이 딱히 생각나지 않자 간단히 카펠 경(Lord Capell)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제레미는 이에 반발했으나 침입자 햄스터의 명칭은 금방 집안 전체에 퍼졌고, 계속해봤자 바뀌지도 않고 자기 권위만 깎아내릴 것 같아 포기하고 말았다. 카펠 경은 보통 테건이 마련한 굵은 톱밥이 깔린 유리 상자에서 지냈고, 간혹 꺼내주면 테건 손 위에서 한참을 보냈다. 테건 또한 카펠 경이 손을 타면 굳이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오랜 업무처리로 피로가 쌓이면 카펠 경을 보러 가기도 했다. 아멜리아는 어머니가 누군가를 이렇게까지 찾은 적은 없다며 제레미를 위로했다. 테건은 사냥을 즐기면서도 굳이 사냥개를 기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쪽이었고, 따라서 인간이나 말이 아닌 다른 동물을 이렇게까지 가까이하며 아껴본 일은 난생처음이었다. 테건 본인은 이런 변화를 그저 그간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경험으로 인한 변심이나 단순한 변덕 정도로만 치부하고 있었고, 주변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생각 외로 카펠 경을 향한 테건의 애정은 오래 지속되었다. 한 손으로는 서신으로 온 감사 결과를 검토하면서 다른 손 위에는 카펠 경을 올려두고 엄지로 천천히 쓰다듬기도 했고, 주기적으로 새로운 먹이를 구해다 주면서 반응을 한참 관찰하기도 했다. 아마 사진 기술이 조금만 더 일찍 발명되었다면 테건은 카펠 경의 사진을 수백 장쯤 남겨두었을 것이다.
테건을 비롯한 카펠 가족이나 사용인들의 사랑을 한가득 받은 카펠 경은 동그란 몸을 이끌고 유리 상자 안에서도 그나마 볕이 잘 드는 곳을 찾아 누워 있기 일쑤였다. 하루는 제레미가 그 모습을 보고 테건에게 가서 햄스터 밥을 너무 많이 준 게 아니냐 물었다. 말을 들은 테건은 그제서야 카펠 경을 처음 보았을 때 모습을 떠올리며 현재 모습과 천천히 비교해보았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카펠 경이 지나치게 살이 올랐음을 인정했다. 그날부터 카펠 경의 유리 상자 앞에는 밥을 주었는지 안 주었는지를 체크하는 양장 노트가 놓였다. 기왕 인간 집에 들어온 거, 가능하면 건강하게 사는 게 좋지 않겠냐는 제레미의 적극적인 의견 덕분이었다. 이렇게까지 많은 사람이 온 신경을 기울여 돌보았던 카펠 경은 저택에 들어온 지 1년여 만에 가족 곁을 떠났다. 어쩌면 운동 부족이 문제였을 수도 있고, 아니면 먹어본 다양한 음식 중 그리 좋지 않은 것이 누구도 모른 채 섞였을 수도 있었다. 인간과 함께하는 일이 드문 야생 동물의 식생에 대해 알려진 것은 많지 않았으므로 누가 무엇을 주었다고 추궁하는 일은 옳지 않았다. 인간 외의 동물은 영혼이 없다고 받아들여지고 있었기 때문에 정식으로 교회나 성직자의 기도를 받고 묻힐 수는 없었으나, 잉그리드의 제안으로 저택 내의 정원에 특별한 자리를 내어주기로 했다. 카펠 경은 우연히 나타나 삶에 침입했고 이제는 가을처럼 붉은 꽃밭 옆에 몸을 뉘었다. 그리고 아멜리아의 뜻에 따라 얕은 무덤의 위에는 주황빛 섞인 베이지색 꽃을 피우는 낮은 나무를 심었다. 이 나무가 자라 처음으로 열매를 맺은 해에는 저택에 새 가족이 탄생했다. 아멜리아와 잉그리드 사이의 첫 자식이자 테건과 제레미의 첫 손자 에드윈 제프리 카펠이었다. 자길 위해 심어진 나무를 카펠 경이 보고 보내주었나, 하는 생각이 들도록 약간의 붉은 기가 언뜻 비쳐 보이는 듯한 옅은 금발을 가진 아이였다.
에드윈의 탄생으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았을 시점에 로버트의 가석방이 확정되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제레미가 먼저 연락을 받아 가족들에게 알렸고, 넷은 일부러 시간을 내지는 않았다. 그저 식사 시간마다 어떻게 하고 싶냐는 이야기를 간략하게 나눴다. 그러나 로버트는 날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교도소에 서신을 보내 확인했으나 로버트는 이미 며칠 전에 가석방되어 교도소 바깥 어딘가에 있는 상태였다. 결국 누구도 그의 소재를 아는 바가 없었다. 교도소는 테건의 요청에 따라 로버트에 수배령을 내렸다. 그 소재는 머지않아 천천히 밝혀졌다. 처음에는 베이싱스토크로 향하나 싶었으나, 며칠 후 좀 더 남쪽에서 목격되었다. 하지만 윈체스터의 한 번화가에서의 목격담을 마지막으로, 로버트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졌다. 겨울이 시작되면서 날씨가 하루가 다르게 추워지는 중이었으므로 이렇게 행방불명인 상태에서는 로버트가 살아 있는지를 보장할 수가 없었다. 이는 교도소 측에서 가석방 대상 인원을 제대로 검수하지 않아 발생한 문제가 분명했기에 제레미는 그 책임을 단단히 따질 생각이었다. 몇 번이고 독촉하는 서신을 보냈고, 교도소에서는 내키지 않아 하며 수색 작업이 진행 중이라는 건성인 답만을 보냈다. 그리고 겨울이 지나고 얼었던 강이 녹아 다시 흐르기 시작하면서 로버트의 소재가 떠올라 밝혀졌다. 지역 경찰은 다시 바쁘게 움직였으며 이번에는 제레미가 나서 규명을 요구했다. 확인 결과 사망 원인은 익사였고, 심하게 취한 상태로 추정되었다. 인근 주민이나 점포 직원 등의 증언으로 역추적한 동선 어디에서도 유서나 그에 준하는 문서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경찰은 만취 후 실족으로 인한 사고로 결론지었다. 카펠 가족 모두가 그 결과를 납득했다. 진상이 어찌 되었든 로버트의 행적과 죽음은 불명예스러웠다. 그래서 카펠 가는 암묵적인 약속을 통해 재판 이후로부터 이미 그를 존재한 적 없는 취급을 했으나 장례는 서류상의 가족 된 도리로라도 치러야 했다. 그의 죄가 신 앞에서는 조금이나마 탕감되기를 바라며 누구 하나 초대되지 않은 조용한 장례가 준비되었다. 테건은 처음에 참석을 거부했으나 이후의 명망을 고려하여 마침내에는 참석하겠다고 전했다. 당일 교회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목사가 있었고, 카펠 가족이 있었고, 조금 부풀고 일그러지긴 했어도 추운 날씨 덕에 보존만큼은 잘 된 로버트의 시신이 있었고, 목에 축축하게 달라붙는 공기가 있었다. 목사가 기도를 하고, 유족이길 거부하는 이들은 두 손을 모아 쥔 채로 고개 숙여 그 목소리에 집중했다. 실제로 애도를 했을지 아닐지는 각자만이 알았다. 장례는 딱히 엄숙하지만은 않은 분위기로 끝났다. 특히 아멜리아는 식 내내 베일 뒤로 짙은 경멸의 눈초리를 보냈다. 잉그리드는 6년 전 사건을 알고 있었음에도 이런 냉담한 흐름이나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테건은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미련 없이 마차에 탔다. 마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생각인 듯했다. 그는 특별히 자리조차 내어지지 않는 공동묘지에 시신을 안치하자고 한 장본인이었고, 이는 기존에 로버트가 저지른 맹랑한 행각에 대한 복수이기도 했다. 이 처사에 반대하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그나마 식 내내 어색하게 참여하던 잉그리드가 동정을 권했으나 차분한 설명과 함께 반려되었다. 그 설명이란 잉그리드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에게도 받아들여질 만한, 사회 풍조를 고려한 것이었다. 그렇게 로버트의 시신을 뒤로 하고 네 가족이 저택으로 돌아오며 장례와 추모가 모두 끝났다.
한편 테건은 에드윈을 매우 아꼈다. 크게 간섭하지 않는다는 양육 방침은 그대로였으나, 충분히 신경 쓰고 있음이 항상 드러났다. 이 시기에 가계 책임자의 인수인계가 가장 마지막 단계로 접어들면서 테건과 아멜리아 모두 바빴고, 테건은 문학회로 만난 친구의 호텔 체인 설립에 조언을 해준 이후로 간혹 아메리카 대륙을 방문하게 되면서 저택을 오래 비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자연스레 손자와 함께할 기회가 줄어들어, 상대적으로 적은 기간에 에드윈에게 필요할 만큼의 애정을 쏟아야 했다. 로버트의 장례식이 치러진 시점에서 에드윈은 6살이었다. 한창 호기심이 많을 나이였기에 테건의 지원과 관심은 잉그리드에게 꽤 도움이 되었다. 정작 에드윈은 시간이 갈수록 이런 일들이 귀찮은 듯 보였다. 이전만큼 흥미로워하지도 않았고,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도 않았다. 잉그리드는 그 점을 빠르게 잡아냈다. 결국 테건의 선물 공세는 대략 2년 만에 끝나게 되었다. 그 대신 “하고 싶은 것이 생긴다면, 생길 때마다 말해주었으면 좋겠다”라고 잉그리드를 통해 에드윈에게 전달했다. 아멜리아, 그리고 로버트 때와 정확히 같은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에드윈이 정말 깜찍하게도 사소한 것까지 하나하나 말하면서 굉장히 성공적인 방법의 표본이 되었다. 에드윈이 하고 싶은 일이란 대부분 간단했다. 부모님과 함께 시내에 나갔다 오기, 테건의 말인 플레어한테 인사하기, 아니면 저녁 식사로 무엇이 먹고 싶은지가 요구의 8할을 넘었다. 테건은 에드윈의 그런 태도를 좋아하는 한편, 이전에 겪은 실패담에서처럼 사랑스러운 손자가 오만에 빠지지 않도록 하려 노력했다. 고용할 가정교사가 어떤 도덕관과 윤리관을 가졌는지를 꼼꼼히 따졌고, 실패담의 목격자이자 동일한 교육 방침 아래에서 성장했으며, 에드윈의 양육권자인 아멜리아에게 자기가 우려하는 부분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렸다. 그러자 아멜리아는 크게 공감하며 방침을 테건과 논의했다. 가장 처음에는 틀만 잡았고, 다음부터는 그 틀에 동의한 잉그리드가 함께했다. 언제부턴가 제레미도 나름의 의견을 내놓기 시작하면서 에드윈을 위한 정기 회의가 자리잡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작 에드윈은 당장의 행복을 더욱 좋아하고 있었다. 이런 노력이 성과를 거두었는지, 아니면 에드윈이 타고난 성정으로 평화와 안식을 사랑한 것인지, 에드윈은 곧고 올바른 청소년이 되었다. 같은 또래의 아이들과 함께 두었을 때 특별히 튀는 부분이 없었고, 부모와 조부모에게 애착이 컸다. 승마에 관심이 커 테건과 종종 승마를 즐겼고 사냥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도 종종 물어왔으나, 공부에는 별다른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테건과 아멜리아로서는 그 부분이 조금 걸렸으나, 아이가 행복해 보이니 된 거 아니냐는 제레미의 말에 걱정을 놓았다. 그리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 기숙학교에 들어갈 시기가 되었다. 이번에는 영지 주변에서 그나마 시설이 양호하고 면학 분위기가 조성된 곳을 골랐다.
기숙학교로 떠나는 날 에드윈은 굉장히 아쉬워하는 기색이었다. 학교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잉그리드가 학교가 방학하면 데리러 가겠다고 내내 말해주었으나 자꾸만 떨어지기 싫은 듯 한껏 움츠리고 있었다. 결국 잉그리드는 일단 지내보고 정말 견딜 수 없겠다면 편지를 써서 보내라고 제안했다. 그리고 카펠과 함께 보낸 10년이 넘는 기간 덕분인지, 혹시 모르니 그런 의사를 표현하고 싶은 때에는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대신 코모도 도마뱀이 보고 싶다는 내용을 써달라고도 덧붙였다. 이 정도까지 말하니 학교 앞에 도착했을 때 에드윈의 표정은 그나마 밝아져 있었다. 그리고 이런 걱정이 무색하게 에드윈은 기숙학교에서도 괜찮게 지냈다. 친구도 다양하게 만들었고, 학업 성적도 나쁘지 않았다. 방학이 되면 어김없이 집으로 돌아왔으며 건강상 문제도 발생한 적이 없었다. 그런 모습을 보며 테건은 마음을 놓았다. 집안 외부로 신경 쓸 일들이 점차 늘어나면서 약간의 불안감을 안고 있었으나, 세 개 학기를 지나고서는 아멜리아와 잉그리드, 에드윈을 믿고 느긋하게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에드윈은 총 일곱 번의 학기를 보내고 코모도 도마뱀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돌아온 이유는 간단했다. 일부 학생이 뭐라도 된 듯이 다른 학생을 무시하는 일을 견딜 수 없어서였다. 이 무렵의 에드윈은 15살이었고 여전히 부모와 조부모에게 갖는 호감이 또래 다른 아이들의 경우보다 더 크긴 했으나, 성실하고 쾌활하며 선의와 이타심을 미덕으로 하는 청년이었다.
에드윈이 이렇게 자랄 동안 카펠 저택에서 일어난 일은 단조로웠다. 여전히 테건은 일선에서 물러나지 않았고, 제레미는 상원의원으로서 의회에 출석했고, 에드워드 홉스가 간혹 저택을 찾아와 일을 논의할 때 아멜리아가 함께했으며 테건의 남동생 코너 스칼렛 린치의 부고가 들려왔다. 테건은 그 서신을 반갑게 받아들고는 노환이 깊어 장례식에는 참석하기 어렵겠다고 회신했다. 호텔 사건 이후로는 사실상 가족으로서 의절한 상태였고, 실제로도 셰필드까지 다녀오기는 어려울 만큼 테건이 노쇠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LS 철강은 테건이 손을 털고 아멜리아가 경영하던 중에 잉그리드가 과로를 귀찮을 정도로 걱정했고, “그럼 당신이 하든가.” 하는 아멜리아의 한마디에 사실상 잉그리드 수중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사실 잉그리드는 이 모녀가 어째서 일을 그만두지 않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모름지기 귀족이라면 사사로운 이익을 좇지 않는 대신 자신을 다듬고 세상을 관망하며, 영지를 제대로 관리하고 영국의 번영을 위해 힘쓰는 것이 맞았다. 적어도 트렌치 가는 그렇게 생각했다. 출신은 사업가 집안이라지만, 이제는 온전히 귀족의 일원으로 합류했는데도 호텔의 사소한 부분까지 보듬으려 애쓰는 테건을 잠시간 결혼 결격사유로 받아들인 일은 나름 합당한 제동장치를 건 결과였다. 그래서 잉그리드는 철강 회사 일부를 떠안은 것을 굉장히 난감해했다. 여전히 업무의 절반 이상을 아멜리아가 맡았고,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은 비교적 간단한 반복 업무 뿐인데도 죽을상을 했다. 그런 것치고 잉그리드가 일을 처리하는 방법은 아멜리아와 특별히 다르지 않았다. 속으로 마뜩잖더라도 일하는 모습을 옆에서 오랜 기간 지켜보았고, 가족으로서 일상의 많은 부분을 함께하며 물든 게 분명했다. 그 모습을 테건은 흡족히 여겼다. 실제로 지시를 하달받아 실행하는 사람들에게는 상부가 변하더라도 방침만 일관적이라면 큰 상관이 없을 터였다. 이 시점부터 테건은 자신이 쇠락해가고 있음을 느꼈다. 그렇기에 주변에, 특히 자신보다 충분히 오래 살 수 있으며 믿음이 가는 사람을 대상으로 쥐고 있던 사업을 하나둘씩 승계했다. 하나 정도는 에드윈에게 직접 주고 싶다고 생각했으나 아직 성인도 되지 못한 아이에게 괜한 부담이 될까 봐 실행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그런 시기에 네펠리온 호텔은 그 어느 때보다도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원래는 영국인을, 그것도 런던에 거주하거나 자주 들르는 사람을 위주로 입소문을 타고 서서히 떠올랐다면, 신대륙과 구대륙을 잇는 여객선이 다수 등장하고 여행객이 늘어나면서 아무런 연고 없이 찾아오는 투숙객이 발생했다. 그리고 이들이 더 다양한 고객층을 끌고 오면서 생긴 결과였다. 물론 이전에 신대륙의 호텔 설립을 도운 결과로 호텔 로비에 동업자로 이름이 걸렸고, 그 이름을 찾아온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에 따라 호텔 경영 또한 어느 때보다도 복잡했다. 사람이 많으니 자연히 컴플레인이 늘었고, 해결을 위해 호텔을 직접 찾아가 총지배인과 긴 논의를 나누었다. 그리고 테건이 호텔을 찾아간 일은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그 이후로는 집에서 더욱 오랜 시간을 보냈고, 밖으로 나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 따라서 이후의 행적은 크게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비에 이어 눈까지 혐오하여 1년의 절반이 넘는 기간 동안 모든 창문에 두꺼운 커튼을 쳤다는 일화만이 유명하다. 그러므로 다음부터 작성되는 이야기는 가까운 후손의 설명을 바탕으로 한다.
테건 다니엘 카펠은 일생의 나머지를 가족들과 많은 대화를 하면서 보냈다. 그중 가장 긴 시간을 공유한 사람은 제레미 알렉산더 카펠이었다. 테건은 언제나 많은 일에 대비해두길 원했고, 제레미 또한 그 대비책을 세우는 데에 함께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논의한 첫 문제는 작위 세습이었다. 둘 사이에 아들이 없고, 제레미의 남동생은 사망했으며, 그 외 다른 친척 중에서도 작위를 받을 수 있는 남성이 없었다. 적어도 그들이 알고, 가족들이 아는 범위에서는 그러했다. 둘은 긴 절차를 거쳐 딸인 아멜리아 트렌치 카펠에게 작위를 세습하기로 했다. 이 결정은 이 가족 중 유일한 성인 남성이자 후보자에 이름이 올라 있던 잉그리드 트렌치 카펠이 작위 세습을 극렬히 거부하면서 내려졌다. 물론 그다음 햄프셔 백작은 에드윈 제프리 트렌치 카펠이 될 예정이었다.
네펠리온 호텔에는 세 번째 총지배인이 고용되었으며, 경영 업무의 80퍼센트는 전문성이 확인된 열두 명의 직원이, 나머지 20퍼센트와 전반적인 총괄은 테건과 아멜리아가 맡았다. 가계는 잉그리드와 아멜리아가 각각 사용처를 나누어 처리했고, LS 철강은 광산을 추가로 매입하고 주변 소형 공장을 인수합병하면서 고정적인 납품처를 두 배로 늘렸다. 자기가 없어도 자신이 쥐고 있던 모든 시스템이 오류 없이 잘 실행되리라 확신한 테건은 진정 마음을 놓고 휴식기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공식적인 은퇴 선언은 하지 않았다. 다만 22년 전 작성했던 유언을 기반으로 새 유언을 작성했다. 유산분쟁에 관한 이야기는 완전히 빠졌으며, 코너와 로버트 대신 에드윈과 잉그리드가 등장했다. 제레미에게 보내는 편지는 원래 작성해두었던 유언의 총 길이보다도 길어졌다. 하지만 그마저도 끝을 보였다. 그러므로 테건은 비로소 눈을 감을 계획을 세웠다. 그날이 정확히 언제일지는 모르더라도 하고 싶을 말을 모조리 전하고 끝의 마지막 순간에 누구와 함께 무엇을 할지까지 세세하게 정했다. 이 나이까지 어떤 문제도 없이 지낼 수 있음은 축복이었다. 그는 일평생 신이 쓸모없으며 인간의 미래는 오직 인간의 손으로만 쟁취하고 갈취할 수 있다고 여겼으나 질병 없는 노년은 진정으로 신의 축복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2년이 다시 흘렀다. 에드윈은 여전히 부모의 사랑을 많이도 원했고 아멜리아와 잉그리드는 직원을 충분히 고용하여 일상을 만끽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전에는 에드워드 홉스의 장례도 있었다. 테건은 참석할 수 없었으나 아멜리아가 홉스의 친구이며 동료이자 테건의 대리인으로서 참석하여 테건의 조의를 함께 전했다.
그리고 때는 눈발이 휘날리는 겨울이었다. 커튼이 굳게 닫힌 2층의 한 서재에서 테건은 마지막으로 읽던 책의 결말을 보았다. 주인공의 말로를 보며 안타깝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평생을 염원하던 것에 끝내 닿지 못하고 절망함은 온 인류가 공유하는 비극’이라는 밋밋한 감상과 함께 책장을 덮고 원래 자리에 꽂아놓은 시각은 오후 4시 27분이었다. 시계를 확인한 후 집무실 책상 위에 유서까지 올려둔 테건은 제레미가 있을 부부 침실로 향했다. 가는 길에 마주친 메이드에게는 가장 적게 남은 위스키 한 병과 잔 2개를 5번 서재로 가져다 달라고 했다. “시가도 준비할까요?” 하는 말에는 거절을 표했다. 침실에 도착하니 제레미는 등받이가 있는 카우치에 끼이듯이 기대 있었다. 테건은 그 앞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제레미를 서재로 초청했다. 원래 머리카락도 회색이었던 제레미는 머리가 센 것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이전과는 명백히 다른 색이 된 테건의 머리카락과는 대조되었다. 그러나 기력을 따지자면 테건이 훨씬 우위에 있었다. 제레미는 힘겹게 일어서 테건과 함께 미리 준비된 서재로 향했다. 둘은 어떠한 의도도 없이 발을 맞추어 걸었으며, 지팡이 소리만이 서로 다른 타이밍에 탁탁거렸다. 도착한 서재는 따뜻했고, 미리 준비된 위스키와 잔이 놓여져 있었으며 그새 눈보라라도 치기 시작했는지 창을 흔드는 바람 소리가 매서웠다. 제레미는 방의 분위기와 테건의 목소리로 불길함을 직감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마지막 인사가 될지도 모르는 시간에 침착하지 못한 모습만은 보일 수 없었다. 그래서 테건이 술을 권할 때에도 한 모금 마시고는 그 씁쓸함에 평소처럼 투정했다. 테건 또한 평소처럼 그 말을 받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고요히 은퇴를 선언했다. 단 한 번도 일을 그만두겠다 말한 적이 없었으므로 제레미는 말의 속뜻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불길함은 사실이었다. 제레미는 그대로 쓰러져 우는 대신, 가까워지는 테건의 손을 붙잡아보았다. 이렇게라도 하면 시간이 느려지기라도 한다는 듯이, 꼭 붙잡아 입을 맞추었다. 그 전에 위스키를 몇 모금 더 마셨을지도 모른다. 제레미는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어쩌면 40년을 품어온 사랑을 고백했을 수도 있다. 이 시각 이 장소에는 단 둘뿐이었기에 모든 일을 명확하게 기억하는 이는 이제 남아 있지 않다. 테건이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도 한결같았다는 부분밖에는 확인할 수 없다. 그리고 죽음은 달콤한 잠 같았다. 흐릿한 취기가 섞여 순식간에 빠져드는 잠이었다. 제레미는 그제서야 눈물을 흘렸다. 반평생을 함께한 상대는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제레미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자 서재 근처를 지나던 잉그리드가 가장 먼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집사장이 상황을 알리자마자 아멜리아와 에드윈이 서재로 들어왔고, 소식을 접한 고용인들이 바깥에 모두 모였다. 그중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지역 교회에는 인파가 들끓었다. 소란스러운 좌중을 헤치고 엄숙한 식이 진행되었다. 신원이 확인된 조문객은 관에 누운 테건을 마주하고 장미를 헌화했다. 헌화가 끝난 후에는 제레미가 짧은 연설을 했다. “그는 이 시대에 없어서는 안 되었을 위인이었습니다…….” 장례는 끝났고 나머지는 남은 자들의 몫이었다. 갑작스레 들이닥쳐 이 죽음을 무를 수 있을 유일한 인간인 테건은 창백한 얼굴로 관 안에 편안히 누운 채였다. 가족들은 침울히 관을 매장하고 흙을 덮어 그 앞에 비석을 세우는 현장을 빠짐없이 목격했다. 제레미가 그 곁에 묻히고, 언젠가 아멜리아와 잉그리드, 그리고 에드윈까지 빠짐없이 주변에 묻힐 것이었다. 어떤 죽음은 다른 모든 상실을 합친 양보다도 큰 공간을 남긴다. 제레미와 아멜리아에게는 그 어떤 상실보다도 테건의 죽음이 그러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를 넘어서는 상실은 아마 오지 않을 터였다. 따라서 잔재를 정리하는 데에는 아주 긴 시간이 걸렸다. 제레미는 장례가 끝나고 나서야 테건이 남긴 편지를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읽고 싶지 않아 했고, 그다음에는 읽기를 도중에 그만두었던 그 문서를 며칠 만에 완독했다. 제레미는 소리 죽여 울었다. 그리고 그에게 테건의 죽음은 아주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제레미가 눈을 감은 후에도 죽음의 잔재는 백 년을 넘게 이어졌다. 유산은 사라지지 않았고 몰락하지도 않았다. 2023년 현재에도 잉글랜드, 시티 오브 웨스트민스터의 리젠트 스트리트에 가면 네펠리온 호텔을 볼 수 있고, 숙박도 가능하다. 호텔에 머무르지 않더라도 그 주변을 지나갈 일이 있다면 호텔 명물인 1층 카페테리아에서 반드시 일일 특선 디저트를 맛보길 바란다. 테건이 그토록 직접 일구어내길 원했던 미래가 진정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부록
작성일: 1862년 12월 7일
유언자: 테건 다니엘 카펠
공증인: 에드워드 홉스
……
별지는 유언과 무관한 사적 내용이 담겨 있으므로 봉투의 이름을 보고 본인 것만 읽기를 권함. 본인이 원하면 타인에게 공유하는 것은 상관없음.
제레미 알렉산더 카펠.
당신이 어렵게 이 문장을 읽고 있으리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아. 한 줌이라도 기억하겠다고 노력할 모습이 선해서, 나는 알려야만 하는 것을 알릴 뿐인데도 이어나가기가 어렵다. 이 아래로 이어지는 내용이 어떻든 잊어버릴 준비를 해. 그래야만 해. 얼마 남지 않았을 일생을 과거에 바치지 마. 망자의 과거는 망자의 것으로만 남겨 두고 당신은 현재를 살아가야 하잖아.
언젠가는 당신을 사랑했어. 그러나 그 시기는 확정할 수가 없다. 우리의 처음은 서로의 퇴로를 막아버린 동업자였고, 당신이 나의 가장 든든한 아군이 되면서 가족이 되었다. 그러나 당신이 함께한다는 사실이 당연하다고 생각한 순간부터는 일과 문제에 더 집중하면서 그 믿음과 사랑에 충분히 보답하려 하지 않았어. 하지만 사과할 마음이 없음은 알아주고, 이해해주면 좋겠다. 울지 말고. 나는 이전에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비극적인 미래에 파묻혀 본 적이 있다. 예상했겠지만 연락도 소식도 끊겨버렸던 그때가 맞아. 죽음은 그 순간에 틈 없이 가까운 곳에 있었고 오히려 귀환과 함께 되찾은 평소 같이 흐리기만 한 하늘이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의 비관과 회의는 어디로 갔는지 흐릿한 형상조차 찾을 수 없는데도 나를 예측 불가능한 시궁창 속으로 밀어넣었다. 그래서 한동안 쉬기로 결정했었지. 이 모습을 당신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상냥하고 걱정 많은 당신이 나를 보았다가는 무슨 얼굴을 보일지 잘 알고 있는 데다가 그 얼굴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아, 그 후로 당신을 이제껏 사랑했음을 알았다. 세간에서 말하는 사랑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였으나 감정은 강렬하게 자신의 이름을 외쳤다. 그러나 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 절대적인 믿음과 사랑은 그저 유사해 보일 뿐 서로 같지 않고 포함되지도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요즘에서야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그리 멀지 않은 죽음을 예감한 지금, 당신에게 더 많은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아 직접 말하지 않는다. 적어도 이런 형식의 고백은 당신이 나보다 먼저 떠났을 때 영원히 비밀로서 잠든다는 장점이 있다. 이 둘 외의 다른 작은 일들은 천천히 말할 생각이다. 그정도는 분명 말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일부러 많은 사실을 숨기고 당신에게 말하지 않았음을 지금도 후회한다. 그러나 앞으로도 얼굴을 맞대고 중요한 진실을 고할 일은 결코 없을 것이므로 이렇게 비겁하게라도 알린다. 당신이 나를 원망하는 모습을 볼 필요가 없도록, 그리하여 나에게 당신이란 사람은 오직 평온하고 유연한 사람으로 남도록 조작하는 나를 차라리 이해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 이전에 했던 말을 번복해 미안해. 하지만 이 방법 말고는 좋은 수가 떠오르지 않는다. 우리의 사랑이 서로 달라 상대를 채워줄 수 없으니 나는 이렇게라도 당신을 포기한다. 그러므로 부디 당신 또한 나와 마찬가지로 나를 포기하고, 평생 용서치 않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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