薄紅色に染まり 上
연분홍색으로 물들어
FGO 1부 종장 강력 스포 + 로마니 아키만 생환 IF
모든 인리수복이 완료된 뒤 평화를 되찾을 줄만 알았던 칼데아는 이례 없는 격무에 시달리고 있었다. 마술협회에 자료 제출, 동결보존된 A팀 마스터들을 깨우기 위한 방법 연구……. 그리고 칼데아에 개인적으로 연락해서 꼭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하는 마술사들을 거절하는 것까지. 해야 할 일은 산더미였고 업무는 매일같이 새로 쌓이기만 했다. 칼데아의 직원들은 업무의 산에서 눈응 돌리고 싶다는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러나 꿈 속에서만 그럴 뿐, 실제로 일을 내팽겨치고 놀고 먹을 수는 없었다.
자칫하다가는 시계탑을 포함한 마술협회의 정쟁에 휘말릴 것이고 무엇 하나 잘못했다간 칼데아 전체의 봉인지정까지도 있을 법한 이야기였다. 인류의 위기를 무사히 극복해냈으니 ‘자,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라는 밝은 인삿말과 함께 슬레이트가 쳐지면 얼마나 좋을까. 잔혹하게도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 다행인 것은 눈 아래에 그늘을 늘어뜨린 칼데아 직원들의 얼굴에서 읽을 수 있는 감정이 불안과 초조가 아닌 피로에 가깝다는 것이다. 「마지막 특이점에서 전원 무사 귀환」. 이 문장이 갖는 의미는 작지 않았으므로.
그래, 로마니 아키만은 무사히 돌아왔다.
모두가 무사하다는 안도, 그럼에도 칼데아를 둘러싼 정국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니라는 직감에서 오는 미묘한 불안. 다음 날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라는 긴장감이 칼데아 내부에 안개처럼 퍼져 있었다.
그러나 모든 특이점의 한 가운데에 있었던 소야 츠무기는, 그 모든 것은 자신과 일말의 관련도 없다는 것마냥 자신의 방에서 오랜 시간를 보냈다. 식사는 꾸준히 챙겼다. 메디컬 체크도 정기적으로 받았으며 누군가 마스터를 찾는다면 달려가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외의 시간은 대부분 홀로 보냈다. 마슈는 내심 걱정하는 눈치였다. 그렇지만 소야 츠무기에게 큰 문제는 없었다. 물론 시간 신전에서 입은 부상은 작지 않았다. 치료도 재활도, 이외에도 많은 것이 필요하겠지만,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홀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었다. 자신이 종국 특이점에서 깨달은 감정을 되새기고 또 앞으로 어떻게 그를 대해야 할지 결정하기 위해서.
그가 돌아와서 기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분명 누구보다 기뻐하는 사람 중 하나라는 자각조차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점은…….
“──로망,”
“…….”
최후를 목전에 둔 사내는 츠무기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볼썽 사납게 바닥에 쓰러져 있음에도 그가 로마니 아키만임을 알았다. 그야, 방금 전까지 익숙한 모습을 하고 있었고, 어떻게 변했는지를 똑똑히 보았으니까─ 라는 이유는 아니었다. 그저 잠시 스쳐지나간 금색 눈동자에 담긴 우려와 걱정, 그리고 다정이. 솔로몬의 모습을 한 그가 로마니 아키만임을 말해주었던 탓이다. 그는 츠무기의 부름에도 묵묵부답이었다. 그러나 그가 입가에 걸어둔 미소에 약간의 금이 갔다. 아주 잠시, 찰나에 가까운 시간, 발걸음이 멈추었다. 츠무기가 그의 이름을 부른 것이 얼마나 효과가 있었을지는 모른다. 로마니 아키만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츠무기는 입을 멈추지 않았다.
“다른 방법이, 있을 거예요. 우리 모두 그걸 찾고자 노력… 한 거잖아요.” 목소리에 물기가 스몄다. 칼데아에 있던 그 누구도 들어본 적 없는 음성이었다. “로망, 그러니까───.”
로마니 아키만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간접적으로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주장하듯. 쿨럭, 츠무기가 기침을 토해냈다. 바닥에 피가 튀었다. 기침 사이 핏물이 섞여있었다. 그러나 그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양 팔에 힘을 주어 몸을 일으키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애써 지면에 박아 넣었다. 팔을 뻗는다면 금방 닿을 수 있는 거리. 그러나 로마니는 가까이 다가와 츠무기를 지탱해줄 생각은 없는 듯했다.
츠무기는 줄곧 이런 사람을 동경해왔다.
아무리 힘들어도 자신의 목표를, 이상을 향해 걸어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사람.
그렇기에 누군가 심장을 옥죄는 것처럼 숨이 턱턱 막혀왔다.
“───좋아해요, 로망.”
그의 걸음이 멈추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츠무기를 바라보자 낯선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다정한 당신이라면 알잖아,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제 감정을 방금 자각한 츠무기는 가능성이 희박함을 알아도 내심 기대를 품었다. 차라리 나에게 알았다고, 다른 걸 생각해보겠다고 말해줘, 라고. 그러나 그는 그저 눈을 접어 웃어보일 뿐이었다. 시선이 금방 그녀를 스쳐지나갔다.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무너지는 시간 신전을 해치고, 자신을 막아서는 게티아를 다시금 물리치고 칼데아에 돌아왔다. 다른 이들 전부 무사한데 그 누구보다 이 푸른 하늘을 보여주고 싶어했던 사내가 없다는 사실에 눈물을 흘렸던 것이 무색하게도, 다 빈치에게 긴급 호출을 받아 돌아간 칼데아에는 멋쩍게 웃는 로마니 아키만이 있었다. 언제나와 같은 낯으로 다 빈치의 꾸중을 듣다가 츠무기와 마슈를 발견하고는 곤란한듯 자신의 볼을 긁적였다. 손에는 더이상 장갑도, 마슈가 보고 그가 ‘기혼’이었다고 착각했던 반지도 없었다.
“그렇게 멋있게 퇴장했는데 말이야, ──라고 말하면 화내겠지? ……다녀왔어ただいま.”
평소보다 조금 더 후련해보이는 웃음을 내건 그에게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까. 츠무기는 마른 입술을 몇 번이나 달싹이다, 속삭이듯 말을 내뱉었다. 다녀오셨어요おかえりなさい. 그 인사에 로마니가 밝게 웃으며 답하기도 전에, 츠무기는 천천히 뒷걸음질치더니, 그대로 관제실을 뛰쳐나갔다. 뒤에서 어어!? 하고, 로마니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츠무기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마이 로드가 내 손을 빌린 거구나? 이야, 내가 당사자가 아닌 사랑 놀음에 끼게 되다니, 이거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네.”
“놀릴 생각이라면 다른 분께 갈게요.”
“이크, 그건 참아주지 않겠어? 나대로 지금 상황을 제법 즐기고 있어서 말이야.”
츠무기는 멀린의 말에 아주 약간 미간을 찌푸리고 시선을 돌렸다. 츠무기의 마이 룸에 당당히 초대 받은 멀린은 제법 기분이 좋은 듯 연신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자신이 당사자가 아닌 사랑 놀음’에 끼게 되어서 기분이 좋은 것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을 제하고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 멀린은 츠무기의 ‘팬’이라고 당당하게 말하지 않았던가. 그는 당당하게 츠무기의 침대 옆 협탁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츠무기는 자신의 방이 익숙하다는 듯 구는 멀린은 신경도 쓰지 않고 언제나와 같이 하루를 준비했다.
더이상 인리소각에 의한 특이점이 발생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갑작스레 2017년을 맞이한 인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칼데아’ 뿐이었다. 탓에 어려운 정국에 휘말릴 것은,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유일한 마스터인 자신이 어떤 취급을 받고 있으며 어떤 소문에 휩싸이고 있을 지도. 탓에 츠무기는 지금까지 작성했던 레포트를 다시금 점검해야만 했다. 물론 칼데아의 스태프들은 일단은 메디컬 체크부터! 라고 말하긴 했으나, 그가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애가 아니라 다행이라는 안도의 기색을 숨기지는 못했다. 칼데아의 제복이 아닌 편한 의복을 입은 츠무기는 고개를 돌려 멀린을 바라보았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로마니라면 지금 마술 협회 사람과 이야기 중이야. 원래라면 네 메디컬 체크 담당이었겠지만─ 시계탑의 로드들이 사정을 봐줄 리가.”
멀린의 눈동자가 츠무기를 피해 허공을 향했다.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혹은 인간에 질린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자 노력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츠무기는 저 몽마의 생각을 따라잡는 것은 이미 먼 옛날에 포기했다. 그는 오랜 시간 동안 죽지 않고 살아온 존재이니 자신과 사고회로가 다를 수밖에 없다고. 그러나 그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다. 시계탑의 로드들은 비록 로드 엘멜로이 2세의 언질이 있다 해도 칼데아를 가만히 두지는 않을 것이다. 변하지 않을 진실이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러나 자신이 해야 할, 그리고 할 수 있는 일은 적을 것이다. 이 생각이 츠무기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지는 않았다.
치익, 센서가 츠무기를 인지하고 문이 열렸다. 복도로 걸음을 내딛는 츠무기를 멀린이 불러 세웠다.
“한 가지 유념해둘 게 있어, 마이 로드. 나는 미래나 과거는 보지 못하고 오직 현재만을 볼 수 있어. 알고 있겠지?” 츠무기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어느새 애매한 표정을 지우고 웃는 낯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래는 시시각각 바뀌어가는 것.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날 수 있으니, 주의하도록 해.”
일견 투명하게도 느껴지는 백색 눈동자가 그를 응시했다. 멀린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시선을 마주했다. 잠시 동안의 정적. 할 일이 있었던 것 아니야? 멀린의 재촉에 츠무기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는 멀린이 이상한 것을 저지르지는 않는지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고 난 뒤에야 완전히 자신의 방을 나섰다.
다시 문이 닫히고 조금 뒤, 멀린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심지어 콧노래까지 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갔다. 그는 두리번대다가 씨익 웃더니 자신이 걸었던 복도의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로마니 아키만이 숨어 있었다. 츠무기의 마이 룸에서 조금 떨어진, 문이 열린 뒤의 대화는 충분히 들릴 정도의 장소. 그곳에 숨은 로마니는 ‘정말 최악’이라는 단어를 얼굴로 표현하고 있었다. 멀린의 얼굴에 능글맞은 웃음이 떠올랐다.
“로마니, 그렇게 숨어 있지 말고 할 말이 있으면 하지 그랬어. 말 걸면 바로 눈치챘을 텐데.”
“하? 그러는 너는 그 나이 먹고 여자애 방에 아무렇지 않게 들어가? 아무리 츠무기가 그런 쪽에 둔하다 해도 아닌 건 아니지.”
“이런, 남자의 질투는 보기 추하네~”
멀린의 코웃음에 로마니가 작게 이를 갈았다. 급하게 마술 협회의 사람과 이야기를 끝내고 방으로 돌아가던 중 츠무기의 목소리가 들려 급하게 몸을 숨겼을 뿐이었다. 그런데 하필 이런 이야기를 들어버릴 줄이야. 과로 등으로 인해 신경이 마모된 그가 한동안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건 당연했다. 물론 멀린에게 놀림당할 것을 알았다면 얼른 관제실로 돌아갔겠지만 대략 삼 일 째 제대로 숙면을 취하지 못한 로마니 아키만의 판단 능력은 썩 좋지 못했다. 영령이 아닌 평범한 인간의 몸이니 어쩔 수 없다.
그래, 로마니 아키만은 이제 완전히 인간이 되었다. 솔로몬에서 인간 로마니 아키만이 된지 10년 가량 지났으나, 이제야 과거의 그림자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신이나 신대神代의 존재가 아닌, 평범한 인간으로 최후를 맞이하고 싶기는 했으나, 아직까지 이 육신에 숨이 붙어있다는 것이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그는 숨을 들이마시고 가볍게 내뱉었다. 날숨이 한숨과도 닮아 있었다. 멀린의 말을 부정조차 하지 못한 그는 분한 낯을 해보였다. 멀린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뭐, 됐어. 그나저나 로마니, 언제까지 그 거리를 유지할 셈이지?”
“거리를 두고 있는 건 내쪽이 아니라 츠무기잖아. 내가 함부로 거리를 좁힐 수 있을 리가.”
“언제든 찾아갈 수 있으면서 찾아가지도 않고 말이지? 그녀가 밀어낸다고 그대로 밀려나는 거야, 응?”
멀린이 장난스러운 말투로 받아치자 로마니는 입을 꾹 다문다. 반박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박하라면 이자리에서 제법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었다. 그러나 로마니 아키만은 이전처럼 츠무기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인리수복이 완료되었으니 더이상 쓸모없다, 이런 것은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것보다는.
“그러다 나를 밀어내면 완전히 끝일 것 같아서.”
두려움이었다. 저도 모르게 속내를 말한 로마니는 입을 꾹 다물었다. 멀린에게 이런 말까지 한 것이 짐짓 분한듯 미간을 찌푸리기까지 했다. 여러모로 신경쓸 것이 많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을지도. 츠무기는 그를 피하지만 로마니 아키만은 츠무기에게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정확히는, 돌려줘야할 말이 있었다. 지금까지는 츠무기가 피하고 있고, 또 칼데아는 일이 많고……. 오늘이 아니라 내일, 이것이 몇 번이고 반복되어 벌써 제법 시간이 흘렀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으나 서번트의 힘을 빌려서까지 자신을 피하는 그의 앞에 설 자신이 없었다.
로마니 아키만은 비겁하다. 삶과 죽음의 문턱을 밟고 돌아왔음에도 이 천성은 고쳐질 생각을 않았다.
멀린은 그런 비겁한 사내를 그저 관망했다. 잠깐의 정적. 로마니는 결국 한숨을 푹 내뱉고 제 머리를 잔뜩 헝클어뜨렸다. 이렇게 시간을 허비할 순 없었다. 그는 여전히 해야 할 일이 잔뜩이었다. 칼데아의 복구와 마술협회의 견제, 그리고 새로운 스태프의 모집까지. 인원이 줄어든 만큼 다른 사람들이 몸을 갈아넣고 있는데 그가 이렇게 쉴 수는 없었다. 로마니는 멀린을 상대하는 대신 몸을 돌려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을 택했다.
“으음? 이제 스토킹은 그만 두고 할 일을 하러 가는 건가?”
“너를 붙잡고 시시콜콜 이야기를 떠들 생각은 없거든. 난 갈 거니까 얼른 너도 아발론으로 돌아가버려.”
“이런이런, 내가 영령으로서 소환되었다는 걸 잊진 않았을 텐데?”
윽, 하는 소리가 순식간에 멀어졌다. 그는 재빠른 걸음으로 멀린에게서 떨어져 복도의 모퉁이를 돌았다. 멀린은 제 시야에서 분홍색 머리카락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다가, 눈동자만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가 가볍게 지팡이 끝을 바닥에 톡 내리 찍자 아무 것도 없던 공중에 몇 개의 꽃잎이 날렸다. 그중 몇 개가 바람에 휘날려 로마니 아키만의 머리카락에 붙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인간이 된 로마니 아키만의 하루는 일에 파묻혀 지낸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나, 또 파란만장했다. 그의 일과는 이렇다. 아침에 일어나 간단하게 식사를 마친 뒤 금일의 업무를 확인. 마술협회 및 아틀라스원 등에서 요구하는 자료를 확인한 뒤 업무 배분. 오후에 가까워진 시간에는 스스로 메디컬 체크 진행. 양심상 중간에 끼워 둔 식사 시간을 제외하면, 그는 눈을 뜬 시간부터 계속 일에 치여 살았다. 회의, 작업, 그리고 지금까지의 기록의 재검토. 종종 갑작스레 연락해오는 마술협회의 사람들을 처리하는 것도 그의 일이었다. 평소와 같으나 종종 예상치도 못한 일이 일어나는 탓에 그는 늘 적절한 긴장 상태를 유지했다. 다 빈치는 그를 보고 혀를 찼고 칼데아의 직원들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솔로몬은 사라졌으나 그의 워커홀릭 기질은 사라지지 않는 것 같다고. 그러나 로마니 아키만은 확실히 변했다. 특히 소야 츠무기와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그가 생환한 직후, 멋쩍게 웃으며 인사를 했을 때만 해도 로마니는 츠무기가 마주 인사해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절뚝이는 걸음으로 관제실을 떠날 뿐이었다. 마슈와 다 빈치를 포함한 모두의 표정이 싸하게 굳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물론 상처가 컸음은 안다. 그렇지만 그 상황에서 모두를 살리기 위해서는 이 방법이 확실했잖아. 로마니 아키만이 속내를 드러냈을 때, 다 빈치는 불현듯 찾아온 두통에 눈을 질끈 감고 이마를 짚고야 말았다.
“로마니, 인간은 이성적으로만 생각할 수 없어.”
“그렇지만 레오나르도.”
“츠무기도 이성으로는 이해하고 있겠지. 그럴 수밖에 없었고 최소의 희생으로 만들어낸 최대의 효율이었다고.”
다 빈치는 보고 있던 태블릿을 책상 위에 내려 놓고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푸른 눈동자가 로마니에게 향했다.
“그렇지만 미리 말해줬으면 조금 더 괜찮은 길을 선택할 수 있지 않았을까. 제대로 된 작별인사는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내가 조금만 더 열심히 했다면— 같은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이야.”
“그렇지만 너는 날,”
“물론 이해하고말고. 겁쟁이인 로마니 아키만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고도 생각하지.”
“그러면,”
“그렇지만 츠무기는 평범한 인간이야. 그랑 오랜 시간을 보낸 너라면 알잖아.”
다 빈치는 말을 마치고 장난스레 어깨를 으쓱였다. 알았으면 가서 사과라도 해봐. 조금 쓴 소리는 듣더라도 분명 받아줄 테니까. 장난스레 손바닥으로 등을 툭 치는 것이 꼭 등을 밀어주는 것만 같았다. 로마니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꾸역꾸역 삼킨 질문이 새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는 간신히 아아, 하고 긍정도 부정도 아닌 답변을 내뱉었다. 레오나르도, 만일 츠무기가 사과를 받아주지 않는다면 어쩌지. 문장으로 내뱉지 못한 질문이 가시가 되어 입 안을 찔러댔다. 그조차 답을 알지 못하는 질문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인간이란 답을 알지 못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존재인 걸까. 난제를 맞이한 솔로몬은 애매한 낯으로 시선을 돌렸다. 쿵, 쿵, 불안인지 공포인지, 혹은 다른 감정인지 모를 울렁임이 그를 괴롭혔다.
츠무기와 제대로된 대화조차 하지 못한 지 일 개월 가량 지났다. 로마니 아키만은 여전히 언제나와 같은 하루를 보냈다. 그러나 그의 책상 위를 가득 채운 서류는 차츰 줄어들었고 철야하는 날은 손에 꼽을 정도가 되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쉬는 시간도 늘어난 탓에 그는 종종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다보면 문득 츠무기에 대한 생각이 점차 크기를 키워갔다. 데이터 상으로는 몸 상태가 많이 나아졌던데 멘탈은 멀쩡할까. 요즘은 뭘 하고 지낼까. 영화 상영회를 열어보자고 약속한 건 기억하고 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 질문이 시간 신전에서의 고백으로 이어지면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채 양 손에 얼굴을 파묻곤 했다.
“나 진짜 최악이다…….”
30대라는 나이가 무색하게도, 하는 행동은 사춘기 소년과 다름 없었다.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얼굴이 보이면 도망치기 바쁘면서, 시간만 생기면 그 사람에 대한 생각이 머리에 가득 찼다. 로마니의 입가에 자조적인 웃음이 번졌다. 한 달이라는 세월은 짧은 것 같으면서도 긴 법이다. 한창 때의 여자아이라면 훌훌 털어냈을 테지. 부정적인 생각이 금방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로마니 아키만이 아는 소야 츠무기라면. 주먹을 꾹 말아쥐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너무나 비겁하게만 느껴졌다.
봄이 가까워졌다. 해발고도 6000m에 위치한 칼데아가 계절적 변화에 큰 영향을 받을 리는 없었다. 그러나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봄을 맞이해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A랑 B가 사귀기 시작했다거나,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거나. 스태프들은 이런 분홍빛 도는 이야기를 꺼내며 웃음꽃을 피웠다. 그리고 로마니는 얼마 남지 않은 인원으로 일 년을 버텼으니 애틋해지는 건가, 라는 말을 남겨 다 빈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의 질타를 받기도 했다. 낭만같은 건 없는 사람 같으니라고! 이름이 아깝다! 에엑!? 나 뭐 잘못 말했어? 보기에도 한심한 일련의 대화가 끝난 뒤에는 어김없이 찰나의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오늘은 조금 달랐다. 훈훈한 이야기 뒤 누군가의 공백을 느끼기도 전, 이런 시답잖은 대화에 참여하지 않던 직원이 모니터를 빤히 바라보다 툭 말을 내뱉은 탓이다.
“그러고 보니 츠무기, 일본 간다고 하더라고요. 정식으로 서류까지 제출했어요.”
로마니는 들고 있던 컵을 툭 떨어뜨렸다. 반쯤 들어있던 커피가 책상에 엎어져 서류를 물들였으나 그는 잠시 동안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뭐라고?”
“츠무기 일본 간다고 보고서까지 제출했어요. 최종 승인은 다 빈치 씨가 했을 걸요?”
로마니의 반응에 스태프들은 눈을 끔뻑일 뿐이었다. 책상 위에 엎어버린 커피가 뚝뚝 떨어져 옷을 적셔도 그는 옷을 닦을 생각도 들지 않는 듯, 멍하니 그 말을 내뱉은 스태프를 바라보고 있었다. 닥터 왜 저래? 츠무기 군이 별다른 말 안 했나 본데. 그러면 다른 사람한테 처음 들은 거야? 그렇지. 둘이 친했는데. 속닥속닥, 잡다한 이야기가 관제실을 메워도 그는 머릿속이 텅 비어 생각을 이어갈 수 없었다. 아니, 도리어 머릿속이 가득 차 잡념을 밀어냈다.
인리수복을 완료한 츠무기가 더이상 칼데아에 남아있을 이유는 없었다. 일 년 하고도 반 년이라는 사회의 공백을 그는 충분히 메울 수 있을 것이다. 칼데아에서도 그부분은 최선을 다해 도와줄 것이라 장담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츠무기에게는 그의 일상이 있었다. 대학에 다니고 주변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고. 그러다 마음이 맞는 사람을 맞아 미래를 그려나가고……. 이런, 바깥은 꽁꽁 얼어붙어 눈보라만 휘날리는 곳에서 지낼 필요도, 그리고 로마니 아키만이 소야 츠무기를 붙잡을 구실조차 없었다.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 뒤에 붙일 수 있는 이유는 단지 츠무기의 곁에 있고 싶다는 것뿐이었으니.
꾹, 주먹을 말아쥐었다. 아아, 거절이 두려워서 지금까지 피해온 주제에 계속 같이 있고 싶다니. 이기적인 것에도 정도가 있다. 자학이 그를 좀먹었다. 뚝, 뚝, 떨어진 커피는 이미 반쯤 식어있었다. 그는 커피색으로 물든 제 옷을 기계적으로 닦아냈다. 그러나 정신은 이미 칼데아의 관제실을 떠나간지 오래였다. 그는 오늘 마기☆마리의 블로그가 갱신되면 무슨 댓글을 달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마기☆마리, 어떤 사람이 떠나가지 않았으면 할 때 어떤 말을 해야 할까요? 그 탓에 치익, 하며 관제실의 문이 열리고 제 근처에 누가 다가온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관제실에 들어온 이가 로마니의 어깨를 툭 건드렸을 때에 그는 고개를 돌려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다 빈치였다.
“누구, 로마니가 왜 이러는지 아는 사람?”
“아, 그게…….”
“레오나르도, 츠무기가 일본에 돌아간다면서. 그런 걸 왜 나한테 말 안 한 거야?”
로마니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다 빈치는 눈을 깜빡이다가 태연자약하게 입을 열었다. “그야, 자네가 츠무기를 피하고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나는 소장 대리,”
“나에게도 이정도 권한은 분명 있을 텐데? 게다가 묻지도 않았잖아.”
다 빈치는 뻔뻔하게 대답하고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로마니, 내가 예전에 뭐라 했지?” 로마니는 답이 없었다. 다 빈치가 했던 무수한 말 중 이 상황에 해당하는 것을 골라내는 것처럼. “자, 이 천재가 몇 개 일을 맡아줄 테니 직접 확인해보고 와. 해보지도 않고 겁만 먹으면 미움받는다고?”
다 빈치는 그를 의자 채로 밀어 관제실 밖으로 내보냈다. 제법 힘을 실어 민 것인지, 성인 남성은 바퀴 달린 의자에 앉은 채 그대로 밀려났다. 치익, 문이 열리고, 그 사이로 의자와 사람 하나가 빠져나갔다. 그제야 정신이 든 로마니는 의자에서 일어날 생각도 못한 채 입을 떡 벌렸다. 닫히는 문 사이, 다 빈치는 복도에 허망히 앉아있는 그를 향해 짓궂은 얼굴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마치 행운을 빈다는 듯.
그날 이후, 관제실 앞에는 로마니 아키만 출입 금지! 라는 팻말이 붙었다. 누가 썼는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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