薄紅色に染まり 下
연분홍색으로 물들어 하편 / FGO 로마니 아키만 생환 IF
그동안 로마니 아키만이 한 짓을 알면 분명 다 빈치는 깔깔 웃다가 의자에서 굴러 떨어졌을 것이다. 관제실 출입 금지를 당한 그가, 갑자기 할 일을 잃은 부랑자마냥 칼데아를 떠돈 것은 아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일은 로마니의 승인을 거쳐야 했고, A팀 마스터들의 관리 및 그들을 깨우는 것은 그가 많은 부분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전에 비해 시간이 많아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종종 늦잠을 잘 수 있는 여유가 생겼고, 느긋하게 티타임을 가질 시간이 생겼다. 아직 퇴거하지 않은 서번트들과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 받을 만큼의 여유도 있었다.
그러나 혼자 남는 순간이 오면 그는 어김없이 츠무기를 떠올렸다. 일본으로 갈 준비는 잘 하고 있을까. 혼자 돌아가게 되는데 힘들지는 않을까. 마지막으로 인사는 제대로 하고 싶은데 받아줄까. 그러다 나를 완전히 밀어내면 어쩌지. 사소한 생각은 점차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갔다. 한 번 죽었다 살아나도 여전히 겁쟁이인 로마니 아키만은 처음 겪는 감정의 격동을 외면하지도, 직시하지도 못한 채 애매한 거리만을 유지했다.
츠무기가 일본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앞으로 하루.
아직 퇴거하지 않은 서번트들은 마스터가 멀리 떠난다는 사실에 제법 아쉬운 기색을 풍겼다. 그러나 칼데아에 큰 소란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로마니 아키만은 그 점이 기이했으나 파고 들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모든 생각을 뒷전으로 하고 어두운 밤, 내일의 업무까지 미리 가져와 서류를 붙잡았으나 도통 손에 일이 잡히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은 조금 과거로 돌아간다.
츠무기가 맨 처음 칼데아에 올 때, 그는 24인치 캐리어 하나와 백팩 하나만을 덜렁 들고 왔다. 애당초, 처음에는 이곳을 평생 직장으로 둘 생각조차 없었으니 당연한 것이지만, 일 년이라는 기간 동안 지내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칼데아에서 지내며 받은 선물과 자신이 가져온 짐 중 사용하지 않을 것을 캐리어에 정리하고 나니 마이 룸은 황량하게만 느껴졌다. 이제 이곳은 비워지고 다른 사람이 들어올 것처럼 말이다.
츠무기의 방이 그렇듯, 칼데아의 복도를 걸어다니는 ‘사람’도 많이 줄었다. 칼데아에서 지내던 이들 중 절반 이상은 서번트였으니 ‘사람’이라 하는 것도 어폐가 있겠지만. 그랜드 오더가 종료된 뒤 남은 것은 뒷정리 뿐이니, 걱정 많은 이들을 제외하면 다들 영령의 좌로 돌아간 탓이다. 사람이 적어서 그런 것인지, 혹은 복도에 혼자 있어서 그런 것인지. 츠무기는 답지 않게 감상에 잠겼다. 당장 사용하지 않을 짐은 먼저 옮겨두었다. 이제 해야할 일은 칼데아의 제복을 벗고 다른 사람들에게 가벼운 인사를 남기는 것. 그 다음에는 남극 대륙을 떠나는 배에 몸을 싣고 비행기를 타러 가는 아주 간단한 것들 뿐이었다. 자신에게는 오랜만에 가는 고향이지만 마술사들이 긴 시간 은닉해온 신비를 모르는 이들에게는 그리 긴 시간도 아닐 테다. 비관적인 생각에 미간이 좁혀지는 것도 잠시, 츠무기는 생각의 연쇄를 끊어내었다. 또각, 또각. 오늘따라 조용한 복도에 선명하게 그의 발소리가 울려퍼졌다.
창밖애는 여전히 눈보라가 매섭게 몰아쳤다. 푸른 하늘을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었는데, 이 극지는 그런 작은 바램도 들어주지 않을 모양이었다. 창밖에 시선을 주던 츠무기는 마저 발걸음을 옮겼다. 일정한 박자로 복도를 메우던 발소리가 얼마 지나지 않아 멈추고, 그 자리를 익숙한 목소리가 채웠다. 목소리가 더 익숙한 두 사람— 한 명의 인간과 한 명의 서번트가 관제실 앞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니까 레오나르도. 이건 관제실에 들어가야 한다니까.”
“안—돼. 내가 말했잖아? 제대로 이야기하고 오라고.”
다 빈치의 말에 익숙한 목소리가 곤란한듯 앓는 소리를 낸다. 츠무기는 저도 모르게 벽에 붙어 섰다. 로마니가 반박하는 목소리가 잠시동안 이어졌지만 완강한 태도의 다 빈치를 꺾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몇 분 간 이어진 공방 끝에 로마니가 백기를 든 듯, 발걸음 소리가 멀어졌다. 츠무기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왜 숨었는지, 왜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것인지 제대로 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요 몇개월 동안 제대로 이야기하지도 못했으니 어색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숨을 필요는 없었다. 츠무기가 멀린의 힘을 빌려 로마니 아키만을 피해다닌 것은 맞지만 이는 단순히 얼굴을 마주하기가 힘들어서, 정도였다. 이미 한 번 거절당했는데 또 얼굴을 보라고? 그렇게 된 순간부터 마음을 접는 것은 후생에나 가능할 것이다. 물론 로마니를 향한 감정이 한 번이라도 색이 바랜 적 있냐 묻는다면 고개를 저어 부정하겠지만.
“…선배, 이런 곳에서 뭐하고 계세요?”
포우를 품에 안은 마슈가 뒤에서 츠무기를 불렀다.
“그냥, 산책하던 중이었어. 마슈는?”
“저는 공부하러 왔어요. 이제 마스터 적성자나 데미 서번트가 아니라 스태프로써 일을 하게 될 테니 새로 공부해야 하잖아요.”
포우! 작은 짐승의 우는 소리가 들렸다. 츠무기는 손을 올려 포우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러고 보니, 로마니에게 그랜드 오더 이후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마슈와 다 빈치 씨를 데리고 자신이 살던 곳을 소개해주고 싶다고. 그때, 로마니 아키만은 미묘한 표정으로 ‘아아, 그런 날이 오면 좋겠네.’ 라는 대답을 내뱉었다. 불확실한 미래나 마슈가 끌어안은 복잡한 사정을 이야기하지 않고 침묵하기를 택한 것이다. 모든 것을 말하지 않고 숨긴 것이 앞으로 몇 개나 더 있을까. 하얀 거짓말이라면 해도 된다는 그말은 분명 츠무기를 향한 것이 아니라 로마니 자신을 향한 것이었겠지. 입안이 썼다.
“응. 레이시프트의 주축은 마스터와 그 서번트들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하니까. 응원할게, 마슈.”
마슈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의 대화는 조금은 허황되기도 했고, 조금은 현실적이기도 했다. 마슈와 함께 여행을 가고 싶다던가, 언젠가 맑게 갠 하늘을 한 번 더 볼 수 있으면 좋겠다던가. 이런 이야기를 하나 둘 풀어내다 보면 시간은 제법 빨리 흘러갔다. 관제실 앞은 한 차례의 언쟁이 끝난 뒤 계속 조용했다. 츠무기는 관제실 쪽을 턱짓했다. 동행할게. 마슈와 함께 나란히 관제실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늘 로마니가 앉아 있던 자리에 다 빈치가 앉아있었다.
“응? 츠무기에 마슈. 마슈는 배울 게 있으니 그렇다 치고… 츠무기는 무슨 일이야?”
“마슈가 간다길래 그냥 들렀어요.”
“싱겁기는. 여기서 일을 해야 한다고 오는 어디 사는 누군가랑은 다르다니까.”
다 빈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뱉었다. 츠무기는 그의 말에 눈을 깜빡이다, 이윽고 미간을 좁혔다. 다른 누군가를 염두에 두고 한 말임이 너무나도 분명했다. 마슈 또한 같은 사람을 떠올리고 있을 터였다. 방금 전, 다 빈치와의 설전에서 패배하고 터벅터벅 제 방으로 돌아간 그 사내 말이다. 다 빈치는 의자 채로 몸을 빙글 돌려 츠무기를 마주했다.
“왜 그래, 츠무기.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어?”
“로, ……닥터를 염두에 둔 게 아니라고 할 생각은 아니겠죠.”
“설마! 내가 그렇게 못난 어른은 아니거든.” 언제 의자를 끌고 온 건지, 츠무기와 마슈의 앞에는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렇지만 그걸 제대로 물긴 했잖아. 이야, 낚시에도 재능이 있다니, 천재의 재능은 무섭네─.”
뻔뻔한 대답에 츠무기의 미간에 깊게 주름이 패였다. 다빈치는 의자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었다. 비스듬한 시선이 츠무기에게 향했다.
“그가 답답해?”
“아니라고는 말 못해요.”
“그렇다는 거지? 그냥 솔직하게 말해.” 다 빈치는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고 말을 이었다. “나도 동감이야. 답답하고, 그러면서도 자신의 의견은 굽힐 생각을 안 하지. 덕분에 내가 그동안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푸른 눈이 과거를 향한다. 마슈나 츠무기에게 말할 생각은 없냐는 제안에 로마니 아키만은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불확실한 게 많은 이 상황에서는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고 말하며 웃는 낯이 지금도 선명했다. 아직은 안 돼, 레오나르도. 아직은. 언젠가는 말할 생각은 있고? 하하, 장담은 못 하겠네. 평소와 비슷한 가벼운 말투. 이 상황에서 그를 대신해 미간을 좁히는 것은 다 빈치의 몫이었다. 이렇게 돌아올 수 있어서 다행이지, 그대로 사라졌다면 향할 곳이 사라진 감정을 삭히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을 테다.
로마니 아키만이 칼데아에 온 뒤, 오랜 시간 친구로 지낸 다 빈치조차 이런 생각을 가감없이 표현하는데 다른 이들은 어떻겠는가. 게다가 그것이 소야 츠무기라면. 평범한 민간인으로 살아왔음에도 로마니 아키만과 비슷한, 그러나 성장 배경 탓에 많은 것이 다른 츠무기는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누구보다 더 잘 이해하겠지만, 그 내면을 알기에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존재하지 않던가. 지금도 그의 백색 눈동자에는 불만이 가득하다. 누군가가 잘못해서 툭 건드리면 매서운 북풍이 몰아칠 것처럼. 두 사람 사이에 앉아있던 마슈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 저기─ 하고 말문을 꺼내야겠다 다짐할 즈음, 다 빈치가 먼저 침묵을 끊어내었다.
“—그래도 말이야, 츠무기. 비록 로마니가 중요한 건 얼버무리지만 대부분 진심이었다는 건 알잖아.”
“기분 풀라는 거예요?”
“아니? 로마니는 조금 더 혼쭐나야해. 지금까지 누구도 이렇게 대하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더 그런 거야. 더 하도록 해!”
순식간에 장난스럽게 변한 말투에 츠무기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다 빈치는 입꼬리를 올려 씨익 웃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도 이제 더이상 그는 미래도, 현재도 볼 수 없는 걸. 이렇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을 거야. 아마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겠지.”
바보같지만. 다 빈치가 시선을 돌렸다. 츠무기의 표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츠무기도 그에게 나쁜 의도는 없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테다. 비록 그가 융통성 없이 자신의 생각을 밀어붙이는 면모가 있다고 하더라도 츠무기는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 감정의 골을 봉합했겠지. 그렇지만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자신의 몇 안 되는 친우의 등을 밀어주는 친절을 베풀기로 했다.
츠무기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내뱉어야할까. 입술을 달싹이지도 못하고 머릿속에 가득찬 생각을 정리하느라 바빴던 탓이다. 내려앉은 정적이 이질적이었다. 다 빈치는 끊어낼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마슈의 무릎에 자리잡은 포우가 뒷발로 귀 뒤를 긁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려왔다. 마슈가 침묵을 끊어내고자 저기, 하고 말을 꺼냈을 즈음에야 츠무기가 고개를 들었다. 언어는 음성조차 되지 못해 거의 숨소리에 가까웠다. 몇 번의 호흡, 그 뒤에 이어진 생각해볼게요, 라는 작은 속삭임. 다 빈치는 미약한 대답에도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츠무기는 가볍게 목례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관제실을 나섰다. 마슈가 얼핏 본 백색 눈동자에는 분노를 닮은 슬픔이 아닌 다른 것이 담겨 있었다. 마치 특이점에서 결전을 앞두었을 때와 비슷한. 마슈는 고개를 돌려 다 빈치를 바라보았다. 그의 뒤에는 아주 익숙한——
“멀린, 몰래 지켜보는 건 악취미라는 것을 잘 알텐데.”
“보는 것밖에 재능이 없는 나약한 마술사에게 그런 잔인한 말을. 보기보다 가차 없네, 다 빈치 군.”
멀린이 팔짱을 끼고 서있었다. 마슈는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마냥 태연자약한 그의 태도에 흘러내린 안경을 손등으로 치켜 올렸다.
“멀린 씨!? 언제부터 계셨어요?”
“음— 아마 캐스팔루그가 다섯 번째 하품을 할, 어이쿠, 화내지 마.”
멀린이 장난스레 말하자 포우가 으르렁댔다. 마슈가 포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자 진정한듯 했지만 고개를 홱 돌리는 것이 온 몸으로 ‘화났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마슈는 눈을 깜빡이며 포우를 보다가 멀린에게 시선을 돌렸다.
“멀린,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츠무기를 도와준 거지? 덕분에 일이 더욱 번거로워졌잖아.”
“아하하, 마이 로드가 부탁하는데 안 들어줄 수는,”
“보나마나 재밌어보여서 도와준 걸 거면서.”
“들켰나? 그렇자먼 다 빈치 군, 너라도 도와주고 말았을 걸? 그때의 마스터의 얼굴은—”
“정말 악취미네.”
다 빈치는 손을 저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마슈는 이해하는 것을 포기하고 포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 빈치는 멀린을 비난했지만 부정하지는… 않은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을 꾹 내리 눌렀다. 멀린이 눈을 가늘게 뜨고 관제실 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보이나요? 마슈의 질문에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만 마슈 양도, 다 빈치 군도 알다시피 두 사람은 가만히 두면 여러모로 먼 길을 떠나기 마련이라,”
“더 먼 길을 가게 했지.”
“매정하긴.” 멀린은 구태여 반박하지 않았다. 대신 늘상 짓는 웃음을 입에 걸었다. “그렇지만 먼 길을 돌아가야 그 끝에 있는 게 더 아름다운 법이지. 비록 이전까지 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지는 않았지만——.”
멀린은 도중에 말을 끊었다. 단어를 고른다기보다는 반응을 살피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다 빈치는 책상 위에 내려놓았던 커피를 마시고 있었고, 마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어질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원하는 반응을 얻지 못한 멀린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금 정면을 바라보았다.
“지금이라면 그래, 두 사람이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는 것을 바라도 괜찮겠지.”
나직한 목소리가 끝을 맺었다. 멀린이 손을 뻗자 그 끝에서 이름 모를 분홍색 꽃이 피어났다. 로마니의 머리색보다는 연한 벚꽃과 닮은 꽃. 그 이름을 물어보면 멀린은 바로 알려줄 것이 분명하나 마슈는 그저 꽃을 바라보기만 했다. 보라색 눈동자가 멀린의 손바닥에 피어난 꽃을 떠나 그의 얼굴로 옮겨갔다. 시선을 마주한 멀린은 눈을 접어 웃어보였다. 마슈는 천천히 한 손을 들어올렸다.
“저기, 그럼…….”
닥터도 선배를 좋아한다는 건가요?
관제실에 있던 모든 사람과 서번트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다시금 츠무기가 일본으로 돌아가기 하루 전.
로마니는 아마 이번 생에 있어서 가장 큰 결심을 하고 복도를 배회했다. 츠무기가 아직도 멀린의 도움을 받고 있다면 로마니는 운명의 여신이 제 손을 들어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은, 그렇게 하염 없이 때를 기다릴 수는 없었다. 목표든 목적이든, 무언가 한 가지를 설정하면 그대로 계속 걸어나가는, 누군가는 미련하다 평할 지난 십 년의 관성이 이런 때에도 어김 없이 그 존재를 드러낸 것이다.
로마니 아키만은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하루를 헛되이 보낼 생각은 없는 것인지, 칼데아를 돌며 츠무기의 행방을 찾았다. 두 사람이 종종 마주치던 도서관, 시청각실에는 거의 상주하는 몇 명의 스태프와 서번트만이 있을 뿐 츠무기의 모습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로마니는 그 안에 있던 사람들에게 가볍게 목례하고 나왔다. 식당과 주방에도 없다. 혹시나 해서 들러본 관제실에서는 다 빈치랑 마슈가 로마니를 막는 일이 벌어졌고-내일이면 선배가 간다구요! 들었지 로마니?- 시뮬레이터 룸은 텅 비어있었다.
칼데아 안을 한 바퀴 빙 돌았음에도 츠무기는 보이지 않았다. 물론 아직 그의 방에 찾아가보지는 않았으나, 그가 아는 소야 츠무기라면 방을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것이라는 확신에 비슷한 감각이 있었다. 설마 아직도 얼굴조차 보기 싫어서 아직도 멀린의 힘을 빌리고 있는 건가? 부정적인 생각이 스멀스멀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의 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로마니는 이내 복도 한 가운데에 우뚝 서서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츠무기가 가버리면 연락을 하는 것도 요원해질텐데.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차라리 처음부터 끝까지 모른 척 하는 것이 나았을지도 몰라. 이 성격은 두 번이나 죽었다 살아나도 바뀌지 않는구나.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저 멀리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 츠무기가 그를 직접 찾아올 리는 없으니 그저 지나가는 서번트, 아니면 스태프일 것이다.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그 앞에서 멈춘 이에게 내뱉을 변명거리를 재빠르게 생각해내는 데에 성공했으나, 상대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그 모든 글자는 새하얗게 지워지고 말았다.
“……로망?”
상상도 못했던 목소리였다. 거의 일 개월만에 듣는 호칭에 순식간에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분명 한심한 얼굴을 하고 있을 거야. 쿵, 쿵, 거센 심장 소리가 귓가에 선명하게 들렸다. 이제 로마니는 다른 의미로 고개를 들기가 무서웠다. 그러나 이렇게 고개를 숙인 채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후우, 크게 심호흡한 뒤 고개를 들었다.
서로 다른 색의 시선이 교차했다. 백색 눈동자가 한치의 왜곡도 없이 그의 상을 비추었다. 로마니는 일순 그 모습에 말을 잃었다. 고저 없는 목소리. 차분한 얼굴. 그렇기에 순간 시간이 멈춘 듯한 착각이 일었다.
“……응, 츠무기.”
목이 잠겨있었다. 그는 큼, 하고 목을 가다듬은 뒤 허리를 곧게 폈다. 할 말이 있어서, 들어줄래? 라고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면 되는데, 로마니는 입술만 달싹일 뿐 무어라 말을 꺼내지 못했다. 몇 번이고 주먹을 쥐었다 피고 침을 꿀꺽 삼키는 사이, 츠무기의 입술이 열렸다.
“피해서 미안해요.”
그가 상상한 수없이 많은 시나리오 중 츠무기가 먼저 사과하는 레퍼토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로마니 아키만은 가장 먼저 자신을 탓하는 사람이었고, 이번 일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한들 그에게 귀책이 있다-고 납득까지 했다. 불안과 벅참, 그외의 온갖 감정으로 고양되었던 머리가 차게 식었다.
“아니, 네가 사과할 일이 아니야, 츠무기. 오히려—,”
“서번트의 힘을 빌려서 피해다닌 건 저예요. 로망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걸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로마니는 제 친우의 말을 떠올렸다. 인간은 이성적으로만 생각할 수는 없어. 그의 말이 옳았다.
“마음으로는, 제 말에 당신이 멈춰주기를 바랐나봐요. 불가능할 걸 알면서도.”
연녹색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츠무기는 체념한듯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저 참, 바보 같네요.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로마니는 꾹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분명 방금 전에 목을 가다듬었는데 목소리가 갈라졌다.
“많이 늦었지만, 대답을 하고 싶어.”
쿵. 쿵. 심장 박동 소리가 다시금 크게 들려왔으나 로마니는 자신이 나름대로 침착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말을 더듬지도 않았고 말을 돌리거나 얼버무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눈치채지 못한 사이 장갑을 낀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미리 말하지 못한 건 미안해. 그렇지만— 후회가 있다면 조금 더 나은 방법을 찾지 못한 것, 더 좋은 이별 방식을 찾지 못한 것 때문일 거야.”
하얀 거짓말이라면 괜찮지 않냐, 사람은 언제나 솔직할 수는 없는 법이라고 말했던 그가 진심을 토로했다.
“그렇지만 돌아온 뒤에는 조금 다른 방법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 모든 걸 뭉뚱그리고 인사하는 게 아니라 다른……. 그 이후에도 네가 날 밀어낼까 두려워서 방치하고 거리를 두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이렇게 시간에 쫓길 일도 없었겠지.”
내일이면 츠무기는 일본으로 돌아간다. 되돌리고자 시도한 것은 좋았지만 너무 늦었다. 로마니 아키만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을 수조차 없었다. 지금까지 이어져온 삶의 궤적이 괜히 원망스러웠다. 이런 일이 있었다 한들 그는 쉬이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삶은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어지기 마련이었고 그가 솔로몬 왕으로 살아온 긴 세월은 아직 ‘로마니 아키만’으로 산 기간을 훨씬 초월했다. 그러므로 입에 담을 수 있는 것은 변화에 대한 약속이나 미래에 대한 희망이 아닌 사과 뿐이었다.
“비겁한 남자라서 미안해.”
그렇지만, 나도 좋아해, 츠무기. 네가 날 밀어내면 나는 더이상 다가갈 수가 없거든. 나에게는 너를 붙잡을 명분도 없으니까……. 겁이 많은 건 죽었다 살아나도 변하지 않나봐. 차라리 이런 게 바뀌었으면 좋았을 텐데.
로마니 아키만은 후련하게 웃었다. 아아, 정말 비겁하다. 떠나는 사람을 붙잡고 가지 말라는 말은 못 할 망정 이제서야 마음을 전하다니. 그는 시선을 돌려 츠무기의 안색을 살폈다.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츠무기는 울 것만 같았다. 정확히는 울고 싶었다.
차라리 로마니 아키만이 뻔뻔하게 굴었다면 그에 대한 감정을 훌훌 털어버릴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잘한 것도 아니면서 태연자약하게 아직도 날 좋아해? 하고 물었다면 그대로 등을 돌려 떠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로마니 아키만은, 소야 츠무기가 한 번도겪어보지 못한 감정에 앓게 만든 이 사내는 그런 뻔뻔한 사람은 되지 못했다. 죽었다 살아나도 맨 처음 이 땅에 생을 부여받은 순간에 쥐고 있었던 천성은 바뀌지 않는 모양이었다.
로마니 아키만은 솔직하고, 공감보다는 이해로 움직이면서도 다정하다. 입술 사이로 바람이 샜다. 어쩌다 이런 남자를 좋아하게 된 것일까. 그가 돌아온 뒤 오늘까지, 대략 일 개월 동안 계속 생각해보았지만 명쾌한 해답은 발견하지 못했다. 로마니와 제대로 된 대화를 하지 않던 시간에도 츠무기의 눈동자는 코너를 돌아 사라지는 분홍색 머리카락 끝을 좇았고, 그의 목소리가 들리면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늦추곤 했다. 다 빈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로마니를 ‘바보같다’고 평했지만 사실 진짜 바보는 소야 츠무기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미 일 개월 가량 지난 고백에 귀를 시뻘겋게 물들인 채 좋아한다 답하는 것은 반칙이다.
츠무기는 이런 사람을 거절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침묵이 길게만 느껴졌다. 츠무기는, 지금 자신이 분명 한심한 얼굴을 하고 있으리라 짐작했다.
“로망은 비겁해요.”
“…알아. 그렇지만 말하고 싶었어.”
“분위기도 못 읽고 결정하는 것도 느리죠.”
츠무기의 매도 아닌 매도에 로마니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백색 눈동자가 올곧게 그를 향한다. 옅은 색으로 물든 얼굴은 그가 한 번도 못 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쑥스러움도 곤란함도, 분노도 아닌 감정이 복잡하게 얽히고 설켜 그 얼굴은 일견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그래도 좋아해요.”
고백은 볼품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는 이 정도면 충분했다.
선배에게,
음성이나 영상이 아니라 문자로 연락을 하려니 제법 어색한 기분이에요. 처음에는 전화를 하려고 했는데 다 빈치 짱과 다른 스태프 분들이 ‘일본은 시차가 있으니까 이메일로 먼저 연락해보는 게 좋을 거야’ 라고 하셔서 이렇게 글을 적게 되었어요. 편지는 단 한 번도 써본 적 없어서 걱정이지만, 부디 잘 받아주시면 좋겠어요.
선배가 일본에 간지 이제 1주일 가량 지났네요. 그동안 칼데아는 여전했어요. 선배와 닥터의 빈 자리를 다른 스태프끼리 나누어서 하다가, 결국에는 아직 퇴거하지 않은 서번트 분들께 가져가기는 했지만 결국 바쁘다는 것, 그리고 다들 어찌저찌 힘내고 있다는 점에서는 여전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선배는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간 것이니, 하고 싶은 일도, 해야 할 일도 많을 거라 생각해요. 제 집은 따지자면 칼데아지만 영화나 소설 소게서 본 ‘집’이라는 공간은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었고 다양한 역할을 했으니까, 어떨지 짐작할 수는 있어요. 여러모로 바쁘시겠지만 몸과 마음이 편안하시기를 바라요.
그러고 보니, 닥터는 푹 쉬고 있나요? 다 빈치 짱이 마침 잘 됐으니 푹 쉬다 와! 라고 해서 제법 당황하신 것 같던데, 일본에서도 칼데아를 걱정하는 건 아닐까 모르겠어요. 지금 옆에서 다 빈치 짱이 ‘만약 로마니가 그러는 것 같으면 츠무기가 한 번 쓴 소리 해줘!’라고 전해달라고 해요.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외에도 잔뜩 있지만, 가능하면 직접 말로 전하고 싶으니 아껴둘게요. 편할 때 회신해주세요.
마슈 키리에라이트.
칼데아 제복이 아니라 흰색 티셔츠에 편한 트레이닝복 바지를 입은 츠무기는 인류 최후의 마스터, 라기보다는 평범한 대학생이라는 단어에 더욱 어울렸다. 대학생이 자취하기에 적절한 크기인 1K 방은 한 쪽 벽에는 싱글 침대가, 다른 쪽 벽에는 책장과 책상이 붙어 있는 아주 평범한 구조였다. 바닥에는 계절이 지나 탁자로 사용하는 코타츠가 놓여 있었다. 중문 너머의 부엌에서는 달그락대는 소리가 들렸다. 중문 가운데의 유리창으로 자신의 키보다 낮은 곳에 위치한 싱크대 앞에서 마침 설거지를 끝마친 로마니의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에게는 2주라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휴가가 주어졌다. 로마니는 다른 사람들도 아직 제대로 휴가에 가지 못했는데 소장 대리인 자신이 갈 수는 없다며 손을 내저었지만 로마니를 시작으로 하나 둘 휴가를 보낼 것이라는 말에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이고 다 빈치가 내미는 비행기 티켓을 받아들었다. 맨 처음 그는 츠무기가 완전히 일본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는 점에 당혹을 숨기지 못했으나, 그런 걸 소장 대리 몰래 결정할리가! 라는 웃음 섞인 말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말이 맞았다. 아무리 서로가 서로를 피한다 한들, 그런 중요한 일이 로마니 아키만에게 알려지지 않을 리 없었다.
“……완전 속은 기분이야.”
“기분이 아니라 진짜 속은 거예요, 닥터.”
마슈의 말에 로마니는 윽, 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다 빈치는 그 모습을 보고 소리 내어 웃고는 책상 위에 커피를 내려 놓았다.
“연애를 시작하자마자 아주 잠시지만 장거리 연애를 할 생각은 아니었겠지, 로마니 아키만?”
“그 전에, 연애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도 안, ……여, 연애라니, 레오나르도!”
“그럼 연애가 아니라 갖고 노는 건가? 그렇게 안 봤는데 대단한데, 로마니.”
반 강제─ 라는 말 보다는 어쩌다보니 비행기에 타서 일본까지 오게 된 로마니였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뒤에는 빠르게 체념했다. 그의 하루는 대부분 츠무기의 일정에 맞춰져있었다. 대학에 휴학계를 제출하러 갈 때에도, 가족들에게 간단히 이야기를 하러 갈 때에도 잔뜩 긴장한 채 옆에 붙어 있었다-이때 부모님에게 츠무기의 연인이 아닌 직장 동료이자 준 보호자라고 소개한 탓에 원룸에 돌아온 뒤 그는 츠무기에게 가벼운 질타를 받았다-.
기간 한정의 평화로운 시간. 일반인으로서의 삶을 완전히 정리하고 마술과 신비의 세계로 완전히 넘어가기 전의 찰나의 유예. 로마니는 마술사들의 사정에 그를 휘말리게 한 것이 미안한 듯했지만 츠무기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오히려 로마니나 다른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지 않고 곁에 있을 수 있다는 점에 내심 안도했다. 츠무기는 시선을 돌려 설거지를 끝내고 손의 물기를 닦는 로마니를 바라보았다. 칼데아에서는 볼 수 없었던 편안한 복장을 한 그는 츠무기와 눈이 마주치자 눈꼬리를 내리며 웃어보였다. 츠무기가 계속 그를 바라보자 멋쩍은듯 손가락으로 볼을 긁적이고는 입모양으로 왜? 하고 물어왔다. 츠무기는 고개를 저었다.
일본에 온 뒤 웃음이 는 것을 로마니는 고향에 왔으니 편안해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츠무기는 그의 오해를 구태여 정정하지 않았다.
그야, 츠무기는 단지 낭만에 물들었을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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