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건 다니엘 카펠

말로

“그는 이 시대에 없어서는 안 되었을 위인이었습니다.”

검은 머리카락을 음침하게 얼굴 위로 드리운 남자가 묘비 옆에 서서 추도사를 읽기 시작했다. 하늘은 늘 그랬듯 우중충하고 흐렸다. 굵은 눈발을 실은 겨울바람이 좁은 틈새를 매섭게 훑으며 지나갔다. 사람들이 눈물을 꾹꾹 찍어내고도 남은 수분이나, 눈가에 붙어 녹은 눈송이는 건조한 공기가 스쳐지나가면서 눈꼬리에 말라붙었다. 장례식에는 더없이 어울리는 날이었다. 흐느끼는 소리가 점차 잦아들자 남자는 어조에 힘을 실어 갔다.

“그분답지 않은 죽음이라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저 또한 얼마간 의심했습니다. 혹시나 겉모습만 닮은 다른 인물은 아닐지, 가족을 노린 누군가가 꾸며낸 일은 아닐지 말입니다. 하지만 여기 계신 여러분은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 이미 짐작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남자의 옆, 그러나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작은 무리 안에서 다시 희미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군중 속에는 ‘평온치 못한 죽음일지라도 축복을’ 바라며 성호를 긋는 사람도 있었다. 남자는 그들이 슬픔을 표현하고 다시 감정을 가라앉힐 때까지 침착하게 기다렸다.

“그러니 더욱 애도합시다. 그 자신만의 손으로 불가능해 보일 듯 넓은 대지를 일구어내고, 누구에게나 사랑으로 대했던 훌륭한 인물을 기리도록 합시다. 하지만 죽음 이후를 너무 걱정하지는 맙시다. 요한복음서 5장 24절¹에는…”

남자는 낭독연설을 멈추고 당혹과 순간의 공포로 가득한 표정을 했다. 그 시선의 끝에는 장례식의 당사자가 있었다. 관에 누워 부패하고 있어야 하는 테건 다니엘 카펠이, 남자의 어머니가 건강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분위기가 한껏 술렁였다. 어느 쪽으로 시선을 두어야 할지 모르는 군중 사이를 테건이 헤치며 가로질렀다. 그리고 뒤로 물러서는 의붓아들의 손을 낚아채며 낮게 속삭였다.

“누가 어떤 부분에서 도움을 줬는지는 나중에 말해도 충분할 거다. 얌전히 따라와.”

그 말에 로버트 카펠은 잠시 얼굴을 찡그리더니 일부러 웅성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해명하듯 좀스럽게 외쳤다.

“그래, 경찰! 이건 경찰이 잘못한 거야! 분명 내가 전달받은 결과는……!”

“뇌물로 찍어냈지. 더 구길 체면이라도 남아 있니?”

더욱더 강하게 잡아끄는 손길에 저항하지 못한 로버트가 테건을 가까이에서 내려다보았다. 눈은 여전히 당황으로 크게 뜨여 있었고, 잡힌 손은 부들부들 떨렸다. 제레미 카펠이 사색을 하고 다가와 당장 여기서 일을 크게 만들 필요가 없음을 간언했다. 그러자 테건은 그대로 돌아서서 조문객을 짧게 둘러보았다. 개중 많은 이들이 친분만 있던 부류였고, 정말 친구로 두었던 이들은 감격하거나 애써 태연한 척 하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남동생은 없었다.

“심려 끼쳐 죄송합니다. 우선 모두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차후 서신을 통해 설명하겠습니다.”

단순히 선언하고 다시 의붓아들을 끌어당기는 테건의 행동에 사람들은 잠시 멎어들기만 할 뿐, 도무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친구를 제외하고는 가정사를 염탐하려는 듯 작게 기웃거리며 상황을 살폈다. 제레미가 하나하나 찾아가 돌아가길 부탁한 후에야 인파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의붓딸인 아멜리아 트렌치만 카펠 집안과 함께 남았다. 첫 번째로 그에게도 밝혀지지 않은 혐의가 있을 가능성이 존재했고, 두 번째로는 그렇지 않다면 이 사태에 관해 함께 논의할 권리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멜리아는 깊게 연관되었으면서도 외부인인, 당장 짚지 못할 다른 사항들을 빠르게 알려줄 수 있는 유이한 사람이었다. 다른 한 사람은 10년도 넘게 사업 내외의 일을 함께한 변호사인 에드워드 홉스였고, 그는 가장 중요한 참고인으로서 저택을 방문할 예정이었다.

각주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한 달 만에 돌아온 저택은 아주 고요했다. 테건이 마차로 보낸 짐과 함께 도착 소식을 먼저 전해 듣고도 현관 밖에서 대기하던 사용인은 단둘뿐이었다. 계략이 새어나갈 구석이 없도록 사용인의 절반 이상을 다른 곳으로 추천해버린 로버트 때문이었다. 테건은 제레미가 이를 막지 않고 대체 무얼 하고 있었는지 짧게 생각했다. 아마 이전의 도박 중독을 들먹이며 로버트가 재산에 관한 모든 권한을 요청했을 터였다. 그리고 직접 고용주의 귀환을 확인했으면서도 어안이 막힌 채로 서 있던 집사에게 지팡이를 떠맡겼다.

“단체로 넋을 잃었나… 짐 정리는 끝났나? 수 시간 내로 도착할 에드워드 홉스를 제외하고는 예정된 방문자가 없네. 혹시라도 그 외의 외부인이 찾아온다면 말 받아주지 말고 쫓아내게.”

지시를 끝내고서는 의붓아들의 야심을 미리 알아보지 못했던 자신을 문책하면서도 처분 방식을 고민했다. 우선은 그의 악의가 정확히 무엇을 위해 발산되었는지가 필요했다. 그렇게 드러난 결과를 바탕으로 판사에게 선처를 부탁할지, 보석이 가능하도록 요청할지, 아니면 무엇도 하지 않을지가 결정될 예정이었다. 테건이 앞서가자 나머지 세 사람이 뒤를 따랐다. 똑바로 관리되지 못한 지가 겨우 며칠밖에 안 되었는데도 나무 바닥이 걸음에 짓눌리며 얕은 삐걱 소리를 냈다. 거기에 온통 검은색으로 칠해진 옷차림이 더해져 꼭 장례행렬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사람들 앞에 막되게 나설 일을 만들어주어 참으로 고맙다. 어디서 시작해 이런 결론이 나왔는지 궁금하구나.”

순식간에 가정과 평화의 원수가 된 로버트는 냉랭한 말에 죽을상을 하고 침묵했다. 그러나 테건은 돌아보지도, 발걸음을 멈추지도 않고 목적지로 향했다. 그가 항상 사용하던 개인 집무실은 맹랑하고 당연하게도 열려 있었다. 잠금쇠를 아예 분해하고 들어가 문고리는 척 보기에도 새것인 티가 났고, 내부는 청소한 시늉도 없이 헤집어진 상태였다. 테건은 의자에 앉아 책상을 간단히 정리했고, 다른 가족 구성원 또한 책상 앞에 서로 마주 보도록 놓인 두 소파에 분산되어 앉았다. 방 안에서 테건의 매서운 시선은 한 사람만을 향했다. 그 시선을 받는 한 사람은 미처 실패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가련하게 떨었다. 나머지 두 사람은 해명을 바라며 기다렸다. 시간이 멈춰가는 듯 조용한 광경은 불과 몇 시간 전과 마찬가지로 테건이 깨뜨렸다.

“차라리 나를 보고 ‘살아계실 줄 알았다’며 달려왔다면 그림이 꽤 좋았겠지. 번거롭게 경찰을 끌어들일 일도 없었을 거다. 네가 벌인 짓이 얼마나 커질지 생각이나 해 봤니?”

여전히 아들을 향한 시선은 냉랭했고, 일종의 압모마저 느껴졌다. 결국 로버트는 거짓 장례식에서의 구차한 변명 이후 처음으로 말을 하기로 결심했다. 다만 지속되는 중압감이 아닌, 도발하고 떠보는 것으로 들리는 마지막 질문 때문이었다. 잘못 수선된 커튼처럼 음침하게 드리워져 있던 앞머리를 양옆으로 치우고 쓸어넘기며 입을 뗐다. 그 대답은 다시금 테건이 이 사건을 맹랑하게 여기도록 했다.

“해 봤죠. 그런데 이것보다 좋은 방법이 없더라고요.”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었겠지. 조급하게 부모를 음해하다니 실망스럽구나. 가계를 맡은 것으로는 안심할 수 없었니?”

“당신이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해?”

분위기가 한층 싸늘하게 식었다. 제레미가 놀라서 테건과 로버트를 번갈아 보는 동안, 아멜리아는 로버트만을 쏘아보았다.

“그럼 너는 어머니께서 뭘 모르리라 생각하고 그따위로 말을 하지?”

“아멜리아.”

테건이 발화자에게 시선을 돌리고 멈추라는 의미에서 차분하게 이름을 불렀으나 아멜리아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베일이 드리워진 모자를 여태껏 벗지 않은 탓에 안에 든 얼굴이 열분, 긴장, 아니면 경쟁자가 사라질 위기를 맞아 느끼는 오희 중 무엇으로 차 있을지는 누구도 볼 수 없었다.

“당분간 오지 말라고 한 이유가 이거야? 몰래 손쓰는 걸 들키기 싫어서?”

“그래, 맞아. 그리고 이 망할 인간이 네 쪽으로 갔을 리도 없으니 봤냐고 물어보지도 않았어. 하지만 네게도―”

순간 테건이 손바닥과 아래팔을 이용해 책상을 내리쳤다. 소리에 놀라 반사적으로 돌아본 이들은 역광이 들어 어둡게 굳은 얼굴을 마주했다. 누구도 이전에 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방금 발언은 아주 적절하지 못했어, 아멜리아. 그렇게 대놓고 비난하면 미리 공모한 것 같잖아. 모자부터 벗어서 내려두지 그러니?”

충격 소리가 들린 순간부터, 잠시 마비되어 있던 아멜리아가 말을 따라 모자를 탁자 위에 내려둘 때까지 모두가 11번 숨을 쉬고 일정히 골랐다. 여전히 질식할 듯 공기는 단단했으나, 분위기가 비교적 진정되어 보이자 이번에는 제레미가 달래듯이 말했다. 문제가 이 이상 커지는 일 없이 부드럽게 잘 마무리되기를, 그리고 테건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덮어주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잘 설명하면 용서해주실지도 모르지. 네 어머니가 그렇게 박정한 사람도 아니고…….”

“하지만 말하고 싶지 않다면 침묵을 계속해도 좋아. 네가 아니라면 다른 이들이 사정을 제외하고 사실만을 말해줄 테니.”

제레미는 몸을 당겨 소파에 걸터앉고 항의하고 싶다는 얼굴로 테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 가정의 최고 실권자는 명백했다.

“결정은 이미 내리지 않았어? 내가 얼마나 간절하게 빌고 용서를 구하든 법으로 해결할 거잖아.”

로버트가 고개를 홱 돌리며 끔찍하게 강한 어조로 떠들었다. 시야에 쨍하니 들어오는 직사광선에도 눈살을 찡그리지 않고 치떴다.

“그럼 이 장황한 사기극을 그저 치기로 봐줘야 하겠니? 세상이 우릴 뭐라고 생각하겠어. 아멜리아, 가서 남자 두 명만 데려와라.”

예상이라도 한 듯 말을 듣자마자 조심스럽게 일어서 문으로 걸어 나가는 아멜리아는 이미 동생을 외부인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사자는 그 뒷모습을 어처구니없다며 바라보았다. 한편 테건은 모노클을 벗고 눈을 감은 채로 눈시울을 꾹꾹 눌렀다. 꼭 안타까움에 눈물이라도 흘리려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리 바빠도 관심만큼은 충분히 보여줬다고 생각했는데 네게는 충분하지 못했나 보구나.”

“제대로 묻지도 않고 어중간하게 떠넘기는 게?”

“네 참담할 미래를 알아차렸어도 말은 똑바로 하자.”

석민하던 모습이 한순간에 사라진 탓에 로버트는 다시 강렬한 시선을 느꼈다. 그림자 속에서도 멸시로 번뜩이는 눈빛 앞에, 오기로 대꾸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발악처럼 아르렁대기만 했다.

“당신이야말로 이해 없이 지껄일 거면 차라리 닥쳐. 내가 뭘 바라는지 신경이나 써 봤어? 그러면서도 관심을 줬다고―”

“적어도 내가 쌓아온 것을 원한다는 점은 이전부터 알았다. 그래서 일단 가계부터 맡겼더니 이따위 불명예를 안겨? 양심이 있긴 해?”

또 한 번 말이 끊기자 로버트는 기가 찼는지 한숨만 연거푸 뱉었다. 테건은 서로의 감정을 상하게만 한 대화가 더 진행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며 의자에 몸을 묻었다. 오래 고민한 끝에 결정을 내렸을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그리고 간략하게 정리해 말했다. ‘오만불손한 아들은 선처도 기대할 수 없고 어떠한 참작도 받지 못할 것이다.’ 마침 아멜리아가 부른 집사 하나와 풋맨 하나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둘 모두 냉랭하고 격정적인 상황에 적잖게 당황한 눈치였다. 테건은 한숨을 푹 쉬고 로버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그들에게 명령했다.

“데리고 나가게. 창에는 못질을 하고 위험한 물건은 전부 빼내. 그리고 도망치지 못하도록 감시하게. 며칠이면 돼.”

두 사용인은 소파로 다가와 로버트를 양쪽에서 붙잡았다. 저항은 그리 거세지 않았다. 발걸음은 순순히 문 쪽을 향했다. 다만 시선만큼은 단 한 번도 걷는 방향을 보지 않았다. 앞에 서 있던 아멜리아가 문고리를 붙잡아 문을 활짝 열어두었다.

“알아둬. 당신이 날 이 꼴로 만든 거야.”

문이 닫히기 직전 두 눈을 희번덕이며 악에 받쳐 울부짖는 로버트를 오직 제레미만이 처절하게 바라보았다. 테건은 책상 위를 마저 정리했고, 아멜리아는 방을 가로질러 걸어 들어와 바로 옆에서 그를 도왔다. 장내는 마침내 조용해졌다. 들리는 것이라고는 종이가 맞닿아 사각거리는 소리와 째깍거리는 시계 초침 소리가 전부였다. 제레미가 휙 돌아서서 소심하게 따져 물었다.

“조금 더 잘 대해줄 수 있었잖아. 무려 20년을 함께한 당신 아들이라고. 한 번 눈감아주는 게 어떻다고 그래?”

“저 애가 위반한 법이 몇 개일지, 그냥 뒀다가 우리 위신이 어디까지 떨어질지 생각해. 어떻게든 주워 담을 수야 있겠지만 이런 종류의 불공정은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잊지 마.”

손을 멈추지 않으면서도 명확한 발음으로 빠르게 쏘아붙이는 말에 제레미는 입을 다물었다. 당장 드러난 것만 해도 위조와 사기, 그리고 뇌물까지 셋이나 되었다. 할 말이 남을 리가 만무했다. 테건이 짧게 시계를 흘겨보았다.

“에드워드 홉스가 곧 도착할 거야. 멀뚱히 서 있지만 말고 먼저 가 있어. 당신이 몰랐던 재미있는 일은 그가 전부 가지고 있을 테니.”

제레미는 잠시 서 있기만 하다가 대답도 불평도 없이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문을 닫고도 한참을 겸연한 얼굴로 쳐다보고 나서야 응접실로 향했다. 복도는 아주 고요했다. 간혹 위층에서 소음이 들리기는 했으나, 금세 잠잠해졌다. 응접실은 따뜻하긴 했으나 대기 중인 인원이 없어 정적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그려놓은 듯했다. 제레미가 문을 비스듬하게 마주 보는 1인용 소파에 앉은 후로 벽난로가 몇 번이고 타닥거리는 소리를 냈고, 이내 10년 넘게 테건과 함께하는 사무 변호사인 에드워드 홉스가 누구의 안내도 없이 들어왔다. 두 부부보다 젊은 나이임에도 일로 쌓인 피곤한 인상 탓에 액면이 상당히 높아지는 사람이었다.

“곧 올 겁니다.”

“예상보다 상황이 나쁜가 봅니다.”

에드워드가 이해하겠다는 의미로 짧게 받아쳤다. 모자를 벗어 벽에 거는 동안 제레미가 맞은편 자리를 짚어주자 가방에서 편지 봉투들을 꺼내 테이블 위로 올려놓으며 앉았다. 버릇처럼 한쪽 팔꿈치를 팔걸이 위로 올려 뒤쪽으로 비스듬히 치우친 자세를 하고는 설명을 시작했다.

“기간이 짧았던 만큼 얼마 되지는 않지만, 상황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있습니다. 반드시 보여주라고 권하시더군요. 이것 또한 마지막으로 보내신 편지에 적혀 있습니다만.”

모든 봉투에는 테건의 이름 대신 ‘다니엘 비숍’이라는 남자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내용물을 꺼내 보면 첫머리에는 겉봉투와 다른, 수신인과 발신인의 실제 이름이 또렷하게 명시되어 있었다. 제레미는 이렇게까지 비밀스럽게 연락을 주고받아야만 했는지를 고민했으나, 조사를 부탁하는 테건의 첫 편지에 에드워드가 보낸 답장을 읽으며 납득했다. 로버트는 만약 테건이 살아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면 제거할 생각이었다. 오늘 관 안에 든 시신은 다른 사람이었으니 진짜 시신은 누구에게도 애도 받지 못하고 찾지 못할 곳으로 사라졌을 터였다. 그 뒤로도 부탁받은 내용이라며 제레미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던 일들이 이어졌다. 우선 수년 전에 위조되어 있던 테건의 유서가 발견되었고, 거짓 부고는 셰필드의 코너 스칼렛 린치에게도 전달되었다. 그 끝에 에드워드는 대부분의 일이 이미 로버트의 계획에 따라 그 수중으로 넘어가 있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는 해결하지 어려우리라 판단된다고 적었다. 그 답장에서 테건은 로버트가 기존 장부와 재무제표를 모두 확인하지는 못했는지, 아직 호텔 내에서 인사까지만 휘두르고 있다고 알렸다. 그렇게 호텔을 드나들면서도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한 데에 무능을 한탄하기도 했다. 에드워드가 보낸 마지막 편지에는 예정된 장례식 일시, 그리고 어디선가 닮은 시신을 구해오기까지 했다는 경악과 역겨운 감정이 담겨 있었다. 마지막으로 불과 그제 보내진 답장에서, 테건은 지금껏 받은 편지까지 넣어 보내니 장례가 끝날 시각에 맞추어 다른 증거들과 함께 저택으로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회신 금지, 전문은 가족들에게 보여줄 것’하고 유난히 힘이 들어간 듯 적힌 글자들이 마지막이었다.

제레미는 편지를 여러 차례 반복해 읽고 내려두면서 손으로 얼굴을 연거푸 쓸어내렸다. 로버트의 야욕이 생각했던 범위보다도 훨씬 먼 곳에서부터 시작되어 아주 부적절한 방법으로 실현되려 했던 탓이었다. 테건이 왜 그리도 냉담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 박자가 엇갈리는 발소리가 응접실로 다가왔다. 문을 열고 테건이 앞서 들어왔다. 아멜리아는 바로 뒤에서 따라 들어와 제레미의 왼쪽 자리로 앉았다.

“와 계실 줄 알았습니다. 자료는 이게 전부인가요?”

테건은 성큼 걸어오더니 에드워드가 일어서서 건넨 종이 뭉치를 받아 훑으며 부드럽게 물었다. 손에 들린 낱장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넘어가는 동안 에드워드가 짤막하게 설명했다.

“일단은 그렇습니다. 하지만 단편적이나마 사정을 알고 있을 사람들이 많으니, 증언까지 서면으로 옮긴다면 그 배는 될 겁니다.”

“평소보다 더 피곤해 보이십니다. 홉스 씨께서는 경찰, 장의사, 교회 쪽만 연락해주세요. 해고당한 호텔 직원들과 이곳 사용인들은 저희가 찾아내겠습니다.”

종이 뭉치를 다시 정리해 에드워드에게 건넨 테건이 동의하냐는 듯 아멜리아와 제레미를 순서대로 돌아보자 아멜리아가 대답했다.

“전력을 다해 돕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시간이 단축되겠군요. 편지는 일단 두고 가겠습니다. 아멜리아 님께서는 아직 못 읽어보셨죠?”

그렇게 말하고 아멜리아가 작게 끄덕이는 모습까지 본 에드워드는 종이 뭉치를 파일 속으로 집어넣었다.

“벌써 돌아가십니까? 저녁 식사라도 같이 하시지요.”

“괜찮습니다. 집중하려면 덜 먹는 편이 좋더군요.”

제레미의 제안은 일을 이유로 최대한 정중하게 거절되었다. 대신 짧은 조율과 테건의 동의 끝에, 재판이 모두 끝난 후에 해결을 축하하는 만찬을 갖기로 했다. 응접실 안에는 잠시 사소한 이야기가 오갔다. 원고 측 변호사는 에드워드와 학연이 있는 커크 맥커니가 되겠지만, 패소할 미래를 뻔히 알면서도 로버트를 위해 나서줄 만한 사람이 있을지가 주된 화제였다.

“참, 이번 일로 생긴 금전적 손해는 로버트에게 묻지 않으려 합니다. 그리 유의미한 숫자도 아니고, 이번 일이 이행될 수 있게 협력한 자들에게만 부과해도 충분할 테니… 이해하시겠지요?”

“그렇다면 사건의 전개를 위주로 조사하겠습니다.”

테건이 대답을 듣고 만족스럽게 웃자 에드워드는 걸어둔 모자를 챙기며 가볍게 목례했다.

“이제는 정말 가보겠습니다. 맡으신 인원을 확보하는 대로 연락 부탁드립니다.”

문이 조용히 열렸다가 닫혔다. 바깥에서 들리는 발소리가 오직 에드워드 한 명의 것임을 눈치챈 제레미가 뒤늦게 배웅하러 나갔다. 테건은 그를 붙잡으려다 그만두고 아멜리아의 맞은편에 묻히듯 앉았다.

“어머니, 정말 이렇게 하는 게 맞을까요?”

짧은 정적이 흐르고, 두 번째 편지를 읽어보던 아멜리아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테건이 몇 번 자세를 고치고는 여유롭게 답했다. 그러나 자애보다는 멸시하는 투에 가까웠다.

“그걸 고려한다고 얼마나 더 길어지겠어. 3개월? 그리고 이런 손해까지 따지는 모습은 보기에 좋지 않아.”

“항상 강조하셨죠. 남들에게 보일 모습도 신경 써야 한다고.”

아멜리아는 침착하게 대답하고 편지를 잠시 무릎 위로 내려두었다. 고개를 들고 눈을 마주치자 방금 같은 어조로 말을 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평온한 얼굴의 어머니가 보였다. 테건은 뿌듯하다는 듯 희미하게 웃었다.

“잘 기억하고 있구나.”

“어머니께서 잘못된 걸 가르치실 리가 없으니까요.”

꾸밈없이 확신에 찬 말이었다.

“적어도 네게는 그리 나쁜 부모가 아니었던 모양이지? 그거라면 됐다. 이제 하던 일을 마저 하렴.”

별다른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아멜리아가 다시 편지를 넘기며 경악에 찬 얼굴을 하고, 테건은 불꽃이 타는 소리를 들으며 사색에 잠겼다. 하루가 유난히 길고 끔찍했다. 에드워드를 보내고 심란한 마음으로 정원을 산책하는 제레미, 선고만을 기다리며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는 로버트, 그런 로버트를 쉴 새 없이 감시하게 된 두 사용인을 포함한 카펠 저택 내의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친애하는 ―께.

점점 따뜻해지는 이 시기에 어울리지 않는 소식을 전해드리게 되어 유감입니다. 또한 상세히 설명할 수 없음에 미리 사과드립니다.

지난 일로 적잖이 당황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조용히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직접 모습을 드러내야 했던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문학회 참석 후 그간 과로했음을 느끼고 비밀리에 호텔에서 휴식 중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누구에게도 거소를 알리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핏줄이 이어지지는 않았다 해도 그는 제가 사랑하는 가족이었으며, 아끼고 믿었던 만큼 이런 종류의 가정은 전혀 해볼 생각조차 없었던 제 잘못입니다. 가족을 모략하고 음계하여 평화를 깨뜨린 대가는 가장 공정한 정의로써 심판되어 매겨질 것입니다.

곧 사순이 돌아옵니다. 세속적인 걱정 없이 고난을 함께할 수 있도록 재의 수요일 이전에 다시 소식 알리겠습니다.

영원한 당신의 친우, 테건 다니엘 카펠로부터.

 

 

망자 없는 장례식으로부터 수일 후, 테건은 이른 아침부터 수신인 이름만 다르고 내용은 똑같은 편지를 몇 장이나 일정한 필체와 자간으로 썼다. 공판 준비절차 중 로버트가 유죄를 인정해 법원의 형선고 절차만을 남겨두었고, 공범이나 그에 준하는 인물들의 행적 또한 어제자로 모두 알아냈기 때문이었다. 편지를 봉하는 일은 제레미가 도왔다. 그리고 바로 옆에서는 아멜리아가 1월 1일부터의 모든 전표와 새로운 예산안을 분주하게 검토하고 있었다. 그는 교활하기만 한 누구와는 다르게 군더더기 없이 일을 해냈다. 편지를 모두 부친 후로는 이전과 같은 일상이 이어졌다. 다만 이제는 로버트가 없었고, 다시 가계까지 봐야 하는 테건 대신 아멜리아가 호텔 업무의 절반을 도맡아 했다. 배우자인 잉그리드 트렌치는 그를 기다리다 못해 직접 찾아왔으나, 자리를 비울 수 없다는 아멜리아의 강력한 주장에 아예 카펠 저택에 거류하게 되었다.

그렇게 저택은 한 달여 만에 다시 생기가 돌았다. 로버트가 추천하여 내보냈던 사용인들을 모두 데려온 덕이 컸다. 제레미는 사용인 관리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으며, 아멜리아는 실무 경험을 쌓으면서 한편으로는 잉그리드와 행복한 매일을 보냈다. 그리고 테건은 네 가지나 되는 일을 바쁘게 처리하고 확인하느라 실패에 대한 불안에서 빠르게 회복했다. 바라던 대로 그의 오랜 주변인들은 건재한 모습만을 보게 되었다. 유서는 로버트를 완전히 배제하고 약간의 수정을 가한 후 가족 앞에서 에드워드의 공증을 받았다.

사건의 뒤처리도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테건은 해고되었던 모든 직원이 원한다면 돌아올 수 있게 해 누구 하나 빠짐없이 복직하도록 도왔다. 유서 위조 과정에 일조하고 공증을 선 변호사는 급하게 스코틀랜드로 떠나 잠적했으나, 만취한 상태에서 수표를 발행했다가 그 신용거래가 걸려 금방 체포되었다. 하지만 자기가 저지른 모든 일을 적극적으로 시인하고 부정하지 않은 점 때문에 도주에 대한 형량은 정상 참작되었고, 그 결과 80파운드의 벌금과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이후 명예 실추에 대한 소송에서 배상금으로 1,120파운드를 카펠 가에 지급하게 되었다. 뇌물을 받고 사망 증명을 내린 경찰 관계자들은 약간의 벌금과 함께 1년 6개월간 정직되었고, 그중에서도 관에 들어갈 시신을 조작한 의사는 면허를 박탈당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원흉이자 패전자인 로버트는 징역 17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터무니없다며 항소했으나 제이심에서도 형량은 유지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끝난 3월 초순에 들어, 이 사건은 희대미문의 사기극이라는 부제가 붙은 채로 몇몇 신문에 작게 실리기도 했다. 그러나 관계자 모두가 함구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기사의 내용은 장례식에 참석했던 일부 지인들의 과장된 표현이 반 이상이었다. 따라서 이 사건은 작은 소란과 소문만을 남기고 외부인들의 기억에서 서서히 잊혔다. 몇 년 후 가석방되어 나온 로버트가 시신으로 강에 떠내려왔을 때에도, 사람들은 짧은 관심만을 주고 그리 슬퍼하지 않았다.

 

 

테건은 눈을 꺼렸다. 20년도 넘는 긴 시간을 지나오며, 이전에 잠시 찾아왔던 소란에서 완전히 회복되었는데도 하늘이 쏟아내는 흰 잿더미를 더는 좋아하지 못했다. 겨울의 천사, 추위로 빚어진 축복, 하늘이 내리는 꽃잎… 그러한 모든 표현을 부정하고 적을 대하듯이 경멸했다. 그 외에는 특별할 것이 없었다. 조금 더 바빠졌고, 가족이 하나 줄어든 것이 전부였다. 여전히 주변에는 사람이 많았고 그해 겨울, 그리고 몇 년 후의 가을에 일어난 변화에 대해서는 눈치껏 언급하지 않았다. 테건은 이런 한결같고 평화로운 일상이 마음에 들었다.

오늘도 저택은 창마다 커튼을 드리웠다. 공기는 서서히 말라붙어가고, 열 명 남짓한 발걸음은 테건이 머무르지 않는 틈을 이용해 각 공간을 환기하느라 바빴다. 하늘이 어두워질 무렵의 저녁, 한 서재에서 바닥이 편평한 잔에 액체를 따르는 청량한 소리가 연달아 두 번 울렸다. 테건은 그중 한 잔을 상대에게 건넸다. 잔을 받은 사람은 작은 모금을 삼키고 얼굴 근육을 뒤틀며 다시 내려두었다.

“나는 당신이 어떻게 독한 술을 아무렇지도 않게 마시는지 모르겠어.”

“적응하기 나름이지.”

받아치는 말에 제레미가 끙 소리를 내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만난 이래로 단 한 번도 테건에게 이겨본 적이 없었고, 이겨볼 마음도 없었으니 당연했다. 테건은 잔을 비우고 소파에 몸을 묻었다.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한참을 건조하게 들렸다.

“은퇴하려고.”

담담한 말에 제레미가 자리에서 반쯤 튀어 올랐다.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의문을 표하기도 전에 테건이 덧붙였다.

“쉴 때가 됐어. 철강도 이제 아멜리아가 알아서 하겠지. 꼭 나처럼 돼버렸어. 일을 찾아내고, 일에 몰두하고……”

검지를 들고 휘적거리며 설명하다가 우뚝 멈춰 서자 제레미가 물었다.

“그래서 아쉬워?”

“적어도 무너지진 않을 것 같아서 좋던데. 이제 백작도 그 애가 될 거잖아.”

“…그렇구나.”

테건이 마찬가지로 별다른 어조 없이 대답했다. 당연한 사실을 말하는데도 뜸을 들이는 제레미를 흘깃 돌아보고 나서야 안심시키려는 듯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아멜리아는 잘할 거야. 서로 의지하고 사랑할 사람도 있고.”

그 말에 제레미가 망설이고 우물거렸다. 그러다 자각 없이 위스키를 물처럼 머금었다가 고통스럽게 넘겼다. 오랜 정적이 이어졌다. 끝없이 자신을 향하는 눈빛에 테건은 괜히 대부분이 회색으로 세어버린 머리카락을 손가락 끝으로 집어 바라보았다. 제레미가 어쩐지 비장하게 이름을 부를 때에서야 시선을 옮겼다.

“테건, 기회가 온다면 항상 하고 싶었던 말 한마디만 해도 괜찮을까?”

“해 봐.”

“당신을 사랑해.”

“농담이 심하네.”

테건은 짧게 대답하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손을 제레미 쪽으로 뻗었다. 제레미는 그를 양손으로 받아 쥐었다. 테건이 낮은 웃음소리를 냈다.

“나는 충분히 행복했어.”

차분히 내뱉어진 단어를 마지막으로 숨소리가 사그라지고 팔과 고개는 자연스럽게 늘어졌다. 방금까지 손에 쥐어져 있던 잔은 바닥을 굴렀다. 제레미가 몇 번이고 붙잡은 손등을 쓰다듬고 문질렀다. 강한 바람이 창문을 매섭게 두드렸다. 제레미는 고개를 숙여 이마를 손등에 대고 웅얼거렸다.

“밖에 눈보라가 쳐, 테건.”

손등은 아직 따뜻했다. 손을 옮겨 살갗을 맞대어본 손목도, 뺨도, 마지막으로 지은 표정도 아직 따뜻했다.

“당신이 그토록 증오하던 눈이 내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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