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자 밖 세상

마르사샤 1

좌우고정 로코물 맞관삽질

2021. 8. 작성

"내가 너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르지?"

바쁘게 화면을 눌러대던 손이 순간 멈추었다. 왕방울만해진 두 눈이 사샤를 향해 깜빡인다. 사샤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 알지. 나도 좋아해, 사샤!"

천진하게 웃으며 답하더니 다시 게임에 집중하러 고개가 밑으로 향한다. 사샤는 들릴 듯 말 듯 한숨을 내쉰다. 뭘 모르는 척 굴어. 정말 아무것도 몰라? 내 말에 담긴 뜻이 뭔지 너 정말 몰라?

사샤는 일어난다. 이런 겜덕한테 기대를 품었던 자기 잘못인지도 모른다. 그저 막막할 따름이다.

"어? 어디가?"

가려고 일어서니까 이제서야 제대로 올려다보는 게 얄미웠다. 눈은 똘망똘망하니 귀여워서는. 아까 좀 이렇게 볼 것이지. 흥이다.

"먼저 갈게."

차갑게 쏘아붙이고 그대로 마르시네 반을 나서 자기 교실로 향했다. 방금까지 따뜻하던 사샤의 앉은자리는 텅 비어 허전했다. 마르시는 사샤가 걸어나간 쪽만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

사샤 웨이브라이트는 아주 화가 났다. 요즘 들어 심기가 매우 불편해 하루에 칰-필-에이 치킨을 두 마리씩 뜯는 중이다. 물론 허니오렌지 맛으로.

점심시간에 그렇게 교실로 와 버리고 나서 하교할 때까지 한 번도 못 마주쳤다. 내심 먼저 찾아와주길 기대했지만 마르시 그 괘씸한 녀석은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았다. 내가 화난 줄 알고 쫀 거 아냐? 눈치도 없어가지고.. 아니 뭐래는 거야 화난 거 맞지. 그래, 존나 화났으니까 좀 알면 좋겠다.

짜증난다.

이렇게까지 신경 쓰인다니 말도 안된다. 그까짓 겜덕 범생이가 뭐라고..걔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건지! 천하의 사샤 웨이브라이트가 고작 마르시 따위한테 휘둘린다는 게 말이 되냐고. 그러나 사샤는 이미 휘둘릴 대로 휘둘리고 있었다.

마르시가 처음부터 신경쓰인 것도 아니다. 그냥 친구일 뿐이었다, 앤의 친구. 앤의 친구니까 같이 친하게 지내는 정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게다가 마르시는 똑똑한 만큼 엄청난 덜렁이인지라, 툭하면 어디 걸려 넘어지고 어디 부딪히고, 자기 물건도 다 흘리고 다녀서 사샤랑 앤이 항상 보호자처럼 챙겨 주어야 하는 동생 같은 존재였다. (그러는데도 막상 학교 성적은 사샤보다 높았다. 사샤가 제일 신기하게 여기는 부분이었다.)

그래봤자 이웃집 동생 같은 친구 이상 아무것도 아닌 마르시한테 우정보다 깊은 감정을 느낀다던가 하는 건 사샤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 100순위, 1000순위에도 들지 않을 무언가였다. 심지어 사샤는 원래........ 앤을 좋아했다. 지금보다도 훨씬 어렸을 때 싹트기 시작한 마음은 나이를 먹어갈수록 점점 더 커지기만 했었다. 그러나 함께한 세월이 세월인 만큼, 천국과 지옥을 여러 번 오가기를 반복하며 이미 지칠 대로 지쳐버린 사랑은 이제 슬슬 포기하는 쪽으로 거의 완전히 기운 상태였다.

그런 타이밍에 기가 막히게 마시가 비집고 들어온 거다. 사샤 본인조차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어쩌다 쟤를 좋아하고 있는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어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앤과 비슷해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마르시는 앤과는 많이 달랐다. 눈치 없고 단순한 앤과 달리, 마르시는 꽤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순 덜렁이처럼 생겨선 보기완 다르게 잔머리도 잘 굴러가고 어떤 분야에선 놀랍도록 예리한 면도 있었다. (그 예리함이 누가 자길 좋아한다든가 하는 쪽에서는 전혀 발휘되지 않아보인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지만.) 사샤는 가끔, 어딘가 본인과 닮은 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마르시에게서 자신과 비슷한 모습이 보였고 그건 설명할 수 없는 동질감을 느끼게 했다. 혹시 그래서 좋아하는 건가? 나와 닮아서? 이 무슨 나르시시스트적인 생각이람. 아니 아무래도 상관없어. 좋아하게 된 이유 따위, 알아내려 끙끙대봤자 의미 없어. 어차피 나 혼자 이러고 말 텐데. 앤한테 그랬던 것처럼. 아니 아마 백퍼 그럴거야. 그러니 빨리 접자. 저 끝에서 날 기다리는 건 한 가지 결말 뿐이야, 너도 알잖아? 혼자 좋아하면 뭐, 그 다음엔 고백하고 사귀기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냐? 이미 한 번 경험했잖아. 그러니 소꿉친구들을 바라보는 불건전한 시선 따위 하루빨리 거두고 나 좋다는 다른 애들이랑이나 실컷 연애놀이하는게 상책이야. 접자. 접는게 답이다. 접어. 접어. 

젠장할.

생각 같았으면 이미 접혔어야 했다. 한 번 접어본 마음, 이번에도 포기하고 묻어버리기 쉬울 줄 알았다. 혼자 남몰래 싹트는 감정 따위 의지로 꺾어버릴 수 있을 줄 알았다. 근데 이번 마음은 생각대로 잘 되지가 않았다. 그 녀석의 행동들 때문이다. 마르시가 한시도 쉬지 않고 해 대는 바로 그 발칙한 행동들 말이다. 이를테면 스킨십이라든가. 장난스레 손깍지를 껴댄다든가. 둘이 있을 때 자꾸 내 팔을 은근히 쓸어내린다든가. 게임할 때 꼭 내 무릎에 앉아서 하려고 한다든가. 환한 햇빛이 드는 교실 창가에 엎드려 자려고 하는데 잠이 안 와 눈만 감은 채로 가만히 있는 내게 슬며시 다가와 지 몸을 기댄다든가 !!!

'미친 거 아니냐고.'

한 번 의식하니까 끝도 없었다. 전엔 친구끼리라고 전혀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행동들 하나하나가 이젠 언제 던져질지 모르는 적군의 수류탄 폭격이나 다름없었다. 마르시는 알고 그러는 걸까? 설마. 생각만 하면 열이 올랐다. 아무렇지도 않게 사샤 웨이브라이트의 심장을 잡고 쥐락펴락하면서 감히 책상에 엎드려 태평하게 게임하고 앉아있는 꼴이라니. 당장 오늘만 해도 그랬다. 일부러 좋아한다는 말을 지나가듯 툭 던지는 척하긴 했지만, 솔직히 얼마나 용기를 내서 떠본 건데. 근데 뭐? '그럼 알지'? '나도 좋아해' ? 사람이 이렇게까지 눈치가 없을 수가 있나! 햄스터같이 생겨서는 정말 햄스터만큼의 눈칫밥도 없었다. 내가, 이 사샤가, 옆자리에 앉아서 대놓고 플러팅을 하는데 반응이 고작 그런 걸 보고 있자면, 정말 화가 머리끝까지 뻗쳐서 그 천진난만한 얼굴에 확 키스해버리고 싶- 아니 알려주고 싶었다. 본인이 얼마나 기만자인지. 어차피 내 맘 알아줄 것도 아니면서. 날 친구 이상으로 볼 것도 아니면서. 자꾸 널 좋아하게 만들지 말란 말이야, 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치킨 두 접시를 비웠다. 리필한 탄산도 다 마셨다. 언제 이걸 다 먹었지? 아 살 찌는데, 이게 다 마르시 때문이야.

집에 오자마자 지쳐 침대에 쓰러졌다. 치어리딩 연습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은 것도 있고, 저녁도 배부르게 먹고 온 탓에 더더욱 잠이 쏟아져내렸다. 무언가 잊은 것 같다는 느낌이 아주 희미하게 들었지만 당장은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었다. 사샤는 바로 잠들어 버렸다.

-

준비물을 빼먹고 오다니.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일부러 선생 엿 먹으라고 안 가져 왔던 적은 있어도, 바보같이 실수로 까먹어서 준비물을 못 챙긴 적은 없었다. 애초에 완벽주의인 사샤의 사전에 실수란 백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것이었다.

게다가 준비물을 깜빡했다는 걸 미술 수업 시작까지 몇 초도 안 남은 지금 아는 바람에 누구한테 빌릴 수도 없는 상황이다. 젠장할.

때르르르릉

결국 종이 쳤다. 아, 망할. 주변을 둘러보니 애들은 선생님이 시킨 대로 다 재활용품 하나씩 챙겨서 왔다. 사샤만 빈손이었다. 아, 쪽팔리게... 급한대로 쓰레기통에서 아무거나 주워 와? 아니, 자존심이 그런 걸 허용할 리 없었다.

드르륵 문이 열리며 선생님이 들어왔다. 역시나 준비물 안 가져온 학생 일어나라는 말부터 꺼내신다. 조용한 정적 속에 사샤가 일어서자 모든 이목이 동시에 집중되는 게 느껴진다. 교실의 모든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는 느낌이야 익숙하지만, 선망의 눈길이 아닌 이런 상황에서의 관심 집중은 기분을 상상 이상으로 더럽게 만들 뿐이었다.

"웨이브라이트 양, 선생님이 항상 강조하는 말이 뭐지?" 집게손가락으로 안경 콧받침을 올리며 미술 선생이 묻는다.

"준비물 안 갖고 오면 수업에 참여할 수 없다고요."

"그래. 잘 알고 있구나. 오늘 수업은 특히나 각자 재활용품 하나 이상씩 준비해오지 않으면 활동을 진행하는 것 자체가 힘들다고 미리 안내하기까지 했지. 그럼 아쉽지만, 너는 수업이 끝날 때까지 교실 밖에 서 있어 주길 바란다."

"네."

사사로운 감정 없이 대화가 끝나서 오히려 좋았다. 미술 선생이 그나마 좋은 부분이 있다면 이런 부분이었다. 수학 선생이나 사회 선생 같은 사람들은 사샤를 '건방진 반항아'로 여기고 쉽사리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탓에 항상 대화가 최악의 결말을 맺곤 했다.

그대로 뒷문을 향해 걸어 나간다. 가만히 쳐다보고 있던 아이들도 사샤의 썩은 표정에 시선이 재빨리 밑으로 향한다.

뒷문을 쿵 닫고 복도에 쭈구려 앉아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사실 이런 벌 서는 거야 사샤에겐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개같은 기분은 가라앉질 않았다. 어제 알람만 맞추고 잤어도 오늘 제 시간에 일어나 평소처럼 여유롭게 가방을 챙기며 재활용품 하나쯤이야 끼워 넣을 수 있었을 터였다. 알람도 못 맞추고 답지않게 퍼질러 자는 바람에 간당간당한 시간에 일어나 급하게 집을 나서다가 미술 준비물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다. 어제 피곤하다고 오자마자 잠들어 버렸지. 어쩐지 뭔가 잊은 느낌이 있었어. 아, 진짜... 따지고 보면 이게 다 며칠 전부터 내 머릿속에 상주하고 앉아서 떠나질 않는 그놈의 마르시 때문이잖아!!

"사샤?"

고개를 들어 보니 문제의 동글동글한 얼굴이 떡하니 눈앞에 나타나 있다. 뭐냐.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넌 여기서 뭐하냐? 수업 시작했는데."

어제 그러고 가 버린 후로 솔직히 보고 싶었는데, 반가워 안아주고 싶은 충동을 누르고 최대한 시니컬하게 물었다.

마르시는 대답 대신 그저 민망한 듯 조그맣게 웃어 보인다. 사샤의 눈치가 발동한다.

"...너도 벌 서냐?"

"엉. 너도?"

"엉."

피식 웃음이 나온다. 마르시도 참지 못하고 터진다. 어느새 둘 다 깔깔대며 웃고 있다.

"넌 뭐 때문에 나왔는데."

"나..영어시간에 게임하다 걸렸어. 게임기 일주일 동안 압수래."

"허구한 날 학교에서 겜하더니 잘하는 짓이다."

마르시가 헤헤, 하며 멋쩍게 웃는다. 벌 서는 이유도 마르시다웠다.

..뭐, 이제 날 옆에 두고 게임만 하는 일은 없겠네. 오히려 잘 됐구만..

"아니 근데, 너무하지 않아?"

갑자기 발끈하는 마르시의 목소리에 사샤는 괜히 움찔한다.

"게임기 뺏은 것도 충분히 가혹한 벌인데 거기다 복도에 나가 서있기까지 하라니. 선생들은 이런 가중처벌이 엄연한 교권남용이란 걸 알고는 있는 걸까?"

어려운 말을 써 가며 씩씩거리는 마르시를 보고 있자니 입꼬리가 절로 실룩였다.

푸핫! 사샤는 결국 박장대소를 터뜨리고 만다.

나 진짜 바보였네.

그간 고민해왔던 시간들이 다 부질없게 느껴졌다. 저러는데 어떻게 안 좋아해, 게임기 압수당했다고 저렇게 동그란 얼굴을 잔뜩 찡그리면서 귀엽게 조잘대는데. 저렇게 깜찍하면서 본인이 깜찍한지도 모른다는 점이, 같이 복도에서 벌 서고 있기만 해도 이렇게나 웃게 된다는 점이, 하루종일 꿀꿀했던 기분도 마르시를 보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사르르 풀려 버린다는 점이, 이 모든 점들이 바로 그 이유였던 거다. 마르시가 마르시답게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순간, 그 작은 순간순간들이 모여 사샤도 모르는 새 이 깊은 매력의 호수에 풍덩 빠지도록 이끌었던 거였다.

하하 하하하. 웃음이 멈추지 않고 계속 나왔다. 이쯤 되면 마르시가 이상하게 여길 만도 했지만, 아무래도 괜찮았다. 드디어 답을 알아냈다는 기쁨에 비하면 그런 사소한 걱정 따윈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르시. 넌 진짜, 너를 좋아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

사샤의 웃는 얼굴을 마르시는 빤히 바라본다.

저 맑고 시원한 웃음소리를 듣고 있으면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이다.

사샤 얼굴의 모든 부분을 하나하나 소중하게 눈에 담는다. 눈을 꼭 찡그리면 더욱 선명하게 그려지는 쌍꺼풀 선, 웃을 때 평소보다 살짝 처지는 눈꼬리, 선홍빛 입술 사이로 드러나는 희고 가지런한 치아....

얼마나 오랫동안 이어져온 짝사랑인지, 사샤는 알까?

알 날이 오긴 할까?

마르시가 아주아주 어렸을 때부터 시작됐다. 너무 어릴 적이라 사샤는 기억조차 하지 못할지도 몰랐다. 놀이터에 불쑥 등장한 한 명의 아이. 처음 보는 아이들의 그네를 되찾아주기 위해 불량배와 맞서 싸우던 금발의 아이. 전사처럼 멋있게 나타나 모두를 지켜준 그 아이.

가슴이 콩닥..콩닥..

단순한 콩깍지에 지나지 않았다면 거기에서 그쳤겠지만 해가 지날수록 사샤는 점점 더 멋있어져만 갔다. 초등학교 저학년에서 고학년을 거쳐 중학교에 올라오기까지, 매년 그 학년에서 가장 유명한 아이의 타이틀을 독차지하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사샤였다. 4학년 땐 반장과 체육부장을 맡더니 5학년 때는 전교 부회장이자 학교대표 응원단장, 6학년 땐 교내 여자핸드볼부 캡틴, 창작음악동아리 부장, 댄스부 부부장에다 주 청소년 락 페스티벌에 나가 전자기타 퍼포먼스로 상을 휩쓸기까지 했다.

'멋짐이란 단어를 사람으로 만든다면 아마 사샤일거야.'

마르시가 자기 소꿉친구를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었다. 정말이지 못하는 게 없는 듯한 마르시의 금발머리 친구는 쉬는시간에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앉아있는 모습마저도 화보의 한 페이지를 보는 것만 같았다. 급식을 먹는 모습도 청춘 드라마의 한 장면 같았고, 수업시간에 턱을 괴고 졸고 있는 옆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자면 마치 신화 속 아프로디테 본인이 환생한 것 같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그러다 종이 치고, 게슴츠레한 눈을 천천히 뜨면서 기지개를 피다가 마르시와 눈이 마주치자 싱긋 미소지어 줄 때면,

세상에,

너무 아 름 다 웠 다.

저렇게 완벽한 이목구비의 조화가 이 불완전한 세계에 어떻게 존재하는 걸까, 1교시부터 10교시까지 저 얼굴만 보고 있으래도 그 어떤 수업보다도 집중해서 바라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황금빛 태양도 질투할 만큼 찬란한 금발이 여름의 교실 창가 아래서 눈부시게 반짝일 때면 이대로 눈이 멀어도 좋아, 라는 말이 마르시의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가 들어가곤 했다.

진심으로 저런 아이가 세상에 또 있을까? 어쩜저렇게 멋있을수가있을까? 이상형을다때려박은것만같아. 아니, 애초에, 내 이상형을 형성해준게 얘다.안좋아할수가없다.진심으로 사샤를 싫어하는애가있을까? 있어봤자 질투심에 눈이먼 배경캐릭터123들일것이다. 사샤가 주인공이니까. 이학교와 동네 전체가 사샤를중심으로돌아가니까. 내인생도 세상도 온통 사샤를 중심으로 돌아가니까. 모든것의주인공은 반짝반짝 빛나는 내친구 사샤고 그래야만 되니까, 저 얼굴과 저 자태가 이세상 만물의 중심이 아니라면 대관절 무엇이겠느냔 말인가.

하지만 똑똑한 마르시는 알고 있었다. 이런 마음은 말로 내뱉어선 안 된다는 것을. 어디까지나 맘속 깊은 곳에서만 혼자 간직해야 한다는 것쯤은, 체육대회 때 단장다운 카리스마를 뽐내며 치어리딩 팀을 지휘하는 친구를 보면서, 점심 시간마다 한 무리의 아이들을 우르르 끌고 다니는 인기만점인 친구를 보면서, 누구보다도 잘 어울리는 진한 눈화장과 함께 펑크 룩을 입고 수백 명의 관중 앞에서 기타 공연을 하는 천상 연예인 체질인 친구를 보면서 점점 더 분명해져만 갔기에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어떻게 모르겠니.

네 시선은 앤을 향하고 있단 거를. 너랑 앤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봐온 내가 모르겠니?

사샤. 너한테 내 맘을 전하는건 처음부터 생각조차 하지 않았어. 너에게 절대 말할 일 없을거야. 아마 평생 그럴 일 없겠지. 혹시라도, 혹시라도 같은 기대 따위는 난 하지 않아. 그저 난, 널 이렇게 바라보는 것만으로 충분해. 내가 너의 옆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난 너무너무 좋아. 너랑 같은 하늘 아래 숨쉬고 살아 있다는 것이 행복해, 그게 다야.

..그러니 내가 네 어깨에 기대 잠들더라도, 점심시간에 네 무릎에 앉아 게임하더라도, 대화하면서 은근슬쩍 네 손을 잡고 만지작거려도, 가끔씩 널 보며 얼굴을 붉히는 것 같아 보여도, 너는 아무런 생각 하지 말아 줘. 쭉 평소처럼 대해 줘, 언제까지나 계속 말야. 지금 이대로만 넌 날 대해주면 돼. 어차피 아니까. 어차피 내가 아무리 이런다 한들, 너는 그런 쪽으로 생각조차 안 할 거라는 걸 아니까, 우리가 친구 사이 이상이 될 일은 없을 거라는 걸 잘 아니까....

어젠 얼마나 당황했는지 몰라. 네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들은 순간 놀라서 눈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니까, 고갤 숙이고 후드를 쓰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네가 알아챌 일 없을 거라는 걸 알고 있는데도, 네 입에서 금방 나온 말이 내가 생각하는 그런 뜻이 절대 아닐 거라는 걸 너무너무 잘 알고 있는데도 바보같이 무의식 중에 조금은 기대를 품고 있었던 건지. 그도 그럴게, 평소에 좋아한다느니 하는 말을 막 자주 하는 애도 아니잖아. 더군다나 그런 말이 퀘스트 깨는 도중에 무방비로 훅 들어왔는데 나라고 별수 있었겠냐고! 사샤는 이럴때보면 정말 너무해. 어떻게 그런...그런 엄청난 말을 막 던질 수 있어?? 내가 널 좋아하는것도 모르면서. 네가 날 얼마나 좋아하는지 내가 모르지 않느냐고? 그래 사샤. 너도 날 좋아하겠지. 좋아하니까 자그마치 십 년가량을 친구라는 이름으로 불러주면서 같이 놀러다니는 거겠지! 사샤 넌 정말.... 네가 기절초풍할 만한 비밀을 겨우겨우 지켜내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한테 그런 큰일 날 대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던지는구나. 사샤다워. 이러니까 더더욱, 더더욱 말 못할 이유만 늘어가는 거야. 사샤~~~.... 이런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사샤 같으니라고...

"..그럼 알지. 나도 좋아해, 사샤!"

있지 사샤, 네가 또다시 아까처럼 설렘 기습을 한대도, 난 아무렇지 않은 척 할 수 있어. 절대 티내지 않을 자신 있다구, 그건 내 전문이니까. 아깐 처음인데다가,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어서 얼 탄것 뿐이지, 나 원랜 포커페이스 잘해. 나 마르시 우라고! 생각해보면 진짜 쉬운 일이야. 어차피 사샤가 그쪽으로 생각도 안 할 거라는 게 확실한 전제로서 깔리고 들어가니, 내 쪽에서 오버하거나 어색하게 굴지만 않으면 된단 거지. 이대로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단 거지, 나만 시치미 뚝 떼면! 사샤는 계속 내 곁에 있고. 나는 자연스럽게 사샤한테 기대서 자고, 사샤 얼굴 바라보고, 목소리 듣고, 팔짱 끼고 그리고 손도 만지고.... 어딘가 아쉬운 기분이 드는 건 기분 탓이야, 이게 최선이란 걸 알잖아. 영원히 계속 이렇게만 지낸다면 난 더 바랄 게 없어. 그니깐 앞으로도 아무렇지 않은 척 할 거야. 네가 날 아무리 설레게 해도 사샤, 난 절대 티 안내고 완벽하게 숨길 수 있어. 그니까 두고보라구, 라고 마르시는 싱글싱글 미소를 띄운 채 하굣길을 총총 걸어가면서 생각했었다.

그런 사샤가 지금 눈앞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하게 웃고 있다. 맞은편 창가에서 사샤라는 배우만을 위한 집중 조명인 양 내리쬐는 화사한 햇살이 그렇지 않아도 예쁜 미소를 더욱 눈부시게 비춰 준다. 온 복도가 환히 빛나는 사샤의 웃음으로 가득 채워진 것만 같아, 천상의 문이 활짝 열리고 하늘에서 천사가 악기를 연주하며 내려오는 순간이 있다면 바로 지금일 것 같다고 마르시는 생각한다. 지금 이 순간. 수년 전 모래사장에서 처음 만났던 그 아이의 앳된 인상이 불현듯 떠오르면서, 눈앞의 어여쁜 얼굴과 겹쳐지면서, 가슴이 오백미터 경주를 하는것마냥 쿵쿵쿵쿵 뛰고 있고, 온갖 칭송과 찬사의 표현들이 머릿속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온몸의 피가 얼굴을 향해 쏠리는 듯 안면이 화끈화끈해지더니, 이런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는 생각에 도망치자는 이성적인 판단보다도 앞서 지금 이자리에서 만두처럼 터져 버리거나 차라리 헬륨풍선이 되어 어딘가로 날아가버리면 좋겠다는 말도 안되는 상상만이 마르시의 머리를 꽉꽉 채우는 순간, 얼굴과 심장이 동시에 터져버리기 직전에 사샤와 눈이 마주친 그 순간,

"좋아!"

얼결에 뱉은 두 글자가 복도에 울렸다.

메아리가 사그라들며 사방이 놀랍도록 조용해졌다. 사샤의 웃음소리와 함께 방금까지 정신없이 쿵쾅대던 심장소리도 뚝 멈추었다. 온갖 잡생각으로 혼란스럽던 머릿속도 백지처럼 새하얘졌다. 일시정지된 영상 속 장면마냥 굳어 있는 마르시의 얼굴을 마르시만큼이나 놀란 눈으로 멀뚱멀뚱 쳐다보는 사샤의 눈 깜빡임 소리만이 정적을 채웠다.

별안간 다시 쿵쿵쿵 심장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 생각이 하나하나 되돌아왔으나 순서는 뒤죽박죽이었다.

딩-동-댕-동

동-댕-딩-동

정적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종이 치고 아이들과 선생님이 하나둘씩 복도에 나오기 시작하자 마르시는 벌떡 일어나 후드를 눌러쓰고 뒤돌아 뛰었다. 두 주먹을 꼭 쥐고 온 힘을 다해 뛰었다. 뒤에서 사샤가 뭐라고 소리치거나 자길 부르고 있을 거라는 생각도 얼핏 들었지만 귓가에 웅웅대는 심장 박동에 묻혀 주변 소리는 희미하게만 들려왔다. 점점 혼잡해지는 쉬는시간의 인파를 뚫으며 마르시는 무작정 달렸다. 달리고 또 달렸다.

-

대체 뭘까.

마르시가 복도에서 달아나 사라진 뒤로 스물네 시간도 넘게 지났으나, 사샤는 그간 마르시의 소식조차 들을 수 없었다. 하교 때까지 자길 피해 도망이라도 다녔는지 조퇴를 한 건지, 어제는 아무리 찾으러 다녀도 안 보이길래 오늘 오전에 마르시네 교실에 찾아가 봤더니 아파서 결석했다고 한다. 어제 같이 벌 설때까지만 해도 멀쩡해 보였는데 갑자기 아프다고? 아니지... 워낙 약골이니까 진짜일 수도 있으려나. 근데 어제 갑자기 좋다고 한건 뭐였을까. 아무리 사소한 해프닝으로 넘겨 보려고 해도 자꾸만 마음속에 걸리는 걸 무시할 수가 없었다. '좋아'라니? 거기서 갑자기? 뭐가 좋은 건데? 단순히 말이 헛나온 걸까. 근데 보통 거기서 그런 식으로 말이 헛나오나? 하지만 또, 마르시이기 때문에 모르는 일이었다. 워낙에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애라 보통의 기준으로만 생각하고 예상해선 안 되는 경우가 많으니까. 진짜로 딴 생각하다가, 평소의 마르시처럼 엉뚱한 공상이나 하다가 말이 잘못 나온 걸지도. 그런데 그럼 왜 뛰어? 그냥 말이 잘못 나온 거면 그렇다고 말하면 되지 뛰긴 왜 뛰냐고, 완전 수상하게! 그녀석 마치 뭔 잘못이라도 하다가 들킨 사람마냥 질겁한 표정으로 도망쳤잖아. 나만 복도에 덩그러니 남겨놓고. 무슨 못할 말을 한 것도 아니면서.....왜 그렇게 지 혼자 오바 떤 건지. 내가 그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거야.

날 좋아하나? 좋아라고 한 게 고백이었던 건가? 쑥스러워서 도망친 거고?

하지만 희망 사항과 현실은 구분해야 한다는 것을 사샤는 인지하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날 좋아해줄 확률이 되면 얼마나 될까. 거의 0에 가까운 가능성이다. 사샤에게 고백했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샤는 단 한 번도 깊은 애정을 느껴보지 않았던 것처럼. 그러니 망상은 금물이다.

그렇담 뭘까. 마르시가 맥락도 없이 좋아!라고 외치더니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냅다 도망친 것은. 혹시 내가 뭘 잘못했나?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사샤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내가 본의 아니게 마르시에게 상처를 줬나? 내가 웃은 게 자길 비웃은 거라고 오해한 걸까? 속상해서 내가 보기도 싫은 건가? 그래서 계속 피하고?

피가 마르는 듯 했다. 마르시를 좋아하면서부터 전엔 겪어본 적도 없는 특이한 일들을 많이 겪고 있는 건 사실이었지만, 이러는 건 정말로 사샤다운 모습이 아니었다. 앤한테마저도 이 정도까지 안달복달했던 적은 없는 것 같았다. 정말 여러 모로 짜증나는 애가 맞았다, 마르시는. 짜증나는 점까지 사랑스러워 보이는 것도 맞았지만.

언제까지고 혼자서 애만 태울 순 없는 노릇이었다. 잘못한 게 있으면 당장 사과할 수 있게, 무슨 말이라도 해줬으면 싶었다. 핸드폰을 꺼내 오늘만 10번째 알림창을 확인했지만 어제부터 보낸 문자 메시지에 마르시는 아직까지도 답장이 없었다. 어차피, 아무리 아프다고 한들 마르시네 부모님께서 이틀 연속으로 학교를 빠지는 걸 허락하실 리 없기 때문에 내일은 마르시가 학교에 와야만 할 것이다. 만에 하나 내일까지도 안 온다면 병문안 핑계로 마르시네 집에 직접 찾아가서라도 만날 작정이었다. 아, 아니지. 훨씬 더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정말 학교에 가기 싫다. 마음 같아선 내일까지, 아니 모레까지, 아니 평생 빠지고 싶다. 하지만 오늘 빠졌으니 내일은 부모님이 중간에 보건실에 가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교실에 가서 앉아 있으라고 하실 게 뻔하다. 그래도 체온계를 몰래 전등 근처에 두고 있으면 빨간 줄이 40도 가까이 오른다는 것을 아직까지 모르시는 건 참 다행이다.

정말이지, 스스로가 바보 같아서 너무 싫다. 순간의 실수로 모든 것을 망쳐 버렸다. 그 상황에서 뜬금없이 그런 말을 한 것부터, 후다닥 튄 것까지, 정말 자기가 봐도 미심쩍은 짓만 쏙쏙 골라서 했다. 아니, 거기서 바로 말실수라고 대강 웃어넘겼으면 해결됐을 문제인데. 왜 그렇게 자연스럽게 넘기지 못 했을까! 그게 뭐가 심각한 일이라고! 사샤 네가 좋아, 라고 한 것도 아니고 널 좋아해, 널 사랑해, 라고 한것도 아닌데. 목적어도 없이 그냥 좋아 라고 한건데. 그정도면 그냥 감탄사라고. 그냥 다른 생각하다가 말이 헛나왔다고 둘러대면 사샤도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어갔을 거란 말이야. 근데 제 발 저려서 혼자 오바하는 바람에 이제는 돌이킬 수도 없게 돼 버렸어. 그 자리에서 바로 해명만 했어도 이렇게까지 어색해지지는 않았다....아니, 애초에 입 간수부터 제대로 했어야 했다. 이때까지 잘만 해 왔는데 왜 그런 상황에서 하필 그 말이 튀어나온 걸까. 무의식 중에 한 생각이 입 밖으로 나와 버리는건 말풍선 개그가 가능한 만화 속에서나 일어나는 일인 줄 알았었다. 그치만 솔직히, 그런 떨림은 처음이었는걸. 그렇게 예쁘게 웃는 건 처음 봤는걸... 어떻게 내 눈앞에서, 그렇게 천사 같이 웃는데, 그런 황홀한 걸 보면서 어떻게 입을 꾹 다물고 있어....

그렇지만 골라도 하필 좋아라는 말을 고르냐. 좋아가 뭐야. 좋아가.

사샤에게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설명할 필요도 없이, 이제 내가 자기 좋아하는 거 눈치채지 않았을까. 절대 들키지 않을 거라고 의기양양했던 며칠 전의 자신이 너무나도 우습게 느껴졌다. 당장 내일부터 학교에 가면 사샤가 자길 어떻게 바라볼지 마르시는 무섭고 끔찍해서 생각하기도 싫었다. 만일 사샤가 거기까진 눈치 못 챘다 하더라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낌새는 차리고도 남았을 것이다. 왜 도망치고 자길 피했냐고 물으면 대체 뭐라고 말해야 할까. 변명과 거짓말로 과연 사샤를 완전히 납득시킬 수 있을까. 자칫했다가 사이가 전처럼 돌아갈 수 없게 되어버리면? 나를 싫어하게 돼버리면? 

정말로 모르겠다. 간절히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차라리 마법처럼 사샤가 어제 있었던 일을 모두 잊었으면 했다. 내가 크리쳐스 앤 캐번스에 나오는 위자드였다면 이럴 때 망각 주문을 사용할 수 있었을 텐데. 차라리, 난 원래 이상한 애니까, 이상한 애가 여느 때처럼 괴짜 행동을 한 것뿐이라고 가볍게 여기고 넘어가 주었으면 좋겠다. 어쩌면 마르시가 이렇게 조바심 내고 있을 동안 사샤는 아무런 신경 안 쓰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애초에 마르시에게 그만큼 관심이 많지도 않을 텐데. 그래, 이 편이 더 사샤다웠다. 이 모든 건 자의식 과잉일지도 몰랐다. 사샤, 제발 나를 신경쓰고 있지 말아 줘. 평소처럼 나에 대해 하나도 관심 없어 줘, 제발! 부디 어제 내가 도망쳐버리고 난 뒤에 다른 친구들이랑 정신없이 노느라 그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자연스럽게 까먹어버려서 지금은 기억도 안 나는 상태이기를, 제발...

혹시 사샤에게서 연락이 올까봐 핸드폰은 전원을 아예 꺼 두었다. 사샤가 뭐라고 말하든 답장할 자신도, 메시지 내용을 확인할 용기도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 머무르기라도 할 수 있도록 아예 연락수단을 꺼두고 나중에 만나면 잃어버렸었다고 둘러대는게 편할 거 같다. 적어도 지금은...... 지금은, 정말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고 누구랑도 말하기 싫다. 그런 상태였다. 그 마르시 우가. 생각하는 걸 그렇게 좋아하고 추리도 그렇게 잘하는 마르시는, 오늘만큼은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고 자신의 미래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인 동시에 백짓장이었다. 제발 살려줘.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 쓴 마르시는 따뜻한 침대 안에서 비장한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일단 내일 일어나면, 교복 후드를 입지 말고 다른 색깔 겉옷을 입고 가는 거야. 나를 멀리서 알아볼 수 없게. 가방도 초록 가방 말고 검은색 크로스백 매고 가고, 아예 다른 사람인 것처럼 입고 가자. 신발도 한 사이즈 작긴 하지만 초등학생 때 신던 흰 운동화 신고 가야겠어. 모자도 눌러쓰고. 그래, 그렇게 입고 가면 적어도 사샤가 날 발견하기까지 시간을 벌 수 있겠지. 이동 수업 사이 쉬는 시간마다는 교직원 화장실에 들어가있고, 점심시간 되면 아프다고하고 조퇴하자. 내일은 사샤 치어리딩 연습하느라 늦게까지 학교에 남는 날이니까 우리집으로 찾아올 일은 없겠지? 안 그래도 사샤집이랑 우리집이랑 꽤 먼 거리인데. 굳이 해 다 진 저녁시간에 나 만나러 우리 집까지 오진 않을 거야. 물론! 모든 건 사샤가 그만큼 나를 신경 쓰고 있다는 전제 아래지만! 좋아, 오케이, 적어도 내일 하루까지는 이렇게 하자. 지금 당장 사샤를 마주하는 건 죽기보다도 싫을것 같으니까... 내일 하루 동안 사샤랑 내가 마주칠 일만 없게 하면 돼. 앤한텐 미안하지만 일단은 앤도 피하자.... 사샤랑 앤은 거의 항상 같이 있으니까. (그리고 만에 하나 사샤가 앤을 이용해 나를 불러내려고 할지도 모르니까...,, 충분히 가능해.) 내일만 버티고 나면, 그 다음 날은 금요일이니까, 그쯤 되면 주말 분위기에 휩쓸려 학교도 떠들썩할 거야. 마침 다음주 월요일이 체육대회라, 참가하는 인원은 금요일에 수업 대신 강당에서 리허설을 하게 돼있지. 리허설은 오후부터라곤 들었지만 그날 하루는 사샤도 정신없을 거야. 화요일의 해프닝 따위는 이제 슬슬 지쳐서 신경쓰기 귀찮아지거나 다른 더 중요한 것들에 파묻혀 자연스레 잊게 되겠지. 솔직히, 지금쯤이어도 까먹었을 가능성이 높아. 안전장치 삼아 하루 더 피하는 거야. 안전하고 확실해야 하니까. 그럼 금요일엔 편하게 학교를 가도 될 거고, 굳이 내가 도망 다니지 않아도 사샤는 이제 귀찮아져서 나를 찾으러 오지 않겠지. 오가다가 자연스럽게 마주친다면 나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인사를 건네면 되고. 왜 연락 못 받았느냐고 하면 폰을 잃어버렸었다 하면서 슬쩍 화제를 돌리면 되는 일이고. 평소처럼 포커페이스만 잘 하면 돼. 너는 할수 있다, 마르시.

마음을 단단히 먹은 마르시는 호기롭게 침대 밖으로 팔을 뻗어 탁상 위의 랜턴을 껐다. 오늘 밤 자고 일어나면, 내일은 쥐 죽은듯이 점심까지만 버티다가 조퇴하고, 그 다음 날 밤 자고 일어나면 이제 화요일 일은 없던 게 되는거야. 사샤를 만나도 아무것도 부끄러운 일 없는 사람 되는거야. 딱 체육대회 리허설 날까지만 버티자. 이번 주까지만 사샤를 절대 마주치지 말자!

'알 이스 웰...'

좋아하는 영화에 나온 긍정의 주문을 속으로 읊으며 잠을 청했다. 종일 머리가 과열돼 있던 탓에 지쳐있던 심신은 금세 꿈나라로 향했다. 그리고 운명의 아침이 찾아왔다.

사샤네 집은 마르시네 주택가에서 스무 블럭 이상 떨어져 있었다. 학교를 기준으로 봤을 때 두 집은 완전히 정 반대 방향. 그래도 도로명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그렇게까지 동떨어진 정도는 아니었으나, 아무래도 평소에 걸어서 왔다갔다하기에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거리라서인지 둘이 서로의 집을 방문하는 일은 좀처럼 흔치 않았다. 보통 그 중간 지점쯤에 위치해 있으며 학교에서 가장 가깝기도 한 앤네 집을 주로 아지트 삼아 모여서 놀곤 했다. 

그 편이 모두에게 자연스러웠던 것이다. 멀기도 멀거니와, 그렇게 각별한 사이도 아닌 이 둘이 굳이 걸어서 서로의 집까지 찾아갈 이유란- 억지로 만들어내지 않는 이상- 없다는 것쯤은 셋에게 있어 너무나 암묵적이면서도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랬는데.

왜 우리집 앞에 네가 있는 거야? 

마르시는 아직도 잠이 덜 깼는지 확인하려 다시금 제 눈을 비볐다. 그러나 마치 확인 사살이라도 당하듯, 사샤가 왔으니 어서 나가 보라는 엄마의 피곤하면서도 앙칼진 목소리가 졸음을 뚫고 또렷하게 들려왔다. 

방에서 나오던 마르시는 그대로 도로 들어가 잽싸게 숨었다.

통제 불가능의 변수 앞에서는 제아무리 뛰어난 수학자라도 골머리를 썩히기 마련인 법. 명석함에 있어서는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 마르시였지만 하루아침에 예상에서 한참이나 벗어나버린 지금같은 돌발 상황을 침착하게 받아들이기에는 마르시도 고작 열 다섯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이게, 지금 무슨 일인가. 

현관 앞에 있어?

사샤랑 절대 마주치지 말자고...그렇게 치밀하게 계획했던 게 바로 어젯밤이었는데 불과 몇 시간도 안 지나서 이렇게 모든 게 물거품이 된다고? 아니, 계획도 계획이었지만 지금 그것보다도 중요한 건 대체 이 아침 댓바람부터 사샤가 자기 집 앞에 와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였다. 도대체 이 시간에 얘가 왜 여기를? 설마 우리 엄마를 보러 온건 아닐 테고, 그럼 나를 보러? 여기까지? 초등학교 때 두세 번이었나, 그 이후론 한 번도 마르시네 집을 방문한 적이 없었던 사샤였다. 그런데도, 오늘, 학교도 가기 전에 굳이 우리 집으로 찾아온 이유라면....그럴 이유라면.....역시나. 역시 내가 자길 피하고 다닌 것 때문에 화가 난 거겠지. 오, 맙소사, 그것밖에는 답이 없었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찾아왔을까. 오늘 아예 끝을 볼려고 하는 거야! 젠장, 다 틀렸어. 변명이고 뭐고 아무것도 준비 안 되어있단 말이다. 당연히 오늘까진 안 마주칠 줄 알고 여유롭게 책가방이나 챙기고 있었는데! 오, 주여. 은근슬쩍 까먹게 하려는 작전은 우습게도 시작도 전에 실패한 꼴이 되어 버렸다. 준비되지 않은 자신의 앞에 성큼 나타나버린 짝녀... 이런 변수를 능숙히 다루는 법 같은 거, 마르시 우는 몰랐다.

가여운 마르시의 당황한 머릿속에 온갖 생각들이 물밀려 들어왔다. 한 구석에서는 여전히, 그래도 어떻게든 계획을 성공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궁지에 몰린 아이 특유의 임기응변식 사고에서 비롯한 실낱같은 희망이 남아 있었다. 마주치지 않는 방법이 어떻게든 있지 않을까. 사샤가 보지 못하는 곳으로 슬쩍 나가? 기다리다가 지쳐서 갈 때까지 나가지 마? 엄마한테 배 아프다고 하고 사샤에게 그렇게 전해달라고 할까? 그러나 우선 첫째, 현관문 앞에 사샤가 버티고 있는 이상 사샤가 안 보이게 나갈 수 있는 다른 출구 따윈 이 집에 없었다. 창문으로 무모한 탈출을 시도한다고 해봤자 마르시네 방은 이층이라 불가능할 뿐더러 일층 부엌 창문으로 등교하러 나가는 비상식적인 행동이 엄마의 눈에 포착되어 또 무지막지한 잔소리를 들어먹을 위험을 감수할 바에야 사샤를 마주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둘째, 사샤가 기다리다가 혼자 갈 때까지 안 나갈 순 있었으나, 사샤를 그만큼이나 기다리게 하는 것 자체가 마음에 걸리는 일이었다. 이 시간에 왔다는 것은 솔직히, 누가 봐도 등교하기 전에 마르시를 만나러 왔다는 것일 텐데. 나를 보러 먼 거리를 감수하고 이른 아침부터 여기까지 걸어온 사람의 수고를 헛수고로 만드는 것은 무척이나 예의도 없고 상대에게 미안한 일이라는 것쯤은 마르시조차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 이전에 사샤와 무슨 일이 있었건 간에 찾아온 사람을 돌려보내는 건 할 짓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사샤인데. 여기서 더 관계가 악화되는 건 결코 마르시가 바라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결국, 답은 너무나 뻔했다. 나가서 마주하는 것이다. 오늘이 벌써 이틀째였고 더 이상 아프다고 해 봤자 엄마에게 통하지도 않는다. 어차피 학교를 가야 할 것이라면,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무섭고 떨리지만 나가서 마주하는 수밖에 없었다. 자신에게 먼저 찾아와 준 사샤를.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 꽁꽁 감춰왔던 이 모든 혼자만의 말 못할 고민들을 마침내 털어버릴 기회를.

가방을 매고 현관으로 저벅저벅 걸어가 문손잡이를 잡았다.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은 뒤 천천히 돌리자, 문을 연 그곳에는 평생을 봐 온 친숙한 얼굴이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옆에서 바라보기만 했던 그 얼굴, 그러나 보고 또 봐도 결코 질리지 않던 고운 눈코입이었다. 제 생을 바쳐 사모해 왔기에 아무리 멀리 있어도 단연코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는 한 사람의 실루엣이었다. 사샤였다.

"안녕..?"

"어, 마르시. 오랜만이다?"

떨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슬며시 시선을 올린 마르시가 확인한 상대의 표정은 눈에 띄게 밝았다. 사샤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인상도 쓰지 않았고 눈동자는 투명하게 맑았고, 그리고 동그랗게 뜬 눈 위로 자연스럽게 바짝 올라간 얇은 속눈썹이 아, 정말..정말로 예뻤다.

"네가 하도 학교를 안 와서 내가 왔어."

그, 그렇구나. 당연히 그렇겠지? 마르시의 손에선 식은땀이 줄줄줄 나왔다.

'...올 정도로 신경 쓰고 있었냐고는 안 물어보네.'

사샤가 떠올린 방법은 바로 아침에 마르시네 집으로 직접 찾아가는 것이었다. 마르시가 등교하기도 전에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함께 등교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도망 속성에 회피 속성인 마르시의 사고 패턴을 어느 정도 알고 있기에 이 방법만이 가장 확실하리라고 자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마르시는 평생 자길 피해다니기만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고 그건 절대 사샤가 두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결과는 역시 예상대로였다. 마르시는 사샤가 바라던 대로 나와 주었다. 며칠 간의 고생 아닌 고생 끝에 사샤는 드디어 마르시를 불러내는 데 성공해 같이 등굣길을 걷고 있었다. 예상과 다른 점이라면 마르시가 평소 복장과는 사뭇 다른 차림을 하고 있다는 부분일까...

"옷이 다르네?" 사샤가 고개를 까딱이며 물었다.

"어? 어어어....." 

마르시는 평소의 회색 후드가 아닌 흰색 교복 맨투맨을 입고 있었다. 신발도 갈색 구두가 아닌 흰 운동화였다. 전체적으로 패션이 마르시라기엔 너무 하얬다. 너 알아보지 못하라고 이렇게 입은 거라고..... 차마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

보도를 걸으며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대화를 주고받지 않았다. 오로지 걸음소리- 일정한 간격을 두고 시멘트에 맞부딪히는 구두굽 소리만이, 그리고 이따금씩 사방에서 배경음처럼 들려오는 짹짹 소리만이 긴 정적을 채웠다. 

사샤와 걷는 등굣길은 어색했다. 우리가 친구로 지낸지가 거의 십 년, 한 번이라도 이렇게 스쿨버스 대신 걸어서 같이 학교를 갔던 적이 있던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니 또 가슴이 멋대로 설레어 왔다. 이런, 오늘 같은 날에는 까불지 말고 가만 있으라고. 하지만 모든 일의 원흉인 바보같은 심장이 이제 와서 주인 말을 들을 리 없었다. 습기 속에서 은은히 풍기는 초여름의 향기에 코끝이 괜스레 간질거려 왔다. 보기 좋은 녹색으로 물든 길가에서는 싱그러운 풀 내음이 진동했고, 햇살에 반짝거리는 나무 위에서는 새들이 아침을 맞이하며 지저귀었다. 촉촉한 새벽 공기를 사샤와 함께 마시며 평온하게 동네를 걷고 있는 이 시간이 너무나 잔잔해서 꿈처럼 느껴졌다. 사샤의 보폭에 맞춰 산뜻하게 내딛게 되는 한 걸음, 한 걸음이 금방이라도 뜀박질로, 날갯짓으로 변해 구름 위로 날아올라갈 것만 같았다. 둘 사이에 정작 풀린 건 하나도 없었는데, 정말 이상하게도 긴 폭풍을 마침내 지나온 것만 같은 안도감이 들었다. 걱정했던 바와는 전혀 달리 사샤는 화나 보이지도, 불만에 차 보이지도 않았다. 마르시를 추궁할 생각도, 뭘 따지려 들 생각도 없어 보였다. 사샤는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았는데, 그 다문 입술이 향유하는 분위기가 오늘따라 왜인지 너무도 따뜻하고 부드럽게 느껴질 뿐이었다. 어쩌면, 생각보다 괜찮은 것일지도 몰랐다. 그날 마르시의 작은 실수도, 지금 마르시와 사샤 사이의 관계도. 어쩌면 모든 일들은 마음 먹기에 달려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샤는 슬슬 답답했다. 이 상태로 가다간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서로 한 마디도 주고받지 않은 채 헤어질지도 몰랐다. 역시 이 녀석한테 먼저 뭔갈 주도적으로 하길 바라는 건 무리인가, 하는 생각을 하며 마르시를 흘끗 바라보았다. 여느 때처럼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는 동그란 얼굴이었다. 대체 맨날 뭘 그렇게 혼자 생각하는지, 나도 좀 알자. 네 속내를 이제는 좀 알고 싶다고. 그날은 왜 도망쳤던 거고, 그때 그 좋아의 의미는 뭐였고, 아프다더니 이젠 괜찮은 건지, 아니 애초에 아프긴 했는지. 당장이라도 추궁해서 확인하고 싶은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마르시가 먼저 물꼬를 트길 바라며 기다렸다. 내가 나답지 않게 이렇게까지 하는데 너는 뭐 느끼는 거 없는지. 꼭두새벽부터 스무 블럭을 걸어온 노동에 조금이라도 보답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네 입으로 뭐라도 말해 보라고.

마르시가 언제까지 침묵을 택하는지 두고 볼까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지루함을 못 견뎌하는 사샤에겐 어쩔 수 없이 슬슬 한계인 상황이었다. 사샤가 매번 말을 해야만 진전이 있는 관계라면 그건 과연 의미가 있을까. 그러나 자기가 저도 모르는 새에 이미 마르시에게 변화를 가져다주었다는 사실을, 사샤는 몰랐다. 

사샤에게 물어보고 싶은 거야 차고 넘칠 만큼 많았다. 그날 내가 내뱉고 도망친 말, 너는 정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잊어 버렸는지. 며칠 내내 학교도 안 나왔던 거, 사실 아파서가 아니라 널 마주치기 부끄러워서였다는 거 알고 있는지. 내가 그때 좋아라고 한 거, 그거 너를 대상으로 했던 말이라고 하면 넌 뭐라고 반응할 건지. 너,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너, 화난 게 아닌데도 여기까지 날 보러 찾아왔을 정도라면 너도 나를 계속 신경 쓰고 있었던 건지. 내가 너를 오래전부터 좋아해왔었다고 말하면 너, 어떻게 대답할 건지. 

학교로 향하는 마지막 모퉁이를 돌아갈 무렵 무슨 용기가 난 건지 먼저 입을 열었다.

"사샤 있잖아, 나 너 좋아한다."

앞서 나가던 사샤의 걸음이 정지했다.

뱉어 버렸다. 이젠 돌이킬 수 없다. 

목적어도, 주체도 없는 좋아가 아닌, 사샤 너를 내가 좋아한다고, 분명한 문장을 명확한 청자에게 말했다. 짧은 두 마디에 담긴 긴 세월의 감정이 너에게 전해졌을까.

우뚝 선 채 몇 초간 미동도 없이 서 있던 사샤는 이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마르시 또한 가만히 서서 자길 바라보고 있었다. 

좋아한다고 말한 뒤의 마르시의 모습은 아주 가관이었다. 잘 익은 토마토마냥 울긋불긋 달아오른 동그란 얼굴 양옆으로 두 귀는 더 시뻘개져 있었다. 그 우스운 꼴로 마르시는 한 번씩이나 더 강조했다.

"그런 의미로 좋아하는 거 맞아."

사샤는 웃음이 나왔다. 입 밖으로 나오려는 걸 꾹 참았다. 사샤 스스로 끈덕지게 배제하고 있었던 가능성이 별안간 깜짝 선물처럼 현실이 되어 찾아와 주었다.

"언제부터?"

사샤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진짜 오래 전부터."

대답하는 마르시의 시선은 사샤의 눈길을 피해 대각선 아래로 향했다. 

"네가 내 마음에 보답해주길 바라는 게 아냐, 부담 안 가져도 돼. 그냥 말하고 싶었어. 오늘은 말해야 될 것 같애서."

난생 처음 고백이란 걸 해보고 있는 마르시는 자기 얼굴이 점점 더 뜨거워지는 걸 느끼며 민망함에 실신하기 직전이었다. 이렇게까지 부끄러운 일이었다니, 그렇지만 속이 그 어느 때보다도 후련한 건 부인할 수 없었다.

사샤는 입을 아주 살짝 벌린 채 웃음이 터져나오기 직전의 얼굴과 딱딱한 정색 그 사이의 애매한 표정으로 마르시를 바라보았다. 지난날의 모든 궁금증들이 한 순간에 풀렸다. 자기가 방금 들은 말이 내포하는 의미가 지난 며칠 간 사샤와 마르시 사이에 있었던 일들 중 사샤 머릿속에 물음표로 남았었던 모든 것들을 군더더기 없이 설명해 주었다. 내가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다면, 네가 그때 한 말의 의미도, 네 말도 안 되는 행동들의 이유도 다 나와 관련이 있었다는 거잖아. 그니까 너는 이미 한참 전부터 나를...

"나도야."

사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바닥만 보고 있던 마르시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있는 사샤의 얼굴은 묘하게 핑크빛이었다.

"나도 너 좋아한다고."

마르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하는 사샤의 목은 마르시의 볼짝만큼이나 불그스름했다. 십 년 가까이 붙어다니면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던 친구의 모습을 마르시는 직관하고 있었다.

"..진짜야?" 

마르시가 한 발짝 더 앞으로 다가서서 물었다. 바보같은 질문이었지만 그럼에도 믿기지 않아 한 번 더 듣고 싶은 말이었다. 조금 더 가까이에서 한 번 더 들어보고 싶었다. 사샤는 여전히 상기된 얼굴로 한숨을 쉬듯 대답했다.

"어..."

마르시는 벙쪄서 사샤의 두 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네가 나를 왜, 나의 어떤 점을 보고 네가, 언제부터 무슨 계기로, 맘속에서 솟아오르는 모든 질문들은 그대로 꿀꺽 삼켰다. 네 말이 사실이라면, 이런 걸 물어볼 수 있는 시간은 우리에게 앞으로 많이 있을 테니까. 

"나 사실 그때 복도에서 좋아라고 말한 것도..."

"그래, 말 안해도 알아."

"네가 너무 예뻐서 나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그 말이 나왔어."

"...."

이쯤 되니 사샤 스스로도 안면이 뜨끈해지고 있는 걸 느끼기 시작했다. 물론, 빨개진 건 저 뿐만이 아니라는 게 보였기에 안심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학교로 향하는 마지막 모퉁이에 멈춰서서 잔뜩 울긋불긋해진 얼굴로 서로를 어정쩡하게 바라봤다.

"가, 마저 가자, 학교."

사샤는 부끄러운 듯 말까지 더듬으며 휙 돌아서더니 걸음을 재촉했다. 마르시는 옆에서 따라가며 슬그머니 손을 뻗어 사샤의 손을 잡았다. 가늘고 긴 손에 제 손바닥을 살며시 포개었다. 그리곤 아주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맞물려 깍지를 꼈다. 

사샤는 내치지 않았다. 오히려 답장해 주려는 듯 더 꽉 잡아 왔다. 

마르시는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다. 지금은 그럴 타이밍이 아니어 보였지만, 언젠가는 꼭 사샤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리라 다짐했다. 내가 용기도 없어 마땅히 마주해야 할 일들을 못 마주하고 있을 때, 그런 내게 먼저 찾아와 줘서. 늘 이렇게 먼저 나서 주는 너라서. 너에게 마음을 전할 용기를 주어서 정말 정말 고맙다고. 

마르시는 다시 놓지 않을 것처럼 손에 꼬옥 힘을 주었다. 

"다음주 체육대회에 나 나가는거 알지?" 

사샤가 입을 열자마자 마르시가 대답했다.

"당근 알지."

"나 치어리딩하는데 너 구경하러 올래?"

"당연히 가야지. 가서 응원해야지! 그럼 나는 치어리더의 치어리더가 되는 건가?"

"뭐야 그게."

사샤가 푸흐흣 하고 웃었다. 마르시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마르시가 제일 좋아하는 저 눈웃음을 이제 실컷 볼 수 있었다. 은근슬쩍 하는 스킨십 말고 이제 당당하게 손 잡을 수 있었다. 이제부터 정말로 매일매일 붙어있을 수 있었다.

어느새 언덕 아래로 학교 건물이 보였다. 등굣길의 햇살은 눈부셨고 새들은 조잘조잘 노래했다. 새벽의 쌀쌀한 공기는 이제 온데간데없었다. 날이 더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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