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C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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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렸다. 야쿠젠 시안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눈 앞의 사고뭉치는 대체 무슨 역효과를 예상했기에 지레 겁먹고 말하지 않겠다고 했던 건지 이해가 안 갔다. 화라도 낼 줄 알았나? 설령 그렇다 한들 자신이 표출하는 분노는 귓등으로도 안 듣고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는 주제에 대체 뭘 염려했던 걸까… 정말이지 어이없을 정도로 아무런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지워버리고 싶을 정도의 나쁜 것. 아예 삭제하고 싶었던 것. 야쿠젠 시안에게 있어 ‘그것’은 그럴 만큼의 가치를 지녔던가? 시안은 준비성이 철저한 편인지라, 질문을 받으면 대응할 대답 서너가지와 이어질 질문을 예상하는 버릇이 있었다–가설을 세우고 검증하는 단계– 그런데 엔리케 하인츠의 질문에 쉽사리 답을 하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좀
새끼손가락을 걸고 지장을 찍는 행위. 아주 의례적인 약속의 행위 중 일부였지만 야쿠젠 시안에겐 생소한 것들 중 하나였다. 자주 해보지 않아 익숙하지 않았던 탓이다. 뜨겁다기엔 미지근하고 따뜻하다기엔 그것보다 높은 나비드 니키타의 체온 역시 생소했다. 불쾌하지는 않았다. 타인과의 접촉을 그렇게도 꺼리는 야쿠젠 시안 치고는 의외인 일이다. 그것보다는 살아있는
우뚝, 멈춘다. 지금 내게 대답을 바라는건가? 지금 상처를 받았냐고? 이 내가? 말도 안되는 소리. 애초에 아무것도 아닌 관계였다. 그러니 상처 받을 것도 뭣도 없다. 그럼 나는 왜 이렇게 화가 난 걸까? 아, 그래. 그건 그냥 이 글러먹은 자식도 마찬가지로 결국 자신을 실망시킨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 왜 실망했지? 그건… 기대했기 때문에.
야쿠젠 시안은 꿈을 꿨다. 정확히는 악몽-시안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이라고 부를 법한 것.꿈 속의 자신은 누군가에게서 도망치고 있지도 않았고, 누군가를 끔찍하게 살인하지도 않았고, 자신이 애써 지켜온 명성이나 실적이 모래성처럼 무너진 것도 아니었다. 그저 혼자 있었다. 사람은 커녕 풀 한포기 찾아볼 수 없는 노랗고 어두운 공간에서 야쿠젠 시안, 그 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