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4
내가 죽인 놈.
질렸다. 야쿠젠 시안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눈 앞의 사고뭉치는 대체 무슨 역효과를 예상했기에 지레 겁먹고 말하지 않겠다고 했던 건지 이해가 안 갔다. 화라도 낼 줄 알았나? 설령 그렇다 한들 자신이 표출하는 분노는 귓등으로도 안 듣고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는 주제에 대체 뭘 염려했던 걸까… 정말이지 어이없을 정도로 아무런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아, 하나 빼고. 이상한 말투가 아닌 반말을 쓰는 녀석의 입버릇은 제법 흥미로웠다. 맨날 뭐뭐했슴다, 그랬는데여. 같은 말만 할 줄 알았더니 평범한 말투도 구사할 줄 알았네, 정도의 감상만이 잔상처럼 남았다.
‘언젠가 얘한테 미안한 마음과 죄책감을 느꼈던 것도 같았는데.‘
이제 그것은 아주 먼 옛날의 일, 또는 백일몽에서 겪었던 일처럼 여겨졌다. 그런 감정은 신기루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절로 비웃음이 입가를 비집고 나왔다.
“그래서? 요약하자면 내 잘못도 있다고 주장하고 싶은 모양이구나. 틀린 말은 아니지. 아, 그냥 모든 걸 내 탓으로 하고 싶은건가?”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철모르고 천방지축으로 나왔다. 한껏 고조된 목소리였다. 뻔하지, 눈 앞의 유리구치 마메는 또 도망가고 회피하는 것이다. 시안은 그리 단정했다. 유리구치 마메가 그동안 어떤 결심을 하고 어떤 마음을 먹고 어떤 행동을,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는 관심 밖의 영역이었으므로. 왜냐면 나한테 말한 적 없잖아.
야쿠젠 시안은 그간의 일을 복기했다. 눈 앞의 것은 제게 마약을 타 갔다. 그래, 나도 만들어주지 않았으면 될 일이다. 거절했으면 될 일이다… 그런데도 만들고 말았던 이유는, 부탁을 들어줬던 이유는… 순전히 너를 얌전히 만들겠다는 시시한 이유가 아니었다. 기존에 손대기 어려운 약품들을 취급할 수 있으니 서로 윈윈이라던 이유도 아니었다. 사실은 네가 괴로웠으면 했어. 네가 고통스러워하면서 천천히 썩어가길 바랐어. 네 안일한 회피가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켰는지 뼈저리게 느끼게 하고 싶어서. 하지만 그것은 야쿠젠 시안의 착각이었다. 눈 앞의 것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힘들면 자해로 도망치고 거기에서 비롯되는 엔돌핀을 즐기기 위해 중독될 것이며 여태 해왔던 대로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줄타기를 오가며 아드레날린을 뽑아낼 것이다…
그에게는 전매특허의 시그니처 표정이 있다. 오만함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상대방을 하찮은 벌레 보듯이 깔보는 것. 문 밖에서는 항시 그러고 다녔으나 이곳에서는 그럴 일이 좀처럼 없었다. 왜냐면 그들은 초세계급이었으니까. 명성과 인지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내로라 하는 녀석들만 모였다는 걸 아니까. 그러니 모나게 굴기는 했어도 하찮게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눈 앞에서 조금씩 다가오고 있는 유리구치 마메는… 답이 없었다. 사상 최초로 ‘하찮은 ‘초세계급 타이틀을 거머쥔 녀석이었다. 그러니까 다가오는 이 자식을 피할 이유는 없다. 있더라도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 이 자식이 빡쳐서 눈이 훼까닥 돈 나머지 제게 손을 올린대도 폭력을 견뎠으면 견뎠지 절대로 뒤로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 고개를 올려 상대를 마주했다. 그래, 내게도 책임이 있지. 내가 실수하지 않았으면 너도 나도 죽지 않았을 테니까. 그래서…
“나도 네 부탁을 들어준 사실 자체를 후회해…”
“그러니까 앞으로 더 이상 내게 부탁 같은 것 하지 마. 이젠 들어줄 생각 없으니.”
시안은 총 세 번 마약을 만들었다. 하나는 윈슬로 부인의 진정 시럽, 하나는 퍼플 드링크, 마지막으로 LSD. 공통점이 있다면 전부 다 중독성도 부작용도 (그나마) 크지 않은 것들로. 부작용을 이야기하며 겁을 주면 그만둘 줄 알았는데 그것 또한 제 오판이었다. 그러니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부작용도, 중독성도 낮은 것으로만 만들어주는 수밖에. 하지만 이 이야기를 눈 앞의 것에게 이야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어쨌든 마약은 마약, 널 배려했다며 위선 떨거나 생색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앞서 말했지? 나는 네가 괴롭길 바랐다고.
- 카테고리
- #기타
해당 포스트는 댓글이 허용되어 있지 않아요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