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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케 하인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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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워버리고 싶을 정도의 나쁜 것. 아예 삭제하고 싶었던 것. 야쿠젠 시안에게 있어 ‘그것’은 그럴 만큼의 가치를 지녔던가?

시안은 준비성이 철저한 편인지라, 질문을 받으면 대응할 대답 서너가지와 이어질 질문을 예상하는 버릇이 있었다–가설을 세우고 검증하는 단계– 그런데 엔리케 하인츠의 질문에 쉽사리 답을 하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좀처럼 다음 단계로의 사고 진전이 되지 않았다. 마치 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나는 대답을 해야 해. 그러니 비켜줘— 하고 벽 앞에 서 있으면 여기서 더 나아가선 안 돼. 그만 둬. 되돌아가. 하며 자신을 돌려보내는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그 약의 존재 가치는 자신의 외로움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다. 여기까지는 그래, 설명할 수 있다. 인정하기 싫지만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비단 자신만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응당 느끼곤 하는 것이니 이상할 게 없단 말이지. 하지만… 엔리케와의 질의응답 이후로 어쩌면 돌아올지도 모를 예상질문, ‘왜 외롭냐’ 는 질문을 받는다면 자신은 그에 대한 답을 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왜냐면 아무도 자신을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으니까.

눈 앞의 이를 올려다본다. 이 자는 함부로 내게 이러니 저러니 어쭙잖은 평가를 할 것 같진 않았지만, 야쿠젠 시안은 사람들로부터 너무도 많은 부정을 받아왔다. 남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도 익숙했고, 핵심 인재 대우하면서도 동시에 어린아이 취급하며 실질적인 회의에는 배제시킨다든가, 의견을 묵살당하는 것도 익숙했다. 사람들이 긍정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결과물이다. 약, 약, 약…. 수요가 있으면서도 동시에 악용되지 않으면서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약을 만들어야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야쿠젠 시안이라는 인간에 대한 부정은 괜찮았고,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자신이 내놓는 결과물에 대해서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그러니까 엔리케 하인츠가 자신의 약을, 개발하기 시작했던 이유를 알게 되면 그것은 옳지 않다고 부정할까봐 무서웠다. 세상에 필요 없는 감정은 없어요, 부터 시작해서 외로움은 사람들과의 교류로 해결할 수 있다는 뻔하디 뻔한 상투적인 위로를 들을까봐 두려웠다. 정작 엔리케 하인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답을 내놓을지는 본인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것을 이리도 지레짐작하고 만다. 언제나 버려지고 부정당할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의 태도란 늘 이렇다. 그러니까 이렇게 사는 게 싫다고. 그래서 필요한 거라고 말하고 싶은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할지 가닥이 잡히지 않았다.

물론 엔리케 하인츠가 뭐라고 한들 자신은 그 약을 완성해낼 것이다. 이곳에서 어떤 이변이 일어나도 마찬가지고 결심은 꺾이지 않을 것이다. 츠카다이라 유우야와 차츰 가까워질 준비를 하고 있어도, 마르코 카시안의 아이의 약을 급여 처리해주기로 했어도, 라쿠나가 자신의 술 선생이 되어주겠다 약조했어도, 시미즈 카논의 동생을 살펴주기로 한 것도, 나비드 니키타와 생애 첫 친구가 되었어도, 시라마야 이토리가 말해준 마츠리에 가기로 했어도… 그 약은 만들어낼 거라고. 연구는 포기하지 않겠노라고.

스스로가 이곳에서 쌓아온, 또 만들어온 약속들과 작은 인연들을 떠올렸다. 그래도 오래 전부터 다짐했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제서야 어떤 용기가 솟았다. 부정당할 용기랄까 뭐랄까… 사람들이 뭐라고 한들 자신은 어떻게든 만들어 낼 거고, 복용할 것이고, 이 지긋지긋한 외로움을 지워내서 아무것도 연연하지 않는 삶을 살리라. 살면서 처음으로 만드는 나만을 위해 만드는 이기적인 약이니 어떻게 쓰든 내 마음이라고… 용기가 두려움을 앞섰다. 드디어 오랜 침묵을 견뎌낸 이를 위해 입을 열었다.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지우고 싶다.”

“미리 말하건대 이건 사람을 여럿 사귄다든가 같은 행위로는 해결할 수 없어. 오로지 나 자신의 문제니까.”

“ …그리고 나는 오랫동안 이것으로 괴로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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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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