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눈에 비치는 것

정쿱

1

1995년생 윤정한에게는 여러 가지 특징과 장점이 있었다. 몇몇은 부단한 노력 덕분이고 몇몇은 처음부터 타고난 것이었다.

남에게 보일 수 있는 특징 : 상당한 수준의 운동신경이나 예체능을 너그럽고 적극 지원해 줄 수 있는 부모, 외모, 장난기 많은 성격.

남에게 보일 수 없는 특징 : 갑자기 개화했다가 스르르 사라지는 이상한 능력들.

이를테면 윤정한은 다섯살부터 열살까지 예지몽을 꿨다. 자각몽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눈으로 볼 무언가를 꿈에서 재현하는 것이었다. 처음에 꿈을 꾸었을 때는 어렸기 때문에 의미를 전혀 알 수 없었다. 여덟 살쯤 되어서야 확실하게 미래의 꿈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열 살의 생일을 마지막으로 독특한 앵글의 예지몽은 사라지고 평범하게 이상한 꿈들이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대신 열살부터 열일곱살까지 윤정한은 귀신을 보았다.

그가 보는 ‘귀신’은 사람 같지 않았다. 안개 뭉치가 모인 흐릿한 느낌이거나 혹은 쓸모없는 선물 교환하기에 당첨된 선물 같았다. 기절하지 않고 울지 않을 담력은 있었지만 귀신들이 치근대고 귀찮게 구는 것이 너무 짜증났기 때문에 윤정한은 리틀 야구부에 들어갔다. 유령들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를 싫어했고, 열정열정열정! 이것도 싫어하는 모양이었다.

야구를 좋아하게 된 건 그 후였다. 그게 목에 걸린 가시처럼 신경쓰였다. 단지 귀신을 피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진짜 좋아한다고 해도 되는 걸까? 단순히 귀신이 안 따라오니까 신난 거 아닐까?

‘대학까지 야구로 들어간 다음에 그만둘까. 찝찝해.’

열일곱살의 생일날 밤, 진로 계획을 하며 눈을 감았던 윤정한은 엘리베이터가 솟구치거나 멈출 때 느끼는 약한 어지러움에 눈을 떴다.

낯모르는 장소에 자신이 서 있었다.

패닉하는 대신 정한은 팔짱을 끼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적어도 대한민국이었다. 대한민국 방방곡곡에 유행 중인 촌스러운 체리 몰딩이었으니까. 그리고 책상이며 옷걸이 같은 물건이 아주 익숙했다.

‘한국인 건 맞는데.’

방은 좁았고, 문을 닫아놓은 채 한 소년이 두툼한 겨울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리고 모로 누워있었다.

정한은 생각을 멈추지 않고 주변의 상태를 확인했다.

첫번째로, 모르는 놈이다.

두번째로, 고장난 회중시계처럼 시간은 느리게 가고 있다. 윤정한을 제외하고.

세번째로, 와, 나 유령인 듯.

팔이 콘크리트벽이며 책상을 쑥 통과했다. 모르는 남자애 머리에 손가락을 넣어봤는데 진짜 아무런 저항도 없이 들어갔다. 휘휘 저어도 걸리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서 문득 집중하지 않으면 바닥까지 뚫고 저 아래로 떨어지겠다는 본능이 새어나왔다.

‘아는 얼굴도 아니고, 자각몽이니까 예지몽 계열도 아닌 거 같고.’

그리고 몸 속 어디에선가 모래시계가 돌아가고 있다는 자각이 있다. 좁은 구멍 사이로 모래가 한 알 한 알 통과해 쌓인다. 위의 모래가 모두 떨어진다면 다시 현실로 돌아갈 것 같다는 희미한 확신.

남자애는 정한이 옆에서 얼쩡거리는 것도, 움직이는 것도, 눈앞에 손을 휘저어보는 것도 아무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문득 정한은 소리를 들었다. 시간이 느려져 번지는 세피아색의 세계는 한없이 고요했으므로, 길고 촘촘한 눈꺼풀이 젖어들며 나는 소리가 귓가에 선명했다.

그리고 베개에 묻은 얼굴에서 눈물 방울이 가로로 포르르 떨어졌다. 그게 시작처럼 눈물방울이 줄줄 흘렀다.

모로 누워있으니 눈물은 뚜렷한 이목구비의 선을 어지럽게 넘나들며 코 끝도, 눈썹 선도, 꽉 감아 깊은 아이홀을 따라서 아무렇게나 흘렀다.

윤정한은 당황과 민망함에 잠시 숨을 멈추고 그 모습을 뚫어져라 보았다.

같은 또래 남자애가 이렇게 우는 것을 보는 일은 없다. 허세와 센 척으로 이루어진 남중생 남고생은 쉽게 우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있어봐야 분에 못이겨서 악지르거나 날뛰는 모습.

그런데 이 남자애는 숨도 내쉬지 않고 울다가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썼다. 속에서 어떤 감정이 끓어올랐단 것은, 오직 겨울 이불이 흔들리는 것으로만 알 수 있었다. 맛보지 않아도 그 눈물이 쓰리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정한은 들릴 리 없으리란 걸 알면서도 중얼거렸다.

“일부러 울고 그런 거 보려고 한 건 아니다?”

아랫입술을 물고 정한은 억지로 시선을 떼서 남자애의 방을 살피는 시늉을 했다.

내가 판 중고 물품을 얘가 가지게 되어서 생령으로 따라왔나.

남자애의 방은 의외로 생활감이 그렇게 넘치지 않았다. 책상 위 모니터 주변만 어수선했다. 책장에 책은 별로 없다. 아기자기하게 장식된 별 이상한 쪼끄만 인형들(얘도 여동생 있는 게 틀림없네), 그리고 가운데에 위풍당당히 장식된 프로 선수의 싸인 야구볼.

“흠.”

다시 보니 몇 권 안 되는 책들은 다 유명한 야구 선수의 자서전, 코치가 추천했을 게 분명한 소년야구, 투수 교과서, 야구교본 같은 책들이다.

좀 더 자세히 둘러보자 (아직) 사용감이 적은 새 교복, 옷걸이 위에 올려 쌓은 야구 점퍼 아래에 글러브가 불룩한 게 보였다.

“너도 야구소년이구만. 나도 하는데!”

무심코 기쁜 얼굴이 되어 소리쳐도, 남자애는 여전히 소리 없이 울 뿐이다. 들리지 않는 것이다.

윤정한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거 기분 이상한데.

누군가 약한 모습을 허락없이 봐 버린 기분.

좋지 않아. 좋지 않아, 윤정한.

그리고 그렇게 모래시계의 마지막 모래가 떨어졌다.

윤정한은 다시 자신의 방에 돌아와 있었다.

시계를 본다. 시간을 찬찬히 따지는 성미는 아니라 여기에서도 진짜로 시간이 얼마나 갔는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하루 정도 지난 후엔 깨달았다. 유령이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예전의 능력은 사라지고 새로운 능력이 생겼다.

‘뭐 이래? 내가 인생을 아직 이십년도 안 살았는데 이렇게 막 줬다 뺏고 이래도 되냐?’

그리고, 야구를 할 이유가 사라져버렸다는 것도 윤정한은 알게 되었다.

.

.

.

지금부터 준비해서 수능을요? 고등학교 첫 상담에 담임이 사색이 되어서 솔직하게 입밖으로 내뱄었다.

뒤늦게 아차 싶었는지 할 수는 있는데… 하고 말꼬리를 흐렸지만 그 뒤의 말은 모두 알 수 있었다. 그 날 저녁 식사 자리에서 엄마가 상담한 걸 가지고 놀려대고.

심통이 나서 할 수 있지 왜~ 수능 봐서 원하는 대학 갈 때까지 재수할게~ 했더니 엄마가 등짝을 후려쳤고 아빠가 동생하고 같은 학번일 때까진 해보라고 그랬다. 미쳤나.

동생과 같은 학번일 수는 없으므로 윤정한은 계속해서 야구를 했다.

그나마 중학교 때까지는 그렇게까지 빡세게 굴리지 않았는데, 고교 야구가 되자 감독이나 코치는 물론이고 팀원들의 눈빛까지도 달라졌다. 신생이라 해도 너희가 선배가 되고 귀감이 되고…… 거기에 초칠 만큼 무기력하진 않았다. 윤정한은 대학이나 추천으로 잘 가고 싶다 하는 마음을 숨기고 열심히 굴렀다.

대통령배, 청룡기, 황금사자기, 봉황대기, 세계 청소년 대회…….

그 사이사이 윤정한은 자신에게 이번에 주어진 능력을 확실히 알게 됐다. 중고물품에 씌였거나, 미래예지나, 그런 건 아니었다. 좀 더 평범하고 묘했다.

그 애가 울기 시작할 때마다 소환되는 것이다.

‘진짜 모르는 앤데.’

그 애는 정말 잘 울었다. 혼자서 입 삐죽거리며 울고, 눈이 빨개지도록 울고, 헐떡거리고, 글썽거리고, 남자애가 어떻게 이렇게 잘 우는가 싶을 정도로 울었다. 윤정한은 자신이 언제 울었는지 생각해보았지만 몇 년 동안의 기억을 뒤지고 샅샅히 떠올려봐야 수학 수업시간에 졸다가 하품 했더니 눈물 맺혔더라… 까지밖에 없다.

어둡고 축축한 라커룸에서 연습용 배트를 손에 쥐고 이 악물고 우는 그 애 옆으로 소환되었을 때 이름을 알게 됐다. 연습용 배트에 이름이 붙어 있었다. 최승철. 그 때는 오래 울지도 않았다.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져 내리고 난 뒤 최승철은 손바닥으로 눈물을 쓱 문지르고 태연한 척 억지로 웃으며 걸어나갔다.

“으이구. 눈가가 그렇게 빨간데 모르겠냐, 찡찡아.”

최승철이 가버리고 난 뒤에도 한동안 윤정한은 남아 있었다. 모래시계는 한 10분쯤 되는 것 같았다. 윤정한의 학교와 별 다르지 않은 축축하고 좁은 라커룸에서 10분간 윤정한은 생각했다.

‘계속 야구 하면 대통령배나 청룡기 같은 데서 얘 볼 수도 있겠네?’

곧 단념했지만.

야구는 팀 스포츠였다.

‘나가기만 하면 맨날 지네.’

최승철이 허구헌날 울었기 때문에 허구헌날 소환된 윤정한은 그렇게 최승철에 대해 쓸데없이 많이 알게 됐다.

최승철은 고 1, 동갑이었다. XX 고등학교 야구부다. 그리고 아기자기한 인형은 여동생이 좋아하는 게 아니라 최승철이 좋아했다. 윤정한이 보기엔 눈만 커다래서 이상하게 생긴 캐릭터도 좋아했고 - 맨날 어딘가에 스티커가 붙어있으니 알 수밖에 없었다 - 앞에 유치한 일러스트가 크게 그려진 인터넷 소설도 좋아했다.

좋아하다 못해 그거 보고 울었다. 자기 또래 남자애가. ‘내 남자친구에게’를 보고. 책장을 넘기다 말고 낑낑거리며 울고 짜고 있어서 진짜 윤정한이 울고 싶었다.

“너는 진짜 이게… 말을 말자.”

어느 날인가는 책상의 컴퓨터 앞에 최승철이 의자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으이구 척추 수술 오천만원) 쿠션을 끌어안고 있었다.

모니터는 하얗다. 파란 머리의 여자와 남자가 번쩍거리며 느릿하게 흘러갔다. 느려져서 알 수 없는 소리가 귓가에서 마치 벌떼가 날아다니는 것처럼 울렸다. 눈이 아파서 찡그리며 고개를 돌리자, 그 푸른 번쩍임을 받은 최승철의 하얀 얼굴이 시선에 잡혔다.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진 뺨은 온통 반들반들하게 젖어 호수처럼 푸르게 모니터의 빛을 반사했다.

돌아온 후 윤정한은 네이버 지식인에 내공 걸고 올렸다.

Q 눈밭에 파란 머리 여자 나오고 고딩 남자애 울만한 영화 뭔가요

내공이 걸려 있어서인지, 혹은 유명한 영화여서인지 답변은 바로 달렸다.

A 이터널 선샤인

인생영화. 파랑 머리 여자분은 아마 이 분일 듯 합니다.

영상미가 참 예쁜 영화고 진지하게 사랑에 대해 얘기하다 보니 감수성 풍부한 때 보면 눈물이 나죠 친구분도 감수성이 풍부하신가봐요.

“친구 아닌데?”

어쨌든 윤정한은 대여점에 가서 한 다섯 번쯤 얼쩡거리다가 알바가 자꾸 말 걸어오는 게 빡쳐서 더 고민하지 않고 ‘내 남자친구에게’를 빌렸고, ‘이터널 선샤인’은 다운 받아 봤다.

이걸 보고 최승철처럼 그렇게 울 수 있을까?

하지만 둘 다 몸을 비비꼬면서 끝까지 보는 데까지만 성공했다. 윤정한은 이런 구질구질한 얘기는 질색이었다. 아무도 안 죽고, 아무도 안 웃고, 차도 안 터지고, 신파. 사랑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왜 사랑하면 비이성적이고 멍청하게 그릴까?

최승철 진짜 이런 거 보면서 운 거야?

얼굴만 보고 지레짐작하는 일은 윤정한도 많이 당했기 때문에 함부로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그래도, 남고딩이 이런 걸 보고 그렇게 힝구힝구 울기까지 하냐구…….

현타가 왔다.

그래도 이런 건 나았다. 야밤에 조심스럽게 울고 있을 때는 기분이 이상하고 짜증스러웠다.

“울지 좀 마. 왜 우는데. 왜 못 웃어.”

반성회에서 울면서 무어라 말할 땐, 그러면서도 어떻게든 눈을 부릅뜨고 손바닥으로 눈물을 닦아내면서 끝까지 말할 때는, 뱃속에서 일제히 나방이 수없이 날개짓하는 것처럼 붕붕거렸다. 어차피 야구하다 보면 매일 반복되는 반성회에서 그렇게까지 자기를 깎아내려야만 하나? 그렇게까지…….

야구하는 사람 같지 않게 하얘서 눈물의 열기에 녹아내리는 표정과 젖어들어가는 붉은 기가 너무 선명했다.

울부짖음이 없이 그저 조용한 이 수많은 울음 속에서 윤정한은 한 가지가 궁금했다. 나는 왜 네가 울 때 여기에 오게 됐을까?

하지만 윤정한의 능력이 늘 그렇듯이 당위와 맥락은 찾을 수 없었다. 부모를 선택하지 못하듯, 재능을 무엇을 타고날지 선택하지 못하듯.

2

프로 선수로서 입단식 날, 윤정한은 처음으로 최승철을 봤다. 아니, 만났다.

‘같은 팀인 걸 왜 아무도 말 안해줬지.’

드리프트도 자기 결과만 확인하고 꺼버렸으니 할 말이 없다. 윤정한은 눈을 굴리면서 단장이 말하는 동안 최승철을 흘끔거렸다.

겉으로 최승철과 윤정한 사이에는 아무런 접점이 없었다. 윤정한이 일방적으로 아는 관계일 뿐이었다.

사실 최승철을 확실히 알고 있느냐면, 그것도 애매했지만. 우는 모습은 많이 봤지만 그 외에는 모른다. 어떤 목소리인지도.

그래서 나눠주는 야구 점퍼를 입고 가는 최승철은 윤정한에게 매우 낯선 존재였다.

울지도 않았고, 녹아서 흐물흐물한 슬픈 표정도 아니었다. 반대로 부리부리해서 만만치 않은 인상이었다.

다 같이 늘어서서 교대로 악수하는 중간 다들 긴장한 티가 역력한데도 최승철은 신경질적인 예의바른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윤정한은 일부러 악수하는 손에 힘을 주고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안녕. 그만 좀 울어.”

최승철이 눈썹을 들어올리고 눈을 마주쳐왔다.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던 그 시선에 윤정한이 담긴다.

정확히.

수없이 본 사람인데, 우는 걸 몇 년간 봤는데,

초점이 또렷하게 자신을 향하고 반응하자 윤정한은 과부하로 잠시 멈췄다.

눈을 마주친 윤정한이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더듬거리자 최승철은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 피식 입꼬리를 잡아끌며 악수하는 손에 꽉 힘을 줬다가 놓았다.

“뭐고.”

다음 사람으로 넘어가고, 또 다음 사람으로 넘어갔는데도 여전히 귀에 최승철의 목소리가 남았다.

낮고, 눌러 죽이려고 해도 사투리 억양이 진한 목소리. 뱃속이 뒤틀릴 만큼 낯선 표정과 눈. 작고 도톰한 입술.

그대로 멍하게 경기장과 기숙사를 순회했다.

“기숙사는 현재는 이름 순대로 정했는데, 두 달마다 바꿉니다. 그 전에도 바꾸실 수 있지만 가능하면 1년은 팀워크를 위해서 다양하게 만나볼 수 있게 할 거고, 2군 선발 명단에 오르면 한달간 독방 가능합니다. 다른 문제 때문에 바꾸시길 원하면 사감님께 말씀 부탁드립니다.”

윤과 최는 가까운 듯 멀었다.

기숙사는 비즈니스 호텔 같았다. 어느 것 하나도 정을 붙이기 힘들게 깔끔했다.

“엥, 티비가 없네요.”

“그러게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싱글 침대가 하나씩 있고, 옷장은 하나였지만 둘로 나뉘어져서 각각 쓸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좀 더 신경 쓴 점은 컴퓨터를 놓을 수 있는 긴 책상 정도.

기숙사에서 생활해 본 적 없는 윤정한은 뭘 해도 한숨이 나왔다. 심심한 건 못 참고 사람하고 어울리는 것도 좋아하지만 개인의 시간이 없는 게 힘들었다.

다행인 것은 생활 리듬 자체는 고등학교 때와 비슷하다는 점이었다. 다른 건 딱 하나였다. 이제 하루를 온전히 야구에만 쏟아야 하는 것. 죽어라고 연습하고 자주 시합했다. 인생이 온통 야구로만 채워졌고, 관계는 야구 선수로만 채워졌다.

모두가 같은 팀이자 동시에 각각 라이벌이 되는 애매한 관계에 슬슬 파벌이 생기고 친한 그룹이 생기기 시작하는데 그 와중에 1군 주장이 와서 후배들에게 인사를 하자 완전히 편이 갈렸다.

“와, 윤정한이랬지. 너 정말 잘생겼다.”

“아! 그 말하시려고 그러죠, ‘야구선수치고’?”

“아냐. 우리 팀 만날 구수하단 소리만 들었는데! 진짜 얼굴마담이 될 친구들 너도 있고 승철이도 있고 이 주장은 기쁘다. 얼른 1군 와라, 알겠지?”

주장이 웃음 섞인 말로 칭찬하고 가자 뒤에서 쑥덕대는 소리가 드러내놓고 커졌다.

잘생기면 뭐하냐, 기생 오라비라느니, 꼴찌로 들어왔는데 버티긴 하겠냐는 둥 윤정한 앞에서도 그렇게 떠들어대는게 약올랐다… 이 작자들, 최승철한테는 한 마디도 못했다. 난 만만해 보이는 거지.

“봤냐? 최승철 걔는 오늘도 싸가지 없이 팍~ 연습장비 내던지고 가던데. 선배 무서운 거고 뭐고 없지.”

“아이고 뭐 1라운드로 들어오셨는데 우리 같은 놈들이랑 대화 하겠어? 왜 감히 말을 걸어, 찐따는 찐따끼리 놀자니까.”

“그니까. 그 새끼 야구 안 했어도 빠따 좀 휘둘렀을 얼굴이잖아. 얼굴에 성격 다 드러나. 소문도 자자했다고, 같은 고등학교에서.”

저거 저거 인소 보고 우는 친구한테 무슨.

그리고 우리 팀엔 최승철네 고등학교 동기도 선배도 없는데 무슨 소문을 들어.

윤정한은 빨래 바구니를 들고 세탁실로 가다가 로비에서 선배들이 모여서 하는 개소리를 듣고 코웃음을 쳤다.

말 섞기도 싫어서 일부러 바구니를 질질 끌고 소리를 내며 가니 선배들도 눈치를 챘는지 입을 딱 다물었다. 고개만 끄덕 해서 아는 척 하고 계속 세탁실 쪽으로 향하자, 방금 전의 그 헛소리가 빤히 다 들리는 반대쪽 복도에 최승철이 서 있었다. 빨래 바구니를 끼고. 자기를 욕하는 소리가 들려서 복도에서 로비 쪽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었던 모양이었다.

무표정해서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그 얼굴이었지만, 윤정한은 거기에서 기가 팍 죽어 시무룩한 느낌을 읽었다.

최승철은 무의식중에 입술을 뇸 하고 모았다가 눈이 마주치고 어색하게 눈인사를 보내고 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분위기 어색하니까 굳이 아는 척 할 필요는 없다는 듯이.

그래서 일부러 윤정한은 목소리를 높여 인사했다.

“최승철. 너도 빨래 하러 나왔어?”

로비에 있던 선배들이 흘끔흘끔 곁눈질했지만 윤정한은 빵긋 웃는 표정을 유지했다.

최승철의 망설임은 짧았다. 크게 숨을 내뱉으며 표정을 다잡은 최승철은 로비에 한 걸음 내디디며 딱딱하게 미소지었다.

““어? 어… 지금 하려구. 정한아. 맞지? 윤정한.”

윤정한은 하하, 하고 일부러 웃음을 터트렸다.

“맞아. 기억하네?”

“같은 동긴데 해야지.”

최승철은 대화하며 의식적으로 로비 쪽을 돌아보지 않고 곧장 세탁실로 향했다. 아무 일도 없었고, 아무 말도 못 들었다는 듯이.

세탁실에서는 코인 빨래방처럼 드럼 세탁기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고 반 이상이 돌아가고 있었다. 빈 빨래 바구니가 돌아가는 드럼 세탁기 앞에 놓여 있었지만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최승철이 입구에서 1회용 세탁 세제와 섬유유연제를 잡아서 윤정한에게 건네주었다가 머쓱하게 손을 뺐다.

“너 따로 쓰는 거 있어?”

“…아냐, 나도 그냥 여기 놓인 거 써.”

윤정한은 뒤늦게 최승철에게서 세탁세제와 섬유유연제를 건네받았다. 잠깐 닿았던 손끝이 뜨뜻했다.

“와, 세탁실만 들어와도 땀냄새 나는 것 같다.”

윤정한은 아무렇게나 말을 시작했다가 아차 해서 고개를 돌렸다. 울고 있는 최승철에게 아무렇게나 말을 걸었던 게 습관이 되어서.

최승철이 그 말에 조금 웃었다.

“라커룸보단 훨씬 낫지 않냐.”

“그치만 거긴 원래 그런 데려니 하잖아.”

최승철이 윤정한의 세탁기를 잠깐 들여다보았다.

“건조기까지 해? 아님 어디서 말려?”

“그냥 방에서.”

“룸메랑 그러기로 했어?”

“그래야지 뭐 어떡해. 너는?”

“난 그냥 건조기까지 돌려서 가져가는데. 빨래 널기도 귀찮고.”

“구겨질 거 같은데…….”

얼떨떨하게 대화를 나누던 윤정한은 갑자기 불쑥 물었다.

“너 집에서 먼 거 힘들지 않아? 갑자기 숙소 생활하게 된 거나.”

요새 안 울더라.

오히려 가족이랑 떨어져서 울 것 같은 건 윤정한이었다. 하루종일 빡세게 기초 훈련하고 운동 하고 진이 다 빠져 머리만 대면 잠들 것 같아도, 사람의 몸은 금세 그 하드한 스케줄에도 익숙해져버려 각종 생각이 밤을 잡아먹었다.

같은 방을 쓰는 낯선 룸메이트는 때때로 밤늦게까지 유투브를 보느리 방이 번쩍거렸다. 이불은 몸에 맞지 않아서 꺼끌꺼끌했다. 내 물건인데 누군가 만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너무 신경 쓰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나는 익숙한 냄새도 나지 않았다.

죽어라고 하긴 했지만 사실 이렇게까지 열심히 야구를 할 계획은 없었다. 그냥, 어쩌다보니 귀신이나 피하려고 한 건데.

그래서 윤정한에게도 이십 평생 안 나오던 눈물이 다 나려고 하는데 최승철 찡찡이는 의외로 한 번도 울지 않았다.

세탁기 버튼을 눌러 작동시키던 최승철이 푸시식 웃었다.

“원래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기숙사에서 살아가지고 별로 다를 것도 없는데. 너는 기숙사 처음이지?”

윤정한은 눈이 땡그래져서 손가락으로 자기를 가리켰다.

“티 나?”

“어엄청 나지.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말하며 최승철이 눈까지 사르르 접고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윤정한은 놀란 얼굴 그대로 오, 하고 길게 소리를 냈다.

최승철이 웃는 모습이 시야에 가득해지는 동시에 누군가 머리를 망치로 내리치는 기분이었다. 기분 좋은 현기증과 귀가 꽉 막혔다가 터질 것 같은 느낌, 그리고 자신은 엄청나게 빠르게 휭휭 도는데 주변은 그대로인 야릇한 시간감각.

어디서 많이 느껴본 감각 아닌가?

얘 울 때도 소환되어가지고 시간이 느릿하게 흘렀는데 웃을 때도……?

왜? 무슨 조건이라도 만족했나? 얘 웃을 때마다 나 또 시도때도 없이 소환돼?

당황한 윤정한은 손을 내밀었다.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그동안 소환되었을 때처럼 자신이 생령이 되었는지, 그래서 말을 해도 못 듣는지, 아무 것도 만질 수 없는지 알기 위해서.

최승철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손을 내밀어 맞잡았다.

윤정한이 패닉에 빠져 물에 빠진 사람처럼 할퀴듯이 더듬더듬 붙잡는데도 최승철은 순하게 맞잡기만 했다.

“뭐, 왜 갑자기 악수?”

그 말 아래에 ‘서울 새끼들은 진짜 낯간지럽게 구네’ 같은 쑥스러움이 묻어있었다.

야구 오래 한 사람들 특유의 못박히고 딱딱한 손바닥. 터진 손끝이 정직하게 닿는다.

윤정한은 손가락이 ‘그 애’를 뚫고 나가지 않고 대답해오는 것에 정신을 차렸다.

윤정한은 현실에 발 붙이고 서 있었다.

‘아니네. 웃는 걸로는 소환 아니구나.’

동시에 비현실적인 체온에 당황스러워졌다. 만질 수 있고, 바로 앞에서 숨쉬는 존재인 최승철. 최승철은 정말로 자기 머릿속에서 나타난 상상친구가 아니었다. 진짜 살아있는 누군가였다.

윤정한은 머쓱한 심정을 가리려고 일부러 손에 힘을 주고 크게 손을 붕붕 흔들었다.

“진짜. 나 처음이니까 좀 도와줘. 최승철.”

“당연하지, 뭘 간지럽게 악수까지……. 그리구 그냥 승철이라고 불러.”

.

.

.

냉막하고 싸가지 없이 블리자드를 뿌리고 다니던 최승철은 그 날을 기점으로 비글로 바뀌었다.

코치들한테 애교부리고 선배들한테는 적당히 살랑거리면서 치켜세우고 동기들한텐 치대고 윤정한에게는 엄청 치댔다.

“아니, 그렇게 말 한 마디 없더니.”

“제가 좀 낯을 가리는 편이라구요.”

그리고 틈만 나면 (누구의) 등짝에든 뛰어들어서 코치들한테 한소리 듣곤 했다. 니 그러다가 누구 다치게 하면 어쩔라고 그렇게 펄쩍대냐. 그마저도 최승철이 몸을 꼬깃꼬깃 접어서 귀엽게 눈을 살짝 치뜨고 올려다보면서 죄송해용 잘못했어용 하고 찰싹 붙어오면, 화는 더 이상 내진 못했다. 대신 컨디셔닝 코치가 XX위키의 어이없는 부상으로 시즌아웃(혹은 선수생활 종료) 된 선수 부분을 큰 소리로 읽게 시켰다.

몇 번이나 그런 일화를 최승철의 기죽은 코맹맹이 소리로 들으며 2군 선수단은 단체로 노이로제에 걸려서 세면대 무서워… 내 손목… 발목… 등등을 중얼거리며 다녔다.

결국 스프링 캠프를 마칠 즈음엔 최승철은 펄쩍 달려들어 안기는 비글 원숭이에서 그냥 늘어져라 기대는 파트 타임 코알라로 전직했다.

“너는 이렇게 까불고 다닐 거 어떻게 참았냐.”

“사투리 놀릴 줄 알고 말을 아꼈지.”

“별 소릴 다 해.”

최승철이 눈을 흘겼다.

“야, 니도 처음 봤을 때부터 ‘어? 사투리 쓰는 촌놈이다’ 이런 얼굴 했짜나.”

“그런 적 없는데에~”

윤정한은 부정했지만, 어쨌든 그 비슷한 얼굴이긴 했으려니 하고 찔리는 구석은 있었다. 몇 년간 이상한 능력으로 꿈 속의 등장인물로 받아들였던 사람이 눈앞에 생생히 뼈와 살을 가지고 나타났을 때의 당혹이 분명히 얼굴에 쓰여져 있을 것이므로.

그래서 윤정한은 자신의 상상이 아님을 증명하는 최승철의 (깨는) 여러 면모에 늘 긍정적이었다.

울보가 블리자드? 오케이.

울보에 블리자드가 사실은 비글? 그것도 오케이.

울보에 블리자드에 비글이 파타코? 에구, 그것도 오케이.

“어이, 거기 붙어앉은 커플. 지방방송 꺼라.”

“옙!! 죄송합니다!”

최승철이 똑바로 몸을 세우고 우렁차게 대꾸하고는 다시 윤정한에게 기댔다. 덩치는 큰 게 저보다 뼈대가 얇은 윤정한에게 머리를 폭삭 기대고 녹아내리는데, 벌써 다들 비글 파타코에게 익숙해져서 그러려니 했다.

윤정한도, 그러려니 했다.

머리를 살포시 기댄 어깨는 무겁고 뜨뜻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 번도 안 자르고 있다는 복슬복슬하고 결이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정한의 목을 간지럽혔다.

“스프링 캠프 마지막인 만큼…… 겨울 내내 연습한 걸 보여야…… 2군이라고 다 뛸 수 있는 것은 아니……”

정신이 산란해 감독의 말이 드문드문 들렸다. 처음엔 톡 쏘는 땀과 먼지 냄새만이 진했는데 가만가만 있으니 차츰 그 속에서 시원하고 달착지근한 냄새가 났다. 그런 냄새를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그냥 살냄새?

다른 사람의 살냄새를 이토록 가까이에서 맡은 적이 없어서 머리로만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윤정한은 무심코 더 잘 맡기 위해 시선은 감독에게 고정한 채로 고개를 돌리고 최승철의 정수리 가까이 코를 가져다 댔다.

살짝 머리카락을 누르고 킁킁대자 최승철이 부러 부르르 떠는 시늉을 했다. 떨어지라는 신호로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땀냄새 나서 이러는 거지? 다 땀냄새 나는데 진짜 뭐라 하기는….”

최승철이 입술을 삐쭉거리며 떨어져나가자 정한은 아무 것도 없는 어깨가 가볍고, 서늘하다 못해 오싹하게 추워졌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최승철 엄청 뜨뜻한 놈이네.’

찡찡이 타임에서는 전혀 알 수 없는 정보였다.

그 사이 감독의 말이 끝나고 코치의 한두 마디 덕담, 그리고 모두 다 같이 박수를 치면서 스프링 캠프가 끝이 났다.

프로가 되고 첫 번째 리그 시작이었다.

3

계절은 정신없이 지나갔다. 2군에서 죽어라고 뛰면서 때때로 단 한 줄의 거미줄처럼 드리워지는 1군 호출은 상반된 감정을 동시에 들게 만들었다. 나름대로 빠진 몫을 잘할 때도 있고, 활약이라고 할 만한 플레이를 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대개는 긴장해서 달려나갔다가 대박 깨져서 돌아오기 일쑤였다.

“프로는 그냥 잘 하는 게 아니라 보여줘야 해. 열심히 하고 있다고 하면 성적이 알아서 좋아져? 실력, 니네도 1군 못잖다. 그런데 왜 나가면 깨지고 돌아오겠냐. 무조건 ‘잘’해야 하는 거야.”

최승철은 코치가 쓴소리를 해도 고분고분 잘 듣고 꿋꿋하게 할 말 다 하고 껄렁하게 마무리까지 잘 해놓고 감사합니다, 하고 들어가선 샤워실에서 물을 최대로 틀어놓고 울었다.

‘쟤는 기존쎄인지 아닌지 모르겠어.’

물론 그냥 보면 기존쎄가 맞다.

정한이 보기엔 동기 중에서 승철만큼 기존쎄가 없었다. 머리 잘 돌아가, 눈치 빨라, 승부가 걸리면 눈이 홱 돌아가고, 장난 치는 거 좋아하고, 사람들 이끌기도 잘 해, 머리를 깨려 드는 감독이나 코치한테도 빠닥빠닥 “잘하겠습니다!” 하는 소리를 바로 주워섬기고.

그런데 그 안에는 연약한 자아가 있다. 되도 않는 순애에 푹 빠져 살고 살짝 만지기만 해도 지문이 남을 듯한 취약한 면을 어쩌면, 자신만이 알고 있다는 것.

시간이 지나면 최승철의 울음은 잦아들 것을 알아서, 정한은 그냥 긴가민가 하게 느껴질 정도의 빈도로 바나나 우유나 사다 안겼다.

“넌 꼭……”

“왜? 너 바나나 우유 좋아하잖아.”

“좋아는 하는데….”

“원플러스원이니까 너 하나 줄 것도 생기는 거지. 감사해, 편의점 원플러스원 만들어준 회사에게.”

그러면서 의심가지 않게 자신도 바나나 우유를 쪽쪽 빨고 있으면, 승철은 뭐 적당히 납득하고 살짝 우쭐한 얼굴을 했다.

뭐만 있으면 윤정한한테 쪼르르 달려가는 자신처럼, 윤정한도 자신을 좋아한다고.

‘나쁘진 않지.’

최승철은 윤정한을 좋아했다.

그건 누가 보더라도 확실했다.

힘들 때 챙겨주는 사람에게 맘이 가는 건 당연하고, 윤정한은 최승철이 울 때를 늘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2017년이 된다.

22살의 윤정한과 최승철은 1군 엔트리 끄트머리에 든 채로 시즌을 맞이했다. 주전은 아니었지만 쓸만한 스페어.

팀에는 중견이 없어서 신인을 불러다 쓴다는 쓴소리도 많았고, 실제로 이 팀 1군이 고참과 신인으로만 구성되어 중견이 없긴 한 게 맞았다. 하지만 어쨌거나 신인이 잘하면 팬들은 슈퍼 루키로 만족했다.

동시에 숙소 의무 기간이 끝나서 윤정한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숙소를 나와서 가족이 있는 집으로 들어갔고, 최승철은 좀 두고 본다며 숙소를 계속 남아있기로 했다.

마흔이 다 되어가는 1군 최고참 포수는 그 꼴이 너무너무 속상한 모양이었다. 원래 이 포수는 후배들에게 사랑의 큐피트가 되어주지 못해 안달이었는데, 1군 엔트리에 들고도 편할 것 같다고 2군 숙소에 남은 최승철한테는 진짜 집요하게 굴었다.

“마, 스포츠 선수가 왜 결혼을 일찍 하는데? 사람이 안정적이게 말뚝을 콱 박아야지 버틸 수가 있지, 지 혼자 버틸라카면 못 버티고 퍼져버리는 거야.”

그러므로 부인의 후배들, 친구의 후배들, 뭐 가릴 것 없이 단체 소개팅을 주선해놓고 응원해주는 것이 그의 후배 사랑이었다.

최승철은 물론이고 역시 가족과 함께 살고 있어서 외로울(선배 생각은 그랬다) 윤정한도 소개팅 단골 멤버로 끌려나갔다.

“야, 말도 마라. 다들 정한이만 봐가지고. 얼굴이 잘생겼음 말이라도 못해야지 말도 잘해! 근데 그렇게 애프터 요청을 받아놓고 넌! 너는 한 번도 애프터를 안 하냐!”

정한은 딱히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아서 그냥 하하 웃기만 했다. 스물 두 살의 혈기왕성한 남자니까 연애에 대해 뭔가 생각이 들 법도 했는데.

그렇지만 별로 외롭지도 않고 힘들 때 기댈 친구도 있고.

최승철은 소개팅 내내 마치 처음 봤던 스무살 때처럼 굴었다. 즉 예의는 바르지만 잘 웃지도 않았고 억양을 죽인 단정한 말투를 썼다는 뜻이다.

정한은 그 옆에 앉아서 와 신기해 너무 신기하다 하면서 승철만 구경하고 왔다. 끝나고 2차를 지들끼리 빠지고.

“저렇게 굴어도 야, 얼굴이 되니까 우리 승철이 애프터 좀 받았다든대. 왜 연락처도 안 주냐? 비싼 남자야, 승철이.”

“별 생각이 없어서요.”

“너무하네! 연애 해서 새끼쳐. 우리 그것만 기다리고 있다고. 나도 스튜어디스 여친~”

승철이 대놓고 싫은 표정을 했다.

“그냥 직업인데 뭘 그렇게 로망 운운을 해요. 징그럽게.”

“웃기지 마라. 걔네도 우리가 프로 야구 선수니까 봐주는 거지.”

“으, 순수하지 못해.”

“니도 소개팅 나갔으면서 왜 이런 개소리 하는 거야!”

승철은 진저리를 치면서 글러브를 길들인다고 주물럭거렸다.

“선배가 나가달라고 하니까 나갔죠 뭐. 진짜 자유 참가 그런 거였음 안 나갔어요 뭐.”

“으유, 진짜 얄미워가지구.”

선배들이 놀리느라 목에 헤드락을 걸고 잡아당겨도 승철이 뚱하게 삐진 티를 냈다.

“그래. 이해한다. 니가 윤정한이랑 붙어다니니까 눈이 꼭대기에 달렸지!”

“아닌데요.”

물론 이 중에서 제일 최승철을 잘 아는 윤정한은 이렇게 생각했다.

‘저거 저거 18세 소녀라서 소개팅 같은 들여다보이는 만남 같은 건 싫다 이거지. 식빵 물고 뛰어가다가 부딪친 그 애가 내 운명의 상대…? 그런 전개 좋아할 듯.’

하지만 그런 자연스러운 운명의 만남은 야구 선수로서는 절대 해보지 못할 경험인 것 같은데.

데이터 관리팀 말고는 대부분 남자들만 득시글거려, 숙소에도 당연히 남자들만 득시글거린다. 여자를 만날 장소가 없는데 어디서 자연스러운 만남이 되겠냐고.

그러나 급할 것은 없다. 그들은 아직 어렸고 당면 목표는 손에 닿을 듯 가까웠기 때문에 돌아볼 여유가 없다고 여겼다. 부수적으로 떨어지는 외로움과 기대고 싶은 마음은, 서로의 손에 맡기면 되기 때문에.

아무튼 휴일을 맞아 오랜만에 2군 숙소까지 친히 강림해주신 윤정한은 최승철의 숙소 침대에서 떼굴떼굴 구르면서 혀를 찼다.

“너도 참 대단하다, 여길 계속 있겠다고? 나 PTSD 도져.”

“뭐 어땡. 가깝잖아, 코치님도 다 여기 있고 또 데이터분석도 바로 받아볼 수 있고.”

윤정한은 앞에서 노트북으로 자기 타격 폼 체크 영상을 틀어두고 있는 최승철을 기가 막힌 눈으로 바라보았다.

“너 사실 민규가 방 청소 지가 다 하니까 그거 편해서 여기 있겠다구 한 거 아니야?”

“아니거든.”

“맞구만 이거. 후배 부려먹는 재미에 숙소 안 나가고 말야.”

“진짜 아니야아!”

승철이 삐쭉 톤을 올렸다.

“너는 집이 근처니까 그냥 들어간다고 그러지, 나는 집 새로 구해야 되니까 그거 귀찮아서 안하는 거라고!”

“알았어 알았어. 그냥 농담이었지~”

“어우 진짜…”

정한은 승철의 냄새가 배인 나긋한 얇은 이불을 자기 몸에 감고 데굴데굴 구르면서 말을 이었다.

“나도 우리 집에서 내내 새벽같이 다 깨우기 미안하니까 나오긴 해야 되는데.”

“돈 아껴. 연봉 아직 두 배밖에 안 올랐다.”

“너는 그러면서 차 산다며. 잘됐네, 우리 모기업 차는 안 팔아서 맘에 드는 거 타고 다녀도 되구.”

“아직 살 건 아냐. 그냥 팜플렛만 보고 차 있는 선배들한테 뭐가 좋냐고 물어본 거.”

“아유 어디서 허세만 들어가지구 외제차만 봤으면서.”

승철이 그 말에 왕창 삐져서 뚱하게 입을 다물었다.

“영화나 보러 가자. 나 여기 있으면 시간 되면 불 꺼야 될 거 같고 그래.”

“뭔 갑자기 영화래. 보고 싶은 거 뭔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승철은 착착 노트북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야구 점퍼 하나를 들었다 놨다 코트를 들었다 놨다 하면서 ‘뭐 입고 가지?’하고 자꾸 물었다.

“어 다 잘생겼어. 그거 좋다.”

“쫌! 고개를 들어가지고 한 번이라도 보고 말해줄래.”

“봤어, 봤어.”

그리고 정한이 눈을 들자 자길 서럽게 째려보고 있는 승철과 눈이 마주쳐서 빵 터졌다.

“안 봤잖아. 이 사람이 진짜!”

그 때 승철의 룸메이트, 민규가 들어왔다. 피곤과 졸음에 반쯤 눈을 감고서도 야식거리를 들고 온 민규는, 침대에서 구르고 있지만 어쨌든 외출 채비가 된 둘을 보고 밝은 소리를 냈다.

“둘이 어디 나가요?”

“어. 영화 보러.”

“뭐 볼 건데? 나도 보러 갈래.”

정한은 눈을 또르르 굴렸다. 사람 좋아 인간인데다, 요새 제일 예뻐하는 후배인 김민규를 떼어놓고 갈 최승철이 아니었다.

같이 가는 거야 좋았다. 정한도 사람 좋아 인간.

그치만………. 모처럼 내가 여기까지 왔는데. 딴 것도 아니고 오로지 너 때문에 나는 여기까지 왔는데.

그리고, 귀여운 파타코 승철이가 딴 놈한테도 파타코 짓을 해요. 가끔은 무겁고 뜨뜻하다고 떨쳐내면서도 이 파타코가 딴 사람한테 붙어가지고 늘어져 있으면 살짝 서운했다. 처음엔 그렇게 나한테만 붙어다니더니.

파도처럼 그런 생각이 쓸었다가도 곧 빠져나갔다.

그래도 민규는 분위기도 잘 타고, 말도 많고, 분위기도 잘 띄우니까. 눈치가 빠른지 둔한지 둘 다인지 의외로 예민하고 불안정한 승철도 잘 구슬러서 둘이 엄청 붙어다녔다.

아까는 농담처럼 넘어갔지만, 매일 그렇게 노래를 부르던 1군 엔트리에 들고나서도 2군 숙소에 남아있는 건 정말로 민규 때문인 것 같았다.

‘얜 좀 친구 많이 사귀어야 돼.’

그러나 승철은 외출 생각에 동동 들뜬 민규를 칼처럼 차단했다.

“어허. 어딜 선배님들 놀러가는데 꼽사리 끼려고. 야식 적당히 먹고 일찍 자. 너 내일 시합하잖아. 우린 내일 쉬니까 놀러가는 거지롱.”

“너무해! 치사해!”

“치사하면 얼른 1군 와.”

스트레이트 펀치를 맞은 듯 민규가 그 커다란 몸을 꾸기꾸기 접으면서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후에엥! 그게 마음대로 되냐? 최승철 진짜 나빠!”

“뭐래 김민규. 꺼져.”

“나도 이 방 주인인데 왜 꺼져요! 형이 정한이 형이랑 꺼…! 아니 가주세요. 놀러 가세요. 그래요. 2군따리 두고 가시라구요.”

“그렇게 말하면 못갈 줄 아냐?”

그리고 정말로 최승철은 김민규를 놔두고 윤정한의 손목만 잡고 나왔다. 정한은 선수단 숙소 규칙을 생각해도, 혹은 다음날 시합인 걸 생각해도 민규를 데리고 나오면 안된다는 걸 머리론 알아도, 승철이 그렇게 단호하게 끊어낼 줄은 몰라서 어리둥절 한 채로 깔깔 웃었다.

“아 민규 표정 봐!”

“‘산책’ 소리 잘못 들은 강아지 같애!”

마냥 신난 최승철 역시도 장난스럽게 쫄랑거리며 영화관으로 향했다.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두 타임만 남아 있었다.

대충 천만 영화를 노릴 뭐라든지, 혹은 마블 영화라도 있으면 선뜻 고를 텐데 딱 그런 게 없다. 있는 것은 B급 코미디와 공포, 스릴러 같은 것들이었다.

“벌써부터 여름이야 뭐야. 아직 5월인데 뭐 이런 것만 있냐고오…….”

“왜 못 고르고 있어. 그럼 내가 고른다?”

대뜸 예매하고 돌아온 정한이 촥 영화표를 펼쳐보였다.

“내가 이거 샀으니까 콜라랑 팝콘 사와.”

“어 내가 사긴 할 건데….”

최승철의 눈이 떼구르르 굴러서 영화의 제목을 확인했다.

“너 이런 영화 좋아해?”

“볼 만 하겠지 뭐~”

좋아할 리가.

이건 최승철의 찡찡이 타임에서 알게 된 취향 리스트에서 고른 거였다. 첫 번째가 로맨스 최루성 영화고, 두 번째가 가족 드라마.

9시가 넘은 시각, 포스터만 봐도 청량하게 눈물을 뽑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로맨스 영화에는 관객이 많이 들지 않았다.

시간이 가까워지자 서너 명이 더 들어오긴 했지만 거의 전세낸 듯 조용했다.

승철이 팔걸이에 콜라와 팝콘통을 안착시키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와, 영화관 진짜 오랜만에 온다.”

“그동안은 왜 안왔어?”

“너가 나랑 영화를 안 봐줬잖아.”

승철은 별 뜻 없이 한 말일 테지만 윤정한은 순간 머리가 하얗게 비었다.

“…얼씨구. 니가 사랑하는 귀여운 후배는 어따 두고.”

꼼지락거리고 편한 자세로 바꾸면서 승철이 성의없이 대꾸했다.

“친구랑 똑같냐. 후배야 뭐 선배님이 오라 하면 오고 가라 하면 가야지~”

“꼰대네 꼰대야.”

“동생은, 야, 귀엽잖아. 귀여우니까 그러는 거야.”

“난 안 귀여워?”

승철이 들고 있던 팝콘 한두 개를 던졌다. 야구선수답게 정확하게 팝콘이 정한의 가슴팍에 부딪쳤다가 떨어졌다.

“어우 끼부리는 거 봐. 귀여워. 귀엽다. 됐냐?”

영화는 무슨 내용인지 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심지어 처음부터 별 재미 없었다. 부드럽고 서정적인 사랑 이야기 같은 거 알 게 뭔가. 외계인한테 납치라도 당하면 몰라.

중후반쯤 가자 윤정한이라도 감동을 느끼게 되었느냐면 그건 아니고, 최승철이 감동을 심하게 느꼈다.

‘아, 역시나 이거 보고 울 줄 알았어.’

정한은 스스로의 안목을 칭찬하며, 자신이 승철에게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을 슬로우 비디오를 보는 것처럼 본다.

찡찡이 타임에서 자기 자신을 보는 일은 난생 처음이었지만 큰 감흥은 없었다.

‘비디오 보는 것 같네.’

자신의 의식이 떠난 자신은 냉철하고 똑똑해 보였다. 가위 눌리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듯한 기분.

옆에서 승철은 입술을 앙다물고 있다. 시선은 거대한 화면에 고정되어 있는데 느려진 시간 속에서도 승철이 한 장면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게 느껴졌다.

“너도 참, 어떻게 봐도 네 취향이라 골라보긴 했지만 이렇게 울 줄은? 민규한테 뒤져보라고 하든지 해야지, 분명히 키티 일기장 있을 듯.”

커다란 눈동자에서 눈물이 부풀어오르는 순간이 화면의 빛으로 반사되어 선명히 정한의 눈에 비쳤다.

정한은 아무렇게나 중얼거리는 것을 멈추고 고개를 돌린다. 미약한 감정이 가슴을 얇게 저몄다.

영화는 제속도로 봐도 느리게 봐도 여전히 윤정한에게 큰 감흥을 주지 않았다.

그보다 제 속을 뒤흔드는 건 오히려 최승철이었다.

영화는 뭐 그렇게 끝났다. 무슨 내용인지 모르지만 결국 실연하고 사랑을 품고 살아가는 내용인 것 같다.

승철은 이제 눈치 볼 생각도 못하고 펑펑 울고 있었다.

‘감독이 이렇게 진심으로 본 애를 만나면 만족하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정한은 물티슈를 내밀었고 그런 거라도 있으니 다행이어서 승철이 받아서 코를 팽 풀었다.

“너능… 나 안 놀리냐.”

“뭘 놀려.”

코맹맹이 소리로 승철이 훙 하고 훌쩍거리다가 중얼거렸다.

“그래에 이렇게 웃는 거…….”

“아니, 지금 니가 놀리네 마네 하는 게 웃긴 거지. 울면 운 거지 뭘 놀려. 영화 재밌었지, 그치.”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뻔뻔하게 윤정한이 거짓말했다. 승철에게는 다정하고 싶었다.

승철은 영화 생각을 하자 다시 울컥했는지 삐죽 솟은 눈물을 쓱쓱 닦느라 그런 정한을 알아보지 못했다.

“마저… 잘 만드러써….”

“그래. 사람들은 이렇게 말랑말랑한 감성을 찾아야 돼. 안 그래도 사람들이 최고로 감정적이 된다는 정오가 가까워져 가고 있네.”

“먼 소리야, 그건 구남친 시간이자나!”

최승철의 붉은 눈가가 웃음으로 사르르 접혔다.

녹은 아이스크림처럼.

윤정한이 질색하는 로맨스 영화에서, 저항 없이 사랑에 빠져버리는 사람처럼.

.

.

.

어쨌든 최승철은 좀 독특한 캐릭터였다. 징크스를 만들지 않겠다고 매일 같이 데이터 분석실을 들락날락하며 징징거리는 동시에 매일 아침마다 여전히 별점과 띠별 운세를 쫙 훑고 추천한 럭키아이템을 사려고 들었다.

‘이런 것도 소녀스러운 점에 드나?’

왜 데이터 분석실과 운세를 동시에 믿을 수 있냐면, 최승철 말로는, 별자리 운세도 결국 기천 년의 데이터가 쌓여서 만들어진 거라서 데이터에 근거한 거라고.

라커룸에서 유니폼을 꺼내 갈아입던 승철이 한숨을 팍팍 쉬었다.

“하… 나 오늘 원정 유니폼 안 입고 싶다…….”

“왜. 어디 아픈데 있어?”

“나 오늘 행운의 컬러가 하양이거든.”

“승철이 미쳤니?”

다행히 승철도 대가리가 휘까닥 돈 건 아니라서 이런 소리는 아주 낮고 조심스럽게 정한에게만 건네고 있었다.

정한도 그걸 알아서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진짜 감독 귀에 들어가면 괘씸죄 추가 되니까.

“그런 개소리 절대 감독님 귀에 안 들어가게 해라. 아주 니 맘대로 하라고 엔트리 말소 시켜버릴라.”

“허엉… 내 맘이 그게 아닌데.”

그런 소동에도 불구하고 최승철은 그 날 주전 리스트에 들었다.

리스트를 확인한 승철이 바로 펄쩍펄쩍 뛰면서 좋아할 줄 알았는데, 승철은 오히려 침착하게 리스트를 보고 숨을 내쉬고, 곁에 있는 정한을 돌아보았다.

이쪽 눈치를 보고 덤덤하게 구려는 게 보여서 정한은 일부러 승철의 등을 팡 쳤다.

“오늘 상대팀이 홈 입는 날이니까 어쨌든 하양은 있네.”

잠깐 말이 없던 승철이 정한을 꽉 끌어안았다 놓았다.

“왜 이래, 간지럽게.”

“나 오하아사 1위거든. 기운 전해주려고.”

“나한테 그래, 왕창 줘라. 다 줘. 다 줘. 나 홈 유니폼 입고 있을 테니까.”

만일 경기 중에 일어난 일을 미리 알 수 있었다면 윤정한은 절대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지몽의 파편이라도 있었다면, 절대.

최승철이 3루 베이스에 주자로 나가 있을 때였다. 왼쪽 날개로 날아간 안타는 딱 한 번 튕긴 그대로 앞으로 달려나온 3루수의 미트에 잡혔고(여기서부터 팬들은 숨이 가빠지고 눈이 개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3루수는 딱 한 번 더듬어 제대로 잡고 포수에게 쏘았다.

이 물흐르는 듯한 완벽한 수비 때문에 원래대로라면 홈에 들어오기 넉넉할 타이밍이 갑자기 초싸움으로 변했다.

안타를 확인하자마자 달리기 시작한 승철을 주루코치도 멈추지 않았다. 돌아오기엔 오히려 늦었다.

포수는 주루 방해를 하지 않기 위해 홈플레이트에서 반 발자국 앞서 서 있다. 막 3루수의 손에서 공이 떨어진 참이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최승철의 인생을 꽉꽉 채운 야구공의 궤적을 본능처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집중력이 오로지 한 목표로 쏠리며 주변이 뿌옇게 날아가고 오직 홈플레이트만이 뚜렷하게 빛났다.

최승철은 홈플레이트를 향해 길게 슬라이딩했다.

흙먼지가 이는 그 앞으로 하얀 홈플레이트, 그리고 하얀 홈 유니폼 위에 검은 포수 장비로 휘감은 포수가 볼을 잡는 것이 슬로우모션처럼 보였다. 최승철의 발도 거의 닿았다.

‘닿는다, 좀만 더……!’

아웃시키기 위해 미트를 뒤로 휘두르는 포수의 균형이 무너져 뒤로 쓰러졌다.

일 초를 수십으로 쪼개는 집중력은 아직 깨지지 않았고, 최승철은 충돌을 예감하면서도 조금이라도 피하려 하면 아웃이 먼저 되리라는 타이밍까지 깨닫는다.

각종 생각이 머릿속에서 거미줄처럼 뻗쳐나간다. 풀어버린 정강이 보호대, 포수의 몸무게 같은 것들이 의미하는 것은 단순하다. 부상 위험.

지금의 1점의 의미, 해결해야 한다는 압박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내리 패배하는 팀. 이 팀은 이를 악물고 버텨야 하는 순간이었고…

그러나 XX위키에서 소리내 읽었던 부상 목록들, 실제로 한 시즌에 팀마다 인대와 무릎 때문에 아웃되는 선수들은 한트럭이다. 그러나 그걸 각오하고도 잘 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뇌를 찌릿찌릿하게 만든다.

그래서 최승철은 발을 더 뻗을 수밖에 없었다. 피하지 않았다.

팬들의 숨죽인 시선과 비명, 그리고 어웨이 덕아웃에서 소리치는 윤정한의 높고 새된 목소리.

“최승철!”

최승철은 눈을 감았다.

빠직.

.

.

.

최승철은 자기 발로 일어서긴 해도 절뚝거리는 통에 결국 교체 후 부축을 받으며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바로 교체 투입 되느라 따라가보지 못한 정한은 경기가 끝나고나서야 들를 수 있었다.

응급실 구석에 붙은 침대에서 최승철은 휴대폰을 들고 있다가 타격 코치와 정한이 자길 찾고 두리번거리며 들어오자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아, 오셨네요. 아깝다, 방금 전에 재활 코치님 나가셨는데.”

“봤어. 안 그래도 병원 로비에서 만났다. 승철아, 부상은 어떻다든?”

두 사람의 시선은 들어오자마자 압박 붕대로 고정시키고 냉찜질을 하고 있는 발목에 고정 됐다가 다시금 승철의 얼굴로 돌아왔다.

승철은 찬찬하게 자신의 상황을 설명했다.

“MRI 검사 해봤는데요, 크게 인대 손상된 건 아니고 가벼운 염좌라서 내일까지 상황 보기로 했고 심한 건 타박상 정도입니다.”

“와, 포수한테 그대로 깔렸는데 그만하기 다행이다. 올라오기까지 얼마나 걸린대?”

“일주일은 안정하래요.”

“그래.”

타격 코치는 안쓰러운 웃음을 지으면서 승철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어우, 야, 그 덩치한테 깔렸는데 이렇게 된 거면 진짜 이만하길 다행이다. 더 심각할까봐 쫄았어. 2군 갔다오긴 할 건데, 요즘 니 성적이면 다시 올라올 거야. 걱정말고 절대 안정하고 재활 코치님하고 의사 선생님 말씀을 하늘 같이 새겨들어. 한 번 다쳤는데 제대로 안 하면 이거 고질병 된다.”

“아유, 제 몸 제가 잘 챙기죠.”

“이제 니도 스물 넘어서 몸이 젊었을 때 같지 않을 것이야…”

“아 쫌 코치님! 저 이제 스물 둘밖에 안 됐다고요.”

“그래그래. 봐라, 니 아직 한참 어리지? 오래 가려면 부상 관리 잘해야 된다.”

“네.”

최승철은 고분고분 잘 대답했다.

“이제 나가자 그럼. 내가 수납하고 올게.”

“제가 얘 부축해서 나갈게요. 어차피 데려다주려고 왔으니까.”

“그럴래? 나 수납하고 기다릴 테니까 그쪽으로 와. 계단 올라가지 말라 할 테니까 목발 챙겨오고. 이따 또 얘기하겠지만 버스 올라가고 이런 거 하지 말아야 되고 택시 타라. 응?”

“알겠습니다.”

코치가 나가자 정한은 말없이 굳은 얼굴로 침대 옆 보호자 의자 하나를 빼서 앉았다.

침묵이 잠시 내려앉았다. 뭐만 하면 뭐라고 쫑알쫑알 다 떠들어대는 타입이기 때문에 이런 침묵은 낯선 것이었다.

승철이 눈을 데구르르 굴렸다.

“다는 못 보고 하이라이트만 봤는데 나 나가고 교체되고 잘 하더라, 너.”

정한은 하하, 웃었다.

빡 수치가 100을 찍어서 나는 웃음이었다.

“마지막에 피할 수 있었는데 왜 안 피했어, 너.”

“아니 슬라이딩 중에 어떻게 그래……”

“할 수 있잖아! 너 할 수 있었던 거 다 알아!”

훈련을 처음부터 지금까지 내내 함께 해왔기 때문에 정한은 알았다. 최승철이 피하려고 하면 그 슬라이딩 중에도 할 수 있었다.

윤정한이 확신을 가지고 노려보자, 승철은 결국 두 손 들었다.

“아니 그게에, 발 빼면 백프로 아웃될 거 같더라고.”

대체 투입 되어서 타석에 윤정한이 섰을 때, 포수가 사인을 보내며 그에게만 들리게 말을 걸었다. 많이 안 다쳤대? 괜찮대?

정한은 이를 꽉 깨물어야 했다. 자신도 완전히 믿지 않는 말을 누군가를 안심시키려 하기 위해서. 괜찮을 거예요. 아까 제 발로 걷긴 걸었어요.

“너 때문에 내가 진짜……”

그런데도 이놈의 새끼가 아웃 같은 소리나 해!?

대뜸 베개를 집어들고 어깨죽지와 팔을 퍽퍽 내리치자 승철이 깜짝 놀라서 움츠렸다.

“하지 마, 하지 마아~”

“야 이 멍청아, 1점이 중요해? 까짓 거 1점이야 다음 회에 니가 홈런이라도 치면 되는 거 아냐! 만약 1점이 부족해서 지더라도 다음 경기가 있고! 한 번 지면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아직 경기가 한참 남아있는데 왜 부상을 자처해!”

정한은 납작한 병원 베개를 패려고 쳐든 채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쓰러진 채로 바로 못 일어났을 때부터 술렁거리며 흔들거리던 감정이 압박 붕대를 감은 발목을 보자 결국 넘어져 엎질러지고 말았다.

그토록 흔들리고 울렁거리다 쏟아지는 감정이 낯설어 정한은 어떻게 참아야 하는지조차 몰랐다.

“네가 운 다 나한테 줘서… 그래서 다친 건가 나는 진짜…….”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서 정한 손에 든 병원 베개로 얼굴을 가렸다.

승철은 말없이 정한을 끌어당겨 자신의 허벅지 위에 기대게 했다. 찬찬히 승철의 딱딱한 손이 정한의 뒤통수에 닿았다. 그 손은 측량할 수 없는 다정함으로 푹신한 머리에 닿아 간지럽게 쓸어내린다.

부끄럽다는 생각조차도, 손가락이 사락사락 뒤통수를 스치는 간지러운 감각에 물결을 그리며 깊이 가라앉았다.

윤정한은 문득, 단 한 번도, 최승철이 울 때 이렇게 해주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항상 울고 있을 때를 알고 있는데도.

선수단 숙소에 반강제로 처박혀 있던 승철은 발목이 낫자마자 신나서 정한의 집 근처로 놀러왔다. 처박혀 있는 동안 민규가 많이 도와줬다고 걔한텐 치킨 시켜줬단다.

“너는 민규한테 더 잘해줘야 돼.”

“이만하면 잘해주지 뭘. 너는 진짜 내 편 들어줘야지. 걔가 나한테 얼마나 잔소리를 하는데.”

정한은 그냥 웃었다.

재활 코치와 거의 이 주일을 붙어서 살다보니 승철도 뭔가 들은 말이 있는지 슬슬 숙소에선 나가야겠다고 투덜거렸다.

“나 보면 1군 꿈이 깨진다고 나가래.”

“그건 그래. 하, 나도 진짜 독립은 해야겠는데.”

“야, 너는 집도 가까우면서… 돈 아끼라니깐.”

“내가 큰 집이 필요한 게 아니잖아. 같이 살면 좋다고 말이 그렇지, 다들 자고 있는데 그렇고, 엄마아빠 깨있음 더 미안해. 나보다 다음날 아침 일찍 나가셔야 되는데.”

“그런가?”

거기까진 생각하지 않았는지 승철이 갸우뚱거렸다.

“나는 내가 대구에 있는 팀 갔으면 그냥 ‘엄마~ 아빠~ 승쳐리 힘들어쪄~’ 이러고 집에서 눌러 살 거 같은데.”

라고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기숙사 생활을 한 최승철이 말했다.

정한은 진짜 그렇게 되면 다르다고 대꾸하면서 동시에 혀 안에서 할 말을 굴려보았다.

‘그러니까 반반 해서 같이 근처에 전세 찾아볼까?’

너도 어차피 나갈 거니까.

그러면 좀 더 싸니까?

그리고 경기장이 가까워지니까.

또.

또 다른 이유가 있을까?

이제는 단체 생활 같은 건 질색인데도 굳이 같은 팀원에게 이런 말을 해도 되는 당위성이 또 어디 없을까?

머릿속에 있을 때는 타당해 보였던 생각이 막상 입밖으로 내려니 어? 이거 이상한데? 싶어서 정한은 손을 뻗어 고깃집 앞의 가로수 옆에 천막을 친 타로 카드 가게를 가리켰다.

“우리 타로 보러 갈까?”

“타로? 맨날 나한테는 이상한 거 본다고 뭐라고 해놓구웅. 거 봐 근데 맞았지.”

“맞긴 개뿔이 맞아, 바보야.”

“내가 그 때 행운의 컬러만….”

“맞기 전에 입조심 해라. 그리고 타로하고 그런 운세하고 어떻게 똑같애. 전혀 다르지.”

“비슷하지 않냐?”

“허허.”

승철은 정한이 운세는 안 믿고 타로는 믿는다는 게 이상한지 한 번 더 확인하려 물었다.

“너 그럼 저런 거… 점이랑, 타로랑 진짜 믿어?”

“믿지. 나 잘 아는 사람도 있어.”

예지몽은 윤정한에게 눈치와 관찰력을, 귀신은 조심성과 이석민을 남겼다.

괴담, 폐가 탐험 유투브 이딴 데에도 절대 엮이지 않고 적극적으로 피해서 ‘내가 진짜 그런 사람을 아는데…’에도 등장하지 않는 ‘찐’ 이석민. 정한도 진짜로 귀신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아니었다면 만나지 못했을 사람이었다.

“와…. 진짜? 넌 진짜 발 넓다. 난 야구 빼면 아는 사람도 없는데.”

“내가 성격이 좋아서 그래. 너하고 친구해줄 정도면 알아봐야지?”

“와~ 뻔뻔해~ 너 같은 악바리가 또 어딨다구 성격이 좋냐 마냐 하냐?”

“어허, 인정해라.”

둘은 작은 천막에 들어가 행사장용 빨간 플라스틱 의자에 꼬기꼬기 몸을 구기고 앉았다. 두 사람의 팔이 틈없이 착 비벼질 정도로 붙어 앉았는데도 천막이 꽉 찼다. 선풍기가 빙글빙글 돌아서 후덥지근하던 뺨에 갑자기 시원한 바람을 훅 날리곤 다시 끈적해졌다.

최승철의 하얀 맨살은 땀으로 미끈거리고 열이 올라서 뜨끈했다. 승철은 땀이 많다고 미안하다고 자꾸 닿지 않게 꼼지락거렸지만, 정한은 정말로 조금도 신경쓰이지 않았다.

타로를 보러 오자고 해놓고도 정한은 굳이 자세한 얘기를 털어놓고 싶어하지 않고, 승철도 그러려니 해서 에둘러 이번 해의 직업적 성취에 대해 물었다.

“와아, 올해는 상당히 좋으세요. 특히 날씨가 추워질 때가 타이밍적으로 좋은 적기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프로젝트 자체에는 큰 문제는 없는데, 인간관계에서 조금 주의하셔야 할 것 같아요…”

열심히 듣는 승철을 흘끔거리며 정한이 물었다.

“건강도 한 번 봐주세요.”

“건강 문제 중요하게 생각하시는구나. 건강에 대해서 두 분 다 차례차례 보실게요.”

승철은 올해 하반기는 무난하리라는 평이 나왔다. 정한에게는 약간의 위험이 있다고 했지만 워낙 운이 좋아서 잘 피해갈 거라고.

에두른 질문에는 에두른 대답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그만으로도 승철은 꽤나 안심이 된 듯 안색이 밝아졌다.

‘단순하긴.’

굳이 타로를 가보자고 한 건 이런 이유가 있었다. 최승철은 이런 것도 잘 믿고, 타로 봐주는 사람도 어지간해서는 좋은 얘기만 해줄 테니까.

만약 나쁜 결과가 나온다 해도 어떻게든 둥글게 만들어서 보여줄 거라고, 정한은 확신하고 있었다.

정한은 타로 카드나 오하아사는 그다지 믿고 있지 않지만 - 자신의 눈으로 본 귀신이랑은 다르니까 - 믿는 건 또 어쨌든 힘이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런 걸로 최승철이 자존심 챙길 수 있다면 좋은 거지.

건강에 대해 대답한 사장님은 시원스럽게 다시 카드를 섞으며 물었다.

“그럼 연애도 봐드릴까요? 두 분 다 다른 것도 많이 보셨으니까 이건 그냥 해드릴게요.”

승철이 움찔했지만 정한은 밝게 대꾸했다.

“저희야 좋죠~”

“아니이…”

“그냥 봐. 궁금하잖아. 너 모태솔로고.”

“너두잖아. 나만 그러냐?”

“그러니까 보는 거지.”

“아하하, 이게 뭐 이상형을 언제 만날 수 있고 진짜 연애를 할 수 있을 지 없을 지는 나오지 않고요.”

그런데도 연애 운은 생각 이상으로 꽝이었다. 사장님은 최대한 둥글게 돌려말했지만 건강 운이며 직업 성취와는 다른 단어가 자주 등장했다. 요약하면 본인 의지도 없고 그럴 애정운이 따라오지도 않고….

‘나는 물론 연애 생각이 없긴 한데 얘는 왜?’

최승철은, 어쨌든, 사랑 중독자 아닌가 말이다.

‘이 녀석 바로 얼마 전에도 일본 영화 보고 울었는데.’

일본 영화 특유의 푸르고 아름답고… 이입 못하면 잘 아다리가 맞아 떨어지지 않는 부분이 빤히 보이는데도 대충 어떻게 사랑으로 비비는.

그래, 사랑.

최승철의 네버다이 취향 아니냐고, 사랑.

“너는 연애 생각 없어? 진짜 자연스러운 만남 말고는 머 생각이 없는 거야?”

사랑과 연애는 다르고, 보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은 다르고. 안하는 것과 못하는 것은 다르고. 그러나 윤정한은 섬세하면서도 그런 결을 헤아리는 일에는 둔하다.

“갑자기 너도 상훈 선배 됐냐, 왜 자꾸 연애 타령이야.”

“……나 그거 조금 상처 받았어. 너를 최승철이라고 부르고 싶은 심정이야.”

“뭐야아! 니가 먼저 잘못했잖아, 그럼 똑같이 행동하지 말든가.”

“그냥 물어본 건데? 친군데 물어볼 수도 있지이. 승철이는 사랑하는 사람이 아직 안 나타났어? 운명의 상대?”

승철의 귓가가 순식간에 빨개져선 버벅댔다.

“니는 좀…… 왜 그렇게 낯간지런 말을 쓰냐.”

“어디가 낯간지러운지 모르겠어. 너가 좋아하는 말 아냐?”

“내가 왜 그런 걸 좋아해애.”

어, 너 완전 좋아해.

하지만 윤정한은 눈치가 있으므로 말하지 않았다.

멋쩍게 앞서서 걷던 승철이 뒤쳐진 정한을 향해 다시 돌아서며 말했다.

“연애 뭐어… 못할 것 같긴 한데.”

“이렇게 승철이가 예쁜데 왜 연애를 못 한다구 생각해~”

일부러 엉덩이를 툭툭 쳤다. 그러나 진저리쳐야 할 승철은 그냥 뚱하게 피하기만 했다.

“왜 그래, 승철아.”

“뭐고.”

“내가 뭐 이상한 거 물어본 거야?”

승철은 고개만 저었다.

사소하게 흥칫펫 하는 일이야 많지만, 그럴수록 떠들지 이렇게 조용한 건 드물다. 울컥 불안해진 정한이 머릿속에서 자신이 했던 말을 쭉 돌려보며 승철의 손목을 잡고 흔들었다.

“응? 뭐가 별로였는데? 말을 해줘야 내가 다음부턴 또 안 그러지.”

“아무 것도 아닌데.”

“뭘 아무 것도 아냐, 네가 이러는데 어떻게 아무 것도 아니야.”

승철이 머쓱하게 뒷머리를 만졌다.

“나 너무 걸어서 다리 아파가지고.”

“으이구.”

말을 돌리는 게 뻔했지만 굳이 캐물을 수가 없었다. 이제 막 부상에서 나았는데 무리시키면 안 되기도 하고.

그래서 정한은 얼른 벤치에 승철이를 앉혀놓고 작은 카페에서 아이스 음료를 사와서 하나씩 손에 들고 쪽쪽 빨았다.

이제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하는 거리는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듯 휘황하게 조명이 켜지고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어색하게 대화가 끊길 것 같았던 순간에 승철이 여상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정한이 너는 왜 연애 안 하는데?”

“갑자기 나? 나는, 음. 귀찮아서.”

“뭐래.”

정한은 어떻게 생각해도 배부른 투정쯤으로 들릴 것 같아서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의 선배 때문에 죽어라고 미팅을 나가면서도 결국 연애하지 않는 건 그거였다. 일은 잘 되고 있고, 팀 내에서 좋아하는 친구, 팀 밖에서 좋아하는 친구 따로 있어서 외롭지도 않다.

설레임보다 그 옆에 있는 익숙함에 기대게 되고, 누군가 웃는 것보다 승철이 우는 게 더 신경쓰이고.

정한은 만족스러웠지만 이런 생활이 똑같이 승철에게도 만족스러울지 믿지 않아서, 결국 한 마디를 덧붙였다.

“나는 연애 안하지만, 넌 하면 좋겠다. 너를 알아주는 사람이랑. 진짜, 널 안 울릴 사람이랑.”

“핳ㅎ!”

“근데 너 연애하면 엄청 울 거 같애.”

이런 때조차 승철이 찾아올 사람이 자신밖에 없으니까, 외롭지 않을까.

이상한 기분이었다. 최승철이 자신을 1순위로 놓는다는 게. 오직 자신뿐인 걸 알아서. 그리고, 다음 순위와의 격차를 알아서.

기분 좋은 동시에 어딘가에선 치트키를 썼다는 불편함이 가시처럼 걸렸다.

능력은 단지 타고나는 것이다. 윤정한이 잘생긴 얼굴을 물려받은 것처럼, 훌륭한 운동신경을 타고난 것처럼. 그저 손에 주어진 것.

예지몽도, 귀신을 봤던 것도, 그러므로 승철이 울 때마다 거기에 소환되어서 얘가 뭐 때문에 우는지 살필 수 있게 된 것도 치트키가 아니며 속임수도 아니다. 읽을 수 있는 카드 패가 하나 더 들어온 것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야구를 시작한 게 귀신 때문이듯이, 최승철에게 정들고 친애하게 된 것 역시 단지 찡찡이 타임 때문일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정말로 자신이 최승철을 좋아하는 게 맞는지 생각하면.

분명히 방금 전까진 같이 살아도 될 만큼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정한은 괜히 아까 승철과 맞닿았던 팔을 주물렀다. 자신의 체온으로는 그렇게 뜨뜻하지 않았다.

승철은 내가 뭘 울어, 진짜 너는, 어쩌구 저쩌구 쫑알거리긴 했지만 정신이 반쯤 없는 것 같았다. 정한도 마찬가지였다.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주변엔 계속 사람들이 오가고, 나무 결을 그린 플라스틱 벤치에 앉아서 오래도록 둘은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고 떠들었다.

4

- 최연소 ‘주장 선임’ 최승철 “기회를 주신 만큼 최선을 다하겠다”

- 세대 교체의 신호탄! 최연소 주장 납시오!

- 주장 완장 찬 최승철, “목표는 우승!”

뉴스는 온통 그 소식이었다. 물론 다른 다른 팀의 일정이나 주장 얘기도 빠지지 않았지만, 그런 기사들에조차도 최승철의 이름은 언급되었다.

그만큼 삼십도 되지 않는 스물다섯 살짜리에게 맡겨진 주장 완장은 파격적인 것이었다. 고작 몇 년 전만 해도 1군에 들 수 있을 지 아닐 지 전전긍긍하던 어린 선수였으니까. 갑자기 폭발하듯 터진 성적이 있다 해도 그들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그 어린 선수만이 남아있는 것이다.

- ‘저 혼자만 열심히 해서는 부족하겠지만, 선배들이 귀엽게 봐 주시고 젊은 패기 넘치게 해보라는 뜻으로 알겠습니다.’

정장을 입고 플래시가 터지는 기자회견장의 인터뷰가 수십번은 더 반복되어 나왔다.

최승철이 씅을 내며 대기실 티비를 껐다.

“아 쫌! 보지 말라고!”

“왜~? 우리 주장이 이렇게 티비 나오는데 응원해줘야지~”

“그냥 하다못해 나 없을 때 봐주면 안 되냐?”

“싫어~ 나도 티비에 나오는 사람이랑 아는 사이라고 자랑해야지.”

아까부터 은은하게 빨갛던 승철의 귓불부터 얼굴 전체에 빨간물이 들어 발그레해졌다. 정한은 히히 웃었다.

승철은 시뻘개진 채로 손부채질을 하다가 한숨을 쉬었다.

“어쩌다 이렇게 됐냐.”

“뭘 어쩌다 이렇게 돼. 투표에서 최다 표가 됐으니 주장이 된 거지.”

어지간 하면 나이 많은 선수가 되었을 테지만, 최고참 선수가 작년의 성적 등등의 이유로 자리를 내놓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물론 윤정한도 최승철에게 투표했다.

그냥 친분 때문은 아니었다. 승철이 2군에서도 주장을 해봤고, 그래서 그런 걸 잘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감독과 코치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직설적으로 말을 하면서도 애교도 잘 부려서 금방 풀어지게 하고.

“난 신인상도 못 탔는데 갑자기 뭔 이런 감투가.”

“그래그래. 나였지, 신인상. 역시 운이 좋아가지고.”

부끄러워서 몸을 배배 꼬고 있던 최승철이 갑자기 정색했다.

“아니지. 너 운정한 운정한 그러는데 절대 아냐. 너는 진짜.”

“왜? 나 운 좋은 거 맞지. 그렇게 잘한 건 아닌데. 그냥 부상 안 당하고 어영부영 버텼는데 주변 상황이 그래서……”

승철이 눈썹을 찌푸리고 손목을 덥석 잡아왔다.

“뭔소리를 그렇게 하냐. 너 진짜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니지? 너 맨날 야구는 하다 보니까 이렇게 됐다, 어영부영 버텼다, 이러는데 진짜 그렇게 하는 애들이 여기 1군까지 와서 성적 낼 수 있을 것 같애? 절대 아냐. 너 받을 만해서 받은 거야. 작년 타율만 해도 삼할이 넘는데 그게 무슨 그냥 어영부영이야.”

그러면서 다른 팀과 같은 팀의 선수들 타율을 줄줄줄 외우면서 비교를 했다. 정한은 거기까진 외우고 있진 않아서 그냥 중얼거렸다.

“하지만 나보다 네 활약 컸는데 너는 신인상 못 받았잖아.”

“크긴? 부상 때문에 결국 규정 타석 못 채웠으니까 안 됐지.”

“에휴 우리 승철이가 얼마나 잘했는데.”

“넌 신인상 탔다 이거지, 얄밉게 진짜!”

“아악!”

승철이 정한의 손목을 위아래로 붕붕 휘둘러댔다.

팔랑팔랑 휘두르는 대로 휘둘리며 윤정한이 깔깔 웃었다.

“너 주장 잘할 거 같아서 사실 나도 한 표 던졌거든? 애들한테도 다 너 뽑아달라고 로비 좀 했다?”

“머?! 이 사태가 니 때문이구만?!”

승철의 눈이 진짜로 충격으로 땡그래졌다.

잠시 넋나가 있떤 승철이 대뜸 목을 잡고 짤짤짤 흔들기 시작했다.

“죽을래?!”

로비(?) 덕분에 팀원들한테 니네 진짜 부부냐? 부부사기단 출동하냐? 지금 외조하냐? 내조하냐? 각종 다양한 버전으로 소리 들었지만 정한은 그냥 신나기만 했다.

내가 왜 이런 걸로 사기를 쳐. 그냥 깨끗한 한 표를 행사해달라 이거야.

“켁! 야 너도 감투 써서 좋자나아!”

“좋겠냐?!”

“내가 아무리 선동했어도 니 실력 없었음 됐겠어?”

정한은 케헤헤 웃으면 자신의 목을 감싼 승철의 손위에 고개를 얹었다.

“짜식, 잘할 거야.”

“아 어떻게 잘하냐고~”

“내가 있잖아. 네가 만약 괴로울 때면 내가, 내가아 위로해줄게에~”

“장난쳐??”

승철이 뾰로통하게 손을 놓고 물러섰다.

“그래. 네가 주장 된 기념으로 신인상 받은 이 몸이 MVP 하게 너 홈런 좀 빵빵 쳐.”

“뭔 소리. 내가 홈런을 치는데 왜 니가 MVP냐?”

“왜냐니? 내가 만루 홈런 만들어주려구 먼저 나갔으니까 기여도 따져보면 그렇게 되는 거야~ 알겠냐 승처라~”

“몰라. 나 집에 갈 거임.”

“너는 잘 할 거면서 꼭 그렇게 엉덩이를 빼냐.”

“꺼져.”

정한은 꺼지지 않았고, 대신 데이터 관리실의 홍지수 선임이 들어왔다. 와이셔츠를 걷어붙이고 들어온 지수의 옆구리에는 파일이 몇 개 들려 있었다.

반쯤 죽은 눈으로 들어왔던 지수가 둘을 보고 직장인의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스프링 캠프 잘 끝내고 오셨어요?”

승철이 반색해서 쪼르륵 지수에게로 갔다.

“지수 씨! 네에, 잘 다녀왔어요. 이거 봐요, 나 엄청 탔어.”

그러더니 소매를 훌렁훌렁 걷어서 자랑인지 찡찡거림인지 보여주느라 난리다.

“애리조나였죠. 오. 진짜 많이 탔네요.”

“좀만 더 했다가는 아주 상의까지 훌렁훌렁 벗어서 보여주겠다, 이 녀석아.”

승철이 오 진짜, 하더니 벗으려는 시늉을 해서 정한이 그 손등을 찰싹 쳐서 말렸다.

“그만해, 지수 씨 당황하시겠다.”

물론 기존쎄2 홍지수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대꾸했다.

“어? 괜찮아요. 야구 선수들 몸이야 좋으니까 보면 눈에 좋죠.”

“들었지, 지수 씨 당황하시잖아 승철아.”

“나 귀 안 막혔거든.”

정한은 화제를 돌렸다.

“지수 씨 LA에서 왔으니까 우리 스프링 캠프 한 데 잘 알고 있겠다. 근처잖아요.”

“햇빛은 비슷해요.”

지수는 모른다는 소리를 돌려 말하며 시범 경기 팀 전적표를 대기실 벽에 붙였다.

“그래도 우리보단 많이 알잖아요옹. 나 미국 가는 거 두 번째밖에 안 됐는데. 여권 완전 새 거야.”

“그렇지. 지수 씨는 메이저에서 좋아하는 팀 있었어요? LA 다저스?”

“헐! 그러네? LA 다저스네? 메이저 경기장 어때요? 마이너 경기장도 가봤어요?”

동갑내기 선수들의 과한 관심에 지수의 피곤에 찌든 미소가 찐해졌다.

“진짜 궁금하면 커피 한 잔 사세요.”

“진짜! 커피 마시면서 물어봐도 돼요? 우리 작년엔 대만에서 했었는데 올해 투손에서 했잖아요, 그래서 메이저 리그 팀 관리 방법도 보긴 했는데 아직 많이 못 봐서.”

어느새 지수에게 바짝 붙은 승철이 신나서 꼬리를 붕방거렸다. 스프링 캠프 내내 눈에 불을 켜고 있더니 그런 건 또 봐가지고.

정한이 무의식중에 그 둘 사이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오, 주장이라고 역시 그런 것도 보이는가 봐?”

“역시 주장 되시는 분은 다르구나. 그럼요. 주장님께는 당연히 말씀드려야죠. 우리 팀 잘 되라고 하는 얘긴데.”

“아우 쫌! 왜 이래 진짜!”

“주장님 대우.”

“주장님에게의 예우?”

자길 사이에 두고 둘이 짝짝꿍이 잘 맞자 승철이 삐죽거렸다.

“와 어떻게 둘이 그렇게….”

“그럼 주장이 커피 좀 쏴 볼까? 지수 씨, 어떤 거 드실래요?”

“와우. 진짜요? 잘 먹을게요. 감사합니다.”

“뭐예여! 저 아직 쏜다는 말 안했는데요!”

“어허! 그렇게 쫀쫀하게 굴면 어떡해. 지수 씨가 메이저 리그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신다는데.”

지수가 맞장구쳤다.

“주장님을 위해서 있는 일 없는 일 다 말하려고 했는데… 커피 못 사주시나요?”

“아니 이렇게 갑자기이!”

“하하하, 다 이렇게 되는 거지. 주장이 쏘는 거니까 주문은 친절히 제가 받도록 할게요. 지수 씨, 뭐 드실래요?”

“저는 모카 좋아해요.”

“네, 그럼 가져올게요.”

그리고 정한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나가려고 하자 승철이 소매 끝을 덥석 잡으며 물었다.

“나느은…? 내 건 왜 안 물어봐?”

정한이 일부러 어깨를 으쓱했다.

“너야 맨날 아아잖아. 거기다 시럽 두 번 넣고.”

묻지 않아서 섭섭한 마음과, 마시는 음료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어 기쁜 마음이 섞여서 승철은 한순간 굉장히 이상한 표정을 했다. 물만이 가득 채워진 수영장 밑바닥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그 안의 마음이 일렁일렁거리며 투명하고 환하게 보였다.

정한은 헤헿하며 간지러운 웃음소리를 냈다.

“내 손바닥 안이지 승철이는~ 아니라고? 아니면 같이 가. 네가 살 거니까 네가 받아오자.”

그 말에 승철이 감동 와장창이라고 얼굴을 꾸기는 것까지, 정한은 즐겁게 생각했다.

.

.

.

스물 다섯에게 주장을 맡길 만큼 중견 선수들이 부족하고, 성적이 좋지 않다는 뜻이기도 했다.

선배들은 웃으면서 축하는 했지만 그렇다고 순순하지도 않았다. 거기에 2군에서 선수들이 대거 불려왔다가 성적이 나쁘면 다시 내려가기를 반복하며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1군 올라갔다 2군 가면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어용.”

긍정왕 김민규조차 이렇게 말할 정도면 말 다했다. 2군도 몸살이고 1군도 몸살이고, 비틀거리며 진창으로 서로를 끌어당겨 넘어지고 있는 형국이었다.

정한은 스포츠 기사를 읽지 않으려 노력해야 했다. 선수단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만한 놈들이 그저 클릭수 좀 내겠다고 저열하게 실패니 뭐니 젊은 주장에게 온갖 화살을 돌리고 있었으니까.

바로 어제도 감독과 긴 시간 면담 들어가서 깨진 것을, 윤정한은 알고 있는데.

감독이 꾹꾹 감정을 눌러담으며 말하는 것이 복도에까지 들렸으니까.

- 주장 노릇 힘든 거 안다. 다들 주장 하면 자기 성적 떨어져. 각오했지. 너한테는 더 부담 되리라는 것도 안다. 그렇지만, 그 부담 이겨내야지. 어느 정도 성적이 되어야지 팀원들이 주장 말을 듣지 않겠어? 니가 나이도 어린데 성적도 안 되면 네 말에 무슨 권위가 있겠냐? 딴 데 정신 팔지 말고.

승철의 성적은 몇 달간 곤두박질치는 중이었다. 부담으로 어깨가 굳은 게 뻔히 보였고, 그걸 받쳐줄 팀원도 없었다.

정한이 그나마 스테디하게 성적을 유지하고는 있었지만 아웃 사이에서 유일한 안타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자신의 기록은 괜찮게 남더라도 팀이 지는 게 정한은 속이 타고 미칠 것 같았다. 맨날 지던 고등학교 시절 재림이다.

그 때도 그랬고, 정한이 생각하기에 자신에게는 다 같이 으쌰으쌰하게 만드는 소위 말하는 버프가 없었다. 성적이 곤두박질인데도 팀 분위기가 그나마 개판이 아닌 것은 윤정한의 공로였지만, 윤정한은 그런 분위기까지 만들 수 있을 뿐 성적으로까지 이어나갈 수 있는 무언가는 없었다.

그 버프는 오히려 최승철이 가지고 있었다. 끈질기게 기회를 살리고 이어나가게 만드는 어떤 것. 팀에 공격성을 불어넣어주고 앞으로 나아가게 강제든 뭐든 모아서 끌고 나가는 힘이.

정한은 좀 잔소리가 많아졌다.

-니가 좀 해야지.

-팀 생각 해야지.

-지각 하면 뭐라 좀 하고, 연습도 빡세게 나오라고 하고. 이겨야 되잖아. 네가 해줘야지. 주장인 니가 아니면 누가 해.

그 애도 역시 주장이라는 역할에 잡혀 침체되어 있어 그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최승철은 깎이고 깎여나갔다. 몸이 재산인 프로 스포츠 선수가 눈 아래가 퀭해지고 툭하면 손톱을 물어뜯어 굳은살이 박힌 살마저 뜯겨나가 테이핑을 한다. 깨물어댄 입술은 피투성이다.

누구나 최승철이 고꾸라질 것을 염려하면서도 자칫 잘못 건드리면 이도 저도 되지 않을까봐 두려워했다.

이런 상황인데도 몇 달이 지나갈 동안, 최승철은 울지 않았다.

“그러면 알고보니까 이미 능력이 바뀌었다 그런 거 아닐까? 원래는 만나지 못했을 사람을 형의 그 능력으로 만났었던 거잖아. 근데 이제 만났으니까. 다른 능력으로 찰칵, 하고 바뀐 거지.”

“능력이 바뀐 거라고?”

정한은 숟가락을 든 채로 멈췄다.

이석민과의 식사자리였다.

초조하고 짜증나고, 산적한 문제들 때문에 윤정한은 숨 쉴 구멍이 필요했다. 천금 같은 휴일에 고민도 안 하고 이석민을 만난 건 그 때문이었다.

석민의 말은 타당했다. 능력은 예고 없이 주어지고 허무하게 사라진다는 걸 누구보다 윤정한이 잘 알았다. 그러니 최승철이 울 때 소환되어 가는 그 짧은 순간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럼 뭐 찡찡이가 나 몰래 울기라도 하고 있다는 거야?”

“울 수도 있지. 원래 누구 앞에선 잘 못 울잖아.”

“그럴 리 없는데. 내내 붙어다녀서 모를 리 없어. 진짜 안 우는 거야.”

석민이 선량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치만 같이 사는 거 아니잖아? 어떻게 24시간을 붙어다녀?”

그 정론을 역시나 타파할 말이 머릿속에서 돌지 않아서 정한은 숟가락으로 리조또를 조금 헤집었다.

깔끔한 저가 이탈리안 레스토랑에는 멜론 탑백이 은은하게 깔려 있었다. 윤정한은 그 중 하나라도 알아들을 수 있는 노래가 없어서 기분이 나빠진 것이라고, 힘주어 생각했다. 결코 최승철 때문이 아니라고.

“그러게, 모르겠다. 애초에 이게 무슨 규칙인지도 모르니깐~ 그냥 아예 ‘능력’이 사라져버린 걸 수도 있고.”

석민이 축 처져서 중얼거렸다.

“없어질 수도 있으니 좋겠다, 형…. 난 왜 계속 보이지.”

“아직도 계속 그렇게 잘 보이는 거야?”

“그러니깐. 미치겠어! 형은 전에도 그냥 안개처럼 보인다고 그랬고, 그 다음엔 잘생긴 남자 보는 거잖아.”

“뭐가 잘생긴 남자야.”

“타입 좀 달라도 형만큼 잘생겼던데. 나도 차라리 그런 걸 봤으면 고민 없었지.”

정한은 잠깐 옛 생각을 했다. 귀신을 보는 것과, 최승철을 보는 것. 후자 압승. 당연히 압승.

“그래그래. 너는 좀, 눈이 너무 좋지. 마인드 컨트롤 같은 거 안 되나? 무서운 모습 모두~ 너희는 이제 모두 호박이다~!”

석민이 마침내 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됐으면 내가 맨날 겁쟁이 소리 안 들었을 텐데, 그치.”

“근데 넌 원래 겁쟁이잖아~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아무 것도 만지지도 못하면서.”

“그야 뭘 만질 줄 알구 아무렇게나 만져? 절대 못해. 무서워.”

한참 깔깔대며 대화를 이어나가던 순간, 갑자기 특유의 약한 현기증이 윤정한을 덮쳤다.

“어?”

최승철의 원룸인 모양이었다. 정한은 침대 매트리스 가운데 서 있었고 등을 보인 승철은 책상 앞에 혼자 앉아 있었다. 의자에 다리를 세우고 앉아 쿠션을 끌어안은 채로.

블라인드를 모두 내린 어두컴컴한 원룸에는 모니터에서만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순간적인 안도로 뒷머리까지 삐쭉 섰다 내려앉았다.

능력은 없어지지 않았다.

최승철은 그동안 정말로 울지 않았던 것이다.

부지불식간에 정한은 웃었다가 입가를 매만졌다.

‘내가 왜 이걸 확인하고 좋아하지? 얜 또 울고 있는데.’

“그래, 그래. 영화 같은 취미 생활이 있다는 건 좋은 거야. 내가 석민이 만나러 나오는 것처럼 너한테도 뭐라도 재밌는 게 좀 있어야지.”

한두 발자국, 정한은 매트리스의 스프링을 헤치고 가까이 다가간다. 그리고 뭔지 좀 보자는 마음으로 화면을 확인하다 멈칫했다. 간지럽고 말도 안되게 풋내나는 신파극이 아니었다. 바로 어제자 경기였다.

세 타석 나간 최승철은 무안타로 중간에 교체되었고, 최승철은 쿠션에 비스듬이 얼굴을 묻고 그걸 보고 있었다. 눈꼬리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높은 콧대를 넘어서 쿠션 위로 둥글게 툭, 떨어졌다. 앞에는 어지럽게 흩어진 타율 타석 데이터와 스포츠 신문.

갈비뼈 안쪽이 불안정하게 울렸다.

최승철은 조용히 자책하고 있었다.

윤정한은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오래도록 몇 년 간 찡찡이 타임에서 정한은 이러한 조용한 침묵을 참지 못하고 무엇이든 말했다. 들리진 않아도 위로의 말도 건네고, 신파극 좋아하는 취향을 가지고 놀리고, 노래도 불러주고.

그런데 지금 잔뜩 주눅이 들어 불어터진 만두처럼 울고 있는 최승철 앞에서 아무 말 할 수가 없었다.

‘네 탓이 아냐.’

‘내가 잘 알아.’

‘넌 열심히 하고 있어.’

‘잘했어.’

“잘 될 거야.’

‘네가 잘 해낼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 모든 말들은 혀 끝에서 단단히 굳어서 부스러지듯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정한은 몇 번이나 입을 열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시 입술을 꾹 다물었다.

울지 마.

제발, 아무도 없는 데서 울지 마.

나는 몰라야 하니까 위로해줄 수 없잖아.

“멍청아. 혼자만 끌어안고.”

한참만에, 간신히 그 말을 내뱉고 나서, 윤정한은 다시 현기증을 느끼며 현실로 돌아왔다. 느렸던 메트로놈이 다시 리듬을 빨리 하듯이.

그리고 그 순간 윤정한의 눈에서도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

.

.

“뭐라셔.”

“성적 떨어졌으니까… 잘하라는 소리지. 팀이 계속 지니까.”

“뭐래 이 자식아. 너만 잘한다고 야구 이기냐?”

농담처럼 말을 붙였지만 승철은 억지로 웃음을 한 번 짓고는 다시 정색하듯이 무표정해졌다.

어떻게든 마음을 다잡으려고 노력하느라 그러는 건 알지만, 정한은 속이 자글거리며 타는 기분이었다.

‘나한테까지 그렇게 센 척 해봐야 뭐가 되는데.’

2군에서 1군으로 대거 콜업 했기 때문에, 2군 훈련 중이던 선수들이 헐레벌떡 차를 타고 들어왔다.

지금부터 1군 연습을 시작해야 하는데 선수들 반은 이미 2군 훈련을 거의 마친 터라 지쳐있고, 나머지 반에서 반 정도는 또 연패에 길이 들어서 영 패기가 없었다.

그 날도 역시 졌다.

정한이 돌아다니면서 의욕을 넣긴 했지만 공허한 메아리처럼 울렸다. 속에서는 불길이 치솟는데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서 더 화가 났다.

‘후… 아니다. 평상심. 평상심.’

안그래도 승리만이 모든 걸 말하는 프로에서 몇 년간 굴러먹은 데다 스스로도 승부욕으로 어지간한 인간이어서 정한은 평상심을 찾기가 힘들었다.

최승철 역시 발버둥치고 있었다. 2군에서 올라온 친구들은 붙잡아다가 한 번이라도 더 말을 걸고 데이터 분석 팀의 자료를 안겨주려 애쓰고, 지각하면 선배한테도 다그쳤다. 연습에 제일 먼저 참여해서 제일 늦게 나가고 자율 연습을 하자고 쫓아다녔다.

“그러니까 연패 탈출하려면……”

“내가 못해서 졌다는 소리야 지금?”

“그런 게 아니고, 팀 분위기 위해섭니다. 지금 2군에 있다가 와서 분위기 모르는 후배들 많잖아요. 무게 있는 선배님들이 참석해주셔야 분위기가 잡히니까요. 부탁드립니다.”

주장이 할 일이라고 정한은 생각했다.

그렇지만 동시에, 속이 쓰렸다.

“프로잖아. 몸을 돌봐야지, 승철아.”

“뭐가.”

최승철이 날카롭게 대꾸하며 손가락에 테이핑했다. 동시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놓았다. 찢어진 상처가 가득한 아랫입술에 또 짧게 피가 비쳤다.

“너 시즌 끝날 때까지 이렇게 몸 굴릴 거야? 못 버틸 거 아냐. 열심히 하는 건 아는데…”

최승철은 단조롭고 사나운 톤을 쓰며 말을 끊었다.

“열심히 하지 않으면 어떻게 해.”

“너 이렇게까지 안하고도 잘 할 수 있잖아.”

정한의 말에 승철이 메마른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은 눈까지 번지지도 않고 곧 사라졌다.

“이렇게까지 안 하면 못해.”

승철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지나쳐 나갔다.

정한은 덩달아 벌떡 일어났지만 따라갈 수가 없었다. 찡찡이 타임도 아닌데, 손을 뻗으면 분명히 닿을 텐데.

‘아, 지금 쟤 도망친 거야?’

나한테서?

정한은 빠져나간 승철의 빈자리를 노려보았다.

내가 좀 뭐라 했다고 저렇게 티 내는 거지. 나 지금 니 말대로 하니까 잔소리 그만하라고.

“으이구 나뿐 자식.”

여름이 될수록 최승철의 타율이 차츰 올라간다. 실수는 줄고, 수백 수천 번을 연습해온 예리한 수비가 늘어난다.

그리고 거기에 맞춰 올라가듯이 팀의 승리도 많아졌다. 질 때 지더라도 쉽게 지지 않는다.

‘내 말 맞지. 얘는 팀 버프가 있다니까.’

그러나 여전히 최승철의 부담은 더해지고 있었다. 정한이 보기엔 위험 수위로 달리고 있었다.

“주장, 너무 빡세게 굴리는 거 아니야? 관절 못 갈아끼운다. 2군 선수할 때도 이렇게 안 굴렀잖아.”

정한은 가볍게 승철의 팔꿈치를 잡고 그렇게 이야기했다. 이러면 승철이 자신을 뿌리치고 투정을 부리길 바랐다. 투정을 부리면 다 받아줄 자신이 있었다.

왜 나한테만 그러냐고. 힘들다고. 하다 못해 이게 다 너 때문이라고 짜증을 부리면, 니가 뭔데 나한테 지랄이냐고 화를 내면.

정한은 미안하다고 할 거였다.

너한테만 모든 걸 미뤄두고 있는 것 같다고, 미안하다고. 이러려고 널 주장으로 밀어준 것도 아니라고. 같이 하자고. 내가 옆에 있다고.

그러나 승철은 미소를 지었다.

우스워서 그렇게 미소짓는 것이 아니라, 절벽 위에서 한 발만 간신히 걸쳐진 사람처럼 절박한 사람이 어쩔 도리가 없어 짓는 미소였다.

“왜 이래, 저번부터.”

“걱정되니까 그렇지. 주장 노릇 잘하고 있잖아? 우리가 주장 하나 잘 뽑아서 팀 분위기 잡혀가고 있는데 너는, 이게 뭐야.”

“…….”

“경기 끝나고 일요일에 저녁이나 같이 먹으러 갈까? 경기 뛰었으니까 단백질 보충 해야지.”

“……그래.”

“어디 가고 싶은 데 있어?”

승철의 옆얼굴에 망설임이 비쳤다.

“아무데나 뭐.”

“그래, 그럼 전에 먹었던 데로 가.”

이래놓고 새벽에, 최승철은 조용히 울더니 카톡으로 미안해, 못 나가겠어. 이 두 단어로 약속을 파토냈다.

처음엔 그러려니 했다. 최승철은 한 번 울고 나면 한동안 그 감정을 잘 가누지 못하는 편이니까.

당장 달려가서 바나나 우유를 던질 수 있는 시절은 이미 끝났으므로, 윤정한은 궁시렁거리면서 다시 카톡을 보냈다.

-그럼 다음에 언제 볼까? 언제가 편해?

그런데 약속을 잡을 때마다 그렇게 파토났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자기한테만 그러고 사회 생활은 아주 멀쩡히 잘 하고 있다는 게 윤정한을 개열받게 했다. 이 새끼는 필요하다면 회식도 열 줄 아는 놈이었고 연패 탈출하고 3연승 한 날은 진짜 회식 하자고 감독님까지 끌고 왔다.

그래놓고 자기랑 한 약속은 맨날 이유도 없이 미안하다고 못하겠대.

“왜 요새는 승철 씨랑 안 다녀요?”

“왜일 것 같아요?”

데이터 팀 지수와 같이 마셔도 결국 이 소리가 나온다. 정한은 자신도 살짝 지치고 화난 걸 인정하고 말했다.

“내 책임 제로에요. 그 새끼가 맨날 울고 짜고 파토내는 거거든요? 에휴, 속상해 죽겠어요 아주 그냥.”

그리고 와인을 벌컥 마셨다. 속이 타서 술이 벌컥벌컥 들어간다.

살짝 기울여 입술을 적시던 지수가 다시 와인을 가득 따라주었다.

정한이 한숨을 푹 쉬었다.

“미안해요, 너무 빨리 마셨죠. 승철이랑 맨날 소주만 까고… 딴 거 먹자고 해봐야 담금주를 먹네 고량주를 먹네 이러다가 와인 먹으니까 이러네.”

“아녜요. 정한 씨 앞에서 울었으니까 어색해서 피할 수도 있겠다.”

정한은 피식 웃었다.

생각해보니 새삼스럽게 웃겨서. 내 앞에서 울었냐고?

열입곱 살 때부터 언제나 그랬다. 하품 같은 걸로는 아니어도 걔의 서럽고 슬픈 찡찡이 타임에 언제나 윤정한이 옆에 있었다.

근데 걔는 왜 요새 내 카톡만 보면 우냐? 카톡 보면 우는 병 걸림?

와인을 또 콸콸콸 목구멍에 쏟아붓자 술기운이 빠르게 올라왔다. 지수가 천천히 마시는 게… 아니 맘대로 하세요, 하고 중얼거렸다.

정한은 알딸딸한 김에 휴대폰을 켜고 최승철에게 전화를 했다. 물론 최승철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벨소리는 중간에 끊기지도 않았다. 보나마나 심각하게 이마를 찌푸리고 노려보고만 있겠지.

세 번쯤 ‘고객님이 전화를…’ 멘트까지 듣고 나서 정한은 지수가 꼴꼴 채워준 와인잔을 또 원샷으로 시원하게 비우고 카톡했다.

-너한텐 이제 바나나 우유 국물도 없어 짜식아

그건 안 읽음으로 오래도록 남았지만 최승철이 또 혼자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으므로 윤정한은 그가 자신의 카톡을 읽었음을 알았다.

열어놓은 창문에서 바람이 부는지 블라인드가 흩날리는 모양으로 굳어져서 클레이 애니매이션처럼 천천히 움직였다.

“너 진짜 내 카톡 보면 울어? 내가 뭔 소리를 했다고 너한테. 내가 좀 뭐라 했다고 저렇게 티 내는 거지. 나도 너 미워죽겠어, 진짜. 나하고는 밥도 안 먹어주구. ……어우, 나 최승철처럼 말하고 있잖아? 우엑.”

경기가 끝나고 가방을 들고 저벅저벅 앞서 가는 승철에게 바짝 다가 붙으며 정한이 속삭였다.

“얘기 좀 해.”

“지금 하고 있잖아.”

돌아오는 어조에 날이 서 있어서 정한도 저도 모르게 날을 세웠다.

“이게 지금 얘기하는 거야?”

퇴근캠을 눈짓하며 승철이 의식적으로 미소와 손인사를 하고 지나갔다.

정한은 슬쩍 눈인사만 했다.

지나가고 나서야 승철이 이맛살을 살짝 찌푸렸다.

“제대로 인사해.”

“못 쓰겠으면 알아서 잘라주겠지.”

“팬들은 눈치 채.”

“이런 비하인드 캠에서 잘하는 것보다 야구를 잘하길 더 바랄 걸.”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날카롭게 말이 뱉어졌다.

승철은 아무 대답 하지 않고 계속 앞으로 걸어나갔고, 정한은 자신의 뱉은 말이 칼처럼 휘둘러지는 것을 알았다. 분명히 저 두부 멘탈 어딘가를 난도질 했을 것이다.

말로 상처입혔다는 사실로 가슴이 뜨끔해졌지만, 그렇지만 최승철도 다르지 않았다. 말하지 않음으로서 정한을 상처입히고 있었다.

혼자 울고 있고 말야. 부담스러우면 부담스럽다고, 힘들면 힘들다고, 자존심 챙기지 말고 나한테라도 말해줄 수 있잖아. 우리가 몇 년이나 봤는데. 내가 너 우는 걸 몇 년이나 봤는데.

정한은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요새 왜 자꾸 피해. 전화도 안 받고.”

“…자고 있어서.”

“그렇게 일찍 자? 약속은 매번 미안하다 끝이고?”

“힘들어서 그래. 미안해.”

“회식은 괜찮고?”

한숨.

“그것도 일이니까.”

“그게 일이냐? 아니, 일을 왜 사서 만들어.”

승철이 눈두덩이를 문질렀다.

“분위기 타야지. 모처럼 3연승 했는데 이어 나가야 될 거 아냐. 감독님도 허락하신 거야. 코치님들한테도 회식 다음에 컨디션 괜찮을지 여쭤봤고.”

“그걸 말하는 게 아니라 왜 자꾸 날 피하는 건데. 내가 잔소리 해서 그래? 최승철. 진짜 얘기 좀 하자고.”

“…나 힘든데 그냥 좀 내버려 두면 안 되냐.”

“어떻게 그래!”

솜사탕처럼 부드럽고 다정하게까지 들리는 목소리로 최승철이 대답했다.

“할 수 있잖아.”

그리고 그 순간 세피아 색으로 세상이 굳어진다.

정한은 자신의 손에서 빠져나가려는 최승철을 제 3자의 시선으로 본다.

‘아니 여기서……?’

손을 갈퀴처럼 구부리고 아무리 잡으려 해봐도 승철은 잡히지 않았다. 아무리 크게 소리쳐도 아무런 말도 전해지지 않는다.

윤정한은 드디어 초조함을 느꼈다. 불안함을 느꼈다. 불완전함, 이 찡찡이 타임이 도움이나 치트키가 아니라 오히려… 오히려 나쁜 것일 수 있다는 생각. 몇 년 만에야 드디어.

최승철과 같이 있는데도, 눈앞에서 울고 있는데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것을 자각하고서.

아직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는 눈가에서 눈물이 한 방울 부풀어올라 만들어지고 뺨으로 떨어지는 느릿한 속도가 윤정한의 뱃속을 불길처럼 할퀴고 지나간다.

손을 내밀어 봐도 늘 그렇듯이 아무 것도 만져지지 않는다. 눈물 방울은 손가락을 통과해 지나간다.

승철의 뺨에는 반짝거리는 눈물 자국이 나지만 정한의 손가락은 여전히 깨끗했다.

그동안 내내 ‘진짜’ 윤정한은 범상한 표정으로 있었다.

이석민이 보고 있을 때도 그랬다고 했다. 별 말도 없이 피곤한 표정으로 잠깐 눈을 감고 있는 것 같았다고, 이상하게 느껴질 만큼 긴 시간은 아니었다고. 다만 조용했다고.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는 ‘진짜’ 윤정한과, 어떤 말과 어떤 행동을 해도 닿지 않는 윤정한과.

그러니 윤정한은 아무 곳에도 없었다.

‘네가 울 때 난 항상 옆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아니었던 거지.’

너는 그냥 혼자 울고, 나는 그 옆에 없었던 거야.

최승철은 아무렇지도 않게 떠난다. 윤정한은 눈물이 나는 그 순간 뭘 어떻게 해도 표정도 울음 소리도 모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참을 수 없었는데, 울보는 태연했다. 그저 부르튼 입술을 한 번 더 깨물기만 할 뿐.

모래시계의 바늘이 마침내 다 떨어지고 윤정한은 하, 하고 짧고 밭은 숨을 내쉬며 휘청이며 돌아왔다.

자신은 손을 늘어뜨린 채 서 있고 최승철은 등돌려 복도를 걷고 있었다.

정한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최승철을 향해 달려들었다. 손목을 잡아채자 아까와는 다르게 거세게 뿌리쳐지고, 승철이 필사적으로 정한을 외면했다.

“나 봐, 승철아. 나 봐.”

몇 번이나 간절하게 부르고 잡아당기고 억지로 얼굴을 붙들어 끌어오고 나서, 윤정한은 찡찡이 타임 뒤의 최승철을 본다. 눈가가 흠뻑 젖어서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리고 있는 모습. 그새 붓기 시작하는 눈.

정한은 최승철의 귀를 거의 움켜쥐다시피 고개를 고정시킨 채로 입술을 붙였다. 급한 행동에 이가 부딪쳐서 찡하게 울렸지만 곧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와 숨이 섞이자 그 아픔은 잊혀졌다. 아직 눈물을 닦지 못한 승철은 흐물흐물 부드러웠다.

서툰 키스에 숨이 찬 승철이 고개를 돌려 떼내면서 멀어지고 나서야 둘의 눈이 마주쳤다.

윤정한은 속이 다 타고 있었고 최승철은 무너지고 있었다. 그 이상 생각할 수 없이 둘은 빈 사무실로 무턱대고 들어가 문을 잠그고 서로의 옷을 벗겼다.

매끄러운 배를 맞대면서, 손을 깍지끼고 넘기면서, 윤정한은 집요하게 눈을 감지 않았다. 틈없이 만지고 눈으로 확인했다. 달아오른 허벅지를 들어올리면서도 얼굴을 맞대고 계속해서 눈가를 핥았다.

너의 옆에 있다는 걸 확인받고 싶은 것으로 정한은 절박했다. 네 옆에 내가 있고, 내 옆에 네가 있다는 걸. 허상이 아니라 만질 수 있고 부르면 답이 오는 바로 옆에.

너를 내버려 둔 적은 한 번도 없다고.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피곤으로 반쯤 기절했다가 깬 정한이 의식을 차렸을 때 승철은 없었다. 짐작하고 있었기 떄문에 정한이 느끼는 건 체념뿐이었다.

정한은 잠깐 옛 생각을 했다. 귀신을 보는 것과, 최승철을 보는 것. 어떤 것이 더 나은지.

최승철의 찡찡이 타임이 낫다고 항상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확신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이 능력이 너와 가까워지라고 있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아니었으니까.

5

단순한 콜업에서 벗어나 마참내! 1군 엔트리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온 민규가 연습 시간 내내 승철이 옆에 들러붙어 있다가 정한을 보자마자 붕방붕방 손을 흔들고 불러댔다.

“정한이 형!”

하여간 눈치라고는 없는 놈.

정한도 손을 흔들고 지나가려는데 민규는 이리 좀 와보라고 손을 막 흔들고 신나서 엉덩이를 들썩들썩했다.

정한과 승철의 어색해진 기류를 모르는 사람이 없는 와중에 - 심지어 감독도 알고서는 넌지시 물어보는 판국인데 - 붙어서 연습을 그렇게 하고도 냉큼 눈치도 안 살피고 불러대는 게 민규다웠다.

“왜에?”

민규가 옆에 있으니 승철이 도망도 못 갔다. 안절부절 못하던 표정이 차츰 굳는다.

정한은 느긋하게 승철의 상태를 살폈다. 여전히 눈 아래가 시커멓고 손가락은 테이핑으로 덕지덕지했다. 약간의 붉은 기가 있는 승철의 눈가와 부르튼 입술. 연습이 끝나자마자 유독 지쳐있고, 필사적으로 괜찮은 척 하고 있어도 윤정한의 눈을 속일 수 없었다.

최승철의 눈 역시 마찬가지로 부산하게 윤정한을 훑는다. 안 그런 척 쌀쌀맞게 고개를 비스듬히 돌리고 있었지만 계속 힐끔거리고.

자기 옆에서 그런 애매한 기류가 흐르거나 말거나 민규가 우다닥 말을 붙였다.

“엄마가 형 좋아하는 치킨 뭐냐고 물어보는데요. 뭐 좋아해요? 기프티콘 되는 거?”

“왜 너희 어머니가 내 치킨 취향을 궁금해하셔?”

“형이 잘생겼다구 나 말고 형 응원할 거래.”

“와.”

“그러니까 빨리요 뭐 좋아해? 나도 엄마한테 알려주고 하나 더 달라고 할 거야. 나는 그거 좋아하는데…”

대화가 이어질 기미가 보이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승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규가 놓치지 않고 재빠르게 손목을 콱 잡았다.

“아, 승철이 형도 그냥 가지 말고 말 좀 해. 며칠 전부터 정한이 형 걱정만 했잖아요.”

서로 어색한 걸 알면서도 일부러 둘을 붙이려고 하는 수작이었다니 이 새끼 폭력적인 인싸야.

정한은 그 와중에도 엄살쟁이 최승철이 민규가 저렇게 꽉꽉 틀어쥐는데도 뿌리치지도 않고 얌전히 잡혀있어서 흥칫뿡 상태로 돌입했다.

“나, 내가 언제 그랬다고.”

“언제 그러긴! 매일인데요! 승철이 형이 얼마나 형 걱정했는지 알죠? 저번에는 나한테 가서 같이 밥 먹고 오라고 쫬다?”

“괜한 소리 하지 마, 쫌.”

“맞잖아. 뭐가 괜한 소리야.”

“와~ 최승철~ 나 신경쓰고 있었어?”

정한이 건조하게 맞장구를 치자 승철이 눈을 피했다.

“신경 쓰지 그럼 안 쓰겠냐.”

뒤로 갈수록 말소리가 기어들어갔지만, 어쨌든 승철은 할 말을 했다는 식으로 고개를 돌렸다.

“형들 그래서 치킨은 뭐가 좋을 것 같냐구요.”

얘는 진짜 눈치가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정한이 하하하 웃으며 민규의 어깨를 꾹꾹 눌렀다.

“후라이드 해. 기본이 제일 좋아. 승처리는 잠은 잘 잤어?”

“갑자기 무슨…….”

“피곤해 보여서.”

매일매일 그렇게 울어대는데 멀쩡하면 세상에 이일언일이에 나가봐야 할 상황 아니냐고. 울면 근손실 오는데.

자신도 홀쭉하게 빠져가지고 근수저를 걱정하는 꼴이 이게 맞나 싶긴 하지만, 걱정은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정한은 민규를 강제로 안마해주고, 걔가 몸부림치는 틈을 타서 민규가 잡았던 승철의 손목을 가로채잡았다.

“후배가 이렇게 걱정해주는데 우리 가서 얘기 좀 할까?”

“좀 있으면 시합인데 뭘…”

경기까지 30분은 훨씬 더 남아있었지만 승철은 경기 핑계 대면서 꼼질꼼질 피했다.

민규가 초롱초롱하게 ‘형아들 화해하세요’ 눈빛을 보내서 부담스러운 티가 역력했다.

“그럼 진짜 이번에는 나랑 저녁 먹기.”

“알았어.”

붙든 손목이 몰랑몰랑하고 뜨끈해야 하는데 긴장 때문인지 차가워서 정한은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이번에 약속 어기면 퇴근캠 들고 번지점프 하쟈. 경기 시작 전에 카메라 감독님한테도 다 말해두고. 감독님, 좋은 컨텐츠 하나 뽑아드리겠습니다 이러자고.”

최승철은 당연히 진저리치며 반대했다.

“싫어, 그런 걸 왜 하냐.”

“그래야 절대 취소 안 하지.”

여전히 승철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러다 진짠가? 하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한 번 정한을 봤다가 안광이 번쩍번쩍 도는 걸 보고 한숨을 쉬었다.

“알았다. 알았으니까 놔.”

“약속한 거다?”

엄지로 손목뼈를 문지르다 놓을 때, 손가락 끝에서 정전기가 일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찌리릿하고 손끝이 저리다.

아쉬운 맘에 손자국이 남을 정도로 꾹 한 번 쥐었다 놓자마자 승철은 냅다 경기 준비가 어쩌구 하면서 라커룸으로 도망갔다.

민규가 살짝 어이 없다는 투로 말했다.

“아유, 승철이 울겠다. 뭘 그렇게 괴롭혀.”

“괴롭히긴 뭐가?”

“형 겁쟁이라 번지 점프 하려면 마음의 준비만 삼백년은 있어야 할 듯.”

“기다리지 뭐.”

“그런 게 괴롭히는 거라는 거야.”

“뭔소리야, 번지 점프 뛰기 싫으면 약속 지키면 되잖아.”

정한은 진심이다.

어제도 찡찡이 타임이 있었고, 그제도 찡찡이 타임이 있었고.

무언가를 해야한다. 최승철이 울 때 옆에 있지 못하단 사실이 이제 윤정한의 목에 가시처럼 걸린다. 그저 지켜볼 뿐이라면, 이 능력은 대체 무엇 때문인데 존재하는지.

귀신을 볼 때도 이유가 있었나? 예지몽에도 이유가 있었나?

물론 아무 것도 없었다. 능력은 그저 타고나는 것뿐이다. 선택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 능력으로 무엇을 하느냐가 다를 뿐.

그러나 이렇게 특정 한 사람을 - 만나보지도 못했던 사람을 - 콕 집어서 울 때 정한을 데려다 놓는 거라면 무슨 이유가 있을 지도 모른다고, 그 사람이 허구헌날 눈빠져라 울었으니까 정말로 이유가 있을 지도 모른다고…….

스물 다섯이 될 때까지, 그 애와 친구가 될 때까지, 몸을 더듬어 합쳐지는 순간을 지날 때까지, 윤정한은 그 이유를 몰랐다.

단지, 이유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만이 선명했다.

그리고 이제 그 사실을 말하려 했다.

.

.

.

상대팀 투수의 손가락에서 볼이 떨어지는 순간부터 윤정한은 직감할 수 있었다.

‘피해야 되는데……’

그러나 몸을 뒤로 빼도 이미 늦었다. 제대로 휘지 못한 볼이 그대로 얼굴로 날아왔고, 반사적으로 치켜든 왼손에 볼이 꽂혔다.

“악!”

정한은 배트를 떨구고 그 앞에 무릎을 꿇듯이 쓰러졌다. 두꺼운 장갑 안쪽으로 손가락이 붓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손 전체가 얼음 물에 담갔다가 용암에 담그기를 반복하는 것처럼 아프고 감각이 제멋대로 날뛰었다.

태연하려고 해도 아파 죽을 것 같았다. 차라리 확 떼어내버리면 시원하게 더 이상 아프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심상치 않은 타격 코치와 가까이 있던 주루 코치가 달려왔다.

“정한아!”

“장갑 풀 수 있겠냐?”

정한은 이를 악물고 비명을 참으면서 장갑을 풀렀다. 그는 고통 때문에 제대로 살피지 못했지만 타격 코치가 바로 감독에게 신호를 보냈다.

교체 되고 덕아웃으로 들어오자 선수들이 어수선하게 모여들었다. 괜찮아요? 많이 부었어? 헐씨, 큰일 났어. 금 간 거 같애?

응급차가 바로 준비되고 정한은 손을 잠시간이라도 움직이지 않게 부목을 댔다.

“정한아!”

새파랗게 질린 최승철의 얼굴이 사람들을 헤치고 불쑥 나타났다. 어떻게 만지기라도 하면 더 아플까봐 차마 대지도 못한 손이 벌벌 떨었다.

“괜찮아? 어떻게 된 거야?”

“찡찡거리지마, 최승철. 별 거 아냐….”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정한은 미소를 지었다. 악문 미소는 별로 효과가 없었지만.

새삼스럽지만 윤정한은 자신이 운정한인 건 신인상이니 뭐니 하는 것보다 긴 부상 이력이 적은 걸로도 증명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해왔다.

그러다 이번에 갱신하게 된 것이다. 손가락과 손등뼈에 금이 갔다. 뼛조각이 없는 것만이 유일한 안도였다. MRI 찍고 뼛조각이 없고 금이 간 걸로 진단이 나와서 바로 깁스를 했다.

스물다섯까지 프로 생활을 하며 한두 번 부상당한 건 아니라서 충격은 덜했다.

코치가 진짜 이나마 한 게 다행이라고 땀을 닦았다. 손가락은 워낙 약한 부분이니 수술이 필요한 부상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열 시가 거의 다 되어서야 땀투성이의 최승철이 등장했다. 허겁지겁 갈아입은 티셔츠가 한쪽은 바지 안으로 한쪽은 여전히 바지 밖으로 흘러내려 있는데 승철은 그것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왼쪽 어깨의 깁스 팔걸이를 흔들지 않게 조심하면서 정한은 오른손을 흔들었다.

“퇴원했지롱.”

승철을 발견한 타코는 정한의 인수인계(?)를 마치고 퇴근했다.

“태워다주랴?”

“아닙니다. 택시 타고 들어갈게요. 아잉 택시비 하게 법인 카드는 주고 가세용.”

그렇게 뜯어낸 법인 카드를 들고 승철과 정한은 대학병원에서 걸어 나와 도로로 향했다.

“괜찮냐?”

“뼈에 금만 갔대.”

승철이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잠깐동안 주장으로서의 생각과 친구로서의 생각이 교차하는 모양이었다.

“……하아. 더 안 다쳤으면 다행이고.”

“지금은 진통제 때문에 좀 낫고.”

“줘라, 내가 들게.”

약 봉투를 휘두르며 얘기하자 승철은 심각한 표정으로 약 봉투를 가져갔다.

“이야, 생색은. 이게 뭐 무겁다고 들어준다고 하냐.”

“너 앞으로 엄청 힘들 건데 이거 조금 먼저 해주려고.”

정한은 깁스 밖으로 움직일 수 있는 새끼 손가락을 조금 꼼질거려 보았다.

“쩝…. 고생길이 열렸네.”

“조심해, 진짜. 조금이라도 빨리 나아야지.”

병원 근처는 아직 택시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정한은 택시 정류장 쪽으로 걷다가 승철을 돌아보았다.

“아니지! 우리 저녁 먹어야지! 아오, 번지점프 할 뻔 했네. 너가 맨날 취소 이랬는데 내가 그럴 뻔 했잖아.”

“너는 지금 이렇게 됐는데 밥이 먹고 싶냐?”

“먹고 싶지. 먹고 살자고 하는 건데.”

승철이 달래듯이 부드러운 소리를 냈다.

“약속 취소 안 된 걸로 할 테니까 집에 가. 다음에 좀 낫고 보자.”

“집에 가면 아무도 수발 안 들어줘.”

“가서 잠이나 자.”

“잔인하다. 나 진짜 거의 부러질 뻔 해가지고 너무너무 아픈데.”

그 말에 당연히 승철의 기세가 꺾이고 눈꼬리와 눈썹이 아래로 축 늘어졌다.

“많이 아파? 진통제 더 먹어야 돼? 많이 아프면 다시 병원 가서 물어보자…”

“헤헿! 그 정도까진 아니고 밥 좀 같이 먹어줘.”

“…….”

승철이 표정으로 욕을 했지만 정한은 아랑곳하지 않고 주변을 돌아보면서 식사할 만한 가게를 찾았다.

몇 걸음 뒤따라 따라오던 승철이 천천히 멈췄다.

“정한아. 나는 근데… 그렇게 못 해.”

뒤에 멈춰선 승철을 정한이 돌아보았다. 덩치도 큰 게 우뚝 서서 있으니까 가로등 불빛을 다 가렸다.

“왜 그래? 뭐야, 최승철. 번지 점프 뛰고 싶으면 뛰고 싶다고 먼저 말을 하지.”

“난, 나는… 너랑 그렇게 하고 평소처럼, 못 해. 친구 못 해. 넌 어떻게 그렇게 똑같을 수 있냐?”

최승철이 짜증을 부리며 그 자리에 쪼그려앉았다.

“그러니까 넌 어떨지 몰라도 난 둘이서 뭐 하기 싫다고. 그 말 하려고 오늘 온 거야. 집에나 가, 윤정한.”

“내가 싫어?”

땀투성이가 되어 달려오고서.

승철이 머리를 거칠게 헤집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너는 어떤데.”

“내가 먼저 물어봤잖아. 그러니까 니가 먼저 대답해야지. 내가 싫어?”

“너 진짜 짜증나.”

정한은 승철의 앞에 같이 쪼그려앉았다. 여름의 밤은 아직도 땀이 날 정도로 더웠다. 도로에서 차가 달릴 때마다 미지근한 바람이 불었다.

승철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끼리 붙어서 손가락 위로 늘어졌다.

정한은 가슴 가득히 간지러운 기분이, 애정이 들었다. 누군가를 사랑하기란 이토록 너무 쉬운 일이었다.

너 나 사랑하는구나.

그리고 나는 너를 사랑하고.

승철의 손목 위에 손을 겹치자 승철이 크게 움찔했다.

“나 봐.”

최승철이 손가락을 아주 조금만 내려서 그 사이로 눈을 떴다.

윤정한은 긴 속눈썹을 본다. 길고 촘촘한 속눈썹은 가로등의 빛을 거르듯이 볼록한 뺨과 손가락 위로 그림자를 남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반짝거리는 커다란 눈동자와 마주쳤다.

몇 초간.

그 눈동자가 차츰 젖어들어간다.

승철의 울기 시작하는 얼굴을, 사실 윤정한은 그 어느 누구보다 더 확실하게 많이 보았다.

귀가 멍멍해졌다. 발 아래가 울렁거리는 듯한 느낌. 여기서 또 너랑 멀어진다고. 또.

심장이 지나치게 빨리 뛰고 뒤통수가 아릿하게 당기는 느낌에 정한은 애타게 속삭였다.

“나 봐, 최승철.”

제발 날 봐 줘.

허우적거리며 정한은 승철을 잡고 있었던 손을 구명줄이라도 되는 양 힘을 주어 잡으려 했다.

휑하게 통과해야 할 자리에 여전히 승철이 존재했다. 승철이 힘을 주어서 기울어지는 정한의 몸을 단단히 떠안는다.

굵은 눈물방울이 승철의 눈에서 뺨으로 굴러 떨어지는 중에도 승철은 계속해서 정한과 눈을 맞추고 있었다.

깨문 입술, 걱정으로 부산하게 자신을 살피는 최승철과 자꾸 눈이 마주쳤다.

네가 울고 있는데.

예고 없이 사라진 능력에 눈이 마주치는 것만이 기뻤다.

‘그럼, 소환 안 된 거야? …없어진 거야?’

윤정한은 과부하로 떨었다. 승철의 팔뚝을 움켜쥐었다가 결국 바닥에 무너지고 만다.

“승철아.”

“왜….”

닿았어.

이제야 너한테 닿았어.

정한은 헐떡이며 필사적으로 승철을 놓지 않았다. 있는 힘껏 움켜쥔 손바닥 안쪽이 뜨거웠다. 언제나 다정하고 싶었는데, 너에게는 언제나 다정하고 싶었는데. 그러나 흔들리고 울렁거려 쏟아지는 감정들 때문에 절박할 수밖에 없는 순간들이 있다.

승철의 눈에 오직 자신만이 비치고 있는 지금과 같은 순간이.

“난 너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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