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늪지의 사랑 1
윈칼
1.
차량이 다시금 덜컹였다.
갈수록 도로 상태는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다. 멀미가 났다. 민정은 울렁거림을 잠재워볼 심산으로 차창에 이마를 꾹 갖다 대었다. 피부가 연해서 금세 이마로 붉은 자국이 올라왔다. 룸미러를 통해 계속해서 딸의 상태를 살피던 민정의 부(父)가 더욱 속도를 늦추었다.
“미안, 딸. 아빠가 조심히 몬다고 하는데 잘 안 되네.”
“괜찮아. 길이 궂은 걸 어떡해.”
“힘들면 잠시 멈췄다가 갈까?”
이미 30분 전에도 차를 한 번 세운 적이 있었다. 이러다가 망안까지 가는데 온종일이 걸려도 모자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정은 선선히 고개를 저었다.
“참을 수 있어. 나는 조금이라도 일찍 도착하는 게 더 좋아.”
“그래. 아빠가 운전 잘 해볼게. 우리 딸 조금만 참아?”
민정은 대답 대신 좌석 등받이에 푹 기댔다. 그리고는 운전에 열중하고 있는 민정 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민정은 종종, 아니 그보다 자주 이 집안 남자들의 존재에 대해 생각했다. 그들은 집안 여자들을 보호하고 모시기 위해 열과 성을 다했다. 그것만이 유일한 삶의 목적인 것만 같았다. 나라면 안 그럴 텐데. 민정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우리는 저주와 축복을 동시에 받은 존재들이지.’
어린 시절, 병실 침대에 누워 민정의 작은 머리를 힘없이 쓰담아주던 엄마를 떠올렸다. 아버지의 성을 받는 대한민국의 법 때문에 각기 성씨는 달랐지만, 민정의 모계 혈통은 여전히 견고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원인도 치료법도 알 수 없는 불명의 유전병을 앓았고, 대부분이 40대가 되기 전에 목숨을 잃었다. 그렇지만 죽기 전까지는 인생에 고난이랄 것이 없고 누군가에게서든 끝없이 사랑받는 삶을 살았다.
민정은 그것이 순전히 집안에 그득히 쌓인 막대한 재산 덕이라고 생각했다. 제법 축복이라 부를 만한 정도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사랑받는 건, 글쎄. 원한 적이 없는데 마냥 받는다고 그걸 축복이라고 해야 되나. 민정은 아직도 죽은 아내를 잊지 못해 이따금 눈물을 훔치는 제 부친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민정 부는 제 아내를 쏙 빼닮은 민정에게 대신 헌신했다. 민정은 가끔 그것이 귀찮고 성가셨다. 이토록 가녀린 육신 때문에 누군가에게 의탁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처지만 아니었다면 진즉 저 멀리, 어딘가로 훨훨 떠나버렸을 텐데.
고작 열여덟이었지만 민정은 벌써부터 삶이 지겨웠다. 도무지 의지대로 살 수가 없었다. 망안이라는 시골로 이사를 가게 된 것도 그랬다. 할아버지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민정은 요양을 위해 모계혈족의 고향으로 옮겨졌다. 그 과정에서 민정의 의견은 없었다. 민정이 반발하지 않은 것은 단지 기운이 없어서였을 뿐. 모든 게 다 있는 서울을 떠나 아무것도 없는 촌으로 오는 일은 전혀 달갑지 않았다.
망안(蟒眼).
한자 뜻 그대로 이무기의 눈이라는 뜻을 가진 망안은 충청도와 경상도 경계에 위치했다. 지금은 율미산이지만 과거에는 ‘율미기’라고 불렸던 거대한 이무기가 죽기 직전 똬리를 튼 곳이라는 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망안은 마지막까지 썩지 않은 이무기의 눈이 찐득한 흙 섞인 눈물을 하염없이 쏟아내던 자리라고 했다. 실제로 망안 일대에는 설화에 걸맞게 늪지가 펼쳐져 있었다. 이무기의 원한 때문인지 다른 늪과는 다르게 해충도 없었고 다른 생물도 거의 없어 연구가들 사이에서 언제나 화제였고 사진작가들이 즐겨 찾는 명소이기도 했다. 그래봤자 늘 안개 끼고 우중충한 날씨 탓에 농작물도 잘 자라지 않고, 내세울 산업도 없어 날이 갈수록 쇠락하는 촌동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지만.
벌써 고2인데 대입 공부는 어떡하지. 아, 어차피 금방 죽을 거니까 아무래도 상관없나. 민정은 어지러움을 견디려고 애쓰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느 새부터인가 주변으로 뿌옇게 안개가 끼고, 갈대인지 억새인지 하는 것들이 끝없이 펼쳐졌다. 차량이 ‘망안1리’ 라고 적힌 팻말을 지나 말라가는 강줄기 위에 얹힌 다리를 건널 때, 민정은 무언가를 보았다.
“… 아빠, 잠깐만.”
거의 들릴 듯 말 듯한 중얼거림에도 민정 부는 금방 갓길에 차를 세웠다.
“왜. 속이 안 좋아? 토하고 싶어?”
“저기 뭐가 있어.”
민정은 차 문을 열었다. 마치 홀린 듯이. 차에서 내린 민정은 다리 난간 위에 손을 올린 채로 자신의 마음이 이끄는 데로 눈길을 보냈다. 저 너머, 갈대 사이로 인영이 보였다. 바람이 불었고. 갈대가 서로 스치며 사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멀리서 보이는 소녀의 머리칼이 나부꼈다. 아름답게.
툭, 투툭.
하늘에서 굵은 물방울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딸, 뭔데 그래. 비 오는데 감기 걸릴라. 어서 가자. 응?”
뒤늦게 민정을 쫓아 차에서 내린 민정 부가 우산을 펼쳐 씌워주며 어르듯 말했다. 하지만 민정은 소녀에게서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소녀 역시 그러는 것처럼. 그 찰나에 빗줄기는 마치 처음부터 억수 같았던 것처럼 거침없이 퍼붓기 시작했다. 민정이 다리 난간을 짚었던 손을 뒤집자 손바닥 위로 빗방울이 떨어져 먼지와 함께 섞이며 까만 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꼭 소녀가 우는 모습처럼.
“아빠.”
“응, 딸.”
“쟤 데리고 가자.”
민정은 소녀가 갈대 사이로 쓰러져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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