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늪지의 사랑

어느 늪지의 사랑  3

윈칼

초록의 숲 by 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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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우와…”

도대체 몇 번째로 외치는 건지 몰랐다. 민정의 집은 그야말로 으리으리했다. 지민은 본인이 사는 집에서 불과 15분 거리에 이런 멋진 집이 생겼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민정네 집은 이전에도 규모가 있는 한옥이었는데, 오랜 공사를 거치고 난 뒤에는 말도 안 되게 근사해졌다. 고1 내내 오며 가며 뭘 그렇게 고치길래 이렇게 요란인가 궁금했던 지민은 민정과 함께 집을 둘러보며 이래서 그랬구나, 하고 끊임없이 감탄했다.

“적당히 고쳤으면 작년부터 내려와 살 수도 있었는데.”

민정이 가볍게 민정 부를 향해 눈을 흘기자, 그가 머쓱하게 웃으며 뒷목을 쓸었다.

“병식이가 증축하면 늪지 일대가 보여서 뷰가 환상적일 거라고 하길래. 딸이 좋은 경치 보고 지낼 수 있으면 아빠도 기쁘니까.”

민정 부가 말하는 친구 ‘병식’은 건축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이름만 들어도 모두가 아는 유명 건축가였다. 그래서 민정이 방에 들어갈 때마다 가슴이 트이는 감각을 느꼈던 건가. 지민은 그렇게 납득하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구태여 말한 적은 없었지만, 뭘 모르는 지민이 보기에도 민정의 집안은 무척이나 부유해 보였다. 하지만 그 어떤 과시도 없이 소탈했다. 지민은 민정 같은 여자애도, 민정 부 같은 아빠도 현실에 존재할 거라곤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영화 드라마에서나 보던 ‘교양 있는 사람’ 이라는 게 이런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온실을 보기 위해 복도를 걷다가, 지민은 문득 자신의 발을 내려보았다. 집에서 실내용 슬리퍼를 신어보기는 처음이었다. 언젠가 시장에서 만져봤던 촉감과는 차원이 다른 보들거림이었다. 구름 위를 걷는다면 이런 느낌일까? 지민은 발바닥으로 느껴지는 감촉이 좋아서, 괜히 종종거리며 걸음을 쪼개어 걸었다. 앞서가던 민정이 문득 돌아보았다가 그런 지민의 모습을 보고는 미소 지은 줄도 모르고.

 


한참 온실을 구경하고 있을 때 민정 부에게 급한 연락이 왔다. 모 대학의 교수로 지내다가 안식년을 얻어 내려왔다던 민정 부는 그럼에도 학회며 동료며 양성 중인 제자들에게 이런저런 연락을 자주 받았다. 그나마 몇 명 있던 친구도 술주정으로 모두 잃은 지민 부와는 확연히 달랐다.

“미안, 딸. 아빠 들어가서 일 봐야겠다.”

“뭐가 미안해. 괜찮아. 들어가.”

민정 부가 발걸음을 재촉해 자리를 뜨고 나자, 온실에는 민정과 지민 두 사람만이 남았다. 온실에는 아직 각종 도구만 있을 뿐이었다. 휑한 화분들을 둘러보던 민정이 지민을 돌아보았다.

“우리 작은 화분에 뭐 하나 같이 심을까?”

“응, 좋아.”

온실에서 무언가를 키우는 것을 ‘농사’라고 하기는 뭣했지만, 지민은 아무렴 이런 쪽에는 자신이 있었다. 드물게 기운찬 대답에 민정이 슬 미소 지었다. 그리고는 지민에게 다가와 손목을 살짝 쥐고 당겼다. 민정의 손은 생전 험한 일이라곤 해본 적 없는 것처럼 보드라웠다. 벌써부터 손바닥이 거칠거리는 지민과는 달랐다. 순간적으로 민정이 손을 잡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지민은 그에게 이끌렸다. 이내 민정은 지민을 이끌고 여러 씨앗이 담긴 바구니 앞에 이르렀다.

“아빠가 씨앗 여러 개를 샀다더라. 혹시 추천해줄 만한 식물이 있을까?”

“음…”

민정의 말에 지민이 쪼그리고 앉아 바구니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이내 노란색 꽃 사진이 붙어있는 씨앗 봉투 하나를 꺼내 보였다.

“금잔화는 어때? 지금 심으면 가을에 꽃이 피는 걸 볼 수 있을 거야.”

“지민이 네가 추천해주는 거라면 난 뭐든지 좋아.”

지민이 내놓는 말에 이토록 긍정적인 답을 주는 사람이 있었던가. 민정의 말에 지민은 코끝이 찡해질 만큼 기뻐졌다. 숨길 수 없는 미소가 새어 나오자 민정도 지민을 따라 맑게 웃었다. 너나 할 것 없이 자연스럽게 움직인 두 사람은 화분에 돌을 깔고, 차곡차곡 흙을 눌러 담았다. 민정이 씨앗 봉투를 여는 사이, 지민이 잘 다진 흙 여러 군데에 자그맣게 구멍을 냈다.

“여기에 씨앗 하나씩 넣고, 흙으로 덮어주면 돼. 너무 세게는 말고.”

“너 이런 거 정말 잘 아는구나.”

민정이 미소 지으며 지민이 파둔 작은 구멍에 금잔화 씨앗 하나씩을 살포시 떨어뜨렸다. 그러면 지민이 작은 모종삽으로 그 자리에 흙을 덮고, 살살 두드렸다.

“나 잘하지.”

“응. 지민이 정말 잘한다.”

원래 칭찬이라는 걸 받아본 적이 별로 없어서 그런가. 아니면 천사 같이 생긴 민정이 해주는 칭찬이라 더 달게 들리는 건가. 지민은 그런 생각을 하다가 아무렴 좋다는 결론을 내리며 수줍게 웃었다. 그 미소를 귀여워하며 바라보던 민정이 넌지시 말을 건넸다.

“너 우리 집에서 계속 지낼래?”

“…… 어?”

그러고 싶기는 하지만 그래도 되는 건가 싶은 생각에 지민의 행동이 멈추었다. 침묵이 이어지자, 민정이 모종삽을 들고 있던 지민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네가 내 친구가 되어줬으면 해. 내 곁에 계속 있어 줬으면 하고.”

“그… 말은 고마운데, 그게… 괜찮은 건가 싶어서.”

지민은 친구가 이런 식으로도 될 수 있나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친구를 사귀어본 적이 없어 그마저도 알지 못했다. 떨어진 지민의 시선이 방황하는 사이, 민정이 고개를 기울이며 낮추어 눈을 맞추었다.

“나 사실 병이 있어. 외가에서 물려받은 희귀병. 언제 발작이 시작될지 몰라. 엄마도 이 병 때문에 죽었어.”

갑자기 병이 있다고? 거짓말할 애 같지는 않은데 얼마나 봤다고 나한테 이런 이야기를 척척해도 되는 걸까. 지민은 당혹스러웠다. 그러자 민정이 대답을 독촉하듯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지민아. 나 아프다구. 그래서 네가 친구로서 내 곁에 있어 줬으면 좋겠다구. 응?”

“그, 친구가 되는 건 나도 좋은데… 여기는 병원도 없는데 이런 데서 살아도 돼?”

친구가 되는 건 좋다는 말을 듣자마자 민정의 표정이 한결 풀어졌다. 민정이 손아귀에서 힘을 풀고, 지민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울 엄마가 예전에 여기서 살았었는데, 그때 엄청 건강해졌었대. 그때 엄마가 딱 나처럼 열여덟이었데. 그래서 울 외할아버지가 여기 있으면 엄마처럼 잠시라도 건강해질지 모른다고 여기서 살라고 하셨어. 망안의 무슨 힘이 지켜줄 거라나. 그러면서 전속 의사씩이나 붙여주고. 되게 웃기지.”

지민은 오늘 점심 식사 자리에서 민정 부가 내일이면 주치의가 도착해 1층 끝방에서 지낼 거라는 이야기를 했던 사실을 떠올렸다. 그땐 잠자코 듣기만 했는데, 이제야 퍼즐이 맞춰져 이해되었다. 그래서 이렇게 작고, 말랐고, 창백했던 거구나. 지민은 시선을 올려 민정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여기서 민정의 제안을 수락한다면, 지민에게는 친구가 생길 뿐만 아니라 안전한 도피처이자 안식처가 생기는 셈이었다. 하지만 그걸 할머니랑 아빠가 허락할까. 그런 생각을 하니 지민의 마음이 급속도로 무거워졌다. 그들은 지민이 행복한 꼴을 보지 못했다. 민정의 집에서 지내는 것을 허락해줄 리가 없었다.

“그런데 나, 할머니랑 아빠가……”

지민이 어렵사리 입을 열던 그때, 민정이 지민의 손등을 도닥였다.

“그런 거라면 걱정할 필요 없어. 너희 할머니랑 아버지가 허락해주셨대. 나도 몰랐었는데, 아빠가 너희 집에 물어봤다더라고. 그러니까 전적으로 너만 좋으면 다 되는 일이란 거야, 이건.”

정말 말 한마디로 다 됐다고. 난 18년 평생을 한순간 벗어나 있기가 그토록 힘들었는데. 지민은 잠시 멍한 상태로 생각을 정리했다. 당혹스러움이나 슬픔 같은 건 없었다. 지민은 그저 갑작스럽게 나타난 일생일대의 구원자인 민정네 부녀에게 그저 감사할 뿐이었고, 그나마 숨통을 트게 되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기뻤다. 민정을 바라보는 지민의 얼굴에 미소가 번져나갔다. 이내 지민은 목소리마저 기쁨에 젖은 채로 답했다.

“그럼 난 좋아.”

그러자 민정의 얼굴도 덩달아 환하게 물들어갔다. 꼭 피어나는 꽃잎 같아서, 지민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윽고 민정이 간지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기뻐.”

지민의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자기가 뭔가 의미 있는 존재가 된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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