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늪지의 사랑

어느 늪지의 사랑  4

윈칼

초록의 숲 by 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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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걱정과는 달리 민정은 망안에서의 생활이 퍽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장인의 갑작스러운 통보에 민정만큼이나 적잖이 당혹스러웠던 민정 부는 그래도 딸이 즐거워하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민정에게 즐거움을 주는 대상이 흡족하지는 않았지만.

탁- 탁-

오늘 저녁은 민정이 좋아하는 라자냐였다. 라구소스를 만들기 위해 재료를 다듬으며 민정 부는 생각에 잠겼다. 도마에서 각종 재료들이 경쾌한 칼질 소리와 함께 잘게 잘려나갔다.

“아빠. 지민이, 우리 집에서 계속 지내면 안 될까.”

평소에는 좀처럼 원하는 게 없는 딸이 그렇게 말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민정 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원래는 민정이 드물게 원하는 거라면 뭐든지 갖다 바치는 민정 부였다. 하지만 그게 유지민이라면 말은 좀 달랐다. 지민을 처음 만났던, 민정이 망안으로 온 첫날에. 민정 부는 딸의 요청에 따라 지민을 집에 누이고 보호자를 찾아 마을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이장에게서 지민의 집안에 대해 상세히 들을 수 있었다. 물론 그 자리에는 민정도 있었다.

“…… 지민이가 어떤 애인 줄 알고.”

참으로 폭력적인 집안이었다. 더욱 자세히 말하려 하면 설명할 단어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영혼이 상스러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지민이 양육자들에게 보호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안타깝게 생각했다. 하지만 민정 부는 딱 그 정도였다. 그에게는 오직 단 한 사람, 이 세상에서 본인의 딸만이 가장 가여웠다. 자신의 아내처럼 마흔이 되기도 전에 죽을 자신의 딸. 그토록 슬프고 사랑스러운 존재에 티끌 하나도 묻히고 싶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지민은 민정의 곁에 머물기에 적당한 대상이 아니었다.

“이장 할아버지한테 다 들었잖아. 지민이를 집으로 돌려보내는 건 우리가 폭력을 방조하는 거나 다름없어.”

민정이 마음을 이토록 어여쁘게 쓰는 것은 감격스러웠으나,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었다.

“아빠는 그 애가 찝찝해. 괜히 뒀다가 민정이 너한테 좋지 않은 영향이라도 가면-”

“그럼 나 여기서 친구 하나 없이 외롭게 지내? 아빠 곧 있으면 출장 가잖아. 아빠 없는 동안 나 발작 일으키면? 그냥 죽어?”

말씨가 날카로웠다. 민정은 원하는 대로 일이 풀리지 않으면 이런 식으로 심술을 부리고는 했다. 아무리 자신이 출장에 간다지만 주치의가 머물고 있기에 사실상 민정이 죽을 일은 없었다. 그 사실은 부녀 모두가 알고 있었으나 민정이 자신의 죽음을 두고 함부로 말하는 것은 그 정도로 자신이 원하는 바를 달성시키라는 압력이었다. 민정 부는 아직도 아내의 죽음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상태였고, 아내를 쏙 빼닮은 딸에게서 이런 말을 들을 때면 속절없이 무너지고는 했다. 불가항력이었다.

“…… 지민이 지내게 하자.”

그렇게 지민은 부녀의 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민정 부와 지민 부 사이에 거래가 있었다. 당연히 딸을 통해 대가를 받고 싶어한 쪽은 지민 부였다. 참으로 지저분한 작자라고 생각했으나 민정의 소원을 이뤄주기 위해 민정 부는 거래를 수락했다. 그의 입장에서 다달이 지불할 금액이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역시 기분은 더러웠다. 이런 사람 씨에서 난 유지민이라는 아이가 딸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도저히 들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민정 부의 입장이 어떻든 간에 지민은 민정 곁에 있게 되었다. 점점 뜨거워지는 여름 햇살만큼이나 짙어지는 딸의 웃음소리만큼은 기쁘기 그지없었다.

 


“아빠.”

상념에 잠긴 채로 요리를 이어가던 민정 부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돌렸다. 민정이 부엌 문간에서 배시시 웃고 있었다. 가르쳐준 적도 없는데 아내와 똑같이 행동하는 딸을 볼 때마다 민정 부는 놀라는 동시에 기쁘고 울컥하는 감정이 동시에 들고는 했다. 민정 부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아직 라자냐 덜 됐는데. 이따 아빠가 부르면 내려오지~”

“아빠 도와주려고 내려왔지. 좀 더 일찍 와서 재료 준비부터 도울 걸.”

“에이, 뭘~ 지민이랑 늪지 구경은 잘하고 왔어?”

“응. 진짜로 벌레 하나도 없고 엄청 신기했어. 연구하는 사람들? 막 와서 사진 찍고 하는 것도 봤어. 풍경이 되게 예쁘더라.”

새가 노래 부르듯 조잘거리는 딸을 보며 민정 부는 미소 지었다. 민정 부가 별말 없이 그라탕 접시에 넓은 파스타면을 깔자 민정이 자연스럽게 라구소스를 국자로 떠 면 위에 부었다. 그러면 민정 부는 베사멜 소스를 뿌렸고, 민정은 파스타면을 덮었다. 민정 부는 말하지 않아도 이뤄지는 딸과의 일상이 무척이나 소중하고 행복했다.

“… 아빠. 내가 생각해봤는데.”

“응. 우리 딸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지민이 말야.”

또 유지민 얘기. 민정 부는 저도 모르게 얼굴 근육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속을 알 리 없는 민정이 천진하게 말을 이었다.

“걔네 아빠가 돈 받는다는 건 몰랐으면 좋겠어. 지민이 마음 다칠까 봐.”

처음 보는 애 마음 다치는 건 걱정해주면서 어쩜 아빠 마음은 이렇게도 모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네 뜻이 그렇다면 그래야지. 민정아, 근데 아빠는… 네가 왜 처음 보는 애한테 이렇게까지 잘해주는 건지 이해하기가 좀 힘들어.”

예열이 끝난 오븐이 알람을 울려댔지만, 부녀는 움직이지 않고 차분히 서로를 바라보았다. 가만히 제 아버지를 올려보던 민정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

“평생 받기만 했으니까. 나도 누군가에게 돌려주고 싶어졌어. 같은 인간이라는 이유 하나로 나눌 수 있는 그런 거. 이를테면 인류애. 그런 큰 사랑 같은 거. 아빠가 나한테 평생 알려준 거잖아.”

민정이 이렇게까지 생각할 줄 몰랐던 민정 부는 잠시 멍해졌다가, 이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감동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모를 줄 알았는데. 평생 모른다고 해도 다 혼자서 감내하고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살았는데. 어느새 자라버린 딸이 이토록 깊게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민정 부는 과거 언젠가 민정 모에게서 들었던 ‘사랑해’ 라는 말을 떠올렸다. 눈물이 차올랐다.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아버지의 손을, 민정은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이거면 설명이 돼?”

그 물음에 민정 부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몇 번이고 고개를 주억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민정은 역시 아빠가 감동할 방식으로 말하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도 아직 이유를 알 수 없는 단순한 궁금증 때문이라고 솔직하게 말한다면 그는 절대 납득하지 못할 테니까.

원하는 대로 진행되고 있어 다행이라고. 민정은 그렇게 생각하며 아버지의 손등을 한동안 말없이 도닥였다.


 

씻고 나오니 벌써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원래 이렇게까지 오래 씻는 편은 아닌데, 온갖 처음 보는 목욕용품을 구경하느라 늦어지고 말았다. 지민은 후다닥 나와서 거울을 보며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거울 너머로 비치는 방을 이리저리 구경했다. 벌써 며칠이나 됐는데도 그랬다.

아무래도 지민은 이렇게 좋은 방이 자기 방이 되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기껏해야 당분간만이겠지만 그런 건 아무렴 상관없었다. 민정의 도움으로 민정 부와 함께 집으로 가 옮겨온 짐을 모두 풀었음에도 방에는 공간이 한참이나 남아있었다.

이곳에서 지낸 지도 벌써 열흘째였다. 듣기로는 민정이 여기서 고등학교를 졸업한다고 했으니, 잘하면 그때까지도 지낼 수 있을 터였다. 지민은 부디 이 평화가 지속되길 바랐다. 성인이 되기만 하면 어디로든 가버릴 작정이었다. 어쩌면 엄마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언젠가 만나게 된다면 지민은 꼭 이 말을 듣고 싶었다. 지민이 네가 싫어 버리고 간 것이 아니라고. 같이 살 수 없더라도, 엄마가 자신을 달가워하지 않더라도, 그 말 하나면 다 괜찮아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자신의 옷이 있었지만 지민은 민정이 준 옷을 입었다. 자신에게는 크다며 가져도 된다고 준 옷이었다. 고급 브랜드에, 재질도 좋았다. 단정하면서도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베이지색 원피스였다. 이렇게 입고 있으니 자신도 꼭 민정 같은 아가씨가 된 것만 같았다. 지민은 거울을 바라보며 민정처럼 웃어보려고 입매를 당겼다. 그런 자신을 마주 보고 있자니, 제법 미인으로 보이는 것도 같았다. 불여시 같은 년이 아니라.

“민정아.”

머리를 다 말리고 나서 가보니 민정의 방은 비어있었다. 먼저 씻고 내려간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지민은 걸음을 옮겨 1층으로 내려갔다. 복도 초입부터 부엌 쪽에서 맛있는 냄새가 풍겨왔다. 발걸음을 옮길수록 부녀가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지민은 저도 모르게 걸음이 조심스러워졌다. 갑작스럽게 등장해서 그들의 평화를 깨고 싶지 않아서였다.

“되게 맛있는 냄새 나.”

“우리 딸이 좋아하는 거라 아빠가 정성을 얼마나 들였는데. 정말 맛있을 거야”

불을 밝혀둔 부엌을 향해 다가갈수록, 지민은 어쩐지 자신이 어둠에 묻히는 기분을 느꼈다. 부녀의 모습이 보이자 지민은 어쩐지 엄두가 나지 않아서, 기둥 뒤로 모습을 숨겼다. 지민이 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두 사람은 함께 저녁 식탁을 꾸리고 있었다. 오븐 장갑을 낀 민정 부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그라탕 그릇을 들고 와 식탁 위에 놓았다.

“짠~ 진짜 맛있겠지!”

민정 부의 물음에 민정이 작게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우리 아빠 최고다.”

그런 제 딸을 보며 민정 부가 기분 좋게 웃었다. 지민은 그들의 모습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엄마가 없는 건 똑같은데. 이렇게 다를 수가 있나? 물론 민정이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나는 살아있지만, 그렇지만. 지민은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에 치달았다.

내게도 저런 아빠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때, 식기를 놓다가 인기척을 느낀 민정이 뒤를 돌았다. 시선이 마주하자 지민은 제 욕망이 들켰을까봐 저도 모르게 흠칫하고 말았다. 미묘한 침묵 후, 민정이 다행히도 아무것도 모르는 낯으로 맑게 웃었다.

“왔어?”

“- 응.”

지민은 혼신의 힘을 다해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부엌으로 들어섰다.

“진짜 맛있는 냄새 난다. 아저씨, 저는 뭘 도와드리면 돼요?”

살갑게 말을 붙이고서야 민정 부가 지민을 쳐다보았다.

“아, 수저만 좀 놔줄래?”

“네.”

지민은 부러 더욱 기운차게 답한 뒤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그 모습을 보던 민정이 스르르 웃었다. 민정은 지민이 허둥지둥할 때마다 아무것도 모르지만 신나서 점프하는 똥강아지 같다며 귀엽다고 말하고는 했다. 그래서 더더욱 지민은 들키고 싶지 않아졌다. 감히 민정의 자리를 넘보았다고. 갑작스러운 열병처럼 찾아온 열망이 언제쯤 잠잠해질지 자기도 모르겠다고. 이런 진심은 결코 말할 수 없었다. 들켜서도 안 됐다.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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