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용된 구원

오용된 구원

Signal of beyond redemption 3

The City Series by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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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거미 질 즈음, 돌바닥을 두들기는 편자 소리가 점차 늘어지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서쪽의 도시에 도착했다. 짐짓 열 명은 됐겠지만 실상으로 보면 서넛씩 3개의 무리가 하나로 뭉친 듯 소지한 장비의 인장이나 문양의 디자인이 달랐고, 각자의 무리로 뭉쳐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중 한 무리에서, 옅은 분홍색 머리카락을 가진 이가 앞으로 나와 이목을 끌어 박수를 쳤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덕분에 산짐승이나 도적에 위협받지 않고 도착할 수 있었어요.”

“어유, 댁들 덕이요.”

“무리 지어서 이동했으니 자잘한 위험이 적었겠죠. 여러분 덕이 큽니다.”

“겸손떨긴, 언제 우리 지부 올 일 있으면 오시오. 내 후하게 대해드리리다.”

“하하, 여기에서 떨어지죠. 저희는 여기가 종착점이니까요.”

“별의 은총이 깃들길 바라네.”

각 무리의 대장처럼 보이는 사람들과 악수를 나눈 셰른과 그 일행은 손을 크게 흔들어줬다. 에아는 기지개를 쭉 펴며 갈렌의 어깨를 붙들고 늘어져라 기댔다. 여독이 쌓여 지친 친구를 본 갈렌은 제대로 업겠다며 손을 들어보였지만 에아는 이를 거절했다. 행군마냥 며칠을 달리고 야영하고를 반복했으니 제 친구는 지쳤을 만 했다. 갈렌은 에아를 셰른에게 인도하고 말 세 필을 마굿간에 맡기러 떠났고 셰른은 여관 주인을 만나 쉴 수 있는 방을 달라며 요청했다.

“세 명이 묵을 겁니다.”

“예에,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저는 셰른 보이드Void, 이쪽은 ‘에아’ 보이드, 마굿간에 간 갈렌 보이드. 이 셋입니다.”

“가족인가 보구먼. 여행이오, 아니면 이주요? 그리고 ‘에아’라는 거, 애칭같은데 진짜 이름은 뭐요?”

익숙히 이름을 대충 적는 여관 주인의 말에 셰른은 머리를 긁적이며 에아를 바라봤다. 에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다는 신호를 보내고, 방을 안내하려는 종업원의 인도를 받았고. 셰른은 여관 주인의 질문에 응답했다.

“―그리고 저희는 가족까진 아닌데, 같은 집성촌集姓村 출신입니다. 뭐 넓은 의미로는 가족이 맞긴 하죠.”

“아하, 그럼 진짜 이주요?”

“고용주께서 물품 심부름을 하달해서 왔습니다. 오래 걸릴 수도 있지만 지금은 당장 열흘 정도만 부탁드리지요.”

“어유, 당연하죠.”

그러며 충분할 만한 비용의 은화와 동화들을 꺼내들자 여관 주인은 반색하며 호의적으로 대응했다. 셰른은 은화를 받아드는 손을 향해 고개를 내렸다 웃으며 좀 더 물어볼 것이 있는지 시선을 들어올렸다.

“그러고 보니, 아까 전에 이름을 물어보실 때 이름 전체를 물어보시던데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

“별 건 아니라네, 몇 달 전에 우리 영지에 방랑자Romani People 점쟁이가 와서는 ‘이름이 빈 자를 조심하라’고 했거든.”

“그런 헛소리 하는 사람들 한 해에 한두 명은 있지 않습니까?”

“우리도 그랬지. 그랬더니 그 점쟁이가 제대로 안 들으면 영주에게 변고가 있을 거라고 경고까지 하곤 사라졌다네.”

“아―. 그랬더니 진짜 영주님에게 무슨 일이 생겼군요.”

“그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한 달 넘게 두문불출하신다네. 그러더니 사병들을 풀어 주기적으로 영지 내 모든 사람들의 이름을 확인하더군.”

“잘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짐을 풀면 식사를 하러 내려올게요.”

셰른은 마구간에서 여관 안으로 들어와 어리둥절한 갈렌의 등을 떠밀고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숙소로 들어갔다. 미리 와서 짐을 풀고 있던 에아의 앞에 둘이 나타났다. 침대 두개가 들어간 방과 침대 하나가 있는 방이 합쳐진 방을 받은 에아는 테이블 위에 짐을 풀어놓고 잃어버린 물건은 없는지 확인하고 있었다. 이어 두 사람이 방 문을 벌컥 열고 나타났다.

“에아. 별 일 없었어?”

“응. 짐 풀고 있었어. 침대는 알아서 골라.”

“어디 눕나 똑같아 보이는데. 그나저나 여관 주인에게 들은 소문 말 해줄까?”

낯선 사람이 들어올까봐 총기를 향해 손을 뻗었던 에아는 둘의 얼굴을 보자마자 바로 손을 내렸다. 한 번에 여섯 발을 장전할 수 있는 리볼버 실린더 다섯개 중 하나하고도 반이 비어있었다. 야영하며 사람들을 노리던 들짐승들을 내쫓는데 쓴 걸 본 셰른은 별 큰 생각 하지 않고 넘겼다. 이어 에아와 갈렌에게 여관 주인의 이야기를 전달했다. 쭉 듣고 있던 에아는 총열의 안쪽을 천으로 닦아내며 말했다.

“그럴싸한 이야기네.”

“그런가? 난 믿을 만 하다고 생각해.”

“갈렌은 성격이 좋으니까.”

“그럼 우리 성격 나쁜 약사 선생님께선 무슨 의견을 갖고 계신가요?”

셰른의 질문에 에아는 창 밖을 바라봤다. 뒤뜰엔 져버린 낙엽들을 한 데 모으고, 장작을 패는 종업원들과 한겹 두꺼워진 옷차림의 사람들이 갈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아침엔 서리가 끼고, 저녁엔 쌀쌀한 바람이 부는 완연한 가을. 에아는 총열을 관리하던 양 손을 내리고 장비를 넣었다. 머릿속에서 널을 뛰던 말을 정리했는지 차분히 가라앉은 모습이다.

“사람이 한 해에 얼마나 아플까?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한 해에 사흘 정도는 아파. 특히나 추워지는 환절기엔 감기가 쉽게 걸리고.”

“난 잘 안 아프잖아. 누가 날 때리지 않는 이상.”

“그거야 내가 있었잖아. 말고도 너랑 갈렌은 내가 뭐라고 잔소리하니까 그런 거고. 바넘 효과Barnum Effect. 으레 모든 사람들이 겪는 사실을 포장해서 상대방에게만 해당하는 특별한 조언이나 분석으로 내놓아 현혹하는 방식이야.”

“우와, 이런 건 어디서 알았어?”

“알고 지내던 사람이…….”

흐려지는 말끝에 셰른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에게 들었냐며 꼬치꼬치 캐물어봤자 명확한 답을 주진 않는단 걸 알고 있어 더 이상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갈렌도 궁금해 하는 눈치였지만 셰른이 그 이상으로 물어보진 않아 그냥 묵묵히 에아의 다음 말을 기다리기만 했다.

“‘이름이 빈 사람’도 좀 미심쩍긴 해. 중요한 사람이 아니면 누가 이름까지 기억해? 모든 사람의 기억력이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야.”

“하긴 나도 뭐든 곧장 다 기억하는 건 아니니까.”

“그러니까 상대방이 자기 이름을 알려준대도 당사자가 이름을 까먹으면, 그럼 점쟁이 말대로 ‘이름이 빈 사람’이 되는 거야.”

“기준이 명확치 않다는 거구나.”

“또 이름을 알리지 않는 사람들은 보통 부랑자, 현상수배를 받거나 의심을 받는 강력범죄 용의자, 도주중인 사람, 아무튼 수상쩍은 사람들 뿐이지. 그런 사람들을 조심하는 건 당연한 거야.”

에아는 말을 더 이으려 했지만 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말을 멈췄다. 들어와도 된다는 목소리에 문을 연 사람은 이제 갓 열 살은 넘겼을 어린 여자아이였다. 여관 종업원의 딸이라는 아이는 금방 식사를 하러 나온다던 손님들이 한참을 기다려도 나오지 않아 걱정돼서 여관 주인이 보냈다며 우물쭈물 손가락을 꾸물거리며 말했다. 그런 모습을 보던 셋은 그제야 식사를 요청했다는 걸 상기시키곤 아이의 안내를 받아 서둘러 식당으로 향했다. 스튜와 찐 감자, 그리고 야채 구이가 식탁 위에 오르고 나서야 에아는 보여주지 못했던 문장들을 나열했다.

“가능성은 열어두고 봐야지. 프로파간다일수도 있어.”

“프로, 뭐?”

“그 덕에 이 도시의 치안이 확대됐다면 다친 영주가 뒤늦게나마 영민하게 대처중이란 여론 형성을 할 수도 있고. 아니면 애초에 이 도시의 호구조사를 더 면밀히 하기 위해 미끼성 찌라시를 날린 걸수도 있고.”

“찌라시는 또 뭐야?”

“에아, 네가 그런 면에서 머리가 좋다는 건 알겠는데 나랑 갈렌이 듣는다는 걸 먼저 이해해 줄래?”

“대충 영지민들에게 자기가 유능하다고 홍보하려 그런 날조를 했을 수도 있다고.”

그렇구나. 그제야 이해한 셰른과 갈렌이 얌전히 밥을 먹었다. 에아는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포크와 스푼을 대충 휘적거리며 건더기를 집어먹거나 떠먹거나 하며 식사를 해냈다. 밥을 다 먹었다며 먼저 일어난 에아는 짐에서 양철 컵과 직접 손으로 만든 건지 손잡이가 삐뚤빼뚤 깎인 칫솔을 꺼내 밖으로 나왔다.

양철 컵에 물을 가득 뜨고선 이를 닦고 있자니, 주변 사람의 사람들이 보였다. 비질하던 사람은 빗자루만 두고 어디로 가버렸고, 우물가에 물을 뜨러 온 남자들, 그리고 멱을 감고 온 건지 옷과 머리가 젖어 농기구를 들고 움직이는 사람들, 해가 지기 전까진 부모님이 부르지 않는 건지 둥그런 가죽 공 같은 걸 차면서 노는 아이들, 소일거리를 하는 노인들이 보였다. 에아는 눈을 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칫솔을 물고 중얼거렸다.

“뭔가 이상한데……. 아.”

에아는 뭔가 깨달았는지 입에 물고 있던 칫솔을 빼고 서둘러 가글을 한 뒤 여관으로 들어갔다. 물어볼 사람을 찾아 식당과 카운터로 향했지만 다들 어디론가 가서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에아의 잘못된 생각일 수도 있어 내일 아침에 다시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셰른과 갈렌이 있을 숙소로 향했다. 가는 길에 아이를 다그치는 듯 조용하지만 날카로운 목소리가 에아의 귀를 스쳤다.

“왜 그랬어, 아빠가 모르는 사람이랑 같지 있지 말랬지!”

“하지만 아저씨가…….”

“아저씨가 부탁했다 그래도 아빠한테 말 해야 된다고 말 했잖아.”

“잠깐, 그건 아이 잘못이 아니라 제 잘못이니 책망하지 마세요.”

혼내려는 듯 아이의 등쪽을 향해 손을 든 아이 부친의 모습에 에아가 헐레벌떡 뛰어가 손을 막았다. 에아는 그 짧은 순간 아이의 아버지의 얼굴을 살폈다. 팔을 막아 당황한 듯 흔들리는 눈, 흥분했는지 확장한 동공등이 흐릿하게 보였다. 에아는 잡았던 손을 풀어주며 정황을 설명했다.

“저희가 숙소에서 늦게 나온게 잘못이죠.”

“여관에서 일한다지만 아이에게 일 시킬 생각은 없습니다. 특히나 지금과 같은 시국엔…….”

“역시, 뭔가 있군요?”

“―손님께선 몰라도 되는 일입니다.”

“알면 좋겠습니다.”

에아는 품 속에서 고이 넣어 놨던 황실의 인장을 꺼냈다. 에아는 권위를 드러내는 걸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필요한 순간에서까지 꺼내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 무엇보다 확실한 신분 인증을 본 남자는 에아의 시선을 설설 피하며 팔짱을 꼈다. 에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황실의 명으로 움직이는 별의 사람입니다. 제국 그 어느 곳이라도 문제를 발견하면 해결하려고 노력하지요.”

“하지만…….”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망설이며 딱 한 단어 대답했음에도 에아는 대화를 잘랐다. 인장을 집어 넣은 에아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뒤 ‘그래도 모르는 사람은 조심하는 게 좋아.’ 라고 말하며 자리를 떴다. 한쪽 손에 든 양철 컵 속 칫솔이 딸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멋진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래서 친밀한 느낌이 더 들었는지 아이는 에아가 방에 들어갈 때까지 쭉 지켜봤다.

에아는 방 안에 들어서자 마자 짐 안에 있던 종이를 테이블에 앉아 꺼내 무어라 슥슥 적어냈다. 기나 긴 여행으로 인해 지쳐서 잠에 먼저 빠져들려던 갈렌과 셰른은 에아가 집중하는 모습을 보곤 어슬렁 어슬렁 그 맞은 편에 앉거나 서서 종이에 적은 걸 보고 있었다. 셰른은 까막눈인 갈렌을 배려하듯 종이에 적힌 내용을 작게 읊으며 에아에게 물었다.

“‘인구 구성에 이상정황이 보임.’이라니, 이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야. 여관 주인, 일하는 직원과 일대에 거주중인 영지민들밖에 보이지 않아. 여기는 무역과 상업으로 먹고 사는 도시라 사람들로 바글거려도 이상하지 않은데. 저녁에 대충 둘러봐서 그런 걸수도 있고.”

“그러게……. 네가 말하기 전까지는 몰랐는데 그래.”

“그리고 궁금한 건 하나 더 있어.”

끼익, 경첩이 움직이는 소리에 펜이 멈췄다. 에아는 닫힌 문 너머로 목소리가 넘어가지 않게 작게 읊조렸다. 그러며 갈렌이 보라는 듯 손을 들어 검지로 문을 가리켰다. 갈렌은 기척을 숨기며 살금살금 걸어가 문을 열었다. 문에 기대고 있던 어린 아이가 중심을 잃고 방 안으로 굴러들어왔다.

“우아악!”

“엿듣고 있었네?”

“그, 그! 죄송해요!”

듣든 말든 상관 없는 사과를 대충 던진 아이가 도망가려 하자 갈렌이 문 앞을 막았다. 아무리 어린이라 그래도 대화를 엿들었으니 허술하게 보낼 수는 없었다. 아이의 눈에는 한 덩치 하는 사람이 자신을 무섭게 막아서서 울음이 터져나오려 했다. 갈렌은 울먹거리는 아이와 에아를 번갈아 봤다. 먼저 나선 건 에아보단 셰른이다.

“우리 꼬마 친구는 방에 들어올 때 노크를 꼭 해야해요, 알았지?”

“그, 그. 죄송해요.”

“어디까지 들었니?”

“몰라요. 이, 입 다물고 있을게요.”

“아냐. 다른사람에게 다 말 해도 돼.”

셰른의 추궁에 입을 꾹 다물겠다고 맹세하는 아이. 에아는 자연스레 끼어들어 말했다. 셰른은 미소짓는 에아의 얼굴을 보곤 당황한 얼굴을 지우고 고개를 끄덕였다. 에아는 아이에게 말했다. 방금 전까지는 부드러운 톤이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하지만 서로 주고 받는 것이 있어야 해. 우리가 황실에서 왔다는 사실도 알고, 이 영지의 비밀을 캐려 한다는 것도 알았으니. 너도 그만한 사실을 알려줘야 할 거야.”

“지, 지금은 생각나는 게 없는 걸요. 자, 잘 모르겠어요.”

흔들리는 눈빛, 정면이 아닌 왼쪽 모서리 같은 곳으로 튀는 시야. 긴장했는지 잘게 떨리는 손, 주춤거리는 몸짓까지. 그 모든 모습을 눈에 담은 에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눈치 없는 사람이 봐도 숨기는게 가득하다는 모양새. 에아는 짐에서 종이에 사탕처럼 포장된 간식을 꺼내 아이에게 주며 말했다.

“신뢰의 표시야, 만일 할 말이 생각난다면 우리를 찾아 오렴. 우리는 내일부터 영지의 도심을 돌 생각이란다.”

아이는 아무런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제야 뒤에서 문을 막고 있던 갈렌이 몸을 비켜줬다. 아이는 소중한 보물처럼 양 손으로 꼭 쥐고 후다닥 방을 뛰쳐나갔다. 아이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을 즈음, 갈렌이 문을 꽉 닫고 셰른의 옆에 앉아 물어봤다.

“진짜 사탕이야?”

“사탕은 아니고 설탕절임. 여러 과일을 얇게 썬 다음에 달달한 시럽에 졸여서 건조시킨 거야.”

“그 귀한 걸 줄 정도로 저 아이를 귀히 여기는 건 아닐 테고, 무슨 생각이야?”

“사람이야 다 귀하지……. 다만 내가 믿는 건 그 명령이야.”

“뭔데?”

“너라면 쉽게 추궁 가능하지!”

추궁하는 셰른에게 에아는 짧고 위트있는 대답과 윙크를 함께 남기고 자리를 떴다. 셰른은 고민하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고, 옆에 있던 갈렌도 무슨 소린지 몰라 턱을 만지작거리며 고민하다 이내 알아챘는지 짧게 ‘아!’ 소리를 내며 깨달은 듯 잠을 청하려 침대 안으로 꾸물꾸물 들어가는 에아를 바라봤다.

밤이 깊고, 달이 뜨면 침대에 일찍이 들어갔던 그림자 하나가 불쑥 일어났다. 같이 있던 일행 둘은 깊게 잠에 빠진 건지 색색거리며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깨어 있던 사람은 작은 보따리 하나를 꺼낸 뒤 익숙한 손길로 장비를 챙겨 입고, 홀스터에 권총도 꼭 끼웠다. 경첩 소리도 나지 않게 살살 열어 여관 밖으로 나선 사람은 로브의 후드를 꾹 눌러썼다. 다만 달빛은 연한 회색의 머리카락을 가릴 수 없었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골목에 들어서자마자 에아는 곧장 보따리를 풀어 그 안에 들어가 있던 램프를 꺼내 들었다. 부싯돌로 불을 밝힌 뒤 천천히 어디론가로 향했다.

“멱을 감던 사람들이 이쪽 방향에서 왔으니까…….”

“뭐 해, 에아?”

에아의 비명소리는 큼지막한 손바닥이 막아줬다. 램프가 가진 빛으로 얼핏 보이는 연한 보라색 머리카락, 갈렌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몰래 나왔을 때, 주변을 제대로 살펴보지 않았던 거였다. 놀래킨 건 갈렌이었지만 검지를 들어 손가락으로 조용히 해달란 부탁도 갈렌이 해야했다. 검지를 올렸던 손을 내려 램프의 불을 제일 작게 조절한 갈렌이 에아의 귀에 간신히 들릴 정도로 작게 말했다.

“걸리는 게 있어서 그렇지? 아까 전에 말 하다 만 것도 있고.”

“하아. 맞아. 우물가에 가 보면 대충 알 수 있지 않나 싶어서 나와봤어.”

“우물가?”

“습기가 있는 땅엔 발자국이 잘 보일 테니까. 특히 지금처럼 안개가 끼는 시기에는 땅바닥에 발자국이 잘 보이지.”

“발자국은……. 아하.”

되물어보려던 갈렌은 그 생각이 에아가 떠올린 어떤 정답과 비슷하게 닿자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에아는 땅바닥을 향해 시선을 떨어뜨렸다. 제 발자국을 보는 모양새였다.

“사람들의 호구조사를 할 정도로 아주 명확하게 알아야 할 필요는 없지만, 대강 알아야 한다면 이 방법이 제일 빠르겠지.”

“그래서 이 밤에 나온 거야? 치안대가 나오면 어쩌려고.”

“그땐 황실 인장을 보여주면 되니까.”

“이번에는 아예 대놓고 제국에서 왔다고 말하려고?”

“응. 더 후회하지 않기로 했어.”

갈렌의 말에 에아는 걸음을 멈추고 대답했다. 밤벌레 소리가 그보다 더 컸던 것 같았지만 갈렌은 용케 그 목소리를 들었는지 묵묵히 에아의 옆에 서 램프를 뺏어들었다. 달라는 듯 툭툭 건드리는 손길이 있었지만 도리어 자신이 들어야 한다는 듯 꽉 쥔 손만 보여줬다. 발걸음은 다시 이어졌고, 갈렌이 먼저 운을 띄웠다.

“에녹의 일은 네 탓이 아니야. 위험하단 걸 알고 있었잖아.”

“구태여 잡입할 이유는 없었어. 내가 안일했던 거야.”

“네가 우리를 이끄는 대장과 같지만 그런 책임을 질 필요는 없어.”

갈렌은 남은 손을 들어 에아의 등을 토닥여줬다. 에아는 눈물 하나 없는 마른 눈으로 갈렌을 바라봤다. 달빛 아래, 램프의 빛 위. 그 어느 때보다 진실된 감정이 튀어나올 시간. 에아 마음 속으로 무심코 눌러놨던 말이 나오는 듯 쏟아져 나와 갈렌을 놀래켰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나를 잃어버릴 지도 몰라서.”

그 눈 아래의 모습이 어떤지, 갈렌의 눈으로 보이진 않았다. 다만 그 말을 하는 에아의 목소리가 심히 가라앉아 있었고, 밝은 회색의 머리카락이 빛나는 듯 보여서 어떤 말이든 허둥지둥 꺼내보였다.

“그럼 그 책임을 나와 셰른이 같이 지어 줄게. 우리는 한 팀이잖아.”

“갈렌.”

“한 팀이고, 같은 친구잖아. 힘들땐 의지가 되는 사람. 기쁠땐 더 기쁜 사람이 되는 게 좋은 사람이래. 에아. 네가 생각하기로 우리는 어때?”

“―좋은 친구들이지.”

먹먹한 목소리로 깊은 고민도 하지 않고 하는 말. 그럼에도 그 말에는 거짓 하나도 섞여있지 않았다. 갈렌은 에아의 등을 두어번 토닥거리곤 옆에 같이 서 움직여줬다. 머지 않은 곳에 우물가가 있는 것인지 습기와 냉기가 동시에 느껴졌다.

우물가에는 아무도 없었다. 빛이 옅은 깊은 밤에 우물가에 가봤자 발을 재수없게 헛디뎌 물가에 들어갈 일밖에 없었으니 그럴 만도. 에아는 갈렌이 들고 있던 램프의 밝기를 높여 발자국들을 살폈다. 그리고 그 일대의 있는 바닥을 훑다싶이 살폈다. 마지막으로 본인과 갈렌의 신발 밑창을 확인한 후, 흠. 짧은 비음을 냈다. 얌전히 옆에 서있던 갈렌은 램프의 밝기를 다시 낮추며 물었다.

“알아낸 게 있어?”

“성비도 안 맞아. 보통 우물가는 식수뿐만 아니라 수자원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곳이라 비교적 사람들이 모이는 편일 텐데. 작은 신발자국이 드물어. 여성은 물론 아이들도 몇은 안 나타나나?”

“일을 안 하는 건 아닐텐데. 물은 생존 수단이잖아.”

“응. 그러니까 뭔가 이상하단 거야. 그래서 여기가 종착점이었나…….”

팔짱을 끼고 고민하던 에아를 보던 갈렌이 뭔가 떠올랐다는 듯 입을 벌리고 소리를 냈다. 생각보다 큰 소리에 놀란 에아가 손을 뻗어 갈렌의 입을 막았다. 갈렌은 그제야 자신이 목소리를 크게 냈다는 걸 알고 얌전히 입을 다물고 에아의 인도에 따라 우물가를 벗어났다. 풀숲에 들어서고 나서야 갈렌의 대화를 텄다.

“그래서 궁금하다 한 거였구나.”

“응. 이거 생각보다 우리가 큰 일에 엮인 걸수도 있어.”

“그러고보니, 양피지에는 분명 마도시라 그랬지. 근데 황실에서 안내해 준 종착점은 여기, 상업도시야. 그게 제일 걸린거지?”

아까 전부터 가지고 있던 의문. 셰른은 알아차렸는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갈렌 혼자서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었다. 에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갖고 있었던 커다란 의문. 왜 이 곳이 종착점인가? 갈렌은 자신이 기억하는 정보를 그대로 입 밖으로 옮겨냈다.

“마법은 북쪽이 유명하지. 셰른도 그 쪽에서 수련하다가 돌아왔으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서쪽에 대해 물어봐도 전부 다 무역도시에 대한 정보만 말 해줬고. 실제로도 여기는 저쪽 강가로만 가도 작은 무역선이 왕래하는 무역도시야.”

“황실에서 착오가 있던 거 아닐까?”

“모르겠어, 하지만 아귀가 안 맞아도 어떻게든 해결 했으니까 잘 되지 않을까? 일단 쉬자.”

뜬 눈으로 밤을 샌 덕에 빡빡하게 아픈 눈을 비빈 에아가 기지개를 쭉 펴고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에아가 마지막으로 제시한 의문에 대한 답은 여전히 알 길이 없는 채로. 다음날 아침이 밝았고 그들은 새로운 하루와 함께 새로운 의문거리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의 모습을 한 나무 동상이 광장 한 가운데에 하룻밤만에 생겨났단 소식이 아침부터 도시를 달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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