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용된 구원

오용된 구원

Signal of beyond redemption 2

The City Series by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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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커튼 아래로 햇볕이 감은 눈을 때리는 감각에 에아는 전날 시계의 태엽을 감아놓지 않았단 사실을 깨달으며 벌떡 일어났다. 창살 사이로 들어오는 빛을 사특한 기운처럼 느껴진 에아는 서둘러 의자에 걸어뒀던 가운을 걸쳐 입고 잰걸음으로 뛰어내려갔다.

곧 있으면 주문했던 제품들이 올 예정이었고, 에아는 더 이상 지체하면 안 된다고 계단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뛰어내리다 발을 헛디뎠다. 비명소리가 들리자마자 아무도 없을 아래층에서 덩치가 큰 덩어리 하나가 뛰어나와 두툼한 팔로 넘어지려던 자를 잡았다.

“에아! 괜찮아?”

“어, 어? 갈렌. 언제 왔어?”

“아침에 왔어. 재고는 다 옮겼고, 목록 확인은 셰른이 하고 있어.”

문은 줬던 열쇠로 열었어. 어지러워하는 에아를 바르게 세워주곤 몸을 살펴봤다. 실내복 위에 대충 오래되어 소매가 해진 가디건을 걸친 모습. 자다 일어나 헝클어진 머리카락까지. 갈렌은 에아의 어깨를 붙들고 그 몸을 돌려 계단으로 올려보냈다. 내려가서 재고의 상황을 확인하려던 에아가 물었다.

“나 재고 확인해야 해.”

“에밀리오 상단주와 그 직원들이 있으니 겉치레정도는 해. 셰른이랑 내가 대응 해줄게.”

갈렌의 말에 앓는 소리가 짧게 흐르더니 에아는 제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얌전히 위로 올라갔다. 갈렌은 얌전히 위층으로 올라가는 에아를 보며 재고를 확인하는 셰른의 뒤에 섰다. 그의 맞은 편에는 옅은 색의 귀공자와 그의 사용인들이 서 있었다. 갈렌은 셰른의 귀에 대고 에아가 일어났다고 작게 소근거렸다.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애쉬는 지팡이를 짚고 꼿꼿이 서 둘을 향해 물었다.

“에아는 일어났소?”

“네, 곧 나올 예정입니다. 어디 아픈 건 아니니 괘념치 마세요.”

“그렇다면 다행이다만…….”

유난히 망설임 가득한 목소리. 그 목소리에 셰른은 눈썹을 씰룩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씰룩이는 입술을 가리려 손가락으로 가렸지만 그 모든 동작이 애쉬에겐 어떻게 읽힐진 당연한 처사였다. 애쉬는 지팡이를 한번 들어 땅을 두드리며 항의하듯 물어보려 입을 열었다. 계단을 뛰어내리는 커다란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그랬겠지. 물에 한 번 빠르게 담갔다 뺀 듯 얼굴에 물기가 가득한 사람이 허둥지둥 나오며 둘의 앞에 섰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시계 태엽 감는 걸 까먹어서요.”

“제가 드린 시계를 잘 쓰고 계셨군요.”

“일단 들어오시죠. 서류에 사인도 제가 할게요.”

에아는 셰른과 갈렌의 몸을 밀어 서둘러 가게 안으로 들여보냈다. 손을 들어 어서 들어오라는 듯 흔드는 에아를 보던 애쉬는 하려던 말도 어느새 놓아버리고 따라 들어갔다. 입고된 재고의 리스트와 들어온 물품의 수량을 정확히 확인한 에아는 곧바로 수령증에 사인했다.

“실물 확인은 안 할거야?”

“조금 있다가 확인하면 되지. 너희들이 뭐 실수하진 않잖아.”

익숙하게 티격태격 하면서 장난치는 둘의 모습을 보던 애쉬는 수령증을 받고선 그들을 바라봤다. 갈렌이 왜 그러냐는 듯 나서 물어보려 했지만 아쉽게도 애쉬는 그런 기회를 주지 않는 듯 수령증을 챙겨 뒤돌았다. 떠나려는 애쉬의 뒷모습을 본 에아는 가냐며 크게 말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다음에 또 뵐게요.”

“아, 음. 좋은 아침 되시고요.”

아쉬운 듯 머뭇거리며 움직이는 구두굽을 본 에아는 애써 모르는 체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문이 닫히면 에아는 힘이 탁 풀려선 바람 빠진 풍선마냥 바닥으로 푹 꺼져버렸다. 둘은 익숙하게 에아의 양쪽 팔을 잡고 들어올려 의자에 앉혔다. 문이 닫혀있는 걸 확인한 셰른이 먼저 에아를 붙들고 물었다.

“한참 불러도 안 나와서 죽은 줄 알았다. 무슨 일 있었어?”

“딱히, 진짜 태엽 감는 걸 까먹었어. 아, 스튜 안 상했나 봐야해.”

“걱정 마. 아침에 들어오면서 먹어보니까 괜찮아서 끓여놨어. 그나저나 괜찮아?”

“응. 그럼 같이 먹자.”

힘이 돌아온 건지 에아가 일어나자 친구들도 따라 일어나 에아의 일손을 도와줬다. 따끈한 스튜와 맛있는 채소들로 사이드를 채운 식사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하고 있었다. 셰른은 스푼으로 국을 휘저으며 물어본다. 아닌 척 하면서 관심 가득한 모습이었다.

“에밀리오 상단주를 거절한 건 맞지?”

“리플리에 들어올 때부터 거절했어.”

“나는 에아 네가 승낙해서 에밀리오 가문에 들어가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어.”

“뭔 소리야.”

“그러면 제국의 별의 부름도 거절할 수 있으니까.”

일순의 침묵. 갈렌의 말이 일리가 있었는지 다들 질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도 아닌 건 아닌지 셰른은 눈썹을 으쓱거리며 스푼을 들어 에아와 갈렌을 가리켰다.

“에밀리오 가문 내로 들어가면 좋지만……. 에밀리오 상단주가 에아를 사랑한다는 것과 별개로 가문 내의 사람들이 에아를 잘 봐줄지도 모르고, 에밀리오 가문의 작위를 무시하고 별이 에아를 부를 수도 있지.”

“그래도 눈치는 볼 생각은 하겠지.”

“그리고 우리는 에아가 필요해, 갖은 위험에서 우리를 구한 게 누군데!”

“에이……. 그 정도는 아니야.”

유독 자신이 없는 소리로 에아는 물을 마셨다. 나오려던 말도 들어가려는 모습에 갈렌과 셰른이 번뜩 목소리를 높였다. 일장 연설까진 아니었지만, 그들은 일전에 있었던 사건을 쭉 늘어놓기 시작했다.

“시찰차 간 마을에서 저주받아 죽어가던 아이를 구한 건 누구?”

“그건 그냥 감기증세가 심해서 해열제랑 거담제랑 해서 준 거 뿐이니까…….”

“모두가 저주받았다고 한 땅에서 홀로 들어가 제국의 보물을 구해다 준 건?”

“그거도 그냥 소독이랑 청결 유지한 거 뿐이야.”

진짜 별 거 아니라니까. 에아가 뜨거운 물이 든 주전자와 찻잔을 가져왔다. 싱그러운 어린 잎향이 그들의 코를 두드리고, 옅은 연두색 물이 주전자에서 나올 즈음에, 에아는 그와 정 반대되게 나직히 말을 이었다.

“난 너희처럼 마법에 통달했거나, 괴력을 갖고 있지 않아. 하지만…….”

잔 곁으로 옅은 열기가 그들의 곁에 붙었다. 에아는 붉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는 잔에 든 차를 한 입 마셨다. 이런, 너무 우린 건지 떫은 맛이 올라와 미간을 좁히게 만들었지만 말은 그래도 정상적으로 나올 수 있었다.

“내가 너희들을 도와줄 수 있다면 언제든 할 수 있, 우아악!”

“너를 너무 낮춰 생각하는 거 아냐?”

옆에서 불쑥 튀어나온 양 손이 에아의 양 볼을 잡고 죽 늘려버렸다. 셰른은 이럴 때마다 갑갑해 죽겠다는 듯 에아를 다그치곤 했다. 제국의 별이 보낸 부담스러운 요청도 받아들일 수 있던 이유 중 삼분의 일은 에아의 몫이었다. 그럼에도 다 체념한 듯 기운이 없는 이 친구는 자길 그냥 평범한 소시민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셰른은 또 한 소리 하려고 입을 열고, 그런 잔소리를 듣기 싫다는 듯 에아는 귀를 막았으며 갈렌이 막으려고 벌떡 일어났을 때, 약국의 나무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주인장 있는가?”

“이거 좀 놔 주고. 여기 있습니다.”

“에아, 자네 앞으로 편지가 도착했다네. 삯은 받았으니 여기 위에 두고 가겠네.”

“감사합니다. 차라도 한 잔 하시고 가시겠어요?”

나이가 지긋한 노인은 카운터 위에 봉인된 양피지 두루마리를 올려놓곤 한사코 대접을 거절하곤 사라졌다. 인장으로 꽉 묶어둔 양피지 두루마리는 주변에 반짝이는 파티클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셰른의 양 손을 잡아 뗀 에아는 성큼성큼 걸어가 양피지의 봉인을 풀었다.

양피지의 봉인이 풀리자 금빛 연기가 나오며 종이가 그대로 공중에 둥둥 떴다. 이런 효과가 있는 걸 써 가면서까지 셋의 이목을 끌 사람이라곤 딱 한 사람 밖에 없었으므로, 에아는 질렸다는 듯 눈을 게슴츠레 떴고 나머지 둘은 에아의 옆에 서서 흥미롭게 양피지를 바라봤다. 셰른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고, 에아는 눈을 질끈 감고 있어, 갈렌은 이미 다 읽었을 에아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이거 뭐라 적힌거야?”

“앞 뒤는 좀 자르고. ―제국에 헌신하는 구원자들이여. 대륙 서쪽에 있는 번성한 마도시에 진귀한 보물이 그대를 기다린다. 제국의 평안이 그대들의 손에 있나니, 보물을 봉헌하여 대륙의 안녕에 기여하라.”

“서쪽……. 마도시?”

“셰른, 뭐 아는 거 있어?”

“아니. 서쪽은 마법보단 상업의 도시고, 그쪽으로 아는 사람도 얼마 없어.”

에아는 양피지를 풀며 반으로 갈라진 인장을 바라봤다. 그 인장이 붙어있던 줄의 끝을 따라 올라가면 양피지의 끝에 반짝이는 은빛 별 모양이 박혀 있었다. 제국의 별, 에아는 한숨을 쉬며 양피지를 확 잡아 채 다시 묶었다. 난롯가에 양피지를 갖다 던진 에아는 부지깽이로 한 번 섞어준 뒤, 셰른과 갈렌을 바라봤다. 둘은 언제 출발해야하나,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약국 연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문 닫아야겠네.”

“안 간다는 선택지는 없어?”

“별님이 우리가 필요하다 그러잖아. 그럼 가야지, 제국의 평화라잖아.”

그럼 우리가 가야지! 셰른은 이미 갈 준비가 만반이었고, 갈렌도 그의 말에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더 뭔가 들을 의지는 없어 보여 에아는 고개를 설렁설렁 끄덕이며 먹는둥 마는둥 했던 식사와 차를 치웠다. 도와주겠다며 붙은 둘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오늘 약국의 손님은 별로 없었다. 월경이 다가와 진통제를 챙기려 온 사람 하나와 앞도 안보고 달리다가 넘어져 소독을 요청하러 온 아이 하나를 빼곤 별로 없었다. 다른 일이 있었다면 떠났을 이웃이며 친구, 동료인 셰른과 갈렌도 에아의 일손을 도와 평화로운 하루가 지나갔다.

“예전이었다면 이런 평화는 기대도 못했는데.”

“하하, 에아가 고생하긴 했지.”

하하……. 에아는 힘이 빠진 듯 둘을 바라봤다. 리플리 시의 청결과 그에 따른 전염병 예방은 촌동네에서 올라온 한 뜨내기 약사 하나덕에 이루어졌다. 그 약사의 입을 빌려서 말하자면, ‘의식에 가까울 정도로 청결에 집착하는 행위’덕에 청결에 관심 가지는 사람이 많았고, 약사의 조언대로 소독과 청결에 집중했더니 환자의 건강이 호전되고 질병에 걸리는 주기가 줄어든다는 걸 경험한 시민들도 하나 둘 따라했다. 그리고 그 약사는 지금 아이의 무릎을 소독하고 있었다.

“넘어져도 안 울고 씩씩하네.”

“따가워요.”

“참으면 간식 줄게.”

입술을 앙 다문 아이는 꿋꿋하게 소독을 받았고, 에아는 사탕을 줄 거라 기대하는 아이의 손에 작고 검은 젤리같은 구슬 하나를 건네줬다. 감초로 만들어진 사탕. 먹으면 짠 맛과 함께 오묘한 감초의 맛이 도는, 달디 단 사탕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 간식의 정체가 무엇인지 아는 아이는 배신당했다는 듯 고개를 들어 에아를 바라봤지만 에아는 생글생글 웃을 뿐이었다.

“약사선생님 너무해!”

“하하……. 아이가 기침이나 가래가 있을 때 먹여 주면 좋아질 거예요. 안 먹는다 그러면 보관해뒀다가 비상시에 쓰세요.”

보호자는 고개를 끄덕이곤 아이를 데리고 사라졌다. 해도 져 가겠다. 에아는 슬슬 가게에서 눈치를 보던 셰른과 갈렌을 불렀다. 할 일이 없을 적이면 제 친구들은 에아의 가게에 와 자발적으로 여러 잡일을 해 주곤 했다. 장작을 패 주거나, 진열된 제품을 보기 좋게 정렬해준다거나. 혼자가 된 주인의 손이 되어준 것도 몇 달 되지 않았다.

“그럼 우리 언제 갈 거야, 다음 주?”

“지금 당장 가기엔 준비가 덜 됐으니 기다려줘. 셰른이 가는 인원이랑 이름 적어서 수락서 보내고. 나는 탄이 부족하니까 그걸 만들어 달라고 주조소에 의뢰도 해야 하고, 가게 몇 달 대신 운영해 줄 사람도 또 구해야 하고…….”

“이번에는 몇 개 정도 들 거 같아?”

“음…….”

에아는 눈을 감고 고민하는 듯 고개를 좌우로 갸웃거리더니 갈렌에게 물었다.

“1에서 100까지의 수에서 하나를 골라봐. 지금 생각나는 걸로.”

“또 저런다.”

“어, 나? 그럼 48로 할까?”

“그럼 15발.”

“아니, 네 맘대로 할 거면 왜 물어본 거람.”

도대체 알 수 없는 에아의 질문에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마흔 여덟발의 탄을 가져갈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니었나보다. 에아는 부스스 웃으며 셰른을 바라봤다.

“너였으면 80이라 했겠지?”

“어우 무서워라. 내 친구는 사람의 마음도 읽나 봐.”

“그래, 나는 사람의 마음을 읽는 공포의 마법사다. 어쩔래?”

농담이라는 듯 웃으며 양 손을 들어 무서운 괴물인 척 한 에아가 킬킬 웃자 셰른과 갈렌도 따라 웃었다. 농담도 잘한다고 웃는 소리가 가게 너머에서까지 들릴 지경이었다. 깊은 밤이 다가오자 두 친구는 자신들의 보금자리로 가겠다며 손을 흔들며 나갔다. 에아는 문을 굳게 잠그곤 창 밖으로 빛이 새어나가지 못하게 막았다.

곧게 뻗은 손가락이 창고의 문을 연 에아는 갈렌이 쌓아둔 짐을 구석구석 살폈다. 약재 사이에 격리된 듯 동떨어진 상자. 양손에 찰 정도 크기의 목재 상자를 들었다.

“발주 시기를 앞당겨야겠네.”

에아는 한숨을 쉬며 카운터 위에 앉아 상자를 열었다. 매캐한 연기를 품기도 하고, 불을 이끄는 향이 먼저 느껴졌다. 연기를 몰고 다닐 법한 흑색의 화약. 에아는 탄피와 탄두, 그리고 그것을 결합하는 걸 도와줄만한 도구들을 꺼냈다. 오늘의 목표는 이 화약의 절반 정도를 쓰는 거일 테다.

에아는 온갖 미사여구로 장식됐던 양피지가 끝까지 아직도 불타오르고 있다고 생각하며 화로를 바라봤다. 제국을 위해 일한다는 의무와 기대에 가득찬 눈은 아니었다. 이런 일에는 질렸는 지 초점 잃은 눈으로 불티를 응시하고만 있었다. 문득 에아는 셰른에게 한 농담을 떠올렸다.

“마법사라니, 그냥 읽기 쉬워서인데…….”

붉은 눈은 불티를 따라 움직였다. 정확히는 불티가 움직일 장소를 따라 움직였다. 에아는 촛불의 일렁거림, 불티가 떨어지는 방향, 별똥별이 떨어질 때를 미리 바라보는 걸 자주 하곤 했다. 흔히 예측할 수 없는, 알기 힘든 것들을 이 약사는 아무렇지 않게 알아내곤 했다.

예언자나 마법사, 같은 존재는 아니었다. 명확하고 확실하게 벌어질 미래의 장면을 내다보는 마법과도 같은 행위는 한 적도 없었고, 커 가면서 자연스레 인지한 쪽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것은, 에아는 테이블 위에 누워 타오르는 불티를 바라봤다.

“‘완벽한 무작위는 없다’…….”

그 말을 하고 에아는 눈을 잠깐 감았다. 이를테면 학창 시절, 쉬는 시간에 책상에 엎드려 잠깐 쉰 것 처럼. 그런 생각을 했을 터였다. 적어도 아침을 알리는 새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는 그랬을 터였다.

새벽의 습기와 온기를 잡아먹는 서늘함이 등을 타고 올라왔을 때에야 에아는 감겨있던 눈을 번뜩 뜨고 벌떡 일어났다. 엎드려 잔 턱에 온 몸이 뻐근한 건 당연하고, 간밤에 어질러놓은 탄환 제조 세트가 보였다. 에아는 서둘러 일어나 카운터 위의 물품들을 착착 정리하고 씻기 위해 집으로 뛰어올라갔다.

약사는 물기 가득한 머리카락을 탈탈 털었고, 뻐근한 몸을 이끌어 가게 밖으로 나왔다. 나무로 된 임시 팻말로 개인 사정으로 오늘은 쉰다는 안내를 문에 달아준 약사는 폐 속까지 아침공기를 빨아들였다. 안개로 가득한 리플리 시, 서리가 내리진 않았지만 쌀쌀한 날씨가 만들어낸 찬 공기가 날카롭게 가슴을 찔러냈다.

에아는 간략히 적어둔 오늘 할 일 목록을 꺼냈다. 이동하는 기간에 먹을 보존식 구하기, 몇 달 대신 일을 해 주거나 가게를 봐 줄 사람을 구하기. 시를 잠시 떠나게 됐다고 주변 이웃에게 말하기. 등등이었다. 일정은 간단하지만 시간이 들겠군. 아침 일찍 시장을 열었을 수도 있으니 상점가 안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다만 짙게 깔린 안개가 눈 앞의 사람을 알아보기 힘들게 했고, 이 때문에 예끼치 못한 곳에서 튀어나온 사람과 충돌하는 사건을 만들어냈다.

“죄송합니다. 안개 때문에 앞이 안 보여서요.”

“괜찮……. 에아?”

“애쉬 경?”

모르는 사람과 부딪혀 뒤로 엎어진 에아는 엉덩이를 툴툴 털며 일어났다. 속으로는 분명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운수가 더럽다고 중얼거렸을 에아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안개 속에 있어도 빛날 법한 남자가 에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애쉬는 예끼치 못한 곳에서 만나 반가운지 맑게 미소를 지은 채로 물어봤다.

“어디 가시나봐요?”

“아. 네, 네. 일이 생겨서 잠깐 시장을 보러 왔어요. 애쉬 경은 괜찮으십니까?”

“그럼요. 음, 그러고 보니 시간이 남았는데. 같이 가실까요?”

“안 그러셔도……. 아. 말씀 드리려 했는데 마침 계셔서 다행이네요.”

“음, 저한테 부탁할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언제가 될 지는 잘 모르겠는데, 친구들과 함께 업무를 처리하러 서쪽으로 나갔다 오게 됐어요.”

“아. 그쪽엔 귀한 물건들이 자주 들어오곤 하죠.”

상단주인 애쉬는 잘 안다는 듯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연스레 에아의 보폭을 맞춰 걸으며 서쪽의 교역도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줬다. 두 개의 큰 강이 만나는 도시, 물이 흐르는 곳에는 반드시 재화와 물건이 흐르는 법이며. 내륙임에도 불구하고 교역선이 왔다갔다 할 수 있어, 바다를 건너온 상인들이 내륙인 수도에 도착하기 전 한 번 정도는 숨을 돌리며 머물다 떠나는 도시라고 설명했다.

“다른 대륙의 향신료와 귀중품이 오고가는 멋진 도시지요. 한 번 들러보는 것도 좋을 겁니다.”

“생각은 해 볼게요.”

“또 그 별이라는 분의 부탁이시죠?”

“네. 그래서 몇 달동안 제 가게를 봐주실 분을 구하고 있습니다. 약을 볼 줄 아는 약사면 좋겠지만 구하지 못한다면 상비약 정도는 구분 가능하신 분을 두는 것도 생각하고 있어요.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럼요.”

약사의 부탁이 어렵지도 않다는 듯 애쉬는 고개를 끄덕였다. 본격적으로 시장을 구경하려니 해가 솟아올라 안개가 물러간다. 여행할 때 먹기 좋은 간편식을 찾던 에아는 잘 아는 가게에 들어가 여러가지 식재료를 달라며 부탁했다. 가게의 주인은 에아가 주문한 물건을 능숙히 챙겨줬다.

“이건 내일이나 모레 오는 도매상에게서 구해줄 수 있네, 달아놓을까?”

“선수금은 얼마인가요?”

“아냐, 요즘 쪼들리진 않거든. 에아는 우리 단골이니까 가져갈 때 돈 줘도 돼.”

“그러고 보니 한껏 펴신 얼굴이네요. 좋아보이세요.”

“그럼, 하해와도 같은 은혜가 있어 풍족하거든.”

에아는 주인장의 말에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끄덕였다. 납득하는 얼굴로 보였지만 동공의 초점은 다른 데에 맞춰져 앞으로 들릴 이야기를 흘려 들을 준비를 했다.

“태자님께서 하루가 머다 않고 국민들의 평안을 위해 신께 기도를 한다지 않는가, 그분이 기도할 때 쓰시는 것과 똑같은 성물을 가지고 있었더니 최근엔 적자보는 날이 줄어든 거 같아.”

“좋은 일이네요.”

“자네도 하나 가져갈 텐가?”

그러면서 검지를 들어 보였다. 손가락의 끝에는 나무로 된 구슬을 꿴 고리가 벽에 걸려 있었다. 그 끝에는 원 안에 내접하는 팔각별이 문양의 상징물이 달려 있었다. 에아는 경청하는 척을 몇 분 해준 뒤, 물건을 받아들고 가게를 나왔다. 가게의 주인이 제 목소리를 듣지 못할 거리에 있을 거라 확신한 뒤에야 피로가 담긴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된다는 듯 바라보는 애쉬에게 에아는 선제로 쳐냈다.

“카운터에서 엎드려 잤더니 피곤해서 그래요.”

“그럼―.”

“오늘 일 못할 정도는 아니에요! 걱정 마세요. 제가 알아서 잘 합니다.”

에아는 당장에 할 일을 대신 해주려는 기세의 애쉬를 서둘러 말렸다. 이른 시간에 상단주가 시장에 있던 건 아마 업무의 연장일 테니 할 일 끝난 에아는 그와 떨어져야겠단 생각을 하듯 뒤로 한 발짝 멀어졌다. 멀어지려는 에아를 막을 생각은 없지만 뭔가 생각난 듯 애쉬는 잠깐 기다려 달라는 듯 그를 불렀다.

“줄 게 있어요. 사실 어제 만나면 주려고 했는데. 깜빡했더니.”

“예?”

“집에 가서 열어보세요.”

재킷 안 주머니에서 천으로 포장된 선물 하나가 나왔다. 고급스러운 포장은 아니었지만 막 대한 건 아니었는지 겉에 포장된 천은 얼룩 하나 없었다. 평소의 애쉬 에밀리오라면 분명 고급 포장지에 싸인 휘황찬란한 보물을 주겠다고 권하고 에아가 한사코 거절하는 그림이 벌어졌겠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귀공자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멋쩍게 웃었다.

“어 음. 사람을 구하면 연락 드리겠습니다.”

어색하게 웃고는 성급히 사라지는 모양새를 뒤쫓던 에아는 그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자기가 일이 남아있었다는 걸 깨닫고 서둘러 움직였다.

몇 달 자리를 비울 예정이란 말과 함께 이웃에게 자그마한 선물을 나눠준 에아는 잔뜩 지친 얼굴을 하고 가게로 돌아왔다. 카운터 위에 엎어진 에아는 생각했다.

“셰른이 셋이 움직일 거라 편지를 쓸 테고, 써놓은 글들은 창고 안에 이중잠금으로 막아두면 되고.”

오늘은 체력이 없어서 안 되겠다. 깨지도 않는 잠을 깨기 위해 기지개를 펴던 에아는 자신의 옷에 있던 어떤 물건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애쉬에게 어떤 걸 선물 받았단 걸 상기해 낸 그는 바닥에 떨어진 선물의 먼지를 떨어낸 뒤에 콧노래를 부르며 포장을 풀었다. 소박한 선물 정도는 받을 수 있지. 금방이라도 웃음을 지을 것 같았던 약사의 얼굴이 굳어진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콧노래가 멈춘 건 우연이 아니었다. 원의 안에 내접하는 팔각별 문양, 지나가면서 대충 봐도 종교의 상징 문양이 새겨진 장신구를 본 에아는 벌떡 일어나 차갑게 식어있던 화로에 불을 붙이고 장신구를 던졌다. 눈을 질끈 감고 신경질적으로 앓는 소리를 내던 약사는 여기 사는 이들은 모를 비속어 몇 마디를 하곤 위 층으로, 집으로 향했다.

“사이비가 어디까지 쫓아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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