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용된 구원

오용된 구원

Signal of beyond redemption 4

The City Series by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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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아가 나선 건 오후 늦게였다.

새벽까지 일어나서 움직였고, 해가 뜰 때까지 생각을 정리하느라고 깨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낮에는 별 일이 없을 거라 생각하고 갈렌과 셰른에게 이변이 있을 시 깨워달란 말을 하고 나서 그대로 침대 속으로 쑥 들어갔다. 그리고 그 직후, 끼니를 챙기러 간 식당에서 웅성거리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둘은 에아의 약속을 지켜주려 했지만 식사 후 간 에아는 그 누가 깨워도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깊게 잠든 상황이었다. 과격하게 깨울 수도 있었지만 셰른과 갈렌은 아무런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숙소를 뒤로하고 나왔다.

“우리가 자세하게 적어서 보여주면 되겠지?”

“종이랑 연필은 챙겼어?”

“앗, 그럼 외워야겠네.”

“에아처럼 심문 할 수 있어?”

음, 셰른은 눈을 감고 잠깐 고민하듯 고개를 좌우로 기웃거리다 끄덕였다. 에아가 하던 일을 어깨 너머로 봤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심문이나 조사 정도는 어렵지 않다고 생각한 얼굴이었다. 갈렌은 나직히 웃으면서 셰른의 뒤를 따랐다.

간과한 점이 있다면, 셰른과 갈렌은 에아와 달리 심문을 유도할만한 행동이나 심리적인 압박에 재능이 없었다. 협박도 미숙한지라 원하는 정보는 얻지 못하고 털레털레 빈손으로 곤히 잠든 에아 앞에 서기만 했고. 에아는 해가 중천이 넘어서야 일어났는데, 일어나자 마자 본 것은 울상인 셰른과 친구를 달래려는 갈렌이었다.

“에아!”

“무슨 일이 있으면 깨워달라 그랬잖아.”

“흔들었는데도 안 일어났어.”

에아는 앓는 소리를 내더니 부스스 침대에서 일어나 오전에 이 영지에서 일어났던 사건에 대해 자세히 듣기 시작했다. 갈렌과 셰른의 말은 어느정도 일치했지만 서로의 주관적인 감상이 충돌됐고, 이가 중요치 않았던 에아는 노트에 대충 적고는 종합했다.

“광장에 여성 모습의 상이 갑자기 생겼다, 이거지?”

“응. 간밤에 누가 거기다가 둔 것처럼 서 있었어. 마을 사람들도 이게 뭔지 알 수 없어서 혼란스러운 얼굴이었고.”

“어떤 조각가가 만들거나 뒀을 법한 사람이나 그런 건 물어봤어?”

“아―. 물어봤는데 아는 사람이 없더라고, 다들 우리가 물어보려니까 도망가기 바빴어.”

에아는 셰른의 말을 듣고선 양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에아가 저런 행동을 취하는 건 드물었기에 둘은 본능적으로 서로 뭔가 잘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셰른이 에아에게 먼저 다가가 물었다.

“에아, 우리가 뭐 잘못한 거지?”

“아냐. 잘 한 거야. 누구 잡아다가 협박한 건 아니지?”

“응, 우리 둘 다 그런거 잘 못하니까.”

종합이 끝났는지 에아는 벌떡 일어났다. 일어난 지 얼마 안 돼 기력도 별로 없는 몸으로 휘청휘청거리며 외투를 챙겨입은 에아는 두 친구를 향해 손을 뻗어 같이 가자고 설득했다. 기 죽은 친구들 기도 세워주고, 시간이 지났지만 얻을 수 있는 정보도 최대한 얻어보겠단 심산이다.

호기롭게 나간 광장에는 여전히 사람이 많았다. 방랑자의 저주라니, 하루빨리 그 이름 없는 사람을 잡아야 한다드니 하는 그런 웅성임들 사이에는 떨리는 음색이 들려왔다. 에아는 두 친구의 후드와 자신의 후드를 깊게 눌러썼다.

목상은 전형적인 평민 아낙의 모습이었다. 양 팔로 몸을 막고 버티어 선 자세. 가까이 다가간 에아는 자리에 앉아 치마의 아래 부분을 만져봤다. 주름 하나하나 섬세하게 파여진 목상이고,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들과 비슷한 크기를 가졌다. 만약에 나무가 금속처럼 불로 녹일 수 있다면, 천에 하나하나 주물을 떠서 넣은 듯 실감나 보였다.

“뭔가 있어?”

“아직까진 추측이지만 몇 개 있긴 해. 사람들이 많아서 여기서 말 하기엔 좀 그렇다.”

“잘 만든 조각상 아냐?”

에아는 구겨지듯 앉아있던 몸을 신음소리를 내며 폈다. 메모지에 이것저것 슥슥 적은 에아는 두 장에 메모지를 찢어 하나는 셰른에게, 하나는 갈렌에게 건네줬다. 여분으로 남는 펜은 글을 쓸 수 있는 셰른에게 넘기고. 그들이 들을 정도로만 작게 속삭였다.

“셰른은 어제 헤어진 상단 지부가 있으면 가 봐, 아는 사람이 있다면 더 좋아.”

“그래, 알았어. 갈렌은?”

“종이를 여관에 가져가.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에게 종이를 읽을 수 있냐고 물어보고. 나는 영주의 성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각자 일 다 하면 만나기로 해.”

목상을 수상하게 살펴보는 에아의 앞에 시기 좋게 경비원이 다가갔다. 에아는 둘을 서둘러 일행이 아닌 척 밀어버리고 경비원에게 황실의 인장을 보여주고는 그의 안내를 따라 갈렌과 셰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웅성웅성거리는 사람들에게서 멀어진 둘은 어리둥절해 있을 시간 없이 고개 몇 번의 끄덕임으로 소통을 마무리 한 뒤에 흩어졌다.

그 자리에서 곧바로 끌려나온 에아는 널찍하고 호화로운 성 내부를 감흥없이 둘러보고 있었다. 수입산이 확실한 비단천이 커튼으로 걸려 있고, 쌀쌀한 밖과 달리 땔감을 많이 때는지 입구에서부터 훈기가 에아를 압박하듯 끼쳐왔다. 부담이 느껴질 정도의 환대여서, 에아는 미간을 꽉 구긴다. 품에 있던 수첩과 펜을 꺼내 무어라 끄적였고, 이를 살펴보던 경비원이 긴장에 찬 얼굴로 말을 걸었다.

“따뜻하지 않습니까? 별의 사자쯤 되시는 분에겐 별 거 아닐 수도 있겠지만…….”

“성대한 환대에 몸둘 바를 모르겠군요.”

그런 거 치고 에아의 얼굴은 변함이 없었지만. 곧이어 성주처럼 보이는 사람이 허둥지둥 달려왔다. 에아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큰 신장, 살집이 도톰히 있는 중, 장년의 모습. 당황한 인상은 아니었지만 예상치 못한 귀빈을 성대하게 받아드리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메모지에 뭔가 더 적은 에아는 펜을 품 안에 도로 집어 넣었다.

“별의 사자를 뵙니다. 영주이며 제국의 신실한…….”

“만나서 반갑습니다. 리플리에서 온 별의 사절입니다.”

순간 짧게 정적이 흘렀지만 영주는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웃어보이며 사용인들에게 에아를 응접실로 안내하라 일러뒀다. 잘 차려입은 사용인들이 에아에게 다가올 즈음, 에아는 고개를 돌려 등을 돌린 영주에게 물었다.

“오늘 광장에 나온 ‘조각상’이 아름답더군요.”

“―아! 그렇지요. 우리 사절님께서는 작품을 보는 눈도 있으시군요.”

“혹여 다른 작품들도 소지하고 계신지요?”

“네, 네.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성함이…….”

사용인의 안내를 물린 영주가 에아를 바라봤다. 그에 따라 다른 사용인들도 멈춰서 에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수많은 시선이 약사를 향해 쏟아졌지만 청중의 시선을 받는 건 익숙한 일인지 에아는 별 동요 없이 말을 이었다.

“■■■■■ ‘에아’ 보이드입니다. 편히 보이드 경이라 부르셔도 됩니다만, 동료들도 성이 보이드인지라 편히 추천드리지 못하겠군요.”

“에아 경이시군요. 다른 일행 분들은 어디 계신가요?”

“여관에 있을 겁니다. 여기까지 오는 건 암행과 다름 없었으니.”

“별의 사자나 되시는 분이 밝히지 않고 오시니 불편하지 않습니까?”

“하하…….”

에아는 대답할 가치를 못 느끼는 듯 옅은 미소와 웃음소리를 형식적으로 내보이곤 영주를 따라갔다. 에아의 미적지근한 태도에 영주는 당황한 기색을 애써 구겨 속으로 넣는 듯 멈칫멈칫 하는 게 보였다. 영주가 이끄는 대로 가 보면, 수많은 조각상들이 두 줄로 가지런히 세워져 있었다.

방금 전에 봤던 조각상처럼 몸을 감싼 자세와, 공포에 휩싸여 도망치는 자세, 울고 있는 어린 아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사람. 눈을 감고 가슴에 양 손을 꼭 얹고 있는 사람. 다양한 모양의 조각상들이 에아를 반기고 있었다. 에아는 붉게 빛나는 눈을 크고 동그랗게 뜨고 그것들을 바라봤다. 영주는 자랑스럽게 작품에 대해 설명을 하나하나 공들여 하고있었다.

“<기도>입니다. 세 달 전에 완성됐지요. 구원을 달라고 기도하는 여성상으로, 금으로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안 보이는 곳까지 섬세하게 만들어졌군요. 작가가 혼신의 힘을 다 해서 만들었나봅니다.”

“당연하지요.”

“여기 이 반짝임, 진짜 금이군요.”

“역시 사자님이시군요. 순수 금으로 만든 작품으로. 금으로써 순수 가치로만 해도 상당한 액수를 가지고 있지요.”

작품으로서 가치가 사라져도 말이죠. 그 말이 에아의 귀에 한참을 흐렸다. 고개를 끄덕이던 에아는 시선을 올려서 눈을 마주쳤다. 흔들리는 동공, 붉게 올라온 피부같은 걸 보면 에아는 얼기설기 대충 추측하던 것들이 거짓이 아님을 확신했을 테다.

“금, 대리석, 나무, 그냥 나무도 아니고, 이건 호두나무, 저건 흑단나무, 이건 화강암……. 다 같은 작가가 한 건가요?”

“아니지요. 각 재료마다 다른 예술가들이 작업했습니다. 정말로 아름답지요? 이중 몇은 황실에 진상될 예정이지요.”

“그렇군요……. 예정된 몇 분은 제가 돌아갈 때 진상토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저희가 인원을 붙여드리지요. 거처도 저희 쪽으로 옮기는 게 어떠신지…….”

에아는 잠깐 고민하는 기세를 보이더니 머리를 끄덕였다. 영주의 안내로 수많은 상들을 거친 뒤 나타난 응접실. 네모반듯한 상 위에 얹어진 흰 천, 그걸 본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더니 자연스레 앉았다. 영주는 잠시 해야 할 일이 있다며 자리를 비웠다. 에아는 그 모든 기척이 들리지 않을 때쯤 품에 넣어 둔 종이묶음을 꺼내 빠르게 휘갈겼다.

저 상들은 전부 다 인간이다.

보는 눈이 없더라도 가면을 놓진 않았다. 에아는 무심한듯 의자 등받이쪽으로 몸을 쭉 민 뒤 창 밖을 바라보며 나른하게 사용인들을 기다렸다. 가벼운 다과와 커피를 가져온 사용인이 에아가 빼곡하게 적어둔 내용물을 궁금하듯 눈을 흘끗흘끗 흘렸다. 에아는 테이블 위에 적어놨던 모든 노트를 내려놨다.

“내용이 궁금하시면 직접 보시지요.”

“앗! 죄송합니다. 감히 제가 살펴보다니요.”

“아뇨 뭐, 보셔도 상관 없습니다. 한 번 읽어보세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모르는 문자입니다.”

에아는 광장에 있던 조각상과 응접실을 오기까지 지나쳐온 모든 상들이 사람이란 추측을 상세히 적어둔 종이를 사용인에게 보여줬다. 사용인은 당황스러워서 손이 떨리는 게 다 보였지만 에아는 당당히 거짓말을 뱉어냈다.

“이건 한글이라 해서, 황실과 소통할 때 쓰는 특수문자중에 하나지요.”

대리석이야 물러서 조각하기 쉽다고 해도 화강암의 경우, 정교한 가공이 불가능하다. 공격마법만 있는 이 세계에서 마법을 정밀하게 쓰면 가능할 수도 있다 변론할 수 있는데, 저 정도의 정밀가공은 셰른도 불가능하다. 가능한 사람이 있다면 제국 제일의 마법사로 추앙받을 것이다.

“대리석으로 만든 작품이 인상이 깊어 황실에 진상이 되는지 물어보는 내용이고요.”

광장에 있던 나무 조각상도 마찬가지다. 손으로 깎는다 쳤을 때, 그런 정밀한 작업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나무 조각상은 이 곳에서 십여개가 넘는 작품이 있었고……. 각기 다른 조각가가 만들었다 하더라도 그 모든 사람이 똑같은 화풍과 개성을 가지기엔 무리가 있다.

“나무 조각상의 정밀한 묘사도 황실 분들의 마음에 들 거란 설명이지요. 손톱 하나하나까지 세밀하게 깎아내는 건 엄청난 재능이니까요.”

대다수의 ‘작품’의 구성원은 여성과 아이들이었으며, 인구 비중이 안 맞던 부분과 맞았다. 작품이 된 지금 그들의 표정은 공포와 두려움에 빠져있었다. 추측하건대, 이들은 강제로 잡혀와 어떤 마법적 과정을 통해 조각상으로 변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이 작품을 만든 조각가와 만나보고 싶은데요.”

불균형인 성비. 비밀을 가진 걸 티 내 버린 영주. 두려움에 떠는 영지민들. 황실의 밀명에 지목된 마도시. 이곳에 영지민들을 죽여 사욕을 취하는 영주가 있다. 그리고 이 곳에 사람을 다른 물질로 변환시키는 ‘마도구’가 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물, 물론입니다! 영주님에게 전달토록 하겠습니다.”

후다닥 사라지는 사용인을 보곤 에아는 종이를 차곡차곡 모아 집어넣었다. 햇살이 들어오는 창가에 놓인 테이블, 반대편의 찻잔은 비워졌지만 가득 차 있는 손님 앞의 찻잔. 수색이 짙어 뭔가 들어갔는지 모르겠는 차. 에아는 이 모든 정황을 의심했지만 보이지 않는 시선들이 차를 마시도록 강제하고 있었다. 약사는 품 안에서 유리병에 들어간 알약 하나를 입 안에 넣은 뒤 찻잔의 손잡이를 잡아 기울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대로 의자 아래로 쓰러졌다.


“이상하단 거야. 최근 무역업무에 되게 태만해졌어. 관공서 인간들이 상인들을 만나도 딱히 반기지 않고.”

“하긴 이상하군요.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무역을 태만하게 받아들인다면 대체 무슨 생각인지 궁금합니다.”

“위치가 좋다고 배짱장사인지도 몰라. 이대로 계속되면 우린 지부 위치를 바꿀까 싶어. 아, 그리고 갑자기 원자재 무역량이 늘었다네.”

우리가 아는 건 이게 다야. 셰른의 맞은편에 선 자는 그렇게 말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들과 함께 여행길에 올랐던 일행 중 한 명이었다. 셰른은 에아가 왜 갑자기 이런 걸 물어보라 했는 지 의문이긴 했지만 리더의 부탁이라면 어렵지 않은 선에서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었으니, 얌전히 에아가 쓴 질문에 대한 답을 하나 둘 쓱싹쓱삭 적어내고 있었다. 뭔가 쓱싹쓱싹 써 내려가는 셰른을 본 상대는 글자들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거, 공용 문자가 아니구만?”

“네. 한글이란 문자인데, 기밀 정보를 빠르게 주고 받을 수 있는 문자입니다. 새어 나간대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이 나라에 세 명밖에 없어요.”

“아하, 당신 일행 세 명?”

“아뇨, 갈렌은 난독증이 있어서 못 읽고. 황실에 계신 분께서 읽으실 수 있어요.”

“신기한 문자구먼, 따로 배운 건가?”

세른은 고개를 끄덕이며 종이를 쭉 보여주며 읽는 방법을 알려줬다. 이게 초성, 이게 중성, 이게 종성이고. 글자 하나에 한 음절이 담겼고……. 그런 말들이 조금 오가더니 상대도 읽는 법을 조금 익힌 듯 종이 위의 문자를 더듬거리며 읽었다. 셰른은 빠르게 익히는 상대를 보며 좋다고 박수를 치며 말했다.

“어려워 보여도 실제 문자의 발음 방법만 알아챈다면 쉽게 읽을 수 있어요. 저는 에아가 일주일 정도만 가르쳤는데 다 읽을 수 있었거든요.”

“오, 그럼. 잠깐, 그럼 정보가 새어나갈 수 있는 거 아닌가?”

“제가 지금 쓰는 건 그렇죠.”

“중요한 정보가 있다면 어떻게 하나?”

“음, 일단 머리 속으로 암기해 뒀다가 에아에게 전해줘요. 그럼 에아는 이 문자를 쓰는 언어권 나라의 언어로 바꿔서 적어 두고요. 한때 에아가 익히게 해 주려고 도와주려고 했는데, 그건 좀 익히기 어렵더라고요. 외워야 하는 단어가 많고, 형태의 변화가 엄청 자유로운데다 저희가 말 할 때의 순서가 달라서 익히는 데 어려움이 있을 거라고 하더라고요.”

“오호, 만일 익힌다면 황실의 비밀이라도 알 수 있겠구만. 그 언어가 뭔가?”

“뭐라 그랬지……. ‘한국어’라고 그랬어요. 근데 배우실 수 있겠어요?”

여기서부터는 에아가 가르쳐야 하는데……. 셰른이 중얼거리다 어깨를 으쓱이며 자기도 포기했다고 말했다. 신나게 글자를 읽으며 즐거워하던 상인은 그 말을 듣자마자 움찔거렸다.

“마법의 성지인 북부에서 젊은 나이에 수련을 마친 머리가 좋은 마법사가 그 언어를 통달 못 했다고?”

“예, 애초에 언어를 배우는 것과 마법을 배우는 건 다르기도 하고……. 그 언어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이 나라엔 딱 한 명이에요. 에아. 그 친구는 어릴 때부터 그 언어를 배운 것처럼 말하고 쓰고 그랬어요.”

“그렇구만. 어찌됐건 우리로선 어려운 일이구만.”

에아에겐 좋은 일이죠. 셰른은 킥킥 웃으며 종이의 뒷장을 넘겼다. 그러자 나타난 새로운 문장. 그 문장을 본 셰른은 벌떡 일어나 상단주로 보이는 사람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서글서글 웃는 상으로 어지간한 자극도 아무렇지 않게 넘기는 마법사가, 얼굴을 잔뜩 구긴 채로 품 안에서 황실의 인장과 심부름을 부탁하기에 충분한 돈을 꺼내 상단주에게 부탁을 한다.

“옆 영지에 머물고 있는 황실 경비대를 불러줄 수 있는가?”

“어렵지 않지만 갑자기 왜…….”

“가장 빠른 말로! 아냐, 내가 가야하나?”

“진정하게. 왜 갑자기 그러나? 그 에아라는 친구가 뭐라 해서 그래?”

셰른은 답지않게 흔들리는 눈과 종이를 꼭 쥔 손에서 새어나오는 불길을 애써 가라앉혔다. 그럼에도 쥐고 있던 종이는 한 순간 불 타 사라졌지만.

“영지민들의 절반이 영주의 손에서 사라지고 있어요. 이 영지에 있는 황실 경비대는 유착 가능성이 높으니 이 지역과 크게 관계 없는 황실의 경비대를 불러달라고 적혀 있어요.”

그 말과 동시에 듣고 있던 모든 이들이 당황해서 우왕좌왕거리다 상단주가 책상을 한 번 두들긴 뒤에야 애써 진정됐다. 상단주는 알았다며 셰른의 의뢰금을 받아들이고 셰른은 후다닥 상단을 뛰쳐나갔다. 나가는 모습을 본 상단주는 방금 전까지 셰른과 친밀하게 대화하던 상인 하나에게 물었다.

“원래 저렇게 허둥지둥하던 친구인가?”

“그럴리가. 맹수 떼가 넘어와서 일행 반절이 나가리 될 뻔 했을 때 얼음창으로 모가지를 따 버린 게 저 사람인걸.”

“그럼 빨리 사람을 불러야겠군, 우리 사병도 모으라 그래.”

황실 사람이 저렇게 당황할 정도면 우리도 자체적으로 움직일 필요가 있어. 상단주는 돈을 주머니에 챙기며 명령에 따라 움직여 줄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셰른은 빠르게 달려 여관으로 향했다. 여관에 있을 갈렌을 데려가 같이 영주의 성으로 향해야 그나마 승산이 있을 거란 생각이었다. 여관에는 어린 아이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그마저도 울먹거리고 있었다. 셰른은 아이를 향해 무릎을 꿇고 물어봤다.

“혹시 우리 일행이었던 커다란 덩치의 보라색 눈과 머리를 한 사람을 보지 못했니?”

“여기 주인 아저씨랑 이야기를 나누더니 다른 모든 어른들이랑 같이 나갔어요.”

“혹시 그 친구가 종이……. 아니다. 있긴 할텐데.”

“이거요?”

아이가 꼬기작 꼬기작 구겨져 있던 종이를 줬다. 어른들이 심각하게 종이를 보고 있던 걸 알아차리고 그들이 사라진 후 따로 챙겨놨다는 아이의 말에 셰른은 서둘러 종이를 열었다. 내용을 다 읽은 순간 아이를 냅다 들어 그들이 묵었던 방으로 뛰쳐들어갔다. 숨길 곳을 두리번거리던 셰른은 아이에게 이불로 쓰던 흰 천을 던져주고 단단히 말했다.

“숨어 있어. 너희 부모님은 오늘이 지나면 오실 거야.”

“엄마 괜찮은거 맞아요? 엄마가 없어진 것도 한 달이 넘었어요.”

“―최대한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줄게. 오늘은 절대 이 방에서 나오지 않는 게 좋지만, 만약 문이 열리며 부싯돌 당기는 소리가 들리면 창 밖으로 나가. 알겠지?”

두려운지 아무런 말도 못한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고, 셰른은 서둘러 바닥에 둥근 모양과 마법진과 같은 형태를 그리고는 자신의 무기와 같은 짐들 일부를 챙겨 내려갔다. 여관의 카운터에는 영지 내 사병 같은 사람들이 몇이 몰려 서 있었다. 셰른은 아이에게 받았던 종이를 손에 꽉 쥐어 태우고는 그들의 앞에 섰다.

“영지 내 경비병이시군요. 어쩐 일로 여길 오셨는지?”

“영주님께서 귀빈을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아……. 에아가 갔나 보군요. 알겠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숨긴 채 셰른은 사병의 안내에 따라 움직였다. 마법사는 에아가 써 내린 문장을 상기했다.

당신의 아내, 부모님, 자식이 영지 내에 있습니다. 영주는 오늘 이후로 그들을 보지 못하게 만들 겁니다. 만일 그들을 다시 보고 싶다면 서둘러 영주의 성 앞으로 모여주시길 바랍니다. 종이를 준 사람이 당신들을 위해 성문을 열어 줄 겁니다.

에아는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들어가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됐는지 알기 위해 미끼인지 잠입인지 모르게 들어갔을 뿐. 셰른은 그들의 안내에 따라 성문 앞에 도착했지만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에 문을 막으려 당황하는 경비원들 뿐이었다.

우리 어머니를 돌려 내라, 잘 돌봐 주겠다고 해서 보낸 건데 왜 얼굴 하나 보여주지 않느냐, 마을 광장 앞에 있던 그 사람처럼 된 거냐. 격양된 목소리들 앞에 갈렌이 묵묵히 서 있었다. 창을 들고 수성을 위해 갈렌을 향해 창을 든 이들을 향해 셰른은 손으로 그들의 머리를 향해 조준한 뒤 작은 불덩어리를 쏘아 투구를 벗겨냈다.

“이봐! 지금 뭐 하는 짓인가!”

셰른의 목에 칼을 들이 민 경비병의 날을 가볍게 잡아 고열로 날을 녹여 낸 셰른이 바람을 이끌어 와 경비병들을 멀리 떨어뜨린 뒤 갈렌의 옆에 섰다. 무리의 앞을 막은 사람이 그 누구도 없단 걸 알아챈 이들 중 덩치가 큰 장정들이 꽉 잠긴 문을 열려 들이 받았지만 열리지 않았다. 갈렌은 셰른에게 무언의 허락을 받으려는 듯 쳐다봤고, 셰른은 고개를 끄덕였다. 갈렌이 성문을 향해 양 손을 짚고 꽉 밀어버리자 빗장이 구부러지고 쪼개지는 소리가 들리며 문이 열렸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불과 바람이 마구잡이로 튀며, 빗장이 뒤틀리고 부서지며 커다란 문이 열리는 소리가 흐릿하게 들릴 즈음. 에아가 칠흑 속에서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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