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용된 구원

오용된 구원

Signal of beyond redemption 1

The City Series by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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옅은 빛무리가 일렁거린다. 어떤 때에는 보는 이의 왼쪽으로 한 번 크게 씰룩이고, 어떨 때에는 오른쪽으로 세 번 흔들거리기도 한다. 고개를 치켜들어 그 붉은 눈으로 바라본다. 그 사람의 머리카락의 끝은 짙은 회색이었다가, 위로 올라가면 갈 수록 희다 할 정도로 연한 회색으로 변해갔다. 그런 사실을 아나 모르나, 가운을 입은 자는 눈을 두어 번 끔뻑거리다 자리에 앉아 종이를 꺼냈다.

종이, 그 옆에는 양초로 밝히는 램프를 하나 더 가져오곤 얌전히 앉은 자는 종이를 검지로 톡톡 건드렸다. 쓸 글자가 한 줄에 얼마나 들어가는 지 계산해 낼 요량인지 손가락은 두들길 때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줄이 끝나는 지점에선 그 아래 단으로 내려갔다. 그 행위를 본인이 생각한 마지막 줄까지 반복하자 깃펜을 들었다. 첫 단어의 중간쯤 왔을까, 딸랑거리는 현관종 소리가 들리고 문이 벌컥 열렸다. 여유로운 인상의 귀부인이 경호 인력으로 보이는 기사의 호위를 받으며 공간 안으로 천천히 들어왔다.

“에아. 잘 지냈나요?”

“아, 부인. 어서 오세요. 새뮤얼 공자는 잘 지내고 있으신가요?”

“그대가 지어준 약 덕에 고비는 넘겼죠. 감사 인사는 나중에 겸하고, 오늘은 둘째 아이가 자주 열이 올라서 해열제를 사러 왔어요.”

“둘째면 디아스 공자군요. 천성이 튼튼하신 편으로 알고 있지만 근래 들어 열이 자주 오르시는군요. 방문한 의원 소견이 있었나요?”

“역시 리플리의 제일가는 약사답네요.”

귀부인은 이어 의원의 소견을 말한다. 어린 아이가 쉬지 않고 많이 움직였다. 자주 노는 거 같은데, 휴식의 중요성이 필요하단 말이 흐릿하게 귀에 들어왔다. 에아는 경청하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약장에 들어가 있던 알약 병을 들어 테이블 앞에 얹었다. 에아는 쓰던 종이를 치우고 새 종이를 꺼내와 깃펜으로 빠르게 글을 쓰며 귀부인 앞에 내놓았다.

“아가님이 아직 어리니 열이 오르면 이등분 해서 한 조각만 먹게 해 주시면 됩니다. 종이에 적어 드릴 테니 사용인들에게 전달하면 됩니다.”

“고마워요. 하지만 내가 알고 싶은 건 더 있어요.”

귀부인은 어디서 나타났을 지 모르는 주머니를 쥐어 책상 위에 놓았다. 에아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이내 질끈 감고는 손을 뻗어 주머니를 밀어냈다. 이런 일에 진절머리가 났다는 듯 고개를 젓기까지. 귀부인은 절박한 표정이었지만 에아는 타협의 여지가 없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단호한 태도였다.

“저는 일개 약사일 뿐이지, 어떤 일의 해결사는 아니니까요. 그런 건 믿을만한 다른 사람을 고용하는 게 좋습니다.”

“하지만 에아, 내가 믿는 사람은 당신이에요.”

“그렇다면 제 사견은 이겁니다. 가문 내부의 후계간 알력 싸움이 있어 보입니다. 아이들의 선생이나 하인, 혹은 자주 만나는 방계 가문을 예의주시 해보심을 추천드립니다. 늦가을인데 디아스 공자같이 튼튼한 아이가 열이 자주 오른다면 제 생각엔 공자가 과한 활동을 하고 있단 뜻으로 받아들여집니다.”

눈을 내리깔고 빈 종이에 두 아이와 그 측근을 표시하듯 휘적거렸다. 귀부인은 약사의 말을 경청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에아는 어디까지나 약사가 아닌 개인의 의심 정도라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약사는 어디까지나 아이의 정황과 귀부인의 얼굴을 보고선 추측했으니 과한 맹신은 좋지 않다고 줄창 말했다. 귀부인은 약사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는지 약값보다 더 많이 나가보이는 금화를 몇개 얹어줬다. 고개를 숙여 금화를 바라보던 에아는 약값을 제한 동전은 귀부인의 손에 다시 올려놨다. 귀부인은 익숙한 일이라는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곤 에아를 바라봤다.

“매번 미래를 바라보시듯이 말씀하시는데도 조언에 대한 비용은 받지 않으시는군요.”

“어디까지나 사견이니까요. 부인 말동무 해드린 거라 생각하세요. 손님도 없었으니 저도 시간을 보낸 셈 아니겠습니까?”

그 말에 귀부인은 호호, 웃으며 포장된 약을 받아들었다. 에아에게 작게 인사한 뒤에 고개를 돌리는 모습은 뭔가 결심한 듯 결연한 표정이었지만 에아는 그 얼굴을 제대로 보진 못했다. 그래도 대충 조만간 저 귀부인의 가문에 칼바람이 불겠거니, 하는 그런 어줍잖은 예감이 들긴 했지만 그건 뭐, 평민 약사가 신경 쓸 부분은 아니었다. 귀부인을 상대하느라 미뤄뒀던 종이를 끌어당겨 뭘 적으려 했는지 생각하며 턱을 괴자마자 이번에도 현관종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면서 들어오는 걸 보며 에아는 고개를 푹 숙였다.

“에아, 들어봐. 갈렌이랑 내가―.”

“아니, 셰른이.”

서로 네가 잘못했네 내가 잘했네 실랑이를 이으며 약사에게 다가왔다. 이번에도 종이를 치운 에아는 팔짱을 끼며 둘을 바라봤다. 계절에 답지 않게 가벼운 옷차림에 축축히 젖은 천을 보자하니 주변에서 허드렛일을 도우고 왔음이 분명해 보였다. 둘이 서로 적의 없는 실랑이를 하는 것이 익숙한 일인 듯, 에아는 신경쓰지도 않고 수건으로 쓰는 천 두 장을 꺼내 그들에게 전해줬다. 옅은 보라색 머리카락과 눈을 가지고 다부진 체격을 가진 이가 수건을 받아들고 에아에게 물었다.

“―그래서 듣고 있어, 에아? 셰른이 손잡이를 좁은 골목으로 이끄는 바람에 수레가 고장날 뻔 했다니까?”

“지난번에 그 수레 끌고 가본 적 있다니까. 그리고 결과적으로 수레는 안 고장났잖아. 일도 일찍 끝났고.”

“그래도 말야. 그 어둠침침한 골목에 나쁜 사람 있으면 어쨌으려고.”

“나랑 갈렌이 누구한테 뭐 쉽게 당하나?”

옅은 분홍색 머리카락과 눈을 가진 자가 에아에게 수건을 받아들며 대답했다. 위험한 길로 가는 건 보안상 좋지 않단 갈렌의 의견과, 누구한테 쉽게 당할 사람은 둘 다 아니니 피차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빠른 길은 좋은 선택지가 될 수 있단 셰른의 의견이 대립하고 있었다. 에아는 얌전히 둘을 가게 구석의 테이블에 앉혔다. 컵에 물을 따라 나눠주니 둘의 이목이 자연스레 에아에게 이끌렸다. 약사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서 내 의견이 궁금해?”

둘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고, 중간에 끼인 사람은 어깨를 으쓱였다. 둘의 사소한 의견 대립은 으레 있던 일이었으니 에아도 으레 있던 방식으로 그들을 응대했다.

“누구네 짐을 옮기던 중이었는데?”

“그건 왜 물어봐?”

“그야 좀 중요한 물품이었으면 갈렌 말이 맞아 보이고, 중요도가 떨어지면 셰른 말이 맞아 보이거든. 상황따라 달라지니까.”

“그럼 내가 맞는 거네.”

으쓱이는 분홍 머리카락. 기고만장한 셰른 말에 갈렌은 고개를 푹 숙였다. 중요한 물건을 나르는 건 아니었단 걸 안 에아는 가운 주머니에 손을 구겨넣고 부스스 웃었다. 셰른은 갈렌의 부스스 오른 그 머리카락을 헤집어 주곤 씩 웃어보였다. 매사 적극적이고 눈치가 좋은 건 셰른 쪽, 적극적이진 않지만 우직하고 듬직한 심성을 가진 건 갈렌. 에아는 그리 생각하곤 했다. 셰른은 에아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늘어놓았다.

“에밀리오 상단의 애쉬 경이 상단 건물 내에서 폐 건자재인 석재가 나왔다고 필요 없다면 밖으로 버려달라고 그랬거든. 일찍 버리는 게 나아 보여서 버리고 왔지! 김에 너한테 안부 전해달라고 하더라.”

“굳이 너희 통해서 나한테 인사를 할 정도인가? 수도에 차고 넘치는 게 약사고 약재상인데.”

“넌 다르지, 우리 친구잖아.”

별 생각 없이 한 말이었지만 셰른이 벌떡 일어나 에아를 들어올리고 빙글 돌았다. 에아는 당황해 버둥거렸지만 갈렌과 셰른은 익숙하단 듯 높이 들어올려 행가래를 쳐주듯 했다. 약국 정중앙을 밝히던 램프가 에아의 머리와 충돌하는 건 필연적인 일이었다. 떨그렁 소리가 나며 바닥으로 램프가 떨어지고, 나무바닥에 램프가 떨어졌다.

소리에 놀라 허둥지둥 하던 둘을 뒤로하고 바닥에 엎어졌던 에아는 익숙하게 테이블 위에 놓아줬던 물잔을 들어 램프 위에 쏟았다. 양초로 불을 밝히는 램프는 물을 맞고 금방 꺼졌다. 큰 불로 퍼질 뻔한 일을 빠르게 정리한 에아는 시선을 피하는 셰른을 바라봤다. 그러면서 약간은 익살스럽게 대답했다.

“아까 전에 셰른 손 들어줬던 거 취소할래.”

“아, 에아! 미안해.”

울상으로 번져있지만 에아가 봐 줬다는 걸 안 셰른은 우는 소리를 내며 에아를 끌어안았다. 물에 젖은 양초는 말리기 위해 램프에서 꺼내 놓고, 떨어진 램프는 어디 틀어지지 않았는지 살핀 뒤 갈렌이 들어 천장에 다시 달아주었다. 물바다가 된 나무바닥은 에아와 셰른이 왁자지껄하게 정리하면 주황빛 하늘이 그들을 밝혔다. 손님이고 뭐고 공 쳤구만. 에아는 허리를 쭉 펴며 둘을 바라봤다.

“저녁 같이 먹고 갈래? 어제 끓이고 남은 스튜 있는데.”

“아냐, 어차피 옆집인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그러고 보니 다음 여행 일정 잡혔어?”

“아직 황제폐하가 뭐라 말씀하시진 않아서. 아니면 우리끼리 여행갈래? 지금 출발하면 겨울바다를 볼 수 있을 거 같은데.”

“것보다 다음 여름에 바다에 가는 것도 괜찮겠다. 남방 휴양지의 여름엔 옷을 가볍게 입고 피서를 즐기기도 하는데―.”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한다고 둘은 생각했는데 에아는 그 말에 쉬이 대꾸하지 못하고 창 밖을 바라봤다. 살짝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려 표정을 살펴볼 순 없었지만 가로등지기가 기름등을 밝히는 걸 보고 있었다. 일렁이는 불빛을 한참 보던 에아는 그들이 있단 걸 깨닿고 고개를 돌렸다. 에아의 표정을 본 둘은 잠시 멈칫거리더니 은은히 미소를 지었다.

“같이 가자. 비취빛 바다가 예뻐.”

“―좋아.”

에아는 기지개를 쭉 펴더니 남은 정리와 청소는 자기가 하겠다며 둘의 등을 밀어낸다. 셰른과 갈렌은 내쫓기면서도 에아에게 이것저것 물어본다.

“내일도 가게 열 거지?”

“그럼. 오후에 재고 들어올 예정이라 오전 일찍 열거야.”

“도와줄게. 내일 일찍 오면 돼?”

“아냐, 갈렌. 내일도 너희 일 있을 거 아냐.”

걱정 마. 둘은 손을 흔들어 짧고 격식 없는 인사를 나누고 가게 앞 마당에서 나가 옆집으로 향했다. 에아는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다 문을 꽉 닫고 빗장과 잠금장치를 걸었다. 창문도 잠구고, 빗자루로 바닥도 쓸고, 밝은 광원에 장부를 가져와 정리했다. 업무적으로 하루를 마무리한 에아는 손님과 친구들이 들어와 치워뒀던 종이를 꺼내 들었다. 딱 첫번째 문장을 썼을 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하…….”

이제 시간이 나서 뭐 좀 쓰려 했는데 오늘따라 도움을 주는 게 하나도 없었다. 깃펜을 내려놓고 몸을 일으킨 에아는 나무로 된 미닫이로 열 수 있는 창을 살짝 열어 누구인지 살펴봤다. 꽃 한 송이를 정성스레 포장해 창 앞에 들이대 반쯤 가렸지만, 익숙하게 서글서글한 인상의 남성이 있었다. 에아는 창을 닫곤 고개를 가로저었다. 빗장을 풀고 문을 열었다.

“애쉬 경.”

“시장에서 질 좋은 햄을 얻어서, 같이 먹자고 가져왔어요.”

“―들어오세요. 다른 경호 인력은 없으십니까?”

“에아씨만 알아주세요. 몰래 나왔어요.”

“주무시고 가면 안됩니다. 소문나면 저만 골치아파져요.”

호리호리하고 키도 큰 편인 에아보다 한뼘은 더 큰 키, 서글서글한 인상이라 미소를 지으면 뭇 사람들의 시선을 받을만한 미남. 햇빛을 받으면 따뜻한 색으로 빛나는 머리카락과, 햇볕을 잔뜩 받아 쨍하게 반짝이는 노란 눈이 인상적이었다. 옷도 격식있고 고위층이나 입을만한 비싼 천으로 짜여져 있고, 달빛에서도 반짝이는 장신구도 곳곳에 보였다.

혹자가 귀족이라 부를 법한 사람의 손엔 꽃과 줄로 묶은 햄 하나를 들고 있었다. 에아는 어쩔 수 문을 꽉 잠구곤 화로에 불을 붙였다. 식사를 할 생각은 없었지만 손님이 식사거리까지 가지고 왔으니 어쩔 수 없이 가운을 벗어 대충 던져두고 움직였다.

애쉬는 이름과 인상이 어울리지 않았다. 훤칠하고 서글서글한 인상에, 어딜 가서나 빛나는, 생기가 넘치는 인간에게 잿더미란 이름은 어울리지 않았다. 도리어 그건 회색 머리칼을 가진 에아와 어울리지 않았을까, 에아는 가끔 그런 생각을 했다.

“머리가 헝클어졌네요. 무슨 일 있었어요?”

“별 일 아니에요. 친구들과 놀다가 천정 램프에 머리를 박았거든요.”

“다친 데는 없고요?”

“뭐 이런 걸로…….”

에아는 그래서 애쉬가 어려웠다. 애쉬 에밀리오, 십여 년 전에 리플리에 혜성처럼 나타난 에밀리오 상단의 상단주. 젊은 나이에 사업 수완이 좋고 인망도 높아 모두의 선망과 질투를 받는 사람. 선망은 받은 대로 불우이웃에게 돌려주고, 질투마저 사랑의 일종이라 생각해 모두를 어여삐 살피는 사람. 그뿐만 아니라……. 깊은 생각에 잠긴 에아가 별 생각하지 않고 빵을 반으로 가르며 제 손가락도 살짝 그어버렸다.

“아이고!”

“무슨 일이에요?”

“아, 아니에요. 조금 베여서.”

이정도는 괜찮아요. 생각의 바다에 잠겨 대충 빵을 자른 자신의 잘못이었다. 그렇게 심하게 베인 것도 아니었다. 핏방울이 맺힌 엄지를 바라보던 애쉬는 에아를 주방에서 내보냈다. 손을 뻗어 옷걸이에 망토와 겉옷을 걸고 앞치마를 꺼낸 애쉬는 자기가 요리하겠단 의지가 가득했다.

“아니 경. 굳이 그럴 필요 없어요. 소독 좀만 하고 바로 제가 할게요.”

“괜찮아요. 오늘은 제가 실력을 내 보일게요. 걱정말고 치료하고 오세요.”

애쉬는 이미 잘라냈던 빵을 기름 두른 팬에 얹어 굽고 있었다. 에아는 저 고집을 이길 수 없다는 듯 약국으로 돌아와 앉아 다친 손가락의 치료를 계속했다. 오늘따라 무슨 액이라도 낀 건지 하고싶었던 일을 죄다 망쳤다. 소독한 천으로 손가락을 꽉 묶은 에아는 식사를 하게 될 테이블이라도 박박 닦고 램프와 식기를 꺼내 저녁 준비라도 도왔다. 다만 요리의 꼴이 좋은 모양새는 아니었다.

빵에 구운 햄과 계란, 소스와 야채 등등을 넣어 겹친 간단한 요리였을텐데. 썰다가 무게에 짓눌렸는지 그 내용물이 튀어나오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제야 에아는 이 완벽한 피조물이라 불리는 이 남자도 뭔가 잘못하는 게 있었다는 걸 상기했다. 안 본지 꽤 돼서 잊고 있었다. 애쉬는 멋쩍게 웃으며 접시 위에 엉망이 된 요리를 올려놨다.

“힘 조절이 잘 안돼서요. 요리를 자주 하진 않으니까요.”

“맛만 멀쩡하면 됐죠.”

“쓰고 남은 햄은 걸어놨으니까 입이 심심하면 드세요.”

“고마워요.”

한 사람은 손을 베고, 한 사람은 겉보기에 엉망인 요리를 내 놓았지만 저녁 식사는 나쁘지 않았다. 에아는 포크와 나이프를 움직여 깔끔히 재료들을 집어 먹었다. 애쉬는 몇 입 먹다가 정적을 깨듯 말을 꺼냈다.

“내일 약재를 보내드릴 건데, 다음 수주는 언제쯤 되실 건가요?”

“지난 번처럼 큰 일이 없다면 두달 뒤로 보고 있습니다. 무슨 별 되시는 분이 절 부르지 않는다면요.”

“별이라, 궁에 들어가실 생각은 없습니까?”

에아는 음식을 휘적이고 있었다. 궁이라. 아래 음식을 내려다보고 포크로 양상추를 집었다. 아삭아삭한 식감을 제외하곤 무겁게 다가오지 않는 야채. 궁에 대한 에아의 인식도 이정도였다.

“리플리 시에 정착한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궁이라뇨.”

“에아씨의 실력이라면 언제든지 오라고 할 텐데도요. 상단 매출 걱정이라면 하지 마시고 입궁해보시는 것도…….”

“싫은 건 아니지만 좋은 것도 아니니까요. 저는 지금이 좋아요. 옆집에는 갈렌과 셰른도 있고.”

어릴 적부터 친했던 두 친구. 그리고 그 사이에 에아. 여러 단골 손님들을 두고 굳이 궁에 갈 필요는 없었다. 문장에서 에아의 생각을 읽은 애쉬가 약간은 실망한 듯 포크를 쥔 손의 힘이 풀려있었다. 에아는 고개를 들어 능청스레 말했다.

“그리고 우리 에밀리오 상단주님도 뵈어야죠.”

“그렇죠?”

램프의 따듯한 빛으로 인해 상기된 볼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애쉬는 그제야 맑게 웃으며 저녁을 먹었다. 에아는 다시금 포크를 움직여 식사를 계속했다. 다만 에아의 손과 입은 최대한 천천히 움직였다. 마치 체하는 걸 두려워 하듯. 이후의 대화는 시덥잖은 농담과 주에 있었던 일, 그리고 일에 관련한 이야기였다.

애쉬가 슬슬 상단에 들러 자택으로 돌아가봐야겠다며 짐을 챙겨 나갈 때, 에아는 그를 따라 배웅해줬다. 활짝 열어 애쉬를 배웅하려는 에아는 작별 인사와 함께 덧붙였다.

“애쉬 경, 저와 당신은 친구입니다.”

“―네. 알고있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에아씨도 좋은 밤 보내세요.”

창문을 닫아서 몰랐는데, 달과 별이 맑게 피어 있었다. 그 빛을 받은 듯 애쉬가 환히 웃으며 인사했다. 에아도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문을 꽉 잠갔다. 빗장과 자물쇠까지 건 에아는 벽면에 기대 흐물흐물하게 무너져내렸다.

“아이고 힘들다…….”

구겨져 앉아있던 에아는 기력이 다 해서 흐느적거리는 몸으로 식기와 램프를 정리했다. 설거지와 가게 청소를 마친 에아는 진정 오늘 영업이 끝났다는 듯 램프를 껐다. 마침 옆에 쓰다 만 종이가 보였다. 적으려고 했는데 적지 못한 종이를 들어 계단을 타고 2층으로 올라갔다.

에아의 집은 약국과 주방이 있는 1층, 그 위 층은 가정집으로 구성돼 있었다. 불씨를 들고 온 에아가 벽난로에 불을 피우자 거실이 보였다. 밤의 차가운 공기는 데워지려면 조금 기다려야 했지만 에아는 개의치 않고 새 옷과 수건으로 쓸 천을 챙겨 씻으러 들어갔다. 방에는 세 명은 족히 앉을 기다란 소파와 커다란 테이블이 있었다.

물에 젖은 에아는 천으로 머리카락을 탈탈 털면서 나타났다. 벽난로 앞에 안락의자를 끌고 와 푹 안겼다. 따끈한 열기가 머리카락과 몸의 수분을 털어낼 즈음, 잠에 취해 있던 에아는 눈을 번뜩 뜨고 고개를 홰홰 저었다. 그러며 벌떡 일어나 램프를 들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래도 졸린 건 참지 못하는 지 실내화를 죽죽 끌고 있었다.

“정리하자.”

깔끔했던 거실과 달리 방으로 향하는 복도에서부터 종이가 한 장, 두 장, 많아지더니 방 안에는 수많은 종이가 벽에 붙어있었고, 바닥에는 종이가 한 곳에 쌓여있었다. 제대로 묶지 않아 나부꼈지만 에아는 한숨을 쉴 뿐 그걸 집을 생각을 하진 않았다. 책상 위에도 종이가 있는 건 매한가지라서 대충 쓸어모아 탁탁 정리한 에아는 낮에 썼던 종이를 위에 올려놓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동생인 에녹이 죽은 것도 몇 달이 지났습니다. 제가 아니라 당신이 최후를 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화를 걸듯. 에아는 이어 줄을 긋는 것처럼 재빠르게 글을 썼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빠르게 흐르고 기나 긴 문장을 적어냈다. 중간중간 에아는 생각을 하듯 턱을 괴었다.

「제국의 별은 그 이후로 사과하고 있지 않습니다. 높으신 분들이 생각이 있겠죠. 제 선택으로 인해 혈혈단신이 된 것은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 당시의 선택지는 별로 없었습니다. 몇 번이고 쓰는 거지만요.」

마치 자기가 에아가 아닌 걸 고백하는 듯한 어투. 에아의 붉은 눈이 활자를 따라 그 다음 문장을 적고 있었다. 그 옆에는 끈으로 대충 묶은 책의 첫 장이 열려있었다.

「이 글을 보고 있을 당신■■■■■에게.

저는 박해령입니다. 당신의 몸을 의도치 않게 강탈한 사람입니다. 정확하게 설명하긴 어렵지만 제가 죽으면서 당신의 몸을 가져간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도 저는 염치가 있는 사람이기에, 당신이 돌아올 때를 대비해 최선의 선택을 한다고 맹세하겠습니다.」

사각이는 글씨가 램프의 불이 일렁이자 멈췄다. 느리게 끔뻑이던 눈에 수마라도 든 것인지 눈을 꾹 감았다 떴다. 더 이상은 못 버티겠단 생각에 에아는 양초를 꺼내 불었다.

「다만 당신이 믿던 신이 있다면 죄송합니다. 저는 그들을 믿진 못하겠습니다.」

내리깔린 어둠이 에아를 감싸고 밤은 깊게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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