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각의 이면

아카시호

조직이 함락하고 몇 년 후 결혼식장에서 미야노 시호는 아카이 슈이치와 마주한다. 식이 거행되는 중에 두 사람은 뜻밖의 작은 소동에 빠지게 되면서 숨기려 했던 내밀한 감정을 서로에게 내비치게 된다.

약 1만 7천자. 모두 미야노 시호의 시점으로 전개됩니다.


화염처럼 강렬했던 느낌은 상상만으로 나를 그 시간으로 되돌려놓는다. 축축해진 손바닥으로 붙잡았던 강직한 팔. 우리를 감쌌던 붉은 벨벳 커튼의 감촉. 긴장하여 오르락거리던 서로의 숨소리. 커튼 틈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희미한 빛에 일렁이던 녹음과 같던 눈빛. 땀에 절여져 더 짙고 매혹적인 향을 띄던 그의 체취. 훗날 따스함으로 추억되는 아찔했던 모든 감각.

스산한 가을바람이 나부끼는 시월의 그날은 쿠도 신이치와 모리 란의 결혼식이었다. 또한 아카이 슈이치가 내게 결코 대체될 수 없는 남자로 각인되고 떠난 날이었다.

착각의 이면

박사님과 나는 이른 아침부터 분주했다. 평소에 신경도 쓰지 않던 흰 머리를 염색한다고 발을 동동 구르는 박사님을 보채 간신히 택시를 잡았다. 내가 걸친 검은 원피스와 상반되게 한바탕 소나기가 휩쓴 자리에 청량한 하늘빛이 눈부셨다. 한 시간이 안 걸려 도착한 예식장 로비에는 신랑과 신부의 이름과 웨딩홀 층수가 적혀있는 전광판이 있었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하여 쿠도 군과 모리 씨에게 인사를 건네고도 충분한 시간이 남았다. 긴장되어 에나멜 구두를 신은 채 발 뒷꿈치를 살짝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객실 문이 열리면 드레스 차림의 모리 씨가 있었다. 목선과 어깨가 드러나며 가슴 부분에 레이스로 장식된 우아한 디자인이었다. 입술을 치켜올려 온화한 미소를 띈 모리 씨는 근사했다.

“안녕, 모리 씨. 축하해. 드레스 잘 어울려.”

“와아. 일찍 도착했구나! 고마워. 시호 짱도 정말 예쁜걸. 아, 저쪽에 신이치도, 소노코랑 다른 친구들도 있어. 시호 짱도 다 아는 얼굴들일 거야. 가면 반갑게 맞아줄 거니까 인사 나누고 있어.”

“후후. 그래. 바쁠 텐데 잘 준비하고 조금 있다 기대할게.”

기다란 손가락 끝으로 객실을 가리키는 모리 씨를 보며 문득 그녀의 얼굴에 언니를 겹쳐 보았다. 언니를 떠올리는 건 아문 흉터를 다시 짓이기는 행위였다. 하늘이 언니의 운명에 조금이라도 귀 기울여주었다면 언니도 아마 저렇게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그 사람과 나란히 손을 잡은 채 환희에 들뜨는 모습을 보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과거에 자꾸 만약에, 를 붙여가며 언니를 그려가는 나의 미련한 상상이 펼쳐나가다가 끝이 그 사람, 에게 닿았다.

그는 오늘 이 자리에 왔을까.

혹여나 그를 본다면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까.

나는 꾸준히 미국으로부터 오는 아카이 씨의 연락을 무시해왔다. 조직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고 내가 법의 심판하에 떠밀리는 과정과 결말까지 모두 확인하고 그는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쿠도 신이치가 당연히 누려야 할 안식처로 되돌아간 것처럼 그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는 분방하고 모험을 즐기는 성미답게 영국에 있는 가족을 거부하고 미국에서 활약하는 길을 택했지만 말이다.

그에겐 더는 내게 얽매일 이유가 없었다. 정확히 하자면 내가 그 이유를 무마했다. 내 거취를 묻는 그에게 구태여 이 곳에 남겠다고 주장했다. 하루라도 빨리 나에게서 그를 떨어트려 놓고 싶었다. 나와 그의 사이를 잇는, 혈연보다 질기나 참으로 모호한 관계를 끊어낼 명분이 필요했다.

내 자신이 의외라 생각한 건, 내가 출국 비행기를 타러 가는 아카이 씨를 배웅하러 공항까지 갔던 것이다. 탑승 수속을 밟기 전 그의 얼굴을 보면 여기에 다다르기까지 수많은 설득과 좌절이 수반된 시간에서 문득 우리 사이 미련과 애틋함을 발견했다. 탑승 안내 방송이 나오고 그가 뒤돌고서야 기묘한 인연의 한 장이 끝났음을 알았다.

신랑 대기실 앞까지 그런 생각에 잠겨있다가 문을 열면 들뜬 표정의 쿠도 군이 보였다. 쿠도 군만큼이나 나도 이날을 염원해왔다. 작은 알약에 모든 걸 쏟아부었던 내 지난날의 보상은 오직 이것뿐이었다. 내가 하이바라 아이로 살며 느꼈던 생경한 경험들은 쿠도 군에게는 최소한의 인간성을 지닌 자라면 베푸는게 당연한, 놀라울 것 없는 일이었다. 그 사실을 아프게 강조라도 하듯 쿠도 군의 미소는 해맑았다.

“제멋대로인 명탐정도 그렇게 입으니 사뭇 달라 보이네. 입 찢어지겠다.”

“어. 미야노! 언제 온 거야? 고마워. 전에 사진도 찍어보면서 몇 벌 입어봤는데 식 때 입는 건 또 색다르네, 하하. 그나저나 너 박사님하고만 왔어? 아카이 씨도 같이 올 줄 알았는데 연락 안 해봤어?”

“어, 그게…. 글쎄. 따로 안 물어봐서. 그 사람은 늘 바쁘니 아무래도 힘들지 않을까.”

“하긴 그렇지. 아쉽다. 간만에 아카이 씨 얼굴이나 보나 했는데. 너랑 꾸준히 연락하고 지내는 줄 알았는데. 하여간 네 새침함에 천하의 아카이 씨도 기가 죽은거지.”

쿠도 군의 입에서 그가 나와 당연히 동행할 줄 알았다는 말이 나오자 공연히 마음이 혼잡스러웠다. 쿠도 군 지인으로 옆에 서 유쾌하게 웃음 짓는 핫토리 군과도 인사하고 대기실을 나왔다. 홀을 둘러보니 박사님은 쿠도 군의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여념이 없어 보였다. 언제나 그랬듯 특정한 어느 곳에 속해있기 애매했다. 식까지 시간이 남아 나는 옷매무새를 정리할 겸 화장실로 들어갔다.

손을 헹구고 잘 드라이 된 짧은 머리를 정돈했다.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기며 귀걸이를 만지작거렸다. 검은 원피스의 목 부분과 등이 너무 파이진 않았는지, 화장이 들뜨지 않았는지 거울 속의 나를 한동안 살펴봤다.

쿠도 군으로부터 단지 아카이 씨의 이름이 나왔다는 것 하나만으로 나는 안절부절못했다. 내심 그의 소식이 궁금하다가도 누구보다 만나기를 꺼리고 있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연락을 무시했던 건 나였으면서. 그에겐 가족을 챙기는 아주 사소하고 형식적인 습관이었을 것이다. 중대한 임무들을 내팽개치고 결혼식 하나를 보기 위해 이 곳까지 올 사람은 아니라고 여겼지만 만약의 일을 대비해 그를 마주한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나름의 방도를 고민했다. 곧 터무니없는 고민에 실없는 웃음을 치고 파우치를 챙겨 화장실을 나왔다. 그러다가 키가 큰 어느 남자와 부딪혔다. 큰 충격은 아니었으나 남자와 나는 거의 동시에 죄송합니다, 말을 내뱉고 고개를 까닥였다. 곧 익숙한 시선이 나를 향했다.

“시호?”

“아, 당신….

언제 도착한 거야? 반사적으로 튀어 나가려던 말을 다시 삼켰다. 살갑게 묻기에는 그간 내 무심한 행동이 걸렸다. 머쓱해져 머리카락만 만지작거리고 있으면 그의 손이 내 어깨에 살짝 스쳤다.

“사흘 전에 일본에 도착했다. 부모님은 일정 때문에 오진 못하시고 나와 동료들 몇 명이 동행했지. 그저께 동생들을 만나 가볍게 식사하고 호텔을 잡아 투숙 중이었어. 오늘 결혼식만 참여하고 내일 출국할 예정이다. 얼추 만날 사람들은 다 만난 것 같아서. 뭐, 너는 언제나처럼 내 연락에 일체 대꾸도 없었지만.”

“미안했어. 신규 프로젝트 때문에 잠이 부족해서 뭘 챙길 여유가 없었네.”

물론 일에 쫓긴다 하더라도 메일도 확인할 틈도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아카이 씨도 다 알면서 속아주는 것 뿐이었다. 무덤한 그가 연락이 뜸한걸 마음에 담아둘 줄은 몰랐기에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아카이 씨는 가볍게 웃었다.

“면박을 주려던 건 아니었어. 네 소식은 박사님을 통해 꾸준히 전해 듣고 있었으니까. 그 정도는 관여해도 상관없겠지?”

“당신이 언제 내 허락을 받고 관여한 적이 있었나.”

가벼운 대화를 주고받으며 우리는 복도를 향해 걸었다. 하객 전용 휴게실로 향해 아카이 씨가 커피 두 잔을 잔에 내리는 동안 나는 의자에 앉아 박사님을 찾으러 두리번거렸지만 헛수고였다. 하는 수 없이 남는 시간 동안 그와 어색한 공백을 채울 뻔하디 뻔한 대화의 말머리를 꺼냈다.

“당신은 요새 바쁘지 않아?”

“늘 바쁘긴 하지만 이게 내가 할 일이니까. 이상하게 들릴 지 모르겠지만 나는 위험에 처했을 때 진정으로 살고 있다고 느껴서.”

“다행이네.”

짤막하게 대꾸하고 커피를 들이켜 타는 목을 달랬다. 둘 다 말수가 많은 편이 아니었고 조직 와해 이후로 긴 교류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기에 어색함을 메꾸는 건 꽤 버거운 일이었다. 그렇게 애써 다음 말은 어떻게 꺼내야 할지 고민하던 중에 마침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뜻밖이었다.

“사실은, 미국에 가기 전에 너에게 같이 가지 않겠냐고 물어보려고 거듭 다짐했어.”

“아….

그 말을 듣자마자 그를 공항에서 떠나보낸 시간이 떠올랐다.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았으나 그는 분명 내게 꾸준히 의사를 보여왔다. 마지막에 여느 때와 다름없이 비니를 눌러 쓴 채 고개를 돌려 나를 응시한 게 마지막 신호였다는 것조차 알았다. 그럼에도 애써 모른척했다. 나는 용기가 없었다. 그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게 어쩐지 언니와 나 모두 배반하는 일처럼 여겼다. 어떤 불순물이 감정에 침투할지 못내 두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네가 여기 남아있길 원하는 것 같았고 나는 위험한 임무가 주어지니까 집을 오래 비울 일이 많아 선뜻 널 보호하겠다 나설 자신이 없더구나.”

“괜찮아. 나 역시 당신에게 신세 지는 건 원하지 않아서.”

“그나저나.”

“응?”

“근사하다, 너. 평소 시호와 사뭇 느낌이 달라서 못 알아볼 뻔했어. 물론 원래도 빼어나지만 말이야.”

“무, 무슨 소리야. 메이크업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거겠지.”

원래 그가 누군가의 외모에 감탄하는 스타일이던가. 손을 모아 꼼지락거렸다. 그러다가 무심히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깍지를 낀 두 손은 두툼하고 억센 느낌을 주었다. 반지 없는 손가락이 휑하게 보였다. 의외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꽤 흘렀고 그도 미국에서 당연히 새 연인쯤은 만들 시기라 여겼다. 물론 언니를 잊고 연인을 만들었으면 그를 괘씸하게 여길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든 그를 미워할 거리를 만들려 애썼던 것 같다.

조금 느슨해진 분위기에 마음을 내려놓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러다가 안내방송에 대화가 잠시 끊겼다. 곧 결혼식이 거행될 예정이니 식장으로 입장하여 착석하라는 멘트였다. 우리는 뒷정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가 쿠도 부부의 지인들과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 있는 박사님을 보았다. 박사님께 다가가 곁눈질을 하며 타박했다.

“정말, 박사님. 어디 계시다 이제 나타나시는 거예요!”

“아, 하하하. 미안하구나. 아니, 아카이 군 아닌가? 못 올 거라 생각했는데 웬일인가.”

“박사님, 인사가 늦었습니다. 끝나고 마저 이야기 나누죠.”

신랑 측 하객 좌석이 남아 아카이 씨와 나는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세계적인 소설가와 한 시대를 풍미한 여배우의 아들 혹은 일본 경찰의 구세주라는 명성에 걸맞게 식장은 하객들로 빼곡했다. 위풍당당한 걸음걸이의 쿠도 군에 이어, 하얗고 화려한 면사포를 늘어뜨리며 모리 씨가 입장을 마쳤다. 미래를 그려갈 젊고 아름다운 한 쌍의 남녀의 뒷모습. 호화로운 예식장의 분위기. 주례사의 점잖은 목소리. 어느 것에도 좀처럼 집중할 수 없었다. 그저 그 둘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아카이 씨의 옆모습을 잠시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간만에 만난 그는 더 농염하고 여유로운 남자의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멘트에 맞춰 박수치는 손과 자세를 고쳐 앉을 때 코에 스치는 옅은 코롱의 향. 빳빳하고 검은 수트에 두드러지는 다부진 몸. 남자고 여자고 그를 선망하고 탐하는 시선들. 여기서 신랑과 신부를 제외한 주인공 중 제일을 뽑으라면 단연 그일 것이다.

복잡한 심정이었다. 나는 조직이 와해한 후 방황하며 내가 누군지에 대한 질의를 되놰야 했다. 움푹 팬 자국에 다시 많은 걸 채워나가야 하는 혼돈의 시간이었다. 내 하찮은 상처를 보듬기에 아카이 씨의 열의와 패기는 너무 무궁무진했기에 나는 알아서 그의 인생에서 물러나는 쪽을 택했다. 내 치부와 대조적으로 아카이 씨의 기반은 무척 평탄히 다져져 온 것 처럼 보였다. 위기도 행운도 모두 기회로 삼을 남자였으니.

1부를 마치고 쉬었다 2부를 진행하겠습니다. 각자 휴식을 취하신 후 2부에서 뵙겠습니다.

진행자의 말에 하객들이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나고 곧 홀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스즈키 씨와 핫토리 군 일행은 일제히 신랑과 신부를 향해 재잘대는데 여념이 없었다. 내가 빼앗아 다시 되돌린 저 화기애애한 현장에 자연스럽게 섞여들 배짱이 없었다. 나는 테이블을 짚고 일어났다. 미미하게 현기증이 났다. 아카이 씨는 하객들에게 제공되는 칵테일을 받아서 들고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고개를 돌려 내 쪽을 확인했다. 나는 아카이 씨에게 잠시 혼자 있겠다는 눈짓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경안정제가 든 알약 케이스를 들고 로비로 향했다.

신경안정제를 물과 삼키고 다시 식장으로 들어왔다. 스파클링 에이드 한 잔을 들고 식장 가장자리에 나 있는 테라스로 향했다. 난간에 몸을 기댄 체 에이드를 홀짝거리고 잔을 내려놓았다. 유리 벽을 통해 여유롭게 팔짱을 끼고 있는 아카이 씨가 보였다. 어깨를 들썩거리고 박수를 쳐가며 연회의 무르익은 분위기를 즐기는 동료들과 아카이 씨는 더없이 즐거워 보였다. 그러다가 그와 시선이 몇 번 얽혔다. 괜스레 내 손 안에 안정제가 든 케이스를 쥐었다.

조직에 관련된 모든 것이 정리되고 나는 꾸준히 치료를 병행했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마음이 나아갈 방향은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대답이 없을 질문만 던지기 일쑤였다. 나는 이러고도 살아나가는 게 맞을까. 야속하게도 현실을 버티는 건 잠 못 이루는 밤에 찾아오지 않는 언니를 그리는 일이 아니라 한 움큼의 약물이었다.

그리고 아카이 씨가 남은 일을 처리하기 위해 미국에 귀국시기를 보류하고 수시로 나를 방문했을 때가 제일 고역이었다. 그건 단순히 언니의 수난을 떠올리는 것 이상이었다. 복잡한 머릿속을 해소하기 위해 시큼한 에이드를 마저 들이켰다. 2부를 시작한다는 안내방송을 듣고 테라스에서 나가려는 순간 가슴을 짓누르는 기운에 놀라 힉, 소리를 내며 뒷걸음치다 난간에 부딪혔다. 꽤 오랜만이지만 결코 낯설지 않은 압박감이었다. 두 다리로 몸을 지탱하기가 힘겨워 난간을 부여잡고 고개를 숙여 가쁜 숨을 토해냈다. 눈앞이 하얘지고 누군가 내 몸을 관통하여 심장을 쥐는 압박감에 식은땀이 흘렀다.

어떻게 된 걸까. 분명 조직은 박살이 났다. 진은 내 눈앞에서 권총 자살을 했고 베르무트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아카이 씨는 나머지 간부들과 부하들의 숨통마저 무자비하게 앗아갔다. 내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그가 한없이 잔혹해져야만 했던 모든 순간을 기억한다. 그 기억이 틀린 게 아니라면 이 가슴을 옥죄는, 금방이라도 내 뒤에 다가와 나를 삼켜 저 깊은 절망의 구덩이로 끌어내리려 하는 힘은 단순히 신경 쇠약 직전인 나의 착각뿐인 걸까. 사실이든 착각이든 간에 우선 나는 도망쳐야 했다. 떨리는 두 다리를 끌어 테라스 밖으로 뛰쳐나오면 누군가 내 팔을 붙잡는다.

“악!”

“시호. 괜찮은 건가?”

아카이 씨였다. 나만큼은 아니나 그의 동공도 크게 확장되어 있었다. 내 얼굴은 보나 마나 창백해졌을 터이고,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끌 만큼 목청껏 소리를 질렀으니. 그러나 지금은 부끄러움을 느낄 여유도 그에게 어느 해명을 할 시간도 없었다. 우선 도망쳐야 했다.

“너, 지금 상태가 안 좋아 보여. 박사님에겐 내가 말씀드릴 테니 잠깐 휴게실을….

“괜찮아, 괜찮아. 나, 그저… 화장실을 좀 다녀올게. 신경 쓰지 마. 내버려 둬.”

호의의 손길을 뿌리치고 예식장을 뛰쳐나왔다. 천장의 샹들리에는 떨어져 내 전신에 박히고 상냥한 안내원들은 금세 표정을 굳히고 수트 안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 내게 겨누는 망상에 휩싸인다. 달려야 한다. 더 빨리 달려야 한다. 어떻게든 저길 벗어나야 한다. 이 순백의 장소를 피바다로 만드는 일은 없어야 한다. 절대로, 절대로…. 절박한 다짐을 하고 달리다 보면 발뒤꿈치가 쓰라려 왔다. 구두 뒤창에 긁혀 피가 흐르는 것도 알지 못하고 나는 뛰었다.

한참을 달리다 보면 나는 웨딩홀이 있던 건물의 가장 높은 층에 도착해 있었다. 벽에 손을 받치고 가쁜 숨을 내쉬었다. 의문의 조직원을 따돌렸다고 생각했으나 여전히 심장을 조여오는 압박은 멎지 않았다. 어디선가 뚜벅뚜벅 층계를 통해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이 층으로 올라올 것이고 어디로 숨는다 해도 도망치는 내 뒷모습을 발견할 것이다.

눈을 질끈 감았다. 다리에 힘이 풀리며 주저앉았다. 소용없는 짓인걸 알았기에 몸을 웅크려 실소했다. 기어코 주변인의 희생과 노력에 되찾은 이 일상에도 낙원은 없었다. 나는 그저 고개를 푹 숙인 채 부디 이 축복의 공간에 저주를 받는 쪽은 나 하나이길 바라며 떨고 있었다. 그때 점점 커지던 의문의 발소리가 내 앞에서 멈췄다. 나는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눈에 비친 자는 전혀 뜻밖의 사람이었다.

“아, 아카이 씨?”

“걱정돼서 따라와 봤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너.”

시간이 지난 지금에서야 솔직히 말하자면, 그 순간 아카이 씨를 마주했을 때 그가 오직 나와 단둘이 있는 시간을 의도적으로 만들기 위해 미국에서 일본의 결혼식장까지 왔을 수도 있다고, 남몰래 달콤한 착각에 빠지곤 했다. 그만큼 그날의 그의 행동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상하고 야릇했다.

“길게 설명할 시간이 없는데, 나 느껴졌어. 누군가 날 주시하고 계속 쫓는 느낌이 들어서. 당신도 안전하지 못해.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얼른 도망쳐. 제발.”

“내가 여기까지 올라오는데 별다른 기척은 없었어. 결혼식을 끝까지 보기는 힘들 것 같고 우선 내려가서 나와 쉬고 있는게."

그렇게 실랑이하던 아카이 씨와 내 사이의 절박한 분위기를 깨듯 더 큰 발소리가 멀찍이서 들려왔다. 내 심장 박동은 그 발소리에 맞춰 솟구쳤다. 그때였다. 그가 내 손목을 붙잡고 복도 끝에 위치한 거대한 컨퍼런스 홀로 발길을 돌렸다. 우리는 홀로 들어가 넓게 쳐져 있던 커튼 뒤로 숨었다. 아카이 씨가 커튼을 덮는 동시에 의문의 발소리가 홀 앞에서 멈췄다.

커튼 사이를 헤치고 새들어온 아주 흐릿한 빛에 겹쳐 그의 실루엣이 아른거렸다. 아카이 씨의 모든 행동은 섬세하고도 거침없었으며 우아했다. 홀 바깥에서 어슬렁거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러나 내 등에 팔을 두르고 나를 완전히 감싸고 있는 아카이 씨의 대담함 때문에 겁에 질린 티를 낼 수 없었다. 우리는 그 좁고 어두운 공간에 숨어 거의 부둥켜안는 자세로 서 있었다.

내 뺨에 그가 입은 정장의 매끄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발소리가 커지고 있다는 사실도 잊을 만큼 아찔한 향이 강렬했다. 그러다가 의문의 자가 홀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무의식적으로 헉, 소리를 내뱉고 놀라 입을 가리자 갑자기 그가 내 손을 잡고 끌어내렸다. 그리고 내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 대더니 입을 감싸며 입 모양으로 말했다.

전부 괜찮을 거야.

아카이 씨의 깊은 눈과 손짓과 입술이 오직 그 문장을 내게 전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 언니가 왜 그에게 정처 없이 빠져들었는지 알 것 같았다.

마법같은 짧은 문장을 인지하기까지 뚝뚝 끊겨 도무지 온전히 연결되지 않는 순간이었다. 괜찮을 거야. 그건 언니의 입버릇이었다. 안개가 무겁게 내려앉은 나의 외길을 다독이는 위로였다. 아무것도 나아지는 건 없고 우리의 목숨을 쥔 자들이 사라지지도 않고, 더 나은 내일이 올 거라 장담마저 할 수 없지만 어찌 됐든 결국은 살아가게 될 거라는 일시적인 착각에 들게 하는 문장.

발걸음이 우리를 가린 커튼 주변을 배회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럴수록 내 몸을 끌어당기는 커다란 손의 감촉은 더 생생하게 다가왔다. 신기하게도 당장 커튼을 들춰 우리를 위협한다고 해도 무섭지 않을 것 같았다. 그때 그와 나에게만 통용되는, 소리 없는 언어가 지탱하는 투명하고 단단한 세계로부터 보호받고 있었다. 도리어 신경이 다른 곳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긴장하여 살짝 찌푸린 미간과 그 밑에 검고 윤기 나는 머리카락에 덮인 눈썹이 보였다. 그가 숨을 쉴 때마다 꿈틀거리던 목울대. 내 얼굴에 닿던 단단한 품. 나의 눈은 쉴 새 없이 그를 새기고 탐닉했다.

내 착각인지 커튼으로 가려진 작고 어두운 공간에 차차 열기가 오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곧 나만의 착각이 아니었다는걸 알게 되었다. 밖을 주시하던 맹렬한 눈빛이 점차 누그러지며 가만히 내 쪽을 향하던 순간. 그는 잘 감추었다고 착각했겠지만 분명히 그건 나를 향한 시선이었다. 내 입술과 목과 쇄골에 닿던, 눅눅하나 결코 불쾌하지 않던 시선. 도리어 속이고 속아주는 척 하며 서로를 제 안에 가두는 이기적인 시선. 그 시선이 엉킨 공간 속에서 눈을 깜빡이고 숨을 내쉬는 것 조차 속마음을 들키는 것 같아 경직되어 그저 잠자코 안겨 있었다.

우리를 찾으려 홀 안을 둘러보던 발소리가 헛수고로 끝나고 점차 작아져 완전한 고요함만이 감돌았다. 그럼에도 어쩐지 그에게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겹친 두 몸 사이로 쉴 새 없이 순환하며 고조되는 박동 소리만 또렷하게 들려왔다. 한참을 그렇게 그의 품 안에 갇혀있다 보면 서서히 그의 손이 내 머리에서 떨어졌다. 그 짧은 순간에 응축됐던 온갖 감정이 한꺼번에 떨어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당신이 딱 거기까지만 한 것에 대한 안도감과 아쉬움. 당신의 절제력을 시험해보고 싶은 못된 충동.

우리는 그렇게 십여분 가량을 커튼 안에 숨어 있었다. 수상한 자의 기척이 가셨다 하더라도 완전히 방심할 수 없다고 느낀 건지 그는 휴대폰을 꺼내 손가락 끝으로 액정을 툭툭 눌러 어딘가로 메시지를 보냈다. 홀로 들어가 난동을 피울 위험성이 있기에 그의 동료들에게 알려 처리를 맡기려는 목적이었다.

메시지를 마친 그가 다시 정장 바지의 주머니에 휴대폰을 욱여넣었다. 일전에 커튼 사이에 미세한 틈을 통해 내다본 것이 의상 착의와 키를 어림잡아 전달하기 위함을 알 수 있었다. 지극히 이성적이고 침착한 수사관의 기질을 그런 곳에서 발휘함에 다시 감탄했다. 그 후에 그가 나를 은밀히 훑는 시선이 그자를 관찰하는 시선과는 다른 결을 띄고 있음을 바랐다.

점점 뒤꿈치가 아파오는 통증도 무디게 느껴질 정도로 한참을 아슬아슬한 공기 속에서 서로에게 온 신경을 몰입한 채 숨어있었다. 그 정적을 깨며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가 내게 휴대폰 액정을 들이댔다. 조용히 속삭이며. 다행히 잘 마무리됐어. 이제 여기서 나갈 수 있어.

저릿한 발목을 티 나지 않게 끌며 다시 예식장으로 내려왔다. 2부가 끝나 하객들은 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내려간 상태였다. 홀 안에는 아카이 씨의 동료들 일부만 남아있었다.

아카이 씨가 그들에게 상황을 전달받을 동안 나는 객석 의자에 앉아있었다. 긴장이 풀려 몽롱한 기분으로 그의 곧은 등을 바라보았다. 차라리 그가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 이 상황이 더 낫다고 해야 하나. 이렇게 마음대로 훔쳐봐도 들킬 염려가 없으니. 홀로 생각에 잠겨있으면 쿠도 군이 다가와 나와 아카이 씨의 동료를 번갈아 본다.

“아카이 씨! 미야노, 너도. 어디 갔던 거예요? 2부 마무리 전에 하객들이랑 포토타임이랑 이벤트가 있었는데. 둘 다 보이지도 않고! 섭섭하게.”

“아. 미안. 그저 술을 좀 마셨는데 어지러워서..."

“거참. 하여간 사람 신경 쓰이게 한다니까. 그나저나, 너 땀을 왜 이리 많이 흘렸어? 머리도 살짝 헝클어진 것 같은데. 어라? 아카이 씨도 그러네. 둘이 뭐한 거야?”

쿠도 군이 몸을 숙여 이리저리 나를 살펴보다가 시선을 아카이 씨에게 돌리자 순간 당황스러워 고개를 푹 숙였다. 마치 아카이 씨와 내가 불경한 짓이라도 하다 걸린 기분이었다. 그러자 아카이 씨가 헛기침을 하더니 쿠도 군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꼬마야. 결혼식이라 들뜬 건 알겠지만 조금 가라앉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자칫하면 네가 큰일 날 수도 있을 일이었어. 자세한 건 내 동료들이 전해줄 거다. 식사는 맛있게 먹도록 하지. 타이밍이 늦었지만 결혼 축하한다.”

아카이 씨가 말을 마치고 어리둥절한 쿠도 군을 뒤로한 채 내게 내려가자고 손짓했다. 등을 스치는 커다란 손의 감촉이 느껴지자 어깨가 오므라들었다. 홀을 나오고 식당으로 내려가며 그와 나의 또각대는 구둣발 소리를 들었다. 내내 내 몸을 감싸고 있던 텁텁한 기운이 점차 걷혔다.

어디 갔었냐는 박사님의 성화도 허기짐을 이기지 못했는지 호화로운 뷔페 앞에서 잠잠해졌다. 나는 조금 기운이 빠져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다 포크를 내려놓았다. 아카이 씨는 동생들 사이에 있었다. 방금 전까지 있던 일이 그에게는 위급상황에 빠진 사람 한 명 구해내는, 지극히 냉정한 정의에 기반한 일처럼 보이게 하는 여유로운 미소를 보이면서.

하객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뜨는 분위기를 따라 나 역시 박사님을 챙겨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갑자기 아카이 씨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고선 내 손목을 잡아 끌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그저 눈을 깜빡거렸다. 당신이 그날 나를 몇 번이나 당혹스럽게 만들었는지 당신은 알까. 그걸 파악할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 그가 덤덤하게 말을 꺼냈다.

“응접실로 가자. 너 발목을 삐끗했잖아. 아까 걸음걸이가 불편해보였어.”

“어?”

그제서야 구두에 쓸려 쓰라린 내 발을 내려다보았다. 괴한을 피하려 급박하게 뛰느라 생긴 상처 때문에 발목 주변이 얼룩덜룩했다.

“이 정도는 큰 상처는 아니라 나 혼자해도 괜찮아.”

“큰 상처가 아니니까 나한테 맡겨도 되는 거 아닌가? 내일 지나면 어차피 난 한동안 널 못 볼 텐데. 그 정도는 괜찮지 않나.”

아카이 씨는 절대 내 손목을 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쩔 수 없이 가볍게 한숨을 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사님에게 눈짓을 보내고 다시 긴장한 상태로 그와 응접실로 걸어갔다.

우리를 쫓던 자는 말단 조직원이었다. 직위는 낮아 조직 내에서 그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으나 조직의 규모에 걸맞게 꽤 수혜를 보던 자였다. 그는 규모가 작은 임무에 한두 번씩 투입되어 벌어들인 자금으로 나름 작은 투자를 하고 있었다. 조직이 와해하며 본거지를 잃은 그는 조직 함락에 쿠도 신이치와 아카이 슈이치가 크게 관여했음을 알고 악의를 품고 있었다. 마침 쿠도 신이치의 결혼이 있다는 걸 알아채어 소동을 벌일 목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아카이 씨가 내 발을 치료해주며 사건의 전말을 묵묵히 전달했다.

“알코올 중독 증세로 정신질환도 생겼던 모양이야. 그러니 관련 없는 사람들이 돌발행동만 보여도 덤벼들려고 너를 쫓았던 거겠지.”

“.......”

“그러니 그의 원한은 너를 향한 게 아니었던 거야. 칼날은 분명 나와 꼬마에게 향했지만 수틀리면 누구든 눈에 뵈지 않던 온전치 못한 놈이었던 거지.”

연고를 바르고 반창고를 붙이느라 세심하게 움직이던 그의 손이 멈췄다. 곧 그의 고개가 치켜 올라가고 시선이 나를 향했다. 언제나처럼 진실을 관철하는 시선 앞에서 아무것도 감출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내가 이전에도 말했듯이 네가 겪었고 겪을 일들은 네 잘못이 아니야. 내 입으로 말하니 얼마나 와닿을지 모르겠지만.”

일전에 커튼 뒤에 그와 숨어 내가 경험했던 고요하게 울렁이던 감정의 접합이 나만의 착각이 아니었음을 그의 말과 태도를 통해 느꼈다. 그래서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이젠 그에게 들켜도 더는 상관없을 거란 생각마저 들었다. 나는 이미 좁지만 붉고 따뜻한 우리만의 공간에서, 당신에게 모든 걸 간파당했으니까. 어쩌면 그보다 한참 전이었을수도.

다음 날 나는 그를 배웅하러 함께 공항으로 향했다. 당연히 그의 가족이 동행할 줄 알았던 나는 그와 동료들 앞에 나 혼자 있는 상황에 무안해졌다. 동료들이 눈치를 보다가 먼저 출국 심사를 받으러 자리를 뜨고 아카이 씨와 나만 남았다. 웅성거리며 캐리어를 끄는 사람들의 소음이 차차 소거됐다. 

이 널찍한 공간에 오직 그와 나만 남겨진, 바로 전날 커튼 뒤에 숨었을 때 내가 느꼈던 울렁거리는 감정이 다시 살아났다. 당장이라도 아카이 씨의 팔을 붙잡고 묻고 싶었다. 내게 더 할 말은 없는 거야? 당신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어? 내가 기억하는 당신의 모습의 대부분은 이렇게 늘 뒷모습이어야만 할까? 입술을 달싹대며 어느 소리도 낼 수 없는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그러자 그가 내 쪽으로 몇 발짝 다가와 말했다.

“나 역시 못다 한 이야기가 많은데 미국에 돌아가도 꾸준히 전달하도록 할게. 건강 잘 챙기고.”

“.......”

손을 흔든 후 그는 뒤를 돌아 탑승장으로 걸어갔다. 그의 뒷모습이 점차 작아져 입구로 들어가 마침내 사라지자 그제야 웅성거리는 소리가 다시 귓가에 퍼졌다. 그에게만 맞춰져 있던 시선도 차츰 분산됐다. 각자 목표하는 곳으로 향하기 위해 분주하게 소리를 내는 몇백쌍의 발들이 보였다. 나와 아카이 씨에게 일어났던 일이 우스울 만큼 세상은 이렇게 쉴 새 없이 흐른다. 그가 사라진 공항에 서 나는 슬픔을 느꼈다. 마음이 닿는 지점이 같아도 거기에 현실을 개입하면 결국 다른 지점이나 마찬가지다. 애써 푹푹 찌는 한낮의 더위라고 여기며 거부했지만 결국 내게 축복과 같던 따뜻함이었다는걸 뒤늦게 깨닫고 후회하는 무력한 식물이 된 기분이었다.

그를 보내고 며칠간 나는 한동안 멍해져 어느 일도 집중할 수 없었다. 이례적인 점은 신경안정제를 먹으며 물리쳤던 우울함과는 분명 다른 결이었다. 더 놀라운 건 복용량을 줄이고도 제법 일상을 버텨내고 있다는 거였다.

우리만의 사소하고 요란했던 소동이 내게 조금씩 고무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물론 마음은 여전히 복잡했다. 아카이 씨가 이런 식으로 나에게 특별한 사람이 되는 건 분명 언니를 져버리는 행동이었다. 그럼에도 우리 사이에 흐르던 어떤 기류가 나만의 착각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미련한 죄책감을 지워버릴 만큼 강렬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용기가 없었다. 공항에서 그저 침묵한 채 내게 무언가를 바랐을 아카이 씨의 기대를 져버렸다.

아카이 씨가 미국으로 떠나버린 시점에서 다시 그의 얼굴을 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설령 내가 과감히 그가 있는 곳까지 대신 간다고 하더라도 무슨 핑계를 대며 그를 마주할 수 있을까? 나는 길지 않은 인생에서 내가 노력해서 바꿀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아카이 씨와의 인연도 마찬가지다. 그는 내게 베풀 수 있는 책임과 정성을 모두 쏟아부었다. 어찌 보면 나를 보호했던 시간도 그가 맡았고 지금도 지겹도록 맡을 임무의 일환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무척 울적했다. 그저 아카이 씨에게 내가 각별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에 안도하고 이 감정을 내 마음 아주 깊은 곳에 몰래 묻기로 다짐했다. 착각하면 그만이다. 언니를 잃었을 때도, 쿠도 군에 대한 감정도 그랬듯 아카이 씨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 다짐이 부디 오래 가길 바랐다.

연구소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의 막바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팀원들에게 지시사항을 전달하고 건물 밖으로 나와 퇴근길 버스에 지친 몸을 실었다. 버스가 출발하자마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턱을 괸 채 차창 너머로 흔들거리며 젖어가는 베이커 가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 곳은 어린아이가 되어 도망쳐 왔을 때와 변한 점이 거의 없다. 변한 건 나였다. 나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자라나 버렸다. 기묘한 성장의 시간 속에는 쿠도 군이 있었고 위기의 순간과 마무리에는 그가, 아카이 씨가 있었다. 찰나에 나타나 파악하기도 전에 사라져버려서 더욱 잊을 수 없는 남자였다. 다시 그날의 정열이 스멀스멀 내 안에서 피어나는 걸 느꼈다. 착각이었다고 내 기억을 퇴색하려 무던히 애써도 내 의지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는 잠들어 있을까. 워싱턴은 새벽일 텐데 거긴 비가 오지 않으려나. 그를 한참 떠올리면 어느새 버스는 정류장에 도착해있었다.

앞머리에 맺힌 물기를 털고 샤워를 간단히 마치고 나왔다. 비는 여전히 가늘고 꾸준히 내리고 있었다. 따뜻한 차 한잔을 들고 책상 앞에 앉았다. 나는 보통 집에서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 간단한 산출물 작업을 하곤 한다. 불필요한 작업을 얼른 끝내고 싶은 마음에 결과보고서 초안만 간단히 작성하고 잠이 들 작정이었다. 그렇게 노트북 모니터를 바라보다가 시선이 메일함 링크로 향했다.

아카이 씨를 홀의 화장실 앞에서 마주했을 때, 그는 꾸준히 내게 메일을 보내왔지만 내게 회신이 없어 섭섭한 기색을 내비쳤다. 사실이었다. 나는 그의 관심이 두려웠고 불편했다. 의도적으로 피한 게 맞았다. 하지만 이제 숨길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다. 나는 서둘러 메일함에 접속했다.

이제 그를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스크롤을 내려 수신 목록을 확인하다 그리운 이름을 발견했다. 아카이 씨의 이름으로 새 메일은 세 통이 와 있었다. 밑에는 이전에 보냈으나 내가 답장하지 않았던 예전 메일이 수두룩했다. 일부러 접속하지 않아 알림을 확인하지 못했다. 천천히 한 통씩 읽었다. 첫 번째는 미국에 막 입국했을 때 보낸 것으로 보였다.

공항까지 바래다줘서 고맙다. 잘 들어갔니. 오랜만의 비행은 힘들더군. 널 만난 대가라고 생각하고 버티다 보니 어느새 도착했어. 집에 도착해서 짐 정리하고 시간 남을 때 또 메일 보낼게.

가늘게 소리를 내며 탄식했다. 가슴 속이 뭉클해지며 퍼지는 그리움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는 내가 귀를 막고 있어도 그동안 쉼 없이 이런 마음을 전달하고 있었다. 도리어 그를 착각에 들게 한 건 나였다. 황급히 다음 메일을 읽어보았다. 첫 메일 이후로 이 주가 지난 시점이었다.

확실히 이 곳도 쌀쌀해지기 시작했구나. 발목은 이제 괜찮은가. 잘 아물었으면 좋겠는데. 본부는 매일 흉악한 사건사고로 쉴 새 없이 바빠서 골머리를 앓는 중이야. 네가 사는 곳도 꼬마가 있는 동안은 이 곳과 맞먹었지. 베이커 가와 떨어진 곳에 신혼집을 얻었다고 하니 너에게는 해가 안 가 다행이지만 그 동네 사람들은 애 좀 먹겠어.

나지막하게 웃음이 터졌다. 분명히 이 메일을 보내면서 본인 나름대로 유머를 섞었다 자부했겠지. 아카이 씨가 내게 못다 한 말들이라는 게 이런 걸까. 그도 한 자 한 자 적을 때 얼마만큼 용기를 냈을까 떠올리며 어제 도착한 세 번째 메일을 읽었다.

박사님으로부터 네 소식은 잘 전해 듣고 있다. 연구 때문에 피곤해 보인다는 이야기를 하시더군.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네게 연락 한 통 없으니 매번 여쭤볼 수밖에. 점 하나라도 찍어 보내면 마음이 좀 놓일 텐데. 뭐라 하는 건 아냐. 네가 치열히 살고 있다는 증거겠지. 멀리 떨어진 이쪽에서도 기사가 날 만큼 대단한 결과물이길 바란다. 이미 넌 혼자서도 해낼 경지에 다다랐으니. 다만 잠은 좀 잤으면 해. 그럼 이만.

거리와 시간이 나를 앞으로 얼마나 좌절시킬지는 알 수 없었다. 내가 발버둥 쳐도 바뀌지 않은 일들이 나에겐 수많이 있었다. 무언가 바뀌지 않아도 좋다. 그저 당신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그날 당신과 내가 느낀 건 결코 착각이 아니었다는걸. 나는 당신에게 그걸 알려주기 위해 이렇게 자라났고 지금도 살아나가고 있다는 걸. 나는 당신과 이렇게 단단하고 끈질기게 연결되어 있다는 걸. 우리는 그날 그 장소에서 서로에게 단 하나뿐인 남자와 여자였다는 걸. 당신이 모두 괜찮을 거란 말이 빈 말이 아니게 될 만큼 난 더 괜찮아질 거라는걸. 나는 상단에 있는 답변 버튼을 클릭하여 글을 적어나갔다.

점 하나만 보내는 건 너무하니까 내용을 더 붙일게. 발목은 낫고 있어. 당신이 손 봐준 덕분인가 봐. 연구는 이제 마무리 단계야. 그리고 더 이상 박사님을 통해 내 얘기 듣지 않아도 돼. 당신의 이야기도 궁금해지네. 바쁘지 않을 때 답장 기다릴게.

짤막히 써 내려간 후 심호흡을 하고 나의 첫 메일을 발송했다. 두근거리는 이 상태로는 어느 간단한 작업도 손에 잡힐 것 같지 않아 그대로 전원을 끄고 노트북을 닫았다. 나른한 기분에 눈을 천천히 감으면 붉고 보드라운 벨벳이 피부에 스치는 상상을 한다. 아카이 씨가 날 감쌌던 그때를 떠올리면 그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나는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창문에 붙은 투명한 유리알들이 반짝거렸다. 비가 그친 하늘은 짙고 고혹적인 쪽빛을 띄고 있었다. 내 굳은 흉터를 가르고 그 틈으로 빛이 스며드는 느낌이 들었다. 선연한 광경을 눈에 담으며 미국의 새벽이 지나고 동이 틀 때 답장을 받고 깜짝 놀랄 그를 떠올리면 아릿한 그리움이 퍼진다. 스탠드 불빛을 낮추자 탁자 위에 우두커니 놓인 하얀 약통이 보였다. 조만간 이걸 아예 치울 날이 머지않은 것 같다. 그런 반가운 소식은 당신에게 제일 먼저 전할게. 곧 아침을 맞을 그곳의 당신에게, 굿모닝.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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