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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semblage (3)

K=Potassium by KPo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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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무슨 그림을 그렇게 보고 싶었던 거야?"

갤러리 1층에서의 담소를 마치고 3층의 화장실로 향하던 나무의 뒤를 쫓은 유신이 물었다. 2층으로 향하는 유일한 통로인 경사로에는 그들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던 동현과 유신은 어느새 안채 쪽으로 사라져 경사로 난간 아래로도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앞서던 나무가 그녀를 흘긋 돌아보았다. 다리는 멈추지 않는다.

"화장실에 가고 싶었던 건 사실이야."

"정말로? 그런 것치곤 걸음이 빠르진 않은걸."

"작품을 보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고."

난간 반대쪽에 뚫린 통창 너머로 번개가 번쩍였다. 그보다 한발짝 늦게 우르릉, 하며 천둥이 제 존재를 알린다. 비바람은 아직도 거칠게 부산을 헤집어놓고 있는 모양이었다.

"날이 정말 안 좋아."

나무의 새하얀 와이셔츠의 등판을 쳐다보며 유신이 말했다.

"그렇네."

뒤통수를 보인 나무가 무감하게 대답했다.

"이렇게 축축한 날이면 괜히 기분이 가라앉지 않아?"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는 생활을 했다면 그랬겠지만, 지금은 디지털로 작업하니 가라앉을 이유가 없지."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고 싶은가 보네?"

나무는 다시 그녀를 흘끔였다. 경사로의 끝이 보이던 참이었다.

"도화지보다는 캔버스가 좋아."

그리고 그는 도로 고개를 돌렸다.

2층에 들어서자마자 왼편으로 커다란 천막이 보였다. 전시 작품을 하얀 천으로 덮은 것이다. 천 아래에 무엇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작가 이아영만 알고 있다. 작품을 완전히 덮지 못하고 슬쩍 들린 천 밑으로는 마네킹들의 발이 수없이 늘어서 있었다. 저마다 전부 색이 다른 게 어딘가 으시시하다.

자유 관람이 진행되었던 아까는 작가의 방이 훤히 열려 있었지만, 지금은 폴딩 도어가 닫혀 작가가 안에서 어떤 작업을 하는지 들여다 볼 수 없게 되었다. 폴딩 도어 왼편의 관계자용 문도 꼭 닫혀있다. 정사각형 모양의 문에 작게 난 불투명한 창문 안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이 작가가 그 안에 있음을 시사하기나 한다.

"아직 그 선생님이라는 분이랑 있나 봐."

유신이 속닥댔다. 작가의 방의 주인, 이아영은 분명 한선혜와 상의할 일이 있다고 했었다. 이후 그대로 경사로를 올라 2층으로 향했고, 적어도 그 후 경사로를 내려오는 걸 보지는 못했으니 별 일이 없다면 두 사람은 이 안에 있으리라.

"그런가 보네."

"화장실 먼저 갈 거야?"

"그러려고."

두 사람은 2층을 가로질러 엘리베이터로 향한다. 3층에 머물러 있던 엘리베이터는 나무의 부름에 따라 2층으로 천천히 내려온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탑승한다. 표시등 아래에 2층과 3층, 옥상의 버튼이 한 줄로 늘어서 있었다.

대화를 나눌 틈도 없이 3층에 도착했다. 닫힌 보람도 없는 문이 열린다. 빵을 굽는 듯한 고소한 냄새가 확 풍겼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곧장 보이는 것은 레스토랑의 텅 빈 경관이다. 거리를 넓게 두고 배치된 테이블들 뒤로 난 통창에 두 사람의 모습이 비쳤다. 해가 저물어버린 밖은 빛 하나 없이 어두컴컴하다.

저녁을 준비하겠다며 레스토랑으로 올라온 도슨트 두 명은 오른편의 주방에 있었다. 오픈형으로 만들어진 주방 안에서 은수와 서진이 오븐을 조작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인기척을 느꼈는지 손님 두 사람을 돌아본다.

"무슨 일이십니까?"

무언가의 벌크 제품을 재포장하던 은수가 물었다.

"화장실을 쓰려고 왔습니다."

나무가 대답했다.

"화장실은 객실에도 있습니다. 다음부터는 그쪽을 이용하시는 게 편하실 겁니다."

"예. 감사합니다."

상황을 설명할 마음은 없는지, 나무는 짧게 대답하곤 화장실 안으로 사라졌다.

홀로 남은 유신은 새카만 통창 근처로 다가갔다. 어둠으로 가득한 시야는 1층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흥미가 떨어져서, 그녀는 주방으로 다가간다. 오븐 안을 들여다보고 있던 서진이 주방과 식사 공간을 가르는 낮은 벽 너머로 유신을 쳐다보았다.

"아, 안녕하십니까......"

여전한 곱슬머리를 괜히 매만지는 서진이다.

"냄새 좋다. 빵 같은 거 구워요?"

"예, 옙... 냉동 생지가, 있어서. 굽기만 하면 되어서요......"

"무슨 빵인데요?"

"그, 크로와상...... 입니다."

유신이 살금살금 오픈형 주방의 출입구 쪽으로 향하더니, 서진이 들여다보고 있던 오븐을 쓱 들여다보았다. 갑작스러운 침입에 서진은 흠칫 놀란 것처럼도 보였다.

거대한 냉장고를 열어 남은 음료를 꺼내던 은수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리셉션에서 보았던 무알콜 샴페인과 알로에 주스를 병째로 검은 장갑을 낀 양손에 들고 있다.

"죄송합니다. 메뉴는 그리 다양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뭘요. 도슨트 분들이 이런 업무까지 하셔도 되나요?"

"괜찮습니다. 한 선생님의 보좌 업무도 겸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니까요."

조리대에 주스병을 내려두며 도슨트가 말했다. 뜬금없이 찾아온 손님에게 음료라도 내주려는 듯 뒤집혀있던 컵을 두 개 꺼내든다. 보좌 업무라고는 하지만 설마 갤러리에서 음식을 준비하게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달리 원하시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알로에로 괜찮으실까요?"

유신은 괜찮다는 듯이 가볍게 눈웃음을 쳤다. 도슨트는 얼음으로 가득 찬 제빙기를 열어 한 스쿱 씩 잔에 담는다. 알로에 주스를 따르기까지 채 삼십 초도 걸리지 않았다. 능숙한 움직임이다.

"아! 맞아, 여쭤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요."

"저에게요?"

"네, 네."

의아함을 내비치는 은수에게 유신은 갤러리 1층 소파 세트에서 지인들과 나누었던 잡담의 내용을 전달했다. 독특한 배색이 특징인 화가 오지민, 그리고 그녀의 작품 『평생의 친구 2』. 달팽이라는 대상을 그녀 특유의 방식으로 왜곡하여 그려낸 추상화에 가까운 정물화. 그녀는 왜 그림에 평생의 친구라는 제목을 붙였을까.

나무의 이런 가설을 제시했다. 달팽이를 왜곡하여 나타내긴 했지만 실은 그것은 단순한 달팽이가 아닌 달팽이관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지민과 친한 예술가 안승현은 인공 와우를 착용하고 있다. 거기에서 영감을 얻어 달팽이관을 캔버스에 그려냈고, 그 '달팽이'는 죽을 때까지 우리의 귀 속에 자리잡고 있기에 '평생의 친구'가 되는 것이라고.

"그 해석이 맞습니다."

알로에 주스는 이미 테이블에 앉은 유신에게 두 잔 모두 전달되었다. 이젠 크로와상과 세트가 될 음료를 준비하는 듯, 길쭉한 잔에 음료를 하나하나 따르며 유신의 이야기를 듣던 은수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서진은 음료가 담긴 잔을 쟁반으로 옮기고 있었다.

"와, 정말요?"

"네. 오지민 화백은 우리와 평생 함께하는 장기를 다른 대상에 투사하고 또 그 대상을 왜곡하여 화백 특유의 색감으로 표현해냈습니다. 그게 '평생의 친구 연작' 입니다. 총 세 점의 정물화로 이루어진 연작은 각각 눈, 귀, 발을 상징하는데요. 눈을 상징하는 『평생의 친구 1』에는 필름 카메라가 변형된 모습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거기까지 말하고 은수는 엘리베이터 근처로 시선을 보냈다. 나무가 화장실에서 걸어나오고 있었다. 기분 탓인지 몰라도 화장실에 들어가기 전보다 안색이 한결 나아 보인다. 은수는 그의 등장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손은 줄곧 음료를 분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갤러리에 전시된 『평생의 친구 2』는 귀를 상징하는 달팽이가 그려져 있습니다. 마지막이 발을 상징하는 『평생의 친구 3』인데요, 무엇이 그려져 있을 것 같습니까?"

"발이요?"

뒤늦게 나타난 나무가 눈을 끔뻑였다. 유신의 짤막한 상황 설명을 듣고 나서야 그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테이블에 앉아선 유신과 함께 주문하지 않은 알로에 주스를 기울인다.

"글쎄요. 복숭아 정도 아니겠습니까?"

"어째서죠?"

"복사뼈라는 게 있으니까요. 그 외에는 뭐 생각나는 게 없군요."

"상식적인 추론입니다만, 아쉽게도 아닙니다."

텅 빈 알로에 주스 병을 부엌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은수가 일갈했다.

"『평생의 친구 3』에는 화살이 그려져 있습니다."

"......화살?"

"정확하게는 독이 묻은 화살입니다. 하지만 화백의 배색이 워낙 특이해서, 대부분의 관람객들은 그저 화살촉의 색이 조금 독특하다고 여길 뿐입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있던 나무는 그제야 눈꺼풀을 평소의 수준으로 들어올렸다.

"아아, 아킬레스건이군요?"

"잘 아시네요. 아킬레스건의 유래가 되는 그리스 신화의 영웅 아킬레우스는 발뒤꿈치에 독이 묻은 화살을 맞고 절명했습니다. 그것을 표현하기 위한 화살이라고 합니다만, 아무래도 메타포를 한 번 뒤튼 작품은 직관적으로 알아보기 힘들죠."

해설을 계속하던 도슨트는 서진이 쟁반으로 옮긴 잔을 오와 열에 맞추어 배열하기 시작했다.

"이번 전시의 주인공 이아영 작가는 다양한 동료 작가들에게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영향을 받은 작가들의 작품을 함께 전시하기로 가닥이 잡혔는데, 그 때 오지민 화백의 '평생의 친구'를 전시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전시 공간 문제로 연작 세 작품 중 한 작품만을 골라야 했습니다. 눈과 카메라, 귀와 달팽이, 발과 독화살 중 어느 것이 관람객들에게 유의미하게 어필될 것 같습니까? 당연하게도 달팽이였습니다."

"실제로 제 친구가 속뜻을 읽어내기도 했고요."

유신이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나무는 그녀를 곁눈질하다가 무심하게 말했다.

"그런 것치곤 오지민 화백도 동료 작가들에게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군요."

"그렇습니다. 눈, 귀, 그리고 발이니까요."

"서로들 많이 친하던가요?"

"표면적으로 그러한 친교가 이루어지는 게 확인됩니다."

고소한 냄새를 연신 풍기던 오븐이 땡 하는 소리와 함께 붉은 빛을 거두었다. 어느새 손에 두꺼운 주방 장갑을 끼고 있던 서진이 오븐을 열어 팬을 끌어낸다. 반질반질한 윤기가 흐르는 크로와상이 족히 열 개는 보인다.

"표면상으로는, 말이죠."

서진은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크로와상을 바구니에 담는다. 크로와상 생지 봉투에서 새로운 냉동 생지를 꺼내던 은수가 나무에게 차가운 시선을 날렸다.

"내면적으로도 그러하니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결과가 드러나는 것으로 사료됩니다만."

"그런가요? 작품에 있어 영향을 주고받는 건 작가들 사이의 감정과는 크게 상관이 없을 것 같은데."

은수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크로와상을 안채의 로비 테이블로 옮겨달라는 부탁을 받은 두 사람은 빵이 잔뜩 담긴 바구니와 함께 레스토랑을 나섰다. 알로에 주스를 두 잔이나 얻어 마셨으니 합당한 요구이긴 했다. 바구니를 품에 안는 건 당연하게도 나무의 몫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으로 내려가, 올라왔을 때와 같은 경로로 2층을 가로질러 경사로로 향하고 있을 때였다.

작가의 방의 두툼한 문이 열리고 아이보리색 정장의 평론가가 튀어나왔다. 입가에 손수건을 대고 연신 콜록대고 있기에, 나무는 일순 불이라도 난 건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연기 같은 것은 흘러나오지 않았다. 영우는 기침을 추스리면서 문을 닫다가, 크로와상을 품에 안은 나무와 유신을 보고 아는 체를 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유신이 선수를 치고 물었다. 영우는 굴곡이 뚜렷한 얼굴을 찌푸리면서 웃는다.

"아아, 아뇨. 아무 일 없습니다. 전시 평론에 대해 상의해야해서 잠깐 얼굴을 뵈러 왔는데...... 먼지가 엄청나더군요."

확실히 그랬다. 작가의 방 공개 전시가 진행되던 아까도 분진이 상당한 수준으로 날리곤 했다. 지금은 환풍기의 덕인지 아니면 간단하게 청소를 한 건지 몰라도 2층 장내에는 분진이 보이지 않지만, 아직도 작업을 계속하고 있는 작가의 방 안은 분명 분진 투성이리라.

"저는 기관지가 좋지 않아서 말입니다. 전시 때도 마스크를 끼고 보았습니다."

영우가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지금은 마스크가 없으신가 봐요. 손수건을 들고 계시네요?"

"예. 그건 아무래도 일회용이라서요. 작가의 방에 한 번 더 들어갈 일이 생길 줄 알았으면 버리지 않았을 텐데요......"

하기사 공개 전시가 끝난 후 폭풍우로 나가는 길이 막혀 귀가할 수 없어지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기관지가 좋지 못한 평론가는 고개를 돌리고 잔기침을 했다.

"도슨트 분들이 밤참을 만들고 계시더라고요. 가서 드시죠."

유신의 제안에 세 사람은 함께 경사로를 따라 1층으로 향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된 것은 필연이었다. 대체로 안면이 있는 유신과 영우가 대화를 나누었고, 나무는 유신의 옆에서 크로와상 바구니를 든 채 묵묵히 그들의 대화를 듣기나 했다.

영우는 이번 전시의 보도 자료 구성에 도움을 주기로 한 듯했다. 원활한 평론을 위해 이아영 작가의 경력 및 이번 전시에서 공개되는 주제작 『조화』의 정보를 사전에 습득하기도 했단다. 갤러리에 갇히게 된 지금 시간을 허투루 쓸 수는 없어 가지고 있던 스마트폰으로 평론의 초고를 썼고, 컨펌을 받기 위해 아영이 있는 작가의 방으로 찾아갔다고 한다.

"아영 씨의 방문을 두드렸는데 반응이 없으셔서, 혹시 작가의 방에 가 계신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정말로 작가의 방에 있었다. 그것도 그녀의 스승 한선혜와 함께. 두 사람은 『조화』에 사용할 마지막 오브제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 『조화』는 다양한 질감의 마네킹과 사람 형태의 조각을 사용하여 제작한 설치형 작품이다.

작가의 방 가운데에 놓인 커다란 테이블 위에는 옷가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단순한 마네킹이 누워 있었다. 얼굴 묘사가 들어가지 않은 매끈한 얼굴과 옷가지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의 마네킹이 테이블에 위를 보고 누워 있으니 꼭 수술대에 누운 환자를 보는 것 같았다고 한다.

기관지가 좋지 못한 영우는 가지고 있던 손수건으로 입가를 가리고 그들에게 초고를 보여주었다. 본래는 아영에게만 확인받으려고 했던 것이, 그녀의 스승이자 영우가 흠모하는 대상인 선혜에게까지 전달되어 적잖이 긴장을 했던 모양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오케이 사인은 떨어졌지만 긴장한 탓인지 아니면 방 안에 가득한 먼지 탓인지, 자꾸만 기침이 나와 급하게 작가의 방을 나왔다. 그렇게 크로와상을 든 두 사람을 마주친 것이다.

"작가의 방 안에는 창문이나 환기구가 없습니까?"

크로와상 바구니를 소중하게 들고 있던 나무가 물었다.

"아뇨, 창문도 있고 환기구도 있습니다. 그런데 날이 이런지라 창문은 열지 못하고 있고요, 환기구의 환풍기는 줄곧 돌아가고 있더군요. 환풍기 하나로는 역부족인 상태라 그렇지......"

그러니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마스크를 써야 할 정도로 기관지가 좋지 못한 영우는 버티기 어려웠던 것이다.

갤러리 건물의 긴 곡선 면을 따라 지어진 경사로를 절반 쯤 온 지점에서 대화의 주제가 바뀌었다. 『평생의 친구 2』에 대한 도슨트 최은수의 해설. 인간의 장기를 다른 대상에 투사하여 그려낸 작품. 눈과 카메라, 귀와 달팽이, 발과 독화살.

"아, 그런 거였군요. 부끄럽지만 짐작도 하지 못했습니다."

영우가 눈썹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눈, 귀, 그리고 발이라. 오지민 작가가 주변 작가들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면, 역시 귀는 안승현 작가일 테죠."

"청력이 안 좋으신 건가요? 그 분."

유신이 머리카락을 한쪽 귀 뒤로 넘기며 물었다.

"예. 몇 년 전에 돌발성 난청을 앓으셨습니다. 안승현 작가는 음파에서 영감을 얻어 작품을 제작하곤 했는데요, 대표작 『공간의 행간』도 그렇고요. 난청 발병 이후로 청력을 많이 손실하셔서 요즘은 또 스타일이 바뀌신 걸로 압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스타일이 바뀌었다는 건? 청력 문제로 더 이상 음파를 다룰 수 없게 되었다는 건가요?"

"아니요, 베토벤도 청력을 잃고도 음악 활동을 계속하지 않았습니까? 안승현 작가는 특히나 음파를 단순히 소리라는 결과로만 다루지 않고 순수한 물리량으로 바라보곤 했습니다. 물리량을 판별하는 데에는 청각은 필요하지 않죠. 다만, 청력이 손실된 이후로는 음파 사이의 공백, 즉 침묵에 집중하는 경향이 점차 커져가고 있습니다."

"그럼 발은 한 선생님을 의미하는 거겠군요."

나무가 대뜸 입을 열었다. 나머지 두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린다. 그는 아랑곳 않고 말을 잇는다.

"눈은? 짐작가시는 곳이 있으십니까?"

"눈은...... 으음."

미소를 잃지 않던 영우의 굴곡진 얼굴에서 순간 웃음이 사라졌다. 특이적인 변화다, 라고 나무가 생각하기도 잠시, 그는 능숙하게 입꼬리를 들어올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연속성을 유지했다.

"잘 모르겠군요."

이렇게 나온다면 억지로 캐낼 수도 없는 법이었다.

"최근에 죽은 아영이 친구가 색약이었다나봐."

유신이 말했다. 그녀는 창가 옆의 작은 테이블에 앉아 로비에서 가져온 크로와상을 먹고 있었다. 평범하게 냉동 생지를 구워 만든 맛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무언가를 뱃속에 넣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던 나무는 일인용 침대에 천장을 보고 일자로 누워 있었다.

"색약?"

"운전하다가 신호등을 잘못 봐서 교통사고가 났다고 하던데."

"신호등을 잘못 봐?"

"색약인 사람들은 빨간색이랑 노란색이 구분이 잘 안 된다나 봐."

"그렇다 해도 위치가 다른데 헷갈릴 수가 있나?"

나무가 하품했다.

"그래서 아영이도 납득이 안 되는 것 같았어. 많이 슬퍼 보이더라고."

"납득이 되든 안 되든 죽은 사람이 돌아오지는 않지. 이아영 작가는 그 얘기를 하려고 널 불러냈던 거야?"

"그렇지? 만난 김에 이런저런 얘기도 좀 하고. 비보에 대한 위로도 듣고."

"친한가?"

"나랑 아영이?"

"응."

"글쎄에. 나야 만나는 사람이 많으니까 그렇게까지 친하다는 느낌은 없지만, 아영이는 또 모르지. 원래 예술가라는 사람들은 되게 고독한 법이잖아."

"그래? 나는 예술가는 못 될 모양인가 보군."

남은 크로와상을 한입에 넣고 우물거리던 유신이 나무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시선을 느낀 나무는 눈동자만을 빙글 굴려 그녀와 눈을 맞췄다. 크고 빛나는 다갈색 눈동자가 그곳에 있었다.

"그림이 그리고 싶은 거지?"

크로와상을 삼킨 유신이 물었다.

"그림이라면 매일매일 그리고 있어."

"모른 척 하기는."

"지금의 생활으로도 만족해."

"정말로?"

"정말로."

나무는 그리 말하고 안경 뒤의 눈을 감았다. 이 대화는 여기서 끝이다, 라는 시그널은 아니었다. 일 분도 지나지 않아 눈을 뜬 것을 보면.

"색약인가......"

"그게 왜?"

유신은 녹빛 커튼을 닫았다. 창으로 들어오는 빛은 한 톨도 없었지만, 아마 방 안의 빛이 빠져나가는 걸 염려한 게 아닐까.

"죽은 사람도 예술가였던 건가, 싶어서."

"무슨 소리야?"

"귀는 청력을 손실한 안승현 작가, 발은 다리를 움직일 수 없는 한 선생님. 둘 다 예술가지. 그럼 눈에 해당하는 그 사람도 예술가일 거라는 추측이 되지 않나?"

"에이. 꼭 영향을 예술가끼리만 주고받나?"

"서로들 작품을 많이 참고하곤 하니까."

유신은 이제 테이블에 턱을 괴기 시작했다. 어깨선을 타고 흘러내린 갈색 머리칼이 전등 빛을 받아 연하게 빛났다.

"그 사람이 예술가인 게 중요해?"

"아니. 하나도 중요하지 않지."

"꽤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 물어보는 거야."

"심각하지 않아. 단지 무료할 뿐."

턱을 괴고 앉아있던 유신은 테이블과 짝을 이루는 디자인의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대로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는다. 그녀가 늘상 뿌리는 이름 모를 향수의 냄새가 훅 풍겼다.

"여긴 좁아."

나무가 일갈했다. 안경 밑으로 손을 넣어 마른 세수를 한다.

"그리고...... 피곤하군."

"나를 너무 색골로 보고 있는 거 아니야?"

"그럼 왜 거기에 있지?"

"매트리스가 얼마나 푹신한가 보려고."

"허튼 소리 하기는......"

잠시 육체적인 실랑이가 있었다. 본래 일정대로였다면 지금 이 시간에는 부산 바닷가의 어떤 호텔방에 있었을 두 사람이다. 그런 사실 여하를 떠나 그들이 현재 위치하고 있는 갤러리의 숙박 시설에서 행하기에는 부적절한 행동이었음이 확실하다.

두 번째의 터치가 끝났을 때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객실의 문을 두드리는 건 아니었다. 소리가 나는 방향을 보아 유신의 객실 문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재빠르게 안정을 찾는다.

"안에 계십니까?"

도슨트 최은수의 목소리였다. 유신이 나무의 침대 위에 있는 한 그녀의 객실에 누군가 있을 리는 없다. 은수는 아무 반응이 없는 객실의 문을 한 번 더 두드렸다.

"안 계십니까?"

이내 들리기 시작한 그녀의 발소리가 점점 커져왔다. 나무의 객실 문을 두드리기까지 정확히 4초가 걸렸다.

"안에 계십니까?"

"네."

객실의 주인인 나무가 현관문을 열고 그녀를 맞이했다. 유신은 아무렇지 않게 녹빛 커튼을 열고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뚝뚝한 얼굴의 은수는 나무의 어깨 너머로 객실 안을 슬쩍 살피는가 싶더니, 평소보다 조금 더 무심한 말투로 안내했다.

"로비에 빵과 음료를 준비해두었습니다."

"아, 예."

"여유가 있으실 때 자유롭게 가져가십시오."

나무가 뭐라 변명하기도 전에 현관문이 닫혔다. 어쩐지 아주 오랜만에 낭패한 기분을 느끼며, 나무는 그대로 현관에 놓인 자신의 구두를 신고 객실을 나섰다. 유신이 뒤에서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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