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semblage (4)
도슨트 서진의 부름을 받고 동현은 지하 홀에 있던 두 사람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도슨트 은수를 줄곧 의심하던 둘은 먼저 1층 로비에 내렸다. 동현은 객실에서 쉬고 있는 유선에게 의사를 묻기 위해 그대로 3층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유선의 방으로 직행했다. 문을 노크하자 방 안에서 누구세요,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야."
그냥 열고 들어오라기에 동현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안에서도 밖에서도 잠글 수 있는 문에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체인형 잠금장치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
유선은 일인용 침대에 누워있었던 것 같았다. 계속 하나로 묶고 있었던 길고 검은 머리를 풀어헤친 상태다. 뒷머리에는 조금 눌린 흔적도 있다. 그녀는 침대에 걸터앉아 현관으로 들어오는 탐정 겸 비서를 쳐다보았다.
"왜?"
"로비에 빵이랑 음료수가 있어. 먹을래?"
"그래, 가져와."
그리고 피로에 젖은 티가 역력한 변호사는 다시 침대에 드러누웠다. 신발을 벗고 방 안으로 들어오던 동현은 몇 발자국 떼지도 못하고 도로 신발에 발을 끼워넣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에서 1층으로 향한다. 문이 열리자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은수가 그 앞에 서 있었다. 동현은 순간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듯한 감각을 느낀다. 방금 전까지 지하 홀에서 예술가 두 명과 줄곧 그녀의 이야기를 한 것이다. 은수는 문이 열렸는데도 내리지 않는 동현을 이상하게 쳐다본다.
"왜 그러십니까?"
"아, 아니, 아무 것도, 아닙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동현은 급하게 엘리베이터에서 빠져나왔다. 은수의 표정을 살필 새도 없이 엘리베이터의 육중한 문은 닫히고 말았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 숨을 내뱉고 있으니, 소파 세트에서 크로와상을 먹고 있던 지민과 승현이 눈을 끔뻑이며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놀랐군."
승현이 말했다.
"그런 말은 굳이 안 해도 좋을 것 같아."
크로와상을 우물대던 지민은 그리 대꾸하며 소파 앞 테이블에 놓인 샴페인 잔 하나를 들었다. 동현이 깨먹은 것과 같은 종류의 길쭉한 샴페인 잔이다. 지금은 샴페인이 아닌 알로에 주스가 담겨 있었다.
"아, 아하아...... 두 분은 여기서 드시려고요?"
"안 될 이유라도 있나?"
붉은 무알콜 샴페인을 든 승현이 물었다. 동현은 무심코 테이블에 놓인 잔의 개수를 헤아린다. 알로에 주스가 든 게 다섯 잔, 샴페인이 든 게 또 다섯 잔. 지민과 승현이 들고 있는 잔까지 합치면 총 열두 잔이다. 트레이 위에 나란히 선 열 잔의 음료 옆에는 크로와상 두 바구니, 여분의 트레이와 앞접시 여러 개, 공용 집게와 티슈가 놓여 있었다.
"아니, 저는 가져가서 먹으려고요."
동현은 여분의 트레이에 크로와상 세 개를 담은 접시와 알로에 주스 두 잔을 올렸다. 샴페인을 가져갔다간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어라?"
갑작스레 지민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막 트레이를 들어올리려던 동현은 흠칫 놀라선 그녀에게로 시선을 향한다. 지민은 왜인지 알로에 주스가 담긴 길쭉한 잔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왜 그래요?"
"아, 아뇨."
동현이 빠르게 물었지만 그녀는 한 손을 나풀나풀 흔들며 무마했다. 그녀의 옆 자리에 앉은 승현은 친구의 모습을 살피는가 싶더니, 쯧 하며 가볍게 혀를 한 번 차기나 한다.
"주스 안에 뭐가 든 줄 알았어요. 알로에 과즙이었구나."
오랜만에 먹어서 몰랐네, 하고 지민은 머쓱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별 일이 아닌 듯하여 그저 따라 웃어주곤 식량을 챙겨 소파를 떠나려고 했던 때였다.
등 뒤에서 엘리베이터의 도착음이 들렸다. 트레이를 들고 돌아보니, 나무와 유신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방금 전 위로 올라갔던 은수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객실로 돌아간 걸까.
"유선이한테 빵 갖다주러 가는 거야?"
유신이 싱글싱글 웃으며 살갑게 물었다.
"아, 아하하, 네. 맛있게 드세요."
동현은 빠른 걸음으로 걸어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기 전에 탑승했다.
그러고 보면, 지하 홀에 내려와 손님들을 불러냈던 서진도 어느 순간 객실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지금 서진과 은수는 같은 객실에 있는 걸까......
숙박 시설 안채에는 열두 개의 객실이 있고, 갤러리에 고립된 사람은 총 열한 명이다. 모두가 따로따로 하나의 방을 사용해도 방 하나가 남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서진과 은수가 같은 방을 쓰는 바람에 3층의 객실 두 개는 현재 공실이다.
그들이 같은 객실을 쓸 이유를 생각했다. 도슨트끼리 처리해야 할 업무가 있었던 걸까? 아니면, 단순히 두 사람이 가까운 관계이기 때문에 같은 방을 쓰고 싶었던 걸까. 하지만 안채의 객실은 전부 싱글 베드라고 들었는데.
영양가 없는 추측을 하다 보니 어느새 유선의 방 앞에 도착해 있었다. 동현은 아까와 같이 유선의 객실 문을 노크하고 들어간다. 노크에 대한 대답은 달리 없었다.
대답이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유선은 동현이 방을 나서기 직전 보았던 모습 그대로 잠들어 있었다. 새하얀 와이셔츠의 가슴께가 느리게 위아래로 움직인다. 침대 옆, 창가 테이블에 트레이를 내려두어도 별 반응이 없는 것이 아무래도 그새 푹 잠든 것 같다.
동현은 테이블 앞 의자에 걸터앉아 크로와상을 베어물었다. 크로와상의 결 사이로 아직 남아있는 온기가 맛에 풍부함을 더한다. 함께 가져온 알로에 주스는 평범한 맛이었다.
테이블 옆으로 크게 난 창문은 옆으로 밀어 열 수 있는 구조다. 크레센트 자물쇠도 달려 있긴 하지만 구태여 창문을 잠그기까지 할 이유는 없어 보였다. 차라리 발코니 문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크게 나 있는 창문 밖에는 당연하지만 동현의 명치 위까지 오는 창살형 난간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빗방울은 창문을 연신 때려대고 있다. 내일 아침이면 깨끗하게 남해 상으로 사라질 태풍은 육지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지독하게도 애쓴다. 창문이 덜컹거리지는 않으니 바람은 좀 멎었을지도 모르겠다.
동현이 크로와상 하나를 알로에 주스와 함께 배 안으로 밀어넣고 나서야 유선은 눈을 떴다. 피로에 쩐 눈꺼풀이 반쯤 감겨있다. 그녀는 눈동자만 굴려 겁도 없이 제 방에 침입한 동현을 노려본다.
"뭐야, 깨우지."
"너무 잘 자고 있길래 못 깨웠지."
유선은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테이블로 손을 뻗어 알로에 주스를 꿀꺽꿀꺽 마신다. 금세 비어버린 잔을 트레이 위로 돌려놓더니 깊게 숨을 들이마시기도 한다. 그녀 나름의 잠을 쫓는 기술인 듯했다. 일련의 행동을 마치고 나서야 그녀는 고개를 돌려 동현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피곤해. 먹고 잘 거야."
"맛있어~ 먹어 봐."
유선이 크로와상의 첫 입을 우물대는 동안 방 안에는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폭우가 유리창에 부딪히는 소리만이 드문드문 나다가, 번개가 한 번 번쩍하고 천둥이 우르릉하며 존재감을 과시하고 나서야 그녀는 짧게 한 마디를 뱉었다.
"맛있네."
동현은 제가 칭찬받은 것 마냥 웃었다. 남의 웃음에는 공명하는 일이 없는 냉랭한 변호사는 미간에 주름을 잡고 크로와상을 질겅질겅 씹는다.
"내가 왜 부산까지 내려와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다."
침대 이불 위로 크로와상의 겉껍질이 부스러져 떨어졌다. 유선은 상관하지 않았다.
"그러게. 태풍이 설마 아래로 올 줄은 몰랐네......"
"내일까지 일정을 비워둬서 망정이지."
그녀는 이곳에서 나갈 수 없음을 깨달은 후 예약해 둔 호텔 측에 전화를 넣었다고 이야기했다. 오늘내일 묵을 예정이었으니 오늘 취소하면 당일 취소가 된다. 당연하게도 숙박비는 거진 돌려받지 못하는데도 구태여 예약 취소 의사를 전한 건 규칙을 따르는 그녀의 성격 탓이리라.
"그나저나, 넌 방에서 좀 쉬었냐?"
"아니, 이 건물 지하에 좀 다녀왔어. 바다가 보고 싶어서......"
"이렇게 깜깜한데 무슨 바다가 보여?"
"헤헤, 그건 지하에 내려가기 전까진 생각을 못했지."
"바보 아냐."
"그보다, 거기서 오지민 씨랑 안승현 씨를 만났는데...... 묘한 이야기들을 하시더라."
"뭐, 누굴 만나?"
유선이 얼굴을 찡그렸다. 동현은 두 예술가의 특징을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 반삭에 인공 와우를 끼고 다니는 분이 안승현 씨, 보브컷에 안경을 쓰신 분이 오지민 씨. 유선은 반삭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흥 하고 콧숨을 내쉬었다.
"그 사람들은 왜 거기 있었는데?"
"나처럼 바다를 보고 싶었던 거 아닐까?"
"진짜 가지가지 하는군."
"아니, 하여튼 간에 그분들이 묘한 얘기를 했다니까. 아까 내가 너한테 샴페인을 쏟았잖아?"
겨우 안정을 찾았던 유선의 얼굴에 다시 주름이 잡혔다.
"그게 왜?"
"난 내가 발을 헛디딘 줄 알았는데, 승현 씨가 말하길 도슨트 분이 발을 걸었다는 거야. 그 단발머리 여자 분."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내 발을 거는 모습을 보셨대."
"아니, 넘어진 건 너면서 왜 넘어졌는지도 모르냐?"
"너무 당황했거든......"
유선은 반절 정도 남은 크로와상을 맛없게 씹어넘겼다.
"그, 그래서. 그 분이 왜 내 발을 걸어 넘기신 걸까 싶어서, 두 분이서 얘기하고 계셨대."
"왜 넘어진 너한테는 얘기 안 하고?"
"두 분이서 그런 얘기를 나누는 게 익숙해 보이더라고."
"뭔 소리야, 또."
"이런저런 추측을 나누는 게 말이야."
"네가 예전에 하고 다녔던 짓처럼?"
갑자기 들어오는 공격에 동현은 말을 이을 찬스를 놓쳤다. 친구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댔다. 지하 홀에서 그녀들을 보고 무심코 떠올렸던 친구의 얼굴이, 다시금 그의 앞에서 일렁였다.
"......그렇지."
"바보 같긴."
유선이 툭 내뱉었다.
"너 그 사람한테 미움 산 거 있어?"
"그 사람?"
"단발머리."
"아, 아니? 완전 처음 보는 사람인데."
"그런데 그 인간이 네 발을 왜 걸어넘겨?"
"그러니깐......"
"뭘 잘못 본 모양이지."
그리 말하곤 유선은 남은 빵조각을 입 안으로 던져넣었다. 음미하는 기색도 없이 저작작용을 완료한다.
"남 일에 관심이 많은 여자들이네. 그래서? 그 사람들이 뭐랬는데?"
"음, 내가 도슨트 분이랑 모르는 사이라고 하니깐...... 일단 나한테 원한이 있어서 그런 짓을 한 건 아닌 것 같다고 하셨지."
"너한테 원한 가질 인간이 이 세상에 어딨어?"
탐정의 상사는 기가 막히다는 얼굴을 했다.
"왜 이래, 나도 개인적으로 이것저것 의뢰 받는단 말이야."
"시끄럽고, 하던 얘기나 마저 해 봐."
"음, 그러니까, 나를 콕 집어서 넘어뜨리려고 한 게 아니라 아무나 넘어뜨리려고 한 게 아니냐고 하셨어."
"아무나?"
"아무나 넘어뜨려서 소란을 피우려고 한 게 아니냐고......"
"뭐 때문에?"
"그 얘기를 지금 하려고 하잖아. 도슨트 분이 발을 거는 바람에 난 넘어져서 잔을 깨 버렸어. 그리고 그분은 누구보다 빠르게 휴지를 가져오셔서 깨진 잔의 조각을 주우셨지."
"아, 맞아. 행동이 빨라서 내심 감탄하고 있었지."
"자연스러운 행동이라고 너도 생각하지?"
"그야 당연하지. 잔이 깨졌는데 그걸 가만히 둘 수는 없잖아."
"그래서, 지민 씨랑 승현 씨가 말하길 도슨트 분은 자연스럽게 바닥에 있는 무언가를 줍거나 닦기 위해, 어쩌면 바닥에 뭔가를 두기 위해 나를 넘어뜨린 게 아니겠냐고......"
동현의 답변을 듣고 유선은 기가 막히다 못해 분노의 빛이 일렁이는 표정을 지었다. 이보다 더 시간을 무의미하게 낭비할 수는 없었다, 라는 평가가 엿보이는 표정이다.
"탐정 놀이가 아주 재밌으셨던 모양인데. 그럼 내 추리도 말해줄까?"
유선의 반응으로 보아 그것은 추리가 아니라 힐난일 것이 뻔했지만 동현은 입을 꾹 다물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기나 했다.
"도슨트가 네 발을 거는 걸 봤다는 안승현이라는 여자, 귀만 나쁜 게 아니라 눈도 나쁜 것 같다."
그 말을 끝으로 유선은 동현의 손에 텅 빈 접시와 잔 두 개가 담긴 트레이를 들리고 객실 밖으로 내쫓았다.
로비에서 크로와상을 리필해 온 후 유신은 얌전해졌다. 이것은 물론 리필하기 전과의 상대적인 비교로, 그녀는 여전히 평소와 같이 수다스러웠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잡담을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육체적인 대화는 더 이상 시도하지 않는 것이 나무로서는 다행이었다.
"왜 무알콜인 거야?"
붉은색을 띠는 무알콜 샴페인을 마시면서 유신이 말했다.
"여긴 자가용이 없으면 진입하기 힘든 곳이니까."
"대리운전을 부르면 되잖아."
"이렇게 외진 곳은 대리기사들이 오는 것도 고역일 것 같은데......"
"그런데, 무알콜이어도 알코올이 아주 조금씩은 들어있는 게 있지? 그런 건 마시면 음주 단속에 걸릴까?"
"많이 마시면 걸릴 수 있다고 어디서 들었어."
혼자 자기 싫은 건가? 같이 자고 싶어도 여긴 침대도 하나고 침구도 하나라 어떻게 같이 잘 수가 없을 텐데.
유신의 잡담에 적당히 대답하며 남몰래 그녀의 잠자리를 걱정하고 있던 나무는 유신이 씻어야겠다며 제 객실로 돌아간 오후 열 시 즈음에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문이 닫히자 대화 소리로 가득했던 방 안은 단숨에 조용해졌다. 침대 옆, 테이블 옆으로 크게 난 창문 밖으로 비가 쏟아지는 소리만이 백색소음처럼 들려왔다. 테이블 위에는 두 사람이 함께 먹고 마시던 빵과 음료의 잔해가 남아 있었다. 식기 반환은 내일 해도 되리라.
샤워 부스 안에 설치된 선반에 샴푸와 바디 워시가 비치되어 있어 간단하게 몸을 씻었다. 가방에서 실내복을 꺼내 갈아입으니 방금 전까지는 느끼지 못했던 노곤함이 전신에 스며들었다. 하지만 나무는 본래 밤잠이 늦은 편이라, 열두 시 이전에는 거의 잠자리에 들지 않는다. 얼토당토않은 일에 휘말려 피로를 배로 받은 오늘도 그럴 예정이다.
가방 안에서 실내복과 뒤섞여 있던 태블릿을 꺼내 작은 냉장고 위에 올려두었다. 본래 물건을 비치할 용도로 사용하는 테이블 위에는 트레이와 접시와 샴페인 잔이 어질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수건으로 머리를 대충 말리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은 스마트폰의 알림을 확인했다. 가장 최근에 업로드한 그림의 반응이 늘었다. 팔로우하고 있는 업계인들의 새로운 작품과 쓸모없는 잡담이 타임라인을 가득 메웠다. 업무 상의 연락은 없다. 오늘내일은 휴가라고 미리 말해두었으니 당연한 결과이기는 하다.
문득 백도화의 근황이 궁금해 유튜브를 켰다. 그의 채널에 들어간다. 커뮤니티란을 확인했지만 호텔 창 밖으로 폭우가 쏟아지는 사진 이후로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폭우 사진에 댓글이 조금 더 늘어나기는 했다. 베스트 댓글은 아까와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폭우 속에서 휴가를 잘 보내고 있을까.
시덥잖은 생각을 하고 있으니 암호화된 메신저의 알림이 울렸다. 정우에게서의 연락이었다.
백정우는 그의 충직한 심복이자 둘도 없는 친구다. 나무가 관리하고 있는 거대 반사회 조직 산백파에서 그의 정체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다.
한때 한국과 일본을 휘어잡았던 거대 조직폭력단 산백파는 모종의 사건을 계기로 뿔뿔이 해산했다. 하지만 그 이후 비밀스럽게 산백파의 보스가 된 나무가 그들을 다시 불러 모아 뒷세계에서 꿍꿍이를 꾸미고 있다는 건, 현재로서는 나무의 오른팔인 정우와 산백파의 전 보스밖에 모르는 일이다.
아무튼 정우는 나무의 일정을 모두 꿰고 있었다. 나무가 오늘내일은 휴가이고, 부산의 어떤 갤러리의 리셉션에 초대받아 참석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물론 지상3사에서 대대적으로 방송하는 기상특보로 본래 동해로 향하던 태풍이 남해안으로 내려왔다는 사실 역시 알게 되었으리라.
[ 괜찮으세요 ]
기본 프로필 사진인 정우가 물었다.
[ 갤러리 옆 숙소에 묵고 있어 ]
정우가 메시지를 쓰고 있다는 표시가 떴다.
[ 호텔은 갤러리에서 멀지 않아요? ]
그는 나무가 갤러리에 고립되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폭우로 인한 산사태로 부산의 모 갤러리 안의 손님들이 고립되었다는 뉴스는 아직 나가지 않은 건가.
[ 갤러리에 갇혔어. 밖으로 나가는 길이 산사태로 막혔거든 ]
[ 네? 그래서 갤러리 숙소에? ]
[ 내일 아침에 소방서에서 토사를 치워줄 거래 ]
[ 별 일은 없으시고요? ]
[ 이쪽은 아무 상관 없으니까 괜찮아 ]
갤러리에 작품을 전시하고 그걸 평론하는 이들은 아무래도 조직폭력단과는 거리가 멀다. 정우는 그 뒤로도 몸조심하세요 와 같은 걱정의 말을 두 번 정도 덧붙이고 메시지를 끝냈다.
배터리 잔량이 십 퍼센트도 남지 않은 스마트폰의 액정을 끄고 나무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어차피 스마트폰을 충전해야하니 다시 몸을 일으켜야 할 텐데도, 지금은 그저 푹신한 매트리스에 몸을 누이고 싶었던 것이다.
익숙하지 않은 천장이 보였다. 원형의 무기질한 전등이 하얀 빛을 내뿜으며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녹빛 커튼을 친 창 밖에서 흐릿하게 빗소리가 들렸다.
자신이 손대고 있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바둑에는 정형화된 전법이 있다. 바둑에서 둘 수 있는 수는 실로 무한에 가깝다고 하지만 그건 바둑을 제대로 공부해보지 않은 인간들이나 하는 소리다. 초반에 집을 지을 토대를 쌓는 방법과, 상대의 집에 침입하여 천천히 깎아내는 전술, 그리고 마지막 승부 굳히기에서 사용되는 끝마무리는 수많은 선대들의 연구 하에 정리되어 있다.
그렇게 정형화된 전법과 사람의 개개인의 일관된 심리적 특성이 합쳐지면 반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상대의 다음 수는 자연스럽게 보이기 마련이었다. 반상 앞에 앉아있던 시절의 나무는 상대의 다음 수를 확인하고 그를 틀어막았다. 그러면 상대는 몹시 당황해서 차선의 수를 두었다. 최선을 틀어막아 나온 차선으로는 나무에게 결코 이길 수 없었다.
그는 반상이 너무나 지루했다.
하지만 새하얀 캔버스는 달랐다.
그곳에야말로 실로 진정한 무한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반상에서 도망쳐 캔버스로 달려나갔다.
캔버스 위에는 고뇌할 거리가 있었다. 반상에는 없던 것이었다. 기본을 넘어 심화된 기술을 익혀도 나무 그 자신이 깨닫지 못하면 그려낼 수 없는 경지가 있었다. 바둑계에서 도망쳐 한선혜의 지원을 받으며 대학을 다녔던 몇 년 동안 나무는 하루도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자신이 진정으로 그리고 싶은 그림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고뇌했다.
그녀의 그림을 보았던 그날 이후부터 줄곧......
줄곧 나무는 그녀를 생각했다.
"나라면 이런 곳에 건물을 짓진 않을 텐데."
커튼이 쳐진 창가 테이블에서 작은 노트북을 조작하고 있던 은수가 말했다. 서진은 막 씻고 나와 수건으로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던 참이었다.
"이런 곳?"
"아침에 말했잖아. 진입로가 하나인 곳은 빡세다고."
"아, 맞아. 내가 산사태가 날 것 같다고도 했지."
"그쪽이 낸 거 아니지?"
"산을 무너뜨리는 능력이라, 그런 능력이 있으면 편했을 텐데......"
은수는 대꾸하지 않았다. 서진은 머리를 털던 수건을 목에 두르고 그녀의 곁으로 다가간다. 노트북 화면에는 갤러리 헴의 전시품 목록이 떠 있었다.
"찾던 게 있어?"
"아니. 없어. 혹시 기재를 안 해 둔 게 있나 싶어서 하나하나 둘러봤는데, 다 목록에 등록된 거더라."
"그렇군......"
서진이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아직 물기가 남아있다.
"예상했던 결과야."
은수는 열려 있던 창을 모두 끄고 노트북을 덮었다.
"그러는 너는?"
"나?"
"여기까지 따라온 정을 봐서 도와드렸는데, 뭐 소득이 있었나?"
서진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나도 일단은 얻은 게 없네."
"일단은?"
"당신이랑 다르게 나는 아직 아침까지 시간이 남았거든."
"이거 의심되네. 역시 그쪽이 시간을 벌려고 산을 무너뜨린 거 아냐?"
단발머리 도슨트가 피식 웃었다. 손님들 앞에서는 보이지 않은 웃음이었다.
"그래. 내일은 바다도 갈라 보려고."
"기대하고 있을게."
Camouflage (1) https://pencil.so/kpota/1680048725
Camouflage (2) https://pencil.so/kpota/784010041
Camouflage (3) https://pencil.so/kpota/1355259784
Camouflage (4) https://pencil.so/kpota/1543612996
Camouflage (5) https://pencil.so/kpota/2012590884
Camouflage (6) https://pencil.so/kpota/1950444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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