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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mouflage (1)

1 (군인·장비의) 위장 2 (보호색이나 형태 등을 통한 동물들의) 위장 3 위장하다, 감추다

K=Potassium by KPo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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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끄러운 소리에 눈을 떴다. 일출 직전의 어슴푸레한 새벽녘이 커튼 틈새로 스며드는 게 보였다. 맞은편 벽에 걸린 시계는 오전 5시 5분 쯤을 가리키는 것 같았다. 미간을 있는대로 찌푸리며 시간을 확인하던 나무는 머리맡을 더듬어 안경을 착용했다.

자동차의 경적음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빵빵대며 울려대고 있었다. 이런 시간에 차에 들어가 앉아 경적을 울릴 기묘한 정신을 가진 사람은 없을 테니, 이건 아마 자동차의 경보음일 테다. 차체에 일정한 수준 이상의 충격이 감지되면 이런 끔찍한 소음을 내뱉고는 하는 게 자동차다.

누구의 차가 저리 소리를 지르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무는 기차를 타고 왔으니 일단 그의 것은 아니었다. 나무의 객실 창문으로는 절벽 너머의 바다뿐이 보이지 않는다. 비명을 지르는 차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건물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맞은편 객실의 변호사님이라면 창 밖으로 주차장이 보일지도 모르겠다......

의도치 않은 이른 기상으로 뿌옇게 물든 의식을 어물어물 부여잡으며 나무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바닥을 짚고 선 두 다리의 관절이 비명을 지른다. 수면 부족이다, 수면 부족. 젊었을 때에는 세 시간, 아니 두 시간만 자도 몸이 멀쩡했는데. 역시 늙고 말았구나.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문을 열었다. 잠기지 않은 문은 조금 열리다가 철컹하는 소리를 내며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도난 방지용 체인을 푸는 걸 깜빡한 것이다. 나무는 작게 한숨을 쉬곤 체인을 풀어냈다. 번호 모를 자동차의 빵빵대는 소리는 아직 멈추지 않았다.

복도로 나오자 맞은편 객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검은 실내복 차림의 유선이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나무를 발견하고는 미간의 골을 더더욱 깊게 한다.

"좋은 아침입니다."

나무가 상투적인 인사를 건넸다.

"차 가져오셨습니까?"

유선은 인사 대신 질문을 건넸다.

"아뇨. 기차 타고 택시 타고 왔습니다. 제 차는 여기 없어요."

유선은 그 답을 듣자마자 나무에게 관심이 사라진 듯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마음은 없는지 곧장 계단으로 향해 구둣발 소리를 내며 아래층으로 내려간다. 나무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의 뒤를 따랐다. 계단 한 칸을 더 내려간 유선이 그를 흘긋 올려다보다가 시선을 물렸다.

일곱 명이 묵고 있는 2층에도 작은 소란이 일고 있었다. 어제와 같은 옷을 입은 지민이 계단 바로 왼쪽에 위치한 객실의 문을 두드리고 있던 것이다.

"왜 그러십니까?"

계단을 앞서 내려가던 유선이 지민을 멈춰세웠다. 졸음이 아직 가시지 않았는지 뿔테안경 뒤의 눈을 반만 뜨고 있다. 그녀는 문을 두드리던 손짓을 멈추고 느리게 대답했다.

"아...... 아영이 차가, 가끔 저렇게... 오작동해서...... 끄라고 하려고요......"

"이아영 씨 차가 저러는 겁니까?"

경적 소리를 닮은 경보음은 아직도 빵빵대며 울려퍼지고 있다. 나무는 계단 벽에 기대어 서서 두 사람을 관찰했다.

"네... 저, 창밖으로 보였거든요. 제 객실은 주차장 뷰니까......"

"검은색 차 말씀하시는 거 맞으십니까?"

"아, 맞아요... 음, 검은색, 뭐라고 하더라. 아반뗀가."

"네, 저도 봤습니다. 그게 이아영 씨 차란 말이죠?"

그리고 유선은 그녀를 대신해 객실의 문을 두드렸다. 아영의 객실이라고 얘기한 적은 없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보았을 때 이곳이 그녀의 객실임은 자명했다. 유선이 아영의 이름을 부르며 노크를 계속하고 있으니 복도 오른편에서 객실 문이 하나 열렸다. 헤어 스타일링을 하지 못한 구겨진 셔츠 차림의 영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 이게 무슨 소리인가요?"

누가 봐도 자다 깬 목소리로 영우가 물었다.

"이아영 씨의 차가 오작동으로 경보음을 내고 있다고 합니다."

문을 두드리느라 바쁜 두 사람을 대신해 나무가 대답했다. 방 안에서는 아직 아무런 반응이 없다. 이마를 덮은 머리칼을 쓸어넘기던 영우는 뭔가 생각난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방에 안 계신 거 아닌가요? 가끔 작업실에서 주무실 때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작업실이요?"

유선이 미간의 주름을 풀지 않고 그를 돌아보았다. 문을 두드리던 손을 잠시 내려놓는다. 원치 않은 외부 요인으로 잠에서 깨 한층 더 날카로워진 시선을 받은 평론가는 주춤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젯밤에도 작가의 방에서 작업을 하고 계셨으니까요. 거기서 주무시고 계신 거 아닌가 싶습니다."

"거기에 잘 수 있는 공간이 있습니까?"

"책상에 엎드려서 자는 정도라면......"

뿔테안경 밑의 두 눈두덩을 꾸욱 누르던 지민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2층 복도에 서 있던 네 사람은 계단을 타고 1층으로 내려가 갤러리로 통하는 통로를 걸었다. 어젯밤보다 빗발은 확실히 약해진 듯했다. 하지만 바람은 여전한지, 빗소리에 가려져 들리지 않았던 바람 소리가 휭휭하며 통로를 걷는 네 사람을 위협했다.

나무는 통로에 난 창으로 주차장을 확인했다. 주차된 자가용 예닐곱 대 사이에서 검은 아반떼가 라이트를 주기적으로 깜빡이며 빵빵대고 있었다. 거센 바람에 차체가 조금씩 흔들리는 것도 같았다. 이 정도의 강풍이면 감지 센서가 오작동할 만도 하다.

갤러리의 조명은 꺼져 있었지만 한쪽 면에 크게 난 통창에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이미 건물 안을 어슴푸레하게 비추고 있었다. 아직 수마가 완전히 떠나지 않은 네 사람은 햇살을 이등분하는 경사로를 올라 2층으로 향했다. 작가의 방이 있는 2층에는 창이 거의 나 있지 않으니 조명을 켜야만 할 것이었다.

이변을 눈치챈 건 가장 앞서가던 유선이었다.

"빛이 들어오는데요?"

그녀의 말대로였다. 조명이 꺼져 있어 본래는 어두워야 할 2층의 입구 언저리가 이상하게 밝았다. 천장에 매달린 조명의 빛이 아님은 너무나 자명했다. 경사로에서 육안으로 확인되는 2층의 조명은 컴컴하게 꺼져있었던 것이다.

2층이 전부 어두운 와중 경사로에서 오른쪽 벽만이 환하게 빛났다. 경사로에서 왼쪽, 작가의 방에서 무언가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 그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유선의 걸음이 빨라졌다. 그녀가 홀로 앞서나가고, 나머지 세 사람은 그녀의 뒤를 따르는 모양새가 되었다.

"작가의 방이 열려있는 걸까요?"

영우가 중얼거렸다. 그와 가까이 있던 나무가 말을 받았다.

"저게 작가의 방의 조명이라는 말씀이십니까?"

"아아, 네. 전시를 했을 때처럼요. 폴딩 도어를 전부 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분진이 많이 심했나......"

"2층의 조명은 전부 꺼 둔 채로요?"

"작업 중에는 작가의 방 조명만 있으면 충분하겠죠."

앞서던 유선이 2층에 도착했다. 이아영 씨 하고 부르며 2층 안쪽으로 사라진 그녀의 목소리는, 그 직후 끊겼다.

쥐 죽은 듯한 고요함이다.

"왜 그러십니까?"

나무가 물었다.

대답은 없었다.

그녀의 뒤를 따르던 셋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다가 급하게 경사로를 뛰어올랐다. 햇살이 만든 자연광을 뒤로 하고 인공적인 조명빛을 향해 달려나간다.

2층에 가까워질수록 묘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함께 달리던 지민이 윽 소리를 내며 입가를 막았다.

세 사람 중 가장 먼저 2층에 도달한 건 나무였다.

유선은 경사로 끝자락에서 몇 걸음 떨어진 부근에 멍하니 서 있었다. 조명이 꺼진 2층의 어둠 안에서 폴딩 도어가 환히 걷힌 작가의 방이 내뿜는 인공적인 빛이 유일한 광원 역할을 했다. 유선은 그 거대한 광원을 마주하고 있었다.

작가의 방 앞에는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아니, 있기는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흰 천으로 덮여 있었던 이번 전시의 거대한 주제작이, 지금은 천을 바닥에 내던지고 그 장대한 자태를 마음껏 뽐내고 있었던 것이다. 작가의 방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등에 진 채 인상적인 역광을 만들어내면서.

이아영의 설치 작품 『조화』는 여러 재질의, 여러 색깔의 또 여러 모습의 마네킹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평범하게 백화점에서 볼 수 있을 법한 길쭉한 목재 마네킹. 어딘가의 공원에 조형물로 설치될 것 같은, 관절 없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나로 이어진 석재 마네킹. 철골을 얼기설기 이어붙어 만든 허술한 마네킹. 그런 것들이 어림 잡아 열 체는 있었다. 색은 어느 하나 같은 게 없고 재질도 모두 다르다. 하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그들에게는 모두 상실된 부위가 하나씩 존재했다.

목재 마네킹에는 왼다리가 없다. 얼굴 묘사가 들어간 석재 마네킹에는 오른쪽 귀가 없다. 철골을 이어붙인 마네킹에는 허리로 생각되는 게 보이지 않는다. 그 외의 녀석들도 죄다 온전한 신체를 갖지 못했다. 온전하지 못한 마네킹들은 각자 특이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원형으로 둥글게 늘어선 그들은 서로에게 닿아있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외따로 떨어진 녀석도 있고 서로 붙어있는 녀석도 있다. 그러나 모두 즐거워 보이고, 그들에게서 부정의 감정은 감지되지 않는다.

원형의 마네킹 행렬 가운데에 그것이 있었다.

모두가 모두를 긍정한 가운데 홀로 부정한 포즈를 취한 마네킹이 있었다.

머리가 없는 마네킹이었다.

그것은 동료들의 발치에서 천장을 보고 누워 있었다.

제멋대로 뻗은 사지는 모든 삶의 의욕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들렸다. 유선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아영아!"

한순간 역한 비린내가 느껴졌다. 피 냄새라는 걸 깨닫기까지 긴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기분 좋은 환상에서 억지로 끌려나왔다는 불쾌감이 엄습했다.

제정신이 아니군, 하고 생각하고 있으니 제 앞을 지나쳐 튀어나가는 그림자가 있었다. 

감상에 빠져 있던 나무는 주제작으로 달려가는 지민의 어깨를 급하게 잡아세웠다.

"잠깐만요!"

"왜요! 뭐하시는 거예요! 저, 저거. 저거 아영이잖아요!"

"사건 현장이잖습니까!"

그를 돌아본 지민의 얼굴이 새파랗다 못해 하얗게 질렸다. 친구가 머리를 잃고 쓰러진 것도 충격이지만, 사건 현장이라는 짧은 말에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음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몇 걸음 비틀거리다가, 이내 전시장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깨가 버들버들 떨린다. 호흡이 상당히 거칠었다.

"이, 이게 무슨......"

영우의 뒤집힌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작가의 방 맞은 편 벽에 등을 기대고 겨우 서 있었다. 입가를 누르고 있는 걸 보니 속이 좋지 않은 듯했다.

"하아......"

가장 먼저 2층에 도착해 참상을 목도한 유선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묶지 않고 길게 풀어낸 머리칼을 신경질적으로 헝클었다.

머리를 헝클던 그녀의 팔꿈치가 나무의 몸에 부딪혔다. 유선은 그러고 보니 이 인간이 여기에 있었지, 하는 눈으로 나무를 돌아보았다.

"속 안 좋아요?"

의외의 말을 들어 나무는 흠칫 놀란다.

"아뇨, 그렇게까진."

"그럼 가서 경찰이나 좀 불러요. 멍청하게 있지 말고. 다른 사람들도 깨우고."

"속 안 좋아 보입니까?"

"당신이요?"

"네."

"얼굴이 아주 죽을 상인데."

유선은 그리 말하곤 인간의 몸으로 만든 마네킹이 누워 있는 주제작 쪽으로 다가갔다. 나무는 말없이 그녀를 따랐다. 인기척을 느낀 그녀가 뒤를 흘긋 돌아보았지만, 딱히 제지는 없었다.

『조화』는 본디 조형물 안에 관람객이 들어갈 것을 전제하고 만들어진 작품 같았다. 전시 구역임을 나타내는 하얀 사각 프레임이 마네킹들의 발밑에 깔려있기야 하였지만 그 두께가 워낙 얇아 바닥과 조금의 단차도 없었다. 팔을 뻗어 서로의 손을 맞잡은 마네킹들은 아치형 문간의 입구를 연상시켰다. 그 외의 마네킹들은 연결되어 있기도 하고 떨어져 있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간격이 넓어 마네킹 사이로 사람 두세 명 정도는 충분히 왕래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맞잡은 손 아래로 들어갔다. 원형으로 세워진 마네킹 안쪽에는 발밑의 하얀 프레임뿐이 없어 미묘한 공허감을 주었다. 아니, 주었을 것이었다. 지금은 그 가운데에 머리 없는 작가가 흰 손바닥을 위로 하고 편안히 누워있으니 말이다.

머리 없는 시체가 아영임은 너무나 명백했다. 그녀가 작가의 집 전시 내내 입고 있었던 미술용 앞치마가 캐주얼한 복장 위에 걸쳐져 있다. 목이 잘린 부근에서 새어나온 선혈은 하얀 프레임 위에 검붉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시신의 어깨까지 피로 물들어 있는 게 보였다.

『조화』에서 작가의 방까지 일정한 너비의 핏자국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피웅덩이에서 시작된 핏자국은 하얀 프레임을 넘어 작가의 방으로 이어졌다. 작가의 방 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테이블을 왼편으로 돌아 그 너머까지 이어져 있었지만, 피로 그어진 선이 어디에서 끝나는지는 『조화』 안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유선은 어느새 무릎을 꿇고 목의 절단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비위도 좋은 사람이다, 라고 나무는 생각한다.

"뭔가 보이십니까?"

나무가 기대 없이 물었다.

"식도요."

"그렇군요."

"안타깝게도 검시 지식은 없어서."

형사 사건 전문 변호사가 무릎을 털고 일어났다. 분진이 묻어있었다. 무심코 바닥을 살폈지만, 아쉽게도 발자국이 남을 정도로 분진이 쌓여있지는 않았다. 그녀는 몸을 비틀어 경사로 근처에서 패닉에 빠져 있던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다들 없네. 사람 부르러 갔나."

"토하러 갔을지도 모르죠."

그녀는 나무의 대답을 귓등으로 흘리곤 『조화』를 빠져나와 작가의 방 쪽으로 향했다. 혈흔을 밟지 않기 위해 조심하는 모습이었다. 나무도 그녀를 따라 혈흔을 쫓았다. 생전의 아영이 마네킹을 손질하던 커다란 테이블 옆을 돌아서 찍힌 혈흔 행렬은, 어느 지점에서 명백하게 끝나 있었다.

전시장에 면한 폴딩 도어를 열면 작가의 방은 삼면으로 이루어진다. 열고 닫기 위한 폴딩 도어에는 무언가를 설치할 수 없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작가의 방의 설비는 남은 삼면에만 설치된다. 그 중 폴딩 도어의 맞은편과 오른편에 기역 자의 테이블이 길게 놓여 있었다.

오른편 테이블에는 작업용으로 쓰는 듯한 컴퓨터와 서류를 정리하는 데 쓰는 파일철이 있었고, 그 외 잡다한 필기구와 정리하지 못한 종잇장들이 테이블 매트 위에 어지럽게 산재했다. 적어도 이곳에는 수상쩍은 물건이 없었다.

문제는 맞은편의 테이블이었다. 나무의 한쪽 팔만한 절단기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겹쳐진 두 개의 날 중 위쪽의 날을 들어올려 날 사이에 물건을 놓고 가위처럼 잘라내는 방식의 절단기였다. 절단하는 데에 품이 드는 소재를 보다 적은 힘으로 절단하기 위한 도구였지만, 지금은 결코 잘라내서는 안 될 것을 잘라낸 것처럼 보였다.

날 사이에서 흘러내린 선혈이 테이블을 푹 적시다 못해 바닥까지 흘러내렸다. 분진으로 뒤덮였던 테이블을 그대로 혈액으로 코팅한 듯 먼지와 선혈이 섞여 기분 나쁜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조화』까지 이어진 혈흔은 바닥의 피웅덩이에서 시작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이 절단기로 아영의 목을 잘라내고, 목이 잘린 아영의 시신을 『조화』까지 질질 끌고 갔다. 그렇게밖에 생각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징그럽네."

유선이 툭 내뱉었다. 나무는 저도 모르게 입가에 손을 올렸다. 차가웠다. 피가 돌지 않아 차가운 손가락이 뺨을 매만진다.

"살인일까요?"

유선은 무슨 바보 같은 질문을 하냐는 듯 그를 노려보았다.

"그럼 자살이게요?"

"가장 중요한 게 안 보입니다."

의식에 희뿌연 막을 뒤집어 씌운 것 같았다. 오감으로 인식되는 현실을 두뇌에서는 현실적이라고 인식하지 않았다.

나무는 무대 위를 둘러보았다. 중앙의 커다란 테이블에는 자르다 만 마네킹과 소형 그라인더, 그녀가 썼던 보안경이 놓여 있었다. 기역 자 테이블에는 몇 분 전 보았던 것들이 변화 없이 그대로 나뒹굴고 있었고, 벽에 걸린 공구걸이에는 톱과 망치와 대패와 또다른 공구들이 사이좋게 늘어섰다.

하지만 분명 있어야 할 그것은 작가의 방에 존재하지 않았다.

"머리가 없어요."

나무는 꿈속을 유영하듯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시취가 가득한 무대 위에서 내려왔다.

당연하지만 갤러리에는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패닉에 빠진 지민과 영우가 안채로 달려가 다른 사람들에게 상황을 알렸을 즈음에는, 이미 꺼지지 않는 경보음에 질려 눈을 뜬 사람들이 많았다. 유신과 선혜, 은수가 그러했다. 그들은 안채 1층 로비에 모여 빵빵대고 있는 저 차가 누구의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선혜가 저건 아영이의 자가용이며, 자신은 저 차를 타고 이곳에 왔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아영이를 깨우는 게 좋겠죠?"

선혜가 그렇게 제안하자마자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두 사람이 갤러리 연결 통로에서 튀어나왔다. 그들에게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참상을 전해들은 세 사람은 빠르게 갤러리 2층으로 향했다. 유신과 은수의 걸음걸이보다 선혜의 전동 휠체어의 속도가 더 빨랐다.

그들이 갤러리 2층에 도착할 때까지 나무는 그저 멍하니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현실감이 없는 시야에는 무기물과 유기물이 하나의 작품을 이룬 『조화』와, 거대한 작품 앞에서 왔다갔다하며 경찰에 연락하고 있는 유선만이 담겼다. 결국 최초 발견자 네 명 중 그녀 외에는 아무도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던 것이다.

경사로 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나무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움직이고자 하는 의지가 없어도 잘만 움직이던 몸은 지금 이 순간 굳어버리고 말았다. 어째서냐고 묻는다면, 이 기묘한 트랜스 상태의 까닭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눈앞의 작품의 완성도가 가히 뛰어나기 때문에,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그다.

목 없는 유기물을 둘러싼 무기물들은 모두 어떠한 부위를 하나씩 상실했지만 그 중 머리가 없는 녀석은 없다. 인간의 모습을 본딴 마네킹들은 전부 머리를 갖고 있다. 그들에게 머리는 단순히 인간의 모방에서 비롯한 묘사 중 하나일 뿐이지만 복제의 원본이 되는 인간은 그렇지 않다.

인간에게 있어 머리란 의식의 근원이다. 의식이란 생명의 증명이다. 자신이 실재하며 사고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모호한 존재가 의식이다. 의식이 없다면 인간은 인간으로서 기능할 수 없으며, 거칠게 말해 무기물과 다름 없는 존재로 전락한다. 배양 접시의 세포와 살아 숨쉬는 인간을 동일시하지 못하는 것처럼.

하지만 머리가 잘린 아영을 머리가 붙은 무기물들의 행렬에 끼워넣은 누군가는 그러한 사실의 전복을 꾀했다.

머리가 필요한 인간의 머리는 자르되 머리가 필요하지 않은 마네킹의 머리는 살려둔다.

그러기 위해서는 작품의 재료로 머리가 없는 인간을 사용해야만 한다.

"송 군!"

시야가 흔들렸다. 유신이 어깨를 흔들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녀는 눈꼬리가 삐쳐올라간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야? 괜찮아?"

천천히 두 눈의 초점이 맞는다.

"나한테...... 묻는 거야?"

제 것이 아닌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왜 이래? 정신 좀 차려 봐!"

유신은 타고나기를 심장이 좋지 못하다. 심박수가 올라갈만한 충격적인 상황을 목도하면 심장에 무리가 가 고통스러워하곤 한다. 심한 경우 졸도하기 때문에, 그녀는 늘 니트로 글리세린을 소지하고 있다. 혀 밑에 넣어 녹여먹는 용도의 니트로 글리세린을.

"잠깐, 진정해......"

두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손바닥 안에 전부 들어오는 가녀린 어깨를 만지면서 나무는 새삼 여자란 작은 생물이라는 생각을 했다.

순간 왼쪽 뺨에 날카로운 통증이 일었다. 고개가 힘없이 오른쪽으로 돌아간다.

뺨을 맞았다?

"왜 이래? 송 군, 왜 이러는 거야?"

콧등에서 미끄러진 안경을 고쳐썼다. 흐리던 시야가 또렷해진다. 조금은 노기가 서린 유신의 얼굴이 정면에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모습은, 아쉽지만 시야 가장자리에서 일렁일 뿐 잘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제가 후려친 왼쪽 뺨을 매만졌다. 따뜻한 손이었다. 차가웠던 자신의 손과는 정반대로.

나무는 문득 깨달았다.

눈앞의 이 여자는 사람이 죽었는데도 전혀 동요하고 있지 않다.

사람이 목이 잘린 채로 죽었는데도 혈액이 손가락 끝까지 잘만 돈다.

"그러는 너는?"

"뭐?"

뺨에서 주춤대며 떨어지던 손목을 잡았다. 피가 쌩쌩 도는 따뜻한 손목이었다. 그녀는 눈을 부릅뜨고 나무를 올려다본다. 불쾌한 것 같기도, 당황한 것 같기도 한 표정을 숨길 기색도 없이 만면에 띄우면서.

"너는 왜 동요하지 않지?"

나무가 한 걸음 다가섰다.

"송 군은 대체 왜 그렇게 동요하는 건데?"

유신은 물러서지 않았다.

"저건......"

말을 잇기도 전에 팔을 뿌리쳐졌다. 팔을 잡힌 유신의 소행은 아니었다. 제삼자의 개입이었다. 유선이 기가 막히다 못해 짜증이 나 죽겠다는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는 이내 시선을 나무의 얼굴에 고정했다.

"뭐하시는 겁니까, 지금? 사람이 죽었는데 사랑 놀음이라도 하세요?"

운율이 좋은 문장이라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아니요. 동요한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뭐라고요?"

"사람을 재료로 써서 작품을 완성시킨다는 발상 자체는 드물지 않지만, 보통은 도덕성에 발목을 잡혀 실현하지 못하고 그저 모독적인 바람으로만 끝나기 마련입니다."

분노로 점철되었던 유선의 얼굴에 한순간 의아의 빛이 스쳤다. 이 인간이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지, 라는 뜻이 내포된 안색이었다.

"하지만, 누가 저런 짓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범인은 작품의 작가를 최후의 소재로 사용함으로써 작품을 완성시켰습니다. 그것도 아주 미려한 형태로요. 생명이 있었던 작가는 생명이 끝나 볼품없이 누워있지만 반대로 생명이 존재하지 않았던 마네킹들은 그 누구보다 생기 넘치는 포즈를 취하고 서로와 이어져 있지 않습니까?"

"송 군......"

"물론 사람이 죽은 데에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한, 좀 더 상위 차원의 충격을 가져다 준 것이 바로 완성된 이 작품입니다. 용의 눈을 그리면 용이 자아를 갖고 날아가버리듯이, 『조화』는 작가의 목숨을 재료로 대신하여 부도덕할지언정 값싼 재료로는 도저히 구현해낼 수 없는 경지를......"

인중에 뜨뜻미지근한 게 흘렀다. 코피라는 걸 깨닫기까지는 길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나무는 말도 마치지 못한 채 유신의 손에 이끌려 갤러리 1층으로 발을 옮겼다. 마지막으로 본 유선의 얼굴에는 분노도 당황도 아닌 경악이 떠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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