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mouflage (2)
───전부 우리가 잘못한 거야.
어둑한 밤거리 뒤로 경찰차의 붉고 파란 경광등이 앵앵대며 번쩍이고 있었다. 사람이 죽으면 그 죽음을 처리하는 데에는 생각보다 많은 인력이 소모된다. 사망 원인을 조사하는 경찰과, 사망 선고를 내리는 의사와, 사망에 얽힌 감정을 하나하나 풀어내야만 하는 유족이, 개미 떼처럼 모여든다. 실로 개미도 그렇다. 죽은 개미에서 흘러나오는 특정한 페로몬은 동료 개미들을 불러 자신의 시신을 옮기도록 만든다. 그런 점에서는 인간과 개미가 그리 다르지 않다.
───전부 내가 잘못한 거야.
붉고 푸른 경광등의 불빛이 역광이 되어 친구의 등 뒤를 밝혔다. 그와 반대로 그늘진 얼굴이 일그러지는 게 보였다.
───전부 네가......
그는 동현의 멱살을 잡고 울분을 터뜨렸다.
시신을 옮기는 개미 떼에 탐정따위는 필요없다.
머리 좋은 친구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았다.
달콤하지 않은 꿈에서 눈을 뜬 동현은 악몽의 까닭을 알 수 있었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자동차의 경보음이 귀청을 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그가 부산까지 끌고 내려온 유선의 차에서 나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에 두었던 안경을 집어쓰고 아침 햇살이 스며드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동현의 객실에서는 갤러리의 앞쪽 벽면과 그 옆의 주차장이 보인다. 뷰가 좋다고는 할 수 없는 객실이다.
주차장에는 차가 어림잡아 예닐곱 대는 서 있었다. 유선의 외제차 역시 얌전히 주차되어 있다. 경보음을 울리고 있는 차는 검은색 아반떼였다. 비상등을 반짝이는 리듬에 맞춰 빵빵대는 것이 여간 소란스럽지 않다. 누구의 차일까? 이렇게 시끄러운데도 차의 주인은 깨지 않고 있는 걸까.
동현은 승현의 새빨간 인공 와우를 떠올렸다. 그녀는 깨어있을 때조차 인공 와우를 계속 착용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걸 착용하지 않으면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거 아닌가? 그런데도 그녀가 와우를 드문드문 착용하는 이유를, 동현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어쨌거나 잘 때는 분명 와우를 빼고 있을 것이었다. 만일 그녀가 저 차의 주인이라면 경보음이 들리지 않을 수도 있겠다.
잠은 이미 깨 버렸다. 소방서는 분명 아침 일찍부터 토사 정리 작업을 하겠다고 약속했었다. 벽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다섯 시 삼십 분이다. 평소보다 많이 이른 기상이지만 이렇게 된 거 미라클 모닝을 즐겨봐도 좋을 것 같았다.
객실을 나섰다. 복도에 발을 딛자마자 묘한 불온함이 피부에 닿았다. 그의 객실을 제외한 세 개의 객실의 문이 전부 조금씩 열려있었던 것이다. 인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다들 시끄러워서 깬 건가? 1층 로비에 모여 계실까.
동현은 어쩐지 풀이 죽어 엘리베이터를 불렀다. 1층에 서 있던 엘리베이터는 동현의 부름을 받고 빠르게 올라와 그를 내장에 태웠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로비가 보였다. 소파 세트의 테이블에는 밤참의 잔해가 놓여 있다. 식어버린 크로와상이 담긴 바구니와 선택받지 못한 음료들 같은 것이. 테이블 너머 소파에는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동현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무와 유신이다.
어제에 비해 상당히 피곤해 보이는 나무는 콧구멍 한쪽을 휴지로 틀어막았다. 휴지의 일부가 붉게 물든 걸 보니 코피라도 흘린 모양이었다. 유신은 그의 옆에 앉아있었다. 살짝 찌푸린 미간에서 어제는 넘쳐흐르던 여유가 부분적으로 사라진 듯 보였다.
"아, 안녕하세요."
동현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자동차의 경보음에 목소리가 조금 묻히는 감이 있다.
"아침부터 소란스럽네요. 저거 누구 찬지 아세요?"
"이아영 씨 찹니다."
한쪽 콧구멍을 틀어막은 나무가 대답했다. 동현의 얼굴이 아닌 허공을 쳐다보면서. 초점이 틀어져 있다, 라고 동현은 느낀다. 동시에 형연하기 어려운 불안이 가슴 속에서 퍼져나갔다.
"......아영 씨요? 그 분 객실이 어디였죠?"
"2층, 계단에서 가장 가까운 왼쪽 객실이요."
"아, 그럼 제가 깨워볼......"
"근데 이젠 거기 안 계십니다."
그는 몽롱해 보였다.
"네?"
"갤러리에 계세요."
"저, 만나고 오셨어요?"
"그렇죠."
대화가 도저히 진전되지 않는다.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아영을 만났는데 도대체 왜 그녀의 차는 아직도 경보음을 빽빽대고 있다는 말인가. 동현은 도움을 구하는 눈으로 유신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어느새 미간의 주름을 푼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영이는 죽었어요."
속눈썹이 긴 눈을 내려뜨며 유신은 담담하게 말했다.
유신에게 대강의 상황을 전해들은 동현은 허둥지둥 갤러리로 향했다. 안채와 갤러리를 잇는 통로를 급하게 지나던 와중 갤러리 쪽에서 달려나오는 지민을 발견했다. 이마가 식은땀으로 젖어있었다. 현장이 어지간히 끔찍한지도 모르겠다. 지민도 동현을 발견하곤 달리던 발을 멈춰세웠다. 먼저 말을 건 사람은 그녀였다.
"저, 저기요. 혹시 승현이 못 보셨어요?"
문장에 헉헉거리는 숨소리가 섞였다. 경사로를 뛰어 내려온 듯했다. 동현은 주춤하며 대답했다.
"승현 씨요? 못 봤는데요. 아직 주무시고 계신 거 아녜요?"
"감사합니다!"
짧은 감사의 말을 남기고 뿔테안경의 예술가는 그를 지나쳐 안채 방면으로 사라졌다. 승현은 갤러리에도 없는 걸까.
실내 전등이 켜지지 않은 갤러리를 통창 너머로 내리쬐는 새벽녘이 밝히고 있었다. 1층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경사로로 연결된 2층에서 희미하게 소란이 들려왔다. 새삼스럽게 여전히 울리고 있는 경보음도 자각된다.
이아영이 죽었다고?
유신은 그녀가 죽었다는 말 외에는 어떠한 단서도 던져주지 않았다. 유선이가 상황을 정리하느라 바쁠 것 같으니 가서 도와주는 게 낫지 않겠냐는 조언을 덧붙였을 뿐이다. 2층으로 향하는 경사로를 오르며 동현은 다양한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다. 아영은 어떻게 죽은 걸까. 아영은 왜 죽은 걸까. 아영은...... 누구한테 죽은 걸까?
2층에 가까워질수록 뭔가 시큼한 냄새가 풍겼다. 시취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긴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등골이 오싹해진 동현은 마른침을 삼키고 2층 안으로 들어섰다.
2층에 발을 들이자마자 어제와는 다른 점이 보였다. 작가의 방 앞의 주제작이 흰 천을 걷어내고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시선이 쏠렸다. 가지각색의 마네킹들이 독특한 자세를 취한 채 서로 얽혀있기도 하고 떨어져있기도 하다. 유선은 그 마네킹들의 사이에 휠체어를 탄 선혜와 같이 서 있었다. 대화를 나누고 있는 듯했다.
그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머리칼을 내린 영우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폴딩 도어가 활짝 열린 작가의 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동현의 시야에는 아직 아영으로 추정되는 물체가 보이지 않았다.
발소리를 들었는지 유선이 경사로 쪽을 돌아보았다. 동현을 발견하고는 작게 한숨을 쉰다. 선혜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에게로 다가온다. 구둣발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려퍼졌다.
"이아영이 죽었어."
잘 잤냐는 인사 따위는 생략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작가의 방의 절단기로 목이 잘려서, 작품 안에 던져졌다."
동현은 작품 안에 던져졌다는 말의 의미를 잠시 이해하지 못했다.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유선은 쯧 하고 혀를 찬다.
"따라와."
그는 상사를 따라 마네킹의 행렬 사이로 발을 옮겼다. 가까이 갈수록 달큰한 냄새가 더욱 짙어진다. 가늘게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는 선혜의 휠체어 옆까지 와서야, 동현은 참상을 목도할 수 있었다.
머리 없는 작가가 작품 가운데에 쓰러져 있다.
그야말로 작품 안에 던져진 것이다.
그는 저도 모르게 입가를 눌렀다. 반사적이고 생리적인 반응이었다. 기겁한 눈으로 유선을 바라보니, 그녀는 무감한 시선을 시신에 던지고 있었다.
"경찰에 연락했어. 소방서랑 같이 오고 있대. 토사 제거 작업이 끝나는대로 바로 진입하겠다고 하더라."
"왜, 왜 이렇게...... 되신 거야?"
"그건 이렇게 만든 놈한테 물어봐야지. 선생님."
유선이 돌연 고개를 푹 숙이고 훌쩍이던 선혜를 불렀다. 연신 어깨를 떨고 있었던 그녀는 유선의 부름에 천천히 고개를 들어 말없이 시선을 맞추었다. 벌겋게 물든 눈가가 애처로워 보였다.
"어제 이아영 씨랑 작가의 방에서 상의를 하셨죠? 언제 헤어지셨습니까?"
"아마, 열한 시 즈음에......"
"이아영 씨는 그때까지 작가의 방에 남아계셨고요?"
"네. 작업을 좀 더 하다가 자겠다고 그래서......"
선혜는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겨우 들었던 고개를 도로 물려버린다. 아영이를 혼자 두지 않았으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회한이 엿보이는 옆얼굴이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건지 짚이시는 게 있으십니까?"
"......모르겠습니다."
"이아영 씨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계신 분이 있으셨습니까?"
"......모르겠어요."
"잘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을 저렇게, 머리를 잘라낼 정도로......"
"이봐요, 유선 씨!"
영우의 목소리였다. 세 사람에게서 조금 떨어져있던 그는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체격이 커 언뜻 위압적으로도 보일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유선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를 응시했다.
"왜 그러시죠?"
"하나뿐인 제자를 잃으셨단 말입니다. 선생님 마음도 좀 헤아려주세요."
"마음?"
유선이 한쪽 눈썹을 꿈틀댔다.
"당신 말마따나 사람이 하나 죽었습니다. 흔해빠진 사고로 죽은 것도 아니고 목이 잘려서 죽었어요. 사건성이 충분하다 못해 흘러넘치고 있는 상황이란 말입니다. 좀 더 직설적으로 얘기해드릴까요? 이건 살인입니다. 그리고."
법정의 대변인은 목을 한 번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살인을 저지른 범인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어젯밤에는 아무도 갤러리에서 나갈 수 없었으니까요. 알아들으셨습니까?"
영우는 눈을 부릅뜨고 얼어붙었다.
서진이 객실 밖으로 나왔을 때 은수는 이미 방을 떠나고 없었다. 그녀의 온기만이 남은 침대가 창 너머의 새벽녘을 받아 빛나고 있었을 뿐이다. 체면을 차리는 것 같은 구두에 발을 쑤셔넣으면서 서진은 대체 누구의 차가 아침부터 빽빽 울어대고 있나 고민했다.
맞은편 객실의 문을 누군가 연신 두드리고 있었다. 어깨의 움직임에 맞춰 새카만 보브컷이 흔들린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인기척이 묻혀 서진의 출현을 눈치채지 못한 그녀는 씩씩대면서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한숨을 크게 내뱉곤 전화를 건다. 송신음이 서진에게까지 들렸다. 이윽고 송신음은 멈췄지만 전파 반대편의 상대는 대답 하나 없이 전화를 끊었다.
보브컷의 그녀는 전화가 끊긴 후 자리에 가만히 서서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서진도 덩달아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무얼 기다리는지 알 수 없었지만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는 데에는 이쪽도 선수다. 이윽고 노크에도 열리지 않던 문이 열렸다. 승현이 귓바퀴에 새빨간 인공 와우를 매달고 모습을 드러냈다. 보브컷의 어깨 너머로 서진과 눈이 마주친다.
"뭐지?"
"너 지금까지 잔 거야?"
"너한테 물은 게 아니다."
지민은 그제야 승현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지 않음을 깨달은 듯했다. 뒤를 홱 도는 모습이 경계심이 가득한 미어캣을 닮았다.
"힉!"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놀랄 건 없지 않나.
"아, 안녕하십니까......"
"아, 안녕하세요. 저, 지금 큰일이 나서......"
"큰일이요?"
서진이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승현 역시 잠이 온전히 깨지 않은 눈을 가늘게 뜨곤 한쪽 귀를 막고 있다. 경보음이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아영이가 죽었어요!"
"예에?"
"아, 아영이가, 목이 잘려서......"
"그게 무슨 소리지?"
승현이 반쯤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뜨면서 물었다. 당혹스러운 기색이 느껴지는 어조다.
"그러니까, 지금 그렇게 자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고......"
격양된 말투로 힘을 실어 말하던 지민은 어느 순간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목소리가 뒤집히다가, 갈라지다가, 결국에는 엉엉대는 울음소리밖에는 들리지 않게 된다. 승현은 어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당황의 표정을 눈가에 걸고 있었다.
"어딨어?"
아영의 시신이 어디에 있냐고 묻는 것일 테다.
"갤러리 2층에......"
지민은 코를 연신 훌쩍이면서 웅얼댔다.
어쨌든 사건 현장을 보고 이야기하기로 가닥이 잡힌 듯했다. 두 사람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향하기에 서진도 얼떨결에 함께 탑승했다.
1층 로비의 소파 세트에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갤러리의 손님인 나무와 유신이다. 승현과 지민은 그들에게 신경 쓸 겨를도 없는지 인사도 나누지 않고 곧바로 안채와 갤러리를 잇는 통로로 향했다. 서진은 두 사람을 먼저 보내고 소파 세트로 다가간다.
"안녕하세요...... 뭔가, 무서운 얘기를, 들은 것 같은데요......"
나무는 한쪽 콧구멍을 휴지로 틀어막고 있었다. 코피를 흘린 듯했다. 누구한테 맞기라도 한 건가. 유신은 어제보다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길고 풍성한 머리칼을 어깨 뒤로 넘긴다.
"아영이가 죽었어요."
"으윽, 네...... 그건, 들었습니다......"
유신은 눈동자만 굴려 서진을 올려다보았다.
"작가의 방 앞에 있던 천에 덮인 작품 기억나시죠? 그 안쪽에 있었어요, 시신이."
"......저, 목이 잘렸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목이 잘린 채로 마네킹 사이에 누워있더라고요."
서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대체 왜죠......?"
"그건, 목을 자른 사람한테 물어봐야 하지 않겠어요?"
유신이 한 자 한 자 음미하듯 천천히 내뱉었다. 서진이 천천히 눈을 뜨자, 그녀의 커다란 다갈색 눈동자가 이쪽을 향하고 있는 게 보였다. 시선이 마주친다. 시선을 교환하고 만다. 서진은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나무가 여전히 몽롱한 눈을 하고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 누군지 몰라도, 아영 씨를...... 정말 미워했던, 모양입니다."
"미워하다뇨?"
유신의 물음에 서진은 어깨를 움츠린다.
"그, 그야. 머리를...... 으윽, 사람, 머리가...... 그렇게 잘, 잘리진 않을 것, 같아서......"
"서진 씨, 밤에 일어난 적 있어요?"
돌연 주제가 바뀌었다. 대화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한발 늦었다.
"저, 저 말입니까?"
"나는 한 번 일어났었어요. 바람 소리가 하도 시끄러워서 잠을 설쳤거든요. 눈을 뜬 게 두 시 쯤인가. 지금이 몇 신가 폰으로 확인했던 게 기억나니 확실하겠죠. 목이 말라서 로비에 주스가 남아있으면 마시려고 1층까지 내려갔었어요."
"그, 그러셨군요...... 주스는, 지금도 남아있네요......"
서진이 소파 앞의 테이블을 흘겼다. 11인분보다 훨씬 넉넉하게 준비했기 때문에, 당연히 남을 거라 예상했었다. 실제로 크로와상과 음료는 아직도 잔여분이 남아있었다.
"그 때 안채 입구에 물기가 젖어있었던 걸 봤어요."
그리 말하며 유신은 소파 세트의 오른편을 가리켰다. 안채에는 출입구가 두 개 있다. 갤러리로 통하는 통로와, 주차장으로 통하는 안채의 정문이다. 건물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통로를 지나 갤러리의 정문으로 밖으로 나가든가, 안채의 정문을 통해 주차장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다. 지금 유신이 가리키고 있는 건 안채의 정문 쪽이다.
어젯밤에는 줄곧 비가 내렸다. 새벽 두 시에 로비로 내려온 유신이 안채 정문 근처에 물기가 있었다는 걸 봤다는 건, 적어도 새벽 한 시 이후에는 그곳으로 사람이 드나들었다는 의미가 된다. 물기는 넉넉잡아 한 시간만 있어도 깔끔하게 마르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서진은 모른척 해 보기로 했다.
"무, 문틈으로...... 비가 들이친 거, 아닌가요?"
"아니에요. 누가 문을 열었던 것처럼 문 앞쪽이 완전히 젖어있었으니까. 그렇다는 건 제가 로비에 내려오기 이전에 어떤 사람이 거기로 드나들었다는 게 되겠죠. 장마철이라 습해서 물기가 증발을 못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적어도 한 시 이후에 드나든 거겠죠?"
적확한 설명이었다. 서진은 어쩐지 궁지에 몰린 기분이 된다. 그녀의 시선이 자신에게서 떨어지지 않은 탓도 있다.
이럴 때 그 사람이라면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할까......
서진은 겁에 질린 얼굴로 양손을 얽었다가 풀었다. 검은 가죽 장갑이 서로 스치다가 떨어진다. 세 번 정도 반복했다. 얼굴 근육이 울상을 짓고 있는 게 느껴졌다.
"자,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깬 적이, 없어서......"
"서진 씨."
유신이 나직하게 불렀다. 서진은 어깨를 흠칫 떨면서 그녀를 바라본다.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뜯어보는 듯한 시선이 끈적하게 얼굴에 달라붙는다. 커다란 다갈색 눈동자는 마주하고 있자면 꼭 보석과 같아서 저도 모르게 홀릴 것만 같아진다. 거짓을 고할 수 없게 된다. 사실대로 털어놓고 마음의 부담을 사하고자 하는 욕망에 한순간 휩싸이게 된다.
서진은 작게 숨을 내뱉었다.
유신은 그에 화답하듯 입꼬리를 끌어올려 싱긋 웃었다.
"됐어요. 가 봐요. 다들 머리를 찾고 있을 테니까."
곱슬머리의 도슨트는 그녀의 허가가 떨어지자마자 잽싸게 자리를 떴다.
갤러리로 향하는 통로 너머로 주인을 잃은 차가 구슬피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울어도, 너에게 돌려줄 머리 같은 건 없다.
서진은 굽은 머리칼을 누르고 정돈하며 경사로를 달렸다.
예술가의 범행이라고 나무는 일축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시신이 작품까지 끌려나온 이유가 설명이 안 되지. 그건 분명히 작품의 완성도를 고려한 배치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코피를 뚝뚝 흘리는 모습이 괴이하기 짝이 없었다. 사건 현장을 보고 어쩐지 정신에 타격을 입은 듯한 나무를 갤러리에서 끌어내 안채 로비의 소파에 앉힌 건 좋았지만, 유신이 피범벅이 된 그의 코에 휴지를 쑤셔넣을 때까지도 그의 상태는 좋아지지 않았다.
눈이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아서 유신은 기분이 나빴다.
강아지를 부르듯 그의 면전에서 손가락을 몇 번이고 튕겼다. 흐릿했던 초점이 순간 그녀의 손가락으로 몰린다. 완전한 각성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아까부터 혼자 무슨 소리를 중얼중얼하는 거야. 정신 차려!"
"난 맨정신이야, 지금."
"알아? 나, 송 군 코피 나는 거 처음 봐."
"그래? 난 자주 봤는데."
이제는 배경 음악처럼 익숙해지고 만 자동차의 경보음이 대화의 간극을 메웠다. 저건 아영의 차라고, 경사로를 오르던 누군가가 이야기해주었다. 아마 은수였을 것이다.
아영이가 죽었다. 그 사실을 새삼스럽게 되새긴다. 마네킹 사이에 누워있던 그녀의 목 없는 사체를 떠올린다. 그건 분명 아영이의 몸이었다. 모르는 누군가의 몸이 아니었다. 잠깐 보았을 뿐이지만, 유신은 단언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자신은 모델러니까. 물체의 굴곡을 인식하고 기억하는 기능은 다른 사람보단 월등하니까.
심장이 쿵쾅댄다. 일상에 침입한 비일상을 더는 외면하지 못한다. 사람이 죽었다. 생면부지의 타인도 아닌, 잘만 알고 있던 사람이 하룻밤만에 사체가 되어 인간성의 해체를 당했다.
유신은 허리를 굽혔다. 몸을 둥글게 한다. 의도적인 행동은 아니었다. 피가 잘 돌지 않아 머리가 지끈거린다. 손발이 저릿하니 감각이 둔해진다. 의식이 물을 탄 것처럼 연해진다. 모두 심장의 탓이다. 피를 온몸에 돌게 하는 생체 엔진의 탓이다.
우리의 몸은 피로 가득 차 있으니까......
잘린 목에서 흘러나온 검고 붉은 액체가 마네킹 사이에 퍼져 있었다.
마개 역할을 하던 머리가 사라졌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머리는 어디로 갔을까......
조인트가 맞지 않아서 모델을 불러오는 데에 오류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머리는 필요 없어."
나무는 제법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신이 난 것 같았다. 아름답다 못해 성스러운 작품을 목도했다는 환희가 지금의 그에게는 있었다. 유신에게는, 그러한 심미안이 없었다. 그녀는 몸을 수그린 채 몰래 쓰게 웃었다.
"머리가 없어야만 짜임새가 맞아. 요철이 맞는다는 말이지. 머리는 마네킹 모두에게 있으니 인간에게는 있어서는 안 돼."
유신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세웠다. 앞으로 떨어진 머리칼을 단번에 쓸어넘겼다. 얼굴에 질색이 묻었기에 슬그머니 씻어냈다. 나무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여전히 몽롱한 눈을 바로 앞의 허공으로 향하고 있기나 한다.
"예술가구나, 송 군도."
그 말에, 나무의 얼굴에 이유 모를 경악이 스쳤다. 3층에서 내려오던 엘리베이터가 늦잠을 잔 동현을 뱉어낸 건 그 직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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