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eam
레안드로 > 케이 로그
최악이었다. 싫어하는 것 극히 드문 인간에게서 이런 생각 들도록 하려면 도대체 몇 개의 악재가 겹쳐야 하는 건지. 상흔을 남길 정도는 아니었으나 드물게 짜증나는 일만 겹친 게 원인이었다. 당장 진행되는 모든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데 썩 흥미로운 것도 아니니 쌓일 수밖에. 성미대로 차분히 살펴볼 수 없는 단체생활에서 오는 거슬림과 두 번의 죽음을 맞게 한 상처, 무너진 절대성에 관한 고찰. 구태여 가설 증명하고자 찾았음에도 가설 틀렸다는 것 하나만 입증하고 돌아왔으니 어지간할까.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본래 어떤 불만이 솟구친들 5분 이내로 가라앉는 인간이다. 레안드로는 정신의 강도뿐 아니라 회복력까지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므로 별다른 외부 자극만 없다면 원점으로 돌아갈 것이 확실했다. 그 시간이 연장된 것은 순전히 육체적 고통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말 않았으나 조금만 움직이면 당장 토할 듯 속이 울렁거렸다. 머리는 또 어떤가. 급격하게 치솟은 열은 스트레스와 결합해 날카로운 정(丁)이 되었다. 관자놀이 찌르는 두통으로 눈앞이 핑 돌았다. 제 상태 객관적으로 파악할 이성은 늘 최후까지 남아있었다. 방심하면 허점 내보일 것도 알았다.
그럼에도 허울 내려둔 것은 상대가 어지간히 무를 것이라는 확신 탓이다. 케이는 복수하네 죽이네 칼을 갈면서도 눈앞에서 울면 잠시간 머뭇할 인간이었다. 제자리에 철벽처럼 버티겠다 다짐해봤자 틈 아래로 물줄기 샐 만큼 허술한데 아득바득 힘주고 버틸 이유가 없다. 편하게 여기는 이면에는 이렇듯 케이가 알면 또 펄펄 뛸만한 명분이 있었다. 그에게 말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모든 게 확실하지 않을뿐더러 분위기 깨기 싫거든. 레안드로는 지금이 꽤 마음에 들었다. 두 번 경험하기 어려울 것이란 예측 굳건하기에 더더욱.
케이 모피어스. 너를 대할 때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은 뭐라고 생각해. 손짓하는 벼랑끝이나 폭풍? 우레와 같은 천둥소리와 뇌우? 뼈도 남기지 않고 삼켜버릴 재앙? 모두 흔적도 없이 살라먹는다는 점에서 두렵지. 하지만 제아무리 거센 폭풍도 가슴 속으로 파고들 수는 없어. 심금을 울리는 건 근원에 닿았을 때 뿐…….
레안드로는 그저 곤혹스러웠다. 인간과의 상호작용이란 것은 언제나 사람을 이상하게 만든다. 별것도 아닌 헛소리에 솔방울 구르는 웃음이, 훈풍 같은 숨이 샌다.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은 표정이건만 그 타이밍을 선택할 수 없어 기어코 가려야만 하고. 이런 반응은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바람 약해진 틈을 타 태풍의 중앙에 발 들인 인간이 몇이나 있었겠나. 바람 타고 회전하는 바깥을 응시할 뿐이던 눈을 장벽 없이 마주했는데 어떻게 고요할 수 있을까.
중심에는 언제나 아무것도 없다. 소음마저 차단된 무(無)의 공간이다. 들불처럼 번지는 재앙의 영향이 미치지 않아 무구하기까지 한 곳. 레안드로 펠레스의 근원.
그런 곳에 소란 이는 것이 도대체 얼마만인지 알까? 케이는 모를 것이다. 레안드로는 현재를 외전 혹은 꿈결로 정의했다. 꿈으로 치부하지 않는다면 이야기는 갑작스러운 결말을 향해 달려갈 테니까. 파괴이자 죽음의 표상이 기어코 고요를 깨트릴 것 뻔했다.
레안드로는 온전치 않은 상태로 작가의 눈을 잠시 가려야 했다. 저돌적인 주연이기도 한 고로 쉽지는 않았다. 방향성이 일치하여 겨우 교정 부호를 달 수 있었을 따름이다. 아무도 여기서 완결을 원하지 않으니 잠시 덮어두자고. 이야기를 끝내기는 일러. 레안드로만이 온전한 상태의 초고를 알았다. 서술되지 않은 페이지를 느꼈다.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이 이야기가 조금 더 보고 싶어졌기에. 단지 홀로 되돌아본다.
나 정말 귀한 꿈을 꿨어. 소중하게 간직하고선 공허할 때마다 곱씹을 테야. 언젠가 닳아 없어지지 않도록 특별한 표시도 해두자. 그때마다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봐, 아니야, 보지는 마. 이건 혼자만 봐야 하니까.
“답잖게 의견을 구하지, 왜.”
레안드로는 하관 가린 손을 스르르 내렸다. 막힘없이 입술이 닿았다. 친애와 감사, 환희, 그 모든 것에 고별하면서. 만약 다시 이런 일이 생긴다면 죽음이자 창조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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