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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안드로 > 케이 로그

백업 by 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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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 모피어스. 서른 넷, 남성, 신장은 190cm 이상. S급 센티넬. 특이사항은 손에 대한 비정상적인 집착. 같은 팀이라 늘상 얼굴 마주하는 것은 물론이고 얼마 전까지는 가이딩 연습 상대까지 되어준 인간. 침식률이 오르기만 하면 인상 찌푸리는 몇 안 되는 센티넬 중 가장 접근하기 좋은 상대였다. 웬만한 인간보다 합리를 따져 계산에 철저했으니까. 적어도 이때 개인적인 흥미는 개입하지 않았다. 가장 적합한 상대가 케이 모피어스였다. 작금의 상황까지 치달은 이유는 첫째로 접촉 가이딩에 꽤 익숙해졌으며, 둘째로 모피어스가 빈틈을 사방으로 노출하고 다녔다는 것이다. 이런저런 변명을 집어치우자면 기껏 접근할 빌미가 있는데 파고들지 않는 것이 아까웠을 따름이다. 모피어스가 알면 치를 떨고 이번에야말로 사지를 가만두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도대체 왜 괴롭히지 못해 안달이냐고? 그런 것에 이유가 필요한가. 레안드로는 썩 무책임한 생각을 흘려보냈다.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갖다 붙일 수 있다. 하지만 정확한 답은 몰랐다. 그냥 그러고 싶었으니까. 늘 그렇듯이 더 알고 싶어서, 보통의 인간과 무언가 다를까 하고, 결국에는 모피어스를 착취한 결과물만 뱃속에 집어넣고 얄팍한 자기만족을 느끼기 위해. 고상한 척은 혼자 다 하면서 실상은 책임 없는 쾌락을 느끼고픈 협잡꾼에 불과하다.

이쯤에서 레안드로라는 인간의 구조를 짧게 뜯어보자면 그는 지나치게 편향된 비대한 자아와 욕구를 약간의 상식으로 포장한 한 덩어리였다. 복잡한 통찰과 생각은 개입할 필요 없었다. 지극히 단순한 행동원리는 한 단어로 정의된다. 혼돈. 적어도 레안드로 본인이 파악한 제 전말은 그러했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조차 그리 많지 않으며 그나마 이끌리는 것이 변화와 흔들림 따위. 그것을 본인에게서 취할 수 없어 타인의 것을 탐할 뿐인, 전형적인 약탈자였다. 물론 이것이 완전한 정답이라고는 여기지 못했다. 누군가 그런 말을 해준 적은 없으니까. 타인에 한해 비인간적인 재해를 흉내낼 수 있었지만 본인의 행적에 관한 고찰은 늘 한 발 늦었다. 객관성을 차리기도 쉽지 않았다. 모든 인간이 그러하듯 본인 일에 완전히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성적으로 고찰한다 해도 무의식의 어느 부분에서 반드시.

“정말 자네 멋대로 구는군.”

때문에 깨달음이 늦었다. 너무 옥죄었나. 어느 정도는 나를 내어주었어야 하는데, 그저 웃으며 눈앞의 만찬이나 즐기느라고. 숨도 쉴 수 없게 몰아세운 후 벗대로 변수를 조작하면 결과값에 이상이 생기기 마련이다. 초보적인 실수를 저지를 줄이야. 이제와서 수정할 수 있나? 수정한다면 그건 얼마나 돌아가게 되는 건지…. 모피어스에게 잘난 듯 말 늘어놓으면서 머리가 바삐 굴렀다. 손에 닿은 체온과 근육의 움직임을 신경쓰느라 더 이상은 동시에 수행할 수 없었다. 레안드로는 한계까지 제 능력을 동원했다. 곧 무용해졌지만. 고찰 도중 모피어스의 음성이 선명하게 울렸다.

“펠레스, 자네는 그토록 미쳐 있는 자극 때문에 넘어지고,”

손이 뺨에 닿았다. 한숨을 막는 손가락이 그대로 멈추었다. 자극 때문에 넘어지고? 뒷말은? 손길에 채근이 묻어났다.

“죽을 거다.”

손이 멈추었다. 레안드로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공존하던 두 가지, 세 가지 생각과 행동이 멈추고 신선한 충격이 뇌리에 박혔다. 모피어스가 손에 뺨을 기대는데도 움직일 수 없었다. 낯을 제대로 보고 싶은데. 적어도 목소리에는 확신이 가득했다. 그를 땅으로 뒤집어 엎고선 표정을 하나하나 관찰하고 싶다는 충동이 치솟았다. 행하지 않은 것은 센티넬 상대로 힘 쓰는 일을 자행하지 않을 정도로 남아있는 이성 덕이다. 왜 그리 확신하지. 죽음으로 말미암아 깨달은 것이 있어서? 단순한 저주의 말인가. 비난이라면 신경쓰지 않겠지만 확신한다면 기꺼이 물을 의향이 있다. 악담에 분노한 것은 아니었다. 이건 제가 이전부터 궁금해하던 질문이다.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이 파멸한다면, 그건 자기 욕심에 잡아먹히기 때문인 걸까? 혹은 감당할 수 없는 자극에 몸이 터져 죽음을 맞이하는 것일까……. 후자라면 본인이 그 기폭제가 될 수 있는 것일까.

잠시 멈추었던 시간의 대화를 더듬었다. 레안드로는 눈을 지긋이 감았다. 지울 수 없는 걸 덮어쓰려면 더한 자극이 필요한 법이지. 우습군. 그건 자네 기준이겠지. 네 녀석에게나 큰 자극이 필요하단 말 아닌가? 잠시 멈추었던 시간을 현재로 돌린 후에야 눈을 떴다.

“공평하게 내가 네 즐거움이 되어줄까.”

“나는 네놈이, …어떤 자극을 좋아하는지조차 몰라.”

“죽을 건 확신하면서 그건 또 모른다니.”

뺨에 닿았던 손이 모피어스의 뒷목으로 기어간다. 모피어스의 체온으로 얼음 같은 서늘함은 면했다지만 열 오른 피부 위를 더듬기엔 여전히 차갑다. 차고 매끄러운 손길은 차라리 뱀의 비늘과 같았다. 뒷목에 안착한 손은 머리칼을 헤집고 기어코 살갗을 더듬는다. 화 삭히라는 듯 가볍게 주무른다. 흥얼거리듯 건네는 말은 언제나와 같지만, 정제되지 않은 욕망의 일부가 진득하게 묻어났다. 늘 그렇듯 농락하는 듯도 했다.

“나를 직시하는 다음 단계는 더 잘 아는 것 정도로 하면 되겠어. 다른 말로는 관심을 가진다거나….”

“원하는 게 뭐야.”

관심을 가지라니까. 이건 답을 얻을 수 있도록 협조하겠다는 뜻이다. 모피어스에게는 보다 직관적으로 가르쳐주어야겠지만 화법을 뜯어고쳐 전해줄 정도로 친절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에게 호의를 내보이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모피어스가 부쩍 가까워졌다. 한결 마음이 들떴다. 다른 건 몰라도 눈은 확인할 수 있는 범위로 들어왔으니까. 눈동자 안 파문처럼 모피어스가 새로운 반향을 가져오지 않았나. 잊고 있던 고찰을 일깨운 것도 모자라 예언까지 하셨으니 어디 실현까지 시켜보라고. 죽으리란 생각은 없다. 이건 레안드로가 버릴 수 없는 오만이다. 그러나 넘어질 수는 있겠지. 이름이 호명된다.

“레안드로 펠레스.”

대답을 종용한다면 응답해 마땅하다. 내가 원하는 것? 그야 당연히.

“너지, 케이 모피어스.”

경쾌하게 웃는다. 이번에도 우울에 빠지려나. 숨통을 옥죄듯 팔을 뒷목에 걸었다. 제 쪽으로 당기는 힘은 강하지 않다. 유혹이라기엔 소름돋는 작태였다. 미려한 낯과 부드러운 움직임은 밀어 속삭이듯 야릇한 태가 나지만 모피어스에게 거북하게 다가가리란 것을 안다. 넘어트릴 수 있다면 좋다. 그렇지 않으면 이쪽에서 넘어트릴 뿐이고. 이기고 지는 싸움이 아니란 걸 아는데도 ‘네가 이길 수 있나?’ 따위의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이 교만은 중증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렴 괜찮지만.

레안드로는 단지 기대한다. 케이 모피어스라는 폭탄이 제게 영향 끼칠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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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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