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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안드로 로그 백업

백업 by 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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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 같은 인간. 정치질 따위 우스운 능구렁이. 예쁘게 박제된 밀랍 인형. 모두 레안드로 펠레스를 수식하는 단어였다. 공통점은 인간 같지 않다는 점에 있다. 삼십 년 넘게 살며 얻은 수식어가 죄다 인간답지 못하다는 말이니 그 성정이 보편적이지 않음은 모를 수 없다. 레안드로 자신조차 제 평판을 알았고, 어째서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까지 납득 가능했다. 조금만 오래 지냈다 하면 주변을 파탄내는 궤적을 걸었으니 이를 부정하면 감성이 아닌 이성에 문제 있는 것이었다. 레안드로는 늘 인간보다는 뱀과 같은 어떤 상징으로, 어떤 상징보다는 그저 존재하는 재해(災害)로써 기능했다. 상호작용은 없다. 언제나 일방적인 행사의 결과만이 남을뿐이다.

그러나 레안드로 본인마저 그것을 진리처럼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우스운 소리. 그저 존재할 뿐이라면 왜 끊임없이 사고하는가? 재앙에 자기 의사가 개입해도 괜찮은가. 비인간이라면 근원을 알 수 없는 탈력감을 느낄 수 없었어야지. 이를 해결하려면 움직여야 했고, 무엇이든 속에 집어넣어 허기를 달래야 했다. 레안드로 본인조차 욕망에 근거해 움직이는 인간이었다. 단지 그것이 타인에 비해 알기 어렵고 극단적으로 짧은 스펙트럼에 반응하는 게 문제였다. 세상 모든 것을 아는 양 굴었지만 이것만은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자기확신이다. 매몰되는 순간 지금과 같은 안정성을 유지할 수 없다. 레안드로는 스스로의 욕망에 잡아먹혀 자멸하는 결과를 원치 않았으므로 깊은 자기 고찰을 내려두었다. 중요한 것은 제 상태가 어떻다는 것보다 스스로 해결할 방법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타인에게 갈취한 감정은 늘 만족스러웠다. 이따끔 실망할 때가 있다 해도 그 나름의 의미가 존재했다. 짧다면 짧은 생 갖은 경험으로 인간이라면 꽤 자신있게 파악할 수 있게 된 셈이다. 따라서 이제는 익숙하게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타인을 착취하는 법은 지극히 간단했다. 늘 그렇듯 재해처럼 존재하며 세상을 오시하면 대부분의 일은 거기서 끝났다. 이따금 이상성욕이 있냐거나 이름이 레안드로가 아닌 메피스토냐는 질문을 들은 적이야 있지만 벽에 대고 돌팔매질 하는 수준이다. 조금의 반응도 필요치 않았다.

이번에도 이미 알고 있는 나쁜 버릇의 일환으로 손가락 깔짝였을 뿐이다. 디에고 데 몬테로. 38세. 남성. S급 센티넬. 신장은 190cm 이상. 특이사항은 S급 센티넬치고 흔치 않은 부상과 이혼 경력. 같은 팀이 아니니 이번 원정이 아니면 크게 마주칠 일이 드물었다. 고작 그런 이유였다. 설명 않는 과거사가 줄줄이 따라붙은 인간은 대게 흔들기 쉽다. 물론 파고들기도 어렵지 않다. 따라서 제 욕망에 충실히 헤집었다. 좋은 이야기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럭저럭 자극적인 이야기는 기대할만했다. 그 인간이 일반적인 경우에서 조금 더 기묘한 방향으로 접근하지만 않았다면 적당히 만족했을 테다.

한 자리에 존재하는 재앙 알아보겠답시고 성큼 뛰어들지만 않았어도. 레안드로는 손끝에 남은 감각을 생생히 기억한다. 도박처럼 내린 입꼬리를 보란 듯 올릴 때, 차가운 손 위로 타인의 체온이 겹쳐진 그 순간. 이질적인 피부의 질감과 서서히 올라가던 근육의 움직임……. 예상이 빗나가는 순간은 늘 뇌리에 남았다. 히죽 웃어 보이던 남자의 낯은 으스스함을 넘어 섬뜩함까지 비쳤다. 말끔하게 포장되어있던 정신의 편린이었다. 그를 잊을 리 만무했다.

몬테로가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겉가죽만 말끔한 펠레스 도련님께 더없이 인간적으로 시인했다. 그럼. 마침 나한테 필요한 게 '재미'였거든. 레안드로는 그를 피하지 않았다. 공감하는 동시에 의문이 속을 가득 채웠다. 왜? 삶이 지루한가? 근본부터 그리 생겨먹은 인간이라? 혹은 과거의 영향으로? 기이할 만큼 눈 깜빡이지 않고, 깜빡이더라도 속눈썹의 진동까지 미세할 정도로만 정교하게 움직였다. 어디든지 뜯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레안드로는 제 틀을 통렬히 깨부수는 인간에게 관대했다. 더없이 호의적일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레안드로 씨는 나랑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군.”

친구? 까짓거 무어라고. 해주지. 가져본 적 있으나 하나같이 너덜너덜해져 떨어졌던 개념. 의식하지 않아도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번엔 다른가. 뱀처럼 속삭이는 목소리는 나름의 호의다. 부끄럽지만 친구라 부를 사람이 거의 없거든. 친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선의라곤 말하지 못한다. 통용되는 개념을 적용한다면 친구란 서로 돕는 존재일 테니까. 서로를 꿰뚫고자 득달같이 틈을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디에고라 부를까?”

포쉬 악센트 특유의 강세가 이름에 실렸다. 친구가 이렇든 저렇든, 아무렴 어떤가? 눈앞의 남자만 웃으면 되었다. 웃으며 응수해주리란 확신이 있었다. 색이 다른 양안이 눈꺼풀 뒤로 사라지고 확연한 긍정이 자리했다.

“이런, 그런 걸로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네 말대로 이름 부르기, 친구가 되는 첫걸음부터 시작해보자고. 레안드로.”

기꺼이. 레안드로는 간만에 감정을 다잡았다. 나름 친구가 되는 역사적인 순간이라면 추한 꼴 보이는 것은 좋지 않다. 표정과 언어, 몸짓 모두 정제된 그대로였다. 드물게 들뜬 기색이 보일지는 몰라도. 보인다면 자꾸만 하나 남은 안구로 향하는 눈짓 때문이었다. 누군가 눈은 마음의 창이라던가? 그리 따지면 불투명한 유리구슬이 어찌 한 사람을 대변할 수 있을까. 제가 지켜보고자 하는 것은 디에고의 과거 아닌 미래이고, 그건 언제나 변화해야만 했다. 희뿌연 빛의 의안이야 과거의 흔적일 따름이다. 흔치 않은 진심을 전할 때는 현재로, 미래로 또렷이 새겨야 했다.

“기쁘다, 디에고.”

“...나야말로, 레안드로.”

다시 손아귀에 체온이 닿았다. 칠 년을 더 산 주제에 하는 짓은 손아래와 다를 바 없었다. 원래 이런 식으로 아양 떠는 인간을 꽤 좋아하는 편이긴 한데…. 알고 하는 건지 원. 레안드로는 달갑게 뺨을 어루만지다가 반대편 뺨 위까지 손을 얹었다. 도망치지 못하게 붙잡은 듯도 보였다.

“부디 사이좋게 지내보자고.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게 없을 만큼 말이야.”

레안드로가 낮게 말을 받았다.

“나, 내 이야기를 하는 데에는 익숙하지 않아. 그러니 알고 싶거든 스스로 속을 갈라서 꺼내 가도록 해. 지금 허락한 거야.”

대신 다칠 각오는 좀 해야 할지도? 농처럼 덧붙였다. 레안드로는 늘 생각해왔다. 누구도 본인을 완벽히 알 수 없으니, 누군가 레안드로 펠레스란 인간을 꿴다면 그때는 비로소 제가 숙여야 할 때라고. 그게 두렵지는 않았다. 그러나 현실로 닥친 적 없으니 실제로 어떨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사실 거기까지 해내리란 기대는 누구에게도 걸지 않는다. 그냥, 눈앞에 친구를 자칭하는 인간이 있으니 문득 떠올린 것뿐이다. 일찍 망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이미 망가져있다면 차라리 낫겠다. 조금만 더 알면 기대할 수 있을 듯도…….

아, 인생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 레안드로는 오랜만에 소망했다.

친애하는 디에고. 오래토록 부식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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