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아무] 영구동토에서 - 1/20 디페 배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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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아무] 영구동토에서
긴 휴가를 냈다. 평생 내 본 적 없을 정도로 아주 긴 휴가였다. 상사는 영문 모를 표정으로 서류를 받아 들더니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오랜 잠입 기간에 대한 포상을 핑계로 한동안 날 치워버리고 싶어 했던 것치고는 상당히 당황한 눈치였다. 서류의 어디가 문제인지 알 수 없었다. 꽤 오랫동안 이런 걸 원하지 않았던가? 잠입이 끝날 시점에 죽어주는 건 과연 나도 들어주기 힘든 요청이었지만 눈앞에서 사라져 주는 건 해줄 수 있는데.
상사는 길게 신음하더니 진심이냐고 물었다. 이런 걸 장난으로 내는 사람도 있느냐고 반문하면 기괴한 것을 보는 것 같은 시선이 답으로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까지 되바라진 어투로 말한 적은 처음이었던가.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뭐가 문제지?”
“휴가를 안 가면 자를 것처럼 권하시기에.”
“자네 정말 장난하자는 건가?”
“방금 말씀드렸습니다만, 장난으로 사직서를 내는 멍청이는 아니라서요.”
“지금 그게……!”
무어라 고함을 지르려던 상사는 미간을 꾹꾹 누르며 심호흡했다. 통쾌했다. 그러게, 내가 언젠가 꼭 쩔쩔매게 해주리라고 다짐하게 만들지 말았어야지. 꽤 난처할 것이다. 평소 눈엣가시로 여기던 놈이 갑자기 퇴사하겠다는데 상사로서는 퇴사를 말려야 하는 상황이니까. 적어도 지금은.
“불만이 있으면 말로 하지 그래.”
“불만 없습니다.”
“없다는 놈이 지금 사직서를 써!”
상사가 펄펄 날뛰었다. 나는 그 꼴을 가만히 보기만 했다. 난처할 것이다. 적어도 지금 내가 사직하면 상사 본인에게. 아니 조직 전체에 상당히 불리할 테니까.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영웅이 돌아오자마자 내쫓기듯 나가버린다면 내부의 사기가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요, 외부의 비난이며 언론의 취재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일본인 같지 않은 면모를 유달리 싫어하던 상사에게 있어 최고의 상황은 내가 잠입이 끝날 시점에 조직에 들켜 사살되는 것이었을 테다. 그다음으로는 조용히 잠입을 마무리시키고 나서 포상을 명목으로 장기휴가를 준 다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진단을 받아내 한직으로 조금씩 밀어내는 것이었고. 설령 경찰조직 내에 내 이력이 알려지더라도 조용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한직으로 밀어내면 된다고 생각했겠지.
세상일이 그렇게 원하는 대로 쉽게 흘러갈 리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여기에는 ‘그 소년’이 얽혀있는데 말이다.
검은 조직의 종말은 화려한 방법으로 만천하에 까발려졌다. 그 소년, 쿠도 신이치군은 언제 어디에 있어도 주목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 같았다. 사실은 거대한 비밀 범죄조직이 있었고 그 정체를 파헤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고등학생이 있다? 나가 죽어도 들러붙어야 할 특종 중의 특종이었고 언론은 당연히 목숨 걸고 기어와 취재를 해댔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노크인 걸 밝히며 조직을 배신하는 내 모습까지 같이 찍혀버린 것일까.
혼혈로 태어나 배척받아야 마땅한 2등 시민이 잠입수사관이 되어 국가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니 일본 사회에서의 배척과 차별에 대한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는 건 금방이었다. 나는 언론이 핥기 딱 좋은 처지와 외모를 가진 영웅이었고 상사는 당장 나를 치워버리기 곤란해졌다. 영웅에게는 휴식이 필요하니 어쩌니 하며 나를 단속시키고 정신감정 및 휴가를 강권하기 시작한 것도 어떻게든 날 가려버리려는 속셈일 것이고.
그런 상황에서 나는 대놓고 사직서를 낸 것이다. 상사로서는 퍽 당황스러우리라. 내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사직서를 냈다면 손뼉 치며 좋아했을 테지만 지금은 영 곤란할 것이다. 아무로 토오루로서 일할 때 만들었던 추천 메뉴까지 주간지에 실리는 판국에 지금 내가 퇴직한다면 언론사에서 냅다 취재해 두고두고 불을 지필 수 있는 땔감으로 쓰겠지.
불만, 불만이라. 상사는 집요하게 캐물었지만 나는 딱히 불만이 있어서 사직서를 내는 건 아니었다. 내게 차별은 일상이었고 배척은 기본조건이었다. 이제 와 사내 정치 때문에 사직서를 낼 만큼 말랑하지도 않다. 상사는 믿지 않겠지만 지금 진심만을 말하는 중이었다.
“이왕 휴가를 낸다면 길게 내고 싶어서요.”
“마르고 닳도록 이야기했잖나! 원하는 만큼 휴가를 내주겠다고!”
“그럼 1년 휴가도 가능합니까?”
“뭐?”
상사가 미친놈을 보듯 나를 보았다. 휴직도 아니고 휴가가 1년이 될 리가. 설령 가능하다고 해도 휴가를 1년씩 낸 게 세상에 알려지면 퇴직이나 다름없이 보일 것이다.
상사와 나는 입으로 주먹다짐하듯 싸웠다. 자존심 때문에 부탁한다는 말 하나 하지 못해 장장 두어 시간을 입으로 싸우는 상사가 한심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긴 휴가를 원했다. 휴가 뒤에 복귀했을 때 커리어에 한 점 불리함도 없는 긴 휴가를. 길면 길수록 좋았다. 그는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가늠할 수 있을 만큼 만만한 사내가 아니니까. 커리어에 악영향 없는 장기휴가가 불가능하다면 나는 정말 경찰을 관둘 작정이었다.
최종적으로 나온 기간은 3개월이었다. 딱 예상한 만큼의 기간이었다.
녹지 않는 땅 위에 선 나무는 아무리 커도 어딘가 빈곤해 보였다. 밟고 선 것이 땅인지 눈인지 얼음인지 가늠할 수도 없고 가늠하는 게 의미도 없는 창백한 땅. 그러나 나는 이곳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마음에 들었다고 해야 할까, 고향 같은 느낌이라는 게 정확할 것이다. 이곳으로 오면 나는 내 안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잠입 시절 조직의 일로 몇 번이나 와 본 땅이지만 몇 번을 와도 감상은 변하지 않았다. 몇 번을 와도 내 안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드는 기묘한 황야. 내 안으로 들어가서 그를 찾는다고 생각하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어쩐지 조금 간지러운 기분마저 들기에 나는 재빨리 그 기분을 흩어냈다.
마지막으로 그의 행적이 발견된 곳이, 러시아에서도 녹지 않는 땅으로 유명한 여기였다. 막막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따지자면 나는 최대한 정보를 얻어내 거기에서 중요한 것을 뽑아내는 것을 좋아했다. 허허벌판에서 흔적을 찾아내는 것은 내가 아닌 그의 장기였고. 그는 야생동물 같은 구석이 있어 아주 작은 흔적에 감을 더해 정확하게 목표를 추적하곤 했다. 그런 사람이 흔적을 지우고 다닐 테니 추적하는 건 어려운 일이겠지만 어째서일까, 다른 것은 몰라도 그만은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묘한 확신이 들었다. 도무지 이길 도리가 없는 남자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마치 그의 죽음을 조사할 때 생존을 확신했던 것과 비슷한 감각이었다.
그칠 만하면 살이 베일 것만 같은 칼바람이 불었다. 이곳이 나 자신이라면 나는 스스로를 해하고 있는 것일까? 이 땅은 여기까지 나를 닮은 것일까. 스스로를 해한 적 따윈 없다고 시치미 떼고 싶었지만 나 자신을 속일 수는 없는 노릇이라 나는 그저 묵묵히 칼바람을 맞을 수밖에 도리가 없다. 그래도 나는 괜찮았다, 내가 한없이 자기 파괴적일 때에 그의 존재가 나를 멈추었다. 그를 쫓으며 나는 자해 같은 과로에서 조금씩 벗어났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는 아무도 없었다.
당신도 이 땅이 당신 스스로라고 느꼈을까? 부는 바람의 칼날에 자신을 베여가며 걸어갔을까. 매사 그랬듯 마땅히 그리 해야 하므로 할 뿐인 것처럼 덤덤한 얼굴로 사라졌을까.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꼭, 그렇게 사라졌을 것만 같아 가슴 속이 서늘한 동시에 불이 치솟았다.
히로의 일이 아카이의 잘못이 아니었듯, 그 폭파 사건도 아카이의 잘못이 아니었다, 사람은 언제나 치밀할 수 없다.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도 모든 상황을 신처럼 제어할 수는 없다. 그리고 아카이도 사람이었다. 아무리 스스로가 잘나도 동료까지 완벽하게 굴게 할 줄 재주는 없다. 그리고 주요 간부를 뒤쫓는 급박한 상황에서 정보도 없이 폭탄이 숨어있다는 걸 알아채는 게 당연하다는 말은 그 누구도 할 수 없을 것이다. 폭탄을 설치한 것은 조직이므로 사상자를 낸 것도 조직이고 죗값을 치러야 할 것도 조직이었다.
그러나 히로의 일을 제 과실로 떠안았듯이 그는 폭파 사건도 제 과실로 온전히 떠안고 세상에서 등을 돌렸다. 이제 와 생각하자면 그는 과하게 짐을 떠안는 경향이 있었다. 모든 것이 제 계획대로 되어야 하므로, 계획대로 되지 않는 건 원인 불문 전부 제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오만하기 짝이 없는 남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구할 수 있는 것도 나뿐이었다. 그는 히로의 일을 제 과실로 생각하므로 나를 외면할 수 없다. 그는 오만하기에 설령 세상 모든 것을 외면하더라도 나만은 외면할 수 없다. 나를 외면하는 것은 책임에서 회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웃긴 논리였다. 나를 살게 만든, 아주 웃기고 오만해 빠진 논리.
내 행적은 이미 며칠 전부터 끊어졌을 것이다. 외국에 나갈 거면 행적을 보고하라느니 어쩌니 하는 소리는 상사 입에서 나올 때 귓등으로 넘겼다. 상사도 어련히 짐작하고 꼬리를 붙여놓았지만, 그 솜씨는 영 어설펐다. 상사로 대접해 주고 싶지 않을 만큼. 지금쯤 난리가 났겠지만, 알 바인가. 행적을 밝힐 생각 따위 추호도 없었다. 아카이가 있는 곳을 남들 따위에게 알려줄까보냐.
저 메마른 지평선 너머에, 미국 전체의 구애를 뿌리치고 돌연히 사라져 버린 영웅이 있다. 모두가 그를 원했지만, 그는 아무도 바라지 않았다. 나는 받지 못해서 안달 났던 것을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마냥 뿌리치고서는 마땅히 짊어져야 할 짐이라고 여기는 것들을 한 아름 짊어지고 떠나버렸다. 그는 오만했기에 구원을 바라는 방법을 몰랐다.
나는 그 오만을 부수러 갈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아카이를 이겨서 망할 그 오만을 산산이 조각내고 다져 흩어버릴 것이다. 그가 어떤 꼴을 하고 있든 상관없었다. 예전에 그를 죽음에서 꺼낸 것처럼, 이번에는 그를 오만에서 꺼내고야 말 것이다.
그가 침묵으로 짐을 떠안았다면 나는 소리로 그 짐을 나눠서 질 것이다. 그가 나를 보호한 것처럼 이번에는 내가 그를 보호할 것이다. 어떤 꼴을 하고 있더라도 내가 그를 걸머지고 살아갈 것이다. 커리어에 해가 되지 않는 휴가는 그래서 필요했다. 그를 걸머지고 살아가기 위한 발판인 셈이다. 직업이 없어도 그를 감당할 자신은 있었지만, 직업을 유지하는 편이 여러모로 편하다.
아카이가 만년의 얼음 속에 자신을 스스로 가두었으니 나는 그 얼음을 통째로 짊어질 것이다. 그리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함께 얼어버리는 것도 좋겠지. 그럴 수 있는 사람도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도 이 세상에 나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빈곤한 황야 위로 그치지 않을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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