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대공님은 까칠하고 싶지 않았다

인생 100회차 서브남주가 서브남의 자리를 벗어나려고 할 때 생기는 일

우리는 수도 없는 ‘빙의자’ ‘회귀자’ 또는 ‘환생’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그런데… 그 세계에서 선택받지 못하는 남자 주인공들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해 본 적은 있는가? 아마 없겠지. 있다면 당신의 동정심에 감사드린다. 그러나 보통은 우리의 당찬 여주인공 심리를 따라가기만도 바쁘기 때문에 선택받지 못한 남자 주인공의 분량은 어딘가로 삭제당하고 외전에 얼굴조차 비추지 않는 지경이다.

이 세계에서 ‘남주인공’ 의 운명을 타고난 자들은 부귀, 행복, 영광, 그리고 영원한 사랑을 보장받는다. 동화의 세계는 원래 그런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단 한 명의 승자를 위한 상품일 뿐, 패자들에게는 그 영광의 부스러기조차 나누어지지 않는다. 수많은 이계의 사람들이 이야기 속으로 들어올 때마다 ‘남자 주인공’들은 생을 거듭한다. 그들이야말로 빙의자고, 회귀자인 셈이다. 그 사실을 서술자인 당신은 어떻게 알고 있냐고?

그야 이 이야기의 서술자가 바로 아흔아홉번째 이야기의 엔딩을 방금 맞은, ‘남자주인공’ 의 운명을 타고났으나 아흔아홉번의 생 동안 단 한 번도 최종 선택을 받지 못한 일명, ‘전문 서브남’이니까.

인생을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택을 받아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평생, 이십 대의 한 순간에 갇혀서 그 순간만을 반복하고 반복하게 된다. 처음에는 좋았다. 그야 인생에서 가장 찬란한 순간이 보통 남주인공이 되는 순간이니까, 두 번 세 번 정도 반복해도 손해볼 건 없다 싶었지. 남자주인공의 운명을 타고났다는 것에는 존경과 사랑을 한몸에 받는다는 것도 포함된다. (그것도 설정값에 따라 달라지지만, 대체로 ‘서브남’ 포지션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그의 운명은 순탄한 편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두번이어야지, 뻔한 이야기의 뻔한 전개를 보고, 또 보고 있다 보면 슬슬 지쳐오기 마련이다. 최근에는 자신이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한 편인가, 그런 고민도 해 봤다. 왜 매번 그는 선택을 받지 못하는 걸까? 왜 매번 다른 남자주인공에게 밀려나는 걸까? 한 명의 남자주인공이 선택받아 해피엔딩을 맞으면, 그 다음 세계에서는 그 자리를 새로운 ‘남자 주인공’의 운명을 타고 난 사람이 차지한다. 아흔아홉 번의 생애를 거듭하는 동안 그의 주변에 있던 다른 ‘남자 주인공’들은 모두 엔딩을 봤고 자기 인생을 잘만 살고 있었다. 그 혼자만 영원한 이십대에 갇혀 있는 셈이었다.

우리의 영원한 ‘서브남’, 펠릭스 폰 멘델스존 바르톨디는 보통 소후작 정도의 지위를 가진다. 부담스럽게 높지는 않지만 여자주인공과는 비슷하거나 살짝 높은 셈이다. 이번 빙의자 리제트 드 캉수아 영애도 백작가였다. 그리고 펠릭스는, 최선을 다했지만 선택받지 못했고-이번에도-무슨, ‘마음의 상처가 있고 차가워 보이지만 속은 따뜻한’ 남자를 고른 이 영애의 결혼식에 참석해 주고 있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나면 또 1년쯤 전으로 돌아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어떤 새로 보는 영애를 만나게 될 테다. 또 영애는 까칠하지만 가끔 잘해주는 남자에게 빠질 테고. 한참 동안 펠릭스를 희망고문하다가 결국에는 어떤 종류의 위기와 역경을 넘어서며 마음을 확인한 ‘진남주’ 와 이어지게 될 테다. 펠릭스는 딸기 쇼트케이크를 입에 밀어넣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성당의 시계를 얼핏 올려다보자 열두시가 되기까지 몇 분 남지 않아 있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펠릭스는 또 다시 회귀할 준비를 한다.


눈을 뜨자마자 펠릭스는 달력을 점검했다. 1831년 3월 10일, 거의 딱 1년 전으로 돌아온 듯했다. 나이는 여전히 스물둘, 주변이 평상시보다 조금 더 화려한 걸 보니 이번에는 공작이나 대공. 거울을 봐도 딱히 달라진 점은 없었다. 늘 그렇듯 온화한 갈색 눈에 자연스럽게 흐트러져 있는 검은 곱슬, 하트 모양의 입술에 곧게 잘 뻗은 코. 빌어먹을 젊음과 생기로 넘치는 얼굴이었다. 영혼은 죽은 지 한참인 것 같은데도 말이다. 옷장을 열어 보면 언제나와 똑같이 크림색, 연한 갈색, 초록색, 아무튼 따스하고 다정한 색감의 외투가 가득하다. 한숨이 절로 새어나왔다. 벌써 백 번째 인생이었다. 사람들이 농담조로 뱀파이어에 대해 ‘200년을 살았는데 아직도 가난하면 죽어라’ 같은 말을 하는데 이쯤 되면 펠릭스도 죽어야 했다.

신이 본인을 가련하게 여겨줄 수는 없는 걸까? 이번에는 성기사단 단장이나 뭐 그런 간지나는 거 안 붙여 주나? 펠릭스는 침대에 앉아 턱을 괴고 생각한다. 따스한 봄 햇빛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며 단정한 얼굴에 빛을 드리웠다. 이제 전략을 바꿀 때가 됐다. 지금까지는 신사답게, 본인의 원칙에 따르는 걸 최우선으로 했지만 이제는 슬슬 미래를 살아보고 싶었다.

펠릭스는 주먹을 꽉 쥐고 일어나 화장대 앞에 선다. 이대로는 절대 선택받을 수 없다. 인정하자. 지금까지의 전략대로 해서는, 영원히 사랑받을 수 없다. 이 원래 성격은 그리 사랑받기에 적합한 성격은 아니었던 거다. 화장대 속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미간을 찌푸리며, 펠릭스는 첫 번째부터 아흔아홉 번째까지 선택받았던 ‘진남주’들의 공통점을 떠올려본다. 검은머리일 때도 있고 금발일 때도 있다. 백발도 있었던 것 같은데. 어차피 그런 거야 바꿀 수 없으니까 넘어가고 (그리고 대체 신의 무슨 농간인 건지, 본인은 검은머리지 않은가.) 다른 점을 생각해 보면 하나같이 싸가지 없는 사람들이었다. 여자 주인공 한정으로나 다정하지. 그것도 가끔. 펠릭스가 싫어하는 부류였다. 원칙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타인에게 상처를 줘 놓고서는 가끔 한번 잘해주는 건 폭력이라는 그의 지론으로는 ‘진남주’들을 절대 이해할 수 없었다. 가슴 속 어둠이 있다 어쩌고 저쩌고 하지만, 그건 좀 알아서 혼자 치유하지 매번 여자주인공에게 의지하고나 있고. 한심스럽기 짝이 없는 부류였다. 보통 무술도 잘 하고, 여자주인공을 위해서라면 폭력도 서슴치 않는다. 이것도 기본적으로 평화주의자인 펠릭스에게는 공감이 가지 않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이 상처입은 야수같은 사람들은, 보통 아주 높은 지위에 있고 군대를 손에 넣고 있다. 쿠데타를 안 일으키는 게 장할 정도로 말이다. 북부로 추방당한 경우도 많고! 그리고 그런 곳에서 여주를 만나…

가만.

펠릭스는 문틈 사이 끼워진 신문을 들어 펼쳐본다. 북부로 보내진다는 것은 곧 좌천이었고 때문에 국경을 수비한다는 아주 중요한 역할임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노환으로 사망한 전 북부대공의 자리를 잇지 않으려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펠릭스는 신문을 빠르게 접어 다시 책상 위에 내려놓고, 화장대 앞에 서서 다시 한 번 얼굴을 찡그려 본다. 자, 지금부터는 생전 단 한 번도 웃어 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살 때다. 이번에는, 이번에는 그 망할 ‘까칠하고 차가운’ 남자주인공 역을 완벽하게 빼앗아가 주겠다. 북부대공? 본인이 자청해서 발령받겠다고 하면 된다. 이 스물두 살을 넘길 수 있게 된다면, 그것만 가능하다면 펠릭스는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온화하고 상냥하지만, 멍청한 호구는 아니다. 지금까지 알지만 하지 않고 있던 것을 시도해 볼 때였다. 지금 이 모습으로 자신을 사랑해 줄 여자를 기다리는 미련한 짓은 관두고, 영악하게 굴 때였다.

종을 울리자 요한이 허리를 숙이고 문을 열었다.

“요한, 지금 당장 황제 폐하를 알현하러 가야겠으니 부디 마차를 준비해 주세요.”

“예? 갑자기요, 도련님?”

“네, 국가의 중요한 자리에 공석이 생겼는데 이리 놀고먹는다는 것이야말로 한심스러운 짓이니까요.”

“알겠습니다, 분부 받잡겠습니다.”

요한이 떠나기 직전, 펠릭스는 옷장을 열었다가 다시 요한을 불러세운다.

“아, 그리고! 따뜻한 겨울 정장을 주문해 줘요. 전부 까만색으로.”

북부대공 폰 멘델스존 바르톨디는 그렇게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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