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남성

사각형의 약속

오롯한 내 일로 인해 내일을 기대할 수 없게 된다면.

차라리 실망할 수 있는 약속을 하자고

그렇게 매일을 살아가는 것도 어쩌면.

나는 아마 기대도 실망도 하지 않기 위하여 이곳에 온 것 같았다. 도망치자는 희망도, 언젠가는 더 멀리 날아가자는 다짐도 모두 한 사람이 만들어 준 것이었기에, 그 애가 사라지자, 목표라고 할 것이 없어져 버렸다. 왜 그 사람이 없어도 세상은 돌아가는지. 나는 어째서 그 애 없이도 먹고 자며 숨을 쉴 수가 있는지.

살아가는 것이 죄는 아니라지만. 그 모든 것이 괴로워서 나는 그 애를 위해 죽고 싶어 하는 자들을 사랑하기로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를 사랑할 수가 없어서. 언젠가는, 꼭 언젠가는 나도 그녀처럼 삶을 끝내봐야지. 그 애 없이도 웃고 떠드는 나날이 싫어 견딜 수가 없었다. 망상, 혹은 꿈속에서 그녀를 보기 위해 나는 취하기로 했다. 피를 따라 몽롱한 기운이 흘러내리면, 그애는 예전처럼 내 일상의 그림자처럼 나와주니까.

실은 언제부터 팔에 주사를 놓는 지를 관뒀는지, 잘 기억나지 않아.

아니지 잘 기억하고 있잖아.

“난 그 자식이 마음에 안 들어.”

기억 속의 그 아이는 늘 웃고만 있던 거 같다. 몇 년 더 살았다고 날 챙겨주는 꼴이 웃기잖아. 이런 곳에서 어른 행세하는 치들은 다 똑같아. 나중에 통수 때리거나 뭔가를 요구하지. 그 애가 굳이 묻지 않아도 나는 내 세상이 오로지 그 애와의 작은 단칸방이 전부라고 단언했다.

“아니, 넌 그렇지 않게 될 거야.”

배신을 예언 받은 신자처럼 부정했었다. 그러나 내 세계에서 그녀는 언제나 맞고 나는 틀리기만 해서.

“어린애가 무슨 담배냐며 이런 거나 사주더라. 참. 돈이 남아도나 보지?”

“알고 보니 그 인간이 대신 배달 해줬더라고… 아니었음, 정말 큰일 날뻔..하긴 했어.”

“첸타오가 말이야~ 네가 해준 얘기 완전 웃기다고 하는거 있지!”

너는 우리의 일상을 결국 나누고 마는구나. 그녀가 그렇게 말하는 것만 어렴풋이 기억날 뿐이었다. 어디서부터 나의 죄였지? 그녀는 언제부터 나의 배신을 직감했을까. 모든 것이 끝났음에도 나는 살아가야 해서. 그저 네 곁으로 걸어갈 한 발짝의 용기가 없었기 때문에.

그 애와 같은 사람들을 보내주기로 했다. 스스로 이 괴로움의 굴레를 끊어버리고 한 사람들. 그런 이들에게 마침표를 팔다 보면, 나도 언젠가는 이 죄를 사할 용기를 얻을 수 있겠지.

때가 되면 훨훨 날아가 버릴 거야. 누가 붙잡든지 간에.

분명히 해야겠지. 너는 나를 붙잡지는 않았다는 것. 나 또한 네게 그런 무게도 굴레도 부여할 자격이 안 되었다는 것. 나는 모든 버팀목을 잃었을 뿐이었고, 마침 너는 거기의 아주 조금 친절한 사람일 뿐이라서.

잠시 기대어 있는 정도면 괜찮겠다 싶었는데.

언제였을까. 확실한 건 비가 왔다는 거였어. 왜, 우리 집은 식물이 많잖아? 비가 오면 그 특유의 냄새가 더 가득 찬단 말이지. 텁텁하게 꽉 채워오는 생기와 우중충한 창밖의 이질감. 그 풍경에 있다 보면 평생 이대로 녹아 사라지고 싶어서…

지금이라면 갈 수 있겠다. 확신이 드는데도 왜 이리 손은 떨리는지. 환희로 애써 포장하고 차가운 바늘을 팔꿈치 안쪽에 대었을 때. 그게 보였어. 의자에 걸친 너한테서 빌린 흰 가운이.

내가 약사를 한다고 하니까 넌 놀렸었지. “약팔이가 아니라?” 이 천재를 뭘로 보고! 나는 내 일에서 외면하기 위해 다른 누군가의 밝음을 흉내 냈었고, 너는 그걸 아는 몇 안 되는 이 중 하나였지만 굳이 나의 변화를 알아채지 않았어. 그런 네 친절에 나는 의지했었나 봐.

예를 들면, 저기 있는 흰 가운도 그래.

“약사라면 필요하겠네.” 이런 겉치레 첨림에선 웃음거리가 될 뿐일 텐데. 여전히 뚱한 나한테 너는 웃으며 가운을 입혀주었다. 그래도, 라는 접속어를 붙이며.

“없는 것보단 나으니까.”

너는 날 위해 이런 걸 따로 장만할 사람은 아니라서, 나 또한 이것이 남은 옷 중 하나임을 알기에. 우리는 무언으로 약속된 친절만을 베풀고 받는다. 얇게 덮을 수 있는 여름용 이불로만. 나는 언젠가 영영 떠나고 싶어서라지만. 너는 왜?

나는 왜 주사기를 더 움직일 수 없을까.

가운은 때가 충분히 타버려 누리끼리 했어. 부분부분 아예 까맣게 물들여 버린 곳도 있었지. 순간 그걸 보고 생각이 든 거야. 아, 저거 빨아야 하는데. 한번 신경 쓰여 버리고 말면, 미래를 떠올려 버리게 되잖아.

내일 날이 맑으면 너한테 가야겠다. 가운 하나 쯤은 너도 별말 없이 공짜로 빨아 주겠지? 둥글게 세탁기가 돌아가는 동안 너와 수다나 떨어야겠다. 얘깃거리가 떨어져도, 네 앞에선 굳이 입을 더 열지 않아도 되니까.

그러다… 그러다 날이 맑으면, 옥상에 가야지. 거기서 작고 네모난 하늘에 둥둥 뜬 하늘을 너와 가만히 바라봐야지. 어쩜 나는 이렇게도 햇빛이 주는 중력에 잠기고만 싶은지.

“전부 너 때문이야.”

결국 입 밖으로 나오고 말았어. 어쩔 수 없었잖아. 내가 얼마나 용기를 냈는지도 너는 모르고. 아마 평생 너는 몰랐으면 하니까, 나는…

“맑은 날에는 그 애한테 못 가겠구나.”

다짐도 희망도 맹세조차도 되지 않는 말을 기어이 내뱉게 만들어. 그러니 이건 결국… 너로 인해 만들어진 관성 같은 것. 참으로 나쁘지도 막 좋지도 않을 습관. 네가 만들고, 내가 지키고 싶은…

내일 날이 맑으면 타오를 보러 가야지.

그렇게 내 세상은 이 좁은 사각형 안에서 반경을 넓혀간다. 여러 곳에서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하고, 그중 몇 개에 얽혀 넘어져 날아가지 못하게 되더라도.

나름 나쁘지 않다는 걸 네가 알려주고 말았어.

카테고리
#오리지널
페어
#Non-CP

해당 포스트는 댓글이 허용되어 있지 않아요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