ㅍㅇㅅㅇ

[2화] 남자친구의 그 형님이 밉습니다

맄즁


평연소일 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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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하게 다리를 떨며 시계를 1초마다 확인하던 지웅은 6시 정각이 되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저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닼! 웬일로 벌써 나가냐는 말도 무시하며 후다닥 뛰어나와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렸다. 원래라면 상사들이 먼저 이만 퇴근들 합시다, 말할 때까지 속으로 쌍욕을 하며 가만히 기다렸겠지만 오늘만큼은 반드시 수행해야 할 특별임무가 있었다.

반드시.

"지웅형... 리키 일생일대의 wish 있어요..."

이젠 기특하게 설거지도 잘하는 리키의 엉덩이를 토닥이다 말고 멈칫했다. 일생일대라는 단어를 리키가 어떻게 알고 있지. 어쨌든 중요한 건 일생일대는 알고 소원은 모르는 리키가 아니니까 지웅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봐. 형이 돈 빌려달라는 거 빼고는 다 해줄게. 아, 보증도 안 된다.

"내일 권지ㅇ형 ticketing... but 조펼과제 있어요...."

리키는 감히 그 고귀하신 이름을 말하기도 쑥스럽다는 듯 손을 꼼지락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권지ㅇ형은 리키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인생의 반 이상을 좋아한 연예인이었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지웅은 저 대단한 스타일링이 대체 누구를 추구해서 나온 건지를 깨닫고는 그저 웃어댔다. 좋아하는 아이돌을 따라 하는 건 귀여우니까.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권지ㅇ형님을 탐탁지 않아 했다. 더 솔직해지자면... 자신과 이니셜마저 똑같은 리키의 권지ㅇ형을 매우 안 좋아했다. 아티스트로는 멋지지만 남자친구 입장에선 살짝, 사실은 조금 많이, 질투가 난다고 해야 할까. 처음엔 그냥 유명한 가수니까 그 정도로만 좋아하는 거겠지 싶어 넘겼는데 리키는 생각보다 그 형님에게 제법 진심이었다. 이번 콘서트에서 무슨 무대가 나올 거고 어떤 노래를 부르는지 신나서 떠들어대는 리키의 말을 지웅이 싹둑 잘랐다.

"그럼 형이 좋아 권지ㅇ형이 좋아?"

"지웅형, of course."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나오는 대답에 지웅은 뿌듯하게 가슴을 폈다. 권지ㅇ형님. 당신 팬이 몇백만명이든 몇천만명이든 상관없습니다. 우리 리키는 저를 좋아하거든요.

어쨌든 일생일대라는 단어까지 알아 온 리키의 노력이 가상하기에 지웅은 생애 처음으로 칼퇴를 하자마자 pc방을 향해 달리고 있다. 티켓팅은 오후 7시부터. 그러나 회사 근방에는 저사양 중에서도 저사양이라는 LOL을 할 때조차 한 번씩 마우스가 튕기고 상점 접속에 로딩이 걸리는 오래된 pc방들밖에 없었다. 어차피 다른 지역으로 갈 거면 집 근처로 가는 게 낫겠지, 지웅은 그렇게 지하철 손잡이에 몸을 의지하며 사방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에 낑긴 채 타고 가다가 틈을 비집고 겨우 내려 에스컬레이터도 포기하고 계단을 열심히 뛰어올라 집 근처 pc방에 들이닥쳤다. 사실 이때까지는 별생각이 없었다. 딱히 연예인을 좋아해 본 적도 없고 콘서트 알못인 지웅에게 티켓팅이란 그저 클릭 몇 번 하고 자리 선택하고 결제하면 끝-인 줄 알았으니까.

이미 선택된 좌석입니다 이미 선택된 좌석 이미 선택 이미...

지웅은 이선좌의 공포에 대한 언급을 인터넷에서 몇 번 본적은 있었지만 당사자가 된 적은 없었으니 이제껏 딱히 실감하진 못했었다. 걍 고생들 하네, 이 정도. 그러나 막상 이 뭐 같은 알림창을 계속 끄다 보니 홧병이 나서 마우스를 집어던지고 싶어졌다. 집 컴퓨터였으면 정말로 던졌을 거다. 지웅은 콜라 빨대를 담배 대신 피우며 모니터에 빨려들 것처럼 고개를 내빼고 계속 클릭했다. 리키한테 자신만만하게 말했는데 어떡하지, 조별과제 회의하면서 잔뜩 설레고 있을 텐데 이걸 어쩌지. 초조하게 손톱을 씹으며 마우스질을 하던 지웅은 마침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pc방을 나섰다. pc방 이용요금은 2시간에 3천원, 치킨마요와 콜라 세트는 7천원... 총 1만원을 허공에 뿌렸다. 사실 시간 낭비와 돈 낭비는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그냥 이런 일도 경험이지 하며 넘길 수 있다. 다만 실망하면서도 아닌 척 괜찮다고 애써 웃을 리키가...

집에 들어가기 싫다. 회사에선 그렇게 간절하던 집이 지금의 지웅에겐 지옥처럼 느껴졌다. 차라리 들어가서 리키가 좋아하는 처갓집 슈프림 양념치킨을 시켜놓고 있을까. 그렇지만 리키가 얼마나 이 콘서트를 기대하고 그 권지ㅇ형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니까 이번만큼은 치킨으로도 해결이 안 될 것 같았다. 지웅은 한참을 망설이며 집 주변을 배회하다가 마지못해 비밀번호를 꾹꾹 눌렀다. 일단 치킨이라도 미리 시켜놔야겠다 한숨을 푹 내쉬고 현관문을 열었다가 앞에서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리키와 마주치자마자 바로 문을 닫고 뛰었다. 더 늦게 올 줄 알았던 리키가 왜 벌써 와있는 걸까, 지웅은 속으로 리키를 탓하며 열심히 달렸다. 역시 도저히 못 말하겠다. 저 눈을 보고 어떻게 사실대로 말하냐고...

"지웅형!"

계단을 다 내려가기도 전에 결국 리키에게 잡혀버렸다. 지웅은 차마 고개도 못 들고 횡설수설 늘어놓았다. 미안 형이 남들보다 손이 느려서 그만... 이선좌의 공포가 아직도... 권지ㅇ형님의 다음 콘서트는 꼭...

"저 ticketing 했어요!"

"했어? 성공했어?"

들뜬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리키를 지웅이 번쩍 들어올렸다. 장하다, 우리 리키! 회의가 생각보다 일찍 끝났다며 재잘대는 리키의 엉덩이를 팡팡 두드렸다. 실망한 리키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돼서 정말 다행이었다. 지웅은 땀을 닦는 척 눈물을 훔쳤다.

리키는 아침에 지웅을 회사까지 태워다주더니 이제 바로 콘서트장에 주차하러 간다고 응원봉을 흔들며 떠났다. 지웅은 평소와 똑같이 귀하신 몸으로 누추한 회사에서 지겨운 업무를 보고 있지만 오늘만큼은 별로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일단 내일이 주말이기도 하고 집에 가봤자 꿀단지보다 더 달달한 리키가 없을 테니까. 분노가 안 쌓이니 키보드를 두드리는 속도도 자연스레 줄어들었다. 느릿느릿 타이핑을 하던 지웅은 시계를 확인했다. 어차피 퇴근하고 할 것도 없는데 이따 우리 리키 마중이나 나가야지.

콘서트가 끝나자 사람들이 시끌벅적하게 쏟아져 나왔다.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지웅은 생각보다 많은 인파에 놀라 주춤대며 뒤로 물러났다. 저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우리 애기를 찾을 수 있을까. 눈에 띄는 금발을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봤지만 당장 시야에 들어오는 노란 머리만 열댓명은 넘었다. 혹시나 사람들이 많아 전화도 안 터질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바로 연결이 됐다.

"리키, 어디 있어?"

"저 concert 끝나서 집 가려고요."

"형 근처에 있는데."

"What?"

형 어디에요, 몰라, 눈앞에 뭐 보여요, ...사람들? 서로 한참을 헤매다가 겨우 만났다. 리키는 자신을 위해 마중까지 나와준 지웅에게 감동을 받아 꼭 끌어안았다. 지웅은 이산가족 상봉한 것마냥 반가워하는 리키의 등짝을 쓸어주다가 슬쩍 먼저 손을 잡았다. 근처에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많아서 이 정도는 특이한 축에도 못 낄 게 뻔하니까. 그렇게 손을 꼭 잡고 주차장으로 향하는 와중에도 권지ㅇ형이 얼마나 멋있었고 얼마나 완벽한 무대를 하셨는지 떠들어대며 잔뜩 들뜬 리키의 뒤통수를 보니 괜히 장난을 치고 싶어졌다.

"리키. 권지ㅇ형님이 좋아, 형이 좋아?"

"umm... 지금은 권지ㅇ형이요."

뜬금없는 질문에 리키는 한 10초 정도 고민하더니 대답을 내놓았다. 멋쩍은 듯이 머리를 매만지면서. 지웅은 이때까진 리키가 농담을 하는 줄 알았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 진심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시점은, 집 가는 내내 콘서트가 어땠는지 재잘대고 집에 도착해서는 앵콜 무대를 찍어온 영상을 보여주는 걸 피하려다가 결국 붙들려서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듣고 있을 때였다. 이쯤 되니 지웅은 진지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인생의 반 이상을 좋아한 연예인의 콘서트를 막 보고 나서 그 열기와 흥분이 식지 않은 여섯살 연하남에게 서운하다는 티를 내도 되는 걸까? 아니면 여섯살 연상으로서 관대한 아량으로 이해하고 넘어가 주는 게 맞는 걸까...?

한번 고민이 생기니까 점점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지웅은 리키가 떠미는 대로 엉겁결에 침대에 누웠을 때도 온통 그 걱정뿐이었다. 옷이 슬금슬금 벗겨지는 동안에도 내내 딴 생각에 빠져 있었다.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지웅은 리키의 손을 턱 잡고 막아 세웠다.

"Why? 하기 싫어요? 그만해요?"

"리키."

"녜?"

"...지금은 형이 더 좋은 거 맞지?"

계속 신경 쓰이던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나니까 뒤늦게 쪽팔림이 몰려왔다. 지웅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볼 리키를 마주할 자신이 없어 팔로 얼굴을 가렸다. 한참이 지나도 리키에게선 별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 나이가 한참이나 많은 사람이 연예인한테 질투하니까 많이 추했나. 뒤늦게 걱정이 들자 지웅은 잠깐 숨을 고른 후에 슬며시 손을 치웠다. 그랬더니 눈앞에 보이는 건 안절부절못하는 리키.

"지, 지웅형. 리키 아까 mistake 했어요. 저 지웅형 제일 좋아요. You know? 미안해요..."

양손을 머리에 얹어놓고 쩔쩔매는 리키의 얼굴을 보니 지웅은 순간 기분이 확 풀렸지만, 더 놀려주고 싶어서 일부러 계속 서운한 척을 이어갔다. 리키야 지금이라도 안 늦었어... 그 형님 지금 솔로인 것 같더라... 형이랑 달리 돈도 많으시고... 형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서... 보내줄 때 가버려...

"지웅혀엉- I'm really sorry..."

"말로만?"

"뭐 원해요. 리키 뭐든 다 해줘요."

"음... 그럼 소원 하나 킵 해놔."

잠깐 고민했는데 당장 떠오르는 소원이 없으니까 나중에 써먹기로 했다. 지웅은 정말 뭐든 다 해주겠다며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리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중에 부모님이랑 화해하면 집이라도 하나 사달라고 해볼까. 속세에 찌든 생각을 하던 지웅은 뒤에서 낑낑대며 몸을 붙여오는 리키에게 마저 집중했다.

다음날, 리키가 조별과제에 버스 타려는 놈을 조지러 간 사이 마트에서 혼자 장을 보고 나오던 지웅의 앞에 웬 검은색 외제차가 멈춰 섰다. 딱 봐도 몇 억은 할 것처럼 보이는 차를 주춤거리며 피했더니 창문이 스르륵 내려갔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에 지웅의 고개가 자동으로 내려갔다.

"Get in."

"넵."

주변에 보는 눈이 없는지 확인하고 잽싸게 올라탔다. 기사가 백미러로 힐끔 보더니 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지웅은 무릎을 딱 붙이고 어색하게 앉아서 차마 옆으로 곁눈질도 못하며 앞 시트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무 말씀이 없으시길래 슬쩍 시선을 돌렸다가 여전히 싸늘한 얼굴과 마주치자 깨갱하고는 머릿속으로 바쁘게 이것저것 떠올렸다.

우리 아들과 헤어지라면서 돈 봉투를 내미신다면 어쩌지. 근데 천만원이 넘어가면 리키도 헤어지는 걸 응원해주지 않을까. 아니지, 정신 차려 김지웅. 돈이야 어떻게든 벌 수 있지만 리키 같은 영앤리치 톨앤핸섬 남자친구는 한번 놓치면 두 번 다시 그런 기회 없다. 만약 돈 봉투가 아니면 어디 으슥한 산에 가서 머리만 빼놓고 묻은 다음에 안 헤어지면 흙을 마저 뿌리겠다고-

"김지웅씨."

"넵."

"...How is he doing?"

"어... 굳."

"Dose he eat well?"

"예스. 베리 머치."

지웅의 작고 소중한 월급은 그 대부분이 식비로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둘 다 평균보다 잘 먹는 터라 한번 장을 볼 때마다 20만원은 우습게 깨졌다. 어릴 때 가난해서 잘 못 먹고 자랐던 지웅에겐 딱 하나의 좌우명이 있다. 먹는 걸로 서럽게 하지 말자. 가뜩이나 집에서 쫓겨난 스무살짜리 비행청(소)년인데 밥이라도 잘 먹여야지 싶어서 절대 꼽 안 주고 착실히 돼지로 만드는 중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볼살이 올라와서 얼마나 귀여운지 모른다. 흐뭇한 모습을 떠올리다가 자연스럽게 미소를 짓던 지웅은 리키의 어머니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정신을 차리며 표정을 굳혔다. 여전히 차분한 표정인 어머니가 갑작스레 손을 얼굴 쪽으로 뻗자 지웅은 뺨이라도 때리는 줄 알고 어깨를 움찔 떨었다. 하지만 굉장히 조심스러운 손길이 흉터 주위를 배회하다가 이내 사라졌다.

"Sorry for the scar on your face."

"어... 잇츠 오케이."

상처가 아물면서 흉터가 작게 생기긴 했지만 리키가 맨날 뽀뽀해주니까 정말 괜찮았다. 게다가 사연도 있어 보이게 돼서 일석이조. 하지만 이런 말까지 할 수는 없으니까 지웅은 그냥 어색하게 웃었다. 잠시 적막이 흐르자 어색한 분위기에 숨이 막혀서 괜히 바지를 문지르자 정말로 눈앞에 흰 봉투가 건네졌다. 올 것이 왔구나, 지웅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제발 리키의 어머니가 천만원 미만으로 넣었기를 빌었다. 천만원 넘어가면 한 1초 정도는 정말 고민 될 것 같단 말야. 실눈을 뜨고 내부를 확인한 지웅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건...?"

"It's a ticket to Ricky's favorite singer."

지웅도 눈이 달려 있어서 그 정도는 알았다. 본인은 센스 있게 두 장을 넣으셨다고 생각하겠지만 권지ㅇ형님에게 라이벌 의식이 있고, 심지어 바로 어제 리키한테 쪽팔리게 질투를 보였던 일이 생각나서... 지웅에겐 썩 달가운 선물은 아니었다. 그래도 대놓고 티 낼 수는 없어 감사하지웅, 고개를 숙였다.

얌전히 집 앞에 내려주시길래 조심히 들어가십쇼, 하고 내리려던 지웅에게 리키의 어머니가 카드를 내밀었다. 예의상 두 번 정도 거절하다가 한도가 100만원밖에 안 된다길래 얼른 공손하게 받았다. 마침 이번 달 식비가 아슬아슬했는데. 차가 사라질 때까지 허리를 숙이고 있던 지웅은 룰루랄라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뒤를 돌았다가 베란다에서 몸을 빼고 쳐다보고 있는 리키 때문에 기절할 뻔했다.

"방금 네 어머니 왔다 가셨는데. 너는 보고 있으면 나와서 좀 인사라도 드리지."

"어머니 헤어지래요?"

"아니. 카드 주셨어. 권지ㅇ형님 내일 콘서트 티켓이랑."

1초만에 뛰어온 리키가 신나서 티켓을 받아들었다. 카드는 안중에도 없구나. 지웅은 슬그머니 카드를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횡령하려는 건 아니고 어차피 다 리키 뱃속으로 들어갈 거다. 그렇고 말고.

리키가 콘서트에 함께 가자고 열심히 졸라댔지만 지웅은 절대로 같이 가기 싫어서 극구 거부했다. 결국 리키는 지웅을 설득하기를 포기하고 동기와 함께 콘서트장에 갔다. 오늘은 둘이 술도 먹고 들어갈 거니까 마중 안 나와도 된다는 말에 지웅은 혼자 집에서 편하게 뒹굴었다. 그것도 잠깐이지 슬슬 지루해져서 계속 핸드폰을 확인했지만 콘서트를 얼마나 열심히 즐기고 계신지 연락조차 없었다. TV에서 틀어주는 지루한 영화를 동태눈으로 보다가 콘서트가 끝날 때가 되어서 리키에게 카톡이나 했다.

재밌었어?

IT'S SO CRAZY

지웅형 가치 안 와서

아시워요

ㅎㅎ

다음에는 꼭 갈게~

You're lying

들켰네

형 자요

저 늑게 들어가요

사랑해요

나도

알라뷰 뿅뿅뿅

리키에게선 더 답장이 없었다. 이제 술 마시느라 연락을 못 하는가보다 싶어서 이불을 덮고 자려던 지웅은 얼마 지나지 않아 현관문이 부서질 듯 열리는 소리에 놀라서 일어났다. 체감상 2초 만에 안방 문도 벌컥 열렸다.

"리키? 친구는 어쩌고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왜 cute 말 써요."

"뭐라- 으븝-"

그대로 달려든 리키 때문에 지웅의 말은 입 안에서 삼켜졌다. 아니 이게 친구를 버리고 달려올 올 정도로 귀여웠나...?

지웅은 어쩌면 자신이 권지ㅇ형님의 거대한 세계관에 갇혀버린 것은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월요일에 욱신거리는 허리를 부여잡고 출근했더니 직원들 몇 명이 모여 주말에 권지ㅇ형님의 콘서트를 보러 간 얘기를 떠들고 있었다. 그 형님이 얼마나 멋있고 섹시한지는 이미 누군가에 의해 귀에서 피가 날 정도로 들었으니까 슬그머니 한쪽 귀에 에어팟을 꽂으려던 순간,

"맞다! 끝나고 지웅씨 사촌동생 봤어."

그대로 에어팟을 떨어뜨린 지웅이 윤과장을 쳐다보았다. 머리 색깔도 특이하고 밤에 선글라스를 쓰고 있길래 딱 알겠더라, 호호 웃는 윤과장 때문에 지웅은 올리브영에서 염색약을 하나 사갈까 고민했다. 초등학교 이후로 black hair는 해본 적 없다던 리키의 목소리가 떠올랐지만 안 그래도 피어싱이랑 옷도 튀는 녀석이랑 길에서 스킨십하는 걸 회사 사람들 중 누가 봐서 들키기라도 한다면...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말 좀 걸어보려니까 갑자기 핸드폰 보다 말고 퍼킹 쏘 큐트 쏼라쏼라 하고는 주차장으로 뛰어가더라고. 사촌동생이 해외파야?"

"아... 네... 뭐."

지웅은 그날 같이 안 가길 천만다행이라고 다시 한번 생각했다. 하마터면 들어온 지 1년도 안 된 회사에 바로 퇴사 갈길 뻔했다. 사실상 리키는 해외파도 아니고 그냥 외국인이지만 설명하기 귀찮아서 겉으로만 사람 좋게 웃고는 얼른 업무하는 척을 했다. 이래야 말을 안 거니까. 하지만 어림도 없었다.

"근데 지웅씨는 연예인 할 생각 없었어?"

"그르게. 어릴 때 명함 엄청 받았죠?"

못 들은 척하려 했지만,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자 지웅은 애써 어색하게나마 웃었다. 당연히 명함은 정말 많이 받았다. 아마 다 모아 놨으면 전화번호부 두께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강원도에서 살던 시절에도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신기했을 정도로 책상 서랍 안에 명함이 가득했었다. 지웅은 실제로 연습생 생활도 했었다.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라 그냥 우물쭈물 넘겼더니 다들 흥미가 떨어져 각자 업무로 돌아갔다. 안도의 숨을 내쉬고 눈치를 보던 지웅이 조용히 엑셀을 열었다. 물론 pc카톡.

리키 💗

머리 염색할래?

ok

무슨 color 원해요

말만 해😎

검은색

oh

한동안 답이 없었다. 답장이 올 때까지 월루를 하던 지웅은 밑에 알림창이 뜨자 다시 카톡을 열었다.

다른 color 말해요

너 identity 맨날 black이라 하더니

정작 hair는 왜 black이 아니야

Jiwoong은 Ricky's black hair 궁금하다

ㅋㅋㅋ

또 별말 없길래 지웅은 리키를 놀리는 것을 그만뒀다. 삐졌는지 퇴근할 때까지 답장이 돌아오지 않아서 딸기우유를 사 들고 집으로 갔더니 리키가 염색약을 앞에 두고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염색약 정말 사 왔네?"

"지웅형."

"엉?"

"리키 형 이만큼 사랑하는 거예요."

"...오버한다."

고작 머리 염색 하나로 비장하게 사랑을 논하는 리키 때문에 지웅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염색약을 빼앗으려 하니까 마지못한 척 리키도 은근히 손에 힘을 풀었다. 염색약과 리키의 샛노란 머리를 번갈아보니 살짝 아쉬워졌다. 흑발 하면 좀 멋있을 것 같은데. 리키의 새까만 머리를 상상하던 지웅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검은색으로 염색하면 큰일날 것처럼 구니까 나중에나 한번 시켜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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