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커플 다이어리는 써봤자 종이낭비입니다
맄즁
평연소일 가이드
사무실 의자에 1초라도 덜 앉기 위해 탕비실에서 아주 느릿하게 커피를 타던 지웅은 옆에서 직원들이 떠드는 말에 슬쩍 귀를 기울였다. 일부러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니고, 저렇게 크게 떠드시는데 어쩔 수 있나.
"커플 다이어리? 그게 뭐야- 유치하게."
"쓰다 보면 정말 돈독해진다니까요.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 수 있구."
듣고 보니 꽤나 그럴싸한 말이었다. 지웅은 리키에 대해 아는 게 생각보다 많이 없었다. 과외하다가 얼떨결에 사귀게 됐고, 사귄 지 얼마 안 돼서 강제로 동거까지 하게 되느라 진도가 아주 빨랐지만 그래서인지 서로에 대해 알아갈 만한 기회가 없었다. 물론 아침에 일어나면 얼굴부터 꾸미러 가는 건 알고 있고. 파자마조차 바지에 넣어 입을 만큼 패션에 진심인 것도 알고. 딸기맛 나는 간식을 좋아하는 반면 매운 음식은 못 먹는 것도.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막상 떠올리려고 하니까 생각이 잘 안 났다. 커피를 홀짝이며 탕비실에서 나간 지웅은 자리에 앉아 엑셀인 척 카톡을 켰다. 옆에서 최대리가 아침부터 아재개그를 쳐서 애써 미소를 지어줬다가 모니터로 고개를 돌리자마자 바로 정색했다. 이쯤 되면 추가 수당이라도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툴툴거리던 지웅은 리키에게서 웬일로 먼저 카톡이 와있자 바로 기분이 째졌다.
지웅형
저 오늘 학교 가요
학교?
방학 중이자나
동오회 해요
동호회?
무슨 동호회???
car poor 동호회
?
신나게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이 멈췄다. 지웅은 모니터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혹시 리키한테 카푸어 같은 소리를 한 적이 있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적은 없었다.
리키
너 카푸어 아니야ㅜ
오늘 가서 동아리 탈퇴한다고 해
지웅은 부들부들 떨며 타자를 쳤다. 좋은 것만 보고 들어도 모자랄 판에 누가 우리 애기 앞에서 카푸어 소리를 내었어. 잡히면 조져버리겠다는 생각에 마저 분노의 타이핑을 하려다가 리키의 이어지는 카톡에 말을 잃었다.
car poor 맞아요
둥처먹고 둥골 뻬먹고
빌부터 살고
car만 가지고 잇으먼
car poor & 둥골 breaker
글자를 하나하나 읽어내리던 지웅은 순간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가 정신을 차리고 얼른 모기를 잡은 척했다. 아니 사무실에 웬 모기가- 사람들의 시선이 흩어지자 급하게 키보드를 두드려댔다.
리키야
어떤 새끼가 그래
형 앞으로 데려와봐
우리 애기가 무사히 대학 졸업해서
부모님이랑 사이 다시 회복하고
형 버리지 않고 꼭 호강시켜주기만 하면 되는데
그게 어떻게 등골 브레이커야
카푸어도 아니야
그것만 믿으면서 이렇게 열심히 돈 벌면서 살고 있는 건데...! 지웅의 본심이 살짝 드러난 것 같지만 아니다. 당연히 리키에 대한 사랑이 근본적으로 뒷받침 되는 거다. 누가 사랑 없이 이런 고생을 하겠냐고. 지웅은 가오와 자존감 빼면 영앤리... 톨앤핸섬만 남는 리키가 저런 말을 하니까 속이 답답해졌다. 대체 왜 저런 생각을 가지게 됐는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벌써 6개월 넘게 동거 중인데도 여전히 리키를 잘 모르겠다.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고민하던 지웅의 머릿속에 아까 동료들이 말한 방법이 번득 떠올랐다.
커플 다이어리.
리키가 원래 다이어리를 열심히 쓴다는 건 지웅도 이미 알고 있었다. 한 번만 보자고 장난 반 진심 반으로 꼬셔봐도 리키는 다이어리를 품에 꼬옥 끌어안고 사수했다. 잘 때도 의심스러웠는지 베개 밑에 깔아놔서 몰래 손을 넣어봤다가 자다 깬 리키에게 한심한 눈빛을 3초 정도 받았다. 아무리 연인이라도 지켜야 할 선이 있으니 지웅도 그 이후로는 다이어리를 건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리키가 어떤 식으로 쓰는지 궁금은 했다.
퇴근하고 바로 집으로 날라간 지웅은 예쁘게 저녁상을 차려놓은 리키를 열심히 칭찬해주었다. 물론 식탁 위에 올라온 반찬들은 지웅이 주말에 열심히 만들어 놓은 것이고, 가운데에 놓인 고기는 마트에서 산 걸 그대로 볶기만 했다지만... 그래도 리키의 떨어진 자존감을 얼른 회복시켜줘야 했다.
"리키, 누가 너한테 등골 브레이커라고 했어?"
"...동기요."
시무룩한 얼굴을 본 지웅의 속이 부글 끓었다. 아무리 리치가 사라졌다고 해도 리키는 여전히 영앤톨앤핸섬 남자친구였다. 그런 리키를 데리고 살며 연애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데 어떤 새끼가 감히...
"지웅형, 좌와성찰 뭐예요?"
"자아성찰? 그게 왜 궁금해?"
"동호회 leave... 말했어요. 회장이 저런 말-"
"몰라도 돼."
이번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카푸어 동호회 회장을 향해 부들대던 지웅은 고기를 뇸뇸 먹는 리키에게 진지하게 제안했다.
"우리 커플 다이어리 써볼까?"
"couple diary? um... 좋아요."
지웅은 쉽게 승낙한 리키에게 이미 쿠팡으로 로켓배송을 시켜뒀던 다이어리들을 꺼내 보였다. 보라색의 부드러운 털이 강렬하고, 그보다 더 눈에 띄는 유니콘이 새겨진 다이어리를 받아든 리키의 눈동자가 쉼 없이 흔들렸다. 하지만 눈을 한 번 느릿하게 감았다 뜨더니 기대 어린 표정으로 지켜보는 지웅에게 박수를 쳤다. 형 top sense예요.
의도야 불순하건 아니건 어쨌든 커플 다이어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한가로운 주말 오후, 바닥에 엎드려 누워 다이어리를 쓰던 지웅은 옆에 리키가 앉자 손을 세워서 일기를 가려버렸다. 부끄러우니까 나중에 봐. 투덜거렸더니 리키가 허리를 끌어안으며 어깨에 머리를 부볐다.
자연스럽게 한판 뜨고 나름 대망의 첫 교환이 이루어졌는데... 지웅은 리키가 쓴 다이어리를 받고 나서 이게 뭔가 싶었다.
지웅형 너무 늦게 먹어서 바로 자도 절대 안 부워요
생각보다 더 재미있어요 얼굴 너무 멌있는데 지웅형도 gag man 가능성 있어요
...? 지웅은 눈을 비볐다. 아 gay가 아니라 gag구나. 이미 사귀고 있는데 왜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나 했네. 성정체성이 그새 또 바뀐 줄. 어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이것이 과연 커플끼리 쓰며 애정을 알콩달콩 키워가는 그 다이어리가 맞는 것인가. 그냥 대충 느낀 점을 메모처럼 휘갈겨 쓴 게 아닐까. 오랫동안 고민해봤지만 답이 나오질 않자 지웅은 일단 납득을 해보기로 했다. 이번이 처음이니까 그럴 수 있지... 그래...
짧은 여행 후, 지웅은 리키에 대한 감상과 애정을 다이어리에 듬뿍 담아 적어서 건네주었다. 하지만 돌아온 건,
지웅형 생각보다 요리 너무 잘해요.
고기 찐자 잘만들어요, 오리탕 더 맛있게 하고, 저 잘먹었어요.
든든해요.
일단 찐자를 진짜로 바꿔주고 싶다는 충동부터 들었지만 애써 참았다. 그리고 오리탕이 아니라 삼계탕 아니었나. 기억을 되짚어보다가 역시나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한숨을 내쉬며 다이어리를 내려놓았다.
"리키."
"녜."
"...이건 커플 다이어리가 아닌 것 같은데?"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멀뚱멀뚱 보는 리키 때문에 지웅은 할 말을 잃었다. 포켓몬스터에서 웅이는 늘 밥을 해줬어, 라던 아련한 짤이 눈앞에 그려졌다. 나는 너에게 밥 해주는 사람이 아니라고! 어쩐지 이 말을 돌아가신 엄마한테서 들어본 적 있는 것 같아 살짝 눈시울을 붉혔다가 다시 정신을 차렸다. 침착하자. 여섯살이나 어린 애기 남자친구를 사귀려면 인내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지웅은 숨을 가다듬고 애써 미소를 지었다.
"리키, 이건 네 개인 다이어리에 쓰는 게 낫지 않을까? 여기에다가는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적자."
그 말에 리키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지웅이 쓴 다이어리를 펼쳤다.
나를 만나줘서 고맙고 그만큼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여기에서의 모든 것들이 너에겐 조금 힘들어도,
이젠 내가 네 편이니까 걱정말고, 정신만 차리고 전진하자. ㅇㅋ?
아직 모르고, 미숙한 면이 많다.
하지만 이것을 보완하려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생각보다 귀엽다.
아직 애기구나.
상대방이 아직은 이해를 더 해야하는 사람이다.
귀여워 리키야~ 잘하자
사랑한다.
지웅은 아무리 제가 썼다지만 역시나 감동적인 글에 감탄하며 다이어리를 툭툭 쳤다.
"이거 봐. 너랑 나랑 차이가 너무 심하잖아."
"지웅형."
"엉."
"diary 보면 그날 무슨 일 있었는지 알아야 해요. 리키 diary 보면 무슨 일 있었는지 기억나죠. right?"
맞는 말 같으면서도 뭔가 이상한 것 같지만, 일단 지웅은 리키가 써준 다이어리의 첫 번째 페이지로 돌아갔다.
지웅형 너무 늦게 먹어서 바로 자도 절대 안 부워요
생각보다 더 재미있어요 얼굴 너무 멌있는데 지웅형도 gag man 가능성 있어요
자신있게 말한 대로 리키와 있었던 일이 금방 떠올랐다. 야식으로 컵라면을 평소에도 즐겨 먹던 지웅은 잘 준비를 하며 이불 안으로 들어가려는 리키를 불러세웠었다. 출출하니까 컵라면 끓여 먹자는 말에 리키는 다음날 얼굴이 부을 거라며 만류했지만, 냄새로 꼬셔서 젓가락 한 개로 나 한입 너 한입 사이 좋게 나눠 먹고 쿨쿨 잤다. 다음날 먼저 일어난 지웅은 옆에서 얼굴이 땡글땡글 부은 채 입을 벌리며 자는 리키를 보고 그만 웃음이 터져버렸고... 그런 모습을 남자친구의 앞에서 보였다는 충격에 빠진 연하남을 달래느라 쩔쩔매야 했다.
"리키야, 부은 얼굴도 귀엽다니까?"
"No. 그거 리키 아니에요. 그거 다른 사람이야."
"그래? 그럼 난 다른 사람이나 귀여워해 줘야겠다."
"...사실 그거 리키 맞아요."
바로 꼬리를 내리는 리키를 잔뜩 귀여워했던 기억을 떠올리자 수긍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지웅은 어쩔 수 없이 첫 일기는 납득을 했다. 하지만 두 번째 일기는 좀 너무하지 않냐고... 서운함이 가득 담긴 지웅의 눈에 리키는 이번에도 정말 억울해졌다.
지웅형 생각보다 요리 너무 잘해요.
고기 찐자 잘만들어요, 오리탕 더 맛있게 하고, 저 잘먹었어요.
든든해요.
다이어리에 적은 내용을 약간 엉성하지만 또박또박 읽어내더니 지웅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거 읽었어요. 그래서 형 기억나죠."
역시 리키의 말대로였다. 지웅은 저번 주말의 제주도 데이트를 떠올렸다. 만근해서 겨우 얻어낸 월차를 월요일에 쓰기 위해 상사들의 눈치를 보다가 마침내 성공해서 리키와 2박 3일 동안 제주도로 떠나는 비행기에 올라탈 수 있었다. 원래 같으면 비행기표를 끊는 것조차 꿈도 못 꿨겠지만, 감사하게도 리키의 어머니가 주고 가신 100만원 한도의 카드 덕분에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겨 부릴 수 있던 사치였다.
그동안 돼지나 소만 많이 먹었으니 오늘은 마트에서 생닭을 사다가 직접 요리해 먹자는 말에 리키의 눈이 살짝 흔들렸지만, 그걸 알아차리지 못한 지웅은 바구니에 닭을 척척 담았다. 은근슬쩍 딸기맛 포키를 바구니 안에 숨겨두는 귀여운 모습은 애써 웃음을 참으며 못 본 척해줬다.
"리키, 요리 해봤어?"
"oh. 당연하죠.
"잘해?"
"저 잘해요."
분명 자신 있게 말했는데 어쩐지 신뢰가 안 갔다. 집에서 보았던 모습이라곤 공장에서 만들어준 고기를 볶는 모습 뿐이었으니까. 결국 지웅은 메인 셰프를 자처하고 리키에게는 디자이너를 맡겼다. 요리란 자고로 맛도 중요하지만 미적 감각도 중요한 법이다. 그렇고 말고. 문제는 별 생각 없이 사버린 생닭을 어떻게 요리하는가였다. 지웅은 차라리 고기를 살걸 그랬나 뒤늦게 살짝 후회했다. 하지만 그건 내일 먹기로 했으니까...
"일단은 이거를 잘라야 돼."
"네."
"닭 분해 잘해, 리키?"
"메뉴 있으면 잘해요."
닭 분해를 하는 데에 메뉴가 필요하던가... 이번에도 영 믿음이 생기지 않아 지웅은 다시 닭 분해를 떠맡았다. 어디선가 칼을 찾아와 양손에 쥐고 호다닥 달려온 리키에게서 칼을 받아든 지웅은 힘껏 도마를 내리쳤다. 퍽- 퍽- 탕, 탕! 둔탁한 소리에 움찔한 리키는 알아서 파를 챙겨 들었다.
"형 저 이거 먼저 넣어요?"
"어, 넣어 넣어. 그거 넣어도 돼."
팔팔 끓는 국을 떠서 먼저 맛본 지웅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또 국을 퍼서 후후 불어준 다음에 리키에게 먹여주었다.
"oh."
"너무 맛있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감탄하는 리키와 마주보며 웃었다.
알파카 농장 아르바이트 체험이라는 게 있길래 신청했던 둘은 제주도에서조차 가오를 잃지 않아 멋지게 선글라스를 꼈다. 차마 엉덩이나 허리를 잡을 수는 없으니 아쉬운 대로 어깨동무를 하며 농장으로 향했다.
"리키, 봐봐. 여기 너무 멋있다."
"나중에 together 살아요."
"리키가 여기 사줄 거야?"
"내가 사줄게. 따라와."
카드 대신 안내 책자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리키가 멋있는 척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둘이 몇 평을 사고 알파카를 몇 마리 키울지 먼 미래를 상상하며 떠들다가 금방 작업복으로 갈아입혀졌다. 두툼한 멜빵 작업복과 장화를 매만지던 리키가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이거 제 style 아니에요."
"그래? 이런 리키도 내 스타일인데. 아쉽다."
"저 이거 평생 입을 수 있어요."
이번에도 얼른 말을 바꾸는 리키 때문에 지웅은 픽 웃고 말았다.
밥 먹으라고 아무리 알파카에게 손짓을 하고 박수를 쳐도 소용이 없었다. 제멋대로 구는 알파카가 어쩐지 누구를 닮은 것 같아 지웅은 리키를 슬쩍 곁눈질했다. 리키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오진 흉통에 지웅은 새삼 설렜다, 크게 외쳤다.
"밥 여기 먹겠습니다아앜-!"
큰 소리에 알파카들이 드디어 다가와 주기 시작했다. 막상 오긴 왔지만 먹이를 주려고 해도 리키만 보면 휙 가버렸다.
"oops... nooo...."
떠나는 알파카를 아련하게 바라보던 리키는 알파카와 교감하는 중인 지웅에게 가서 시무룩한 목소리를 냈다.
"친구 만드는 거 너무 어려워요..."
"형 같은 남자친구만 있으면 됐지. 친구도 필요해?"
애교 섞인 말에 리키가 폴짝 뛰었다. 친구 필요 없어요. 지웅형만 있으면 돼요. 돈도 필요 없어요. (아니 그건 좀)
결국 알파카 친구 만들기는 실패하고 숙소로 돌아온 둘은 미리 장을 봐뒀던 고기들을 전부 꺼내왔다. 10인분은 되겠지만 당연히 남길 생각 같은 건 전혀 없었다. 자칭타칭 고굽남인 지웅은 리키를 위해 고기도 열심히 굽고 직접 입에도 넣어 먹여줬다. 뜨거울까 봐 후후 불어서.
"맛있어?"
"옹."
리키가 손가락을 쪽, 하고 빨아댄 탓에 고기 먹다 말고 텐션이 오를 뻔했지만 요즘 살이 다시 빠지려 하는 리키를 위해 마저 열심히 구웠다. 먹고 나서 당연히 할 생각이었는데 알파카 농장 알바가 생각보다 고됐던 탓인지 둘 다 그릴을 치우자마자 잠이 들어버렸다. 물론 아침에 일어나서 제주도에서의 마지막 날 모닝기념으로 하기는 했지만...
"생각나죠."
"...그렇긴 하네."
뭔가 리키한테 말려든 것 같았지만 어쨌든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웅은 못마땅하게 팔짱을 끼며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커플 다이어리는 한두 번 정도 더 교환되다가 슬그머니 끝나고 말았다.
지웅은 리키에게 등골 브레이커니 어쩌니 엿을 먹인 동기를 가만히 놔두고 싶진 않았다. 집에서 쫓겨났을 때도 기가 안 죽었던 우리 애기를 감히 주눅들게 만들다니. 한창 간죽간살로 살던 이후로는 어디 결혼식 갈 때나 한 번씩 하던 완깐,더듬이 몇가닥은 내려줬다,까지 한 채 구찌 수트로 중무장을 하고 나섰다. 이러고 버스를 타기엔 당연히 쪽팔리니까 눈물을 머금고 택시를 잡았다.
리키한테 미리 물어본 건물 앞으로 가자 타이밍 좋게 수업이 끝났는지 곧 학생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1km 떨어진 곳에서도 보일 것 같은 가파른 콧대와 짙은 아이홀을 가진 미남의 등장에 이목이 쏠렸지만 이미 영앤리키 톨앤핸섬한 임자가 생긴 지웅에게 그딴 관심은 필요 없었다. 곧이어 알파카 같은 머리털이 보이자 지웅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애기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리키보다 지웅을 먼저 발견한 동기들이 놀라서 입을 벌렸다. 그 모습에 어리둥절하던 리키가 뒤늦게 지웅을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지웅형?"
"가자, 리키. 오늘은 루브르 가서 모나리자 보기로 했잖아."
"예에?"
루브르에서 뛰쳐나온 것 같은 얼굴로 헛소리를 늘어놓은 지웅이 리키의 어깨에 팔을 두른 채 질질 끌었다. 그러면서도 콧대가 가장 자신 있는 각도로 고개를 꺾어 동기들을 한번 쳐다봐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리키는 벙찐 오징어들을 뒤로 한 채 곧장 지웅의 허리를 감쌌다. 꽈악 붙드는 손가락이 느껴져서 이건 좀 스킨십이 진하지 않나, 지웅이 서둘러 말리려 했지만 리키는 지웅을 차에 태우더니 곧바로 시동을 걸었다.
"지웅형, 저 기운 올려주는 거 알아요. but 다른 사람 보는 거 싫어요."
"너네 동기들이 하도 헛소리를 하니까 그렇지."
솔직히 부모가 용서해주기 전까지 카푸어는 맞긴 하지만 그래도 리키가 기죽는 꼴을 지켜볼 수는 없었다. 멘트를 50가지나 준비했던 지웅은 하나하나 다 써먹지 못해 아쉬워졌다. 일본 가서 초밥 먹기, 태국 가서 마사지 받기, 독일 가서 소시지랑 맥주 먹기, 모히또 가서 몰디브 한잔 하기... 생각해보니 1절에서 잘 멈춘 것 같다.
그런 지웅의 나름 따뜻한 의도와 열정을 몰라준 채 리키는 신호와 속도를 아슬아슬하게 지키며 달렸다. 생긴 건 야밤에 고속도로를 시속 200km로 달릴 것 같지만 사실 굉장히 안전 운전을 하던 리키에게 익숙했던 지웅은 호달달 떨며 안전벨트를 꼭 움켜쥐었다.
"리키, 우리 너무 빨리 가는 거 아니야?"
"저 곧 터져요."
대체 뭐가 터지나 궁금했던 지웅은 리키를 따라 슬쩍 시선을 내렸다. 아, 거기... 여기서 해결해줄 수는 없는 일이라 애써 시선을 돌렸다. 창문으로 비치는 제 얼굴을 보니 리키가 저럴 만도 했다. 맨날 일에 지쳐 머리 손질도 못 하고, 퇴근하자마자 옷 벗어 던지고, 속옷에 반팔티만 입고 돌아다니던 모습만 보다가 새삼 새로웠겠지. 이따 이 상태 고스란히 침대로 던져질 미래를 생각하니 지웅도 살짝 설레기 시작했다.
"근데 gucci 어디 있었어요?"
"이거 짝퉁이야. 형이 동대문까지 가서 장만해왔다."
"oh."
짝퉁을 입어도 모델보다 빛나는 지웅에게 당연히 굴욕이란 없었다. 잘생긴 이마를 드러내며 입꼬리를 당겨 웃는 지웅 때문에 리키는 심장 대신 핸들을 세게 움켜쥐었다. 다시는 이런 깜찍한 짓을 못 하게 침대 위에서 혼을 내주겠다고 다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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