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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애기는 혼자 두지 맙시다

맄즁


평연소일 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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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이 되었으니 여행을 가자며 리키가 노래를 불러댔다. 하지만 지웅은 월요일이나 금요일에 연차를 쓰기엔 눈치가 상당히 보이는 조...중소기업을 다니고 있어서 그런 사치를 부리기 어려웠다. 게다가 자타공인 집순이인 지웅에게 소중한 주말을 이틀 동안 써가며 멀리 여행을 가자고 하는 건, 다음 5일의 평일 동안 회사에서 죽어나가라는 소리와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아직 세상을 잘 모르고 마냥 에너지가 넘치는 연하 남자친구를 집에 묶어둘 수는 없기에 지웅은 어쩔 수 없이 토요일에 당일치기 여행을 다녀오기로 약속했다.

"메아리 소리가 들려오는- 계곡 속에 흐르는 물 찾아-"

마지못해 끌려가는 것 치고는 막상 누구보다 신난 지웅이 차에서 노래를 크게 불러대기 시작했다. 리키는 아직 한국 노래를 다 알지 못하기에 옆에서 오예- 추임새만 넣으며 같이 흥얼거렸다. 오랜만에 멀리까지 데이트를 가서 그런지 차 안의 분위기는 굉장히 들뜬 상태였다. 미리 짜놓은 플리를 빵빵하게 틀어놓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지웅은 독박으로 운전하는 리키에게 미안해져서 눈치를 살폈다. 도와줄 게 없나 두리번대다가 글로브박스에 잔뜩 넣어둔 과자들을 하나씩 꺼내 입에 넣어주었다. 바스라진 과자 가루들이 우수수 떨어졌지만, 지웅은 아무것도 모른 채 잘 먹는다며 웃어대기만 했다. 차 주인인 리키의 입장에선 분명 화가 날 만도 한데, 사랑하는 지웅형이 손수 먹여주다가 떨어뜨린 과자 가루 정도는 팅커벨의 요정가루나 다름 없어 보여서 딱히 화가 나지도 않았다.

도착하자마자 모래사장을 뛰어가다 넘어져 한바퀴 구른 지웅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어서서 다시 바다를 향해 달려가더니 물장난을 쳤다. 리키에게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지만, 리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꾸만 도망다녔다. 결국 지웅은 물에 들어가기 싫다는 리키를 번쩍 들어올려 던지려다가 선글라스 위로 화난 눈썹을 보고는 얼른 내려주었다.

"맨날 모니터만 들여다 보다가 이렇게 바다 보러 오니까 좋긴 좋다."

"자주 와요."

그건 힘들어서 일부러 대답을 회피한 지웅은 미리 알아본 카페를 가리켰다. 어차피 물놀이를 하러 온 것도 아니고 당일치기 여행이니까 속전속결로 해치워야 했다. 바닷가가 한 눈에 보이고 사진 찍기에 예쁜 인테리어라 사람들이 정말 많다고는 들었는데... 문을 열고 들어서니 상상 그 이상으로 많았다. 몇 바퀴를 돌았지만 여전히 자리가 나지를 않을 정도로. 차라리 회를 먼저 먹고 다시 돌아오자며 이만 나가려고 했는데 때마침 앞에 있던 커플이 슬슬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지웅은 슬그머니 그 옆에 서서 일부러 딴청을 피웠다. 마침내 자리를 얻자 리키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형은 아이스-"

"americano."

이젠 척하면 척이라 리키는 씩 웃으며 카운터로 향했다. 리키가 오면 찍어달라고 하고 리키도 멋지게 찍어주기 위해 미리 사진을 찍으며 예행연습을 해보던 지웅의 귓가로 어떤 목소리가 꽂혔다. 입구 근처에서 들려오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불안감이 엄습했다.   

"어어, 지웅씨?"

아닌데요. 저 김지웅 아닌데요. 차마 그럴 수는 없으니 옆에서 들려온 엿같고도 낯익은 목소리를 향해 목이 꺾일 정도로 고개를 돌렸다. 웃으며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윤과장. 오지랖 넓고 남의 일에 관심이 굉장히 많은 사람이었다. 옆에 남편까지 끼고 있어서 지웅은 하는 수 없이 미소를 애써 지으며 일어나서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과장님. 이런 곳에서 다 뵙네요."

"멀리서 봐도 잘생긴 얼굴에 설마설마 했지. 여보, 이쪽이 내가 그렇게 말했던 김지웅씨야."

"이야- 진짜 잘생겼네."

네감사합니다하지만이만가주시면안될까요... 속으로 발을 동동 구르던 지웅은 순간 리키가 생각나서 시선을 슬그머니 돌렸다. 어떻게든 여기로 못 오게 하려고 했는데 이미 리키는 트레이를 들고 오는 중이었다. 지웅은 리키를 향해 무언의 눈빛을 간절하게 보냈지만 텔레파시는 통하지 않았는지 결국은 일이 닥치고 말았다.

"지웅형. 여기 strawberry 넣어줘요."

"......."

"형?"

"...저번에 얼굴 보셨다 하셨죠? 여긴 제 사촌동생인 리키구요. 리키야, 이 분은 우리 회사 과장님이셔. 옆에 계신 분은 남편분이시고."

"아, 안녕하세요."

어리둥절하게 번갈아보던 리키가 급하게 허리를 숙인 탓에 음료가 쏟아질 뻔한 것을 지웅이 간신히 붙들었다. nice catch, 리키의 감탄을 한 귀로 흘리며 지웅은 차라리 떨어지는 컵에 머리를 맞고 기절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싶어졌다. 물론 저런 걸로 기절을 할 수는 없겠고 아마 머리랑 옷이나 좀 젖고 말았겠지. 아 그 핑계로 자리를 뜰걸 그랬나. 뒤늦게 후회해봤지만 이미 컵들은 안전하게 테이블 위로 놓여졌다. 그렇게 서로 어색하게 인사를 나눈 후에 이젠 제발 좀 가라고 속으로 그렇게 빌었는데도 윤과장은 억지로 동석을 해왔다. 그도 그럴것이 카페가 만석이라 빈 자리가 아예 없긴 했다. 근데 그러면 다른 카페를 가셔야죠. 왜 나이도 한참이나 어린 부하직원의 옆에 앉으시는 건가요. 지웅이 속으로 오열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윤과장은 여전히 어색하게 시선을 회피하는 리키에게 질문을 던졌다.

"리키는 뭐하는 사람이에요?"

“Um... 일단 저는 sexy하게 제일 귀여운 사람이에요."

"응?"

"Oh. 질문 잘못 이해했어요."

민망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이던 리키가 통역을 요구하듯 바라보았지만 이미 딴생각에 빠진 지웅은 그런 간절한 얼굴을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이마를 닦아내며 깊게 고민했다. 차라리 불이야- 외치고 도망나가는 건 어떨까. 하지만 누군가의 신고를 받고 소방차가 와서 소방대원들이 있지도 않은 불을 끄려고 하며 일이 커질 생각을 하니 눈앞이 벌써부터 아찔해졌다. 결국 여러 방안들을 고민해보다가 심호흡을 하고는 호들갑을 떨었다.

"...어어. 리키야 지금 전화 오는 거 아니야? 오늘 중요한 과제 있다고 하지 않았어? 아니다, 교수님 면담이었나? 얼른 가봐야 하지 않아? 전화 엄청 오는 것 같은데?"

놀랍도록 잠잠한 핸드폰을 눈앞에 들이밀던 지웅이 서둘러 몸을 일으키며 리키의 팔을 잡아 끌었다. sexy하게 빨대를 입에 물고 딸기라떼를 마시려던 리키는 어정쩡하게 일어나 그렇게 빨대만 문 채 질질 끌려갔다.

"과장님!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아닌 척 해도 은근히 꼰대 기질이 있는 윤과장이 월요일에 만나서 인사를 안 했다느니 어쩌니 할까봐 지웅은 그 와중에 착실히 허리를 숙여가며 카페를 나갔다. 물론 회사에서 사촌동생을 봤다는 얘기가 시끄럽게 나올 게 뻔히 예상은 갔지만 어떻게든 그 말 수를 조금이라도 줄여야만 했다. 그렇게 끌려가는 동안 불만스럽게 빨대를 쓰레기통에 뱉은 리키는 다른 카페라도 가자고 했지만 지웅이 여전히 막무가내로 주차장으로 향해서 어쩔 수 없이 차에 올랐다. 시동을 걸다말고 한숨을 내쉰 리키가 지웅을 빤히 쳐다보았다.

"지웅형. 저 족팔려요?"

"어엉? 그게 무슨 소리야? 쪽팔리다는 말은 또 언제 배웠-"

"저 친구들한테 형 boast해요. But 형 리키 conceal해요."

서운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를 가만히 들어주던 지웅은 답답해서 가슴을 쳤다. 아니 이 사람아. 학교 동기들이랑 회사 상사들이랑 같아? 리키 너는 아직 어려서 사회를 잘 모르는 거야. 너네는 그냥 나를 봐도 우와 멋있는 형이구나- 하고 말겠지만 회사는 다르다고. 조금이라도 켕기는 게 생기면 하이에나처럼 달려드는 정글이란 말야. 내가 너한테 애기라고 부른다고 정말 애기처럼 굴 거야? 말을 우다다 쏟아낸 지웅이 팔짱을 꼈다.

"빨리 출발 좀 하자. 윤과장이 나와서 우리 또 알아보면-"

"...아기는 운전 못 해요."

"뭐? 지금 장난하자는 거야?"

핸들에 손을 얹은 채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앞만 보는 리키때문에 지웅은 머리를 싸맸다가 서서히 진정했다. 생각해보니 리키는 충분히 서운할 만했다. 저 나이라면 보통은 CC를 하는 게 맞는데. 같이 PC방에 가서 머리 맞대고 수강신청해서 공강도 맞추고 손잡고 캠퍼스를 거닐며 데이트를 하고 점심시간마다 만나서 학식을 각자 시켜 나눠 먹는 모습이 자연스러운데. MT에 가서 화장실을 가는 척 나와 나무 뒤에서 쪽쪽거리고 술을 더 사온다는 핑계로 손을 잡고 느긋하게 시간 때우면서 다녀오는 게 더 어울리는데. 친구들이랑 더블데이트도 해보고 술자리에 앉혀놓고 서로 소개도 시켜주고... 그러나 리키는 자신과 나름 비밀 연애를 하느라 어디에도 티를 내지 못하는 중이었다. 게다가 남자친구의 직장상사를 이렇게 멀리까지 와서 갑작스레 만났으니 놀라고 당황스러울 만도 했다. 숨을 가다듬은 지웅은 리키의 손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리키야. 형이 진짜 서운하게했다. 그치."

"네."

1초의 망설임조차 없던 대답에 지웅이 잠시 리키를 의심스럽게 쳐다보았다. 이 새끼 지금 뭔가 밑밥 깔고 있는 것 같은데. 하지만 리키는 여전히 풀 죽은 얼굴을 하고 있고 지웅은 지은 죄가 있다. 결국 리키의 손등을 달래듯 살살 쓸어주었다.

"우리 애기. 형이 뭐하면 화 풀래?"

"...아기는 보통 뭐 먹어요?"

글쎄다. 지웅은 아기를 돌본 적이 당연히 없고, 아직 친구들이 아기가 있을 나이도 아니었다. 보통 이유식 먹지 않나? 아니면 분유... 근데 지금 이걸 왜 물어보는 거지. 순간 뭔가가 생각나서 지웅은 리키를 질린 얼굴로 쳐다보았다. 뻔뻔하게 구는 것치고는 피어싱이 주렁주렁 달린 귀가 터질듯이 붉어져 있어서 결국 져주기로 마음 먹었다.

"오키. 지금 옷 까면 돼?"

훌렁 옷을 들추는 지웅을 리키가 다급하게 말렸다. 집에서요! 집 가서요! 줘도 못 받아먹는 리키가 역시 애기는 맞다면서 지웅은 실실 웃었다.

주말 내내 위아래로 시달리느라 후들거리는 다리로 겨우 출근한 지웅을 윤과장이 반겼다. 올 것이 왔구나. 애써 자리를 피하려는데 눈을 빛내며 이것저것 물어온 탓에 입을 크게 벌릴 수밖에 없었다.

"리키요?"

"우리 딸이랑 너-무 잘 어울릴 것 같아서."

호호 웃는 윤과장을 보며 지웅은 입술을 씹었다. 우리 리키는 제 남자친구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했다간 1년도 못 다닌 회사를 그만둬야 될 테니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바들바들 떨리는 입가를 무시하며 이것저것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저희 리키는 아시다시피 스타일이 좀 특이해서-"

"우리 딸 외국에서 유학했잖아.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지."

"...저희 리키는 사실 여자친구가 있어요."

"그래? 주말에 사촌형이랑 부산까지 놀러왔길래 당연히 없는 줄 알았지."

"저희가 진짜 정말 돈독해서요."

아쉽다는 듯 자꾸 물고 늘어지려는 윤과장을 피해 자리로 피신왔더니 이번엔 옆에서 최대리가 말을 붙여왔다.

"지웅 씨. 내일 출장인 거 기억 하지?"

"...네. 그럼요. 알고 있죠."

그새 까먹고 있었다. 급하게 달력을 뒤적거린 지웅은 형관펜이 쳐진 날짜를 확인하고는 이마를 감쌌다. 이럴 때가 아니라 리키한테 얼른 알려줘야 했다. 서둘러 엑셀인 척하는 pc카톡을 열었다.

리키야

리키

형 내일 출장가~!

까먹고 있었어ㅠ

출장 뭐예요?

이틀 동안 집에 못 들어가

oops

리키 혼자 무서어요 🫢

손 내려봐

😀

ㅋㅋㅋㅋㅋㅋㅋㅋ

맛있는 거 사갈게ㅎ

지웅은 퇴근 시간에 맞춰서 리키를 마트로 불러냈다. 고작 이틀 사이에 굶어 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이제 막 설거지를 마스터한 애라 그런지 영 걱정이 되었다. 먹을 만한 것들을 챙기라니까 기어코 딸기맛 과자들을 가져오는 리키를 되돌려 보내고는 제육볶음을 여러 개 담았다.

"질려도 이틀 동안은 이걸로 버티고 있어. 알겠지?"

"형. 리키 아기 아니에요."

"언젠 아기라면서."

"많이 빨아서 어른 됐어요."

순간 무슨 소리인가 싶어 멈칫했던 지웅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마트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는 리키의 입을 잡아당기다가 자꾸만 가슴쪽이 쓸려서 아픈 옷을 쭉쭉 늘렸다. 가뜩이나 사무실에서도 따끔거려서 죽을 맛이었는데. 리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자꾸만 입술을 움직여대길래 놓아준 지웅은 다시 입을 틀어막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내일이랑 내일내일 못하면... tonight-"

"어어, 저기 세일한다."

김칫국을 열심히 마시는 리키를 질질 끌고 가서 카트 안에 고기를 또 열심히 담았다. 이 정도면 이틀이 아니라 일주일은 거뜬히 버티겠지만 원체 잘 먹는 리키가 하루만에 먹어치워서 배고프다고 울기라도 할까봐 어쩔 수 없었다. 어쩐지 연애가 아니라 육아에 가까운 짓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지웅이 뒤에 서 있는 리키를 힐끔 쳐다보았다. 해산물 코너에서 움직이는 킹크랩을 열심히 구경하는 리키를 보고는 납득했다. 그래, 육아 맞지.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택시부터 잡은 지웅은 불안감에 손톱을 물었다. 리키가 아침부터 도통 연락이 되지를 않았다. 이제까진 선톡은 잘 안 해도 카톡을 보내거나 전화를 걸면 꼬박꼬박 받아왔었는데. 배고픔에 굶주려 비명횡사한 모습까지 떠오르자 도저히 진정할 수가 없었다.

"총각. 무슨 사고라도 났어?"

"저희 집 애기가 연락이 안 돼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봐요."

"그러면 빨리 가야지."

빠르게 속도를 내는 택시기사에게 감사하다고 중얼거린 지웅이 계속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리키는 받지 않았다. 옆에서 자꾸 난리를 치는 지웅 때문에 덩달아 초조해진 택시기사가 긴장된 목소리로 물었다.

"애기가 대체 몇 살인데 그려. 초등학교도 못 들어갔나?"

"스무살이요."

"?"

정신이 온통 딴 곳에 팔려 있어 택시기사가 뭘 물어보고 뭐라고 대답했는지도 모른 채 지웅은 거실에 쓰러져 있는 리키를 상상해보다가 머리를 쥐어 뜯었다. 그러다 마침내 통화가 연결되었다.

"리키!"

"지웅형? 전화 많이-"

"형 지금 집 거의 다 왔어. 왜 전화를 안 받아.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네?! 지금요?!"

전화 너머에서 우당탕 소리가 울려퍼졌다. 뭔가 사람 목소리도 들린 것 같고. 그 사이 통화가 끝나버렸다. 지웅은 핸드폰을 내려다보고는 뺨을 긁적였다. 일단 목소리를 들었으니 안심이 되려다가 다시 이상한 상상이 시작되었다. 혹시 안에 도둑이 들어서 저런 소음들이 난 거면...

택시비를 결제하고 나서 바로 5층에 뛰어 올라간 지웅은 도어락을 눌러댔다. 손이 마구 떨려와서 자꾸만 오류가 나서 욕까지 내뱉고 한대 때려주니까 그제야 제대로 눌렸다. 역시 기계는 때려야 말을 잘 들어. 지웅은 리키의 이름을 외치며 문을 열어젖혔다가... 거실을 정신없이 치우는 네명의 꽐라를 발견했다. 한명은 설거지도 안 한 그릇들을 찬장에 쑤셔 넣고 있었고, 한명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과자 봉투들과 술병들을 문 뒤로 숨기고 있었고, 한명은 블루마블을 닥치는 대로 정리하고 있었고, 리키는 옷장 안으로 신발을 던지고 있었다. 저러니까 옛날 생각 나네.

"...심리키 빼고 다 나가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던 녀석들이 서둘러 짐을 챙겨 나가고는 조심조심 문을 닫았다. 인기척이 없어 어두워진 현관에서 지웅이 한발짝 움직이자 불이 툭 켜졌다. 그렇게 서서히 다가오는 지웅을 피해 리키가 뒤로 물러서다가 벽에 등을 부딪쳤다.

"형... early 와서, 그래서-"

"리키야."

"...네."

"정신 차리자?"

"네에..."

지웅의 표정을 눈앞에서 본 리키가 딸꾹질을 했다. 당분간은 지웅한테 절대 개기지 말자고 다짐도 하면서. 물론 리키는 애기라서 그런 건 금방 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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