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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서로를 존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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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연소일 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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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어김없이 가혹한 컨셉을 보자마자 지웅의 입가가 바르르 떨렸다. 새빨간 페라리를 끌고 회사 앞에 찾아온 리키는 오후 6시임에도 썬글라스를 낀 채 블랙 셔츠와 블랙 슬랙스를 입은 채 차에 기대어 서 있었다. 한쪽 구두 앞코를 땅에 디딘 채 얼굴을 옆으로 돌려 핸드폰을 하는 척 날렵한 턱선과 조각같은 콧대를 보여주더니 지웅이 건물에서 나오자마자 썬글라스를 추켜올리며 싱긋 웃었다. 지웅은 어린 남자친구의 지독한 추구미를 존중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었지만 솔직히 회사 앞에서 저러고 있으면 개쪽팔렸다. 쥐구멍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뒤에서 나오는 사람과 부딪칠 뻔 했다.

"동생이랑 또 어디 놀러가?"

"...마트에 장 보러 가요."

놀랍게도 둘이 갈 곳은 집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대형마트였다. 마트를 가는데도 저러고 나오는 거였다. 지웅의 영혼 없는 대답에 윤과장이 의아한 얼굴로 리키를 보다가 떠났다. 리키는 보조석을 열어주면서 지웅에게 손짓했다. 지웅이 못본 척 그대로 걸어가자 리키가 뒤에서 차가 빵빵거리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으며 보폭에 맞춰 차를 몰았다. 뒤차에서 욕이 계속 날아온 탓에 결국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지웅은 마지못해 차에 올라탔다. 리키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지웅에게 안전벨트를 매주더니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한숨을 내쉰 지웅은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를 내려 노력했다.

"리키야."

"네."

"회사 앞에는 좀 평범하게 나올 수 없을까?"

"Why?"

"...형에게도 사회적 체면이라는 게 있어서."

"최면? hypnosis?"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되묻는 리키를 보며 지웅은 입을 다물었다. 체면은 모르는데 최면은 왜 아는 거냐고. 이럴 때면 정말 못 알아듣는 것인지 아님 못 알아듣는 척하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당장 중요한 건 점점 감당이 안 되는 이 지독한 추구미였다. 지웅은 어떻게 해야 저 꿈에 나올 것 같은 블랙들을 갖다 버릴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얼마전 인터넷에서 본 글을 떠올렸다. 여자친구의 옷이 마음에 안 들어서 불만이라던 내용에 엄청난 악플들이 달려 있었다. 꼬우면 헤어지던가 직접 사다 입혀주라고. 뭐 해주지도 않고 불만만 말하면 죽빵을 갈기고 싶다고 했던가. 지웅은 자신이 그 글쓴이와 다름 없는 짓을 할 뻔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스스로 반성했다. 그래, 옷이 마음에 안 들 땐 새로 사주면 되는 것이다.

굳게 마음을 먹은 지웅은 곧장 축산코너에 가서 고기의 마블링을 보며 beautiful... 중얼거리는 리키를 의류 가판대에 끌고 가서 옷을 하나씩 갖다댔다. 얼굴이 하얗고 잘생겨서 뭘 입혀도 옷발이 살았다. 흐뭇하게 웃으며 옷을 고르는데 리키가 이번에도 어김없이 블랙에 손을 뻗었다. 집에 비슷한 걸로 몇 십벌은 있는 것 같은 검은색 셔츠를 보더니 만족스러운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웅은 그 손목을 덥석 붙들며 진지하게 말했다.

"리키야. 우리 다른 예쁜 색을 골라볼까? 검정색은 이미 많잖아."

"Oh. I see."

처음엔 아이씨라는 줄 알고 당황했던 지웅은 리키가 정말 블랙이 아닌 다른 옷을 가지고 오자 입꼬리를 올렸다. 물론 그 끝은 바들바들 떨리는 중이었다.

"...호피무늬 말고."

"홉히무니?"

"너 나이엔 좀 귀여운 거 입어도 되잖아. 여기 곰돌이 그려진 후드티는 어때?"

"oh..."

"이 토끼 맨투맨은?"

"What the..."

리키는 뭔 충격적인 꼴이라도 본 것마냥 입을 벌린 채 머리에 양손을 올리며 옷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결국 한참이 지나서야 떨떠름한 얼굴로 지웅에게서 옷을 받아들었다. 집게 손가락으로 집어들어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리키 이런 거 안 입어요."

"왜애. 귀엽잖아."

"싫어요."

 

저렇게 싫어하는데 강요할 수는 없었다. 없지 없는데...! 검은색 셔츠에 영혼이라도 판 사람처럼 1년 365일을 그것만 입고 다니는 모습을 더 지켜보고 싶진 않았다. 결국 합의,입어싫어요입어싫어요입어입으라고...알겠어요,에 타협을 거쳐 검정색 맨투맨 두 벌을 담았다. 하나는 지웅의 강력한 주장으로 귀여운 곰돌이가 작게 그려져 있었는데 리키는 그걸 보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언제부턴가 지웅의 앞에서 마냥 귀여운 어린 남자친구가 되어가는 것 같아 리키는 불만이 가득했다. sexy한 지웅형을 위해 집에서 욕을 먹어가면서 페라리도 훔쳐 나왔는데 막상 지웅은 부끄럽다며 회사 근처로는 끌고 나오지도 못하게 하고. 작고 낡은 빌라 한 구석에 어울리지 않게 주차되어 있는 차를 보며 한번씩 애잔한 미소를 지어대고. 옷도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탑텐이나 스파오같이 애기들이나 입는 매장에 데려가서 이게 귀엽다는 둥 저게 어울린다는 둥 로고나 그림이 큼지막하게 그려진 맨투맨만 가져오고. 그것도 보라색 노란색 분홍색... 저번에 마지못해 검정색 맨투맨을 받아들었더니 이젠 다른 색깔까지 강요하려 들었다. 본인이 추구하는 미적감각과 동떨어져 있긴 하지만 잘 어울린다며 활짝 웃는 지웅을 보면 차마 눈앞에서 그 옷을 찢어버릴 수는 없었다. 

고양이가 그려진 보라색 후드티를 입은 채 지웅의 배웅을 받으며 나온 리키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곧장 옷을 벗어 던졌다. 차에 미리 숨겨둔 블랙 셔츠를 입으니 곧바로 안정감이 찾아왔다. 축 늘어져 있던 태평양 같은 어깨가 곧게 펴졌다. 만족스러운 숨을 내쉬며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힉-?"

창문으로 들여다보고 있던 지웅과 마주쳤다. 콩닥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있는데 지웅이 손짓을 했다. 마음의 준비를 하며 천천히 창문을 내렸더니 지웅이 손목시계를 확인하고는 또 손짓을 했다. 마지못해 차 밖으로 나오자 지웅이 리키의 손목을 부여잡고 집으로 질질 끌고 갔다. 그렇게 끌려가서 혼이라도 날줄 알았는데 예상 외로 아주 좋은 시간을 보내고는 둘다 서둘러 집을 뛰쳐 나왔다.

"지웅형. 이따 또 해요."

리키는 지하철 근처에 도착하자마자 내리려는 지웅을 붙들고 잘못 채워진 단추를 다시 잠가줬다. 지각할까봐 마음이 급하면서도 제법 끌리는 말에 지웅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계단을 열심히 뛰어 내려가는 뒷모습을 보며 리키는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역시 sexy 남자친구의 첫 단계는 black shirt가 맞다고 생각하면서.

리키는 지웅의 마음을 비로소 이해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이해 못하는 부분이 있다. 감당하기 힘들기도 하고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을 만큼 부끄러운 면모도 존재했다. 뽀로로 굿즈를 받고 싶다며 눈을 빛내는 지웅은 귀엽지만 그 상품을 따내기 위해 애기들 틈에서 숫자송인지 뭔지를 함께 부르겠다는 모습은... 보기에 많이 힘들었다. 마음 같아선 내가 사줄게 따라와, 하고 당당하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이제 가진 게 가오와 차밖에 없는 리키는 지웅에게 저 굿즈를 선물해줄 수가 없었다. 멀리서 지켜보며 응원하겠다는 말과 함께 도망가려고 했는데 심지어 두개나 가지고 싶다며 강제로 리키까지 끌려 나왔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숫자송의 가사를 제대로 외우기도 전에 곧바로 도전이 시작되었다. 입만 벙긋하다가 끝나버린 탓에 뽀로로 영화 티켓이 날아갔다. 아이들의 싸늘한 시선이 꽂혀 리키는 썬글라스를 고쳐 썼다. 하지만 괜찮다. 지웅이 가장 가지고 싶어하는 뽀로로 인형은 아직 살아있으니까. 지웅은 리키를 붙들고 비장한 표정으로 가사를 계속 알려줬다. 리키는 허리에도 못 미치는 아이들과 나란히 서서 이 말같지도 않은 노래를 사람들 앞에서 왜 불러야 하는지 여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어쩔 수 없이 가사를 중얼거리며 외웠다. 할 수 있지 리키야? 네...

"삼 삼초는 어떻게 기다려- 이야이야이야이야-"

그와중에 가오는 못 잃어서 자세를 잡고 노래를 마친 리키는 자신을 기특한 얼굴로 바라보는 지웅을 보며 아주 뿌듯해졌다. 이제 곧 나올 가사를 한껏 기대하며 지웅을 힐끔 쳐다봤다. 그러나 남자친구가 아닌 뽀로로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사랑해 널 사랑해 이 지랄을 하고 있는 지웅 때문에 입가가 바르르 떨렸다. 리키는 그 꼴을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보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 

"사랑해 요기조기 한눈 팔지 말고 나를 봐-"

삐져서 딴 곳을 쳐다보는 리키를 눈치채고 아차 싶어진 지웅이 뒤늦게 돌려세우며 얼굴을 마주보고 불러주었다. 기특하게 노래도 잘하는 리키를 끌어안으려다가 애기들도 함께 있는 마트라는 걸 떠올리고는 서로 얼른 몸을 돌렸다.

"언제나 이 맘 변치 않을게-"

리키는 마지막 가사만큼은 지웅을 똑바로 바라보며 진심을 다해 불렀다. 지웅도 마주보고 웃어서 진심이라고 믿어보긴 하지만... 노래가 끝나자마자 주어지는 인형을 보고는 감격하며 끌어안는 지웅 때문에 저 안경 쓴 펭귄을 한대 치고 싶어졌다.

장을 보는 동안에도 카트에 인형들을 끼워놓고는 계속 내려다보는 탓에 리키의 등이 다섯번은 카트에 치였다. 미안하다고 쩔쩔매면서도 또 정신이 인형에게로 팔려서 결국 리키가 카트를 끌었다. 덕분에 잔소리를 듣지 않고 딸기 과자를 몰래 5개나 더 넣었지만 차에 타서도 뽀로로 인형만 구경하는 지웅을 보니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꼴보기 싫은 펭귄 대가리를 잡아서 쑥 뽑아서 뒷좌석에 던져버렸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신의 빈 손과 뒤를 번갈아 바라보던 지웅이 물었다.

"리키야 방금 그거-"

"지웅형. 왜 사랑해 부를 때 리키 안 봤어요. 왜 pororo 봐요."

"으응...?"

"pororo 때리고 싶어요."

리키는 완전히 삐져서 핸들만 꾹 쥐었다. 여기서 힘을 풀었다간 저 안경이라도 뜯어내버릴 것 같아서. 잠시 고민하던 지웅이 얼굴을 붉히며 수줍은 듯 리키의 어깨를 툭 쳤다.

"어, 어떻게 그래. 애들도 있는 앞에서 마주 보면서 사랑한다구..."

여전히 앞만 쳐다보고 있지만 리키의 광대가 한껏 치켜 올라가 있어서 지웅은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새끼... 눈치는 빨라가지고.

다음 강의까지 시간이 애매하게 떠서 수업을 같이 듣는 규빈과 당연하다는 듯이 pc방으로 갔다. 가는 동안에도 축축 처지고 그렇게 좋아하던 딸기스무디도 거절한 채 마우스만 의무적으로 움직였다. 평소라면 중국어와 영어를 섞어 욕을 날렸을 리키는 상대팀의 도발에도 묵묵부답이었다. 결국 한타를 하다말고 한숨을 내쉬며 헤드셋을 벗어서 내려놓았다. 덕분에 적팀에게 죽은 규빈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리키를 쳐다봤다.

"뭐해 지금?"

"김규빙. 고민 있어."

무슨 고민을 게임하다 갑자기 꺼내냐고 따지는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리키가 중얼거렸다.

"지웅형 pororo 너무 좋아해."

"포, 포르노...?"

"pororo."

"아- 뽀로로."

규빈은 대충 대답하며 게임을 마저 했다. 친구의 남자친구에 대한 얘기는 관심 없다. 상대가 남자라서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리키의 연애에 대해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리키는 친구의 그런 간절한 마음을 싸그리 무시하며 마저 말을 이었다.

"요즘 침대에 pororo 인형 있어. Between me and 형. 어제 지웅형 cheek에 kiss하려다가 인형에-"

"악!!!"

듣자듣자 하니까 더는 못 들어주겠어서 규빈이 비명을 지르며 키보드를 치켜들었다. 주변 이들의 따가운 시선에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이며 자리에 앉았지만 결국 그대로 pc방에서 쫓겨나왔다. 하마터면 블랙리스트에 올라갈 뻔해서 규빈이 투덜거렸지만 다음 강의실로 돌아가는 동안에도 리키의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사연은 계속 되었다.

지웅은 그놈의 뽀로로가 뭐가 좋다고 하나는 포장도 안 뜯고 관상용으로 서랍장 위에 올려놓고, 다른 하나는 매일 밤마다 끌어안고 뒹굴어댔다. 뽀로로와 웃기지도 않은 사랑의 라이벌이 된 것도 큰 문제였으나 사실 제일 큰 문제는 지웅이 자꾸만 리키의 아이덴터티를 건든다는 거였다. 지금도 마지못해 연핑크 후드티를 입고 있던 리키는 캠퍼스에서 아는 얼굴과 마주칠 때마다 쪽팔려서 입술을 깨물었다. 차에 옷을 숨겨놨던 걸 어떻게 알았는지 오늘은 강아지가 그려진 노란 티셔츠가 대신 자리잡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입고 나온 연핑크를 그대로 택했다. 다시 예전의 Ricky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에 귀를 후벼파던 규빈이 해결책을 내줬다.

"그럼 헤어지던가."

"What?!"

"싫어? 그럼 아예 작정하고 애교라도 부려봐."

"...규빙 crazy 됐어?"

"그걸 노리는 거지. 네가 애교 부리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주먹이 떨리는데 그 형도 직접 보면 질려서 그만하라고 하겠지. 그러면 넌 계속 멋있는 척을 하면 되는 거야. Got it?"

진짜로 떨리는 주먹을 보여주던 규빈에게 리키는 홀린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꽤나 일리가 있었다. 지웅은 자신이 고개를 끄덕이며 '옹!' 할 때나 '안 돼요'라고 발음할 때마다 웃으면서 귀여워했지만 정작 대놓고 애교를 부리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가족들 앞에서도 해본 적 없는 애교를 지웅의 앞에서 해야 된다니 치가 떨렸으나 때로는 미래를 위해 한발자국 물러서야 할 때가 있는 법. 그게 바로 지금이라고 리키는 생각했다.

집에 돌아가니 김치찌개를 끓이던 지웅이 리키를 반겨주었다. 숟가락으로 국을 떠서 후후 불어주고는 먹여줘서 리키는 암- 받아먹었다. 맛있냐고 묻는 말에 옹, 했더니 지웅의 광대가 솟구쳤다. 어쩌면 지금이 그 타이밍일지도 모른다.

"지웅형."

"엉?"

"Ricky's 애교 보고 싶어요?"

"별로?"

1초의 망설임도 없는 거절에 리키는 눈을 깜빡였다. 물론 지웅에게 애교를 꼭 보여줘야 하는 것은 아니고 지웅이 거절할 권리도 있다는 건 아는데 괜히 기분이 나빴다. 슬슬 오기와 반발심이 생겨났다.

"보여줄래요."

"어어... 그래 해봐."

마치 설날에 세배를 받게 된 어른처럼 떨떠름하게 의자에 앉은 지웅이 리키를 바라보았다. 막상 판을 깔아주니까 용기가 안 생겨서 리키는 몇번이나 심호흡을 했다. 지웅은 그 모습을 보며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켰다. 미들스쿨 때 친했던 친구가 특기로 보여주던 애교를 떠올리며 리키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들어올렸다.

"빵 빵 뿌잉 Ricky는 지웅형만의... chocolate... 앙..."

비장하게 사랑의 총을 쏘면서 시작한 것과는 달리 하트를 앙 하고 깨물자마자 바로 고개를 숙이며 주먹을 쥐고 떨어댔다. 규빈의 말이 맞았다. 정말로 주먹이 떨렸다. 싸해진 공기에 잠시 정적만이 맴돌았다.

 "...근데 재능은 있다."

진지하게 고민하던 지웅이 겨우 내놓은 반응이었다. 웃음기 없는 칭찬을 들은 리키는 지웅이 마저 찌개를 끓이는 동안 침대에 올라가서 뽀로로 인형에게 냥냥펀치를 한대 날려주었다.

침대에 누워 멀뚱멀뚱 천장을 보던 지웅은 가운데에 놓인 뽀로로 인형을 슬그머니 치웠다. 그러자 리키와 누운 채로는 오랜만에 눈을 마주할 수 있었다.

"왜 리키답지 않게 애교를 부렸어?"

"...지웅형. 김치찌개가 귀여워요, pororo가 귀여워요?"

"으응? 당연히 뽀로로?"

"그럼 pororo랑 리키 중에 누가 더 귀여워요?"

무슨 소리인지 이제야 감이 잡혔다. 지웅은 웃음을 참으려 입술을 깨물었다. 잔뜩 긴장한 리키를 놀려주기 위해 일부러 심각하게 고민하는 척했다. 그러자 충격받은 얼굴로 머리를 감싸는 리키가 귀여워서 결국 웃음을 크게 터뜨렸다.

"당연히 우리 뽀로, 아니. 아니! 리키야! 리키라고 하려고 했어!"

말이 잘못 나오자마자 이불을 박차고 나가버리려는 리키의 허리를 얼른 끌어안았다. 지웅은 잔뜩 삐진 리키를 어르고 달래주며 겨우 다시 침대에 눕혔다.

"우리 리키 서운했구나."

"서운 아니에요. 빡쳤어요."

"...그, 그랬구나."

"그리고 Ricky's identity is black. 다른 색 하지 마요. 빡쳐요."

"...오키. 존중할게."

빡치시다니 당연히 포기해야지. 지웅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존중이 뭐냐는 물음에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더듬댔다. 이해하고 인정하고 뭐 그런거... 잠시 뭔가를 고민하던 리키가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저 pororo 종중해요."

"그래, 뭐, 고맙다."

"But 지웅형 옆은 안 돼요."

귀여운 발음에 웃음이 나올 뻔 해서 지웅은 이를 꽉 물었다. 여기서 웃었다가는 이 귀여운 연하남이 또 삐질 테니까. 앞으로 뽀로로 인형은 얼굴 옆이 아닌 침대의 구석 끝에 두기로 합의,어깨는?no허리는?no엉덩이는?no!,를 마쳤다. 과정이 어떻든 간에 좋게 끝났으니 이만 자려는데 리키가 옆에서 또 말을 걸어왔다.

"지웅형."

"왜?"

"근데 pororo 왜 좋아해요?"

순진한 얼굴로 잔인한 질문을 해와서 지웅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아직 만난지 1년도 채 안 됐고 이제 성인이 된 남자친구한테 이런 진지한 얘기를 꺼내도 될까 싶었지만 언제까지고 숨길 수는 없었다. 결국 작게 숨을 내쉰 지웅이 천장으로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형은 사실 보육원에서 자랐거든."

"보육원 뭐예요?"

"부모님 없는 애들이 자라는 시설 있잖아."

“Oh..."

리키의 눈이 크게 떠졌다. 안절부절 못하는 리키의 손을 토닥이며 지웅이 계속 말을 이었다.

"보육원에선 맨날 뽀로로 같은 애니메이션만 틀어줬거든. 그리고 학교에선 고아라고 따돌림 받아서 친구도 없었고. 그래서 뽀로로가 내 유일한 친구였어."

"지웅형, 저-"

"분위기 너무 가라 앉았네! 이만 잘까? 아니다, 우리 리키가 제일 좋아하는 거 하고 잘까?"

미안한 얼굴로 바라보는 리키를 차마 마주하기가 어색해서 지웅이 호들갑을 떨며 이불 안으로 머리를 집어 넣었다. 그러나 목덜미를 쭉 잡아 올리는 리키 때문에 켁켁거리며 다시 이불 밖으로 나왔다.

"저 family 될게요. friend도. 이제 지웅이라 부를래."

"리키야..."

리키는 지웅이 감동을 받은 줄 알고 뿌듯한 얼굴을 했지만.

"그래도 여섯살 어린 남자친구랑 말을 까는 건 좀..."

"...Sorry."

어쨌든 둘이 그렇게 화해의 뜨밤도 보내며 며칠 정도는 조용히 잘 흘러지나갔다. 하지만 지웅은 오늘 회사에서 분노의 타이핑을 치고 있었다.

아니 리키야

이번주 음식물 담당 너잖아

근데 왜 자꾸 모른척 해

응식물 버리고

Ferrari 운전 싫어요

지하철 손잡이 잡는

나는 괜찮고?

쓰레기 버리는 문제로 이렇게 쪼잔하게 굴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도가 지나쳤다. 지웅은 속으로 집에 얹혀사는 주제에, 까지 생각했다가 머리를 때렸다. 이건 좀 너무 했다. 아무리 상대가 잘못을 했더라도 약점을 물고 늘어져서는 안 된다. 심지어 집에서 쫓겨나게 한 장본인이 누구인데. 심호흡을 하던 지웅은 카톡에 올라온 사진을 보고 픽 웃었다. 썬글라스를 끼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자화상에 조그맣게 끼어 있는 뽀로로까지. 뽀로로는 눈물을 흘리며 sorry라고 외치고 있었다. 리키의 귀여운 짓에 지웅은 답례로 거울을 보며 그림을 그렸다.

(사진)

sorry

next week 제가 해요

오냐

(사진)

ㅋㅋㅋㅋ

어때?

?

큰일이다

놀랐어 phone 떠러드려서

screen 꺴어요

미소를 짓고 있던 지웅의 입꼬리가 빠르게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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