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이렇게 사귀고 있습니다
맄즁
평연소일 가이드
지웅은 파티션이 가려주는 사각지대에 앉아 업무를 보는 척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지만 사실상 메모장에 가득 들어차 있는 문장은 집에 가고 싶다, 였다. 지금쯤 수업이 끝나고 집에 와서 뒹굴고 있을 자칭(타칭) 섹시 연하남이랑 간절하게 껴안고 뒹굴고 싶었다.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회사라는 감옥에 갇혀 업무라는 벌을 받고... 한탄을 하다가 순간 자아성찰을 했다. 전생에 나라를 구했으니 리키랑 사귀고 있구나. 형 올 때 삼겹살 구워놓을게요, 애교도 부릴 줄 아는 기특한 애기를 먹여 살리느라 이 짓을 하고 있구나. 그 생각을 하니 조금쯤은 힘이 났다. 많이 나지 않는 건 둘의 사랑이 고작 그것밖에 안 되어서는 아니고, 아직 수요일밖에 되지 않은 현실이 암담해서였다.
옆에 최대리가 와서 앉자 지웅은 자연스럽게 윈도우키와 1을 눌러 워드로 업무보고서를 작성하는 척했다. 결재판을 챙겨 다시 떠나는 최대리의 뒷모습을 곁눈질로 보다가 이번엔 윈도우키와 2를 눌러 다시 메모장으로 돌아왔다. 집에 가고 싶다는 문장을 다 지워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로는 집에 가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달래줄 수가 없어서.
동료들은 퇴근 이후의 술 권유도 마다한 채 매번 집으로 쏜살같이 가버리는 지웅에게 집에 꿀단지를 숨겨 놨냐고 농담을 했지만, 사실 꿀보다 더 달달한 남자친구가 기다리고 있기는 했다. 아직 연애를 시작한 지 몇 개월밖에 되지 않아 한창 불타오르는 시기였다. 오늘 아침에도 현관 앞에서 배웅해주는 리키랑 가볍게 뽀뽀만 하려다가 점점 진해져서 지하철을 두 번 놓칠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집을 떠날 수 있었다. 결과는 1분 남기고 아슬아슬하게 도착.
"지웅씨, 오늘 클라이언트 오는 날이니까-"
겉으로는 은은하게 미소를 짓고 있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뽀짝(184cm) 연하 남자친구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찬 상태로 지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황대리가 업무를 전달하고 떠나자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가 메모장에 마저 문장을 적었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집에 가고 싶으니까 별게 다 거슬렸다. 그냥 고객이라 하면 되지 왜 굳이 영어를 섞을까. 우리 리키 생각나게. 어제도 침대에서 은근한 목소리로 오랜만에 doggy style로 하자길래 그게 뭐냐고 물어봤다가... 지웅은 허벅지를 강하게 꼬집었다. 진정하자 여기는 회사다. 속으로 크게 한숨을 한번 내쉬어준 다음에 이번엔 정말로 워드를 열었다. 칼퇴를 위해서라도 정신 차리고 업무를 계속해야 했다.
하지만 수요일 오후는 시간이 더럽게 안 간다.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수록 이것저것들이 신경 쓰이기 마련이다. 아, 옆자리 키보드 소리 오진다. 마우스를 쥐고 있던 지웅의 손에 핏줄이 솟았다. 저 오지는 소음을 듣고 있으니 머릿속에 과제 기간만 되면 키보드를 열심히 두드리는 리키가 떠올랐다.
소파에 앉아 있는 리키의 다리 위에 종아리를 올려놓고 편하게 누우면 리키가 그 위에 노트북을 두고 과제를 하는 자세가 어쩌다 보니 정형화되고 말았다. 뜨뜻한 노트북 밑판이랑 타닥타닥 자판 소리에 잠이 솔솔 와서 그대로 눈을 감았다가 뜨면 어느새 리키랑 침대에서 끌어안고 자는 중이곤 했다. 과제는 다 끝냈냐고 물어보니 자는 와중에도 고개는 착실하게 끄덕끄덕. 그 모습을 떠올리던 지웅은 순간 미소가 지어지자 급하게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도 귀엽다. 다시 스멀스멀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다잡는 순간 최대리가 자리에 돌아왔다.
"어제 기안서를 어디다 놨더라아-"
"두 번째 서랍 열어보세요."
"아니, 어떻게 매번 그렇게 잘 알아? 여기 감시카메라라도 달아놨어요?"
그럴리가요. 동작이 워낙 크셔서 다 보이고 다 들려서 기억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는 것뿐. 물론 지웅은 마음속으로만 말하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켜보는 척, 최대리에게 장난을 쳤다. 최대리가 킥킥 웃다가 앞을 보자마자 지웅의 입꼬리가 순식간에 내려갔다. 속으로 집에 가고 싶다를 백만번쯤 중얼거리며 업무를 마저 하다가 핸드폰에 알림이 오자 시선을 내렸다. 피자 쿠폰의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메시지였다. 사용기한을 확인해보니까 오늘까지. 상도덕도 없는 새끼들, 이걸 오늘 알려주다니. 부들대던 지웅이 핸드폰을 들어올려 화면을 쭉쭉 내렸다. 알고 보니 2주 전부터 줄기차게 알림을 보내 왔었다. 미안합니다, 광고인 줄 알고 무시했어요. 속으로 사과를 하던 지웅은 슬쩍 pc 카톡을 틀어 리키에게 연락을 했다.
리키💗
오늘 피자 쿠폰 써야 돼 ㅎ
삼겹살: ?
ㅋㅋㅋㅋ
나중에 먹자~
이미 굽고 있다
?
퇴근하려면
2시간도 더 남았는뎅
배고파요 😎
웅 ㅋㅋㅋㅋ
많이 먹고 이또 ㅎ
ok
지웅은 삼겹살을 구워서 먹는 리키의 모습을 상상하며 슬쩍 웃었다. 스무살짜리가 뭐 얼마나 더 크겠다고 저렇게 잘 먹지. 그러다 거기까지 커지면 안 되는데. 지금도 좀 버겁단 말이야... 그런 쓸데없는 걱정이나 하고 있던 지웅에게 리키가 노릇하게 구워진 삼겹살 사진을 보내왔다. 분명 방금까지 배고프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입에 침이 고였다. 침을 꿀꺽 삼킨 지웅이 상상을 이어갔다.
상추를 손바닥에 얹어놓고 그 위에 김 올라오는 흰밥을 올리고 삼겹살 두 점 덮어준 다음에 마늘을 쌈장에 푹 찍어서 같이 쌈 싸 먹고 싶다. 그러고 소주잔을 딱 들이키면 옆에서 리키가 삼겹살을 쌈장에 찍어서 먹여주는데. 처음엔 마늘 냄새 난다고 뽀뽀도 안 해주더니 이젠 잘만 해준다. 얼른 집에 가서 리키랑 뽀뽀 아니 삼겹살 먹을 생각에 마음이 급해진 지웅이 키보드를 부서져 가라 치고 있는데 메신저에 알림이 떴다. 어쩐지 불길하다.
- 오늘 유전무님과 회식 잡혔습니다...
씨발. 지웅이 마우스를 터뜨릴 듯 움켜쥐었다. 유전무 새끼는 본인 친구들이랑 놀면 되지 굳이 아래 직원들 불러다가 회식하는 걸 좋아했다. 친구들 앞에서 내세울 게 없어서 고깃집에서 부하직원들이 딸랑거리는 걸 즐기나 본데, 지웅은 올해 입사한 말단 사원이라 얄짤 없이 가야 했다. 리키의 생일날에도 회식이 잡혀서 장염을 핑계로 빠졌다가 다음날에 잔소리를 오지게 들었으니 이번에는 꼭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얼굴도 못 본 사장한테 님의 법카가 유전무의 사리사욕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다이렉트로 꼰질러야 이 거지 같은 회식문화가 사라지려나.
하지만 스물여섯살 김사원은 힘이 없다.
지웅은 불판 위에 지글지글 익어가는 소고기를 보며 리키랑 처음 만난 날을 떠올렸다. 원래 리키를 가르치던 친구가 급하게 휴학하고 고향에 내려가야 해서 지웅에게 자리를 넘겨줬었다. 명문대를 다니는 친구와는 달리 인서울 끝자락에 간신히 걸쳐 있던 지웅은 이 귀한 과외 자리를 자신이 계승해도 되는지 상당히 의심스러웠지만,
"고3인데도 공부에 관심 없어. 아이돌이랑 농구랑 뭐 이런 얘기 해주면서 시간 때우면 되거든. 그냥 너 공부할 거 해도 되고. 부모도 그냥 책상 앞에 붙들어 놓는 것만으로 만족해하니까 성적은 걱정 마."
"개꿀."
"아, 맞다. 걔 한국말 못하니까 영어 빡세게 공부해가라. 분명 과외해 주러 갔는데 어째 내 리스닝이랑 스피킹이 늘어나더라."
"개꿀."
개꾸리같은 말만 반복하던 지웅은 친구한테 받은 주소로 찾아갔다가 입을 떡 벌렸다. 과장을 좀 보태면 지웅이 현재 살고 있는 5층짜리 빌라보다도 클 것 같은 단독주택이었다. 집 앞에서 괜히 기가 죽은 채 들어가니까 드라마처럼 가사도우미가 반겨줘서 어깨가 더더욱 내려갔다. 지웅은 학생의 어머니랑 간단하게 대화만 나누고 방에 올라갔다. 그곳에는 삐딱하게 앉아 헤드셋을 낀 채 눈을 감고 있는 녀석이 있었다. 인사를 해도 못 듣는 것 같길래 지웅은 녀석의 앞에 가서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느릿느릿 눈을 뜨고 5초 정도 가만히 있길래 지웅도 멀뚱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입을 벌리며 굳었던 녀석이 갑자기 침대로 뛰어 올라가더니 이불 밑으로 샤샤샥 들어갔다. 지웅은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자신을 쳐다보는 녀석에게서 나즈굴을 떠올렸다.
"안녕. 신리키 맞지? 오늘부터 과외하기로 했는데."
"...프사 다른 사람 같아요."
"아아- 예전에 스노우 필터 끼운 거야."
얼굴 넓적하게 나온 거 아직도 안 내렸구나. 지웅은 본인의 프사를 볼 일이 없어서 그대로 잊고 있었다. 나즈굴 아닌 리키가 아직 나올 생각이 없어 보이길래 책상 앞에 앉아서 책을 착착 폈더니 이불을 여전히 뒤집어 쓴 채 다가왔다. 많이 소심한 성격이구나 오해했던 지웅은 최대한 친절하게 미소를 지었다.
"한국말 못 한다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잘 하네?"
그 말을 들은 리키의 표정이 꽤나 애매해서 왜 저런 얼굴을 하는지 의아해했다. 이유는 나중에 알게 되었다. 원래 과외해 주던 친구가 꼴뚜기를 닮아 관심이 전혀 없어서 별로 안 친해지려고 영어만 썼단다. 지웅은 혀를 끌끌 찼다. 어린 놈이 얼굴은 오지게 따진다고.
"이거 수능 book 아닌데요?"
"엉? 이건 내 과제. 너 공부 안 한다면서. 그래서 과제할 거 가져왔지."
"...오늘부터 공부 할래요."
날아간 개꿀...
그래도 다른 개꿀이 있었다. 리키네 어머니가 앞으로 고생 좀 해달라며 지웅에게 한우를 대접해줬다. 이제까지 한우라고는 마트에서 유통기한 임박해서 특가로 나온 것만 먹어본 지웅은 차원이 다른 부드러움과 육즙에 감격했다. 정신 없이 먹고 있는데 리키가 어쩐지 한 입도 안 먹고 이쪽만 쳐다보고 있길래 한 점을 집어서 내밀었다. 리키는 엄마가 전화를 받으러 가는 것을 힐끔 보더니 냠- 받아먹었다. 그 모습을 떠올리던 지웅은 다시 생각해도 귀엽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신리키가 아니고 심리키인 건 세 번째인가 네 번째 과외 때 알아차렸다. 지웅은 리키의 몫으로 준비해둔 교재들에 이미 왕대갈체로 이름을 또박또박 적어놨어서 ㄴ에다 짝대기를 몇 개씩 그어 모두 ㅁ으로 만들어줬다. 수습 가능해서 다행이었다. ㅁ에서 ㄴ으로 바꾸는 건 상상만 해도 그저 아찔했으니까.
"선생님, graduation하면 뭐 할 거예요?"
"취업해야지."
"어디요?"
"몰라. 되는 대로 다 넣고 뽑아주는 곳으로 가겠지."
"선생님 dream 없어요?"
"아이 해브 어 드림. 아이 원투 비 어 돈 많은 백수."
챡챡챡챡 교재에 비를 내리던 지웅이 무심하게 대꾸했다. 리키는 돈 많은 백수... 중얼거리더니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지웅이 픽 웃었다. 그치, 돈 많은 백수 싫어할 사람이 세상에 어딨겠어. 하지만 부모 수저 물고 태어나지 못한 나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곳에 취업하고 개미 같이 일하다가 말년에나 돈 많은 백수가 될까 말까 한단다. 너는 부모 수저 잘 물고 태어났으니 개꿀 인생을 사는 동안 말이지.
"선생님 말 difficult."
"유어 라이프 부럽다고."
리키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웅은 수업이나 마저 나갔다. 공부하고 싶다 했으니 책임을 져줘야지. 돈도 양심 없이 명문대 과외 급으로 받는데. 하지만 머리는 명문대급이 아니라서 문제를 풀면서 이게 맞나 틀렸나 끙끙대다가 리키와 눈이 마주쳤다. 대체 어딜 보고 있는 건지를 알 수가 없었다. 교재도 아니고 그렇다고 손도 아니고 내 눈만... 지웅은 어이가 없어져서 펜으로 책을 두들겼다.
"심리키. 집중 안 하지?"
"하고 있는데요."
지웅은 자신을 지긋이 보더니 갑자기 윙크를 하는 리키를 가만히 쳐다봤다. 새끼가 발랑 까져가지고. 빠른 손놀림으로 코를 쥐었더니 리키가 그만 놓으라며 코맹맹이 소리를 냈다. 낄낄대던 지웅이 손을 놨다. 어리니까 봐줬다.
양심이 조금은 남아 있던 지웅은 빠르게 인정했다. 솔직히 그때부터 리키가 신경 쓰인 건 맞다고. 어린 놈이 맹랑한 소리를 해서 처음엔, 허 참나 얘 봐라? 이랬다. 근데 시간이 조금씩 지날수록 리키랑 닿는 어깨 면이라든지 살짝씩 느껴지는 숨소리라든지 에어컨 바람을 타고 오는 향수 혹은 샴푸 냄새...
"지웅형."
"왜."
"kiss할래요?"
그러면 섹시해 보일 줄 알았는지 눈을 나른하게 뜬 리키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지웅은 리키를 힐끔 쳐다봤다가 책을 돌돌 말아서 머리를 쳤다. 얌마, 너 수능 3달 남았어. 정신 차리고 쌍코피 터질 때까지 공부만 해도 인서울 턱걸이 할까 말까인데.
"그럼 in seoul 하면, kiss해요?"
"...수능 잘 보면."
암만 봐도 리키는 인서울은 무리였다. 지웅은 리키와의 키스가 어떤 느낌일지 궁금은 해서 일부러 조건을 두루뭉술하게 제시했다. 대체 키스가 뭐라고 리키는 그때부터 공부를 겁나게 해댔다. 예습까지 철저히 해가며 모르는 문제를 물어봤고, 숙제를 내주면 완벽하게 해왔다. 어떤 날은 문제를 풀다 말고 쌍코피까지 났다. 리키네 어머니가 아주 좋아하면서 보양식을 마구 먹여대서 덕분에 지웅도 살이 5키로나 쪄버렸다. 모의고사 성적이 점점 올라 기특한 마음에 머리를 쓰다듬어주니 리키가 좋다고 실실 웃어댔다. 지웅은 그때마다 누군가 심장을 움켜쥐는 듯한 기분을 받았다. 그래서 결국 먼저 선을 넘었다.
얼굴이 잘생겨서 그런지 혀의 감촉도 좋았다. 미끌거리면서도 축축해가지고...
지웅은 없던 일인 것처럼 굴었다. 어쩔 수 없었다. 아직 미성년자한테 그러면 안 되는 거였으니까. 당장은 수능이 더 중요할 나이니까.
그렇게 시간이 흘러 수능을 보고 돌아온 리키가 다음 과외 날에 당당하게 어깨를 폈다. 지웅형, 저 가채점했는데 기분이 째져요. 지웅은 리키가 구라를 치는 줄 알았는데 진짜로 잘 봐서 눈이 땡그래졌다. 인서울이 뭐야 중위권도 노려볼 만했다. 그러자 골치가 아파졌다. 난 이제 꼼짝 없이 얘랑 키스를.... 지웅은 퍼뜩 현실을 깨달았다. 생각해보니까 이미 그건 해버렸네.
"그럼 sex해요."
막 수능 끝난 애 머리를 때리기엔 책한테 미안해서 지웅은 손으로 직접 때렸다. 너는 인마 아직 미성년자인 놈이 머릿속에 그런 거밖에 없냐? 그랬더니 리키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뻔뻔한 꼴을 보던 지웅은 납득하고 말았다. 하긴 원래 저 나이대는 성욕이 들끓을 때지.
물론 바로 자진 않았다. 미성년자랑 키스까지는 몰라도 섹스는 하면 안 되지. 둘은 원서접수와 논술을 핑계로 수능 후에도 과외를 이어갔다. 지웅의 생일 땐 대학을 미리 탐방해본다면서 시내에 나가 데이트도 했다. 아니, 미성년자니까 데이트 아니지. 어쨌든 뭔가를 했다.
12월 31일엔 부모님이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러 나가셨다는 리키의 전화에 잽싸게 그 집으로 건너갔다. 남들은 종소리 들으려고 혹은 새해를 맞이하려고 카운트다운을 했을 텐데 둘은 몸을 맞대려고 숫자를 셌다. 결국 00:00 되자마자 입술부터 부딪쳤다. 그렇게 서로 옷을 벗기고 속옷마저 벗으려던 찰나. 띠리링- 밖에서 도어락 열리는 소리가 났다. 허둥지둥거리던 리키는 지웅을 옷장 안으로 쑤셔 넣었다. 지웅이 낑낑대며 몸을 접고 문을 겨우 닫은 순간, 리키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씨바 좆됐다. 입을 틀어막고 숨을 코로 조용히 쉬고 있는데 어쩐지 바깥이 조용해졌다. 어둡고 좁은 곳에 있으니까 숨이 막히고 머리까지 점점 몽롱해져서 지웅은 결국 문을 열어젖히며 바닥으로 엎어졌다. 그랬더니 보이는 두 쌍의 발.
드디어 중국어 패치가 완료된 줄 알았다. 지웅은 분노에 차서 중국어로 뭐라 떠들어대고 계시는 리키의 어머니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분명 중국어가 맞는데도 귀에 쏙쏙 박혔다. 아마도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어떻게 선생이란 새끼가 제자한테, 뭐 이러시지 않았으려나. 속옷만 입은 채로 쫓겨난 지웅은 담장 근처를 배회했다. 정수리만 빼꼼 보이던 리키가 창문으로 옷을 던져줬다. 제일 중요한 지갑이랑 핸드폰은 안 줘서 정류장까지 겨우 걸어가 택시 기사님께 사정하고 얻어탔다. 맨 발가락을 꼼지락대던 지웅은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해보니까 이번 달 과외비 아직 못 받았는데. 수능 점수 바짝 올려준 거 보너스도 못 탔는데. 일단 이런 생각들이 먼저 들었고. 그 뒤로는 리키 어떡하냐...
지웅은 졸업사진 찍느라 사뒀던 정장을 입고 리키의 집에 찾아가 공손하게 두 손으로 초인종을 눌렀다. 시간이 한참이나 지난 후에야 대문이 덜컹 열렸다. 이번에도 공손하게 두 손을 앞으로 모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마당을 지나갔다. 집에 들어서서는 소파에 앉아 계신 리키네 부모님 앞에 일단 무릎부터 꿇었다.
아무 썸씽 없던 둘이 갑자기 1월 1일 자정이 되었다고 해서 눈이 맞았을 리는 없고, 당연히 그전부터 뭐가 있었으리라 의심할 수밖에 없었겠지. 심지어 그게 사실이기도 하고... 지웅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 그저 죄송합니다만 반복했다. 옆에서 같이 꿇고 있던 리키가 중국어로 뭐라 떠들어댔는데 대체 무슨 말을 했는지 리키의 아버지가 재떨이를 덥석 집어서 던졌다. 지웅은 순간 리키를 감쌌다가 깨진 조각에 뺨을 깊게 베였다. 아직도 흉터로 남아 있어서 리키가 볼 때마다 미안하다면서 쪽쪽 빨아댔다.
어쨌든 둘 다 그대로 쫓겨나 버렸다. 아마 고생을 좀 해보면서 이참에 정신 차리고 돌아오라는 의미였겠지만 리키네 부모님은 생각이 좀 짧으셨다. 이건 걍 둘이 같이 먹고자고섹스하라고 동거를 허락해주신 것과 다름이 없었으니까. 지웅은 그대로 이행하다가 졸업한 후에는 그저 그런 회사에 취업해서 열심히 리키를 먹여 살렸다.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곱게 자란 도련님이라 설거지 하면서 그릇을 드럽게 많이 깨부수고 요리를 하는데 설탕과 소금을 오지게 헷갈려서 결국 집안일도 내가 다 하고... 돈도 내가 벌고... 지웅은 처음엔 별생각 없이 살았지만 어느 순간 억울해졌다. 이거 좀 많이 불공평한데 싶어서 리키를 봤더니, 아 그렇지. 내가 다 해야지... 그렇게 열심히 살아서 이 거지 같은...
"지웅씨, 뭐 해."
지웅은 소곤거리며 팔을 툭툭 치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아, 맞아. 지금 회식 중이었지. 탄내를 풍기는 고기를 대충 뒤집자 옆에서 최대리가 절망적으로 얼굴을 감쌌다. 겉으로는 민망하게 웃던 지웅이 집게를 쥔 손을 부들 떨었다. 꼬우면 지가 굽던가. 우리 리키는 집에서 삼겹살 좋다고 먹고 있는데 나만 소고기 먹으려니까 영 찝찝하다고. 걔는 집에서 랍스터니 스테이크니 그런 거 먹는 모습이 더 어울리는데. 남자친구 잘못 만나서 부모님께 쫓겨나고...
얼마전에 스파 브랜드에서 3만원짜리 원플러스원 맨투맨을 사다가 커플티라며 웃던 모습을 생각하던 지웅은 울컥 치밀어 오르는 눈물을 참았다. 300만원짜리 티셔츠 입는 게 익숙한 도련님이었는데... 웃긴 건 하나뿐인 아들이 어디서 굶어 죽을까 봐 걱정은 됐는지 카드는 쥐여주셨다. 한도가 80만원이라서 그렇지. 리키는 집에서 몰래 쌔벼 온 차에 그 돈을 매번 다 썼다. 이것만큼은 포기 못한다던가. 어차피 작고 소중한 월급으로도 그럭저럭 둘이 먹고 살 수 있으니 리키의 가오를 살려주기 위해 지웅은 그 사치를 허락해주었다. 그리고 오늘 같은 날 쓸모가 있기도 했고.
"히익- 저 차 뭐야?"
마지막으로 허과장새끼 택시 잡아드리고 허리를 꾸벅 숙이던 지웅은 옆에서 들려온 최대리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역시나 했는데 역시나. 리키가 이 밤중에 굳이 선글라스까지 낀 채로 지웅에게 저벅저벅 다가왔다.
"지웅형, 술 많이 마셨어요?"
"웅..."
하필 주당으로 소문난 허과장새끼 앞에 앉아서 술을 궤짝으로 마셨다. 지웅은 어깨를 감싸는 리키에게 기대어 걸으며 그대로 타려다가 아차차 싶어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고개를 꾸벅했다. 이제 슬슬 가도 될 때였다. 지옥으로 보내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보내야 하는 까마득한 상사 놈들은 다 보내놨으니까.
상도 다 치워놓고 설거지도 예쁘게 다 해놓은 거실 풍경을 보던 지웅은 크게 감격했다. 우리 리키 기특해요, 엉덩이를 팡팡 두들겨줬더니 리키가 몸을 배배 꼬아댔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혹시 그릇을 깨 먹었나 싶어서 지웅이 싱크대 앞에서 눈을 가늘게 뜨고 살폈다.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리키는 여전히 의심을 가득 품은 채 확인하느라 바쁜 지웅의 뒤에 바짝 붙어 서더니 슬쩍 몸을 부벼 왔다.
"리키."
"옹."
"지금 하면 속에서 올라올 수도 있어."
지웅은 시무룩하게 떨어지는 리키한테 좀 미안해졌다. 설거지도 깨끗하게 잘 해놓고 데리러 가면서 칭찬 받을 생각에 잔뜩 기대했을 텐데... 처음엔 입으로 해주려다가 목구멍 잘못 찔렀을 때 대참사가 날 것 같아서 손으로 해줬더니 둘 다 아주 만족스럽게 잠들 수 있었다.
출근하니까 소문이 어떻게 번졌는지 허과장이 지웅의 앞으로 와서는 요즘 MZ들 소비가 어떻고 카푸어가 저떻고 설교를 해댔다. 지웅은 겁나 억울해졌다. 카푸어라니, 우리 리키 부모님이 어떤 분들이신데. 저기 강남 쪽에만 빌딩을 몇 개나 가지고 계신데. 중국에는 더 많다고 들었거든요. 우리 리키 외동이라 그거 다 가져갈 거거든요. 그때까지 리키 옆에 잘 붙어 있을 거거든요. 속으로 따박따박 반박하던 지웅은 순간 정신을 차렸다. 생각해 보니까 지금은 잠시나마 부모에게 손절 당했으니 카푸어가 맞긴 맞았다.
"근데 어제 데리러 온 사람은 누구예요?"
"사촌동생이요."
"사촌동생이랑 손도 잡아? 신기하다."
"어릴 때부터 봐서 친해요."
지웅은 옆에서 물어보는 최대리에게 아주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물론 속으로는 딴생각 중이었다. 손만 잡게요? 입술도 부비고 고추도 맞대고 심지어 몸 안에 쑤셔 넣기까지 하는데요.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으니 그 뒤로는 조용히 모니터만 들여다보자 사람들도 금방 흥미를 잃었다. 한숨을 내쉰 지웅은 오늘도 어김없이 지루한 업무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메모장이라도 하나 켜놓을까 고민하던 와중, 엑셀 필터를 씌워놓은 pc 카톡이 왔다.
지옹형
웅?
저 오늘 늦다
?
과팅 가요
아 그거 오늘이었니
지웅은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리키랑 누워서 각자 핸드폰을 하는데 동기라는 녀석에게서 전화가 오더니 과팅 자리 하나가 부족하니 어쩌니 했었다. 그냥 끊어버리려는 리키를 말리고 가도 된다며 턱짓을 했다. 정말 괜찮아서 허락한 거였다. 신입생 때 많이 즐겨야지 또 언제 그런 기회가 오겠어. 하지만 동기에게 마지못해 승낙한 리키가 전화를 끊자마자 지웅을 노려봤다.
"지웅형 과팅... 많이 했어요?"
손가락과 발가락으로도 다 못 셀 만큼 많이 했어서 어색하게 미소만 지어 보였던 지웅은 삐진 연하남을 풀어주느라 고생했다. 그렇지만 솔직히 억울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 당시에 리키는 중학교를 다닐 때라서 우리에겐 일말의 여지도 없었는데 내가 왜 죄책감을 가져야 하나 싶었다가 생각해 보니 오히려 더 죄책감이... 지웅은 리키를 마저 열심히 달래주었다.
리키한테 말 걸어도
ignore
안심하십시오 😎
예쁘면 무슨 말 하는지 들어는 봐봐 ㅎ
ㅗ
oops
ㅠ
?
이 새끼 이거 일부러 그런 거 같은데. 지웅은 리키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리키가 날 두고 딴눈 팔 녀석이 아니라서 믿고 보내주는 거다. 아니면 오히려 그게 서운한 건가? 스무살은 종잡을 수가 없다.
퇴근을 하고 바로 집에 달려온 지웅은 아직 불이 꺼져 있는 거실을 보며 어쩐지 기분이 꿀꿀해졌다. 캔맥주를 홀짝이다가 리키의 인스스나 봤다. 어리고 귀여운 애들끼리 모여서 찍은 사진... 얘는 저런 애들이나 만나지 왜 나를 만나서 집 나오고 개고생을 하냐. 괜히 심란해진 지웅이 캔맥주를 하나 더 따고 들이키는데 곧 현관문이 열렸다.
"왔어?"
"녜."
"재밌었어?"
"아니."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리키의 뒤로 현관문이 큰 소리를 내며 닫혔다. 술기운이 올라오는지 신발을 벗다 말고 비틀거리길래 지웅이 얼른 뛰어가서 받아줬다가 그대로 둘 다 현관으로 자빠졌다. 무거운 몸을 치우려는데 리키가 위에서 징징거렸다.
"리키 형한테... 매우 서운해요."
"과팅 보내서?"
"옹."
"그럼 형이 다음엔 어떻게 해줄까?"
"um... 가지 말라고, 울어요."
아니, 뭘 그렇게까지 해야 돼...?
어쨌든 다음에 또 과팅 좀 와달라며 비는 전화가 오길래 지웅은 옆에서 리키의 옷소매를 잡고 우는 시늉을 했다. 그 모습을 보던 리키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방황하더니 바로 전화를 끊어버리고는 지웅을 끌어안으며 달래주기 시작했다. 리키 형밖에 없어요, 형 사랑해요, 형 미안해요...
지웅은 그제야 리키가 저번에 취해서 그딴 소리를 내뱉어 놓고 이미 다 까먹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냥 장난친 거라고 말하기도 쪽팔려서 마저 우는 시늉을 했다.
흑흑... 애기랑 연애하기 너무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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