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캐 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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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합작 '덕질의 민족' 봄호 참여작

뮤턴트 A씨는 12번째 회기를 마치고 내가 녹음기를 껐음을 확인했을 때 ‘그 말’을 꺼냈다.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나는 A씨가 신중하고 꼼꼼한 사람임을 알고 있었고, 그가 그토록 의식하는 녹음기가 꺼졌을 때를 골라, 텔레파시가 아닌 발화를 사용하여 입을 뗐음을 눈치챘다. 그는 내게 ‘사업을 제안’하려는 참이었다.

어느 날 사회에 나타난 ‘뮤턴트’들은 큰 파란을 불러일으켰다. 인간을 초월한 힘과 능력을 목격한 비뮤턴트-인간들은 경악하고 공포에 떨었다. 누군가는 이미 그들이 세상을 정복할 것이라 여기고 선망하거나 비난하기도 했다. 도망을 칠까 공격을 할까 전 세계가 우왕좌왕 소란을 피우느라 흙먼지가 하늘을 메웠다.

그러나 나는 그때 작은 기침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흙먼지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로 했다.

2월의 마지막 날 아침, 엘리나 로페즈 세나는 지난 주말에 다녀온 워크숍의 책자를 대기실의 매거진 랙에 꽂고 있었다. 워크숍에서 배운 바를 바로 실천한 것이다. ‘리셉션에 관련 책자를 놓거나 워크숍 수료증을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두는 등, 내담자가 의도를 의심할 필요가 없는 방법으로 자신이 어떤 분야의 전문가인지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라.’ 지시를 따르니 대기실은 한층 더 그럴듯해 보였다.

미국에서 유학 후 모국으로 돌아와 개인상담실을 차린 지 2년 차가 된 엘리나는 스스로 그런대로 잘해나가고 있다고 느꼈다. 대학에서 수련하던 시절에 비해 훨씬 다양한 사람을 내담자로 만나고 자신이 그들을 도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 좌절할 때도 있었지만, 꾸준한 공부의 습관은 엘리나를 잘 일으켜주곤 했다. 닥치는 대로 워크숍이며 컨퍼런스를 찾아다니다 보면 세상을 보는 식견이 자연히 넓어졌다. 선구자들의 권위에 기대면 자신도 내담자들에게 권위자인 양 행세할 수 있기도 했다.

오후 상담 이전에 커피를 한 잔 마시면서 책을 읽을까 하던 참에 차임벨이 울렸다. 리셉셔니스트의 출근 시간이 가까웠던지라 엘리나는 무의식적으로 익숙한 얼굴을 예상하며 고개를 돌렸다가 조금 놀라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은 이마에 큰 화상 흉터가 있는 중년 남성이었다. 핸드폰을 보며 미간을 찌푸리고 있어 험악한 인상을 주었다. 남자는 문을 열고 들어서고도 잠시 핸드폰을 노려보다가, 조금 뒤늦게 엘리나를 발견했다. 엘리나도 조금 뒤늦게 남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어떤 일로 오셨을까요?”

“안녕하세요.” 핸드폰에서 시선을 뗀 남자는 인사를 하며 얼른 표정을 풀었는데, 다시 보니 흉터를 제외하고는 지극히 평범한 얼굴이었다. 미소를 짓는 얼굴은 온화하기까지 했다. “상담을 받고 싶어서요. 어디서 신청할 수 있을까요?”

본래는 리셉셔니스트가 할 일이었고 그가 올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었지만, 엘리나는 선뜻 직접 안내해주기로 했다. 마침 시간이 나기도 했고, 남자가 까다로운 내담자처럼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쪽 방에서 신청서를 작성해주시고, 다 작성하시면 나와주시면 되세요.” 남자는 가볍게 감사합니다, 하고 덧붙이며 방으로 들어갔다. 커피를 마실 시간도 있을 듯했다.

그런데, 리셉셔니스트가 출근을 하고 엘리나의 커피가 다 식을 때까지도 남자는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거의 깜빡 잊을 뻔했을 정도로 조용했다. 리셉셔니스트와 조금 잡담을 나눈 후, 엘리나는 반 잔 정도 되는 식은 커피를 한 번에 넘기고 남자에게 무슨 일이 없는지 확인할 결심을 했다.

우선 가볍게 똑똑, 문을 두드렸다. “필요한 게 있으실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돌아온 대답에 위화감을 느끼기 직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당황한 표정의 남자는 몸을 한껏 부풀리고 당장에라도 뛰쳐나갈 듯이 문을 열어젖혀 놓고는, 엘리나와 마주치자 입술을 깨물고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뒷걸음질을 쳤다. ‘“죄송합니다. 미리 말을 해야 했는데. 안 그래도 이걸 어떻게 적을지 고민하다가…… 이런!”’ 말은 엘리나의 머릿속에 직접 전해지고 있었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입도 벙긋 않고 마주보기만 하는 두 사람을 보고 있던 리셉셔니스트가 카운터 너머로 말을 건 때에야 엘리나는 숨을 삼킬 수 있었다.


“텔레파시 능력이 있습니다. 독심술은 아니고요.” 남자는 빽빽하게 작성한 상담 신청서와 함께 가방에 챙겨왔던 듯한 팜플렛을 하나 내밀었다. 엘리나가 매거진랙에 가득 꽂아둔 워크숍 책자들과 비슷한 것이었다. 첫 페이지에는 ‘당신과 다르지 않은 사람들: 뮤턴트’라는 제목이 다소 촌스러운 폰트로 커다랗게 적혀 있고, 발행처는 ‘뮤턴트들을 위한 집, 뉴 홈’으로 되어 있었다. 남자는 변명하듯 덧붙였다. “뮤턴트, 그러니까 돌연변이라는 말이 부적절할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하지만, 정체성을 표현하기 위해 불가피해서요.” 성실하고 친절한 지적이었지만, 엘리나가 따라잡기에는 다소 앞선 내용이었다.

무어라 입을 떼지 못하는 엘리나를 앞에 두고 남자는 침착하게 엘리나가 신청서와 책자를 모두 읽을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책자에 의하면 뮤턴트는 ‘일반적인 인간이 지니지 않은 특성이나 능력을 지닌 사람들’을 일컫는 총칭이었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도시 전설처럼만 존재하였으나 사실은 오랫동안 실존해왔다. 지금까지 그들의 존재가 지워졌던 이유는 초국가적 특수 부대에 의해 ‘생산’되거나 비밀리에 강제로 징집되어 이용당해왔기 때문인데, 최근 그 부대가 해체되면서 자유를 찾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비교적 눈에 띄지 않는 특성을 가진 여러 뮤턴트들은 언제나 인간 사회에 존재해왔다……. 평소 같았으면 음모론으로 치부했을 내용이었다. 표지에 들어간 귀여운 삽화는 친근감을 주고자 하는 의도였겠으나 위화감을 더 강하게 만들고 있었다. 인지 왜곡, 환각, 현실감각 상실…… 익숙한 증상의 이름들이 눈앞에 아른거렸지만, 머릿속으로 들었던 뚜렷한 목소리는 남자를 섣불리 진단할 수 없게 만들었다. 엘리나는 잠시 남자를 - 눈을 마주치지는 못하고, 시선은 간절하게 모아놓은 손깍지에나 겨우 닿았으나 - 곁눈질하고, 이번에는 신청서를 읽기 시작했다.

이름은 콜린 애덤스(Colin Adams). 나이는 53세. 평범한 정보를 채우는 칸 밑에는 ‘상담 신청 사유’를 묻는 문항이 있었다. 그 문항을 가로지르도록 정갈하게 그어진 두 줄이 눈에 들어왔다. 그 대신, 특정하는 질문도 없이 기나긴 설명이 작은 글씨로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텔레파시의 원리와 조건, 한계에 대한 설명이었다. 보험 계약서의 약관 같은 건조하고 딱딱한 문장들이었다.

엘리나는 아마 그 의도도 보험 계약서의 약관과 비슷하리라 직감했다. 남자는 상담사가 자신을 내치지 못하도록 상담에 기나긴 조건을 붙이고 있었다. 팜플렛의 내용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것이 남자에게 진실인 이상, 어쩌면 남자는 모든 관계에서 끝없이 약관을 작성해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제야 엘리나는 눈을 들어 콜린 애덤스와 눈을 마주쳤다. 애덤스씨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야말로 평범한 얼굴이었다.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지금부터 첫 회기를 시작할게요. 50분 세션이에요.” 애덤스씨는 시계를 흘끗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가능합니다.” “좋습니다. 상담을 녹음해도 될까요?” “…….” “이후에 제가 상담을 준비하거나 공부하기 위해 사용합니다. 3년 후에는 파일을 폐기하고요. 동의하지 않으신다면 녹음은 하지 않겠습니다만, 저는 애덤스씨와의 상담에 성실하게 임하고 싶고, 그러기 위해서는 녹음이 필요합니다.” 애덤스씨는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엘리나는 자신의 짐작에 점점 확신을 얻어갔다. 신뢰를 얻고자 간절하지만, 그 자신은 타인을 신뢰하기가 어려울 것이었다. 그를 놓치고 싶지 않아 얼른 덧붙였다. “원하신다면 텔레파시를 사용하셔도 좋아요. 그건 녹음되지 않으니까요.”

한참의 침묵 끝에 애덤스씨는 녹음에 동의했다.

상1 : 동의하셨으니 녹음기를 켜겠습니다. 자, 이렇게. (녹음기를 탁자에 내려놓음.)

내2 : 네, 잘 보입니다.

상2 : 네. 그럼, 이제, 어떤 일로 오셨을까요?

내3 : (10초 침묵) 어떤 일로.

상3 : 이 상담실의 문을 두드리고 들어오신 이유가 있으실 것 같습니다. 이 일에 A씨의 시간을 할애하겠다고 결정을 내리신 거니까요.

내4 : 아, 그런 의미에서. (침묵) 사실은, 상담을 받게 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음,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마 쉽게 상담을 받으러 오지 않을 것 같아요. 그래서, 뭐, 제가 그들을 대표한다고 할 순 없겠습니다. 저는 그 가운데 그나마 가장 상담을 받는 데에 거리낌이 없는 축에 속할 텐데 말이죠. 그래도, 그래서, 저라도 먼저 상담을 받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아마 절대 나서지 않을 것 같아서.

상4 : 그게, 뮤턴트들에 대한 이야기가 맞을까요?

내5 : (잠시 고민) 네.

상5 : 어째서 그들이 상담을 받으러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제게 생소한 이야기여서, 쉽게 상상이 되지 않네요.

내6 : 그렇군요. (3초 침묵) 그렇겠네요. (5초 침묵) 뮤턴트들은, (긴 침묵) 자신을 인간으로 여기지 않고, 인간에게 공감받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는 것 같아요.

<수 분간 침묵을 지킴. 침묵이 반복된 것을 보았을 때 내담자의 신중한 성격 탓이 크다고 추측되며, 이어진 이야기를 고려했을 때 특히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발상이 들었을 때 오래 고민하는 것으로 생각됨.>

그렇죠, 그러니까, 사실은, 저도 그 점을 반신반의합니다. 뮤턴트 또한 인간이라는 데에는 조금도 의심이 없지만 말입니다. 정말, (침묵) 특수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누군가 그걸 정말로 이해할 수 있을까? 공감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상담에 왔습니다.

상6 : 음, 알겠습니다. 우선, 상담에 대해 좀 더 설명을 드려야 할 것 같군요. 상담이란 개인의 마음을 탐색하여 안정과 성장을 도모하는 과정입니다. 사회에 대해 접근할 때 특정한 개인이 어떤 집단을 대표한다고 가정하는 방식으로 집단을 이해하는 것은 한 방법이 되지만, 적어도 상담에서는 그렇게 접근할 수 없다는 점은 짚어드려야 할 것 같아요. A씨가 여기서 어떤 이야기를 하시든 뮤턴트 전체에 대한 이야기가 될 수는 없겠습니다. 염려하시는 것 같아 부연했습니다. (웃음)

내7 : 그렇습니까. (웃음 후 잠시 침묵)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상7 : 네, 대신, 저는 A씨가 스스로의 마음을 들여다보시는 동안 길을 잃지 않도록 도움을 드리는 역할을 할 겁니다. 상담을 공부한 입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가는 길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A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해하게 된 A씨의 상황이 있겠죠. 그걸 반영해서,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완전히 잘못된 길로 드는 것은 막을 겁니다. 그래도 길을 걷는 건 A씨의 몫이 되겠군요.

내8 : (빠르게) 이해했습니다. 그 부분은 알아보고 왔으니까요.

상8 :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웃음) 자, 뮤턴트의 경험이 인간에게 공감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A씨도 뮤턴트시죠. (그렇죠.) 내 경험을 이해해줘, 공감해줘, 그렇게 들리기도 합니다.

내9 : (5초 침묵) 네.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상9 : 상담을 받고자 하는 이유가 설명이 되네요. 공감받을 수 있기를 기대하고 오신 것 같습니다. 맞을까요?

애덤스씨는 침묵이 길었다. 하지만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몹시 신중하며 주지적이지만, 성찰적인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엘리나는 이때 이미 애덤스씨와의 상담에 희망적인 예감을 품었다. 변화를 바라고 있으며 책임을 질 준비가 된 사람이라면 진행이 다소 더디더라도 분명 진전이 있을 것이라고.

엘리나가 긴 침묵을 기다려 주자, 애덤스씨는 끝내 인정했다. “그렇게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음이 분명해지기 위해 시간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더 걸려도 괜찮습니다.” 가벼운 농담 투로 말하자, 애덤스씨는 바로 웃었다. “네, 맞습니다. 공감을 받고 싶었어요.” 조금은 자신이 없는 듯 작아진 목소리지만, 엘리나를 위해 더 분명하게 말해 준 것이 틀림없었다.


두 사람은 신청서에 적은 객관적인 정보들에 대해서도 자세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애덤스씨는 자신이 팜플렛에서 설명한 ‘특수 부대’에서 생존하고 탈출한 사람임을 인정했지만, 그곳을 탈출한 방법과 과정에 대해서는 “아직은 이야기하기 조심스럽습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가족관계에 소개되어있는 남편 또한, 함께 탈출한 뮤턴트라고 했다. 상담을 받게 하고 싶은 사람 중 한 명이지만, 아마 받지 않을 거라고 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다시금 입을 다물었다. 대신에 화제를 돌려, 그 외에도 소중하게 여기는 뮤턴트 동료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했다. 특히 ‘생산’된 뮤턴트들을 두고는, 크게 한숨을 쉬며 웃었다. 어찌 보면 애정이 담긴 듯, 또 어찌 보면 냉소적인 태도였다. “랩키드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건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또 다급히 덧붙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해하려고 노력할 거예요. 그들도 뮤턴트고, 인간이니까요.”

엘리나는 자신이 애덤스씨를 점점 편하게 느끼고 있음을 자각했다. 애덤스씨가 남편을 향한 사랑에 대해, 동료를 향한 유대감에 대해, 또 그러면서도 존재하는 거리감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가 편안하고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애덤스씨가 침묵할 때면 곧 그 편안함에서 위화감이 다가왔다. 애덤스씨는 엘리나를 의식해서 ‘뮤턴트 고유의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배제하고 있었다. 엘리나는 두려웠다. 두려워하는 자신을 깨달았다. 낯선 존재, 낯선 이야기, 어디에서도 선례를 찾을 수 없는, 누구의 권위도 빌릴 수 없는 주제가 자신을 위축되게 하고 있었다. 그러나 편안한 이야기만 해서는 상담은 성립되지 않는다. 애덤스씨는 자신의 특수한, 아마도 끔찍한, 혹은 이상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그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를 찾아서 상담에 찾아오지 않았는가…….

그래도 그 이야기는 다음 시간부터 하자. 엘리나는 합리화했다. 간단한 신변 조사만으로 50분이 다 되어가기도 하고.

 

상31 : 거의 시간이 다 되어갑니다. 오늘은 이야기를 마무리해야겠네요.

내32 : 그렇군요. 조금 마음이 시원해졌습니다. (웃음)

상32 :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여쭤보고 싶은데요, 상담을 결심한 이유는 설명을 해주셨지만, 결정적으로 상담실 문을 열고 들어온 계기는 또 별개이지 않습니까. 특별히 일이 있으셨을까요?

내33 : 아, 그건, (침묵) 별 건 아닌데요.

상33 : 별 것 아닌 이야기도 좋으니까요. (웃음)

내34 : (웃음) 건물 앞 화단 오렌지 나무에 꽃이 피어 있더라고요.

상34 : (침묵) 오렌지꽃을 보고.

내35 : (침묵 후 웃음) 봄이 왔구나 싶었습니다. 봄이 오면 묵혀뒀던 일을 처리하고 싶어지잖아요. 겨우내 남편이랑 따뜻하게 잘 늘어졌거든요. 그러니까 다음 일을 해야지 생각해서요.

어쩌면 지나치게 추상적인 말이었지만 엘리나는 굳이 더 캐묻지 않았다. 애덤스씨가 얇은 외투를 챙겨 밖으로 나간 후, 엘리나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정말 오렌지 나무에 꽃이 피어 있었다. 조금 이른 개화인지라 아직은 쌀쌀한데도 작은 흰 꽃들은 가지에 꿋꿋이 매달려 있었다. 애덤스씨가 건물을 나서며 잠시 그것들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발걸음을 옮겼다.

과연, 묵혀온 일을 처리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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