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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합작 '덕질의 민족' 가을호 참여작
의미 있는 대상을 상실했을 때 인간은 애도의 과정을 거친다. 소중한 사람을 잃었을 때 그에 대해 생각하기를 멈출 수 없게 되고 새로운 대상에게 흥미를 갖기 어려워하는 것은 정상적인 반응이다. 정서적 안정을 되찾는 데 걸리는 시간은 사람마다 상이하다.
A씨는 남편의 장례식을 치른 후에도 꾸준히 상담에 찾아왔지만, 그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꺼렸다. 물론 나로서는 그가 A씨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알고 있었기에 중요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판단했고, 몇 번인가 다른 화제에서 연결 지어 언급하거나 질문하기도 해보았다. 하지만 A씨는 매번, 아직 준비가 안 되었노라고 단호하게 답했다.
마침내 A씨가 당시의 일을 상담실에 꺼내놓았을 때, 창밖에는 낙엽이 지고 있었다. “4월 11일은, 정말 정신없는 날이었어요.” A씨는 그렇게 입을 열었다.
칼이 삽자루를 놓아주자, 콜린도 함께 놓았다. 막 덮인 무덤을 파헤치던 삽은 맥없이 쓰러졌다. 콜린은 항복에 능숙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항복을 표방한 의사 표명을 자주 했고, 칼은 늘 그 의미를 알아듣고 불쾌하게 여겼다. 삽을 함께 놓은 것은 당신과 상황의 주도권을 두고 더 실랑이하지 않겠다는 의미이고, 그러면서 이렇듯 조심스럽게 발로 땅을 다져놓는 것은 그러니까 이 소동은 여기서 끝을 내겠다는 선언이었다. 칼이 미간을 좁혔지만, 콜린은 이미 돌아서서 앞장서고 있었다. 칼은 당장이라도 다시 삽자루를 쥐고 사정없이 무덤을 파헤칠 수 있었지만 그러지는 않았다.
뮤턴트 뉴홈의 집무실에 칼과 함께 들어선 콜린은 그제야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커피는 블랙으로 괜찮겠죠?” 칼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그들을 따라 들어온 젖은 흙냄새를 맡는 동안, 콜린은 익숙하게 커피를 내렸다. 머그잔 두 개를 양손에 들고나서야 칼을 마주할 수 있었다. “앉아요.” 콜린의 제안에 칼은 무표정한 채로 소파에 앉았다. 낮은 탁상을 사이에 두고 콜린도 마주 앉았다.
커피 향이 죽음의 냄새를 덮었다. 그것이 칼을 불편하게 했다. 따라서 칼은 친절하게 한 번 더 하고자 하는 말을 반복해주었다. “루소는 우리를 기만했습니다.” 그러나 콜린을 따라 들어온 시점에 이 말은 효력을 잃은 채였다. 그 사실을 칼도 알고 콜린도 알았다.
그런데도 칼이 그 명징한 사실을 꺼내어놓은 목적은 콜린을 찌르기 위함이었다.
콜린 애덤스. 코드네임 워키토키. 텔레파시 능력자. 국장 루소의 밑에서 일한, 전투부 소속 만년 준위 뮤턴트. 약 4년간 ‘프로젝트 글로리 와해’를 이루고자 하는 루소의 계획에 조력한 자. 그리고 루소의 마지막 날들을 함께 한 그의 배우자.
너도 알지 않느냐는 물음이다. 루소가 우리에게는 그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라고 종용한 주제에 자신은 감히 내심 죽음을 바랐다는 사실이 기만적이지 않냐고.
콜린은 길게 침묵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칼은 그가 찔러넣은 날이 그에게 깊이 박혔음을 느끼는 동시에 인내심이 닳아갔다. 상처를 입힌다는 목적을 이루었음에도 만족스럽지 않고 초조했다. 어쩌면 칼은 콜린을 상처 입히고 싶은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예 죽이고 싶은 것이었다.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완전히 피를 빼서.
마침내 콜린이 고개를 들어 칼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마지막 날 밤에,” 콜린의 두 눈은 충혈된 채였다. 거기에는 어떤 확신도 총기도 없었다. “알랭은……” 하지만 그 이름을 꺼냈다는 것은 당신이 모르는 루소를 들먹여 우위를 점하겠다는 정치적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칼은 다시 주먹을 쥐었다. 그 손은 콜린의 코뼈를 부러뜨릴 수도 있고 다시 뛰쳐나가 삽자루를 쥘 수도 있었다. 칼은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다. “죽기 싫다고 했습니다.”
칼은 콜린을 보았다. 콜린도 칼을 물끄러미 보았다.
“누워서, 울면서, 프랑스어로 무슨 말을 했어요. 잠꼬대도 아니고 또렷하게 말하더라고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잊어버릴 수도 없었습니다. 어제 겨우 틈이 나서 사전을 찾아봤는데, 그렇게 번역되더라고요. 죽고 싶지 않다고.” 콜린은 머그잔을 양손으로 쥐었지만, 커피를 입에 대지는 않았다. 어딘가에 매달리는듯한 동작이었다. “어이없는 일이죠. 마지막 4개월 동안, 알랭은 죽음을 바란다는 사실을 숨기지도 않았거든요. 그 사이에 딱 한 번 싸웠는데, 그 이유도 나한테 자기가 죽거든 재혼을 하라고 말해서였어요. 결혼한 지 며칠이나 됐다고 남편에게 그런 말을 하냐고 화를 냈더니, 내가 자기에게 묶여서 삶의 행복을 잃어버리는 걸 바라지 않는다고 울더라고요.”
거기까지 말하고 콜린은 한 번 웃었다. 10년은 무슨, 20년은 늙은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루소의 몫까지 세월을 거친 듯한, 아니, 이제야 루소를 따라잡은 듯한. 울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무덤덤할 수도 없는, 감정이 복잡한 것과는 별개로 감추는 기색이 없이 솔직했다. 칼은 그런 콜린 애덤스의 모습이 낯설었다. 칼이 아는 콜린은 좀 더, 감정을 누르고 이성적으로 대화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항상 의심하면서도 판단을 내렸다. 불안하고 미숙했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콜린은 물었다. 여전히 주먹을 쥐고 있는 칼의 손을 또렷하게 응시하고, 다시 칼의 얼굴을 보았다. “루소는 죽고 싶었던 걸까요, 아니면 살고 싶었던 걸까요.”
칼은 루소의 얼굴을 떠올렸다.
부드러운 요람 대신 배양액 속에서 그의 얼굴을 보았던 기억은 아마 만들어진 기억이다. 어쩌면 어떤 실험 직후의 기억과 뒤섞인 것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루소는 매번 죽음으로부터 일어난 칼의 어깨를 단단히 잡았다. 때로는 칼의 부활에 감격한 듯 눈물지으며 웃기도 했다. 그리고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아무리 괴로워도 살아야 한다고. 그것은 저주였다. 그것이 부자지간의 저주였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애덤스씨, 나는 알랭 베르나르라는 사람을 모릅니다. 내가 모르는 사람의 얘기는 하지 마십시오. 중요한 건 루소가 삶을 종용했다는 사실입니다. 악착같이 생존할 것을 강요했단 말입니다.”
“루소가 알랭 베르나르예요.” “아니, 아닙니다.” “루소가 알랭이고 알랭이 루소입니다. 그렇게 전제하고 얘기하죠. 루소와 알랭이 다른 게 아니라, 우리가 루소를 본 관점이 다른 겁니다.” “…….” “루소는 죽고 싶었던 걸까요, 아니면 살고 싶었던 걸까요.”
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콜린이 대신 말했다. “지금이라도 무덤을 파내서 루소를 일으켜 세울 수 있다면, 그래요, 어쩌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죠. 글로리의 연구 기록을 뒤지면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기술도 있을지도. 아니면 그런 능력을 가진 뮤턴트가 존재할 수도 있고. 아니지, 우리는 이미 겪지 않았습니까. 시간을 되돌리고, 시간을 멈추는 뮤턴트를요. 죽음을 우회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을 겁니다. 그런데…… 알랭 베르나르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그가 원하는 바를 들어주고 싶습니다. 다만 정말 모르겠습니다. 알랭은 죽기를 바랐던 걸까요, 살기를 바랐던 걸까요. 나는 이 질문에 갇혀버렸습니다. 마지막에 잠든 알랭의 얼굴은 아무런 감정도 담지 않았었거든요. 답이 나오지 않는군요. 너무 많이 고민한 나머지 답을 주지 않고 떠난 알랭이 미워질 지경입니다. 미워하기에는 너무 사랑하지만요. 그러니까 칼,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칼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콜린은 그런 칼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두 사람은 늘 이런 식이었다. 탁상의 중앙에 점을 찍고 대칭을 이루는 자리. 아무리 닮았다 한들, 위치에 따라 보는 것은 정반대가 된다.
“그러니까, 그래요. 루소가 우리를 기만했습니다.”
콜린은 항복에 능숙했다. 두 손을 들고 내가 졌노라고 선언했다. 종전선언의 반대편에 서서, 상대는 잔뜩 힘주어 쥐었던 주먹을 허망하게 내려놓을 수밖에 없다. 칼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콜린은 그 뒷모습을 지켜보았지만 따라나서지는 않았다. 칼이 무덤을 파헤치러 돌아가지는 않을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우리는 평생 장례를 치를 것이다.
루소가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누군가는 두 눈을 뜨고 이 시대를 살아가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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