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반하는 순간
“아이하라네 누님은 집에 자주 안 계시네.”
이제는 아이리네 현관에 들어오는 것이 익숙해진 쿠로오가 말을 건넸다. 조부모님과 아버지와 함께 사는 쿠로오네와 달리 아이리네는 언니밖에 없는데, 그 언니도 주말마다 외출하는 일이 잦아 보였다. 물론 그래서 공부하긴 좋았지만, 직장인인데 주말에도 늘 외출하는 건 힘들지 않나. 아이리는 그 말에 늘 그랬다는듯 태연히 대답했다.
“아아, 우리 언니? 바쁘지. 엄청 외향적이라 약속도 많고, 사회인 배구부도 해.”
“진짜 바쁘시네.”
“거기에 데이트도 해. 사내연애라 매일 보면서 말이지.”
체력이 대단하다니까……. 그렇게 중얼거리는 아이리를 보며 쿠로오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러고보니 아이하라는 남자친구 없어?”
“없지. 쿠로오 군도 알잖아, 난 집-학교-집밖에 안 다니는걸.”
“아이하라는 딱히 다른 곳에 안 가도 남자친구 사귈 수 있을 것 같은데.”
쿠로오는 아이리가 전학온 이후 관심을 보이던 아이들이나, 그녀의 신발장에 들어있던 러브레터들을 떠올렸다. 그게 전학 온 지 며칠이 지나서였지. 얼마 안됐던 것 같은데. 아무튼 아이하라 아이리가 인기있다는 사실은 모를 수가 없었고 그래서 얘가 남자친구가 없는 게 이상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던 것이다. 안 그래? 쿠로오는 인기 많은 것을 치켜세우듯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아이하라는 썩 달갑지 않은 표정이었다.
“별로…… 연애 같은 건 관심 없어.”
어, 뭔가 잘못 이야기했나. 눈이 웃고있는 걸 보면 단순히 민망해하는 건가 싶지만 목소리가 묘하게 힘빠져 있었다. 하긴, 이런 질문 많이 받아서 질릴지도. 쿠로오가 살짝 눈치를 살필 때쯤, 그 기색을 눈치챈 아이리가 괜히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 생각할 여유 없어, 곧 수험생이잖아 수험생! 공부해야지.”
“아무렇지 않게 폐부를 찌르는 말을…….”
“그러니까 이제 공부하자.”
그 말대로였다. 방학 중엔 부활동 시간이 늘어난 만큼, 연습이 없을 땐 공부에 몰두해야 했고, 쿠로오와 아이리는 농땡이 피우는 일 없이 열심히 공부했다. 다행히 아이리와 함께 공부하는 것은 쿠로오가 어렴풋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 그녀의 집은 공부하기에 딱 좋은 환경이었고, 아이리는 모르는 걸 물어보면 아주 쉽고 친절하게 척척 알려주었다. 교사가 꿈이라던 그녀는 가르치는 데 꽤 재능이 있어보였다. 사실 그녀는 공부가 천직같다고 할까.
‘애초에 저렇게 공부하는 사람을 본 적도 없다고.’
몇 시간을 꿈쩍도 않고 반듯한 자세로 집중하는 걸 볼 때면, 혀를 내두르게 됐다. 빼곡히 정리된 스케줄러, 끊기지 않는 집중력이나 쉴틈없이 움직이는 손이라던가. 그런 걸 보고 있으면 나도 열심히 해야지, 하는 생각이 들어 좋았다.
‘같이 한다고 하길 잘했어.’
먼저 같이 할래 물어봐준 아이하라 아이리에게 고마울 정도였다. 틀린 문제가 확연히 줄어든 문제집을 보며 쿠로오가 만족스럽게 웃을 때였다.
꼬르륵.
쿠로오의 배에서 민망한 소리가 났다. 윽, 하필 이렇게 크게……. 쿠로오가 얼굴을 붉히자 눈이 마주친 아이리는 그가 민망하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
“벌써 저녁 시간이네. 뭐라도 먹자.”
“밖에 나가서?”
“그냥 집에서 먹자. 마침 재료도 넉넉하고. 내가 해줄게. 특별히 싫어하는 음식 있어?”
“딱히 그런 건 없는데…… 아, 도와줄게.”
“그냥 있어. 손님이잖아. 간단하게 오므라이스 한다? 아쉽지만 지금 생선은 없거든-”
생선 아니어도 잘 먹거든. 웃으며 따라 일어난 쿠로오가 부엌으로 향했다. 아무리 손님이라지만 뒤에서 가만히 앉아있기 민망했기 때문에 쿠로오는 괜히 그녀의 곁에 가 기웃거렸다. 통통 칼질하는 모습이 꽤 익숙해 보였다.
“아이하라는 요리도 잘 하는구나.”
“언니가 요리를 못해서 음식은 내 담당이거든. 그보다 앉아있으라니까.”
“뭐 도와줄 거 없나 해서. 가만히 있으니까 불편해.”
“음……. 그럼 이거 파기름 낸 다음에 나머지 재료 다 넣어서 볶아줘.”
“좋아. 파를 먼저 볶네?”
“한꺼번에 넣어도 상관은 없는데, 그게 더 맛있어. 소금이랑 후추도 좀 넣어줘.”
“네네-”
이럴 일이 잘 없어서일까, 나란히 서서 음식을 하고 있으니 뭔가 재밌다는 생각도 들었다. 완성한 오므라이스는 꽤 그럴듯한 모양이었고, 침을 꼴깍 삼키고 있을 때, 아이리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케찹 서로 뿌려줄까.’ 장난스러운 미소에 쿠로오 테츠로는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뭐야, 도깨비?”
“고양이인데.”
“에.”
“그러는 넌 뭐 그렸는데!”
“무난하게 스마일!”
“귀엽네……. 역시 이건 내가 먹을까.”
“아냐, 나 줘. 고양이가 더 어려워서 그래. 다시 보니 귀여워.”
아이하라는 그러고 정말 그 고양이를 헤쳐 먹기 아쉬워했다. 가장자리부터 야금야금 긁던 숟가락이 더이상 갈 곳이 없어졌을 때가 돼서야 중앙 부분을 떠먹은 아이리가 일순 표정을 찡그렸다.
“케찹 비율 너무 많아!”
“그렇겠지!”
쿠로오는 한껏 얼굴을 구긴 아이리의 모습에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게 그냥 먹지. 조금이라도 싱거워지라고 제 밥과 계란을 덜어주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웃기지. ‘짜고 셔…….’ 쿠로오는 그렇게 중얼거리는 아이리를 보며 다시 한 번 픽 웃었다.
‘귀여워.’
순간적으로 스친 생각에 숟가락에서 밥이 툭 떨어졌다. 방금 뭐라고……? 귀엽다니, 게다가 왜 그렇게 웃는데?! 쿠로오의 머릿속이 시끄러웠다. 아니 아니. 뭐, 귀엽다고 생각할 수는 있지. 진짜 객관적으로. 봐봐, 아이하라야 원래 귀엽게 생겼고……. 쿠로오의 시선이 아이리에게 다시 가 닿았다가, 움찔하고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솔직히 순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귀엽다는 건 여러 의미가 있으니까. 음음, 그냥 그런거야. 괜히 변명을 덧붙여가며. 쿠로오 테츠로는 그렇게 덮어두었지만, 분명 어떤 감정은 안쪽에서 희미하게 형체를 갖춰가고 있었다.
*
그 이후로 며칠, 쿠로오는 아이리를, 정확히는 그녀를 바라보는 자신을 돌아보았다. 걱정했던 게 무색하게, 쿠로오와 아이리의 분위기는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방학이 끝날 때까지, 같이 공부를 해도 아무 일 없었고, 쿠로오도 평소처럼 아이리를 대할 수 있었다. 거봐, 그때만 잠시 그런 거 뿐이라니까. 쿠로오 테츠로는 내심 안심했지만, 덮어둔 감정은 얼마 안 가 고개를 들었다.
같이 공부하는 게 일상처럼 굳어진 쿠로오와 아이리는 3학기가 개학하자마자 찾아온 시험 기간에도 같이 공부하고 있었다. 조금 날이 춥다는 걸 제외하면, 평소와 별 다를 것도 없었던 그날. 좀 다른 게 있다면…….
“어서 와…….”
문을 열어줄 때부터 아이리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는 것이다. 척 보기에도 피곤해 보이는 얼굴에 쿠로오가 당황하며 물었다.
“너 괜찮아? 잠 못 잤어?”
“응, 몸이 별로 안 좋아서 잠을 설쳤어.”
“그럼 오늘은 그냥 쉬지 그랬어.”
“아냐, 시험도 얼마 안 남았고. 딱히 아픈 것도 아닌데 컨디션 핑계대고 쉬면 계속 쉬게 되니까. 낮에도 그냥 공부했어.”
“그래도, 낮에 했으면 저녁엔 좀 쉬는게…….”
“괜찮아, 할 수 있어.”
아이리를 알게 된 이후로 가장 많이 들은 말을 꼽으라고 한다면, ‘괜찮아’일 것이라고 쿠로오는 생각했다. 남들한텐 유하고, 다정하고, 상냥하면서 자기 자신한테 엄격한 면이 있단 말이지……. 보는 입장에선 대단하지만, 이렇게 매사에 빠짐없이 열심이면 분명 지칠 텐데. 아이리는 안 좋은 낯빛으로도 꿋꿋이 앉아서 책을 폈고, 미간을 좁히면서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쿠로오는 어쩐지 속이 불편해졌지만, 왜 그런 기분이 드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무리였는지, 시간이 지나자 아이리도 조금씩 졸기 시작했다. 고개를 흔들어도 보고, 눈을 비비는 아이리를 본 쿠로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안되겠다, 깨워줄테니까 잠깐이라도 눈 붙여.”
“미안, 그럼 조금만…….”
그러곤 그대로 책상에 엎드려 금방 기절하듯 잠들어 버렸다. 너네 집인데 침대에 가서 편하게 자지……. 뒤늦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깨우기엔 너무 피곤해 보여서, 쿠로오 테츠로는 조용히 두리번거리다 담요 하나를 가져와 어깨에 살며시 덮어주었다. 으음, 하고 고개를 돌리길래 의자도 다시 조심조심 빼며 옆에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고 앉아서 다시 공부했다.
조금 시간이 지나고, 기지개를 쭉 피던 쿠로오는 슬슬 깨울까, 하고 아이리를 바라보았다. 옆에선 일정하게 새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깨우기 미안할 정도로 잘 자네……. 쿠로오는 아이리 쪽을 보고 몸을 책상에 엎드렸다. 긴 머리가 얼굴을 덮고 있는 것이 답답해보여 슬며시 넘겨주니 가려졌던 얼굴이 드러났다. 조금 창백한 낯빛에, 피곤해 보이는 눈가, 감겨있는 눈, 긴 속눈썹…….
‘얘는 이런 순간에도 예쁘네.’
그런 생각이 자연히 들고야 마는 얼굴을 하나하나 찬찬히 바라보았다. 이런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인데. 이래도 예쁘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이하라는 뭐랄까.
‘웃고 있을 때가 더…….’
어쩌다 아이리가 활짝 웃으면, 쿠로오는 종종 형용하기 어려운 기분이 들었다. 워낙에 해사하게 웃어서 그런가……. 보는 사람도 기분이 좋아지게 하는 그런 게 있지. 쿠로오는 천천히 눈을 끔뻑거렸다. 몸을 엎드리고 있으니 점점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나도 진짜 잠깐만 눈 붙일까……. 감기는 눈을 그대로 둔 채 쿠로오도 슬쩍 쪽잠을 청했다.
눈을 떴을 땐, 이미 하늘이 다 컴컴해졌을 시간이었다. 10분 정도만 눈 붙이려고 했는데! 방이 따뜻해 노곤해진 탓인지 시험 공부의 피로가 누적된 건지, 생각보다 오래 자버렸다. 시간을 보고 충격받은 쿠로오가 다급하게 아이리를 흔들어 깨웠다. 그제야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킨 아이리가 뻐근해진 허리를 붙잡았다.
“헉, 시간이…….”
“미안, 깨워준다고 해놓고 나도 깜빡 잠들어서.”
“아냐, 내가 피곤해서 정신 못 차리고 잤지 뭐……. 오늘은 얼른 챙겨서 가.”
쿠로오는 가방에 제 책과 필통을 집어넣었다. 아이리도 물건을 정리하려다 어깨에 둘러진 담요를 뒤늦게 눈치채고 매만졌다.
‘쿠로오 군이 덮어준 건가?’
아이리는 짐을 싸는 쿠로오를 보며 고마운 동시에 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공부하자고 해놓고 계속 자버린 꼴이니까. 이럴 거면 그냥 쉴 것이지, 괜히……. 하루를 날린 기분이 들어 쿠로오를 배웅하러 현관까지 가는 길에도 기분이 계속 좋지 않았다.
“어”
현관문을 연 쿠로오가 짧은 소리를 내며 뒤를 돌았다. 손가락으로 깜깜한 바깥을 가리킨 쿠로오가 말했다.
“눈 온다!”
어? 정말? 아이리도 현관 슬리퍼를 대충 신고 밖으로 나갔다. 문 밖으로 나서자 마자 서늘한 바람이 훅 불어와 자다 일어나 따끈따끈한 얼굴에 찬 공기가 닿았다. 까만 하늘에서는 하얀 눈이 설탕 뿌려지듯 떨어지고 있었다.
“정말 눈이네…….”
쿠로오의 옆으로 걸어나온 아이리가 손을 펼쳤다. 조그만 조그만 눈송이는 그녀의 손에 닿자마자 스르르 녹아 없어졌지만, 아이리는 그마저도 좋은지 웃으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쿠로오는 그런 아이리 쪽으로 눈을 돌렸다. 겨울 바람이 스치고 간 볼이 붉었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눈은 반짝반짝 빛났다. 오늘 본 얼굴 중에 제일 활기차 보이는 얼굴이었다.
‘이런 거 좋아하는구나.’
그렇게 아이리를 빤히 쳐다보다가, 그녀가 고개를 돌려 쿠로오를 바라보자 그대로 눈이 마주치곤.
“예쁘다, 그치?”
아까 전 떠올리던, 활짝 웃는 아이리의 얼굴을 목도했다. 머릿 속에서 덧그리던 모습보다 생생하게, 살짝 접힌 눈, 올라간 입매, 볼록해진 하얀 볼. 그런 것들을 하필 이 순간에 마주하고 만 쿠로오는…….
“……응.”
자신이 지금 이 애에게 반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도 없이 깨닫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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