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

2.

배구를 좋아해

💌 by 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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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여행 직후랬지 분명.’

빠뜨린 물건은 없는지 살펴보던 여학생이 고개를 들어올리고 잠시 생각했다. 전학 첫날이 수학여행 직후라니……. 분명 다들 수학여행 때 있었던 일로 떠들고 있을텐데. 잘 어울리지 못할까 걱정이 조금 되었다.

“아이리, 전학 첫날이라 긴장한 거야?”

방문 쪽에서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연갈색 머리가 등 뒤로 스르르 흩어지고, 옅은 분홍색 눈이 문에 비스듬이 기댄 사람을 향했다.

“언니, 아직 출근 안 했어?”

“같이 나가려고 했지. 그런데 너 보니까 학교까지 데려다줘야 할 거 같은데?”

“또 어린애 취급해.”

놀리듯 말하는 제 언니에 아이리는 눈을 가늘게 떴다. 8살 터울인 언니는 종종 이렇게 그녀를 애취급 할 때가 있었다. 물론 나이 차이가 꽤 나는 건 맞고, 집에서 막내인 것도 맞지만.

“고등학교 2학년인데.”

“고등학생이면 어린애지!”

“머리 헝클어져!”

“넌 좀 더 어리광부릴 필요가 있어. 애처럼 굴어야 할 때 어른처럼 군단 말야.”

“집에선 꽤 어리광 부린다고 생각하는데…….”

억울하다는 듯 웅얼거렸지만, 언니는 그 말을 전혀 들어주지 않는 눈치였다. 부모님이 일 때문에 급하게 미국으로 가시고, 아이리는 직장인인 언니와 함께 도쿄 외곽에 살게 되었다. 실은 혼자 살더라도 다니던 학교에서 졸업까지 다니고 싶었지만…….

“혼자 사는 건 좀. 아직 어리잖니.”

“으음, 위험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건 아니지. 혹시라도 혼자 살다가 무슨 일 생기면 어떡해.”

가족들이 다 반대를 해서 (솔직히 엄마는 열심히 설득하면 될 것 같았는데 아빠랑 언니가 택도 없어 보였다) 그냥 언니가 살고 있던 집에 들어와 살고, 학교는 전학을 가기로 했다. 그리고 오늘이 새 고등학교로 처음 등교하는 날이었다.

“걱정하지마. 너야 늘 친구 잘 사귀잖아.”

“그렇긴 한데, 학교를 다니다 도중에 전학하는 건 처음이라 그래.”

“괜찮아, 괜찮아. 다 똑같애-”

동생의 어깨에 손을 두른 아야메가 그냥 하던 대로 하라며 그녀를 데리고 집밖으로 나왔다. ‘잘 다녀오고!’ 자신이 과거 배구부였다는 걸 잊은 건지, 아야메는 힘차게 아이리의 등을 두들겼다.

‘아파!’

순간 눈물이 찔끔 나올 뻔 했지만, 이러니 저러니 해도 신경써주는 언니가 있다는 것은 꽤 기꺼웠기 때문에 아이리는 반대 방향으로 출근하는 언니를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이따 저녁에 봐!’ 그녀의 언니는 그 웃음을 보고서야 마주 손을 흔들고 뒤돌아 갔다.

*

잘 어울릴 수 있을까, 했던 걱정이 무색하게, 그녀는 첫날부터 아이들에게 잔뜩 둘러쌓여 있었다. 어디서 왔어? 왜 지금 전학 온 거야? 전의 학교에서 수학여행 다녀왔어? 폭격 수준으로 쏟아지는 질문에 오히려 기가 눌릴 정도였다. 아이리는 몰리는 이목이나, 관심, 시선 같은 것들이 익숙한 사람이었지만 전학생이라는 특수한 상황까지 붙으니 아무리 그녀라고 해도 조금은 피로했다. 며칠 지나면 평범해지겠지……? 등교 이틀차, 아이리가 그런 생각을 하며 조금은 무거운 발걸음을 옮길 때였다.

어, 하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 아이리는 자신과 똑같은 교복을 입고 있는…… 머리 모양이 좀 독특한 남학생을 발견했다. 우리반…… 은 아닌데. 그래도 날 알아서 부른 거겠지? 모르는 얼굴이라 조금 의아했으나 아이리는 일단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키가 되게 크고…… 좀 무섭게 생겼다.’

저 정도면 거의 190 될 것 같은데. 문짝만한 남자애가 인상도…… 순하다고는 절대 말 못할 얼굴이다보니. 살짝은 움찔하게 되었다. 하지만 가는 길도 쭉 겹치고, 학교까지 가는 길에 계속 어색하게 걸어가기는 싫으니까. 아이리가 말을 붙이려던 순간, 남학생이 먼저 자연스럽게 물어왔다.

“5반에 왔다는 전학생이지? 이름이 뭐야?”

“맞아, 이름은 아이하라 아이리. 너는?”

“쿠로오 테츠로야. 나는 4반.”

“옆반이네. 그런데 내가 전학생인 건 어떻게 알았어?”

“못 보던 얼굴이기도 하고, 어제 뒷모습 봤거든. 그런데 옆집인줄은 몰랐네. 분명 직장인 누나 한 분만 계셨는데.”

“부모님이 일 때문에 외국으로 가셔서 언니 집에서 같이 살게 됐어. 그래서 전학도 온 거고.”

첫인상과는 달리 막상 이야기를 나눠 본 남학생은 대화하기 편한 스타일이었다. 옆집, 옆반, 물리적인 거리도 가까웠기 때문에 대화할 거리 또한 많았다. 그리고 쿠로오의 부활동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을 때, 아이리는 익숙한 주제에 반색했다.

“그보다 쿠로오 군, 일찍 등교하네.”

“아침 연습이 있어서……. 넌 왜 이렇게 일찍 가는데?”

“학교 일찍 가서 공부하는 거 좋아해서. 조용하고, 집중도 잘 되잖아.”

“와- 성실하네.”

“아침 연습이면, 부활동?”

“응, 나 배구부거든.”

“우와, 배구부야? 나도 전학 오기 전에 배구부였는데!”

“정말? 선수?”

“아니, 매니저. 중학교 때부터 쭉 매니저였어.”

“엄청 오래했네. 배구 좋아하나봐.”

“응! 좋아해. 언니가 배구를 했어서 어릴 때부터 많이 봤거든. 뭔가 반갑다. 배구는 언제부터 했어?”

배구에 진심인 두 사람의 입에서 ‘배구’가 나온 순간부터, 이야기는 한 번도 끊길 줄 몰랐다. 오늘 처음 제대로 만난 상대지만, 쿠로오와 아이리는 눈 앞의 아이와 대화하는 게 즐겁다고 느꼈다. 대화가 잘 통해. 그렇게 생각하며 아이리는 조금 무섭다는 첫인상을 고쳤다. 한참을 떠들다 보니, 어느새 교실 앞이었다.

“수업 잘 들어, 쿠로오 군.”

“아이하라도.”

반으로 들어가는 뒷통수에 ‘뭐야 너 쟤랑 친해?’ ‘언제부터?!’ 같은 목소리들이 얹어졌다. 그 소리를 들으며 아이리도 작게 웃으며 교실로 들어섰다. 아이하라 무슨 좋은 일 있어? 소리를 듣고서야 자신이 학교 오는 내내 웃었다는 것을 다시 상기하곤.

“아냐, 별 일 없어.”

옆집이니까 내일 아침에도 마주칠 수 있으려나, 생각했다.

*

“쿠로오 군, 안녕.”

“오- 이정도면 짜고 나오는 건데.”

“너도 15분에 나오는구나?”

쿠로오와 아이리는 처음 함께 등교한 날 이후로 거의 매 등굣길마다 마주쳤다. 자주 마주치다 보니 이제는 등 뒤에서 한 쪽이 튀어나와 인사하더라도 익숙하게 인사했고, 같이 떠들며 가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하지만 둘은 하교 시간에는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아이리는 소속된 부활동이 없어 일찍 하교했고, 쿠로오는 배구부 연습을 꽉꽉 채워하고 돌아왔으니까. 방과후엔 늘 부활동이 있었던 아이리는 이른 귀가가 새삼 어색했으나, 지금에 와 새로 들어가기엔 시기가 많이 애매했다.

‘기말 끝나면 바로 겨울 방학이고, 3학년까지 얼마 남지도 않았으니.’

1년 만에 부를 나갈 신입부원을 반길 사람이 어딨을까. 3학년이면 대하기도 불편할 거고, 선생님들도 입시에 집중하라고 하시겠지. 하지 않을 이유는 이렇게나 잔뜩인데, 그래도 아이리는 문득 어떤 것들이 그리웠다. 스프레이 파스 냄새, 체육관 바닥 특유의 마찰음, 경기장의 분위기. 그런 것들이…….

‘아.’

바스락. 문제집이 담긴 비닐봉투의 소리가 아이리의 상념을 깨뜨렸다. 그래. 입시가 코앞인데. 아이리는 배구 쪽으로 진로를 정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더더욱 핑계거리가 없었다. 이전 학교에서 예기치 못하게 배구부를 일찍 나오게 됐기 때문에 아쉬움이 괜히 더 커진 것 같았다. 더이상 내가 그 안에 섞여 배구를 할 일은 없겠구나. 내 배구는 그게 마지막이 됐구나 하는…….

‘그래서 저렇게 운동부 애들을 보면 부럽다는 생각이 드는 거겠지.’

반대편에서 오는 두 학생이 입은 붉은 져지가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저거 네코마 배구부 져지였던 것 같은데. 아이리는 져지와 가방만 멍하니 바라보다, 뒤늦게 보고 있던 사람이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쿠로오 군?’ 퍼뜩 정신을 차리고 불렀을 땐, 쿠로오도 그녀를 발견한 후였다.

“어, 아이하라!”

“지금 부활동 끝나고 오는 거야?”

“응, 연습 끝나고. 아이하라는 어디 다녀와?”

“뭐 좀 사오느라. 그런데 이쪽은…….”

쿠로오의 곁에는 금색 단발의 남학생이 함께 있었다. 우리 학교 배구부는 머리 모양이 튀는 사람만 있는 걸까?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아이리가 바라보자 쿠로오가 익숙하게 그를 소개했다.

“내가 이야기했던 옆집 친구.”

“아, 어릴 때부터 친구라던? 그럼 나랑은 옆옆집이네. 난 아이하라 아이리야. 넌 이름이 뭐야?”

“코즈메 켄마.”

“코즈메 군이구나. 반가워.”

생글생글 웃는 낯을 보며 켄마는 ‘친화력이 엄청 좋은 타입.’ 하고 짧게 생각했다. 쿠로오의 입을 통해 몇 번 이야기는 들어는 본 사람이었다. 전해들어 알고 있는 건 전학생, 쿠로오의 옆집이라는 것, 배구를 좋아한다는 것 정도지만. 켄마는 조금 전 지금과는 전혀 다른 아이리의 표정을 떠올렸다. 묘하게 서럽고, 분한 얼굴? 뭐였을까 그건. 잠시 호기심은 일었지만, 켄마가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부러워, 이거 아까 내가 간 편의점에는 다 떨어지고 없었는데!”

“난 오면서 하나 먹었는데 이거 줄까?”

“아냐, 됐어. 네가 산 거잖아.”

“그럼 네가 사온 것 중에 하나 바꾸는 건?”

“이건 문제집인데요.”

“아. 취소 취소.”

어느새 옆에서는 두 사람이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이 둘…… 만난지 얼마 안 된 걸로 아는데 과하게 죽이 잘 맞지 않나? 어쩐지 기가 빨린 켄마가 입을 열었다.

“집 다 왔는데, 안 들어가?”

“맞다. 들어가야지.”

“그래, 얼른 들어가서 쉬어.”

다음에 또 봐. 그렇게 손 흔드는 것을 마지막으로, 아이리와 켄마는 짤막하게 인사를 나눴다.

집으로 들어온 아이리는 사온 문제집을 대충 책상에 올려두고 침대에 털썩 누웠다.

‘나 좀 이상한 표정이었을 것 같은데.’

아이리가 몸을 뒤척여 돌아누웠다. 부럽다 못해 부활동을 하는 걔네가 조금 질투나서……. 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정확히 떠오르지도 않았지만, 감정이 드러나는 얼굴이긴 했을 것이다. 아이리는 고개를 돌려 달력을 보고 숨을 푹 내쉬었다. 기말고사를 표시해 둔 동그라미가 선명했다.

‘딴 생각 그만하고…….’

몸을 일으켜 책상에 가 사온 문제집을 꺼내 펼쳤다. 네코마에서의 첫 시험이 3주 남은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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