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

6.

불편한 오해

💌 by 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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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방학. 쿠로오는 길지 않은 이 기간이 유독 더디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침대에 드러누워 멍하니 천장만 올려다 보다 요사이 내내 제 머릿 속을 메운 한 사람을 떠올렸다.

‘집도 옆집이고, 한 번쯤 우연히 마주칠 법도 한데.’

방학이 시작되고, 쿠로오는 아이리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학교에 갈 때는 그래도 타이밍 좋게 자주 마주쳤는데, 방학 때는 그런 우연도 없고. 그렇다고 만나자 할 핑계도 딱히 없었다. 이것저것 머리는 굴려보았지만 다 너무 사심있어 보이는 것 같아서……. 쿠로오는 몸을 뒤척이며 끙, 하고 앓는 소리를 한 번 냈다. 이럴 때마다 제가 하고 있는 것이 짝사랑이라는 실감이 났다. 나는 보고 싶어서 이 궁리 저 궁리 하는데 상대는 아무 생각 없고, 부담스럽게 만들어서 들켜도 안 되고…….

‘어렵네…….’

들켰다가는 절대 지금 같은 거리감으로 못 있을 거라는 건 알았다. 아이리가 고백을 거절한 사람한테 어떻게 선을 긋는지 보기도 했고……. 언젠가 연애 같은 건 관심 없다 말하던 아이리의 목소리가 요즘따라 자주 생각났다. 달갑지 않아하는 그 표정까지 아주 생생하게. 물론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있는 것보다야 낫지만, 딱 잘라 관심 없다 말하는 데에는 결국 쿠로오 자신도 포함이었다.

“왜 관심이 없는 건데……!”

또 한 번 몸을 뒤척인 쿠로오가 베개에 얼굴을 잠시 묻었다가 긴 한숨을 뱉었다. 이 와중에도 결국은 보고 싶다는 생각 뿐이다.

“뭐 하고 있으려나…….”

창문을 열면 바로 보이는 방에 살고 있는 애를 못 봐서 이러고 있다니. 건너편 꼭꼭 닫힌 창문과 하얀 커튼이 야속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 방학을 보내면서 마음 고생을 해서일까, 개학날부터 쿠로오에게는 예상치 못한 행운들이 쏟아졌다.

새 학년, 새 학기 첫 날. 약간 들뜬 발걸음으로 대문을 나서자마자 본 것은 만개한 벚꽃나무 아래 서있는 아이리였다. 그건 순간 놀라 인사를 건네는 것도 잊을 만한 풍경이었다. 아무 말 못 하고 서있는 쿠로오를 향해 아이리가 고개를 돌렸다. 벚꽃과 닮아있는 눈동자가 따라 그를 향했고 이내 그녀가 살풋이 웃었다.

“아, 나왔다.”

그 모습을 본 쿠로오의 심정이 어땠는지는 차마 짧게 줄여 이를 수 없으나, 그래도 가장 짧게 줄인다면 심장이 떨어지는 감각일 것이다. 힘들다고 했던 거 다 취소합니다. 아니, 심장이 힘들긴 합니다. 누구에게 말하는지 모를 말을 속으로 잔뜩 내뱉은 쿠로오가 벌렁이는 가슴을 가다듬고 물었다.

“나 기다린 거야?”

“응, 개학 첫 날이니까 같이 갈까 해서.”

사실 쿠로오는 아이리라면 오늘도 일찍 나오지 않을까 싶어 아침 연습도 없는 날 일찍 나온 것이었다. 우연이라도 만들어보고 싶어서 그런 건데 아이리가 기다리고 있었다니. 일찍 나와서 정말 다행이다. 쿠로오는 마음 속으로 두 손 모아 그렇게 말했다.

행운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내려가지 않는 입꼬리로 한참 떠들며 도착한 학교에서는 새 학년 반 배정표가 붙어있었다. 쿠로오와 아이리는 나란히 서서 각자의 이름을 찾았고, 특히 쿠로오는 자기 반을 확인하자마자 같은 반에 아이리의 이름이 적혀있지는 않은지부터 살폈다. 그리고 정말로, 3학년 5반에 아이리의 이름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호흡을 틀어막듯 숨을 들이마셨다.

“와, 쿠로 우리 같은 반이네?”

아이리도 그 사실을 발견했는지 쿠로오를 돌아보며 웃었다. 잘 됐다, 재밌겠다, 뭐 그런 말을 한 것 같았는데 사실 잘 들리지 않았다. 아니, 이거 진짜야? 정말로 같은 반이라고? 쿠로오는 지금 자신이 아는 모든 종교적 존재를 속으로 다 찾아대고 있었다. 하느님, 부처님, 알라신, 또 뭐있냐. 아무튼 정말 감사합니다. 나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방학 때 애타하고 속 끓인 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아이리에게는 보이지 않게 주먹을 꽉 쥔 쿠로오는 태연한 척 교실로 가자고 말했다.

등교를 일찍 하는 쿠로오와 아이리였기에 고를 수 있는 빈 자리가 많았다. 어디 앉지, 살펴보는 아이리와 달리 쿠로오는 별 고민 없이 휘적휘적 맨 끝 창가자리로 향했다. 물론 명당이긴 한데 거기…… 뒤에서 자고 싶은 애들한테 명당 아닌가? 무언가 묻고싶은 기색을 눈치챈 쿠로오가 답했다.

“난 앞에 앉으면 칠판 다 가리잖아.”

“아. 하긴 그렇지. 으음, 그럼 나도 여기 앉을까.”

쿠로오의 옆 자리 의자를 드르륵 뺀 아이리가 자리에 앉았다. 쿠로오는 내심 옆 자리에 앉은 게 좋았으나 입으로는 장난섞인 말을 뱉었다.

“아이리는 앞에 앉아도 상관없을 것 같은데?”

“네가 너무 큰 거지, 나도 여자애들 중에선 큰 편이거든.”

“으응~”

“그 표정 열 받아.”

키득대며 떠들고 있던 찰나, 교실 문이 열리고 금발의 단발 여학생이 졸린 표정으로 들어왔다. 아이리는 처음 보는 학생이었으나, 쿠로오와는 일면식이 있는지, 눈이 마주치자 여학생이 입을 열었다.

“어, 쿠로오 너도 이 반이야?”

“응, 일찍 왔네?”

“뒷 자리 앉으려고 일찍 왔는데 이 시간에 사람이 둘이나 와있을 줄은 몰랐네.”

“뒷 자리 앉으려고 일부러? 불량 학생이네~”

“여자친구랑 맨 뒷 자리 앉아있는 애가 할 소린가.”

여자친구라는 말에 쿠로오는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무슨 단어 하나로 이렇게……. 스스로도 당황스러울 정도여서 제발 얼굴이 티나게 붉어지지는 않았길 빌며 해명했다. 동시에 아이리도 여자친구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들렸다. 두 사람이 모두 부정하자 여학생은 ‘아니라고?’ 하며 눈썹을 까딱 들어올렸다. 잠시 둘을 스쳐간 청록색 눈동자가 아이리에게 가 닿았다.

“미안, 분위기가 완전히 커플인 줄 알았어.”

“왜 나한텐 사과 안 하는 건데?”

“난 하시모토 미나야. 쟤랑은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는데 넌 처음 보네. 이름이 뭐야?”

자연스럽게 쿠로오의 말은 무시한 미나가 아이리와 대화를 이어갔다. 쿠로오는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조금 전 당황하던 제 모습을 곱씹었다. 고작 여자친구, 그 한 마디에 허둥대는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여자친구, 여자친구라. 그렇게 부를 수 있는 관계면 바랄 게 없겠는데. 아이리에게 가 닿은 시선을 거두지도 못한 채, 쿠로오는 그렇게 바랐다.

그런데 그 바람은 조금 이상한 방향으로 실현되었다.

왜 조금만 친해도 남녀가 붙어있으면 사귀는 사이로 오해받는 걸까. 처음에는 당황하고 부끄러워하고 일일이 해명했지만 그게 몇 번 반복되다 보니 이젠 그냥 아니라고 대답하는 것도 지쳤다. 그것보다도 진짜 문제는…….

‘오늘도 안 나왔네.’

그런 일이 반복되고부터 아이리가 쿠로오를 눈에 띄게 피한다는 것이었다. 매번 등교하던 시각, 아이리는 며칠 째 나오지 않았다. 같이 가기로 약속을 한 것도 아니어서 기다리기도 뭐 하고, 무엇보다 쿠로오는 아침 연습을 가야했기에 언제 나올지 모르는 아이리를 무작정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항상 곁에 있던 사람이 없어지니 빈 자리는 더 크게 느껴졌다.

아이리가 불편해 한다는 사실을 모르진 않았다. ‘그런 거 아니야.’ 비슷한 패턴이 되풀이되자 어느 순간부터 딱 잘라 말하는 목소리와 표정에 불쾌함이 어렸다. 상처받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아이리를 좋아하는 건 자신만의 감정이니까. 잠깐의 속상함은 오로지 제 몫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이야기 듣는 게 싫을 수도 있지. 더 오해 사기 싫어서 거리를 둘 수도 있지. 머리로는 이해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평소라면 더 이어졌을 대화가 뚝뚝 끊어질 때, 같이 있는 걸 피하려 할 때, 시선을 피할 때. 그렇게 선 그어지는 모든 순간 서글퍼지는 건 어쩔 수 없어서…….

“잠깐만!”

눈이 마주쳤는데도 모른 척 집으로 들어가려는 아이리를 본 순간, 쌓이고 쌓이던 초조함이 터진 쿠로오는 아이리의 손목을 붙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탁, 하고 손이 뿌리쳐졌다. 선이 그어지던 요 며칠에 종지부를 찍는듯한 행동이었다. 울컥 서러운 감정이 올라온 것도 잠시, 고개를 들어 바라본 아이리의 얼굴에 쿠로오는 더이상 자신의 감정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졌다.

“아이리.”

쿠로오의 목소리에 담긴 것은 책망이 아니었다. 하얘진 얼굴, 흔들리는 시선. 제 행동에 스스로가 더 당황한 표정.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이리의 모습에 놀란 쿠로오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왜 그래?”

거기에 담긴 것은 그저 걱정이었다.

*

최근 아이리는 여러모로 마음이 불편했다. ‘분위기가 완전히 커플인줄 알았어.’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쿠로오와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진 걸까, 고민하긴 했다. 그렇게 보일 정도라고? 저런 오해를 사서 끝이 좋았던 적은, 적어도 아이하라 아이리의 인생에선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확인사살마냥, 꽤 여러 명의 아이들이 줄줄이 비슷한 오해를 했다. 물론 거기엔 쿠로오가 아이리를 향해 보이는 눈빛이 심상치 않은 것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그녀가 그것까지 알 도리는 없었다. 그래서 아이리는 그냥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그래왔듯, 쿠로오와 거리를 두기로 했다.

거리를 뒀다고 마냥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일단 쿠로오는 아이리가 전학 오고 가장 친해진 사람이었고, 잘 맞는 친구였다. 그런 애와 고작 사실도 아닌 타인의 말 때문에 멀어지는 게 아이리도 좋진 않았다. 무엇보다도 쿠로오의 입장에선 마른 하늘에 날벼락일 것 아닌가. 잘 지내던 친구가 하루 아침에 자기를 피하는데. 좀 그렇긴 하지, 생각을 하면서도 아이리는 선뜻 쿠로오와 이전처럼 지낼 순 없었다. 그녀가 지금껏 겪어왔던 것이 그렇게 하지 못하게 발목 잡았다.

‘내 사정을 다 이야기하면 이해해줄까?’

그런 생각도 해봤지만, 만약 아니라면. 그래서 또 아무렇지 않게 상처주는 말을 듣게 된다면. 그건 싫었다. 별로 다시 겪고 싶진 않았다.

‘그래도 지금 이 상태론 쿠로한테 미안하고…….’

고민이 깊어지던 와중에, 하필 집 앞에서 쿠로오를 만난 것이다. 아직 마음의 준비를 못 했는데……! 아이리는 눈이 마주친 게 기분 탓이길 바라며 집으로 도망가려 했고 그때 쿠로오에게 붙잡힌 것이다.

얽어오는 손, 자신의 것과는 다른 힘. 전혀 다른 상황이지만 어쩐지 익숙한 감각에 아이리는 쿠로오의 손을 뿌리쳤다. 정말로 반사적인 행동이었기에 놀란 머리가 1초 백지가 되었다가 생각을 쏟아냈다. 깜짝이야, 어떡해, 기분 상했겠지? 화내려나? 나 같아도 기분 나쁠 것 같아, 그치만 나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이것도 다 핑계로 들리지 않을…….

“아이리.”

빈틈없이 쏟아지는 상념들 사이로 쿠로오의 목소리가 비집고 들어왔다. 그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아이리가 쿠로오의 얼굴을 제대로 보고, 그가 짓고있는 표정을 마주했다.

“왜 그래?”

쿠로오의 표정과 목소리에 묻어있는 것이 오직 걱정뿐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나서야, 아이리는 안도했고 동시에 입을 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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