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

5.

이름을 불러줘

💌 by 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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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평소와 다름없는 순간도 특별하게 만들곤 한다.

“시험치러 가는 건데 기분 좋아보이네.”

시험 당일의 고등학생을 웃으며 등교하게 만들 만큼.

하지만 역시 그건 좀 이상해 보였는지, 아이리가 의아한 눈으로 쿠로오를 바라보았다. 쿠로오는 민망함에 그럴듯한 변명을 만들어 붙였다.

“오늘만 지나면 끝이니까.”

실은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 없다. 쿠로오는 그저 좋아하는 아이와 함께 걷는 이 순간이 기꺼울 뿐이고, 요근래 그의 기분을 가장 크게 좌지우지하는 건 전부 아이리였다. 짝사랑이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좋아하는 감정만으로도 사람은 충분히 들뜰 수 있었다.

“아이하라는 끝나고 놀러 가?”

“응, 친구들이랑 쇼핑가기로 했어.”

“뭐 살 건데?”

“으음, 봄 옷도 좀 사고 싶고, 악세사리나 화장품도…….”

손가락을 접어가며 말하는 아이리에 쿠로오는 조금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엔 늘 수수하게 다녀서 꾸미는 데 큰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쿠로오가 기억하는 아이리는 늘 화장기 없는 얼굴에, 단정한 교복 차림 아니면 편한 사복 차림이었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화장도 해? 한 번도 한 거 못 본 거 같은데.”

“학교 갈 때야 안 하지. 놀러 갈 땐 해. 오늘도 옷 갈아입고, 화장하고 만나기로 했는걸.”

“학교에서 바로 안 가고?”

“시험친 직후엔 다들 초췌하니까……. 꾸미고 가고 싶대서 그러기로 했어.”

꾸민 모습…… 궁금하다. 매번 등교할 때 아니면 공부할 때 만나서 화장하고 꾸민 모습을 볼 기회가 없었다. 지금도 예쁜데, 아이하라가 제대로 꾸미면 어떨까? 쿠로오는 그런 생각으로 아이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지만, 정작 그 모습을 먼저 본 것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좀 일찍 나왔네.’

약속 장소에 이르게 도착한 아이리는 주변에서 사람이 꽤 많은 가게를 발견하고 간판을 올려다 보았다. 게임파는 곳인데…… 아, 새 게임 발매해서 다들 사러 온 건가. 포스터 속 게임은 전에 사촌 동생과 해본 게임이었다. 후속작이 나왔구나. 그렇게 구경하고 있는데, 가게에서 익숙한 사람이 걸어나왔다.

“어라, 코즈메 군?”

가게에서 게임팩을 들고 나오던 켄마가 화들짝 놀라며 옆을 돌아보았다. 게임팩 사고 나왔나봐. 웃으며 말하는 아이리에게 켄마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낯을 많이 가리는구나. 그래서 그런지 켄마와는 등교하면서 종종 마주쳐도 쿠로오만큼 대화를 많이 하지는 못했다.

“저거 산 거야? 새로 나온 거?”

“응, 시험도 끝났고. 발매일도 겹쳐서.”

“모르진 않았지만, 코즈메 군 게임 좋아하는구나-”

“켄마로도 괜찮아.”

매번 꼬박꼬박 ‘코즈메 군’이라 부르는 게 신경쓰였던 켄마는 이 김에 그렇게 덧붙였다. 켄마가 요비스테에 별 생각이 없다는 걸 모르는 아이리는 의외라고 생각했지만, 이내 웃으며 대답했다.

“켄마도 편하게 아이리라고 해!”

“아이리는, 왜 여기 있는데?”

“난 친구들 기다리는 중이야. 넌 혼자 왔어?”

“응, 이것만 사러 온 거라…… 이제 갈 거야.”

때마침 울리는 핸드폰에 아이리는 ‘친구 도착했나보다.’라며 켄마에게 손을 흔들었다. 나 가볼게, 조심히 들어가!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받는 아이리에 켄마도 조용히 손을 흔들었다. 걸어가는 아이리의 뒷모습 옆으로 그녀를 힐끔 돌아보는 사람들이 보였다. 평소에도 눈에 띄지만, 차려입고 나오면 더 그렇구나. 싫어하는 말을 줄세우면 ‘눈에 띈다.’가 반드시 상위권에 놓여있을 켄마는 그 모습만 봐도 조금 피곤해지는지 걸음을 재촉해 집으로 향했다.

*

“켄마, 금요일에 산 게임 해봤어? 어때?”

“다른 건 무난한데, 보스맵이 좀 어려워.”

“벌써 보스맵이야? 그거 전작은 꽤 어렵지 않았나?”

“아이리, 이거 전작 해봤어?”

“응, 사촌이 게임을 좋아해서 같이 했었어.”

쿠로오는 어쩐지 거리가 가까워진 것 같은 켄마와 아이리 사이에 어리둥절하게 껴있었다. 켄마가 아이하라를 아이리라고 부르네? 둘이 안 본 사이에 갑자기 친해지지 않았어?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우던 쿠로오가 끼어들었다.

“금요일에 켄마가 게임 산 건 어떻게 아는 거야?”

“시내에서 우연히 마주쳤어.”

“아, 그랬구나. 난 갑자기 둘이 이름 부르길래 언제 이렇게 친해졌나 하고.”

“켄마가 그냥 켄마라고 부르라고 해서, 나도 아이리로 괜찮다고 했어.”

나도 아직 ‘아이하라’인데. 그럼 켄마는 아이리가 꾸미고 나온 것도 봤겠네. 속에서 불쑥 그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질투랄 것까진 없지만, 뭔가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사실 좀 의외였어. 낯가리는 것 같은데 요비스테는 흔쾌히 하라고 하니까.”

“호칭같은 거 별로 신경 안 써서……. 이름이 편해.”

“쿠로오 군이랑은 친해서 이름이나 애칭 부르는 줄 알았지. 뭐더라, 쿠로?”

아이리의 입에서 쿠로, 라는 말이 나오자 쿠로오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아이리가 쿠로라고 부르니까 왜 이렇게……. 정작 아이리는 켄마가 맞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별 생각없이 말을 이었다.

“뭔가 귀엽더라.”

“어디가……?”

제 커다란 소꿉친구와 귀엽다가 좀처럼 연결되지 않는지 켄마의 눈썹 사이로 선이 생겼다. 너 이럴 때만 표정 다채로워지지 말라고! 쿠로오의 외침에도 그대로인 켄마의 표정을 보며 아이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어감 같은 게? 귀엽잖아.”

쿠로오는 그런 아이리를 바라보며 입술을 한 번 달싹이곤 목소리를 냈다.

“마음에 들면 아이하라도 그렇게 불러.”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지만, 사심이 섞인 말이었다. 어감? 그런 게 뭐 진짜 중요하겠는가. 쿠로오는 그냥, 아이리가 쿠로라고 불러주면 좋을 것 같았다. 가볍게 툭 던지듯 말한 목소리와는 달리 눈은 아이리의 반응을 살폈다. ‘나도?’라고 말하는 것 같은 표정이 잠시 스쳐갔지만, 길진 않았다.

“그래! 하긴, 아직 ‘쿠로오 군’인 건 좀 딱딱하긴 했어. 그치?”

“맞아, 꼬박꼬박 ‘군’까지 붙이고 말야.”

“쿠로도 그냥 아이리라고 불러.”

“응,”

아이리. 고작 그 세 음절이 목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이게 뭐라고, 고작 이름 부르는 게 뭐라고. 입 밖으로 내뱉는 데 이렇게 자꾸 용기가 필요한지. 그러나 공백이 너무 길어져도 이상해 보일 것이다. 쿠로오는 결국 숨을 토해내듯 불러보고 싶었던 이름을 뱉었다.

“아이리.”

이름이 불리자 아이리는 방긋 웃었다. 그리고 쿠로오는 또 고작 그것에 행복해져서.

‘쿠로…… 바보같은 얼굴이 됐잖아.’

눈치빠른 소꿉친구에게 짝사랑을 들켜버리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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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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