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엔딩 택틱스 2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야
이 시대의 평화는 순전히 행운으로 유지되고 있다.
2주간의 체력 단련과 첫 신체검사가 끝나고 나서는 모두 본격적인 호신술을 배웠다. 또 배우냐는 말이 나왔지만 그만큼 몸을 지키는 게 중요하다는 의미라고 받아들였다. 센티넬, 가이드 상관없이 배웠으나 중요성은 가이드에게 더 있어 센티넬이 핵심적인 호신술만 배울 때 가이드는 급소의 위치와 빠르게 그곳을 노리는 방법까지 세세하게 배워야 했다. 능력이 크건 작건 센티넬은 능력이라는 무기가 있지만 가이드는 그런 게 전혀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고, 누구도 반박하지 않았다. 오히려 선호하는 가이드가 더 많았다. 입소 초기 종종 가이드들끼리 하던 말 중에는 그런 말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라고 무조건 센티넬을 안정시킬 수 있는 게 아닌데. 우리도 센티넬이 작정하고 공격하면 죽을 텐데.
공통적으로 2주간 기본 호신술을 배우고, 가이드가 더 세세하게 호신술을 익히는 동안 센티넬은 명상과 운동을 병행했다. 말이 명상이지 멘탈 케어와 스트레스 관리 같은 다소 뜬금없고 군대와는 어울리지 않는 주제였기에 많은 센티넬들이 의아함을 표했으나 다 이유가 있다고 했다. 이유인즉슨, 센티넬의 폭주 가능성은 전적으로 센티넬 본인에게 달려있다는 것이었다. 가이드는 게임처럼 센티넬이 현재 어떤 상태인지 객관적으로 그리고 실시간으로 볼 수 없고, 센티넬 본인조차도 그것을 잘 알 수 없다. 그러니 꾸준히 자신을 단련하고 평온한 상태를 유지해야 폭주 가능성이 낮아진다. 언뜻 들으면 헬스 트레이너들이 밥 먹듯이 하는 멘트와 다를 바가 없지만 센티넬의 폭주가 센티넬 본인의 스트레스나 정신 상태, 건강 상태와 연관이 있다는 건 이미 알려진 연구 결과였기에 모두가 납득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폭주의 원인을 개인에게 돌리고 책임을 지우려고 하는 게 아니라 과학적인 결과가 그랬다. 다르게 말하면, 과학까지도 폭주는 센티넬인 자신에게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핑계조차도 댈 수 없게.
많은 센티넬들이 절망감과 무력감을 느꼈고, 세림 역시 그러했다. 사실 절망이나 무력이라고 말할 정도는 아니지만 자기 관리가 전부가 아니라는 건 감으로 알고 있었다. 연구팀과 센터는 자기 관리를 하면 폭주 가능성이 낮아진다고 했지 폭주를 원천 차단할 수 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자기 관리를 해도 폭주를 할 수도 있는 거고, 그렇다면 내가 얼마나 열심히 관리를 하고 마음을 다스리며 살아왔든 내 탓이 된다는 거다. 내가 얼마나 열심히 감정을 추스르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관리를 해왔는지 전부를 알 수 있는 건 나 밖에 없으니까. 시기를 얼마나 늦추든 폭주한다면, 그래서 타인에게 해를 끼치게 된다면 백 퍼센트 내 편을 들어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를 완전히 이해해줄 사람을 만나지 않는 이상은.
이 시대의 지도자들, 지식인들이 종종 공식 석상에서 하는 말이 있다. 이 시대의 평화는 순전히 행운으로 유지되고 있다. 맞는 말이었다. 아무리 본인을 잘 다스린들 폭주의 위협에서 완벽히 벗어날 수 있는 센티넬은 없다. 게다가 모든 센티넬이 자기 관리를 하지는 않고, 그럴 수도 없다. 그러므로 폭주란 순전히 운이다. 운이 좋아 휘말리지 않은 사람들과 운이 좋아 자아를 잃고 죽지 않은 사람들이다. 원래 인간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생물은 운에 많은 걸 맡기지만 센티넬이라는 족속들은 하루하루가 주사위 게임인 셈이다. 굴린 결과를 알 수 없는 주사위.
두 번째 신체검사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무엇이 좋은 상태인지 알 수 없었다. 의사에게는 전부 양호하고 앞으로도 이대로만 지내시면 됩니다, 라고 들었지만 센티넬인 이상 맹신할 수 없는 말이란 걸 세림은 알았다. 무엇을 믿어야 할지 알 수 없었지만 답을 줄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센터는 그들을 위로하고 진정시키는 데에는 딱히 관심이 없었다. 세림과 같은 처지인 사람들은 모두 센티넬이기 이전에 20세, 더 많아봤자 22세인 사람들이었고 누구도 명확한 답 같은 건 모른 채 하루하루를 보냈다.
게다가 명상 수업이 시작된 이후로 센티넬과 가이드는 훈련 시간 내내 다른 곳에서 훈련을 받았으므로 같은 내무반의 인원이 아니고서는 짜인 스케줄 내에선 식사 시간이나 자유 시간, 외에는 신체검사를 하는 날 밖에 마주칠 일이 없게 되었다. 같은 내무반에서 지내는 센티넬과 가이드 사이가 아니라면 말을 붙이거나 친해질 만한 기회가 많이 없어졌다는 의미였다. 물론 사막에서도, 콘크리트 사이에서도 꽃은 핀다고 그 와중에도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고 특별한 기류를 형성하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은 서로에게 무관심하게 지냈다. 따로 가이딩을 신청하면 받을 수 있어 그때 만날 수도 있지만 애초에 따로 가이딩 신청을 하는 센티넬이 많지 않은 것도 한몫했다. 부대 밖에서, 센터 밖으로 나가서는 일반인들과 선을 긋고 살아가던 사람들이 센티넬과 가이드 밖에 없는 곳에 와서는 서로에게 묘하게 선을 그으며 살아가고 있다. 안타깝고도 우스운 일이었다.
그렇지만 세림은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 누구라도 센티넬 혹은 가이드가 되어 이곳에 강제적으로 처넣어져서 1년 6개월을 보내다 보면 이해하게 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건, 훈련이든 규칙이든 질서든 모든 것의 이유가 '우리는 남들과 다르기 때문'이니까. 센터가 의도했든 아니든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 틀림과 다름은 다르다는 걸 알아도 그렇다. 다를 뿐 틀리지 않았다는 말은, 결국에는 다르긴 하다는 의미다. 그들과 같아질 수는 없다. 기적이 일어나서 일반인의 몸으로 돌아가지 않는 이상. 이질감은 센티넬과 가이드 양쪽과 평생 친구를 먹었다. 특히 더 좋아하는 건 센티넬이었고.
입소식이 있기 전 처음 센터에 들어왔을 때, 카드를 받고 앉아서 버스를 기다렸을 때만 해도 세림은 이런 곳에서도 누군가와 친해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여기 있는 누구도 자의로 들어온 게 아니고 놀러 온 게 아니긴 하지만 무려 1년 반, 18개월, 약 540일을 비슷한 처지인 사람들끼리 같은 곳에서 지내는 건데 그런 인연이 하나도 없을까 싶었다. 3월에 개학해서 중간에 방학 한 달 하고 1월에 반 갈라져서 헤어지는 학교에서도 친구가 생기는데 안 될 게 뭐가 있을까, 생각했었다. 거지 같은 환경일 수록 유대감이 깊어진다나 뭐라나 하는 말도 있는데. 적어도 몇 주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은 모르겠다. 기대를 버리진 않았지만, 바라지는 않기로 했다. 생각해보니 학교는 내가 어디 갈지 지망을 적기라도 했었다. 여긴 그냥 지정 받아서 온 건데.
벌써 세 번째 신체검사를 받는 날이다. 5월이었다.
신체검사는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반발했지만 이제는 다들 기다리는 날이 되었다. 첫째로는 하지 말라는 짓 안 하고 스케줄에 맞춰서 잘 살면 신체검사에서 문제 될 일이라곤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원래부터 지병이 있거나 체질이 약했던 사람들은 조금 고생을 해야했지만 센티넬이거나 가이드라서 일어나는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되면 성가실 일은 없었다. 둘째로는 신체검사를 하는 동안에는 훈련도 교육도 없고 통으로 자유시간이라는 이유였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게 힘든 사람은 조식 먹고 나서 더 잘 수 있고,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하루하루가 지겨웠던 사람은 누군가와 마음껏 이야기를 해도 되고 하루종일 하고 싶은 걸 하며 보낼 수도 있으니까. 신체검사가 진행되는 동안에 지켜야하는 일정은 아침과 저녁 점호 시간, 식사 시간, 본인의 검사 시간 딱 세 가지 뿐이다. 집합 시간만 지키면 되는 수학여행 자유일정 같은 거다. 앨런은 살면서 수학여행이란 것을 가본 적은 없지만.
이번에는 운 좋게도 첫날이다. 신체검사를 받는 순서는 매번 다르다. 어떤 날에 하는지는 알려주지만 그날 정확히 몇 시쯤에 하는지는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이왕이면 첫날, 앞 순서에 받고 다른 사람들이 전부 끝날 때까지 마음 편하게 있는 쪽을 대부분 선호한다. 매도 먼저 맞는다는 말이 있다고, 같은 내무반의 사람이 그랬다.
소개하는 게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신체검사 날에는 필수로 가이딩이 이루어진다. 신체검사 순서 자체가 센티넬과 가이드의 교차로 되어있고, 자신의 바로 앞 순서나 뒤 순서의 센티넬을 가이딩해주게 된다. 말했듯이 신체검사 순서는 매번 다르기 때문에 어떤 상대를 가이딩하게 될 지는 미리 알 수도 없고 완전 랜덤이다. 게다가 신체검사 도중 상대에게 어떤 문제가 발생한다면 자신의 바로 앞이나 뒤 순서가 아닌 센티넬을 맡게 될 수도 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아니, 설명은 그만하는 게 낫겠다.
핸드폰이 울렸다. 앨런의 차례였다.
앨런은 검사실로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중식을 먹고 소화시킬 겸 부대 내부를 걷다가 무심하게 설치된 벤치에 앉아있던 참이었다. 자신의 순서가 되었다는 알림 메시지마저도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대략 20분 내에 순서가 올 것 같으니 미리 와있으라는 말 뿐이다. 검사실이 있는 건물에서 부대 내에서 가장 끝자락에 있는 곳까지 대략 8분 정도 걸린다는 걸 감안해서 그렇게 보내는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앨런은 신체검사가 있는 날에는 항상 검사실이 있는 건물 근처에서만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런 것에 크게 신경쓰지 않을 수도 있다.
몇 분 걸으니 도착한 검사실은 한 달 전과 같은 분위기에 같은 풍경이었다. 익숙하게 복도의 검사실 문의 맞은 편 벽에 기대어 선 앨런은 목에 건 카드를 만지작거리며 다른 사람들이 검사를 받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누구도 화를 내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거부하거나 난동을 부리지 않는다. 열세 번째도 아니고 세 번째인데 다들 적응했다. 익숙해졌다. 혹은 체념했다, 포기했다. 앨런은 이런 분위기가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켠으로는 조금 서운했다. 서운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아직도 자신은 덜 적응했다고 생각해서일까. 아직도 나는 돌아가고 싶다고, 집에 가고 싶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면. 그러니까, 다들 적응 못할 것처럼 굴고 말하더니 왜 나만 아직도 겉도는 기분인지 알 수 없어서 그런 걸까. 답을 알 수 없어 무의식적으로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멍하니 사람들을 보고 있으니 곧 제 이름이 불렸다. 앨런은 후다닥 뛰어 검사실 안으로 들어갔다. 2달 전에, 한 달 전에 했던 것처럼 연구원의 지시에만 잘 따르면 검사는 무탈하게 10분 내로 끝난다. 검사를 마치고 나면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가이딩을 해줄 센티넬을 기다린다. 첫 신체검사 날에는 키가 엄청나게 크고 마른 미소년이었고 두 번째 했을 때는 저보다 조금 작은 키에 안경을 쓴 여성이었다. 둘 다 낯을 가리면서도 가이딩에는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런 사람이길 바랄 뿐이다. 1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붙어있는 거지만 그마저도 싫어하는 사람이 있고, 그런 사람에게는… 억지로 하는 것 같아서 앨런도 마음이 좋지 않으니까. 억지로 하고 싶지는 않다. 이미 억지로 하고 있는 게 많아서. 여기 있는 것 자체가 억지로 있는 거라서.
"두 분 이쪽으로 오셔서 가이딩 해주세요."
연구원의 말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가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아마도 오늘 자신이 가이딩할 상대다. 눈이 마주친 순간 앨런이 느낀 것들을 나열하자면, 우선 자신보다 아주 약간 위에 있는 눈높이. 피곤한 건지 예민한 건지 모를, 센티넬들이 자주 하고 있는 어딘가 날이 선 눈빛. 보자마자 잘생겼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얼굴. 하지만 저와 크게 나이 차이가 나지는 않아보이는, 잘생김 사이에 감춰진 앳됨. 그런 것들이었다. 가만히 보아하니 저에게 말을 걸려던 찰나에 연구원이 말을 해서 기회를 놓친 것 같았다. 하려던 말이라고 해봤자 제 주의를 깨우려는 말이었겠지만.
익숙한 기계 아래 앞에 먼저 선 그는 앨런이 옆에 서자 앨런 쪽으로 몸을 돌린다. 그러고는 웃는다. 아까의 그 날이 선 눈빛이나 피곤한 표정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솔직히 조금 무섭다고 생각했었는데. 다만 활짝 웃는 얼굴은 아닌 것 같다. 적어도 앨런 본인에 비하면. 따라서 웃는 얼굴 띄운 앨런과 시선이 마주하자 그가 입을 연다.
"어떻게… 하실래요?"
손 잡을 거냐 포옹할 거냐 묻는 거다. 신체검사에서 요구하는 가이딩은 가벼운 수준이기 때문에 보통은 둘 중 하나를 한다. 그러므로 예상한 질문이었으나 앨런이 조금 당황한 것은 앨런은 이전의 신체검사에서는 상대에게 맞춰주었던 탓이다. 그러니까, 상대는 미리 하고 싶은 걸 정해놓고 이거 해도 될까요, 이렇게 물어봤었다. 어떻게 하실래요, 하고 앨런의 의사를 묻는 게 아니라. 생각지도 못한 배려에 앨런이 눈을 깜빡이자 그도 앨런을 내려다본다. 계속 보니 그렇게까지 무섭게 생기지만은 않은 것 같다. 무섭게 생겼다기보다는, 일반인처럼 안 생겼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연예인처럼 생겼다. 잘생겨서의 이유도 있지만, 화려하게 생겼다고 해야하나.
"포옹 할까요?"
"네."
앨런에게 익숙한 쪽은 포옹이다. 손만 잡는 건 묘하게 거리 두는 것 같아보이기도 하고, 닿는 신체 면적이 많을 수록 가이딩이 잘 되는 거라면 포옹이 가장 무난하면서도 효과적인 가이딩 스킨십이니까. 익숙한 대로 앨런이 팔을 벌려 안으려 하자 그 역시 이런 상황이 익숙한 것처럼 가만히 안긴다. 이 사람도 포옹 쪽이 익숙한가. 잘 골랐네. 그런 생각을 하며 안고 있었다. 몸에서 힘을 뺀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누구와 가이딩을 하게 되어도 그렇게는 안 할 생각이다. 이건 그냥 좋아서 안는 게 아니다. 가이딩은 누군가를 진정시킬 수 있고, 어쩌면 생명을 구하는 일이다. 상대는 다르게 생각할 지라도.
30초 정도 안고 있자 연구원이 이제 됐다고 말한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팔을 놓고 품에서 떨어진다. 이건 앨런 방식의 상대에 대한 배려다. 앨런 본인이야 가이딩에도 그로 인한 스킨십에도 크게 거부감 없고 해야하는 일이니 하는 거지만 상대는 센티넬이고, 센티넬은 그걸 자신이 '받는다는' 사실 자체를 싫어할 수도 있다. 말 그대로 가이딩은 가이드가 '해주는' 거니까. 그래서 앨런은 연구원의 오케이가 떨어지면 바로 품에서 떨어진다. 상대가 붙잡는 경우는 어차피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끝났으니 가셔도 된다는 말이 들리면 앨런과 그는 자연스럽게 연구원들 앞을 벗어나 사람이 드문 곳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앨런이 걸어 나오며 고개와 눈빛으로 가볍게 인사를 하니 그도 아까의 그 활짝은 아닌 웃음으로 작게 감사합니다, 대답한다. 세 번째 보니 확실히 알겠다. 한 번 봐서 쉽게 머리에서 잊힐 만한 얼굴은 아니다. 더 환하게 웃으면 더 잘생겼겠지, 그런 생각을 한다.
그 이후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헤어졌다. 그가 먼저 상담실로 들어가고, 앨런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옆 상담실로 들어갔다. 신체검사가 끝나고 난 후에 하는 의사와의 면담은 꼭 이렇게 일대일로 이루어진다. 자신의 상태를 알리기 싫어하는 사람을 위한 최소한의 배려라고 했던가. 어찌 됐든 상관없었다. 앨런은 계속 별문제 없으니 지금처럼만 하라는 말을 들어왔고 오늘도 그랬다. 상담실에서 나오자 그는 없었다. 그야말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나가다가 잠깐 마주쳤다가 헤어진 것처럼 그렇게 사라졌다. 대부분이 이렇다. 신체검사에서 만난 상대와 통성명을 하거나 친해지는 경우는 아직은 드물다. 통성명까지는 해도, 어차피 이름만 알게 되고 이후에 우연히 마주칠 확률이 적다. 누군가를 신경 쓸 시간에 자신의 상태를 가장 먼저 돌보아야하는 곳이다.
신체검사를 마치고, 앨런은 다시 밖으로 나가 조금 걸으며 사진을 찍고 내무반으로 돌아왔다. 가족들에게 찍은 사진을 적당히 편집하여 보내고 간단히 안부를 남겼다. 그리고는 편지지를 꺼내어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신체검사를 하는 날은 가족에게 보낼 편지 쓰는 날로 정했으니까. 이번에는 무슨 말을 해야할지 고민하며 펜을 움직이다 보면 내무반에 다른 사람들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하고, 그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편지를 마무리하고 잘 접어서 봉투에 넣어서 전에 했던 대로 옷 사이에 끼워놓는다. 일주일 전에 생일 축하한다며 받은 편지를 다시 꺼내서 또 읽는다. 그러다보면 석식 시간을 알리는 소리가 들리고 읽고 있던 편지를 원래대로 돌려놓고 내무반의 다른 사람들과 내려가 석식을 먹고 올라온다. 석식을 먹고 올라와서 읽던 편지를 마저 읽는 일을 포함해 이것저것 하며 쉬고 있으면 곧 저녁 점호 시간이다. 그러면 잠에 든다. 내일은 조식을 먹고 나서 바로 편지를 담당자에게 전달하러 갈 예정이다. 외에는 일정이 없지만, 어떻게든 하루를 보낼 것이다. 여태까지 그랬듯이.
이제 겨우 이곳에서 보내는 첫 번째 생일이 지났다.
앞으로 보내야할 시간이 길었다.
봄은 언제 왔는 지도 모르게 가버렸고, 봄이 떠난 자리에는 여름이 찾아왔다.
군대에서 보내는 여름은 평범하게 보내는 여름보다 훨씬 길었고 힘들었다. 도대체 여태껏 일반 군인들은 어떻게 이 무더운 날씨에도 군복을 입고 생활하고 있었던 건지 짐작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더웠다. 괜히 일반 군인들은 군대에 들어오기 전에 신체검사(센티넬과 가이드 대상이 아닌)를 해야하고 그 기준을 통과해야만 현역으로 복무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세림은 새삼 이런 환경을 버티셨을 아버지가 대단하고 존경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 군대는 오기 전에 그런 신체검사는 하지 않는다. 센티넬이거나 가이드이기만 하면 거의 무조건 와야 한다. 여기 다 같이 모여서 1년 반 동안 지내지 않더라도 여기서 모두가 받는 교육이나 훈련은 어떤 방식으로든 받아야하니, 사실상 센티넬과 가이드에게는 필수교육인 셈이다. 어쨌든 센티넬과 가이드이기만 하면 무조건 와야 한다는 것은 그 외에 건강이나 신체상의 조건이 필요없다는 뜻이고, 곧 여기 있는 사람들의 건강 상태는 제각각이라는 뜻. 그러니까, 날이 더워지자 빈혈이나 저혈압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열사병으로 쓰러지는 사람도 종종 나왔다. 의무실의 문이 쉴 새 없이 열리고 닫혔고, 집에 돌아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힘들어하는 사람이 내무반에 한 명씩은 꼭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모두가 함께 견뎌야 했다. 덥고 힘들다는 이유로 내보내 줄 센터였다면 애초에 이렇게 많은 인원을 한 곳에 몰아넣고 훈련을 시키지도 않았을 테다. 센터가 해 준 건 야외 훈련을 일부 실내로 옮기고, 내무반에 해충 퇴치 용품을 충분히 보급하고, 하루에 한 시간은 에어컨을 가동할 수 있게 하는 것 정도였다. 아무리 힘들어해도 누구도 집에 돌아가지는 못했다. 외부와 주고받는 편지조차도 센터의 검사를 거치니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세림은 조금 각박하다는 생각도 했다.
3개월에 한 번씩 지급되는, 3일 동안 자리를 비울 수 있는 정기 휴가는 그래서 여름에 가장 많이 쓰였다. 여행을 가거나 특별한 일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집에 가서 먹고 싶은 거 먹고 시원하게 있다가 오겠다는 이유로 쓰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호캉스가 아니라 집캉스. 그렇게 할 정도로 덥고 힘든가 생각했지만, 사실 세림도 7월에 쓰긴 했다. 본격적으로 더워지기 시작하지만 너무 덥지는 않을 때 써서 가족들과 여름 여행을 다녀왔었다. 그치만 이건 더위가 싫어서, 못 견디겠어서 도피하겠답시고 쓴 건 아니었으니까. 어딜 가나 더운 시기였다. 아예 다른 나라로 가버리지 않는 이상 냉방 여부가 가장 중요한 시기.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여름도, 모두를 힘들게 한 무더위도 달력이 9월로 넘어가자 조금씩 꺾이기 시작했다. 9월이 되어도 여전히 더웠지만 더이상 누군가가 쓰러지지는 않았고 야외 훈련에 큰 반발이 뒤따르지도 않았다. 여름이라기엔 선선하고 가을이라기엔 더운 날들이 이어졌다. 나쁘지 않은 평화였다. 너무 더워도 힘들지만 너무 추워도 힘든 게 사람이다. 너무 덥지도 않고 너무 춥지도 않은 살기 딱 좋은 날씨는 지쳐있던 사람들의 마음을 천천히 돌리고 있었다.
무지하게 더웠던 여름 동안에는 세 번의 신체검사가 있었고 한 번의 휴가, 한 번의 외출이 있었다. 휴가가 3개월에 한 번씩 지급된다면 외출은 2개월에 한 번씩 지급되었다. 휴가가 3개월 동안 기다려서 3일 동안 나갈 수 있다는 것에 비하면 외출은 효율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게다가 2개월 기다려서 딱 하루, 그것도 무조건 센티넬과 가이드가 한 페어로, 가급적 붙어다녀야 했다. 부대에서 나갈 때 둘이서 함께 나가고, 복귀해서 돌아올 때 둘이서 함께 돌아와야 한다. 하지만 나가있는 동안에는 센터 측에서 둘이 실제로 붙어있는지 뭔지 확인할 길이 없기에─위치추적은 센티넬만 가능하다─출발할 때와 복귀할 때만 같이 가면 된다. 물론 이런 제약마저도 귀찮고 번거로워하는 몇몇 사람들은 외출은 그냥 없는 셈 치겠다고도 했다. 어차피 나가봤자 할 거 없다면서. 필요한 옷이나 물품은 가족이나 지인들이 보내주고 밥과 잠은 꼬박꼬박 챙겨주며(시간이 엄격하긴 하지만) 상비약이나 현대인에게 흔한 질병에 대한 처방전은 부대 내에서도 해결할 수 있으니 굳이 나갈 이유가 없다는 의견이었다. 그래도 대부분은 2개월이 돌아올 때마다, 날씨가 좋은 날을 골라서 외출을 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하는 일은 다들 비슷비슷했다. 애인 만나기. 가족 만나기. 지인 만나기. 여기서는 못 먹는 거 마음껏 먹기. 취미생활 하기.
세림은 옆 내무반의, 저와 비슷한 체구의 남자 가이드와 함께 나갔었다. 그래도 규칙인데 같이 다니는 게 좋지 않겠냐는 의견이 일치해서 점심까지는 붙어다녔다. 그런데 점심을 같이 먹을 때 다들 그다지 규칙을 신경쓰지 않는 데다가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센티넬인지 가이드인지 알고 있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귀찮게 살아야 할 필요가 있겠냐… 하는 얘기가 나와 점심 이후부터는 각자 행동했다. 헤어진 직후에는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헤어지기 직전에 가이딩도 받았고 몸 상태가 좋았기에 괜찮을 것 같았다. 그렇게 각자 볼일을 보고 정한 시간에 맞춰 정한 장소에서 만나 함께 부대로 돌아오는 길에는 오늘 하루동안 서로에게 너무 비즈니스 느낌이 나지 않았나 싶었지만 세림에게나 상대에게나 2개월에 하루 밖에 돌아오지 않는 날이니 최대한 효율적으로 써야 했다. 부대로 돌아와서 복귀 신고를 하고 나서 상대는 나중에 또 갈 사람 없으면 같이 가자고 했었다. 그 말을 들은 세림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었지만 왠지 다음에 또 같이 가게 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냥, 느낌이 그랬다. 지루해서 길고 길어서 지루한 여름이었다.
작열하던 더위가 어느 정도 지나가자 또 새로운 훈련이 시작되었다. 정확히는 완전 새로운 훈련은 아니지만.
초여름, 센티넬과 가이드가 한 쌍을 이루어 각자 능력 사용과 가이딩을 몸에 익히는 시간이 잠깐 있었다. 말이 같이 하는 거지 실상은 센티넬이 능력 훈련하는 걸 가이드가 지켜보는 훈련이었다. 어쨌든 그 훈련을 할 때에, 센터 측에서 임의로 센티넬과 가이드 짝을 지어줬었다. 꼭 학창 시절에 자리 바꾸기를 선생님 마음대로, 혹은 랜덤 프로그램으로 했던 것처럼. 가이드가 센티넬에 비해 수가 조금 더 적은 탓에 센티넬 두 명에 가이드가 한 명 붙는 곳도 있었다고는 들었으나, 대부분은 센티넬 한 명에 가이드 한 명이었다. 세림도 그랬고.
일주일 동안 이어진 짧은 훈련이었기에 생각보다 훈련 시간 중에 짝 가이드와 이야기를 할 시간은 없었다. 벽이 무슨 특수 처리가 되었다는 훈련실 안에서, 일정 간격을 두고 서서 자신의 능력을 보인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센터의 센티넬과 가이드 직원이 총출동하여 대기하고 있으며 우선 실내에서 진행하고 능력에 따라 실내에서는 제대로 된 활용이 어려워보일 경우 실외로 옮긴다. 물론 실외에서도 만반의 준비는 되어있다.
웃긴 건 그렇게 온갖 준비와 긴장은 다 했는데 첫날에는 대부분의 센티넬이 이게… 센티넬? 싶은 위력을 보여줬었다. 불 능력이라면 성냥이나 라이터처럼 나오고, 얼음 능력이라면 아메리카노에 넣는 얼음 같은 것만 만들어낸다던가. 사실 세림도 마찬가지였다. 근력 강화가 능력인데, 힘만 주면 맨손으로도 쪼갤 수 있는 수박을 박살 내는 게 전부였다. 두 손으로 시간 좀 걸려서 쪼개느냐 한 손으로 내리쳐서 파사삭 부숴지거나. 더 대단한 능력이나 재능을 가진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세림이 같은 훈련실에서 본 센티넬들은 다 그랬다.
센터 측 센티넬은 능력이라는 건 결국 상상 같은 거라서 잘 알아야 구체적으로, 그리고 강력하게 나오는데 다들 친하지가 않아서 그런 거라고 했다. 비유하자면 눈앞에 총, 탄창, 탄약, 소음기가 있는데 총이 총이라는 것만 아는 상태라서 그렇다고 말했다. 제대로 자신의 능력을 다루기 위해서는 탄창이 탄창임을, 탄약이 탄약임을, 소음기가 소음기임을 알아야하고 그것들을 순서대로 조립하고 끝내는 방아쇠를 당기는 법, 더 나아가서는 탄약이 다 떨어졌을 때는 총신으로 때리는 법까지도 알아야 제대로 제어하고 활용할 수 있다고 했다.
그 센티넬은 무덤덤하게 이야기했지만 세림에게는 꽤나 무서운 이야기로 들렸다. 센티넬이 능력을 개발하고 발전시켜서 활용시킬 수 있게 되는 과정이 곧 인간이 총을 쏘게 되는 과정과 비슷하다니. 그건 마치… 센티넬의 능력이란 대체로 누군가를, 무언가를 해칠 수 있는 무기라는 것처럼 들리지 않나. 센티넬은 그런 무기를 상시 품고 있는 사람들이고.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어쩐지 오싹했다. 왜 일반인들이 센티넬들을 보고 괴물이라고 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일주일간 가이드가 옆에서 보고 나서는 가이드는 따로 훈련을 하러 가고 센티넬들만 모여서 센터 측 센티넬들과 함께 능력 개발… 까지는 아니고 능력 탐구의 시간을 가졌다. 센티넬의 능력은 아직 과학적으로 원리가 조금도 밝혀지지 않았기에 무슨 메커니즘으로 발동되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없으니, 이렇게 생각하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하고 다들 몸통박치기 식으로 직접 부딪히며 알아가야 했다. 세림 역시 그랬다. 그냥 주먹에 힘을 주면 되는 걸까요? 근데 어디까지 되는 걸까요…. 힘 주다가 힘 빼면 원래 힘으로 돌아올까요? 손발이 아니라 손가락도 될까요? 세림이 긴장하며 그리 물으면 베테랑(이라고 해봤자 세림보다 서너살 많았다) 센티넬은 항상 그리 대답했다. 직접 해보세요.
첫 집합 때 듣자하니 이번에는 몇 달간 길게 진행할 모양이었다. 탐구는 무조건 끝내고, 가능하다면 개발까지 전부 끝낸다는 생각으로. 여기 있는 센티넬이 한두명도 아니고 가이드도 가르쳐 줄 센티넬도 부족한데 그게 되려나, 싶었지만 어차피 센터는 처음도 아니니 알아서 잘 하겠지 하고 넘겼다. 세림은 16기다. 센터는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을 16번째 관리, 감독하고 있다는 말이다. 또 하는 말로는, 기간만 길어졌을 뿐 세부 사항은 저번과 거의 같으며 중간에 페어 가이드가 변경될 수 있고, 원한다면 특정 가이드와만 계속 페어로 있을 수 있게 해준다고 한다. 하긴, 슬슬 마음에 드는 사람이 생길 때도 되었다. 벌써 여기서 반년을 넘게 보냈다. 대학교로 따지면 한 학기보다도 긴 시간이 지나갔다. 하지만 그게 세림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10분 정도 기다린 끝에 이번 훈련을 함께할 가이드를 만나게 되었다.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몇 달간 길게 진행될 훈련이라면 이왕이면 잘 맞는 사람, 안 부딪힐 사람을 만나는 쪽이 편한 게 당연했다. 제비뽑기 결과를 보는 기분으로 몇 걸음 걸어가자 눈앞에 선 사람은 저보다 조금 작은 남자였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세림보다 정말 조금 낮은 눈높이, 미용실을 가지 않은지 좀 됐는지 보통 사람들보다는 긴 뒷머리, 자연 갈색인 듯 가까이서 보니 검은색이 아닌 머리카락, 누가 봐도 웃고 있는 입꼬리와 그렇지 않은 눈꼬리, 순해보이는 눈과 두꺼운 입술. 첫인상을 말하자면, 나랑은 다르게 생겼다. 생긴 걸로 성격을 짐작해서는 안 되지만 왠지 성격도 저랑 조금 다를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여기서 봐왔던 사람들 중에는 그나마 표정이 조금 밝은 것 같기도 하다. 초면에 이렇게 가식 아닌 것 같은 진심 미소로 대해줬던 사람이 얼마나 있었던가.
빠르게 첫인상 스캔을 하고 나니 악수를 하자는 듯 손이 내밀어져 있었다. 무안해지기 전에 얼른 잡아 따라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갑자기 지은 웃음이라 어색해보일지도 모르겠다.
"이름이… 아, 좀 사람 없는 데로 가서 할까요?"
"네!"
악수를 했던 손을 풀고 안내에 따라 배정된 훈련실로 걸음을 옮겼다. 세림이 선두고, 아직 이름을 모르는 가이드는 세림보다 반걸음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다른 센티넬과 가이드들을 구경이라도 하는 것처럼. 구경할 게 있나. 호기심이 많은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훈련실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미 도착해있던 사람들이 뒤를 돌아보았으나 곧 신경을 껐다. 훈련실은 여전히 조금 좁았다. 센티넬과 가이드가 늘어나는 숫자를 감당하지 못한 탓이다. 먼저 자리를 잡고 서니 반걸음 뒤에서 따라오던 가이드가 졸졸 따라와 세림 앞에 섰다.
"아, 악수는 아까 했지. 저는 박세림… 이라고 해요. 스무 살이고요."
"저는 앨런이에요. 저도 스무 살이에요."
"그럼 저희 말 편하게 할까요?"
"네! 가 아니라… 그래."
처음 겪는 상황도 아닌데 어색했다. 그나저나 앨런이라니 신기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인 아닌 거겠지. 한국인 아닌 사람도 여기에 있는 건가. 세림이 여태 만나거나 조금이라도 말을 섞어본 사람들은 적어도 보기에는 전부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조금 놀랐다. 하지만 그, 앨런의 얼굴을 다시 보니 생긴 걸로는 구분 못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니, 진짜로 한국인일지도. 해외에서 오래 있어서 그냥 이름이 그런 걸 수도 있잖아. 물어봐볼까. 스몰토크라고 생각하고.
"… 외국인이야?"
"응, 미국인이야."
"어… 그렇게 안 생겼는데."
"그런 소리 많이 들어."
스몰 토크라기엔 너무 어색한데 이거 망한 거 아닐까. 자칭 타칭 외향인이지만 세림은 안타깝게도 낯을 가렸다. 그리고 딱 보아하니 그건 앨런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낯 많이 가리는 사람들이 오히려 초면에 잘 웃는 법이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모르겠고 무표정으로 대하자니 낯가린다고 티 내는 꼴이니까. 그렇게 더블 낯가림의 상황에서 세림이 할 말을 고르고 있으니 앨런이 물어왔다.
"어, 근데……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지 않아?"
"…… 응? 우리… 가?"
뭐지 이 영화 클리셰 같은 대사. 그런 컨셉인가. 세림은 앨런의 얼굴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까먹은 걸 수도 있다는 생각에 시선을 돌려 똑바로 앨런의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떠오르는 건 없었다. 앨런이 특이하거나 인상이 센 편은 아니니까 내가 진짜 까먹은 건가 싶었다. 여태 지내면서 만나고 대화한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기도 하고 말이다. 단서를 찾지 못한 세림은 시선만 데굴데굴 굴리며 앨런이 먼저 떠올려주길 기다렸다. 앨런 역시 제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조금 부끄럽네.
"신체검사 날에… 본 것 같은데. 봄에."
"봄…?"
"5월. 아닌가…?"
"……."
큰일이다. 진짜 기억이 안 났다. 5월에 했던 신체검사라고 짚어주기까지 했는데. 그때 언제 했는지,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같은 걸 떠올려보지만 첫날에 했다는 것 말고는 기억이 선명하게 나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상대가 저보다 키가 작았던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여성 가이드는 대부분 키가 작은데.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는데. 어렴풋이 기억은 나지만 그게 앨런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서 세림은 또 머쓱하게 시선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
"한 번만 웃어볼래?"
"… 나?"
"응. 웃는 거 다시 보면 기억날 것 같아."
안 그래도 기억 안 나서 뻘쭘한데 갑자기 웃어보라고 하니 더 뻘쭘해졌다. 그치만 딱히 거절할 말도 못 찾겠고, 웃는 걸 보여줘서 정말로 한 번 만났었는지 아닌지 앨런이 확신할 수 있다면 그정도야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앨런이 완전히 떠올린다면 세림도 기억이 날 지 모르는 일이었다. 사실 이런 게 중요한지도 모르겠고, 이전에 한 번 만났든 아니든 크게 앞으로의 일에 연관 있나 싶었지만… 연관이 없다면 오히려 못 할 이유도 없다.
세림이 마음의 준비(?)를 끝내고 작게 웃어보이자 앨런은 또 시선을 들고 세림을 빠안히 바라보았다. 괜히 긴장이 됐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이제 와서 모르겠다고 하거나 기억 안 난다고 하면 괜히 저가 더 아쉬울 것 같았다.
"맞네! 그때 나랑 같이 했었어. 나한테 먼저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봤었잖아."
"어어어어어…. 어,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그 전 달에 신체검사 날 가이딩 받을 때 무작정 포옹하자고 했다가 손 잡는 게 더 좋다고 상대가 단호하게 말해서 다음부터는 그냥 물어보자고 결심했었던 게 기억났다. 지금 생각하니 목소리가 비슷한 것 같다. 얼굴이나 체구는 기억이 안 나는데 계속 목소리 듣고 있으니 들어본 적이 있는 것도 같았다. 사실 정확한 건 아직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5월의 신체검사 날 세림이 먼저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봤다는 것만 확실히 기억나고, 상대에 대한 건 죄다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사라져 있었다. 신체검사에서 보는 가이드한테 너무 관심 안 가져도 되겠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기억이 안 날 일인가 싶었다.
"엄청 잘 생겨서 얼굴 기억해. 그리고 귀에 피어싱도."
"칭찬이지? 고마워."
"연예인처럼 생겼어."
"나도 그런 소리 많이 들어."
일부러 했던 말 그대로 하니 앨런이 웃는다. 이제서야 어색함이 풀린 것 같아 세림도 마음이 놓였다. 처음에는 앨런이 어색한 분위기를 풀기 위해 정말 컨셉으로 한 말 아닌가 의심했었는데(그야 정말로 세림의 기억에는 없었다) 그건 아니었다. 센터가 이어준 인연, 두 번 겹친 우연. 이래놓고 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헤어질 수도 있지만 그래도 한 번 가이딩해본 상대가, 저를 기억하는 상대가 페어라 다행이었다. 왠지 정말로 친해질 수도 있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 날 앨런과의 훈련은 순조로웠다. 훈련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게 세림이 혼자 이리저리 주먹도 휘둘러보고 발차기도 해보고 팔꿈치로 찍어도 보고 손날로도 쳐보고 하면서 능력과 친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앨런은 조금 떨어져서 보다가 다른 곳에서 다른 훈련 받고 중간에 다시 오고 그러는 게 다였다. 말했듯이 이능력 개발이란 (소수의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을 제외하면) 모든 센티넬에게 짜인 커리큘럼 같은 거 없는 몸통박치기식 훈련이다. 모두가 가진 능력이 다르기에 누가 알려줄 수도 없고, 상상력과 직관을 끌어내어 자신의 능력을 어떻게 개발할지 스스로가 만들어 나가야 한다. 베테랑 센티넬들의 조언은 그저 조언에 불과했다. 당사자가 아니니까.
그마저도 훈련실이 인원에 비해 부족한 편이라 오전 오후 시간 모두 훈련실을 사용하는 게 불가능해서 훈련실에서 쫓겨났을 땐 부대 내 탁 트인 공간에서 해야했다. 혹시라도 연습하다가 사고 치면 센터 측 센티넬과 가이드가 와서 수습해준다. 그래도 불안할 때는 센터에 미리 언질을 해두면 능력으로 이루어진 공간 안에서 하게 해준다. 그러면 훈련실에서 하는 것과 비슷하게 실제 외부에 가하는 영향을 줄일 수 있다고 한다. 지금도 이렇게 얼렁뚱땅 그때그때 대처인데 처음 센티넬과 가이드가 나타났을 때나 1기 때는 얼마나 혼란스러웠을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세림이 느끼기에 이능력 훈련은 꼭 언어를 배우는 것과 비슷했다.
외국어를 배우는 데는 순서가 있다. 먼저, 문자를 배운다. 한국어로 치면 자음과 모음, 영어로 치면 알파벳, 일본어로 치면 히라가나와 가타카나. 문자를 익히고 나면 기본적인 단어와 함께 인사말을 배운다. 인사말을 배우고 나면 기초 회화를 배우고, 회화를 배울 때 즘에 읽는 법을 배우니 그 뒤에는 쓰는 법을 배운다. 쓰는 법을 배우다 보면 문법을 배우게 된다. 문법을 배우고 나면 어떤 상황에는 어떤 단어를 써야하는지, 어떤 맥락에 어떤 말을 해야하는지 배운다. 그래서 언어는 배우는 데 오래 걸린다. 주입식으로 해봤자 암기지 자신의 것이 아니니까. 이능력도 똑같다.
다만 이능력은 어느 시점부터는 이미 내 안에 내재되어 있는 내 것이라는 점이 달랐다. 이미 내 것인데 다루는 방법을 모른다. 머리 안에 '이능력'이라는 언어가 설치되어 있는데 정작 나는 어떻게 쓰는지 모른다. 그래서 하나하나 끄집어내면서 기초부터 알아가야 한다. 그런데 내 머리에만 설치되어 있는 언어라서 나한테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간결하게 말하자면, 독학, 노답, 노가다.
무슨 소리냐면 오전 오후 훈련 시간을 전부 합치면 하루에 8시간은 되고(물론 휴식 시간도 포함은 되어있다) 이걸 평일 5일 동안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는 이상 계속하는 데도 진짜 더럽게 어렵고 안 늘었다는 소리다. 세림은 언어를 배우는 데 재능이 딱히 없었다. 언어를 금방 배우고 익히는 재능을 부러워한 적도 딱히 없었다. 평생 한국에서 살 텐데 한국어만 할 줄 알면 되지 굳이 다른 언어를 배울 필요성을 못 느꼈다. 근력 강화라는 이능력은 준비되지 않은 세림에게 성큼 다가온 외국어였다.
게다가 그 많은 이능력 중에서도 하필 근력 강화다. 세림은 원래 힘이 셌다. 물론 센티넬에게 주어지는 이능력이란 과학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설명이 불가능한 초자연적 현상이니 아무리 세림이 힘이 세진다 한들 능력을 사용할 때만큼 세지지는 못한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평범한 사람에게 이정도의 힘이 필요한 일이 어디에 있는가. 낑낑대면서 박스를 옮기지 않아도 되고 한 손으로 여러 개를 가볍게 들 수 있다거나 바위가 앞길을 막고 있을 때 부술 수야 있겠지만 그정도로 힘이 세지고 싶었던 것 같지는 않다 아마도. 어쨌든 원체 힘이 센 세림이기에 능력이 크게 매력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림이 훈련에 열과 성을 다하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이 힘이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지도 모르니까. 가족들, 아니면 나중에 연인과 다니다가 괴한을 만났을 때 제압할 수 있게 도와줄 수도 있고, 무거운 짐을 옮겨야 할 때 자신이 들어줄 수도 있고, 무언가를 부숴야 할 때 별다른 도구 없이도 해결이 가능할 수도 있으니까. 다른 하나의 이유는, 이왕 주어진 것이라면 갈고 닦아서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완벽까지는 힘들더라도 세림 본인이 불안하지 않을 정도로는 제어하고 싶었다. 그리고, 세상이 센티넬을 보고 괴물이라고 할 때마다 부정하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다.
신기하게도 세림의 현재 짝인 앨런은 세림과 다르게 언어는 잘 하는 편이라고 했다.
오전 시간에는 훈련실 쓸 시간이 안 되어서 아침 햇살을 받으며 운동장 한 구석에 서있을 때였다. 내용물이 비어있는 버린 캔을 스무 개 정도 받아와서 본인의 손 힘이 아니라 능력을 써서 한 손으로 기계가 누른 것처럼 납작하게 만드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힘의 집중이 중간에 풀리는 건지 캔은 자꾸 조금 찌그러지다가 말았고, 무지개색 스프링 장난감처럼 되었다. 처음 몇 개 실패하고 나서 더 집중해서 더 세게 해야 할 것 같다는 앨런의 조언을 따라 최대한 정신 집중해서 했는데도 서른 개가 안 되는 캔이 전부 모호하게 눌러졌다. 결국 발로 직접 꾹꾹 누르며 내가 이렇게 보잘것없나… 생각하며 침울해지려던 때였다.
침울해지기 싫어서, 아직 앞으로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 풀 죽기 싫어서 생각 환기도 할 겸 앨런에게 물었었다. 미국인이면 한국에는 언제 온 거냐고, 미국에도 센터 지부 있을 텐데 왜 여기 있냐고. 사실 그때까지도 그다지 친해지지 못했었다. 첫 만남…이 아니라 두 번째 만남이 이루어지고 일주일은 지난 시점이었는데. 이유는 세림이 생각보다 훈련에 너무 집중해서, 그리고 앨런 역시도 그 시간에 다른 훈련으로 바빠서. 말을 걸 수 있었지만 걸 정신이 없었다.
"한국 나이로 16살에 처음 왔어."
"얼마 안 됐네."
"응. 그때부터 배웠지, 한국어는."
"근데도 잘 한다."
"3년이면 말은 그럭저럭 하게 돼. 게다가 나는 학교도 한국 학교 다녔으니까…."
세림은 16살 때 무엇을 했었던가. 평범한 한국의 중학생이었다. 새 교복이 생겨서 좋았고, 새로운 친구를 만난다는 일에 들떠있었다. 고등학교는 중학교와 얼마나 다를지, 그리고 또 얼마나 힘들지 상상하고 있었다. 앞으로의 진로에 중요한 시기이니 긴장하면서도 두근두근했었다. 외국으로 갈 생각은 아직은 없었다. 본인이 그랬던 시기에 앨런은 비행기로 열 시간이 넘게 걸린다는 나라로 와서 생판 모르는 사람들과 학교를 다니고, 생판 모르는 언어를 하며 하루를 보내고 공부를 하고 적응하고. 쉬운 일은 아니었을 거다. 낯선 곳에서 적응하는 일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려워한다.
"그리고 나도 그때 알았는데, 센티넬이나 가이드는 출국 제한이 있었어."
"진짜? 그건…… 몰랐네."
"그래서 가고 싶어도 못 갔을 거고…. 근데 난 어차피 계속 한국에 있을 생각이었어. 한국에 계속 있으니까 여기로 온 거 같아."
"그렇구나…. 힘들겠다."
낯선 나라로 와서 낯선 언어로 말을 하며 낯선 사람들과 학교를 다니고 적응하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었을 거다. 그 낯선 나라에서 가이드라는 이름을 부여받고, 성인이 되자마자 또 한국인만 가득한, 게다가 시스템도 다른 한국의 군대에 무조건 가야한다. 자신의 상황이 아닌데도 어쩐지 아찔해져 세림은 눈을 한번 감았다 떴다. 어떻게 그런 걸 버티지. 낯가림의 문제가 아니라 적응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 '군대'라는 것은 ASG의 주도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하는 일이나 복무 기간은 모든 나라가 같다고 해도, 사람이 다른 이상 분위기가 다른 건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와서 1년 6개월을 똑같이 버티고 훈련을 받아야한다니, 이건 진짜 말 그대로 억까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동정은 원치 않을 것 같아 생각만 하고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말이라도 통해서 다행이다, 진짜."
"나 언어는 잘 하는 편이야. 나 중국어도 할 줄 알아!"
"헐. 진짜? 3개국어야? 대박…."
나는 한국어 밖에 못하는데…. 그리 중얼거리자 앨런이 소리내어 웃었다. 세림이도 노력하면 잘 할 수 있게 될 걸? 그랬으면 좋겠다……. 제발. 당시에는 그저 신기하고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넘긴 말들이었지만 이제 와 생각하니 진심으로 부러워졌다. 언어를 잘한다면 능력도 잘 다뤘을까 싶어서. 완전히 다른 세계와 체계, 문법을 금방 이해하고 받아들여서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그때 세림은 앨런을 조금 부러워했었다. 비밀스럽게, 동정도 함께 하면서.
주변을 보며 앨런은 친한 사람을 만들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사실 처음부터 그랬다. 단지 외면하고 있었다. 1개월도 아니고 1년도 아니고 1년 반이니 이왕 가는 거 안에서 친구 만들어서 같이 지내라고 했던 가족의 당부를 앨런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러지 못했던 건, 앨런 본인이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개 제 또래이고 소통에 큰 문제는 없지만 성격도 취미도 취향도 진로도 출신지도 전부 제각각인 한국인들 사이에서 한국인이 아닌 앨런이 쉽게 녹아들기는 어려웠다. 취향이나 취미나 같은 진로를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 넣어놔도 천천히 친해지는 게 앨런이었다. 게다가 이곳의 사람들은 죄다 어딘가 예민했고 불안정했고 불만이 많았다.
가을부터 훈련이 시작된 이래로 가이드 중에서는 그래도 거리가 가까워진 사람이 있었다. 센티넬이 센티넬끼리 모여서 훈련을 하듯 가이드도 가이드끼리 모여서 훈련을 한다. 그러다보니 자주 보게 되는 얼굴이 있었고 앨런이 헤맬 때 옆에서 알려주던 사람도 있었다. 다행히도 모든 사람이 앨런에게 퉁명스럽게 구는 건 아니었고 가이드끼리는 서로를 해할 일도 없었으므로 센티넬들보다는 대체로 성격이 좋았다. 아무튼 가이드 중에서는 그래도 친해진 사람이 있었는데, 문제는 센티넬이었다.
센티넬과 가이드는 한 쌍, 한 페어. 가이드는 센티넬이 없어도 상관없지만 센티넬은 무조건 가이드가 있어야한다. 군대에 있는 동안 앨런은 가이드로서 친하든 친하지 않든 센티넬 옆에 있어야 한다. 외출을 할 때도, 훈련을 할 때도, 신체검사를 할 때도. 그리고 센터가 부를 때면 언제든. 센티넬인 세림에게 주어진 의무가 능력의 훈련과 개발이라면 가이드인 앨런에게 주어진 의무는 센티넬의 케어였다.
전역하고 퇴소해서 군대 밖 세상으로 다시 나가게 되어도 센티넬을 케어해야하는 건 같은데 앨런은 센티넬에 대해서 아는 게 많이 없었다. 센터가 이렇다저렇다 알려주는 것과 실제 센티넬을 옆에서 케어한다는 건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음, 비유하자면, 언어학과 통번역의 차이. 어떤 언어에 대해 알고 공부하는 것과 실제로 사람들이 쓰는 말을 다루는 건 비슷해보여도 완전히 다르다. 언어학도 잘하고 통번역도 잘 하는 사람이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언어학을 잘한다고 해서 무조건 통번역을 잘 하는 건 아니다. 앨런은 따지자면 지금 언어학만 잘하는 상태였다. 실제로 센티넬을 어떻게 다루고 어떻게 대하는 게 정답인지는 알지 못한다. 이론과 현실은 다르다.
"앨런아, 혹시… 다음에 외출 같이 갈래?"
그러므로 앨런이 세림의 외출 같이 가자는 제안을 무시할 이유는 없었다. 하루종일 같이 다녀야하는 사이는 아니라 해도 가는 길과 오는 길을 함께 한다는 건 좋은 기회다. 게다가 몇 주간 같이 훈련을 하며 지내본 바로는 앨런에게 세림은 크게 버거울 것 없는 사람이었다. 무례하게 굴지도 않고, 지나치게 감정적이도 않으며 첫인상이나 무표정이 조금 무서운 것과는 반대로 항상 상대를 배려해주며, 가이드에게 애꿎은 화풀이를 하지 않는 좋은 사람. 첫 번째 페어 훈련 때 만난 센티넬은 너무 무뚝뚝한 사람이었다. 앨런이 앞에서 보고 있든 말든 신경도 안 쓰고, 필요한 말만 하고 훈련 시간이 아닐 때는 아는 체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물론 그 사람이 잘못 됐다는 건 아니다. 그때는 앨런 역시도 상대를 경계하고 있었고, 앨런이나 상대 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으니까. 이번에도 그런 사람과 페어가 된다면 조금 힘들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다행히 기억에 있던 사람인데다가 상냥한 사람이었다. 요약하자면, 앨런에게 세림은 친해져보기 적합한 사람이었다.
"아,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랑 갈 예정 없으면."
"응, 없어. 같이 가자."
앨런이 세림의 손을 덥석 잡자 세림이 잠시 놀란 얼굴을 하더니 웃어보인다. 그에 앨런도 따라 웃어주었다. 저번에 외출을 함께 했던 센티넬은 어떤 사람이었던가. 그 사람도 좋은 사람이었지만 친해지지는 못했다. 그때는 무더운 한여름의 군대에 적응하느라 누군가와 친해져야겠다는 생각이 아직 뇌 구석에 박혀있던 때였다. 그래서 앨런은 먼저 무언가를 물어보지 않았고 상대도 굳이 앨런에게 무언가를 캐묻지 않았다. 정말로 어쩌다보니 출근길과 퇴근길이 겹친 사람들처럼, 형식적인 대화만 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겠지만. 어쩌면 눈앞의 세림도.
외출할 날짜를 정하고 센터에 고지하러 가는 것까지도 순조로웠다. 세림은 오랜만에 알고 지내던 사람들에게 얼굴도 비추고, 시간이 된다면 본가에도 들렀다가 오겠다고 했다. 앨런에겐 특별한 일정이 없었는데, 그래서 둘의 외출 날짜는 사실상 세림에게 맞춘 날짜였다. 세림은 앨런에게 미안해했지만 앨런은 개의치 않았다. 안 나가고 싶은데 억지로 가는 거 아니고 딱히 나가서 무얼 할 지 아직 정하지 않은 것 뿐이라고 몇 번이고 말하고 나서야 세림은 마음을 놓았다. 앨런은 세림의 이런 모습에서도 배려심을 느꼈고 그런 세림이 고마웠다.
그렇게 같이 나가던 날, 앨런이 본 세림은 한결 홀가분해 보였다. 세림이 크게 티를 내거나 자신에게 말을 한 적은 없지만 세림이 모든 신경을 능력에 쏟고 있다는 건 앨런도 알고 있었다. 한 달 남짓 되는 기간 동안 계속 옆에서 지켜보니 모를 수가 없었다. 세림만 그런 것일까, 아니면 모든 센티넬이 다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걸까. 가이드인 앨런은 무언가를 노력해서 개발하고 연구하고 익힐 필요까지는 없었기에 알 수 없는 영역이었다. 어쨌든 이번 외출로 세림은 한숨 돌릴 수 있을 것처럼 보였고, 앨런은 내심 그게 좋았다. 타산적인 이유로는 짝 센티넬이 예민해져봤자 가이드에게 좋을 게 없었기 때문이었고, 개인적인 이유로는 앨런은 세림이 웃을 때가 더 좋기 때문이었다.
기대에 부푼 표정을 하고선 먼저 가는 세림의 뒷모습을 보며 앨런은 하늘을 한번 바라보았다. 편지지는 저번에 샀으니 아직 충분했고, 형은 오늘 바빠서 못 만난다고 했으니 앨런은 딱히 만날 사람이 없었다. 세림처럼 집에 들를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된 거 오늘은 혼자 다니기로 마음먹었다. 저번에 안 갔으니 피부과를 들렀다가 좋아하는 걸 먹고 느긋하게 산책도 하고 쇼핑도 하고 구경도 하다가 돌아올 생각이었다. 발걸음을 옮기기 전 멈춰 서서 고개를 들으니 시선 끝에 사계절 중에 가장 높다는 가을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솜뭉치 같은 구름이 흘러가는 풍경을 보고 있자니 새삼스러웠다. 처음 왔을 때는 아직 추위가 덜 가신 겨울이었는데. 하루가 일주일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는데, 어느새 반년도 더 지나 가을이라니. 나는 여기서 반년 동안 무엇을…. 앨런은 고개를 털었다. 무엇을 이루기 위해 들어온 건 아니었다. 그건 확실하다.
앨런은 이상하게 외출만 나가면 상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원래는 하루종일 붙어다녀야 하는 게 규칙이어서 그런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혼자 다닐 때도 계속 상대를 생각했다. 첫 외출 때부터 이랬는데, 앨런은 처음에는 당연히 모든 가이드가 다 이런 줄로만 알았다.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건 몇 달 전이었는데, 가이드 훈련 중 휴식 시간에 외출에 대한 말이 나와서 이야기를 하다가 알게 되었다. 어차피 하루종일 붙어다니는 게 비현실적이라는 건 센터도 알고 있을 거고, 붙어다니지 않다가 센티넬이 무슨 일을 일으킨다고 해도 아마 짝 가이드에게 책임을 물지는 않을 거라는 의견이 다수였다. 센티넬과 가이드를 둘 다 위치추적을 하려면 가이드에게도 베리칩을 이식해야 하는데 그러면 또 한 차례 반발이 거세게 일어날 것이니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그걸 알고 있는 이상 모든 책임을 상대 가이드에게 떠넘길 수는 없을 거라고 다른 가이드들은 말했다. 왜냐하면, 이 부대 내에서, 그리고 센터의 관리 아래에서는 가이드 역시 훈련을 받고 감시와 관리를 받는 입장이니까. 게다가 16기까지 진행되는 동안 센티넬이 외출을 나갔다가 폭주하거나 문제를 일으켰다는 일은 없었기에 괜찮을 거라는 말이 많았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렇게 걱정이 된다면 진짜로 하루종일 같이 붙어다니면 되는 일이라고.
맞는 말이었다. 상대 센티넬이 A급이 아닌 이상 걱정할 이유는 사실상 없었으며 A급이라고 해도 평소 가이딩을 제때 받았고 나가서 별일이 없다면 폭주할 일은 없었다. 센티넬이 아예 어떤 의도를 가지고 테러 행위를 할 수는 있지만 그건 전적으로 센티넬의 책임을 물으니 가이드와는 상관이 없다. 그런데도 앨런은 자꾸만 상대 센티넬을 생각하고 신경쓰고 걱정했다. 가이드라는 특성을 갖고 태어난 이상, 센티넬을 관찰하고 옆에서 돌봐주는 게 당연한 일로 느껴졌다. 가이드야 센티넬이 없어도 살 수 있지만, 센티넬은 그렇지 않으니까.
혼자 여기저기를 거닐면서도 세림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는 의미였다. 물론 다른 센티넬에게도 똑같이 그랬었고. 평소 행실이나 성격을 보아하면 세림이 문제를 일으킬 것 같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연락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래서 뭐하냐고, 잘 하고 있냐고 메세지를 남길까 말까 고민한 게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결국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건 세림이 저를 귀찮아할까봐, 센티넬이니 센터니 능력이니로 복잡해져있던 생각을 겨우 환기시키는 중인데 제 메세지로 인해 다시 그런 생각을 하게 될까봐.
부대로 돌아가기 전 둘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만나 함께 출발했다. 가는 동안 앨런은 오늘 무얼 했는지 물어보았고 세림은 누구를 만났고 뭘 먹었고 어딜 갔다가 무얼 했는지 하나하나 이야기해주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세림이 정말로 즐거워보여서, 평범한 사람들과 같아보여서 앨런은 굳이 메세지를 남기지 않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지하철에서 내려 부대 문 앞까지 걸어가는 동안에도 둘은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었다. 세림은 들어가기 싫다고 했고, 앨런은 나도, 답하며 웃었다. 억압과 감시가 동반되는, 지루하고 반복되는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부대 내에서는 하고 싶은 일도 마음껏 하지 못하는데. 한껏 농땡이를 피우던 둘은 복귀시간에 늦지 않게 들어갔고, 소지품 검사를 하고 복귀 신고를 하고 나서는 정말로 각자의 내무반으로 돌아가야 했다. 갔을 때보다 늘어난 짐을 한 아름 안은 세림이 건물 앞에서 먼저 발걸음을 옮기려 할 때 앨런은 충동인지 계획인지 세림을 불러세웠다.
"세림아."
"응?"
막상 불러세우고 나니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불렀는지 정리가 되지 않았다. 계속 여기에 붙잡아둘 수도 없는데. 많이 떨어진 거리로 엇비슷해진 높이에서 눈을 맞춘 앨런이 웃어보였다. 전하려는 건 분명, 아주 단순한 말. 언제든 할 수 있는 말. 하지만 너무 늦어지면 안 되는 말. 그런 말.
"앞,"
"앞으로도 같이 나갈래, 앨런아?"
"… 응?"
그런데 선수를 뺏겼다. 역시 아까 오면서 먼저 말했어야 했는데. 앨런은 세림이 먼저 그렇게 말해줄 거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있었으므로 멍한 얼굴로 눈만 깜빡였다.
"어, 앞으로도 계속 훈련 같이 할 거잖아. 그러니까 그냥 계속 같이 나가는 것도 좋지 않을까? 매번 새로 구하려면 번거로운데…."
"…… 응. 그러자. 나도 그 말 하려고 했어."
"진짜? 내가 할 말 뺏어버렸네…."
선수를 뺏긴 건 황당했지만 기분은 좋았다. 같은 마음이었다는 의미다. 이유가 어쨌든, 앞으로 퇴소할 때까지 외출할 때는 세림과 함께 할 수 있다. 가는 길 오는 길만 함께한다 해도 상관없었다. 앨런에게는 외출하는 날 하루종일 누구를 생각하고 걱정할 지가 달린 문제였다. 어차피 누구와 함께 가든 상대를 걱정할 수 밖에 없다면, 조금 더 친해지고 싶고 편한 사람을 걱정하는 게 당연히 더 좋은 일이다.
"그럼 그렇게 알고 있을게. 잘 자, 세림아."
"응! 앨런이도 잘 자구 오늘 고마웠어."
출발했을 때처럼, 먼저 뒤돌아 가는 세림의 뒷모습을 끝까지 바라보다 앨런은 발걸음을 옮겼다. 누군가와 친해진다는 게 이렇게 어렵고 주저하게 되는 일이었던가. 어렸을 때는 이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적어도 미국에 있을 때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가이드라는 사실은 앨런이 외면하려고 해도, 무시하려고 해도 어떤 방식으로든 앨런을 바꾸어 놓고 있다. 이전과 똑같이 살고 싶은데,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건 자신 뿐만이 아니라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그럴 것이고, 이전과 똑같이 살 수는 없다는 사실에 누군가는 저항하고 누군가는 역행하고 누군가는 적당히 비위를 맞추며 살아가겠지만.
내무반으로 돌아와 저녁 점호를 마치고 자리에 누운 앨런은 오늘 하루에 대해 생각했다. 세림과 함께 나갔던 일이나, 아침에 보았던 하늘, 지하철에서 들었던 노래, 평범하게 일상을 보내는 사람들과 그 속에 평범하게 섞여있던 자신과 저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세림의 하루에 대해서. 앞으로 세림과 계속 친하게 지낼 수 있을까. 아무런 일 없이, 아무런 갈등도 없이. 세림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도, 그렇게 지낼 수 있을까. 자신있게 그럴 수 있다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앨런은 그저 눈을 감기로 했다. 내일 일어날 일은 아무도 모른다. 저도 세림도 센터의 그 누구도. 그러니 주어진 오늘을 있는 힘껏 살아갈 뿐. 후회한다 해도 어쩔 수 없다. 다음에는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하면 된다. 이곳에 들어온 지 반년이 지났다해도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정말 잘 하고 있는 건지도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앨런은 단 하나는 후회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5월, 그 3분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함께했던 너를 기억에서 지우지 않은 일. 그 웃음을 기억한 일.
너를 만나서 기억하고, 다행히도 다시 만날 수 있었던 일.
그것만은,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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