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엔딩 택틱스 3

어쩔 수 없이 열심히 하게 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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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증 오류 있을 듯


말에는 힘이 있다.

생각은 흐릿하게 추상으로 머릿속에서 머물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말로 꺼내는 순간 그건 선언이 되고 다짐이 된다. 그러므로 한 번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

세림이 뱉은 말은 약속이었다. 서로에게 특별히 문제가 생기지 않는 이상, 외출을 할 때에는 서로를 찾자는 약속.

앨런에게는 굳이 말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말할 생각 없지만, 앨런에게 먼저 제안한 이유는 사소했다. 세림은 매번 외출을 계획할 때마다 같이 갈 사람을 구하는데 쓸 만한 여유도 시간도 없었다. 하라면 할 수야 있겠지만 시간낭비로 느껴졌다. 매번 다른 사람과 나가야한다는 규칙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럴 필요도 없었다. 센터가 이어준 우연이지만 앞으로도 몇 달간 함께 훈련을 하고 얼굴을 볼 가이드가 앨런이었고, 마침 앨런도 쉬이 이곳에 적응하고 가까운 사람을 만들진 못한 것처럼 느껴졌고, 게다가 앨런과 함께 보낸 하루는 아무런 불편함이 없었다. 그렇다고 멋대로 앨런의 생각을 추측하는 건 좋지 못한 일이지만 아무튼 앨런도 저의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적어도 서로가 서로를 편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건 확실했다.

외출 파트너를 정하고 나니 세림은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앨런보단 덜하겠지만 세림도 낯을 가리는 편이고, 무엇보다도 누군가와 친해지는 것과 그 사람과 어떤 하루를 같이 보내는 건 다른 문제다. 친한 사람이 꼭 잘 맞는다는 보장은 없다. 세림은 만약 앨런과 잘 맞지 않는다면 또 외출 파트너를 새로 찾아야한다는 사실이 부담스러웠고 그렇기에 앨런이 무난한 사람이길 바랐고 앨런은 실제로 그런 사람이었다. 여기까진 좋은데, 그렇다고 앨런이 앞으로도 자신과 함께 나가줄지는 또 다른 문제여서 고민하다 헤어지기 직전에서야 말을 꺼냈던 건데 다행히 앨런이 괜찮다고 했다. 당장 급한 걱정거리 하나는 해결한 셈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세림에게 남은 걱정거리는 하나였다. 이능력과 친해지기. 근력 강화라는 외국어 마스터하기.

솔직히 말해서 이게 정말 외국어일 뿐이었다면, 딱히 숙달하지 않아도 살아가는 데에 지장이 없다면 이렇게까지 열심히 할 필요도 없었다. 실제로 세림은 그렇게 해왔다. 친해지고 싶지만 도저히 상대가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다면 그냥 포기했다.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은 걔 말고도 많았으니까. 가고 싶었던 식당이 문을 닫았다면 다른 곳을 갔다. 거기 말고도 식당은 많으니까.

이번엔 그럴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고 세림이 마주한 인생 최대의 시련이었다. 지금 이 능력과 친해지기 어렵다고 해서 능력을 바꾸거나 타인과 교환할 수 없다. 없애버릴 수도 없다. 그렇다고 있는 그대로 방치하고 내버려 두자니 언제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른다. 적당히 관리하자니 왠지 성에 차지 않았다. 세림이 완벽주의자는 아니지만 센티넬의 이능력이라는 건 말 그대로 언젠가 저 자신을 집어삼킬 수도 있는 위험한 친구였기 때문에 귀찮고 성가셔도 친해져서 제 말을 듣게 할 필요가 있었다. 센터가 시켰으니 모두가 그렇게 했으며 센터와 센티넬 모두가 그리 하니 세상도 당연히 센티넬들에게 그러길 요구했다. 세림이 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안 해도 되는 영역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강요를 받아 행동하는 게 유쾌한 일은 아니었지만 세림은 금방 인정했다. 해야하는 일은 해야하는 일이고, 나만이 강요 받고 있는 게 아니라고. 나에게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여기 있는 사람의 과반수가 겪고 있는 일이다. 이렇게 태어난 이상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다'는 말에 매이기는 싫었지만 정말 어쩔 수 없었다.

세림은 어쩔 수 없다는 말에 매이고 싶지 않아서 열심히 했다. 걱정거리가 하나 사라졌으니 몰입할 여유는 충분했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 여태까지 했던 노력도 모두 어쩔 수 없이 한 노력이 되고 새로 만난 사람들이나 쌓은 인연, 자신이 고뇌하고 걱정한 시간들도 전부 어쩔 수 없이 만들고 소모한 것들이 되어버리는 게 싫었다. 나중에 여기서 보낸 시간을 돌이켜봤을 때 누구보다도 나 자신에게 부끄럽고 후회하지 않을 시간이 되었으면 했다. '어쩔 수 없이' 흘려보내기엔 1년 6개월은 긴 시간이고 세림은 고작 스무 살이었다.

나 자신에게 어쩔 수 없다는 말에 매몰되지 말자고 다짐을 하고 싶어서 세림은 일어나서 조식을 먹고 훈련을 가기 전에 혼잣말을 한 적이 있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 열심히 하고 싶어서 열심히 하는 거야.

뱉은 말은 다짐이며 선언이 되었다. 열심히 해도 도통 발전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데 포기하고 싶지는 않아서, 벌써 체념하고 싶지 않아서 한 말은 세림 자신을 설득했고, 세림은 짧은 가을 동안 쓸데없는 생각을 할 시간도 없을 정도로 훈련에 몰두했다. 또한, 내가 열심히 하고 싶어서 하는 거라고 마음을 먹으니 세림 안의 이능력이란 친구도 세림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는지 이전보다는 훈련이 수월했다. 

"앨런아 이것 봐! 열다섯 번 연속으로 성공했어!!"

"우와~ 이제는 진짜 잘 하네!"

스무 개가 넘게 가져다놓고 해도 한두 개 될까 말까 했던 빈 캔 찌부시키기를 한 번의 실패 없이 15번 연속으로 성공했을 때, 그즈음의 세림은 눈을 감고도 벽에 부딪히지 않고 훈련실로 갈 수 있었다. 능력의 미세 컨트롤에 어느 정도 숙련되고 나서는 베테랑 센티넬의 조언에 따라 능력을 최대치로 발산하는 훈련에 돌입했다. 세림의 능력이 능력이니만큼 아무데서나 할 수가 없어서 좋든 싫든 매일 훈련실에 출석 도장을 찍는 나날이었다. 밥 먹고 훈련하고 쉬고 자고 이 루틴의 반복인 일상이었지만 나름 할 만 했다. 훈련의 성과가 조금씩이라도 보이니 의욕이 생겼다.

능력을 많이 쓰는 만큼 가이딩도 더 많이 필요해져서 세림이 훈련실 안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으면 앨런은 훈련실 안 격리된 공간에서 세림을 지켜보곤 했는데, 세림의 몸에 이상이 생기거나 갑자기 쓰러지면 바로 가이딩과 응급처치를 하기 위해서였다. 세림은 자주는 아니었지만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훈련 도중 주저앉았고 그럴 때는 걱정 가득한 앨런의 눈빛과 함께 꼼짝없이 가이딩을 받아야 했다. 그래도 가이딩 받으면 괜찮아져서 다행이라고 앨런이 말할 때마다 괜히 걱정시키는 게 미안하긴 했지만, 저가 아닌 다른 센티넬과 가이드들도 다 이런 상황에 놓여있을 테니 그런 미안함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가을이 다 지나고 12월이 되고 나서는 훈련실에 오래 붙어있기가 힘들었는데, 야외에서 훈련하던 사람들이 대부분 추위를 피해 실내로 들어오는 게 첫 번째 이유였고 세림이 노력 끝에 능력을 발전시킨 것처럼 세림 외에도 다양하고 강도 높은 훈련을 원하는 센티넬이 많아진 게 두 번째 이유였다. 그래서 세림은 늦가을에 그랬던 것처럼 하루종일 훈련실에 박혀서 스케일 큰 훈련을 할 수 없으니 부대 운동장이나 강당 같은, 이능력 훈련이 아닌 다른 훈련에 쓰이는 곳에서 있을 때가 많아졌다. 이능력 훈련에 집중해야하는 기간에 정작 훈련실이 부족하다는 게 어이가 없었지만 쉬어가는 시간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최근에 근육통이 심해지기도 했고, 가이딩을 받아도 어딘가 개운하지 않고 피로가 쌓인 느낌이 들기도 했으니 계속해서 몸을 혹사할 순 없었다. 

그동안 자신의 훈련에만 집중하느라 앨런과 오래 이야기할 시간이 그다지 없었는데, 앨런도 앨런 나름대로의 노력을 하고 있었다. 앨런이 말하길, 가이드가 받는 교육과 훈련은 대부분은 이론식이지만 때로는 센티넬들이 훈련하는 걸 지켜보며 어떤 능력을 가진 센티넬을 대할 때는 어떻게 해야하는지, 센티넬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행동이나 표정, 손짓 등을 보고 무엇을 알아채야 하는지 배우기도 한다고 했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게 많기 때문에 가이드에게도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 실제 센티넬들을 관찰하는 거였다. 이론식 교육만 하다가는 정말로 위급한 상황에 지레 겁먹고 아무것도 못 하는 가이드가 생기기도 해서 센터가 택한 방법이랬다. 다른 점은 그것 뿐만이냐고 묻는 세림에게 앨런은 가이드는 그 외에도 총기나 둔기와 같은 실제 무기를 다루는 훈련을 센티넬이 하는 것보다 훨씬 많이 한다고 말했다. 이는 센티넬을 위해서가 아니라 가이드 본인을 위한 훈련으로, 아군이 아닌 센티넬과 마주했을 때 가이드가 이길 방법은 사실상 무기 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마저도 전투 상황에서는 가이드가 무기를 들고 공격할 준비를 하기도 전에 센티넬은 손짓 하나로 가이드를 공격할 수 있을 확률이 월등히 높지만 말이다. 이건 앨런이 말하지 않아도, 세림 자신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총은 잘 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웃는 앨런에게 세림은 멋지다고 대답해주는 게 고작이었다. 서로가 서로의 유일한 편이 되어주지는 못할 망정 상처입힐까봐 매번 걱정해야 한다니, 어쩐지 서운해졌다. 안 그래도 복잡하고 어려운 인간관계가 두 배로 복잡해진 것 같아 잠시 침울해졌지만 이어지는 앨런의 말에 애써 털어냈다. 앞으로의 인간관계보다 더 중요한 지금의 문제가 많았고, 세림에겐 그것들이 더 급한 문제였다.

언젠가의 대화. 아직 12월에 머무르는, 앨런과 함께 하는 이능력 훈련이 두 달도 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요즘 어깨랑 팔이 계속 쑤신다며, 스무 살인데 벌써 늙은 기분이라 우울하다고 장난스럽게 말하는 세림의 어깨를 앨런이 주물러주고 있을 때였다. 앨런이 손에 힘을 가득 넣어 세림의 상체 여기저기를 꾹꾹 눌러주며 물었다.

"근데 세림이는 왜 그렇게 열심히 해?"

그 말을 들은 세림의 첫 감정은 의아함이었다. 다른 가이드도 아니고 앨런이 그런 걸 물어볼 줄은 몰랐다. 그야 세림이 봐온 앨런은, 군대나 이곳 센터에는 적응하지 못해도 자신이 가이드로 태어났으며 앞으로는 센티넬과 가이드, 그리고 일반인으로 나뉜 세상에서 살아야한다는 사실에 저보다도 빨리 적응한 사람이었다. 자신이 비범하게 태어났다는 사실에 절망하거나 슬퍼할 시간에 1초라도 빨리 받아들이고, 바꿀 수 없는 현실을 원망하고 아쉬워하는 것에 오랜 시간을 쓰지는 않는 사람. 그러므로 앨런이라면 센티넬인 자신이 이능력 훈련에 몰두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할 거라고 무의식적으로 여기고 있었다. 마음 속에서 정해진 답은 있었지만 앨런이 기대한 답과는 다를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세림은 그 답을 내놓았다.

"으음, 일단 열심히 안 하면 어떻게 될 지 모르니까 위험하고…."

"위험하고?"

"근데 그냥, 열심히 하고 싶어. 내 능력이니까…. 잘 다루게 되어서 나쁠 건 없지."

그렇구나아. 앨런은 그렇게만 대답하며 계속해서 세림의 어깨나 팔을 천천히 주무르고 있었다. 역시 앨런이 기대한 대답은 아닌 것 같았다. 그치만 앨런이 기대한 대답이 무엇인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세림은 어쩐지 뻘쭘하고 머쓱한 기분이 되어 괜히 목 스트레칭을 했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하고도 익숙한 정적이 맴돌았다. 멀리 창틀 사이로 보이는 풍경이 흐릿했다. 곧 해가 떨어질 시간이었다. 

"내가 보기엔… 세림이는, 음, 되게…."

"응."

"…… 절실해? 보인다고 하나? 그랬거든."

"……. 내가?"

절실했었나? 그렇게 생각한 적은 없었다. 이왕 열심히 하는 거 사력을 다하면 좋으니 필사적으로 훈련하고 노력한 건 맞지만 그걸 절실하다고 표현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세림은 생각했다. 애초에 절실하다는 말은 어떻게 아는 걸까. 하지만 앨런이 '절실하다'는 말의 뜻을 잘못 알고 있을 거란 생각도 들지 않아서 세림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도대체 앨런이 본 나는 어땠길래 절실해 보였을까. 이 정도는 물어봐도 괜찮지 않을까.

"음… 왜?"

"나는 세림이를 잘 모르지만…. 그치만 그래도 계속 가이딩도 해주고, 옆에서 보고 그랬잖아."

"그치."

"가이딩해줄 때도 그렇고, 훈련하는 거 그냥 볼 때도 그렇고…. 위험한 일을 만들기 싫다거나, 이왕 하는 거 열심히 해야지… 보다도 더 깊은… 마음? 의지처럼 보였어."

"아… 그래?"

"응. 근데, 음, 내가 정답은 아니니까."

세림은 구태여 더 묻지 않았다. 앨런은 이미 충분한 대답을 해준 거라고 생각했다. 왜 내 행동이 그렇게 보였을까. 비단 행동 뿐만이 아니라 앨런이 가이드로서 저를 가이딩해줄 때도 그렇게 느꼈다는 건 훈련에 몰두한 몇 주의 시간 동안 내내 그래보였다는 의미였다. 세림 본인도 깨닫지 못한, 어떤 마음이 거기에 있었던 걸까. 세림은 일단은 자세히 말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앨런이 대충 보거나 자신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면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앨런이 알아채지 못하면 아마 세림 본인도 계속 모르고 있었을 거고. 한참 이야기를 하다보니 곧 석식 시간이었다. 둘은 함께 석식을 먹고 각자의 내무반으로 돌아갔다. 세림에게는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정말로 자신조차도 깨닫지 못했던 어떤 마음이 있었던 건지 찾아볼 시간이.

마침 다음 날은 훈련이 없는 토요일이었다. 12월이 되니 날이 급격히 추워져 세림은 조식을 먹은 후에는 내무반 본인의 자리에 박혀서 속세를 즐겼고, 중식을 먹고 나서는 가볍게 유산소 운동을 할 생각으로 몇 주 전 어머니가 보내주신 겨울 외투를 입고 야외로 나섰다. 부대 내에 따로 운동 기구나 헬스장이 있지는 않지만 부대 전체는 아주 넓기에 운동을 하고 싶거나 체력을 키우고 싶어하는 많은 사람들이 부대 한 바퀴를 돌곤 했고, 세림 역시 주말에 꼭 하루는 그런 식으로 가볍게 운동을 해왔다.

날이 추워 가을에 비하면 밖에 사람이 없었다. 날씨에 상관없이 세림처럼 꾸준히 나오는 사람들만 몇 보였다. 평소라면 옆으로 다가가 말이라도 걸었을 테지만, 오늘은 혼자 생각하고 싶어 나온 것이기 때문에 세림은 가벼운 인사만 건넸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도 굳이 세림에게 한 번 더 다가와 말을 걸지는 않았다.

봄에는 꽃이 군데군데 피어있고, 여름에는 초록이 무성했으며, 가을에는 노란색과 붉은색으로 물들곤 했던 부대 내의 나무들이 무채색으로 바뀌어가고 있는 게 보였다. 처음 여기에 왔을 때도 이런 풍경이었다. 올해 2월은 눈이 많이 오지 않았었으니. 이번 겨울에는 눈이 많이 올까. 화이트 크리스마스일까. 첫눈—엄연히 따지자면 한 해의 첫눈은 아니지만—은 저번 달, 그러니까 11월 말에 왔었다. 짧게 내렸다가 그친 눈은 다 녹아 자취를 감췄다. 밖에서 맞이하는 겨울은 좋았지만 어쩐지 이곳에서 맞는 겨울은 버석버석하게만 느껴졌다.

본 목적을 따라 세림은 앨런이 제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절실해 보인다고 하나. 더 깊은 마음이나 의지처럼 보였어. 그랬나. 자신에게 '절실함'이 있었나. 이곳에서의 생활이.

문득 세림은 이전에도 이렇게 며칠에 한 번씩 꼭 운동장이나 공원을 돌던 적이 있었다는 걸 떠올렸다. 

중고등생 때였다. 한참 축구를 하던 시기, 세림은 교내 축구부는 물론 지역 내의 청소년 FC에도 소속되어 있었고 이대로만 하면 선수가 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는 말을 곧잘 듣던 평범하고 꿈 많은 남학생이었다. 꿈이 많다기에는 꿈이 딱 하나였지만 어쨌든, 꿈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은 많았다. 세림의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한 시간 뛰고 힘들어하는 아이들이 있어서 세림은 코치님의 조언에 따라, 그리고 자신의 열정을 따라 최소 일주일에 한 번은 꼭 그렇게 다른 아이들과 학교 운동장이나 인근 공원을 몇 바퀴씩 돌았었다. 힘들지도 않았다. 그렇게 몇 바퀴씩 뛴 직후에도 경기를 할 수 있었다. 

그때는 즐거웠다. 다른 사람들도 세림이 즐거워보인다고 말했다. 아마 인생에서 가장 무언가에 열중했던 시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어떤 두려움도, 미래에 대한 불안도 없었다. 순수한 마음으로 즐길 수 있었다.

순수한 마음으로 즐길 수 없게 된 건 18살 때부터였다.

학교에서 단체로 SG 검사를 했다. 세림은 A급 센티넬 판정을 받았다. 검사 결과를 본 날은 부정했고, 아버지와 함께 등록을 마치고 집에 간 날에는 조금 울었다. 이유는 그냥, 무서워서. 아직 누구도 잘 알지 못하는 것이 되었다는 사실은 세림에게 실체없고 설명이 불가능한 두려움이었다. 부모님은 괜찮다며 다독여주셨지만 세림은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살 수는 없을 거라는 예감.

다 괜찮을 거라는 부모님의 말씀을 가득 챙겨 학교로 간 날, 세림은 평소처럼 지냈다. 검사 결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물어보지도 않았고, 누군가가 물어봐도 대답하지 않았다. 최대한 모른척했다. 아무 것도 보지 못한 척 했다. 그렇게 넘어갈 수 있을 줄 알았다.

그 날은 FC 팀 훈련이 있는 날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수업이 끝나고 집에 들르지도 않고 바로 축구장으로 향했다. 모든 게 평소와 같았다. 5월의 날씨는 봄보다는 여름에 가까워 삼십 분만 뛰어도 땀이 났지만 즐거웠다. 몇 시간을 그렇게 다 같이 뛰다보면 해는 금방 넘어갔고, 해가 넘어가고 슬슬 배가 고파질 때면 집에 갈 시간이었다. 자신의 짐을 챙겨 모두에게 인사하고 코치님께도 인사 드리고 집에 가려던 세림을 코치님이 불러세웠다. 잠시 할 말이 있으니 따라오라 했다. 세림은 영문도 모른 채 따라갔다. 따라간 곳에는 저 말고도 두 명이 더 있었다. 한 명은 학교에서도 종종 인사를 나누는 1학년 후배였고, 한 명은 팀에서만 본 얼굴이었다. 둘 모두 표정이 어두웠다. 

코치님은 세림을 포함한 셋에게 한 명씩 오늘 훈련에 대한 피드백을 한 번 더 전달했다. 셋 모두 칭찬 위주였다. 그렇게 분위기가 풀어지려던 찰나, 코치님은 '너희도 짐작했겠지만…'이라는 말과 함께 셋을 한 자리에 모은 진짜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본론은 이랬다. 셋 다 이번에 SG 검사에서 센티넬 판정을 받은 걸 알고 있다. 그것이 축구하는 데에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센티넬은 일반인보다 신체 능력이 뛰어나다는 연구 결과에 따라 일반인과 센티넬이 같은 경기에서 함께 뛰는 건 공평하지 않은 데다가 위험하지 않냐는 말이 나오고 있다. 프로 씬, 아마추어 씬 가리지 않고 그런 의견이 다수다. 그래서 일반인들이 센티넬과 함께 경기를 뛰고 싶지 않아한다. 무슨 말인지 아냐.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세림은 아직 이해가 잘 되지 않아 멍하니 발끝만 바라보았다. 아니, 사실은 이해했다. 부정하고 있었다. 세림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코치님은 세림을 콕 집어 이해했냐고 물었다. 세림은 끝내 그렇다고 대답했다.

센티넬만 있는 팀으로 옮기는 걸 추천한다. 여기 있어도 돼, 근데 말했듯이 그다지 좋아하진 않을 거야. 그리고 일반인들과 함께 뛴다고 해도 센티넬은 한 팀에 많아봤자 두 명이야. 가이드면 몰라도. 언제까지 숨길 생각은 아니잖아. 숨긴다고 숨겨지는 것도 아니고. 단 한 명으로 뽑힐 자신 있으면 남아도 되는데, …….

부정하고 싶어도 이해할 수 밖에 없었다. 축구 팀이 어떻게 꾸려지는지 아는 세림이니까 당연히 그랬다. 복수의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유틸리티 플레이어는 몇 없다. 대부분은 주력 포지션 내에서 다른 선수들과 경쟁한다. 그 사이에서도 주전으로 뽑히기는 쉽지 않다. 세상은 넓고 축구선수가 꿈인 사람, 축구를 잘하는 사람은 많으니까. 센티넬인 선수는 센티넬이 아닌 선수보다 더 촘촘한 경쟁을 해야한다고 코치님은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 뿐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코치님은 천천히 생각해보고 연락해도 되고 나중에 직접 말해줘도 된다고 하며 셋을 돌려보냈다. 축축 처진 발걸음으로 세림은 집으로 돌아갔다. 아무렇지 않은 듯이 저녁을 먹었지만 방에서는 조금 울었다. 자신이 센티넬이라는 사실이 자신의 꿈에도 영향을 미칠 줄은 몰랐다. 안일하게 생각했다. 그냥 조금 다르게 살 뿐이라고, 그렇게 착각했다.

그때의 기분을 세림은 기억한다.

세림은 그때, 포기하지 않았다. 그 빡빡한 경쟁률을 뚫어보겠다고 선언했고 코치님은 열심히 해보라고, 응원하겠다고 해주셨었다. 세림과 함께 불려갔었던 둘은 어느 날부터 팀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생각해보니 전에도 말도 없이 보이지 않게 된 팀원이 몇 있었다. 세림은 자신이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세림은 자신이 그 11명 중 한 명이 되어주겠다는 마음으로 남들보다 몇 배는 더 열심히 했다. 즐겁기만 해서는 부족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도 멈출 수 없었다. 어지간히 잘해서는 안 되었다. 특출나게, 특별하게, 누구보다 잘 해야 했다. 팀에서 가장, 포지션 내에서 가장, 센티넬 중에서 가장 잘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밤낮없이 훈련에 매달렸다.

그렇게 축구에 매진하며 살다가 병원에 간 적이 있었다. 인대가 늘어나는 횟수가 많아진 탓에 고통을 참으며 뛰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의사는 다행히 심각한 정도는 아니지만 계속 무리를 하면 상태가 악화할 게 뻔하니 지금부터라도 회복에 더 신경을 써야한다고 했다. 그날 저녁을 먹으며 병원에 다녀온 이야기를 하니 엄마도 아빠도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잠깐이라도 쉴까 생각 중이야, 하며 세림은 대충 그 상황을 넘겼다. 그러고선 자기 전 침대에 누워 홀로 생각에 잠겨있는데 엄마가 들어왔다. 발목은 괜찮니, 약은 먹었니, 다른 데 아픈 데는 없니, 같은 말 끝에 엄마는 그렇게 말했다.

"요즘의 세림이는 축구하는 게 즐거워 보이지가 않아."

그 말을 들었을 때 세림은 어떤 기분이었던가.

처음은 놀람과 의아함이었다. 두 번째는 깨달음이었다. 세 번째는 슬픔이었다. 

그때 세림은 엄마와 오래 대화를 나누며 모든 걸 인정했다. 예전처럼 즐거워서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는 것. 센티넬 축구선수로 성공하고 싶다는 마음에 노력이 아닌 무리를 했다는 것. 쫓기듯이 훈련을 해왔다는 것.

그럼 그 때 세림이 무엇에 쫓기고 있었냐 하면은,

두려움과 불안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부대를 두 바퀴만 돌려던 것이 세 바퀴를 돌고도 반 바퀴를 더 돌고 있었다. 가만히 서서 숨을 고르다가 가장 가까이에 보이는 벤치에 걸터앉았다. 발치에 보이는 돌멩이를 주워들었다. 말없이 바라보다 돌멩이를 집은 손가락에 힘을 주니 돌멩이는 돌 파편이 되어 흘러내렸다. 손가락 끝에 까끌까끌한 감촉이 남았다. 벤치에 등을 기대고 고개를 들어 바라본 주변의 풍경이 과거의 한 장면과 겹쳐보였다. 생각해보니 그때도 12월이었다. 눈이 오지 않아 온통 추운, 부는 바람이 차갑고 매서웠던 겨울. 앙상한 나무들을 보며 쓸쓸함을 느꼈던 겨울. 버석버석했던 겨울.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뎌내야만 했던 겨울.


영어로 화기는 firearm. 화기가 아닌 것들은 cold weapon이라고 부른다. 

앨런은 생각한다. 차갑지 않은 무기가 존재하긴 할까.

사람을 상처입히고 죽이는 데 쓰인다는 점에서 모든 무기는 차가운 게 맞지 않을까.

세림과의 만남이 신호탄이었던 걸까, 앨런은 점점 더 많은 사람들과도 친해지게 되었다. 친해졌다, 보다는 가까워졌다, 가 더 정확할 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이전에 비하면 발전한 셈이다. 센티넬을 따로 만날 기회가 많이 없어서 여전히 과반수가 가이드라는 점은 아쉬웠지만 대신 앨런은 그들을 통해 세림이 아닌 센티넬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훈련과 교육의 일환으로 많은 센티넬들을 관찰하고, 베테랑 가이드에게서 이야기도 듣고 하며 앨런이 깨달은 건 거의 모든 센티넬은 적극적으로 가이드를 필요로 한다는 점이었다. 겉으로는 가이드를 싫어하고 자신에게는 필요없다 말해도 죽음의 위기가 닥치면 센티넬은 가이딩을 필요로 한다. 가이딩이 아예 필요없는 센티넬은 없다. 순순히 죽고 싶어하는 센티넬도 거의 없다.

센티넬은 능력을 아예 쓰지 않아도 가이딩을 받아야 한다. 센티넬이 평범하게 일상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정말 평범하게는 살 수 없는 이유다. 퇴소하고 나서도, 모든 센티넬은 한 달에 한 번씩 신체검사를 받아야 하고 일주일에 최소 한 번은 가이딩을 권장받는다. 이식된 베리칩을 통해 항시 센터 측에서 위치추적이 가능하다. 터지지 않도록, 어차피 터질 거라면 최대한 나중에 터지도록 국가 차원에서 관리하고 감시하는 걸어다니는 시한폭탄 취급이다.

그런 취급이 싫어서 대부분의 센티넬이 특수부대 입대를 택했다.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처럼 평범하게 살지 못할 거라면 차라리 인간병기 취급을 당하며 조금 더 나은 대우를 받으며 살겠다는 생각이었다. 센티넬과 가이드만 있는 특수부대에서는 적어도 센티넬이라는 이유로 핍박 받을 일은 없으니까. 항시 주변에 가이드가 있고 헬스 케어도 국가에서 꼼꼼하게 해주니 오히려 생존율은 이 쪽이 더 높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얄팍한 자기합리화지만 완전 이해할 수 없는 말은 아니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앨런은 생각했다. 스스로 무기가 되길 택한 센티넬들은 차가울까 뜨거울까. 그들은 무기일까 사람일까. 센터는 그들을 무기 취급할까 사람 취급할까. 그들 옆에 있는 가이드는 그들을 무기 취급할까 사람 취급할까. 

"무기로 취급하는 건 사람 취급이 아닌데, 사람으로 취급하면 동정하게 될 것 같아. 근데 누군가를 함부로 동정하고 싶지는 않아…."

"그래도 사람으로 취급 받는 게 낫지. 사람… 이니까."

다음 외출 일정을 센터에 고지하고 돌아오는 길, 둘은 훈련실 구석에 걸터앉아 그런 대화를 나누었다. 먼저 이야기를 꺼낸 건 앨런이었다. 마땅히 물어볼 만한 사람이 세림 밖에 없었고, 대답이 궁금한 것도 세림 뿐이었다. 세림의 대답에 앨런은 역시 그렇겠지, 덧붙였다. 안 불쌍한 도구와 불쌍한 사람 중에 고르라고 하면 앨런도 불쌍한 사람 쪽을 골랐을 것이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나 동정심은 항상 나쁜 건 아니지만 도구 취급은 거의 항상 나쁜 것이라고 생각했다. 앨런은 사람이고, 세림 역시 사람이며, 여기 있는 모두가 사람이다. 

앨런은 고개를 돌려 제 옆의 세림을 바라보았다. 세림이 특수부대 입대를 택할 것 같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특수부대에 들어간다면 센티넬인 세림은 필히 누군가를 해하는 입장일 테니까. 앨런이 몇 달간 봐온 세림은 그런 걸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세림은 능력으로 누군가를 해하는 쪽보단 지키는 쪽이 어울렸다. 굳이 따지자면 보호보단 가해에 가까운 능력인 걸 아는데도 그랬다. 

"세림이는 평범하게 살 거지?"

"응. 싸우는 건 별로……."

"근데 엄청 열심히 하고. 대단하다."

"…… 아, 그…."

세림은 무언가 할 말이 떠오른 듯 보였다. 주변 눈치를 보는 것에 앨런이 왜 그러냐고 묻자 사람 많은 데서 하기는 조금 그런 이야기라고 했다. 그럼 다른 데 갈까? 물으니 세림은 어차피 곧 같이 나가니까, 그때 밖에서 이야기하겠다고 답했다. 앨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세림이 머쓱해하고 있었다.

"괜히 기대하게 만든 거 같은데…."

"세림이랑 나가는 건 항상 기대하고 있으니까 상관없어!"

앨런이 웃자 세림도 따라 웃었다. 오후 훈련이 끝나기까지 고작 한 시간도 남지 않았다. 앨런이 가이딩과 격려의 뜻을 담아 가볍게 안아주자 세림은 가만히 그 포옹을 받아들였다. 처음 만난 날 했던 의무적이고 상투적이고 기계적이었던 포옹과는 많이 달랐다. 타인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지라도 둘에게는 다르다. 앨런은 그렇게 믿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둘의 두 번째 외출은 지난 외출과는 조금 달랐다. 세림도 앨런도 12월에 휴가를 써서 연말에 가족들 그리고 친구들과 보내고 왔기에 한 달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빠듯하게 하루를 써서 본가에 다녀올 이유가 없었다. 둘이서 데이트한다고 생각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맞았고, 둘 모두 간만에 갖고 있는 옷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겨울옷을 골라 입었다. 함께 외출 신고를 하고, 부대 밖으로 나와 역 앞에서 헤어지는 게 아니라 같이 지하철을 타고 삼십 분 정도 이동해서 세림을 따라 요즘 세림과 앨런 또래의 아이들이 주로 논다는 서울의 도심으로 갔다. 세림은 그래도 익숙한 듯 보였지만 앨런은 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한국에 온 직후에는 한국과 학교에 적응하느라 바빴고, 주말에는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었다. 이런 소위 핫플레이스에 혼자 올 만한 배짱은 없었고 앨런을 이끌고 같이 가자고 권유하는 사람도 딱히 없었다. 

"… 생각해보니 세림이가 처음이네."

"여기 온 거?"

"아니. 학교가 아니라 진정한 사회로 나와서 사귄 한국인 친구."

그게 너라서 다행이다. 그런 말은 묻어두고 그저 웃었다. 세림은 조금 부끄러워하며 그렇겠네, 했다. 사실 세림이 아니었어도, 미루지 않는 이상 입대는 무조건 스무 살이 되는 해의 2월에 하게 되어있으므로 다른 사람과 친해졌다면 그 자리는 세림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이전에 다짐했던 것처럼, 그 사람이 하필 세림이어서 다행이었다. 후회하지 않을 만한 사람이어서.

세림과 함께 그날 앨런은 평범한 대한민국의 21세처럼 놀았다. 도착하고 나서는 브런치 카페를 갔고(메뉴 세 개 시키려던 걸 자제해서 두 개만 시켰다) 천천히 주변을 걸으며 서점이나 문구점에도 들렀다. 세림은 평일 낮이라 그래도 사람이 없는 거지 주말에는 말도 못하게 사람이 많아서, 그럴 때는 길 안 잃어버리게 조심해야 한다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앨런은 이렇게 넓은 거리에 사람이 꽉 차려면 얼마나 많아야하는 건지 상상하곤 했다. 한 시간 정도 돌아다닌 후에는 사람이 더 많아지기 전에 점심을 먹을 식당을 찾아 들어갔다. 세림은 앨런의 입맛을 걱정했으나 앨런이 가지 말고는 딱히 싫어하거나 못 먹는 게 없다고 하자 그럼 내가 가고 싶었던 데 가도 되냐고 물었고 앨런은 동의했다. 점심으론 규동을 먹었고 후식은 탕후루였다. 대형 오락실에서 같이 게임도 했고 인생네컷이라는 것도 찍었다. 길거리에서 키링이나 악세사리를 파는 곳이 많아서 같이 구경했고 앨런은 가족들에게 주고 싶다며 귀여운 키링을 세 개 고르기도 했다.

군대에서 밥 먹듯이 하는 게 체력 단련이고 훈련이다 보니 둘은 지칠 새도 없이 걷고 구경했다. 둘 중 누구도 힘들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몸이 힘들어도 마음이 즐거웠다. 사실 앨런은 세림이 조금 피곤하다고 느낄까봐 중간중간 세림의 눈치를 슬쩍 봤는데, 세림 역시 한껏 즐거워 보였다. 센티넬이고 가이드고 없는 세상에서 평범하게 만났다면 내내 이런 모습이었겠지, 싶었다.

그렇게 시계를 볼 틈도 없이 걷고 놀다보니 하늘이 조금씩 어두워졌고, 해가 질 시간이 되어가니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아직 해가 완전히 지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의 식당이 오후 영업을 시작하고 낮의 일과를 마친 사람들이 거리에 하나둘 나타날 때 즈음, 더 추워질 것 같은데 일단 실내로 들어가는 게 어떠냐는 세림의 말을 따라 둘은 한적한 카페를 찾아 들어갔다. 사람이 많은 카페도 많았지만 굳이 한적한 카페를 고른 건 밖에서 이야기하겠다던 그것 때문이겠지. 세림은 춥지도 않은지 수박 주스를 시켰다. 사실 앨런이 시킨 것도 아이스 아메리카노였으니 추위 안 타는 건 거기서 거기였지만.

2층짜리 카페의 구석 창가에 나란히 앉은 둘은 창밖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함께 바라보며 별거 아닌 이야기를 나누었다. 센터에서 주는 밥도 맛있긴 한데 뭔가 급식 먹는 기분이야. 어떻게 보면 급식이지 뭐. 너는 학교 다닐 때 급식 많이 먹었어? 응, 그래서 일부러 늦게 먹었어. 일찍 가면 모자랄까봐 많이 안 줬거든. 나는 배고파서 그냥 일찍 가서 먹었는데.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이야기를 하다가 정적이 찾아왔다. 앨런은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잠시 후 자리로 돌아가는 앨런의 눈에 의자에 앉아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는 세림의 뒷모습이 보였다. 왜 이리 어색할까. 사실 너에게도 나에게도, 부대에 있을 때보다는 이런 모습이 자연스러운 게 맞을 텐데. 애써 생각을 지우며 다시 자리에 앉자 세림이 고개를 돌려 앨런을 바라보았다. 

"그, 하려던 말이 있는데."

앨런 역시 세림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곤 작게 웃어보였다. 뭐든 말해도 좋다는 의미였다. 무슨 말이길래 그래? 궁금해지네~. 장난스럽게 말하자 세림이 부끄러우면서도 어딘가 곤란해하는 얼굴로 손을 꼼지락거렸다.

"… 저번에 앨런이가 그랬잖아. 내가 절실해 보인다고."

"그랬었지."

"왜 앨런이가 그렇게 봤을지 생각을 해 봤어."

의외였다. 사실, 앨런은 세림이 너무 몰두하거나 무리하지는 말았으면 하는 마음에 한 말이었다. 보통은 그렇게 말하면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곤 하니까. 세림에게 어떤 문제가 있다거나 이상해보인다는 의미는 아니었는데 그 말을 듣고 생각까지 했다니 말이 잘못 전달되었던 걸까 하는 마음에 조금 초조해졌다. 일단은 세림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세림은 말을 고르는 듯 입술만 옴짝달싹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세림이 어렵사리 꺼낸 말은 앨런이 최근 몇 달간 가이드로서 센터에서 지내면서 깨닫게 된 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 나는, 무서웠던 거야."

"… 뭐가?"

"… 내가, 능력을 잘 다루지 못해서, 다른 사람들을 다치게 할까 봐."

"……."

"물론 열심히 하고 싶었던 것도 있는데, 그런 마음으로만 열심히 했던 건… 아닌 것 같아."

센티넬은 가이드를 필요로 한다. 죽고 싶지 않아한다. 그리고,

"언젠가 폭주했을 때 소중한 사람을 다치게 할까 봐……."

자신의 폭주를 두려워한다.

자신의 존재를 두려워한다.

그 뒤로 세림은 긴 이야기를 꺼냈다. 이전에도 좋아서 하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어떤 감정에 쫓기듯이 몰두한 적이 있었다고 했다. 그 대상은 그 당시 세림이 가장 좋아했던, 평생의 꿈으로 여겼던 축구. 좋아하니까 즐겁고 즐거워서 좋아했고 좋아하니까 열심히 했던 일이, 그 중심에 있는 마음이 어느새인가 애정이 아니라 강박이 되었던 일.

"원래는 그냥 멋진 축구선수가 되고 싶었던 건데, 최고가 되지 않으면 안 되게 되니까, 점점… 힘들었어. 기대가 아니라, 내가 이 순간에도 누군가에게 밀리고 있으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이 더 커져서.

즐길 수 없게 된 거야. 좋아서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 원하지 않는 결과를 피하기 위해서 열심히 하는 게 됐으니까. 어쩔 수 없이 열심히 하게 됐으니까.

그래서, 이번에도 어쩔 수 없이 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려고 했었는데….

근데 앨런이 말 듣고 생각하니까, 그냥… 그때랑 똑같았던 거지. 좋아서 하는 줄 알았는데 쫓기고 있는 거.

나는 딱히…. 내가 센티넬인 게 무서우면 무서웠지, 좋아한 적은 없으니까아…."

세림은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앨런은 무어라 답하는 게 좋은지 전혀 모르겠어서 고개만 끄덕였다. 세림이 말을 마치고 난 후에는 어색하게 팔을 뻗어 어깨를 토닥였다. 친해졌다고 생각하지만, 어쩐지 평소 같은 반응을 할 수 없었다. 세림이 무슨 마음으로 그 시간들을 견뎌왔을지, 무슨 기분으로 여태껏 훈련에 임해왔을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똑같이 일반인이 아니라 해도 가이드인 앨런이 이해할 수나 있을까. 스스로마저도 두려워하며 살아갈 센티넬의 삶을.

어떤 말도 섣불리 할 수 없어 앨런은 고민 끝에 말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세림은 자신이 분위기를 어둡게 만들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지 미안해하는 얼굴로 오히려 고마운 쪽은 자신이라고, 앨런이 한 말 덕분에 진짜 자신의 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세림은 고맙다고 했지만, 그게 정말 고마운 일이 맞을까. 괜히 세림의 아픈 기억을 건드렸던 건 아닐까. 앨런은 그저 시선만 굴리다가 또 긴 고민 끝에 한마디를 전했다.

"힘내자, 우리."

"응. 우리 얼마 안 남았잖아."

세림은 그렇게 말하곤 남은 수박 주스를 단번에 마셔버렸다. 순식간에 텅 빈 세림의 컵을 말없이 바라보던 앨런이 자신의 컵에 꽂힌 빨대에 입을 가져다대고 한 번 빨아들였다. 앨런의 컵 역시 음료는 금방 동나버리고 얼음만이 남았다.

"이제 갈까."

"응. 더 있다간 저녁 못 먹고 들어가겠다."

앨런이 빈 컵 두 개를 양손에 들자 세림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컵을 들었다. 앨런이 안 들어줘도 괜찮다고 말했지만 세림은 그래도 내가 마신 건데, 하며 컵을 들고 먼저 계단을 내려갔다. 유쾌하지는 않은 이야기를 한 게 몇 분 전인데도 태도에 변함이 없이 여전히 다정한 세림이 좋았다. 당연한 거 아니냐고 한다면, 그 당연한 일을 당연한 일로 만들어주는 게 좋다.

카페를 나온 둘은 저녁으로 가볍게 고기를 먹고(둘에게는 가벼웠다) 늦기 전에 지하철을 타고 부대로 돌아갔다. 복귀 시간에 아슬하게 맞춰서 저번처럼 괜히 시간을 끌 순 없었지만 저번보다 더 즐겁고 시간 가는 줄 몰랐던 하루였다. 내무반으로 돌아와 가방 정리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니 어느새 점호 시간이었고, 오늘 세림과 보낸 하루를 한 번 더 더듬어볼 틈도 없이 앨런은 자리에 누웠다. 

누워서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고 있으니 고작 3달쯤 전, 세림과 처음 함께 나갔던 날이 떠올랐다. 가는 길, 오는 길만 함께 했던, 세림과 이렇게 계속 가깝게 지낼 수 있을 지에 대한 확신도 없었던 때. 괜한 걱정이 아니라, 그때의 앨런은 정말로 자신이 없었다. 자신의 말마따나 학교를 벗어나 제대로 성인이 되어 사회에 나오고 나서 한국인 친구를 사귄 적이 없었으니까. 조금 더 열심히 했다면, 더 적응을 잘하고 모두에게나 더 싹싹하게 굴었다면 친구를 더 많이 사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무래도 좋아졌다. 아무도 이곳에 친구를 사귀려고 들어오진 않을 거고, 그건 앨런도 세림도 마찬가지일 테다. 너무 고립되지만 않는다면, 완벽하게 소외되지만 않는다면 그걸로 된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괜한 걱정해서 좋을 거 없지. 

완벽히 이해하거나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지만, 전혀 이해하지 못하거나 공감할 수 없는 사람도 없었다는 데에 앨런은 안도했다. 그리하여 누구도 미워하지 않을 수 있어서. 

그런 마음만이라도, 원래 그래왔던 대로 할 수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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