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엔딩 택틱스 4

나랑 친구해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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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증 오류가 여전히 존재합니다.


ASG 대한민국 서울 지부 16기 센티넬 가이드의 모든 공식 훈련 일정이 끝났다.

2월 초, 세림이 이곳에 들어온 지 딱 1년째 되던 날. 센터는 세림과 같은 16기 사람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그렇게 전했다. 필수적으로 받아야 하는 훈련이나 교육은 완료되었다. 그렇지만 신체 검사는 계속 받아야 하고, 기상 시간, 식사 시간 같은 하루 일정은 똑같이 진행된다는 소식이었다.

대부분이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1년 동안 예상치 못한 사태가 벌어진 게 아니고서야 고지된 일정이나 정해진 시간을 지키길 강요해왔던 센터가 갑자기 내리는 자유시간이라니. 게다가 센티넬이나 가이드 한 쪽에만 그렇게 전달한 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이라니. 센터 측 사람들은 어쨌든 이제부터 전역일까지, 이전과 같이 시간과 규칙만 잘 지킨다면 크게 터치하지 않을 것이며, 계속해서 훈련이나 교육을 받고 싶은 사람은 말만 하면 언제든지 도와주겠다는 말을 남기고 모두를 해산시켰다. 섣불리 믿기 어려운 말이었지만 센터가 굳이 번거롭게 모두를 모아놓고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었다. 모두가 갑자기 주어진 자유를 낯설어했다. 누군가는 갑자기 맘껏 놀라니 그게 더 어색하다면서 익숙하게 훈련실로 향했고, 누군가는 바로 내무반으로 돌아갔고 대다수는 어정쩡하게 서서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았다. 그리고 세림도 그 방황하는 사람들에 포함되어 있었다.

세림은 일단 내무반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여태 지내는 동안에는 몸을 움직이는 일이 많았기에 편한 옷을 주로 입었고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세림은 자신의 자리에 앉아 멀뚱히 있다가 일단 옷부터 갈아입었다. 정해진 일정이 없다고 해도 핸드폰을 회수했다가 저녁에나 돌려주는 건 같았기에 당장 할 일이 없었다. 부대 내에서는 정말 오랜만에 입는 자켓의 핏을 한번 점검하고 세림은 일단 건물 밖으로 향했다.

아직 기온이 낮은 겨울 아침이지만 운동장에는 사람이 꽤 있었다. 몇 달 전의 자신처럼 저 멀리 구석에서 능력 훈련을 하는 듯한 사람도 보였고 한 달쯤 전의 자신처럼 부대 내를 열심히 달리고 있는 사람도 보였으며 편의점 근처에서 대충 시간을 보내는 듯한 사람도 보였다. 그러고보니 교육실이나 휴게실 같은 곳의 창문으로 부대 운동장이나 공터를 볼 때에, 이 시간에 밖에서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들은 뭐하는 사람일지 궁금해한 적이 있었다. 세림은 이제야 그 사람들이 뭘 하고 있었던 건지 알 수 있었다. 그 사람들도,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다. 지금의 세림처럼, 다른 사람들처럼.

세림은 편의점에서 커피 한 잔을 사서 나왔다. 커피라고 해봤자 기계로 내리는 것도 아니고 잘 포장된, 인스턴트 맛이 강한 커피였지만 부대 내에서는 오랜만이었다. 이야기 밖에 할 일이 없어 주말의 공원처럼 대화의 장소가 된 운동장을 보며 세림은 앨런이 지금 뭘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아마 앨런도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에 있었을 테고, 그럼 저와 똑같이 갑자기 주어진 자유를 어색해하고 있을 터였다. 핸드폰이 없으니까 연락도 안 되고, 내무반 어디에 머무르는지도 물어본 적이 딱히 없어서 세림에겐 앨런을 찾아갈 방법이 없었다. 센터에 물어보면 알려주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마주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편의점 커피가 슬슬 질려 평범하게 물을 마시게 된 지 5일째 되는 날, 세림의 우연은 이루어졌다. 정확히 15일을 기다린 때였다.

일주일 전 정해둔 루틴대로 운동기구가 있는 훈련실로 가던 중, 누군가가 깜빡하고 닫지 않아 반쯤 열린 이능력 훈련실의 문 사이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사실 실루엣보단, 직감으로 알아보았다. 훈련실 내부는 매우 넓어 문밖에서는 얼굴이 잘 보이지 않으니까. 세림은 자신의 직감을 따라 훈련실 안으로 들렀고 누군가와 진지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앨런을 발견했다.

앨런 옆에 있는 사람은 풍기는 분위기나 복장으로 보아 동기는 아닌 듯 보였다. 곧장 말을 걸려다가 괜히 분위기 깰까봐 세림은 어색하게 등을 보이고 서서 능력을 써보는 척하며 둘의 대화를 엿들으… 려고 했다.

"세림아!"

밝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세림은 어정쩡하게 뒤를 돌아보며 어, 앨런아, 대답했다. 앨런은 언제 그랬냐는 듯 환히 웃으며 제 쪽으로 다가왔고, 세림은 우연히 마주친 척 해야하는지 아니면 솔직하게 행동해야하는지 갈림길에 섰다. 세림이 두 개의 선택지 사이에서 고민하는 사이 앨런과 함께 있던 여자가 다가와 먼저 말을 건넸다.

"이 분이 앨런 씨 파트너였던 분이에요?"

"네…. 그리고 친구예요."

자신이 누군지를 소개하는 데에 뒷말은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앨런이 구태여 친구라고 언급해준 것이 세림은 내심 기뻤다. 고민에 소모하던 기력이 사라지자 살가운 웃음이 절로 나왔다. 세림이 인사하자 여자도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요 며칠간 앨런의 훈련과 상담을 도와주고 있다고 말했다. 훈련은 훈련인데, 상담이라니? 무슨 주제인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고민 상담이라면 나도 할 수 있는데. 혹시 좋아하는 사람인 건…. 세림이 남몰래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자 앨런이 말했다.

"나, 좀 더 전문적인 가이드가 되고 싶어서."

"전문적인… 가이드?"

"응."

그럼 나는 비전문적인 센티넬인가. 종종 앨런의 말은 쉽지만 그 진의를 단번에 파악하지는 못하겠다고 세림은 생각해왔다. 방금 같은 말이 가장 좋은 예시가 되겠다. 꼬치꼬치 캐묻자니 수상하게 보일 것 같아서 일단 세림은 잠자코 앨런과 여성의 눈치만 살폈다. 앨런은 무슨 할 말이라도 있냐는 얼굴로 세림을 바라보았고 여성은 둘의 대화를 우선시하는 듯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세 명이서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어, 어…. 힘내…! 나도 응, 응원할게."

"고마워~"

어쩐지 끼면 안 되는 곳에 낀 기분이었다. 뭐랄까, 눈치껏 피해줘야 할 것 같은 기분. 급하게 자리를 피할 각을 재던 세림을 말없이 보던 여성이 곧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여성은 가볍게 웃더니 앨런을 보고는 물었다.

"아, 아직 말 안 하셨나 보네요."

"네…. 좀 더 확실해지면 말할까 했는데."

무엇을? 앨런이 제게 말하지 않은 게 무엇이 있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세림을 보던 여성이 앨런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오늘은 이만 가볼게요. 친구 분이랑 이야기 나누세요."

"네, 오늘도 감사했습니다."

그러더니 여성은 열린 훈련실 문 사이로 나가버렸다. 기다리던 시간이긴 하지만 어쩐지 자신 때문에 둘 모두를 어색하게 만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여 세림은 계속 눈치만 보았다. 앨런은 그런 세림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꼭, 외출 파트너로서 하루종일 함께 다녔던 날들처럼. 생각보다 먼저 손이 나갔다. 손끝에 온기가 닿았다. 앨런이 세림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밥은 먹었지?"

"으, 응."

"여기 너무 시끄러우니까 밖으로 가자."

별로 시끄럽지는 않았지만 둘만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기에 세림은 순순히 앨런을 따라갔다. 평소에는, 그러니까 부대 밖에서는 자신이 앨런의 손을 잡고 이끌었었는데. 이끌어지는 입장이 되니 오묘한 기분이 들어 세림은 그저 바닥만 바라보며 걸었다. 앞선 앨런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렇게 걷다 멈춘 곳은 주로 신체검사가 이루어지는 건물의 1층 구석에 있는 어떤 방문 앞이었다. 앨런은 그제서야 세림의 손을 놓고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여긴… 휴게실이네."

"응. 근데 여기가 제일 사람이 없더라고. 신체검사하는 날 빼고."

앨런은 그리 말하고는 웃으며 소파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단조로운 회색의 소파는 벽에 붙어 길게 뻗어있고 그 앞에는 직사각형 모양의 테이블이, 테이블 위에는 휴게실을 깨끗하게 쓰자는 내용의 코팅된 종이가 붙어있고 갑 티슈 한 개가 놓여있다. 더이상 시선을 돌릴 곳이 없어지자 세림은 상황을 받아들이곤 앨런의 옆에 앉았다. 소파는 그리 폭신하지도 딱딱하지도 않았다. 부대 내의 모든 휴게실 소파가 다 그랬다.

그러니까, 세림은 앨런을 보고 싶었던 거지 이렇게 단 둘이서 나란히 앉아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아마도 그렇다.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 것 같은 공기를 느끼며 세림은 제 무릎께만 괜히 문질렀다. 긴장하면 안 된댔는데….

"… 선배 가이드 분이셔. 아까 그 사람."

"선배…?"

"응. 우리 훈련 지도해주시는. 아니, 해주셨던 분."

"그렇구나. 어쩐지 초면이더라."

"그치이. 전투 상황에서 침착하게 판단을 내리는 걸 잘 한다고 해주셨어. 가이드로서 딱이래."

가이드로서의 판단이라니, 그런 건 세림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몇 달간 종종 시간을 보내고 외출을 함께 했지만 둘은 나가서는 부대 내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부대가 아닌 곳에서 굳이 센터나 부대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도, 그럴 시간도 없었다. 둘의 시간은 밖에 있는 것들, 부대 내에는 없는 것들로도 충분히, 행복하게 채울 수 있었다. 부대 내에서 마주칠 때는 둘이서 대화하는 시간은 적었고 그마저도 세림이 이야기하면 앨런이 듣고 맞장구 치는 게 대부분이었다. 나는 생각보다 앨런이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그때서야 세림은 생각했다. 그런 주제에 앨런이 물어보지 않아도 모든 걸 다 말해주길 바라고 있었던 거다.

"아까 했던 말처럼, 확실해지면 말해주려고 했는데…. 들켰으니 어쩔 수 없네."

"…… 뭔데?"

잠시 흐르는 정적이 참을 수 없이 길게 느껴졌다.

"나, 전역하고 나면…. 특수부대에 들어갈 거야."

앨런이 꺼낸 말은 너무나도 예상 밖이었다. 세림은 뭐라고, 어, 그게 무슨 소리야… 같은 최소한의 반응도 나오지 않았다. 테이블에 있던 시선을 앨런에게 둔 채로, 세림은 그저 듣고만 있었다.

"갑작스럽게 들리겠지만 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거야. 상담도… 계속했었고. 강요 받은 것도 아니야."

"…."

"그래서…. 계속 더 훈련받고 있었어. 그러다보니 바빠서 세림이한테 말할 시간도 없었네."

너무 충격받지 않도록 노력하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지는 않는다. 세림은 애써 침착하며 짧게 응, 하고 대답했다. 사실 그렇게 놀랄 일도 아니다. 특수부대 입대를 택하는 센티넬이나 가이드는 많다. 돌연변이로서 불안을 끌어안고 사회에서 평범한 척을 하며 사는 것보다 같은 사람들과 동질감을 느끼며 벼락처럼 내려온 능력을 기꺼이 쓸모있는 곳에 바치는 게 마음 편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세림도 많이 봐왔다. 당장 세림 본인이 좌절한 것도 절대 그들과 같아질 수 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앨런은 한국인도 아니다. 출국 제한이 걸려있으니 완화될 때까지는 무조건 한국에서 살아야한다. 외국인으로서, 그리고 또 가이드로서. 고향도 아닌 나라에서. 그러니 앨런의 선택은 대단히 놀랄만한 일도 아니고 납득할 수 없는 일도 아닐 텐데. 그럼에도 이렇게 복잡한 기분이 든다면, 그건….

"… 이제라도, 더 말해주면 안 돼? 왜…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는지."

그런 중대한 선택을 내게 말하지 않았다는 이유. 그 이유 때문이겠지. 우린 그 정도의 사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앨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 옆에 놓인 정수기 앞으로 가더니 물 한 컵을 떠서는 세림의 앞에 놓아둔다. 세림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맙다고 말하는 게 전부였다. 앨런은 자신이 떠온 물컵과 세림을 느리게 번갈아보다가 입을 열었다.

"나, 파일럿이 되고 싶었어. 그거 때문에 한국에 온 건 아니지만. 여기서든 미국에서든 대학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시험을 보고, 합격해서. 그래서 언젠가는 꼭 비행기 조종석에 앉아서, 하늘을 날아보고 싶었어."

앨런의 말에서 세림은 기시감을 느꼈다. 그 카페에서, 자신이 앨런에게 긴 이야기를 하던 때와, 그때의 자신과 비슷한 목소리와 어투였다. 곧 세림은 앨런의 꿈의 결말도 예측할 수 있었다. 아마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겠지. 그래, 앨런도 가이드니까. 평범한 사람이 아니니까. 5%의 인간이니까.

"근데 센티넬이나 가이드는 파일럿을 할 수 없대. 조종석에 앉아있다가 무슨 일이라도 벌어지면, 아무리 부기장이나 승무원이 있다고 해도 기체 자체가 위험해지는 건 막을 수 없으니까. 맞는 말이지, 응. 맞는 말이야."

"… 응….."

"그래서 댄서로 꿈을 바꿨어. 그건 뭐…. 누구든 할 수 있고, 설령 무대 위에 있다가 어떤 상황이 벌어진다고 해도 주변에 사람도 많고… 내려가면 되니까. 딱히 반대하는 사람들도 없고.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는데…."

"응."

"…… 여기 와서, 훈련을 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세림이도 만났고. 그 사람들을 보면서 생각했어. 아무리 내가 원한 게 아니라도, 이런 체질? 능력…? 을 갖게 되었는데, 그걸 써서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다면… 그게 맞는 거 아닐까. 그래야 하는 거 아닐까… 하고."

세림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컵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컵의 남은 물 안에 잠시 즐겁게 운동장을 돌던 몇 년 전의 자신이 스쳐지나갔다.

"그냥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나, 누구랑 해도 가이딩 잘 되는 편이고, 심신도 안정되어 있고, 여러모로 되게 유능한 가이드라고 하셨어. 그리고, 특수부대는 가이드가 많이 없대. 센티넬들이 더 많이 입대하는 것도 있고, 애초에 가이드가 수가 더 적어서. 그래서…."

"응, 무슨 말인지 알아."

쟁취한 게 아닌, 원하지도 않은, 그렇지만 부여된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따르겠다는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세림은 평생 순종적이지도 반항적이지도 않은,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하고 그럼에도 해야하는 건 하는 사람으로 살아왔다. 질서나 도덕 같은 것을 어지럽히지 않는 선에서 마음이 가는 대로 살아왔다. 그러니 세림에게 앨런의 결정은 논리적으로는, 이성적으로는 이해해도 마음으로는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딱히 원하거나 간절하지 않은데,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걸 택하겠다는 마음. 그건 도대체 어떤 마음인지. 그걸 선택할 수 있는 네 마음은 얼마나 강한 건지.

"… 응원할게."

그러니 세림이 할 수 있는 말은 그것 뿐이다.

"고마워, 세림아. 나도 너 응원해."

"힘들면 나한테 말해. 같이 놀자."

차마 함께 하겠다고는 할 수 없다. 웃으며 앨런의 어깨를 토닥여주는 순간에도 세림에겐 그럴 용기도 마음도 없다. 아마 앨런도 특수부대에 들어가는 자신을 상상하기 어려울 거다. 마땅히 이어 나갈 말이 없어 세림은 궁금하지도 않은 걸 이것저것 물었다. 특수부대 입대도 조건이나 시험이 따로 있는지. 지원율이 많이 높은지. 관두고 싶을 때 마음대로 관둘 수 있는지, 그런 것들을. 앨런은 아는 선에서는 대답했지만 자세한 건 입대를 확정하고 나서야 알려준다고 했다. 우리, 계속 친구로 남을 수 있는 거지. 그것만은 묻지 못했다.

그날, 앨런과 헤어지고 나서부터 잠에 드는 순간까지 세림은 앨런에 대해, 앨런이 내린 결정에 대해 생각했다. 특수부대에 들어가면 아마 다시는 보지 못하겠지. 특수부대도 휴가와 외출이 있지만 지금처럼 같이 나가는 건 불가능하다. 횟수조차도 그리 많지 않다. 애당초 특수부대원은 센티넬이고 가이드고 사실상 고립되어 살아간다. 국가 보안을 위해서, 그리고 평범하게 살아가기로 택한 모든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서. 앨런이 정말로 입대를 택한다면 앨런과 만나서 편하게 대화를 나누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건 올해가 마지막이 될 것이다. 말로는 친구여도 만나서 놀 수 없을 것이다. 그저, 군인과 일반인이 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한 번씩 이런 식으로 친구와 멀어지고 헤어진다. 싸우지 않았어도, 그저 물리적 거리가 멀어져서. 혹은 상황이 여의찮아서. 혹은 더이상 친하게 지낼 이유가 없어서. 혹은 친하게 지내면 안 되는 사이가 되어버려서. 혹은 어떤 이유도 없이. 살면서 만난 모든 친구와 여전히 친구 사이로 지내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다. 어떤 인연은 오래 가고 어떤 인연은 스쳐지나가고 어떤 인연은 평생 가고 어떤 인연은 놓아주어야 한다. 모든 인연을 데리고 갈 수는 없다. 세림은 그걸 알고 있다.

앨런이 자의로 선택한 일이다. 그러니 이해해야 한다. 응원해줘야 한다. 세림이 그걸 반대할 자격은 없다.

그걸 알고 있는데.

어차피 할 일도 없겠다, 세림은 앨런의 선언을 듣고 나서부터 앨런을 졸졸 따라다니며 앨런이 받는 훈련을 지켜보았다.

어떤 훈련은 관전이 가능했고 어떤 건 불가능했다. 이론 교육은 관전이 관전이 아니라 사실상 같이 듣는 거였고, 총기와 흉기 등 무기를 다루는 훈련은 유리 벽 너머로 관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실제 센티넬 폭주 대비 훈련, 이능력 대비 훈련 같은 건 일절 허락해주지 않았다. 이유를 물으니 안전상의 이유가 첫째지만, 그런 훈련을 보는 것만으로도 어떤 센티넬은 영향을 받기도 한다는 이유였다.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반박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세림이 주로 보는 건 이능력 훈련실, 테스트실 따위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앨런의 모습이었다. 앨런의 모습은 늘 비슷한 듯 달랐다. 어느 날은 홀가분해보였고 어느 날은 심란해보였고 같은 날이라도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얼굴이 달랐다. 안심한 얼굴로 들어갔다가 심각한 얼굴로 나오는 날도 있었고 긴장한 얼굴로 들어갔다가 웃는 얼굴로 나오는 날도 있었다. 어떤 얼굴도 세림을 향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지켜보았다. 앨런의 선택을, 그 과정을.

그런 나날이 2주 정도 지속됐다. 2주 후에는 세림도 그만두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슬슬 부대 운동장에 초록 잎이 돋아나기 시작해서. 그리고 당사자인 앨런이 부담스러워해서.

부대에서 맞는 두 번째 생일은 휴가를 내어 가족들과, 친구들과 통으로 보냈다. 누구에게도 앨런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다른 인연과 친구들이 그랬듯, 세림에게 앨런은 서서히 멀어지는 사이가 되는 듯했다.

그런 식으로 놔둘 수 없다고 생각한 계기는 단순했다.

3월에는 세림 자신의 생일이 있고, 4월에는 앨런의 생일이 있다.

앨런은 휴가에서 돌아온 세림을 반기며 생일 선물을 건네주었다. 쇼핑백도 아니고 포장지에 싸서 리본 장식까지 한, 누가 봐도 정성이 보이는 선물이었다. 보시다시피 포장하는데 신경 좀 썼으니 너무 막 뜯지 말라는 앨런의 말에 세림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같아서는 앨런의 앞에서 뜯고 싶었는데, 둘이서 있을 만한 공간도 시간도 없어서 세림은 내무반에 아무도 없을 때 조용히 들어와 자신의 자리에서 정성스럽게 선물을 개봉했다. 솔직히 생일은 기억해도 생일선물을 챙겨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고양이와 강아지 패턴의 포장지가 감싸고 있던 건 캡모자였다. 투명 비닐에 잘 감싸진 캡모자는 당연히 새 것, 모양을 유지하기 위한 보형물도 그대로 있는 채였다.

캡모자는 심플한 디자인에 블랙이었다. 함께 외출할 때마다 둘은 자주 쇼핑을 했는데, 쇼핑을 하며 세림이 했던 말을 기억하고 고른 디자인인 듯싶었다. 같이 나간 날 중에 앨런이 모자를 구경한 날은 없었으니 아마, 휴가를 나갔을 때 3월에 있을 세림의 생일까지 미리 생각하고 산 것이겠지. 세림을 생각하며 고르고, 포장까지 하고. 이미 그 사실에 감동하고 있을 때 세림의 눈에 카드 한 장이 잡혔다. 사진엽서였다. 한쪽 면에는 미국 어딘가의 풍경이, 한쪽 면에는 앨런의 글씨체로 적힌 글이 있었다.

[ Happy birthday to my friend~ *^ ^*

옷이나 신발은 너무 부담스러울까봐 ㅜ ㅜ 모자는 괜찮지? ><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

ps. 나랑 친구해줘서 고마워 세림! ]

자신의 취향을 생각해서 선물을 고르고, 그걸 그냥 주는 게 아니라 포장까지 했는데, 거기에 카드까지 있는 걸 본 세림이 앨런의 생일을 그냥 넘길 수는 없었던 거다. 만약 앨런이 입대하면 올해 앨런의 생일은 자신이 챙겨줄 수 있는,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 생일이 될 텐데. 받기만 할 수는 없다는 어떤 자존심과 고마움이 세림의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세림은 흔쾌히 마지막 남았던 휴가를 4월 초에 또 썼다. 어차피 세림에겐 남은 의무 훈련도 없으니 아무리 부대 안에서 맞이하는 여름이 덥다고 해도 실내에 짱박혀있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었다. 더위는 매 여름마다 찾아오지만 자신이 챙길 수 있는 앨런의 생일은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른다. 그런 기회를, 세림은 놓치고 싶지 않았다.

선물을 고르는 데에 생각보다 시간이 들었다. 앨런은 좋아하는 게 뭐냐고 물어도 두루뭉술하게 대답하고 싫어하는 걸 물어도 별로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라 뭘 줘야 좋아할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뭘 받아도 기뻐할 거라는 건 알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진심으로 기뻐할 만한 선물을 주고 싶었다. 그런 고민 끝에 고른 건 겨우 만년형 다이어리와 펭귄 키링. 이럴거면 필요한 게 뭔지 아예 물어볼 걸. 조금은 후회했다.

꽃이 그려진 포장지도 샀다. 책상 앞에 앉아 선물과 포장지, 부착하면 끝인 리본을 늘어놓고 고민하고 있으니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그냥 선물 포장 해달라고 하면 알아서 잘 해줬을 텐데. 직접 포장하겠다니 무슨 생각이었을까. 그래도 이왕 산 김에 해보자는 마음으로 선물을 잘 겹쳐놓고 포장지를 자르고 접고 붙이고…. 리본을 예쁘게 묶을 자신이 없어서 산 리본을 붙이고 나니 선물 포장이 끝났다.

그렇지만 어쩐지 허전한 기분이었다. 이걸로 된 걸까. 나만이 해줄 수 있는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다른 누구도 아니고, 나만이 줄 수 있는 생일 선물이.

"여기 오려고 그렇게 갑자기 외출하자고 한 거야…?"

"응!"

그래서 무작정 앨런을 찾아가 같이 외출 나가자고, 언제 시간 되냐고 물었다. 생일날 전후로는 세림이 그랬던 것처럼 휴가를 쓸 계획이라길래 휴가 쓰기 이틀 전날로 약속을 잡았다. 부대를 나와서 둘이 곧장 향한 곳은 잠실역이었다.

원래 세림의 계획으론 에버랜드에 데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부대가 있는 곳은 서울이라 용인까지는 너무 멀었다. 자차를 타고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택시를 타고 가자니 택시비만 몇만 원이 들고 대중교통으론 가는 데만 두 시간이 걸린다. 실내가 아니라서 더위를 정면으로 맞서며 돌아다녀야 한다는 불편함도 있었다.

앨런은 롯데월드는 처음 와본다고 했다. 한국에 와서 가족들과 동물원은 갔어도 놀이공원은 간 적이 없다고 했다. 세림 역시 센티넬 발현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매표소 직원은 둘 중 한 분이라도 센티넬이 계시냐는 말과 함께 확인을 요청했다. 티켓을 구입하고 입장까지는 수월했지만 들어가고 나서도 많은 게 달라져있었다. 롤러코스터나 자이로드롭, 바이킹 같은 스릴 있는 놀이기구 안내문에는 센티넬은 꼭 가이드와 동행해달라는 문장이 추가되어 있었다. 이것 외에도 센티넬이 무슨 짓을 저지를까봐 추가 투입된 인력, 그리고 기술들이 많겠지. 세림은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앨런의 생일을 축하해주고 싶어서, 자신만이 해줄 수 있는 걸 해주고 싶어서 여기에 데려온 거니까.

평일의 롯데월드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가족 단위로 놀러 나온 사람이 많았지만 전체적으로는 한적했다. 덕분에 둘은 모든 놀이기구를 한 번씩 다 탔다. 둘 다 딱히 놀이기구를 무서워하는 편이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세림은 앨런이 무서워한다면 타지 않을 생각이었으나 앨런이 오히려 저것도 타보자며 세림을 이끌었다. 굿즈샵도 둘러보고 어이없을 정도로 비싼 스티커 사진도 찍고 핫도그랑 슬러시도 먹었다. 롤러코스터를 탈 때 내려가는 순간에 찍힌 사진을 보고 한참을 웃기도 했다. 다행히도 앨런은 아무런 걱정 없이 즐거워보였다.

부대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둘은 2층 난간 앞에 나란히 서서 퍼레이드를 구경했다. 4월의 퍼레이드 테마는 봄꽃 무도회. 꽃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무용수들, 퍼레이드 차들이 우르르 쏟아져나와 1층 전체를 누비며 춤을 추었고 어떤 사람들은 음악에 따라 자신들의 자리에서 춤을 추었다. 앨런은 꼭 작은 축제를 보는 것 같다며 퍼레이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아무런 걱정 없이 행복할 수 있다면 좋을텐데. 세림은 앨런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앨런아. 앨런아?"

"응?"

"이거. 생일 선물이야."

퍼레이드 노래가 멈춰 잠시 조용해진 틈에 세림은 가방에 고이 모셔두었던 생일 선물을 건넸다. 앨런은 선물과 세림을 번갈아보더니 활짝 웃었다.

"뭐야… 오늘 이렇게 같이 논 걸로도 엄청, 좋았는데. 선물이 따로 있었어…?"

"당연하지. 너도 나한테 줬잖아."

앨런은 받은 선물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집에 가서 가족들 앞에서 뜯어볼게, 라고 했다. 가족들 앞에서 언박싱이라니, 좀 부끄러울 것 같은데. 그리 말하자 앨런은 어차피 어디서 뜯든 너는 모르지 않냐며 웃었다. 머쓱해져 그건 그렇지, 답하자 앨런은 재차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퍼레이드는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지고 다시 진행된다는 안내 방송이 울렸다. 앨런은 1층의 풍경을 내려다보다 세림의 손을 잡았다.

"가자."

"응? 지금?"

"응. 여기서는 세림이 목소리 하나도 안 들려."

슬슬 돌아가야하는 시간이긴 하지만, 세림은 앨런이 퍼레이드를 끝까지 보자고 할 줄 알았다. 다른 이유가 있겠지 싶어 세림은 앨런을 따라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지하 매표소 앞까지 나오자 아까의 소란이 무색하게 조용했다. 저녁 쇼핑을 즐기거나 늦은 퇴근을 하는 사람들의 발소리만이 들렸다.

"고마워, 세림아. 갑자기 나오자고 하길래 나는 무슨 일이라도 있나 싶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았네."

"재밌었다면 다행이야. 안 피곤해?"

"응. 피곤하진 않은데, 고맙다는 말은 잘 들리는 곳에서 하고 싶어서."

"…… 아."

그러니까, 같이 놀고 퍼레이드를 구경하는 것도 물론 재밌고 좋지만 자신에게 고마움을 제대로 전달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는 뜻이다. 세림은 조용히 웃었다. 그러고보니, 세림도 앨런에게 할 말이 있었다. 직접 해주고 싶어서 카드나 편지를 따로 쓰지 않았다. 자신의 글씨를 앨런이 잘 알아볼 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둘째치더라도.

"물론, 나 말고도 다른 사람들… 친해진 사람들 있겠지만. 그래도, 같이 훈련도 하고 외출도 계속했으니까…. 작년에는 못 했던 걸 올해는 해주고 싶었어. 생일을 축하해주고,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재밌는 하루를 만들어주는 거."

"그러네. 작년 생일 때는 부대 내에서 축하해주는 사람은 같은 내무반 사람들 몇 명 말고는 없었으니까."

"… 입대, 정말 하는 거야?"

"일단은… 그럴 거 같은데."

앨런의 그 말을 들은 지 약 두 달. 실질적으로 앨런이 특수부대 입대를 위한 훈련을 받기 시작한 지는 이제 곧 석 달. 세림이 앨런을 따라다니며 지켜본 건 고작 이 주다. 앨런이 그리 가벼운 마음으로 결정을 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자신이 1년 정도 본 앨런의 시간은 앨런의 전체 삶에 비하면 일부일 뿐이고, 따라다니며 훈련을 지켜본 2주는 더 일부분이다. 이래라저래라 할 자격도, 권리도 없으며 당위성도 없다.

그래도 전하고 싶은 말이, 세림에겐 있었다.

"앨런아. 그냥… 걱정돼서 하는 말인데."

"뭔데?"

지하 통로를 걷던 둘이 멈춘 곳은 잠실역 안 분수대 앞이었다. 외국에 있는 분수대를 보고 감명을 받았는지 표절한건지 어쨌든 보고 만들었다고 하는 분수대. 빈 벤치에 둘은 나란히 앉았다. 등 뒤로는 물소리가, 눈앞으로는 분주한 시민들의 발소리가 가득했다.

"… 특수부대에 들어가는 건, 정말로 앨런이가 하고 싶은 일이야?"

"… 음."

"입대를 반대한다기 보다는…. 음, 그러니까. 걱정 돼."

"그렇겠지."

"가이드로서, 앨런이를 나라에서 필요로 할 수도 있지. 사람들이 필요로 한다는 건 알아. 그… 마음? 기대? 를 저버리기 싫은 기분도… 알아. 그치만, 앨런아."

"… 응."

"다른 사람이 아니라, 앨런이가, 너 자신이 필요로 하는 건 그게 맞는 거야?"

앨런은 조금 놀란 표정으로 보더니 곧 시선을 돌렸다.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오지랖일지도 모른다. 아니, 실제로 오지랖이다. 알고 있지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해야하는 말이 있었다.

"… 나는 앨런이가 뭘 좋아하고, 뭘 중요하게 생각하며 살아가는지…. 거기까지는 몰라. 아, 그렇다고 알려달라는 건 아니고. 아무튼. 근데, 내가 본 앨런이는… 훈련을 받는 너는. 그렇게…….

행복해보이지는 않았어."

"… 그래?"

"… 응. 오늘처럼 웃는 건 못 본 것 같아."

세림이 1년간 앨런과 친구로 지내며 알게 된 점이 있다면, 앨런은 그냥 짓는 웃음과 진짜로 좋아서 짓는 웃음이 확연히 다르다는 사실이었다. 세림이 본 앨런은 습관처럼 웃고 있었다. 때로는 세림에게도. 그런 행동이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정말로 좋을 때는 어떻게 웃는지를 보고 나서는 계속 신경이 쓰였다. 그냥 지나가는 가이드가 아니라, 이제는 친구니까 더더욱.

"앨런이가 아무 생각 없이 결정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그치만, 그래도 나는… 조금 더 고민했으면 좋겠어. 특수부대에 들어가서, 가이드로서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게 앨런이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인지. 평생 그런 일을 하면서 살아도 정말 괜찮을지. 그렇게 하는 게… 앨런이에게 행복한 일인지."

"…."

"… 나는 좋아하는 걸 하면서도 힘들었으니까. 진심으로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는 건… 더 힘들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해."

"… 알았어. 고마워, 세림아. 무슨 말인지 알았어."

"참견처럼 느껴졌다면 미안…."

"아냐, 걱정해서 해준 말이잖아."

앨런은 앉아서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세림은 그런 앨런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걱정과 참견은 어떻게 다른 걸까. 모든 참견이 걱정은 아니지만 모든 걱정은 참견이 되는 거 아닐까. 적어도 세림 자신이 하는 걱정은. 앨런은 받은 선물과 가방을 챙기고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세림을 향해 손을 뻗었다.

"가자. 지금 안 가면 늦겠다."

"응."

부대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는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앨런이 피곤한 듯 보여 굳이 말을 걸지 않았다. 복귀 신고를 하고 소지품 검사를 하고, 헤어지는 길에서 둘은 언제나처럼 인사를 나눴다. 내일 출발하기 전에 인사하러 올게. 응, 잘 자! 생일 축하해! 부대로 돌아온다는 건 곧 일상이 된 비일상으로 돌아온다는 것. 여기서 나가기 전까지는 부대에서의 나날들이 '일상'이다. 잘 준비를 마친 세림은 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다. 내일부터는 정말로 참견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는 본인이야말로 뭘 하고 싶은지 정하지 못했으니까. 내겐 그럴 자격이 없을 거야. 있어도 더는 안 돼. 다짐과 동시에, 하루종일 재밌게 놀은 여파로 세림은 금방 잠에 들었다.


하고 싶은 일과 잘 하는 일이 일치하면 축복이라고들 한다. 많은 사람들이 하고 싶은 것과 잘 하는 것이 달라서 평생을 그 가운데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산다.

그래서, 이 일이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 아니라고? 또 기상나팔이 울리기 전 눈을 뜬 앨런은 그때처럼 천장의 무늬에 시선을 둔 채 생각했다. 앨런 역시 좋아하는 일을 잘 하고 싶다고 바랐던 사람이다. 누구나 그걸 바란다. 비행기 조종에 소질이 있기를. 몸치가 아니길. 다정하게 살 수 있기를. 쉽게 이루어지는 건 하나도 없었다.

무언가를 잘 한다는 건 노력으로만 되지는 않는다. 비행기 조종을 잘 한다고 해도 타고나길 몸이 약하거나 고소공포증이 있다거나, 기압을 버티지 못하면 파일럿이 될 수 없다. 내가 한 동작을 익히는데 일주일이 걸리는데 비해 1시간이면 끝인 사람도 존재한다. 노력하지 않아도 날 때부터 다정한 사람이 있다. 세상은 그런 식으로 모두에게 불공평하다. 누군가에겐 당연하게 있는 게 누군가에겐 당연하게도 없고, 누군가에겐 과하게 많은 게 누군가에겐 부족하고, 그런 식으로.

어쩌면 나는 그래서, 내가 잘 하는 것을 좋아하고 싶다고 생각한 걸까. 생각지도 못했던, 어느 날 벼락처럼 내려온 가이드라는 체질과 그에 따르는 신체 능력을, 판단 능력, 대처 능력을 좋아하고 싶다고 생각해서, 그래서 나 자신까지도 속였던 걸까.

어릴 때부터 우리 가족은 대체로 하고 싶다는 건 반대하지 않고 응원해주고 지지해줬다. 형에게도 그랬고, 나에게도 그랬다. 심각하게 악영향을 끼칠 만한 선택이 아니라면 해보라고, 많이 실패해봐야 성공도 많이 하게 된다고 말하곤 했다. 비밀스럽게 형에게만 특수부대 입대를 이야기했을 때, 형은 조금 놀랐지만 그것이 네 선택이라면 반대하진 않겠다고 했다. 형이 그렇게 말했으니 아마 부모님도 비슷한 반응일 것이다. 누군가를 지키고 싶다는 이유라면, 마음껏 질릴 때까지 지키고 오라고. 그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그래서 세림이 말을 꺼냈을 때는 조금 놀랐다. 아마 세림도 알고 있었을 테다. 자신이 아무런 생각도 고민도 없이 내린 결정이 아니라는 것 쯤은. 멘토 가이드인 혜성 씨를 포함해서 많은 특수부대 소속 가이드들과 이야기를 나누어봤다. 대부분은 나쁘지 않은 선택이니 각오만 되어있다면 추천한다고 했다. 일반인으로 살다가 뒤늦게 특수부대에 들어오고 나서 더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다고 했다. 그들 중 누구도 내가 아직도 망설이거나 고민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알아챘는데도 모른척했을 수도 있지만.

무엇이 내 진짜 마음일까. 세림이 본 대로, 나는 정말로 내게 행복하지 않은 선택을 했던 걸까. 나보다 남을 더 위하는 선택을 했던 걸까. 만약 그랬다면 나는 왜 그런 선택을 했던 걸까. 불합리하고 불공평한 세상을 조금이라도 덜 미워하고 싶어서 한 발버둥이었을까….

집에 가서는 일부러 특수부대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혼자 마중 나온 형에게도 절대 말하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두었다. 원래라면 5월부터 입대 신청이니 슬슬 말해두려고 했지만, 세림의 말을 듣고 조금 더 고민해보기로 했다. 누군가를 위해 살아가는 게, 내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일인지. 그것이 내게 행복한 선택인지.

부대로 돌아오는 날에는 완연한 여름 날씨였다. 예전에는 이정도로 덥지는 않았는데, 지구온난화의 영향이겠지.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바꾸거나 되돌릴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있다, 가 아니라, 많다.

짐을 풀자마자 숙소를 나와 세림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전의 그 휴게실로 가볼까 하다가 그냥 훈련을 받으러 가기로 했다. 먼저 찾으러가도 당장 할 말이 있지는 않았다. 아직 고민을 끝내지 못한 탓이었다.

익숙하게 훈련실에 들어서자 혜성 씨가 웃으며 휴가는 잘 다녀오셨냐고 물었다. 나는 좋았다고 간결하게 대답했다. 잠시 뜸을 들이고는 입대는 확실히 결정하신 거냐고도 물었다. 곧장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망설였다. 세림의 말을 듣기 전이었다면, 네, 가족한테도 말했어요… 라고 했겠지만. 애써 웃으며 조금만 더 고민해보겠다고 했다. 혜성 씨는 따라 웃으며 시간은 많으니 충분히 고민하고 생각해보세요, 말하고는 훈련실의 조작보드 앞으로 가 섰다. 곧 5월이잖아요. 오늘 훈련은 폭염 대비 훈련이에요. 나는 익숙하게 캐비닛에서 장비를 꺼내 착용했다.

점심시간이 다 되어 훈련실을 나오자 복도 의자에 세림이 앉아있었다. 세림은 에어팟을 낀 채 핸드폰에 열중이었다. 축구 영상이라도 보나. 혜성 씨에게 인사하곤 조심조심 세림의 앞으로 다가갔다. 세림의 얼굴 위로 내 그림자가 살짝 겹칠 때 쯤, 세림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어, 깜짝이야. 끝났어?"

"응. 근데 왜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어?"

"아…. 그, 집에 잘 다녀왔냐고 인사하려고."

세림은 머쓱하게 웃더니 급하게 에어팟을 뺐다. 급하게 빼느라 귀에서 뺀 에어팟 한 쪽이 세림의 손에서 떨어져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허리를 숙여 줍고는 세림에게 건넸다. 세림은 아이처럼 웃으며 고마워, 말하고는 두 쪽 다 케이스에 잘 넣어 닫고는 주머니에 넣었다. 그 모든 동작을 빠짐없이 지켜보았다.

"잘 다녀왔지. 맛있는 것도 엄청 많이 먹었어. 좀 살찌지 않았어?"

"흐음? 잘 모르겠는데. 전이랑 똑같은데?"

오랜만에 함께 줄을 서서 기다려 중식을 먹었다. 오후에 세림은 부대 건물 안 체력단련실에서 운동을 할 거라고 했다. 세림은 집에 가서 뭘 했는지, 훈련이 힘들지는 않은지 같은 것들을 물으면서도 특수부대 입대에 대해서는 전혀 묻지 않았다. 꼭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는 것처럼 굴었다. 앨런은 그런 세림의 태도가 배려인지, 아니면 체념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쩐지 쓸쓸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세림은 일주일 내내 그런 태도로 일관했다. 온갖 것들에 대해 말하고 물으면서도 입대의 입 자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앨런은 처음에는 세림의 그런 부분적 침묵이 부정적인 감정에서 기인한 거라고 생각했다. 네가 어떻게 하든 이젠 신경쓰지 않겠다든가, 아무래도 좋다든가, 나는 할 말 다 했다든가, 그런 체념과 포기에 가까운 마음일 거라고.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세림이 그렇게까지 부정적으로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세림 본인의 일도 아니고 자신의 일인데, 왜 세림이 그렇게까지 미워하고 무시하고… 어쨌든 싫어할까. 세림은 이유없이 사람을 좋아해도 이유없이 사람을 싫어하지는 않는 사람인 걸, 앨런은 알고 있었다.

그러니 세림의 의도적 침묵은 아마 자신에 대한 배려다. 확실히 입대를 할지 말지 결정하고 자신에게 말하기 전까지는 재촉도 만류도 하지 않겠다는, 네 선택을 기다리겠다는 존중의 표현이다. 언젠가 세림은 우리 둘이 있으면 나만 계속 떠들지 않냐면서, 그것이 조금 미안하다고 했었다. 하지만 세림은 앨런이 말하지 않는 것을 가장 잘 보는 사람이다. 적어도 이 부대 내에서는 그렇다.

5월에 예정되어 있던 신체검사 날, 둘 모두의 차례가 끝나고 앨런은 세림과 부대 내 어딘가에 짱박혀 영화를 같이 보기로 했다. 같이 본다고 해봤자 부대 내 휴게실에 설치된 패드로 보는 거였지만 혼자 보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리 폭신하지도 딱딱하지도 않은 소파, 네모난 정사각형의 화면, 한 쪽씩 나눠 낀 에어팟, 에어팟이 껴지지 않은 귀로 들리는 서로의 숨소리와 문밖의 발소리와 잡음. 러닝타임 동안 완전히 집중하기는 힘들지만 서로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니 그걸로 충분했다.

영화는 그저 그랬다. 휴게실 소파처럼, 재밌지도 재미없지도 않았다. 세림은 그래도 해피엔딩이라 좋다고 말했고 앨런은 배우의 연기력이 마음에 들었다고 말했다. 주인공 소꿉친구로 나온 배우 있잖아, 가이드래. 그래? 그럼 신인이겠네. 앞으로 센티넬이나 가이드 연예인이 많이 늘어날 거라고 어떤 평론가가 그러더라. 사람들의 이유없는 미움은 곧 이유없는 끌림이 될 거라나…. 그랬으면 좋겠다. 응, 그랬으면 좋겠지.

하늘이 맑아 산책하기 좋은 날씨지만 그만큼 기온도 높아 밖에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던 둘은 패드를 덮고 나서도 계속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자유가 주어졌다해도 이런 날씨에 밖에 선뜻 나갈 수 있는 건 온도 조작이나 얼음이나 물 능력을 가진 센티넬들 뿐이라, 실내 공간은 어딜 가도 사람이 있을 터였다. 둘은 잠시 나란히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각자의 핸드폰만 봤다. 캘린더 어플을 띄워놓은 화면만 뚫어져라 보던 앨런이 먼저 침묵을 깼다.

"세림아. 나, 입대 안 할 거야."

"응?"

"특수부대 안 갈 거라구."

앨런의 시선은 캘린더 어플 속, 5월 1일에 등록해놓고 아직 지우지 않은 'submit papers'에 있었다.

"아예… 결정한 거야?"

"응. 말하는 건 세림이가 처음이야."

세림은 조금 놀란, 또는 당황한 얼굴로 앨런을 바라보았다. 앨런의 시선은 여전히 핸드폰 화면에 있었다.

"특수부대에 가면, 가이드로서의 나는 만족하고, 행복하겠지? 그치만…."

"… 응."

"그냥 사람으로서의 나는 별로 행복하지 않을 것 같아. 행복할 수도 있지만……."

"응."

"안 맞는 옷을 억지로 입은 느낌이 들 것 같아."

"…… 그래?"

세림의 반응은 어쩐지 떨떠름해 보였다. 이 말을 하면 세림이 가장 좋아하고 안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앨런은 그제서야 세림에게 시선을 두었다. 세림은 입만 미묘하게 웃는 채로 고개를 숙였다.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아닌 표정. 앨런은 왜 그런 표정이냐고 물었다.

"…… 친구라면, 꿈을 응원해주는 게 맞는데……. 뭔가, 내가 괜히… 앨런이의 꿈을…… 막, 막은 거 아닌가… 싶어서."

"…… 으하항. 그런 걸 걱정했어?"

"… 응……."

세림이는 바보네. 그리 말하며 앨런이 세림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손가락이 어깨에 아슬하게 걸쳤다. 앨런은 다독이듯이 손가락을 움직여 세림의 어깨를 두드렸다.

"막는 건 아무 이유도 없이 하지 마! 그만둬! 이러는 거고~. 세림이는 날 위해 어드바이스를 준 거잖아. 그걸 내가 받아들인 거고. 그게 왜 막는 거야?"

"… 응원해주지 못해서?"

"응원해주지 못할 수도 있지. 아무튼 난 오히려 세림이한테 고마워하고 있으니까, 미안해하지 마."

"… 그래?"

"응."

세림의 어깨에 둘렀던 팔이 내려갔다. 앨런은 5월 1일에 등록된 일정을 삭제했다. 5월에 남은 일정은 오늘로 등록된 신체검사 뿐이다. 핸드폰을 옆에 두고선 테이블 위에 올라가있던 자신 몫의 아이스티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얼음이 다 녹은 아이스티는 거의 물맛이었다.

"세림이가 솔직해서 좋아. 나였으면 그냥….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을 거야. 내가 말을 해도 될 그런 게… 아닌 것 같아서."

"그거… 솔직하다랑은 좀 다른 거 같은데?"

"그런가? 어쨌든. 음, 우리 가족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타인이 하겠다는 일에 굳이 뭐라고 안 하거든. 터치를 안 하는 건 아닌데, 듣기에 막… 엄청 나쁘거나 위험한 일이 아니면 하게 냅둬."

"좋은 가족이다. 서로가 하는 일을 응원해주는 거잖아."

"그치. 그러니까 세림이한테 고마운 거야! 나도 우리 가족들도 아무도 그렇게는 말 안 했을 거라구."

"… 그렇게 되나?"

"그래. 물론, 지금도 조금 해보고 안 맞으면 관두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만…. 나는 또 한 번 시작한 건 잘 포기 안 하니까…."

"그치그치. 앨런이 포기 안 하지. 서른 살 될 때까지는 했을 걸."

앨런이 웃음을 터뜨렸다. 서른 살이라. 과장이 아니라, 본인은 정말 그럴 사람인 걸 누구보다도 본인이 제일 잘 안다. 그랬다면 자신은 서른 살이 될 때까지 내내 후회했을까. 아니면 어느 순간에는 잘 적응해서 그럭저럭 잘 하고 있었을까. 만약을 가정해도 아무런 의미도 없지만.

"그래서, 정말 고마워. 세림이 덕분이야. 세림이의 참견 덕분에."

"참견 아니라며…."

"에이, 장난이지. 삐쳤어 설마?"

아니거든? 세림이 황당한 얼굴로 앨런을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하자 텔레파시라도 통한 듯이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아무런 일도 아닐텐데 그냥 웃음이 났다. 영화는 그저 그랬고, 날은 너무 덥고, 앉은 소파는 폭신하지도 딱딱하지도 않고, 음료의 얼음은 다 녹았고, 나눈 대화는 세림의 오지랖인지 조언인지 덕분에 앨런이 어떤 결정을 취소했다는 얘기고, 웃길만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도. 웃음이 멈추고 앨런이 남은 음료를 원샷했다. 세림이도 다 마셨어? 응. 나 줘. 내가 버릴게. 쓰레기통에 빈 플라스틱 컵과 빨대를 버린 앨런이 소파로 돌아오며 말했다.

"근데 훈련은 계속 갈 거야."

"왜?"

"할 게 없어서…. 그리고 받아서 나쁠 것도 없고."

"할 거 없긴 하지…. 나도 같이 갈까?"

"아냐, 세림이는 안 해도 돼. 센티넬 훈련이 가이드보다 열 배는 힘들댔어."

"진짜? 그럼 말고…."

특수부대를 목표로 하는 센티넬 훈련은 신체적보다도 정신적으로 힘들어.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전역까지 석 달 정도 남은 시점에 굳이 세림을 힘들게 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저도, 세림도. 아무 탈 없이 전역할 수 있다면, 그래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것 외에 바라는 건 없다. 지금으로서는.

그 날 이후로도 둘의 하루하루는 평소처럼 흘러갔다. 앨런은 일어나면 조식을 먹고 훈련을 받으러 가고, 세림은 어느 날은 앨런을 기다리고 어느 날은 기다리지 않고 자기 할 일을 하러 가고. 작년처럼, 연일 지속되는 더위에 쓰러지거나 이상 증세를 보이는 사람들이 더러 나오는 걸 제외하면 센터는 평온했다. 앨런은 세림에게 이야기한 다음 날 바로 훈련실에서 혜성 씨에게 입대를 하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지 말해달라고만 하고는 그날의 훈련 준비를 하러 자리를 떴다. 태연한 반응이었다. 아마 저처럼 마음을 바꾼 사람들이 이전에도 많았겠지.

형에게는 전화를, 가족에게는 편지를 썼다. 마음을 바꾼 이유가 세림의 말 때문이라고는 여전히 말하지 않았다. 엄마는 알았으니 더위 조심하고 집에 돌아오면 해줄테니 먹고 싶은 음식을 미리 생각해두라는 말을 답장에 남겼다. 집에 돌아가면. 그런 날이 오긴 오는 구나.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았는데.

퇴소가 한 달 남은 시점부터 센터 직원들은 여기저기 정식 페어를 장려하고 다녔다. 주로 앨런과 세림처럼, 외출을 주기적으로 함께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퇴소 이후에 페어를 맺으려면 일부러 센터까지 와야하고 검사를 다시 받아야하고 서류를 몇 개씩 작성해야하는데, 지금 하면 많이 간단해진다, 그런 이유를 대며 부추겼지만 응하는 사람은 몇 없었다. 그야 센티넬과 가이드의 페어는 그냥 소꿉놀이처럼 오늘부터 우리 둘은 짝이야, 이런 게 아니라 ASG를 필두로 센터에서는 일반 사회의 배우자나 가족과 비슷하게 여겨지는 제도다. 등록도 복잡하고 깨는 건 더더욱 복잡했다. 무엇보다도 인생의 파트너를 정하는 문제다. 우연히 만나서 강제적으로 1년 반 동안 함께한 사람들 중에서 고르라고 하면 누구든 싫어하는 게 당연했다.

앨런과 세림도 페어를 맺을 생각은 없었다. 퇴소하고 나서도 연락하며 지내기로 하긴 했지만, 그거랑 평생 서로를 파트너로서 책임진다는 건 아예 다른 얘기다. 입대에 대해서도 오래 고민했는데,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를 이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결정할 순 없었다. 세림 역시도 딱히 페어를 맺을 생각 같은 건 없어보였다.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이제 서로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한겨울에 이루어졌던 입소식과 반대로 퇴소식은 한여름에 이루어졌다. 입소식과 마찬가지로 두 번으로 나뉘어서, 땡볕 아래 운동장에서. 퇴소식은 입소식보다 훨씬 짧았고, 전달 사항도 얼마 없었다. 퇴소한다고 해도 센티넬과 가이드라는 사실에서는 퇴소할 수 없으며 센터의 감시는 계속된다. 센티넬이고 가이드고 센터가 부르면 언제든지 와야한다. 그러니 해방되는 건 1년 6개월 간 모여서 생활했던 이 시설, 그리고 필수적으로 받아야했던 훈련 뿐인 셈이다. 물론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나, 특히 앨런에게는 중요했다. 누구도 이 부대의 숙소를 집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을 테다.

짧은 퇴소식이 끝나고 내무반으로 돌아가면 모두 각자 짐을 챙겨 귀가할 준비를 했다. 부대에 있는 동안 요청하면 다른 물건을 더 전달 받을 수 있기에 대부분은 입소할 때보다 짐이 늘어난 상태였고 앨런도 예외는 아니었다. 입소 때와 달리 퇴소 날에는 분실 예방을 위해 짐을 미리 보내놓을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몸만 한 캐리어를 옆에 끼고 숙소에서 부대 입구로 향하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앨런 역시 큰 캐리어 하나와 백팩을 뒤로 매고 있었다. 이것저것 욱여넣은 백팩이 빵빵했다.

부대 정문 앞에 도착해서는 줄지어 서서 차례대로 몇 명씩 나갔다. 이런 날이니 누군가는 기다리지 않을까 했는데 정문 앞은 아무도 없었다. 앨런이 의아해하고 있을 때 뒷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근데 아무도 없네? 보통 가족들이 기다리지 않아? 여기 문 지나서 국방부 있잖아. 그 앞에 있대. 아하. 입소 날에는 너무 긴장해서 오는 길 같은 건 완전히 까먹었었는데 그랬던 것 같아. 인도에서 국방부 건물을 지나서, 정문을 지나서, 센터를 거쳐서 부대 숙소로 갔었지.

일상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얼굴은 제각기 달랐다. 대부분은 해방과 자유를 느끼는 후련한 표정이었지만 걱정이 만연한 표정의 사람도 있었고 아무런 표정이 없는 사람도 있었다. 가진 짐이 많이 무거운지 힘들어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세림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세림이라면 역시 웃고 있을까. 세림이네 가족이라면 분명 마중 나와 계실 테니까. 앨런은 조금 웃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집으로 돌아가기 전 세림과 합류하는 건 불가능해보여 앨런은 어쩔 수 없이 등록된 세림의 번호로 메세지를 남기고 마중을 나온 형과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지하철이나 버스로 돌아가는 사람들도 많이 보였다. 이제 저들은 어떤 삶을 살아갈까. 나는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 어떻게 살아가는 게 좋은 삶인 걸까. 그런 생각에 잠겨있으니 형이 또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냐며 웃었다. 으응, 그냥. 집에 가긴 가는구나~ 하고. 앨런이 가볍게 웃자 형도 따라 웃었다. 어떻게든 살 것이다. 부대 내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지금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선택을 하면서.

몇 시간 동안 묵묵부답이던 세림은 메세지를 보낸 지 4시간이 지나서야 답장을 보냈다. 부대에서 나오자마자 마중 나와준 친구들이랑 놀고 집에 가서 씻고 밥 먹고 짐 정리하고 그러다보니 정신이 없었다는 내용이었다. 둘은 서로 전역 축하한다, 집에 잘 들어갔냐는 말로 인사를 나누었다. 전화라도 해볼까 싶었는데, 자신이 피곤한 만큼 세림도 피곤할 게 뻔했으니 그만뒀다. 핸드폰을 손에서 놓고 내무반이 아닌, 자신의 방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본다. 휴가 날마다 본 천장이지만 그때는 항상 며칠 뒤면 돌아가야겠지, 이런 생각이 가득했었다. 이제는 아니다. 원하는 만큼 방에서, 집에서 있을 수 있고 이제 한 달에 한 번 신체검사도 훈련도 늘 반복되는 일과도 없다. 새벽 늦게 잠에 들어서 해가 중천인 시간에 일어나도 잔소리는 듣겠지만 큰일이 나지는 않는다. 그럴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인지, 전에는 잘 몰랐는데. 되찾은 일상의 소중함을 느끼며 눈을 감으려 하니 형이 노크를 했다. 케이크 먹자, 앨런. 좋아!

정리가 다 되지 않아 난잡한 앨런의 방. 책상 옆 벽에 설치된 걸이에 걸려있는 가방에 펭귄 키링이 달려있다. 사용감이 거의 없어 펭귄이 깨끗했다. 책상 위에 올려진 파란색 다이어리도.

2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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