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끊이지 않는 맞바람이 되어라
알레이는 신경질적으로 서류를 내려놓았다.
나이 든 집사장이 붉은 머리칼의 용기사를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어느덧 성숙한 청년이 된 목동은 제 분을 이기지 못하고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있었다. 이미 그 잔인한 손에 희생당한 적발 몇 올이 종이 위로 떨어진다. 보다못한 집사장이 입을 열었다.
“그렇게 머리카락을 험하게 대해시면 안 됩니다, 알레이 님. 부디 진정을…….”
“진정을 할 수 있겠어요? 그런 취급을 받았는데?”
용기사의 말을 들은 집사장이 끙 소리를 내며 입을 다문다. 아크사버그의 비극 이후, 그는 창을 잠시 내려놓은 이 청년이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몹시도 잘 알았다. 영주 회의에서부터 상인과 용병 조합까지 발품을 팔았고, 재능 있는 자를 고르고 솎아 기사단을 세웠으며, 제때 경종을 울릴 수 있도록 마을마다 있는 종탑 보수를 건의하거나…….
동시에 어리다며 무시당하는 것이 일상이요, 창만 잡아왔던 촌뜨기 주제에 무얼 아냐는 하대의 눈빛은 익숙해졌고, 운 좋게 용기사가 되었다며 시기하는 자까지 한 마차에 가득 담고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물론 그의 편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당장 이 영지의 주인 또한 알레이의 편이었고.
“오늘은 어려운 상대였어. 며칠 뒤에 만날 조합 사람들은 그래도 네 건의에 호의적이었으니……, 그때를 노려보자.”
더불어, 문을 열고 들어오는 갈색 머리의 청년까지. 차기 영주로 꼽히는 헤레이스 에버그린이 집무실의 문을 닫았다. 그보다 살짝 큰 자신의 양동생에게 다가간 이는 곧이어 알레이의 입에 따끈한 쿠키를 물렸다. 갓 구운 것인지, 채 굳지 않아 부드러운 초콜릿 쿠키가 입에 들어오자 용기사의 찌푸린 미간이 펴지기 시작했다.
“제가 이런 것만 물려주면 기분이 풀리는 애로 보이시지요, 헤레이스.”
“틀렸어? 지금도 표정 많이 풀렸는데.”
미간 찌푸리면 주름 생긴다? 나직한 웃음소리에 곧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낸 용기사도 마주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가 처음 7 년의 전장을, 그리고 이어 펜과 종이로 이어지는 전쟁에서 쉼없이 맞서 싸울 수 있었던 건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뇌와 시름에 잠길 적이면 어김없이 달려와 그를 안아주던 사람들. 지금과 같이 따스한 말과 다정한 격려를, 든든한 버팀목과 굳건한 동료가 되어주던 사람들.
“맞다, 네포스 님께서 말씀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잠시 영지 근처를 정찰하고 오신다고요.”
“아, 감사합니다. 좀 쉬라니까 말도 잘 안 듣고……, 부지런하다니까요.”
“제가 보기에는 네포스 님이나 알레이 님이나 피차일반이십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닌데, 하고 중얼거린 알레이가 책상 위에 널린 서류를 바라보았다. 돌이켜 보자면, 어젯밤 회의에서 돌아온 이후로 내내 수정과 수정의 연속이었지. 어쩌면 이번만큼은 집사장의 말을 부정할 수 없겠다. 헤레이스가 그런 용기사의 뺨을 가볍게 꼬집었다.
“그러니까 좀 쉬어. 잔소리 듣기 싫잖아, 응?”
기껏 펴 놓은 미간이 다시 와장창 구겨지는군. 그러나 짜증이 담긴 낯은 아니었고, 저를 마냥 예뻐하는 손윗형제에게 약간의 심술을 부리는 것에 가까웠다. 마지못해 헤레이스와 집사장을 번갈아 바라본 알레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는 여전히 한 손에 쥐고 있었던 깃펜을 내려놓았다.
“그럼, 이 노구는 이만 물러나는 것이 좋겠군요. 헤레이스 님의 말씀대로 조금이라도 쉬십시오, 알레이 님.”
“또 안 쉬고 서류 보고 있으면 혼난다! 뭐라도 하고 싶으면 차라리 연무장에 가.”
알레이의 표정에 편안함이 깃든 것을 확인한 집사장이 먼저 물러났고, 뒤를 이어 헤레이스도 쿠키를 담은 접시를 책상 위에 올려놓은 뒤 떠났다. 창과 갑옷, 서류와 법전이 뒤섞인 집무실에 홀로 남은 것은 그 주인이었다. 헤레이스가 남기고 간 쿠키를 깨물어 먹으며 알레이는 생각에 잠겼다.
그에게는 아직도 3 년 전의 기억이 생생했다.
구릉이 불타오른다. 강변은 말라붙었고,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제 등 뒤에 흉포한 마수가 있음을 앎에도 쓰러진 이웃을 일으켜 함께 도망쳤으며 아이들은 저보다 더 어린 갓난애를 안은 채 눈을 감았다.
그야말로 지옥도였다. 그것도 단 한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당혹과 절망이 섞인 표정을 지은 알레이를 이끈 것은 그의 파트너, 네포스였다. 먼저 신호한 그가 날아올라 벼락을 내리쳤다. 경악에 굳었던 용기사가 뒤따랐다. 하늘이 갈라졌으며 바람이 일었다. 알레이는 처음으로 자신이 알고 사랑해마지 않던 곳이 제 전장이 된다는 사실에 머뭇거렸으나, 이내 무참히 살육당하는 자신의 이웃을 목도하고는 망설임 없이 달려들었다.
폭풍이 일었다. 그는 단 한번도 이토록 강렬한 바람을 일으켜본 적이 없었다. 그의 계약자에게 마력을 나누어받은 이후에도 그랬다. 끊이지 않으며 유하고 끈질긴 것이 강점이었던 그의 마력은 광포한 센바람이 되어 전장을 휩쓸었다. 사실 어느 순간부터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찢고 찢겼다. 죽이고 지켰다. 기진맥진할 때까지 마력을 소모했다가 이윽고 제 육신을 내던졌다. 혈향이 가득했고, 꼭 그만큼 지천에 어둠이 가득했다. 한밤중, 밤의 그림자보다 더 어둡게 찾아왔던 암흑은 붉게 동이 틀 적에야 그 모습을 감추었다.
마을은 전소되었다. 뒷면의 것들 때문이기도 했으며 누군가 도망치다가 엎지른 기름에 붙은 불길이 삽시간에 건물들을 뒤덮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아는 대부분의 사람은 살아 도망쳤음을 확인했다. 미처 구하지 못한 사람들 또한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최전선에서 거대한 창을 든 채 숨을 고르는 용기사에게로 살아남은 자들이 다가온다. 이윽고 기력을 다해 쓰러지는 몸을 그들이 받았다.
알레이 에버그린이 눈을 뜬 것은 이틀 뒤였다. 에버그린 영지에서였다. 그의 파트너와 손윗형제가 전하기를, 생존자들은 모두 에버그린 영지에 임시로 머물고 있으며 마침 얼마 전 개척한 농경지에 정착할 예정이라고 했다. 마을이 있었던 자리는 검게 물들어 풀 한 포기조차 기를 수 없었던 탓이었다. 알레이는 쉰 목소리로 무엇 하나를 물었고, 곧 그의 가족은 진정 살아 있다는 사실에 울음을 터뜨렸다. 안도와 죄책감과 절망과 비탄이 섞인 눈물이었다. 그는 그렇게 한참 울었다.
그렇게 생존자들이 새 개척지로 향한 뒤에도 알레이는 드물게도 상록의 저택에 머물렀다. 더불어 집무실 한 칸을 요구했는데, 내내 행정이나 ‘일족의 의무’ 따위에는 관심이 추호도 없던 영주는 놀람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젊은 용기사는 영주 자리를 탐내는 것도, 이곳에 영영 정착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의 전장을 잠시 책상 위로 옮기려는 것이었다.
3 년의 시간을 약속했다. 그 시간 동안 적어도 에버그린 영지 내에서는 효과적인 대비책을 구축할 것이고, 가능하다면 프라툼 아분단티아의 다른 영지에도 그것을 전파하고자 하며, 덧붙여 체계적인 기사단 하나를 설립하겠다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터무니없는 일이었으나 단번에 그의 편으로 돌아선 헤레이스가 말하기를, “아버지께서 전폭적인 지지를 해주신다면 못할 일은 아니다”고. 알레이는 내심 웃었으며 에버그린 영주는 이마를 짚었더랬지.
바야흐로 지난한 전쟁의 시작이었다. 알레이는 제가 서류와 담을 쌓고 지낸 기간 동안 헤레이스가 무엇을 배우고 있었는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영주 이사나 로르켈이 아니고서야 한낱 용기사가 무엇 한 가지를 주장한다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알레이는 그가 처음 창술을 배우던 나날처럼 치열하게 책상 앞에 앉아 씨름했다. 노력에는 결과가 뒤따랐다. 꼭 그만큼 실패와 구설수도 뒤를 이었다. 그러나 산들바람은 끊이질 않고 폭풍은 넘어지지 않듯, 차근차근 영지 내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나갔다.
그리고 어느덧 이번이 세 번째 해. 알레이는 제가 곧 떠나야 함을 안다. 하물며 에버그린 영지 내에서도 그를 흰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제 편이 아닌 사람들은 오죽할까. 용기사와 용만으로는 모든 생명을 구할 수 없기에 이 길을 택했으나 동시에 용기사와 용만이 그 모든 생명의 희망임을 안다. 알레이는 자신의 의무를 버릴 생각은 없었다.
그가 다시 펜을 잡는다. 겨울이 지나고 새로운 봄이 오면, 그 때의 그는 펜 대신 창을 쥐고 전선에 나가리라. 그는 막을 수 없는 센바람이, 멈출 수 없는 높바람이 되고자 한다. 거친 폭풍이 되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기꺼이 지킬 수 있도록. 또한 죽음으로부터 멀리 도망칠 수 있도록.
그는 폭풍이 될 것이다.
그리고 영영 꺾이지 아니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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