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바다

유진 by bamnam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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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는 조금 오래 전. 여전히 어린애인 제가 ‘어린’ 때의 일이다.

작은 시골 마을 가장자리의 작고 푸른 점. 밀집한 나무의 군락은 어린애들에게 자주 그렇듯 쉽게 놀이의 장소가 되었다. 어린애들 중에서도 맏이가 되는 유진에게 작은 떡갈나무 숲의 의미는 어떠했는가 하면,

-이거 봐! 나 이만큼 올라올 수 있다?!

-나 무릎이랑 손바닥 다 까졌어어…. 약 바르는 거 싫은데….

…하는 파란만장함을 불러일으키는 곳, 애들의 천진한 광포함을 증폭시키는 곳…, 어린아이에게는 깊은 안쪽에서 길 잃어버린 애를 데리고 돌아와야 하는……. 수많은 까닭으로 작은 숲은 마을의 일부였고 일상의 배경이었으나, 그다지 좋아하는 곳은 되지 않는다고. 유진은 생각했다. 오히려 잠깐이라도 혼자 시간을 보낼 여유가 생기는 도서관이 좋으면 좋았지…. 그런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자면, 먼저 알아채는 어른들이 종종 있었다. 그래서…,

-지나고나면 그리워지지 않겠니? 그게 뭐가 됐든 말이야.

그런 말을 들을 때면, 동생들보다 겨우 조금 나이가 들었을 뿐인 어린애는 ‘그럴 리 없다’는 말을 꺼내지 않는 것이 고작이었다. 반발하듯 부정하고 싶지는 않은 탓에 고민하느라, 찌푸린 미간을 감추지 못해서 다시 웃음거리가 되기는 했지만, …아무튼.

온갖 사고가 일어나는 온상지를 그렇게 좋아하기는 어려운 일인데, 이후라도 그리워 할 일이 있을까. 지금은 생각하기만 해도 조금 착잡해지는…, 하는 생각으로 창 밖을 보는 사이, 문을 두드려 저를 부르는 소리에 급히 향하는 방향은 아니나 다를까, 조금 전까지 내려보던 떡갈나무 숲.

…절대로 그리워지지 않을 것 같다고. 떠나기 전의 유진은 생각했다.

그리고 그보다는 시간이 흐른 뒤, 그러나 여전히 유진이 ‘어린’ 때의 일. 다만 해가 지나면 어떤 편지를 받게 되는, 비교적 가까운 과거의 일이다.

심부름을 맡아 서류 봉투를 안은 채 작은 도시의 거리를 걷던 발이 느려지고 고개가 들리는 것은, 선선한 바람에 가로수의 이파리가 스치는 소리가 낯설지 않은 까닭이었다.

..이런, 비슷한 소리였지. 조금 더 여러겹으로 겹친, 여러 그루의 나무 사이에서 울리던 소리는 도시의 소음에 삼켜지지 않고 느릿느릿 흘렀었지만.

잠시 느리게 눈을 감아 떠올리는 것은, 아침 저녁으로 이는 바람에 넓은 잎이 스치는 소리. 자주 떨어져 있는 떡갈나무 잎. 흠집이 적은 것을 골라 말려 책 사이에 끼워 만든 책갈피와 같은 것들. 그런 때에 앞에 놓인 푸른 나무는 집을 두른 군락의 일부가 되었다가, 눈을 뜨면 다시금 이 작은 도시의 일부가 된다.

그것을 가만히 보다 다시 걸음을 옮기며 생각하는 것이다. 세상에 절대란 없고, 이런 식으로 떠오르는 것도 있는 모양이라고.

어른이 갖는 소회야 아직 모를 일이지만, 그런 정도라면 열 넷의 유진도, 조금쯤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곳의 나무는 제 것과는 다르다는 것 또한. 그런 종류의, 야트막한 그리움을 통해 유진은 떠나온 떡갈나무 숲을 ‘내 것’으로 여기고 있는 스스로를 알았다. 다만 그것이 여전히 제 일상보다 중요하지는 않아서, 이따금 이파리를 스치는 바람 소리에 멎는 발길은 곧 제자리를 찾아 지나쳐가고는 했다.

이후로의 매일은 바쁘고 부산했다가 조금쯤 느닷없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그 결과로 유진은 지금 ‘마법학교’에 와 있었다.

지금, 앞으로는 바다와 뒤로는 숲을 두른, 이 신기하고 신비한 곳에.

느리게 깜박이는 눈은 검은 물결 위의 달 그림자에 눈길이 앗긴다. 나고 자란 나라가 섬의 지형을 가졌는데, 바다가 무엇인지 모르기는 오히려 어려운 일. 다만 생활 반경이 넓지 않고 차라리 책으로 많은 것을 경험하는 유진에게 바다는 활자와 그림, 영상에 담기는 것으로 차라리 익숙한 것이었다.

멀리서 생각하기로는 강의 하류가 섞이는 곳. 이만큼 물씬 풍기는 ‘바다 냄새’와 같은 것은 그러니 낯선 것이다. 그리고….

바다는, 원래 이렇게 쉴 틈 없이 움직이나. 겪어본 적 없는 이는 지금이 잔잔한 편인지 아닌지를 알 수 없다. 그저 알 수 있는 것은 당장 담기는 모습과 냄새와 소리. 지각에 닿아오는 것들. 달빛에 비추인 수면은 수많은 파동이 번진다. 높다 싶은 언덕이 솟았다가 주저앉으며 해수면에 부딪치는가하면, 손바닥 정도의 구획 안에서조차 방향이 다른 곡선으로 쉴새없이 너울진다. 그를 보면서 하는 생각은,

이, 순간마다 무수한 모습의 바다에서, 네가 ‘좋아하는 바다’는 어느 것일까. 어느 것 하나를 고르기엔 ‘너무나도 많은’ 것이 동시에 느껴져서, 하물며 아직 낯선 네가 골랐을법한 하나를 찾기가 어려운데. 모니터 앞에서부터 어렴풋 떠올린 물음이 다시 수면 위로 오르다가, 모래사장에 몰려온 물살이 두고가는 포말과 함께 흩어진다.

“와글와글….”

잠깐 표현을 곱씹다가 웃음이 터진다. 말마따나, 정말이지 풀 냄새와 사람 냄새, 나무의 소리와 사람들의 소리가 언제나 시끄러울 정도로 주위를 채우는 날들을 떠올리면. 잘도 적절한 표현을 찾아내는구나 생각하고 말아서. 작게 끄덕이며 입을 연다. 어쩌면 꽤나 선선하게.

“그런 셈인가. 그럼 너는….”

저편에서, 물 위로 물이 흩어지는 소리. 혹은 어느 벽에 부딪친 파도 소리가 스친다. 잠시 흐르는 시선을 두고, 말을 잇는다. 너희 집에서는,

“파도 소리에 물 냄새가 와글와글했겠네.”

동생이 있다면 거기에 사람의 모습이 더해지기도 했을 테고. 다만 어린애들에 둘러싸이거나 홀로 지내는 것 외의, ‘단 둘’인 것은 경험하지 못했으니 네게서 듣지 않는다면 그런 풍경과 섞이는 감상을 제가 알기는 어렵겠으나.

그러니 알기 어려운 것을 섣불리 추측하는 대신, 어렵지만 떠올릴만한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이 바다에는 낮에는 또 어떤 소리와 냄새가 섞일까. 이른 아침이나 푸른 새벽에는. 그중 뭐가 네 ‘내 바다’가 되는지, 그래서 이곳에서 네가 떠나온 바다를 떠올리게 만드는지 도무지 알기 어렵도록, 바다는 더욱 수많은 것으로 하루가 내내 시끌거릴까. 하는, 그런 것들.

그리고 너를 보면, 넘실거리는 검은 물 대신 제 눈 위로 쏟아지는 달의 형태는 어느새 기울어 있다. 목소리가 이루는 파장이 몹시 고요한 파도소리 위로 흘러 제게 닿는다.

그리고 건네지 않은 물음들의 답을 얻는다.

너는 어쩌면…,

처음 생각했던 것은, 바다에서 자랐다는 네가 떠올렸을 무언가. 그리고 옛 집의 풍경을 떠올리던 자신의 경험. 그렇지만 그건 방식도 형태도 다른 것이었던 모양이라고.

깨닫게 되는 순간. 그리고 그 짧은 순간, 달을 닮은 눈을 가진 소년의 말에서 퍼진 물살이 제 감각을 변화시키는 것을 지각한다.

도심의 가로수와 내 떡갈나무는 같을 수 없다고, 대단히 애타게 그리워하지 않으면서도 구분을 짓고 말았던 나와 너는 다르구나.

그리고…, 이렇게나 멀리 떠나온 나는 지금도, ‘바다’로 연결되어 있겠구나. 똑같고 한결같지 않도록 ‘다른 바다’를 건너가기를 택하고도.

마음이 내려앉으면, 불안한 줄 모르고 불안하던 파동은 잠잠해지고 만다. 어느때보다 잔잔한 수면과 같이.

연결된 그 전부를 바다라고 하는 네 눈은, 그래서 달을 닮았나보다. 어디에 있든 볼 수 있도록, 어디에서든 비추는 달을.

있잖아. 어느 책에선가, 조수를 일으키는 건 달이라고 하던데.

그렇다면 마주한 달이 일으키는 파도에 내가 젖어 이전과 다르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될까. 이런 일들을 나는 너 혹은 다른 누군가와, 몇 번이나 경험하게 되는 걸까.

그렇다면 그저 전과 다른 책을 읽고 모르던 것을 배우는 것으로 생각했던 이 ‘새로운 생활’이, 다른 의미에서 기대되는 것 같다고. 그런 생각으로 입을 연다.


쓰고싶어서 즐겁게 썼으니, 이어야한다는 부담 없이 놀아주세요X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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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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