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켄

밀림

누군가는 그 속에서 삶을 갈구했고, 누군가는 그 바깥에서 삶을 가꾸었다. 어느 것이 안이고 밖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주관이니 선택하라.

상록 by 수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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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그 공백의 기간 동안 인간보다는 식물의 낯을, 눈빛보다는 햇빛을 오래 바라보았던 것도 같다. 그렇다 하여 사람을 대하는 나름의 재주를 잊었느냐 하면, 아니. 굳어져 있는 목소리와 능청스러움을 구분할 정도의 분별력 정도는 여즉 남아 있다. 고개를 돌려 마주하는 것은 피로한 기색이 역력한 이의 옆모습이다. 사람을 대할 적에는 눈을 마주치는 것이 예의라는 것만은 잊었는지, 혹은 애초 예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무뢰한이었던 것인지 저를 마주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 한 자락이 없다. 다리를 꼬고 그 위로 팔을 올려 턱을 괸 채 한참을 말 없이 그리 있었다.

“노버스의 이름은 온실 밖에서나 반짝이는 별에 가깝지. 온실 속에서는 모두가 같은 크기의 목소리를 지녀. 아이도, 어른도, 노인도, 하다 못해 목소리를 내지 않는 사람도 말이다. 타인이 씌운 희망에 고개를 떳떳이 들고 싶지 않아. 내가 무엇이라도 되는 양 유세도 떨고 싶지 않았고, 쓸데없는 고집도 부리고 싶지 않았어.”

고개를 다시 돌려 허공을 바라볼 때 즈음, 대단한 비밀이라는 양 털어놓는 것은 그러한 진술이다. 새빨간 시선이 위로, 또 아래로, 제 입 너머로 씹어 삼켰던 비밀의 진위마냥 진과 허를 구분할 수 없는 건조한 목소리 뿐이었다. 여전히 세상이 돌아가는 것에 대해 묻는다면 지구의 자전과 공전만을 안다. 그는 어디까지나 인간이며 사람일 뿐, 그 삶의 흐름 이상으로 눈을 돌리고자 하지 않는 온실 속의 존재이다. 애초 울타리가 있다면 그 바깥으로 나가지 않은 채 안주할 수 있음 역시 선택지 안의 답안이 아니었던가! 그는 제가 책임감 없이 내뱉은 말이 상대에게 어느 정도의 희망을 안겨 주었는지를 몰랐고, 또한 그것을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 상상력의 정원은 우림처럼 우거지지 못해 황폐하므로 그는 상대의 심정을 감히 예상하지도 못했으리라. 꼭 그것이 아니더라도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이란 어찌나 어려운 일이던가…….

온실의 유리벽과 빼곡한 식물, 그 사이를 뼈처럼 채우고 있는 빌딩의 사이에서 라이켄은 창 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밖을 기대하는 이들과는 다른 삶을 살았다. 애초 그 삶에 밖은 없으니 누군가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오더라도 그저 기우와 같은지라, 어떤 것이 비이고 어떤 것이 피인지 알 수 없는 이는 헤드셋을 벗어 뒤를 한 번 돌아보기나 했던가. 그것이 단지 이명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아래에 빽빽히 자라나는 것들을 잘라내는 삶만이 이어졌다. 그 장소를 가꾼다는 명을 다하기 위해 한 번 즈음 문을 열고 그 둥근 온실의 주변을 빙 돌다 보면 이미 명을 달리 한 이들이 땅으로의 재생을 준비할 뿐, 그들을 향한 애도로 그 위에 흙과 씨앗을 덮으니 르노는 늘 평온하다. 타인의 이름을 멋대로 가정하는 것은 그러한 행위와 다를 바 없는 무게의 것이다. 애초 자신의 삶과는 궤적을 함께하지 못한 각자의 흐름이 있는 법이 아닌가. 그에 대한 예를 다하며 존중을 표하나 그것으로 끝, 외지의 시선으로 바라보기에는 무정하기 그지없으나 수풀이 타인에게 베풀기에는 또 건조하지만은 않다 느꼈던 모양이다.

소맷자락으로 눈을 한 번 비볐다. 제 곁에 공존한다는 타인의 마음 한 번을 들여다 보지 않고 그저 우직하게 살아남았으리라 굳게 믿는 이는 섣부르며, 이어지는 정적이 피로하지도 않다 느끼는 것은 또한 무감하다. 외지인이 바라보기에는 이것 역시 이기적이고 속이 좁은가, 그 감상을 그대로 그에게 전했다면 ‘라이켄’은 놀란 티 역시 내지 않으며 다시 한 번 건조하게 제가 그리 행동했느냐 물어 왔으리라. 혹은 농담을 내뱉었을까-온실 속에는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은 탓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내뱉지 않는 비난은 없는 것과 다름이 없어 이에 대한 답 역시 없다. 그리 외면하고 회피하면 그만인 것들이었다. 정원 바깥에서는 땅이 말라가고 생이 끊어지는데도 그것을 모르는 양 눈을 흐렸다. 그리 찡그린 채 보면 모두가 같은 초록인 것이다.

이 역시 외지인이 바라본다면 폐쇄적인 삶과 짤막한 식견이 만들어낸 폐해에 불과해 보였을까!

그 짤막한 침묵의 시간 동안 라이켄은 자신이 두고 온 고향을 떠올렸다. 문이 굳게 잠긴 지금은 정말로 상상만으로만 닿을 수 있게 된 공간. 타인이 자신의 애향심을 수상쩍게 여길 적에도 늘 마음 속에서, 때로는 손 끝으로, 목소리와 발걸음으로 지켜 왔던 터전, 끊임없는 과거의 재생으로 현재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기이한 곳. 바람의 공허한 흐름이 녹색의 상상을 끊어내고 그 사이에 투명을 주입시켰다. 그러한 외부의 간섭을 ‘라이켄’은 단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었더랬다. 제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색을 부여하는 바깥의 것들이 좋았다. 그렇기에 그것을 제 땅에 옮겨담아 심고 재생한다. 사람 하나 없이 공허한 상상 속의 온실에도 고요의 멋은 존재했기에 그는 자신이 몇 발자국 떨어져 있음에도 르노가 존재함을 재생할 수 있었다. 치열한 삶을 회상하는 타인과는 대조적인 온화함이었다. 어쩌면 그러한 평온이 웃음으로, 유쾌함과 즐거움, 어울리지 않는 농담 따위를 키워낸 것이었겠지! 그것이 가시나무의 형태를 갖춘다 하더라도 피어난 것을 잘라낼 수는 없다 여기는 자는 고집스레 그것마저를 끌어안고 있을 터인데.

그 속의 무엇도 확연히 보여주지 않는 온실처럼 그것의 존재를 증명하는 유일한 것-라이켄 역시 그 상이 흐릿했다. 그 모든 것이 온실으로부터 기인했다는 것만을 보일 뿐, 어찌 보면 그 모든 것이 가상이라 하여도 그 존재가 모호함을 방패 삼아 수많은 것들을 가공하고 오려붙이며 또 진실로 의태하게끔 할 수도 있는 꼴이었다. 그것이 존재함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증언과 수많은 소문, ‘르노’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게 된 온실의 문을 두드려 본 수많은 이들, 개중에서도 생존하였다면 상대가 고작이니 그 정의가 바뀔 적마다 재생의 꼴도 바뀐다. 누군가에게는 유토피아, 누군가에게는 디스토피아, 누군가에게는 집, 정원, 예술품, 작품, 터전, 자신. 거친 우림의 형태가 침묵 사이를 뚫고 자라나면 재생은 달칵거리는 소리 한 번 없이 일시 정지를 향한다.

“그 말은 꼭 르노가 국가라는 것을 전면으로 부정하는 이야기처럼 들리는군 그래.”

타인이 지니고 있던 불만이 명확한 형태로 구체화되는 순간이었다. 정원사는 주저 없이 그 비죽이는 형태를 알아보아 그것이 있을 자리에 두었다. 마음 바깥이라고 불리는 그 땅을 아는가! 가느다랗게 떠진 눈은 상대의 안면 위를 선명히 훑고, 그 피로감 속에 남은 것이 단순한 권태와 소진만이 아님을 알았다. 허나 모두가 비밀을 입에 담아 곱씹고 어떤 것이 진실이며 거짓인지를 따지는 지금은 꼭 그 감정을 짚을 옳은 때는 아닌 듯 싶어 고개를 돌렸다. 가끔은 답장을 남기지 않는 것처럼 그 무엇도 모르는 양 읽어낸 것을 접어 두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았다.

“동시에 그런 평가의 원인이 꼭 나에게 있다는 것처럼 들리기도 해. 뭐, 지금에 와서 책임을 지라고 해도 상황이 이렇게 흐르면 나는 벽을 부수러 달려 나갈 수도 없어, 산티노. 무엇보다……. 나는 나 자신을 정원사라고 정의내리지 않으니 큰 상관은 없다. 네 말마따나 나에게나 집이지, 저 바깥의 사람들에게는 르노가 정원보다 못한 수풀의 더미일지 누가 알겠어. 그들이 부여하는 가치는 온실 바깥의 것이니 실상 나와는 무관해. 단지 불호의 영역일 뿐이라고.”

상대가 내뱉은 우회적인 비난은 저를 찌르지도 않았다는 양 마지막까지도 가볍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허나 지금 즈음 그 얼굴을 똑바로 마주한다면 턱을 괸 손 너머의 무표정한 낯만을 마주할 수 있었을 터이니, 그 속이 아주 웃고 있는 것만은 아님은 확실해 보였다. 그의 생각을 점화시키고자 하였다면, 의태의 새싹이여, 그 재생에는 훌륭히 성공하였으니 감히 자랑스레 여겨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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