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림
끊임없이 비가 내려온다. 타인의 생에 의한 우수, 꺾이지도 않은 누군가의 삶에 대한 울림, 피치 못할 기우.
평생을 온실과 벽, 돔, 유리 따위에 감싸진 채 살아왔다. 그리하여 깊은 악의를 알지 못하느냐 하면 부정, 그 속에도 뿌리를 얽고 땅을 마르게 하는 것들은 있기 마련이었으니 그것을 모를 턱이 없었다. 허나 살아남기 위한 악의와 타인을 해하기 위한 악의는 그 손길의 길이부터가 다르다. 그 외침의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의 색과 형태에 차이를 두었으며, 때로는 흩뿌려지는 혈액의 형태마저도 상이했다. 그는 상대가 자신을 찌르기 위해 어떠한 형태의 칼을 취했으며, 그 상처의 깊이는 어느 정도를 의도하고, 또 무슨 모양새의 흉을 새기려 했는지 알지 못한다. 그 자상 속으로 굵은 소금이 파고드는 것을 피할 법도 하나 고통이 두렵지 않아 몸을 움츠리는 시늉도 않았다. 예상 이상의 고통은 그저 제 생각보다 상처가 깊었다는 사실만을 전할 뿐, 투명한 혈이 흐르는 와중에도 눈 한 번을 깜박이지 않았다. 따끔, 따끔, 염증으로 남아 영영 욱신거릴 흉터…….
어렸을 적 집 앞의 작은 나무에 생채기를 남긴 경험이 있다. 그 껍데기 위에 남은 상처는 나무가 자라남에 따라 위로, 위로, 가지가 돋아나고 잎이 무성해질 때까지 끊임없이 위를 향했더랬다. 어느샌가 제 발치에 있던 상처가 아득한 위에 남은 것을 바라보며 열 아홉의 그는 시간이 지났음을 실감했다. 그 때의 나무가 흘렸던 혈액을 기억했다. 지금의 제가 흘리는 것 역시도 저는 기억할 수 있으리라. 그 상처로 하여금 저는 그 나무가 십수년 전의 그 나무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나무는 자신을 기억했는가? 묵묵한 식물의 흔들림은 바스락거리며 여지만을 남기고, 스물 아홉이 된 지금에도 라이켄은 그 답을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제 심부에 남은 상처를 들여다 볼 적마다 그 이름-레이브 비르타넨이라는 일곱 글자를 재생하게 될 것이라 생각하면 그 초목 역시도 그 상처의 주인이었던 저를 기억하리라는 어렴풋한 예상이 피어올랐다. 이름 없는 나무여, 그대는 그 상처를 기꺼이 여겼는가. 독이 없어 썩어들지도 않고 짓이겨 뭉개지지도 않은 그 상처는 여즉 그 자리에 남아 최후가 다가올 적까지 흔적으로 머무를 것인가.
숨을 들이쉰다. 형태 없는 상처는 살갗에 생채기 하나를 남기지 않아 숨이 새어나가는 소리조차 남기지 못했다. 비명을 지르는 것은 검은 속 뿐이다. 내뱉는 목소리에도 묻어나지 않는 혈흔은 비린내 하나 없이 공기를 실어 나를 뿐이므로 공허하다.
“그래, 알고 있어. ……. 난 정제되지 않은 감정만을 내비추는 것을 피하고 싶었을 뿐이야. 지금도 마찬가지고. 네가 그리도 솔직한 감정과 진실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늦게나마 여과 없이 덧붙이는 것인데……. 진심도 없이 남에게 칼날을 들이미는 일은 천천히 그만 두는 법을 배우는 게 좋겠어. 냉하게 굴기에는 네가 너무 서툴러. 칼을 쥐는 방법부터가 틀렸다.”
그러니 이토록 엉성한 상처가 찢기듯 남고 불필요한 찰과상마저 새기고 마는 것이 아니겠는가! 고개를 꼿꼿이 들어올린 이는 그리 고한다-본초학자, 치유사, 올마이, 세상의 독을 풀어내는 자로 이름을 알린 당신은 타인을 해치는 데에는 지독하리만치 재주가 없노라고. 작은 잎과 열매, 흙이 묻어나는 뿌리만을 손에 쥐어 그것으로 타자의 상처를 봉하고 아물게 하며, 때로는 속의 열을 내리는 약을 만들어내는 이의 손에는 날카로이 벼려진 정원 가위보다는 약포가 들려 있는 편이 어울렸다. 애초부터 날붙이를 손에 들기에는 퍽 여린 손이었던 것도 같고. 그 회상이 흐릿하여 이어붙임을 업 삼아 왔던 이는 문득 오랫동안 눈에 담지 않았던 타인의 손을 바라보았다. 저 손에 의해 수많은 이들이 생을 이어갈 수 있었더랬지. 동시에 저 손은 그 손을 스쳐 지나갔던 작은 새싹들의 감촉을 기억해 그것들의 생존을 희망하는 활자를 한 자씩 눌러적었을 터이다. 숨겨지지 않은 자그마한 흉들이 눈에 들어왔다. 보이지 않는 곳에는 더욱 많은 흔적이 남아있을까-그리 생각하며 고개를 기울이면 어느샌가 그것을 감추듯 손을 짓눌러 쥐는 모습이 시야를 흔든다. 그러니 무엇인가를 베어내려는 자가 칼날을 쥐는 올바른 자세는 저러한 모양새가 아니다, 네 개의 날붙이가 향하지 않아야 할 방향을 바라보고 있지 않던가……. 그리하여 그 악의가 생존을 위한 것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그 말에 내가 무슨 답을 해 주기를 바라나. 네가 최악이라고? 진정 썩은 것은 너 자신이니 나를 몰아붙이지 말라고? 애석하게도 난 네가 마음 편하도록 마음에도 없는 쓴 소리를 토해 줄 사람이 아니야. 네가 입을 다물라고 해서 순순히 혀를 짓깨물고 목소리를 삼킬 정도의 인간도 되지 못해. 그렇다고 제발 내 말을 믿어달라 애원할 성정도, 거짓된 용서를 빌 위인도 아니지.”
서투른 원망이 허공을 가로지른다. 붉게 물든 분노와 한탄이 검은 밤을 찢어내고 눈 앞으로 피어오르는 극채로 화한다. 늘상 마음에 든다 이야기했던 붉음이나 어느 세계에서는 생과 사를 동시에 상징할 듯한 역동의 색은 눈 앞을 시리게 했다. 그것을 내쫓기 위해서라도 말을 이어야 했으나 한 걸음 멈춰선 호흡은 다음에 배치할 화언에 신중을 기할 것을 고한다. 활시위를 당기는 듯한 안정이 필요했다. 시선을 바로 하기 위해 다시금 얼굴을 위로 들어올린다. 수많은 감정으로 점철된 타인의 낯은 그것만으로 정돈되지 않은 정원이다. 잘라내고 덧붙일 것을 재고하고 또 재고하여 재생. 달칵, 지익, 고심하여 골라낸 테이프가 흐르도록 두었다.
“믿지 않겠노라 다짐이라도 했나? 불안이 지속되면 의심으로 흘러가고, 그것이 불신으로 자리하는 것은 퍽 당연한 일이라 여겨. 그 불안이 완전히 네 땅에 뿌리를 박기 이전에 가지를 치지 않은 것은 나였지. 필요를 알아서 다른 이들에게 말 없이 쓴 맛을 물려 주었던 너와 다르게 나는 필요를 알고 있었음에도 무엇도 하지 않았어. 그것에 대한 잘못을 따진다면, 역시 잘못은 나의 땅에 있군.”
무색한 음성이 흘러나온다. 어느 순간부터 원래의 초록을 잊고 그리 검은 빛을 띄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마구잡이로 뽑아내 끈처럼 걸쳐두면 그 건조한 꼴이 꼭 보기에 역하지만은 않아 그것이 형태로 자리할 수 있도록 시간을 준다. 깊은 반성과 성찰은 본디 색이 겹치고 겹쳐 늘상 그러한 빛을 띄기 마련이었다. 반추, 수치, 죄책감, 그 따위의 것들이 한 데 뭉쳐 모양새를 만들어내기 시작하면 그 윤곽을 눈에 담아 그 흐름 그대로 재생되도록 한다. 상대가 결국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붕괴하여 고착되어도 누군가가 정지를 지시하지 않는 한 재생은 지속되는 것이었다. 두려워 할 것은 없었다.
“인간의 말에는 별다른 해독제가 없어. 늘상 모습을 바꾸고 그 색마저 바뀌는 음성을 어떻게 풀어내겠어. 그러니 해독하라는 기대조차 하지 않아. 말로서 네게 독을 풀어두고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으려는 꼴이 참 무책임해 보일 수도 있겠군 그래, 레이브.”
웅크려 있는 이의 앞에서 차마 입꼬리를 올린 상태를 유지할 수는 없었다. 스스로의 말이 손가락과 같은 모양새가 되어 그 표정을 끌어내리고 시야를 다시 한 번 가린다. 흐릿한 시선에 빛을 되돌리려는 듯 눈을 소매로 비비고, 한 걸음, 두 걸음, 벌어져 있는 거리를 좁히는 그 시간이 꼬박 10년만큼의 무게를 지니는 듯 하였다. 상처는 남겨졌으며 저주는 내려졌다. 그것이 진정 마음을 담은 것들이라면 자신은 평생을 그 상흔과, 결국 썩어 부패할 내일과 더불어 살아가게 되리라. 그럼에도 재생은 지속되는 것, 끊어지지 않는 이상 어떠한 고통과 괴로움이 있어도 연달아 흘러가는 것이 아니던가. 어울리지 않는 거짓의 결말이 말단으로 자리잡을 수는 없게 되었으니 이 역시가 생존,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마지막이라 여겼다.
“말했듯이 나는 마음에도 없는 쓴 소리를 처방할 전문의는 되지 못해. 오랫동안 덧칠되었던 오해가 하루 아침에 풀어지리라는 기대를 할 정도로 순진한 인간도 아니지. 내가 내뱉는 말이 네 마음의 낡은 허물을 한 꺼풀 벗겨내거나 진액을 빨아먹는 해충을 지워주는 극약이 될 수 있으리라고 믿을 정도로 오만한 사람도 아니다. 그러니 어떠한 기대도 없이 감히 한 마디 하자면…….”
미안하다. 거짓말도, 변명도, 짤막하게나마 이어졌던 회피도. 다른 녀석도 아닌 네게 그래서는 안 되었어. 그리 내뱉는 순간에도 음성의 색은 여상했다. 그것이 만들어낸 자리에 저는 서 있었고, 정원사는 그 자리에 자신을 둔 채 발치를 바라보았다. 혈액의 웅덩이도, 빗물도 고여 있지 않은 바닥에 제 낯은 비추지 않았다-그것을 대신하는 상은 당신, 올마이, 레이브 비르타넨, 레이브. 어렸을 적 이름 없는 나무에 남겼던 자그마한 상처의 위치에 그 희미한 빛의 눈동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여전히 그 우림의 위는 건기, 마른 손은 닦아낼 것도 없는 그 위를 쓸어내는 것 대신 한 차례 빗물이 쓸고 지나간 툰드라 위의 소금물을 닦아내 본다. 혈흔과 구분할 수 없는 투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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